출판사에서 이 책 검토를 부탁할 때까지 나는 조너선 스펜스의 부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저자가 그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계약을 추진해 보라고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의견을 말해줬다. 천하의 스펜스 교수가 읽을 만한 책 쓸 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겠는가? 읽을 만하지 못한 책을 아내가 내도록 놓아두겠는가?

나는 스펜스를 현존하는 중국사 연구자 가운데 단연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본다. 게다가 문필가로서도 뛰어난 사람이다. 20여 년 전부터 그는 내 마음속의 스승이었다.

안핑 친(출생명 金安平)의 책은 처음 읽은 것인데, 이 책에서도 나는 스펜스의 스타일을 느꼈다. 청대 고증학 연구자인 안핑 친이 이런 거시적 관점의 연구를 구상하는 데는 스펜스의 영향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나와 동갑에다가 성도 같은 안핑 친에게 같은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우(學友)로서의 유대감을 느낀다.


공자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다. 그런데 공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관념이 아닌 한 인간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공자", 하면 봉건, 충효, 전통 등 강렬하게 떠오르는 관념들이 있고, 그 관념들에 파묻혀 인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만이 아니라 유교를 숭상하던 전통시대에도 그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추종자들에게 너무 거룩한 존재여서 비판적 고찰의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공자의 가르침이 제 몫을 못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드는 후세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이 책은 “인간 공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역자 같은 동양학 다른 분야 전공자의 초보적 이해 수준으로도 저자의 정확성에 의문을 품을 대목이 더러 있다. 완벽한 권위를 가진 책이 아니다. 그러나 나무 대신 숲을 바라보는 그 넓은 시각에서는 유가사상 전공자들도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인간 공자”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공자에게서 권위의 옷을 홀랑 벗겼다. 전통시대의 모든 학인들이 공자 사상 연구에 거의 모든 노력을 쏟으면서 그려내던 공자의 모습보다 더 명쾌한 모습을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전통시대에 공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공자의 절대적 권위는 문법의 기본이었다. 현대인은 그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 저자는 현대인이 익숙한 문법으로 공자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공자가 앞으로도 이 세상에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절감했다. 20세기 들어 공자는 ‘아시아의 후진성’의 가장 큰 책임자로 낙인 찍혔다. 공자의 가르침을 박살내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아시아 여러 사회를 휩쓸었다. 20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한 시대의 풍조일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라는 시대가 ‘무한 성장’을 꿈꾸는, 균형과 조화를 생각하지 않는 시대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런 시대에 공자의 가르침이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적대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근대인은 무한 성장의 꿈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가? 급격한 기술 발달에 따라 자원 공급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는 ‘근대의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꿈속에서 인간으로부터 떼어놓았던 자연이 결국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소홀히 했던 균형과 조화를 열심히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고, 그 생각을 위한 교재를 유가사상에서 찾을 때가 되었다.

번역 작업을 하던 중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며 책의 내용이 절실하게 겹쳐져 생각나는 대목들이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페리스코프>에 그런 대목을 내놓고 관련된 생각을 붙여 적은 글을 몇 차례 올렸다. 독자들 반응이 예상보다도 좋았다. 공자의 가르침을 현대인이 적절하게 받아들이게 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서의 성격이 원서의 성격과 똑같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영어권에서 이 책은 학술서에 가까운 고급 교양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보다 넓은 범위 독자들을 위한 대중 교양서에 접근시킬 수 있었다. 공자와 유가사상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지식과 이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획-편집을 맡은 조성웅 선생의 판단에 많이 의지했다. 번역서로서는 특이한 경우다.

원전의 인용 내용 표시방법이 조 선생과 함께 제일 고심한 문제다. 원서에는 인용 범위가 미주에 표시되어 있을 뿐, 인용 내용은 번역문만 주어져 있다. 그런데 저자의 원전 번역, 특히 미묘한 표현이 많은 <논어> 번역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꽤 있었다. 한국 독자들 중에는 원문 검토 능력을 갖춘 사람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서 <논어>의 인용만은 각주로 원문을 붙여놓기로 했다. 다른 원전의 인용문도 처음에는 모두 준비했지만, 미묘한 차이가 <논어>처럼 크게 문제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원전 해석의 정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연세대 철학과 이광호 교수의 감수를 받았다. 이 교수의 해박한 학식만이 아니라 40년간의 교분을 통해 닦아놓은 ‘소통의 길’ 덕분에 미묘한 문제들에 관한 효과적인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감수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확성 문제는 근본적으로 내 책임이다. 이 교수가 제기해 준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책에 분명히 드러낼 범위는 내가 정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내게 맡기면서도 아낌없는 도움을 준 이 교수의 너그러움에 각별히 감사한다.

