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프레시안>에 게재된 이근식 교수의 글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본다. ‘반론’은 아니다. 그의 글은 정치학 논설인데 나는 정치학의 기본 개념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역사 공부한 사람의 ‘논평’ 정도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우선 이런 대목이 편안하게 읽혀지지 않는다.


본원적 평등이란 모든 사람은 인격, 존엄성, 인권에서 완전히 평등하다는 만인평등의 생각을 말합니다. 본원적 평등이 사회 속에서 실현된 것이 사회적 평등입니다. 동등한 참정권을 갖는 정치적 평등, 법 앞의 평등, 일상생활에서의 평등 의식, 이런 것들이 사회적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원적 평등이 상당히 마음에 들기 때문에 강조를 하고 싶어서 '사회정의에 관한 으뜸 공리'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만인평등이라는 본원적 평등은 그 자체로 자명하기 때문에 그 타당성,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이 필요 없는 유일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사회과학의 주장도 그것이 왜 옳은가에 대한 논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인평등이라는 것은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것을 검증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원적 평등, 즉 만인평등을 사회과학 '사회정의에 관한 으뜸공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유와 상생의 정당성이 도출된다고 볼 수 있지요.


‘공리’라는 개념은 논리학과 수학에서 원래 쓰인 것이고, 다른 학술분야에서는 ‘확립된 원리’라는 정도 뜻으로 다소 애매하게 차용되는 말이다. “논증이 필요 없는 명제”라 명시한 것을 보면 이 교수는 엄격한 의미로 쓰려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공리 중 어떤 공리로 생각하는 것일까? 공리에는 논리적 공리와 형식적(비논리적) 공리가 있다. 논리적 공리는 “갑과 을의 집합에는 갑이 내포된다.” 같은 보편타당한 명제다. ‘자명한 진리’에 가까운 뜻이다. 형식적 공리는 “a +b = b +a"처럼 특정한 학술체계의 구성을 위해 현실적 타당성과 관계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명제다.


“으뜸공리”라는 말로 보아 논리적 공리를 이 교수가 뜻하는 것 같다.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형식적 공리에는 으뜸이고 뭐고 없으니까. 이 교수가 “만인평등”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해서 “공리”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겠다.


그런데 “만인평등”을 자명한 진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상대하지 않고 자명한 진리로 봐주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학술을 할 것인가?


번역하기 힘든 말 중에 “political correctness”란 말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어 중에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없다. 내 생각에는 “도덕적 강박”이 뜻으로 제일 가까울 것 같은데, 맥락에 따라 적절치 못한 경우도 꽤 있을 것 같다.


1960~70년대 미국 지식층에서 기성체제에 반발하는 도덕적 고양 현상이 널리 일어날 때 학술활동에도 도덕적 기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풍조가 있었다. 통용되는 도덕적 이념이 공리처럼 숭앙받고 검증 없이 입론의 근거로 쓰인 것이다. 그 결과 이 시기의 주류 학술 담론이 학문적 엄밀성을 갖추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대두하자 조롱거리가 되었다. “political correctness”가 대표적인 조롱의 말이었다.


1960~70년대 진보주의 학자들이 학문을 팔아먹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덕적 이념을 위해 팔아먹은 것이니 돈이나 권력을 위해 팔아먹은 것보다 낫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학문의 관점에서는 똑같이 팔아먹은 짓이다. 학문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 이념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면서 스토킹으로 괴롭히는 것과 같은 짓이다. 학문적 부실 때문에 이념까지 과도하게 침해받게 된 것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용서받을 수 없다.


“만인평등”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는 평등을 주관적 인식으로서만 인정하고 객관적 실체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적 현상이 아닌 머릿속의 관념으로 보는 것이다.


‘평등사상’은 사회적 현상 맞다. 많은 사람들이 ‘평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현상이 역사적 조건에 의해 빚어질 수 있고, 이것이 다시 특정한 방향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이 교수는 평등사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인평등 사상은 역사발전을 추진한 힘찬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신분, 재산, 성, 인종 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는데 수천 년간 내려오던 이런 악습을 철폐한 것은 바로 만인평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주의를 좋아합니다.


뒤쪽의 “만인평등”에는 “사상”을 실수로 빠뜨린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19세기 이전의 차별 상황을 “악습”으로 규정하는 기준이 뭘까? 유교의 삼강오륜이 차별적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지탄받아 온 것을 이 교수는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평등주의’라는 이념의 기준을 따르는 것 같다.


평등주의는 근대세계에서 지배와 침략에 많이 이용되어 온 이념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제일 먼저 주력한 일이 조선의 ‘독립’, 즉 국제적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중국과의 전통적 특수관계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개항기 이전에 조선이 속해 있던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는 불평등 국제관계였다. 강약의 차이를 인정해서 강자가 존중받고 약자가 보호받게 하는 체제였다. 이 천하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열강은 만국공법 체제를 강요했다. 만국공법 체제는 현실의 불평등을 가상의 평등으로 가림으로써 약자 보호의 필요를 부정하는 체제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나 자유주의 권력체제도 가상의 평등을 빌미로 약자 보호의 필요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등’의 의미를 확충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 존중하는 가치를 ‘평등’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을까?


