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1. 12:18



화요일(8일)에 가 뵈었으니 사흘이 되었다. 전에는 다녀오면 책상머리에 앉자마자 다녀온 이야기를 적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어찌된 것인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자판을 당기니 먼저 그 생각부터 든다.


두 가지 문제가 생각난다. 첫째는 지내시는 조건이 불안해 보인 것이다. 간병인 문제다. 근무가 겨우 이틀째라서 아직 익숙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렇게 인계-인수가 안 되어 있을까? 모시는 노인들의 습관과 필요 같은 소프트웨어는 말할 나위도 없고, 소지품조차 파악이 안 되어 있다니. 독경집을 찾지 못해서 결국 금강경은 읽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지내시는 조건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 있으니 어머니 걱정해드리는 분들에게 보일 글에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지금 계신 곳보다 입원 노인들을 더 잘 배려해 주는 요양원이 따로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따라서 공치사도 할 수 없는 세세한 측면까지 입원자 위주로 생각해주는 자세에 놀라고 감동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들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경영하는 요양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간병인 고용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2년 동안 계시던 병원의 안정된 고용 상황과 대비된다. 경영자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 아니라 병원과 요양원의 제도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병원에서는 인력회사의 파견 형식으로 간병인을 쓰기 때문에 실용적 기준에 따라 운용되는 데 반해 요양원에서는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에 잘못된 것이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책상 위에서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입원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목적에 미흡한 점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 문제. 근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 중의 집중력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시간에는 적절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해 ‘저강도 근무(low-intensity duty)’ 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간병인은 노인들에게 생활의 동반자다. 노인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소정의 정규 근무 외에 노인들과 함께 하는 생활시간을 ‘저강도 근무’로 인정해 준다면(주거 간병인 1인 고용을 출퇴근 간병인 1.5인 고용으로 인정해 준다든지) 요양원의 간병인 운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병원의 간병인 파견근무 관행에는 통제가 너무 약한 데서 오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평균 근무기간이 요양원보다 훨씬 긴 것을 보면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더 만족스러운 조건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운용방법의 문제점을 보완해 가며 쓰는 것이 이론상으로만 약점이 없는 전혀 다른 운용방법을 강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원리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복지사업의 특징이다. 똑같은 자격을 가진 간병인의 똑같은 근무시간을 제공하더라도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 받는 사람 사이의 친근함과 익숙함에 따라 효과에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내 어머니 보살펴드리는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지 않기 바라고, 그 사실을 보험공단에서도 고려해 주기 바란다.


또 하나 생각난 문제는 ‘시병일기’를 책으로 내기로 한 사실이다. 재작년 11월 중순 회복이 시작되실 때부터 매주 두어 차례씩 시병일기를 쓰다가 작년 6월 요양원에 모신 후로는 한 달에 두어 번씩 가 뵐 때마다 방문기를 적었다. 처음에는 어머니 걱정해드리는 분들께 메일로 보내다가 작년 연말부터는 블로그에 올려놓고 있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를 모르던 분들 중에도 어머니를 아껴드리게 된 이들이 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책으로 만들자는 권유에 응하기에 이르렀다.


남들이 별로 않는 일을 하려니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다. 어머니를 위한 일인가,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역사 앞에서>란 책을 통해 아버지가 이 사회에 존재의 일부나마 남기신 것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이 사회에 남기는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책에 무엇을 담느냐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분의 존재를 내가 오히려 침해하는 측면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시병일기를 쓰던 때와 지금의 어머니 상태가 다르시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미래가 없고 현재만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읽는 분들도 같은 인식 위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당신의 생활을 늠름하게 영위하고 계시고, 근래의 회복 추세를 보면 의식이 더욱 확대되실 여지도 느껴진다.