원전 해석에서 저자와 역자의 의견이 다를 때 세 가지 처리방법을 썼다. 대부분의 경우, 저자의 해석이 나와 다르더라도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이 아니면 그대로 따랐다. 몇 군데 분명한 착오로 보이는 것은 이 교수의 확인을 받아 내 해석으로 바꿨다. 한두 군데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내용이라도 본문의 맥락에 꼼짝없이 걸려 있는 부분에 저자의 해석을 그대로 두면서 표시를 해놓았다. 역자로서 대단히 건방진 짓이지만 이 교수를 믿고 저질렀다.

십여 권 번역서를 내 본 중에 이 책처럼 오래 붙잡고 있었던 적이 없다. 원래 번역이란 자기 글쓰기보다는 책임감도 만족감도 덜 느끼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전혀 덜하지 않았다. 조성웅 선생과 그 등 뒤에 있는 돌베개 여러 분의 참을성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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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6. 15. 10:50



어제는 지난 주 가 뵙고 엿새 만에 다시 가 뵈었다. 격주로 가 뵙는 틀이 꽤 오랫동안 잡혀 있었는데 모처럼 빨리 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머니도 분명히 인식하시는 것 같다. “네가 웬일이냐?” 내 얼굴을 보실 때 반응이 이렇게 나오실 때가 더러 있지만 수사적인 질문으로 대개 느껴진다. 그런데 어제는 정말로 놀라신 기색이 역력하셨다. 마구 손을 뻗쳐 내 얼굴을 만져보시는 것이, 실물 확인의 필요를 느끼시는 것 같다.


세 시에 도착해서 한 시간 반가량 모시고 있었는데, 거의 내내 ‘행복’, ‘기쁨’, ‘고마움’을 노래하셨다. 단둘이 앉아 있을 때도 평상 화법 쓰실 틈이 별로 없이 노랫가락 화법이 이어졌다. 노랫가락 화법은 표현이 애매한 내용을 얼렁뚱땅하는 데도 많이 쓰이지만, 어제는 내내 믿음이 가득 실린 ‘인생 찬가’였다. “이곳은 참 좋은 곳이예요.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숲도 있고, 바람도 있고, 햇빛도 있어요. 이렇게 좋은 곳인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이곳”이 처음에는 세종너싱홈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노랫가락이 이어지는 동안 이 세상으로 바뀐다.


전전날 작은형이 다녀간 것도 기억하고 계셨다. 와서 뭐 하고 갔는지, 누구랑 같이 왔었는지는 기억할 생각도 안 하신다. 자극을 드려 보려고 캐물어 봐도 “내가 그런 거 관심 없잖아.” 잡아떼시지만, 아침 식사 하고 점심 식사 한 것 기억하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억하신다. 내가 며칠 만에 온 건지 날짜를 꼽지는 못하시고, 전번에 아내랑 함께 왔었다는 사실도 떠올리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보통보다 빨리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인식하셔서 한없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정말 어머니에게 최고의 기쁨조가 되었다. 누가 찾아와도 기쁘게 맞으시지만, 내 모습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켜 드리는 것이 분명하다. 쓰러지신 후 3년 동안 꾸준히 접해 온 익숙함이 지금 나에 대한 어머니의 인식에 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곳 오신 후 1년 동안에는 그 인식이 복합적인 형태로 자라난 것 같다. 어릴 때의 내 모습, 아버지의 기억 등 여러 가지가 지금의 내 모습에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착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장난스러운 칭찬을 하다가 불쑥 아버지 얘기로 넘어가실 때가 많다. 스물세 살에 만나 서른두 살에 사별하신 그분과의 인연이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또 무거운 인연이다. 그 인연을 다 풀지 못했다는 미진함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기쁨도 흔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매듭을 대신 풀어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달 전부터 들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그 매듭이 풀리지 않고는 어머니 마음이 저렇게 석연하실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 계실 때 두 분 사이에 이런저런 곡절이 없었을 리 없다. 아버지 일기의 행간에서 더러 느껴지는 것도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풀려나갈 길이 막힌 곡절 하나하나가 어머니 마음속에 응어리가 되어 있었을 텐데. 그런데 요 몇 해 동안 어머니와 나 사이의 관계는 극히 단순화된 것이다. 껄끄러운 곡절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인간관계의 본질에 마음을 놓으면서 묵은 응어리가 풀리시는 것 같다.