‘평등’의 이름을 그대로 두더라도, 이것을 학문적 ‘공리’로 내세우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이념 중에는 “세상이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지향의 명제와 “세상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명제가 있다. 당위의 명제에는 폭력성의 부담이 있다. 그런데 ‘공리’로 내세우는 것은 당위의 명제 중에도 가장 엄격한 형태다. 아무리 허울이 좋더라도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나그네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평등주의가 도그마화한 것은 18세기 후반에 발전한 자연법사상이 19세기 초에 제기된 원자론과 결합된 결과였다. 과학혁명의 성과에 도취된 유럽 지식인들이 자연에도 인간 세상에도 절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자연법 개념을 세웠다. 뒤이어 물질이 (평등한) 원자의 결합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원자론이 자연과학의 주류 담론이 되자 이것을 인간사회의 모델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평등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원자론적 세계관은 산업화와 국민국가 건설에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유기론적 불평등 질서에 묶여 있던 농업사회의 해체에도 국민의 전면적 동원에도 평등의 관념이 유용했던 것이다. 너무나 유용해서 원래의 모델인 원자론이 20세기 들어와 자연과학계에서 힘을 잃어도 평등주의는 살아남았고, 자연법사상 자체가 쇠미해진 포스트모던 시대까지 버티고 있다.


지난 200년 동안 평등을 향한 이야기도 많고 노력도 많고 투쟁도 많았지만 인간사회의 불평등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신분차별이 경제적 신분차별로 바뀌었을 뿐이 아닌가. 지금도 경제적 신분차별을 심화-고착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근년의 금융공황과 같은 악재 앞에서도 쉽게 힘을 잃지 않고 있다.


평등과 차별(불평등)의 흑백론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동물농장>의 패러디를 생각해 보자.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 제일 평등하다.” 평등이라는 것은 관계에 대한 상대적 인식이다. 이것을 하나의 실체, 그것도 모든 관계에 대한 절대적 규정력을 가진 실체로 확립하려는 노력 자체에 모순이 들어있지 않은가?


경제학이 학문으로 성립하는 문턱이 재화를 덩어리(stock) 아닌 흐름(flow)으로 파악하는 데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가변의 실체 아닌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분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거리, 시간, 질량 등 실체의 개별적 관찰을 넘어 그 상호관계를 따져보는 데서 근대물리학이 세워졌다. 자유와 평등 같은 사회적 가치도 절대적 실체로만 세워놓으면 신앙의 대상에 그칠 뿐, 분석적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정치학 분야의 어떤 주제도 마음먹고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분야의 논설을 더러 접할 때, 정치학이 발생하던 계몽시대의 사고 틀을 시원하게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이근식 교수가 “진보적 자유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을 보더라도 그가 바라는 질서의 원리를 표현하는 데 그리 효과적인 길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제일 답답한 고비가 평등과 자유의 관계다. 평등과 자유의 갈등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평등을 본원적 평등, 사회적 평등, 경제적 평등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고 한다.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의 구분은 납득이 가지만, 본원적 평등이란 것은 이 두 가지와 같은 차원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평등이 자유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평등에 ‘본원적’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준 것뿐이다.


사회적 평등이 자유와 합치한다는 주장 자체도 뻑뻑하다.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기 때문에 아무도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유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일반인이 가진 자유의 통념 중 일부만을 ‘올바른 자유’로 규정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가운데 ‘지속가능한 성장’만이 올바른 성장이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그러고도 경제적 평등이 남아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교수가 직접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개인주의와 ‘상생’으로 이야기를 돌린다. ‘상생’ 이야기는 자기 책에 나와 있다고만 하는데, 아마 개인주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인 모양이다. 내 생각에는 개인주의가 자유주의의 본질인데, 개인주의를 거세한 자유주의란 게 당나귀 귀 빼고 뭣 뺀 꼴이 아닐지, 별로 기대가 가지 않는다. 차라리 이 교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자유’인지 ‘자유주의’인지 돌아볼 여지는 없을까? 자유주의 세계라 해서 모든 구속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세계라 해서 자유가 씨가 마르는 것도 아닌데.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면 사회도 어느 쪽으로든 완벽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완벽한 자유세계도 있을 수 없고, 완벽한 평등세계도 있을 수 없는데, 마치 그런 세계가 가능한 것처럼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특정한 체제로 사람들을 몰고 다닌 것이 근현대 역사의 기본 흐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대규모로 인간을 해치고 자연을 해친 근대세계의 폐해가 이 환상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보다 균형과 조화를 더 중시하고 싶다. 19세기 이전의 역사를 ‘불평등 세계’로 백안시하는 관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문명 초기부터 인류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완벽한 자유와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균형을 현실 속에서 형성하려 노력했다. 전제군주제라 해서 구속과 차별의 극대화를 향해 모두 똑같이 전력으로 매진한 체제가 아니었다. 자유와 구속, 평등과 차별의 절충을 통해 현실적 지속성을 추구한 결과였다.


완벽한 자유와 완벽한 평등의 환상이 계몽시대에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 덕분이라고 나는 본다. 급격한 기술 발달로 자원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 같은 놀라운 상황이 펼쳐지자, 그밖의 어떤 문제라도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부르주아 사회에 넘쳐흘렀다. 이런 자신감을 그 시대 사람들은 진정한 문명의 증거로 여기며 그런 자신감이 없던 시대를 ‘암흑시대’라 부르고 그런 자신감을 가지지 않은 사회를 ‘야만’이라고 불렀다.


극우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모두 좌빨로 보인다. 완벽한 평등의 당위성을 믿는 극좌파의 눈에는 내가 수구 꼴통으로 보이겠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