이런 상태에서 책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방문기를 계속 쓴다는 것부터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내 블로그나 <월간 불광> 독자 중에는 어머니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라도 어머니의 사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월간 불광>에 실린 방문기를 보여드리면 언제나 기뻐하신다고 원장님은 말씀하시지만, 다음 찾아뵐 때 어머니 뜻을 확인할 수 있는 대로 확인해 봐야겠다.


확인은 해 보겠지만 어머니의 지금 의식 수준으로 분명한 뜻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 스스로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어볼 일이다. 어찌 생각하면 ‘사생활 보호’라는 것도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는 ‘근대적 관념’의 하나일 수 있다. 블로그의 댓글을 보면 내 눈에 보이는 어머니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읽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꽤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잡지에는 그런 피드백 통로가 없지만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생각할 것은 천천히 더 생각하기로 하고, 해 온 버릇대로 근황은 적어놓아야겠다. 말씀 도중에 사이를 띄우고 생각에 잠기실 때가 많은 것을 보면 의식이 든든해지신 것이 분명하다. 간병인이 곁에 있을 때 쉴 새 없이 노랫가락 화법을 이어 가시는 것은 마음이 상대적으로 불안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내외가 모시고 있을 때는 평상 화법을 많이 쓰시고 대화 중의 여백도 많다. 생각에 잠기실 때 가급적 방해하지 않고 있어 보니 긴 시간 혼자 생각에 잠기는 데 익숙하신 것 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며느리 구박증’이 미약한 형태로나마 나타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아내보다 10분쯤 나중에 올라갔더니 며느리를 다정하게 대하고 계시다가 나를 반기시는데, 몇 마디 오고간 뒤에 간병인이 아내를 가리키며 누구인지 아시겠냐고 물으니 느닷없이 “이런, 쌍간나!” 하시는 것이었다. 아무런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장난스러운 욕설이었지만, 당시 대화의 맥락에서는 뚜렷한 돌출이었다. 아내가 오랜만에 찾아온 것을 분명히 기뻐하고 계셨다. 그런데도 미묘한 심술을 나타내시는 것은 평생 며느리 재미를 별로 못 보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짐작이 얼른 떠오른다.


간병인 도움의 취약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걱정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병원에 계실 때 마음에 안 드는 간병인에게 대단히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간병인에게도 너그러우신 것 같다. 음식도 방문객도 있으면 즐기고 없어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으시는데, 간병인에게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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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랭킨과 클린턴


자네트 랭킨(1880-1973)은 1916년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남편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 시민권을 여성에게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등 여권신장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여권운동 못지않게 정열을 쏟은 평화운동 때문에 의회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1917년 대 독일 선전포고에 반대한 연방의원은 모두 49명이었고, 이들은 거의 모두가 정계에서 매장됐다. 랭킨은 이 반대 때문에 공화당의 상원의원 후보지명 기회를 놓치고 무소속으로 낙선한 후 의회를 떠났다.

여권운동에 전념하던 랭킨은 1940년 전쟁반대 공약을 걸고 하원에 복귀했다. 이듬해 참전승인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투표로 온 국민을 분노시킨 후 그의 의회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의 평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1968년 1월 그는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사당 앞에서 월남전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때 함께 한 5천명의 여성을 ‘랭킨 부대’라 한다.

광기(狂氣)는 전쟁의 본질에 속한다. 아무리 컴퓨터게임을 닮아 가는 첨단전쟁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미국 하원도 이라크 공격을 시작하자 탄핵절차를 하루나마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우리 장병이 싸우고 있는데 탄핵절차를 예정대로 밀고 나갈 수는 없다. 바로 그래서 공격을 시작한 것 아닌가.” 하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흘간의 공격이 끝나자 억눌려 있던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적 반전주의자뿐 아니라 이라크 응징에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들까지 비판에 나서고 있다. 섣부른 공격으로 아랍권의 반감을 사고 우방들의 협조에 균열을 가져오는 등 오히려 사담 후세인의 입지를 강화시켜 줬다는 것이다. 유엔 사찰단(UNSCOM)의 활동재개 전망도 없다.