아버지 일기에 처음 접한 것이 23년 전, 내가 서른여덟 살 때였다. 아버지가 그 일기를 쓰실 때와 같은 나이였다. 내 불초함을 충격으로 느꼈고, 그 충격 덕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 없다(虎父無犬子)”는 말을 더러 듣게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아버지 대역을 맡아 드릴 수 있다면 정말 대성공이다.


어머니 하시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때 나는 비판에 가차가 없었다. 한번은 이모님이 함께 계실 때 무슨 일로 “눈깔을 까뒤집고 대들었”더니 어머니가 이모님을 돌아보며 탄식하셨다. “저놈은 김 서방 귀신이 씐 놈인가봐.” 그때도 대역은 대역인데, 악역이었다. 악역까지 능란하게 소화하던 유능한 배우가 근년에 착한 역할을 해 내니까 어머니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 원래부터 착해빠진 형들이라면 나보다 백 번 더 잘 해드려도 그런 감동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어제 평소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어머니 뵈러 간 것은 사실 마음이 좀 불안해서였다. 지금 계신 곳보다 입원 노인들을 더 잘 배려해 주는 요양원이 따로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세한 측면까지 입원자 위주로 생각해주는 자세에 놀라고 감동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운영 조건의 어쩔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불안할 때가 있다.


간병인 고용이 두드러진 한 가지 문제다. 2년 동안 계시던 병원에 비해 간병인 평균 재직기간이 짧아 보인다. 경영자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 아니라 병원과 요양원의 제도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병원에서는 인력회사의 파견 형식으로 간병인을 쓰기 때문에 실용적 기준에 따라 운용되는 데 반해 요양원에서는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에 잘못된 것이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책상 위에서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입원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목적에 미흡한 점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 문제. 근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 중의 집중력 확보를 위해서도 근무시간에는 적절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해 ‘저강도 근무(low-intensity duty)’ 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간병인은 노인들에게 생활의 동반자다. 노인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소정의 정규 근무 외에 노인들과 함께 하는 생활시간을 ‘저강도 근무’로 인정해 준다면(주거 간병인 1인 고용을 출퇴근 간병인 1.5~2인 고용으로 인정해 준다든지) 요양원의 간병인 운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리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복지사업의 특징이다. 똑같은 자격을 가진 간병인의 똑같은 근무량을 제공하더라도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 받는 사람 사이의 친근함과 익숙함에 따라 효과에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자식은 자기 부모 보살펴드리는 사람이 자주 바뀌지 않기 바라고, 그 사실을 보험공단에서도 고려해 주기 바란다.


어제 원장님과 잠깐 그 얘기를 나눴다. 지난 주 다녀온 뒤 생각난 대로 적은 글을 보내드렸었는데, 사실 백 가지 잘해 주는 것 놔두고 한 가지 아쉬운 얘기 내놓는 것이 서운하시지나 않을까,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긴한 지적이라고 고맙다 하면서 이사장님께 벌써 말씀드려 한 가지 방침은 결정해 놓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간병인 처우를 대폭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정말 불평도 함부로 못하겠다. 재정수지에 아랑곳없이 노인들 잘 모시는 기준에만 전념하는 자세가 존경스럽고 고맙기는 하지만, 길게 해 나가려면 수지도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할 텐데.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뭔가. 세종너싱홈 홍보에 더욱 매진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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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정보는 권력?


진화론은 경쟁이 생명현상의 원리라고 가르친다. 개체의 생존과 종의 번식을 위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는 가운데 진화의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말이 진화론을 요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것은 다윈이 한 말이 아니다. 19세기말 진화론을 사회학에 도입해 사회진화론을 제창한 허버트 스펜서가 쓴 말이다.

문명을 가진 인류는 다른 생물들보다 더 격렬한 경쟁의 모습을 보인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행복한 생활’이 경쟁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은 외부자원의 획득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확보에도 달려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게는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보일 싸움을 인간은 벌인다. 인류는 같은 종 안에서 가장 심한 싸움질을 벌이는 동물이라 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일세를 풍미한 것은 인간의 격렬한 경쟁양상을 명쾌하게 설명한 때문이었다.

