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인희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동덕여대 가정학과에 재직하시던 이 선생님은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 90세이신데, 쌩쌩하시다. 청력이 떨어지셨다고 하지만 차 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시고, 걸음을 못하신다고 하지만 집안에서는 지팡이 짚고 움직이시는 데 아무 문제 없으시겠다. 앉았다가 일어서실 때는 부축이나 손잡이가 필요하시겠지만.
이 선생님 얼굴이 보이자 어머니는 즉각 '장난 모드'로 풀스윙.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친구의 한 분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이 선생님만이 아니라 신신회 10여 분 멤버 대부분과 매우 편안한 사이셨다.
새 신, 믿을 신, 신신회. 새로운 믿음을 필요로 하던 분들의 모임이었다. 전쟁 중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버렸던 분들. 요즘 현대사를 살펴보면서 그분들 말씀을 많이 들어두었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6-25전쟁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인텔리 과부 클럽'.
부군들 중에는 사망자도 있고 납북자도 있고 월북자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 월북자 가족은 매우 취약한 입장에 처해 있었는데 이 모임은 남편을 잃었다는 연대감 하나로 뭉치며 어떻게 잃었는지는 가리지 않았다. 여성 교수들끼리 학교 이야기와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주로 나누는 계모임이었지만, 약자의 입장에 갑자기 떨어진 사람들이 상호 협력과 정보 교환을 위해 모인다는 뜻이 있었을 것 같다. 최고의 인텔리들인 만큼 이 사회의 실력자, 권력자들과 연줄을 가진 분들도 있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여지가 꽤 있었을 것 같다.
써놓고 보니 엘리트 집단의 이기적 조직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모임은 권력자 아내들의 치맛바람과 달리 방어적인 성격이었다. 예를 들어 1968년 경 형들이 유학 갈 때 경찰에선가 신원조회라고 조사를 나왔다. 우리 아버지가 확실히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위장하고 월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유학을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월북자로 의심할 정도면 납북자들에 대한 의심은 어땠겠는가. 하물며 월북으로 밝혀진 분들의 가족이 처한 곤경은 어땠겠는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대책을 의논하고 도움을 줄 만한 이가 있으면 도와주고 했을 것이다.
그 모임에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가장 많이 베푼 분이 이인희 선생님이었을 것 같다. 정의감이 강하면서도 인정이 많은데다가 자원도 넉넉했다. 내수동 경찰청 자리의 엄청 큰 한옥만 해도 대갓집이 분명했고, 시숙인가 되는 분이 전경련 회장까지 지내셨던 것 같다. 그리고 살림의 달인이셨다. 우리 집에도 격식 갖춘 잔치가 필요할 때면 꼭 나서서 도와주셨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참 부드러우면서도 든든한 분이었다. 오늘 모시러 가보니 20여 년 전에 이사 가신 워커힐아파트에 그냥 살고 계시다. 지금 서울 사는 천만 시민 중에 50년 동안 한 차례밖에 이사를 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있을까?
같이 가는 사람이 있을 때 어머니가 그 사람을 먼저 보고 인사를 나누다가도 내 얼굴이 눈에 띄면 관심이 순간적으로라도 홈빡 내게로 넘어오신다. 오늘 이 선생님이 예외였다. 나를 먼저 보고 "아니 이게 누구냐~ 내 아들놈 아니냐~" 흥얼거리면서 옆쪽으로 접근해 있던 이 선생님께 흘낏, 눈길을 돌리시다가 한 순간에 놀라움이 얼굴을 채웠다. "아니, 아니! 이게 누구야!" 세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두어 시간 동안 어머니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이 선생님을 상대로 얘기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편안하게 얘기 나누던 사이로 그냥 돌아가신 것이다. 이 선생님 기억으로 전번 만난 것이 십여 년 전 같다고 하시는데.
오늘 이 선생님에게 놀란 일이 몇 가지 있다. 불교에 그렇게 깊이 잠기신 분인 줄 전혀 몰랐었다. 어머니 뒤를 이어 <월간 불광>에 글 올리고 있다는 말씀을 요양원으로 가는 길에 드렸더니 "나도 <불광> 받아보고 있는데 몰랐구나. 다시 뒤져볼께." 하시고 어머니 덕분에 <불광>을 보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불교에 우호적인 정도이신가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와 반야심경을 암송하는데 유창하게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암송하신다. 어머니는 대충 기억나시는 듯 입을 오물거리시는데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학생 시절 이후 천수경 암송은 포기하고 지냈다.
가는 길에 어머니 상황을 설명드리면서 마음이 아주 밝고 편안하신 점을 말씀드렸더니 끄덕이면서 "어머니다우시군." 하셨다. 이 말씀이 내게는 뜻밖이었다. 늘 걱정을 지나치게 하시던 분이 이제야 편안한 마음자리를 찾으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가 원래 마음 편한 분으로 늘 생각하셨냐고 여쭈니 그렇다고 하신다. 어떤 일에도 쉽게 비관하지 않고 긍정적인 면을 잘 찾아보시는 태도 때문에 어머니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좁았던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이 선생님을 편안하게 대하시는 것은 서로 이해하는 폭과 깊이 때문일 것이다. 분명히 나를 대하는 것보다 이 선생님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시는 면이 있다. 근년에 내가 자식치고는 어머니가 편하게 대하실 수 있는 상대가 되어드렸지만,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데는 자식이기 때문에 제약을 받는 측면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어머니에게 친구들 만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으실까? 친구 분들 대면할 기회 만들어드리는 데 더 애를 써야겠다. 이런 걸 '친구 공양'이라 하나?
가까이 지낼 때 자식들 이야기를 늘 나누던 일이 기억의 밑바닥에 깔려 있으신 것 같다. 어머니가 불쑥 한 마디 하셨다. “아이들이 서로 같은 또래라서... 우리가 더 가까웠지.” 큰형 또래의 영중 누님과 작은형 또래의 학중 형님 생각까지 다 나시는 모양이었다.
자식들 얘기하다가 절창이 한 차례 나오셨다. 아들이 넷이라고 몇 차례나 우기셨다. 누구누구 넷이냐고 이 선생님이 따져 물으시니 우선 나를 가리키며 “여기 한 개 있지.” “네, 한 개요.” “그리고 기봉이가 있지.” “네, 두 개요.” “또 기목이가 있지.” “네, 세 개요.” “그리고 기협이가 있잖아!” 이 선생님과 내가 동시에 뒤집어졌다. 못된 기협이와 착한 나를 따로 치시나보다.
세 시 반경 어머니가 노곤한 기색을 보이셔서 작별하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 선생님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기분이 좋으셨다. 또래의 친구와 이렇게 유쾌한 시간 가지시는 일이 쉽지 않으시겠지. 그런데 원장님을 “참 보살 같은 사람”이라고 한참 칭찬하시다가 내 칭찬으로 넘어오실 때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기협이 너 참 여자 같더라.” 어머니가 “여자 중의 여자”라고 늘 흠모하시던 분에게 이런 말씀을 듣다니, 정말 귀중한 칭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