이번 전투의 서방측 첫 희생자가 유엔 사찰단의 리처드 버틀러 단장일 것이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클린턴이 필요로 하는 공격의 핑계를 만들어줌으로써 유엔의 권위와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결과 사찰단은 이라크 측의 철저한 거부대상이 됐고,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이라크 무기사찰을 위한 다른 채널을 구상하기 바쁘다.

‘클린턴의 애완견’이란 꼬리표가 붙게 된 블레어 총리도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클린턴의 이미지는 이번 공격으로 더 굳어졌다. 거기 장단을 맞춰주다가 스타일을 구겼으니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은 격”이랄까. 클린턴은 사담과 함께 세계적인 위험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같은 편에게 위험한 인물로.


1998년 말 탄핵 위기에 몰린 클린턴 미 대통령이 느닷없이 이라크 공격을 재개하고 이로 인해 탄핵 절차가 늦춰지는 것을 보며 분통을 터뜨린 글이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비굴하고 비열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전쟁을 이용한다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다. 뒤를 이은 부시의 광적인 호전성에 많이 가려졌지만,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클린턴을 ‘전범(戰犯)’으로 규정한다.


사회가 전쟁 분위기에 휩쓸리면 민주주의가 손상된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보통이고, 아주 뿌리가 뽑혀버리기도 한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아끼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희생당한다. 자네트 랭킨은 그런 희생자의 하나였다.


1917년 참전에 반대했던 49인의 미국 연방의원 대부분이 랭킨처럼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그중 예외적으로 펄펄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1855~1925)였다.


라폴레트는 미국의 참전 여론이 거대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된 것으로 믿고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했다. 참전에 앞서 상선 무장 법안에는 필리버스터로 대항했다. 루시타니아 호 참극의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다는 주장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참전 후에도 징병제에 반대하고 언론 자유를 주장했으며,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부자와 대기업들이 전쟁 비용을 대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전쟁 분위기에 들뜬 사회에서 이런 이성적인 주장은 미친 소리로 몰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런 미친 소리를 계속하는 정치인은 소속 정당의 공천도 잘리고 유권자들에게 외면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라폴레트의 정치적 입지는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진보세력의 지지를 모아 19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3당 후보로 이례적인 17% 득표까지 기록했다.


1924년 선거에서 진보당 후보 라폴레트는 11개 주에서 2위를 기록했고, 아성 위스콘신의 선거인단을 차지했다. 그의 두 아들이 후에 위스콘신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것을 보면 우리 머릿속에는 ‘지역주의’, ‘토호세력’ 같은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을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전초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위스콘신 사람들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미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위스콘신 아이디어’는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큰 획 하나를 그은 이념이었다.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내던 정치 초년에 라폴레트는 한 사람의 성실한 정치인일 뿐이었다. 그가 ‘튀기’ 시작한 것은 1891년 보스 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였다. 공화당에서 왕따 당한 그는 정치개혁을 주도하면서 공화당 외부의 지지 세력을 끌어 모으고 공화당 안의 ‘반란파’를 키워내 1900년 주지사 자리에 올랐다.


6년간 주지사로 있으면서 라폴레트가 빚어낸 것이 ‘위스콘신 아이디어’였다. 좁은 뜻으로는 대학 교수들을 대거 정책 입안과 집행에 참여시킨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이다. 전문성 없는 정치인들이 쪼물딱대던 관행으로부터 비약적 발전을 정치-행정에 가져온 아이디어다. 그러나 더 넓은 뜻으로는 철도회사로 대표되는 대기업의 횡포에 민중이 맞서는 길을 열어준 새로운 시대의 ‘민주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철도회사의 소유 재산에 재산세를 물리는 조치. 정치계에서 나오지 못하던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그리고 강력한 착상을 그는 학자들에게서 얻었다.