인간의 싸움은 목표만이 아니라 방법도 다른 동물과 다르다. 물론 일대일의 몸싸움은 다른 동물들과 같이 힘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관계를 가진 동물이고 연장을 쓰는 동물이다. 대개의 싸움은 누가 힘이 세냐보다 편을 어떻게 맺느냐, 어떤 연장을 쓰느냐에 따라 결판난다.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게 된다.

정보가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은 <손자병법>에 간첩작전의 종류가 체계적으로 적혀 있는 데서부터 알아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냉전에서는 첩보활동이 경쟁의 핵심이 되기까지 했다. 냉전종식 후 경제전쟁의 시대에 첩보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안기부의 부훈이 ‘정보는 국력’으로 바뀐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그런데 안기부가 우리나라의 경쟁상대인 다른 나라에 관한 정보획득이 아니라 도청을 통한 국내정보 수집에만 몰두한다면 새 부훈이 무색해진다.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기보다 정부에 대한 내부비판을 봉쇄하는 데 안기부의 존재의의를 둔다면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의 암묵적 부훈 ‘정보는 권력’에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공산권의 붕괴가 정보부족 때문에 일어났던가. 소련의 KGB, 동독의 슈타시를 비롯해 공산국의 비밀경찰이 국력의 상당부분을 내부사찰에 쏟아 붓는 동안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정보가 만들어주는 권력은 권력의 껍데기일 뿐이다. 참된 권력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1998 가을)


감사원의 감사 결과 발표를 보고 나는 두 가지로 놀랐다. 사건 발생 이래 정부와 군의 태도를 보며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말 저 정도였나? 하는 것이 한 가지다. 또 한 가지는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감사원이 사실을 그렇게 까발릴 수 있는 데였나? 하는 것이다. 재작년의 KBS 감사를 비롯해 근년 감사원의 활동이 정권의 의도에 너무 많이 얽매인다는 인상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은 한국전쟁 후 한국군이 입은 최대의 타격이다. 그런데 어제 발표된 감사 결과는 46명 사병이 목숨을 잃은 배의 침몰 자체보다 더 큰 타격이다. 나도 내 아들도 사병으로 복무했고, 군대 갈 아들이 더 있다면 보내기 싫어도 또 보낼 생각이다. 군함 한 척이 침몰했다 해서 보낼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군 지휘부의 행태가 이번 감사 결과와 같은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박살내는 감사 결과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감사원의 이번 감사도 정권의 뜻을 받든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천안함 사태의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군부에 뒤집어씌우려는 뜻.


천안함 사태 처리 과정은 파행의 연속이었다. 군부와 정부가 함께 어울린 파행 과정이었다. 감사 결과는 군부 쪽의 여러 문제점을 센세이셔널하게 드러냈다. 파행에 대한 정부 쪽 역할은 군부의 잘못에 휘말린 것뿐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을 정도다.


“군의 초기 대응은 훌륭했다”는 통수권자의 초기 발언이 이제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군대도 안 가본 통수권자가 속아 넘어갈 정도로 군부의 기만이 심했다는 인상을 많은 국민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가 통수권자를 일방적으로 속이기만 했을까?


센세이셔널 포인트의 하나는 사태 발생 보고를 대통령이 국방장관보다 먼저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통수권자는 “초기 대응은 훌륭했다”고 했다.


더 큰 센세이셔널 포인트는 어뢰 피격 가능성 보고를 초기에 군부에서(국방장관까지) 묵살했다는 사실이다. 국방장관은 11일 국회 특위에서 그 보고를 어느 시점에서 어떤 형태로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는 생각은 “그 중요한 일에 관해 자기가 받은 보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말이 되나? 무엇을 아직도 은폐하려고 저러는 걸까?” 하는 것이었다. 많은 시청자들에게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김 장관의 말이 사실일 것 같다. 학창 시절 김 장관의 각별히 순진하고 고지식하던 모습을 기억해서만이 아니다.(그가 고교 동창이란 사실은 사태 발생 후에 생각났다.) 은폐, 조작을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 이후 국방장관에게 쏟아져 들어오던 방대한 정보 속에서 ‘어뢰 피격 가능성’ 얘기가 어떤 의미와 비중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한 승무원이 정신없이 뱉어낸 한 마디였는지, 현장을 벗어난 뒤에도 당사자 입장에서 꾸준히 제기한 명확한 의견이었는지 나는 판별할 수 없다. 대다수 국민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사원 발표를 봐도 이 의견이 현장 상황 속에서 돌발적으로 한 차례 나온 것일 뿐 이후 꾸준히 제기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장관이 섭렵하는 정보 속에 그런 ‘말’도 나왔다는 사실이 들어 있기는 해도 유의해야 할 ‘의견’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사 결과에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며 “그런 말이 어디 있기는 있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초기 보고 속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감사원에서 짚어주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보고가 오고갔으며 그중에서 이 ‘말’이 어떤 형태로 어떤 비중을 가진 것이었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정보의 비대칭은 여론 조작에 널리 활용되는 조건이다. 감사원 발표는 어뢰설이 애초부터 유력한 관점이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준다. 그 유력한 관점을 초기에 퇴색시킨 것이 군부의 잘못이었다는 인상과 함께.