1917년 그가 참전에 반대하고도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순진한 평화주의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사 로버트 Fighting Bob”가 그의 별명이었다. 그의 참전 반대는 평화의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얻을 대기업과 대자본에 대한 적극적 공격이었다. 20년간 꾸준하고 치열하게 진행해 온 공격의 연장이었다. 그에게 정치란 ‘일반인’들과 ‘이기적 이해집단’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었다.


불꽃같은 라폴레트의 연설 중에서도 특히 대중을 열광시킨 것이 ‘출석부 낭독 roll call’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행이 되어 있는 투표 실적 공개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개혁 법안에 반대한 입법자들의 명단 공개가 관행에 젖어 보스만 쳐다보던 의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 힘을 몰아 당내 후보 경선에도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위스콘신 주에서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위스콘신 주의 중심도시 밀워키 지역에서 사회당이 강세를 보인 것도 라폴레트가 구축한 민주주의 인프라 덕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0년에 밀워키는 미국 최초의 사회당원 시장과 사회당 연방의원을 배출했고, 1940년까지 거의 대부분 기간을 사회당에게 시정을 맡겼다. 밀워키 기반의 사회당 세력을 “하수도 사회주의 sewer socialism”라 흔히 부르는 데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평가하는 뜻과(밀워키 시의 위생 정책은 오랫동안 전 미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념에 투철하지 못함을 비난하는 뜻이 엇갈려 있다.


밀워키의 사회당 세력은 라폴레트가 이끄는 진보주의 세력과 치열한 정책 대결을 벌였고, 선거에서의 공조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큰 그림 안에서 두 세력은 대중의 각성이라는 배경조건 위에서 보완과 공생 관계에 있었다. 위스콘신이 보수적인 양대 정당의 분위기를 벗어난 ‘개혁 특구’ 노릇을 할 때 그 중심부 밀워키는 ‘좌익 특구’ 노릇으로 ‘특구 구조’를 뒷받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지방정치의 새로운 단계가 열릴 것을 기대하면서 100년 전 위스콘신 주의 정치개혁을 되돌아본다. 남북전쟁 이후 대기업과 대자본의 주도 하에 성장과 팽창에 도취되어 있던 미국 사회에 각성의 씨앗을 싹틔운 곳이었다. 개혁파도 사회당도 그곳에서 ‘이념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다. ‘민생’ 문제를 철저히 파고들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민생 문제의 잘못이 정치 관행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한국에서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제 구실을 못해 온 것은 100년 전의 미국과 대동소이한 상황이다. 위스콘신 정치개혁이 큰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원칙과 상식’을 억누르는 부패와 비리가 과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지방정치가 제 구실을 하게 되면 더 큰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서울, 경기도 등 단체장과 의회 다수파가 여야 간에 엇갈린 지역에 특히 큰 기대를 건다. 파당적 입장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파국을 일으켜 자기편의 결속과 지지를 강화하려는 반동적 시도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라도 지역민의 사랑을 놓고 생산적 경쟁을 통해 정치력을 키우는 노력이 일어난다면 지역민들에게 다행한 일일 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공헌이 될 것이다.


라폴레트가 1917년 참전 반대의 목소리를 당당히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위스콘신 정치개혁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1910년 최초의 사회당 하원의원이 된 빅터 버거는 반전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의회에서 쫓겨났지만 밀워키 시민들은 1918년에서 1926년까지 그를 다섯 차례나 하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비록 참전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참전의 문제점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미국 사회의 피해를 얼마만큼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정치의 극단적 퇴행을 보여주는 천안함 사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방정치의 새 무대이기에 더욱 큰 기대를 걸게 된다.


Posted by 문천


어머니 제자 이경자 선생님이 며칠 전 요양원에 다녀가셨다. 다녀가신 말씀을 원장님께 메일로 듣고 감사 인사를 전화로 드리려는 참에 먼저 전화를 주셨다. 마침 그 날 내가 올렸던 글 “역사학의 위기, 역사의 위기”가 각별히 마음에 드셨다고 치하해 주신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 퇴직 전 같은 학교에서 가까이 지내던 L 교수 말씀을 하신다. 나를 아는 분인 L 교수와 아까 통화했는데 L 교수도 그 글을 무척 좋아하더라고.


L 교수. 고등학교 때 서클활동 같이 한 분인데, 참 좋은 분이다. 대학 때 꼭 한 번 해수욕장에서 마주친 후로 40년간 안 보고 지내 왔는데, 내 글을 좋게 봐 주셨다니 실없는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L 교수 앞으로 메일을 쓰다 보니 불쑥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K 병장. 75년 늦깎이로 군대 갔을 때 나를 조수로 받아 업무를 넘겨주고 제대한 분이다. 혹시 이 분 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K 병장이 L 교수에게서 연상된 것은 그가 L 교수의 동생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비질비질 새어나온다.


어느 날 저녁 후 중대 사무실에서 K 병장에게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심심한 고참들이 나를 놀려먹으려 들고, K 병장은 업무 방해를 차단하기 바빴다. 한 고참이 내게 여자 전화번호 하나 내놓으라고 한다. 휴가 가서 연락해 주겠다고.


든든한 사수를 믿고 내가 겁이 없었다. 들이미는 종이에 “73-0001”이라고 적어줬다. 여자 이름도 달라기에 “박근혜”라고 적어줬다. 적어놓은 것을 보고 “이거 뭐야? 좀 이상한데?” 하고 고개 갸웃거리는 것을 보고 K 병장이 “왜 그래?” 종이를 당겨보고는 대뜸 “야! 이거 청와대 번호잖아? 내 친구 집이 72-0001번이라서 내가 알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런! 나도 친구 집 번호가 72-0001번이라서 청와대 번호를 알게 된 건데! (워낙 별난 번호라서 안 보고 지낸 지 여러 해가 돼도 기억하고 있었다.) K 병장에게 물었다. “그 친구가 혹시 L 씨 성 아닙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집에 제 친구도 있거든요.” “아니, 그럼... 니가 아무개 누나 친구란 말야?”


지금 생각해도 K 병장에게 미안하다. 말년 호강은 첫째로 조수 능력에 달린 것인데 친구 누나 친구라는 넘을 조수로 ‘모시게’ 되다니! 군대 밖의 관계는 군대 안의 위계관계에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피차 다짐을 하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나? 표는 안 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떠날 때까지 그의 마음이 어떠했다는 것은 뻔히 짐작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 늙은 졸병이 눈치는 없고 곤조만 있어서 걱정 많이 시켜드렸지.


L 교수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K 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L 교수 친구로 군대에서 K 사장님 밑의 조수로 근무했던 아무개인데, L 교수와 연락이 닿게 되니 옛날 고마운 생각이 나서 책이라도 하나 보내드리고 싶다고. 어리둥절한 채 주소를 불러주는데, 아무래도 좌표가 잘 잡히지 않는 기색이다.


그러고는 한 시간쯤 있다가 전화가 왔다. “아까 전화로 잘 파악이 안됐는데, 친구라는 L 교수가 누구시죠?” “K 대 있는 친구분의 C 대학에 있는 누님 말씀입니다.” “아! 아무개 누님?! 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네, 제가 군대를 좀 늦게 가서 폐를 많이 끼쳤죠.” 몇 마디 더 얘기를 하다가 K 병장과 각별히 친하던 B 병장 이름이 생각나 얘기하니 더욱 반가워한다. B 병장과는 아직까지 친분을 지키고 지낸다고.


그렇구나. K 병장과 B 병장은 군대 인연을 평생 잘 지키고 지내 왔구나. 나는 군대에서 만난 사람 아무도 안 보고 지내 왔는데. 군대 인연만이 아니다. L 교수와도 40년 만에 메일 나누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 수십 년씩 안 보고 지내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근래 와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을 보며 지내게 되니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살아가는 방식을 좀 바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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