이번 사태에서 정부의 정보 ‘통제’가 심했기 때문에 정보 ‘조작’까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정보의 통제와 조작은 서로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TOD 촬영이 “더 이상은 없다”고 우기다가 단계적으로 공개를 늘린 것이 단적인 예다. ‘대외적 안보’보다 ‘대 국민 안보’를 기준으로 정보를 통제했다는 인상을 준 일이 수없이 많다.


어제 특위에서도 국방장관은 어뢰 팸플릿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안보상의 이유로 거부했다. 정말 ‘이상한 나라의 국방장관’이다. 팸플릿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출처를 감추는 데 문제가 없고 원본을 밝히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부터 이상한 얘기지만, 정 그렇다면 특위 안에서 밝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투쟁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자기편과 정보를 공유하면 신뢰를 늘릴 수 있고 상대보다 우월한 정보를 가지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국민을 제압할 상대로 여기는 것일까, 함께 신뢰를 키워나갈 자기편으로 보는 것일까? 현 정부가 국민을 적대시하는 태도가 이번 사태 속의 정보 관리방법에서 또 확인되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걱정이 아니다.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와중에 군과 사회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반 때 군사쿠데타를 겪은 나는 군사정권을 미워하며 자라났다. 군사독재라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정치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꼭 현 정권의 행태를 목격해서만이 아니다.


60년대의 군사독재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졌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국가를 살려낼 생각도 없이 사리사욕에만 몰두한 데 비하면 박정희 정권은 키워 먹으려는 의지라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군부는 국가를 이끌어갈 인적-물적 자원을 다른 어떤 집단보다 잘 갖춘 섹터였다. 60년대에는 군사독재가 다른 정치 형태에 비해 선택할 가치를 상당히 가진 길이었고, 그 효과를 잘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을 70년대, 80년대까지 이어 나간 것이 큰 해악을 일으켰고, 가장 큰 해악의 하나가 군부에 대한 사회의 불신이다. 오죽하면 여러 면에서 한국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은 김영삼 정권이 ‘문민’ 한 마디로 국민의 인기를 끌어 모았겠는가? '군사문화'란 것이 이 사회에서 극악한 오염물질처럼 여겨지게 되었겠는가? 방대한 조직과 크나큰 인적-물적 자원을 옹유하고 있는 군부는 한국 사회의 큰 자산인데, 군사독재자들의 과도한 욕심으로 이것이 부채처럼 되어있는 것이 이 사회의 큰 불행이다. 군의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어제 특위에서 김 장관은 모순점을 지적하는 이정희 의원에게 “북한의 혐의를 벗겨주느라고 애 많이 쓰신다”고 비아냥댔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김 장관이 군부의 역할에 대한 이 사회의 진정한 요구를 어떻게 저렇게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민주노동당 의원이라면 북한을 위해 일하는 존재라는 얘기만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들으며 살아 왔겠지.


김 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는 사태 발생 이래 국민을 직접 상대해서 군의 입장을 그대로 밝히는 대신 정부의 지휘와 조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국민이 정권을 맡긴 정부인 만큼 그것이 타당한 자세이기도 하다. 불가피한 책임은 지더라도 군의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정부가 지시하는 어느 정도의 불법적 정보 통제와 조작도 더 큰 국익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원 발표를 보고서는 당황도 하고 황당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평소 내 글을 지지하던 이들도 딱해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적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더 이상 휘말리지 말고 국민을 똑바로 바라봐 달라고. 군의 진정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