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26. 16:29



"어머니 책" 함께 만들 서해문집 김선정 주간과 함께 갔다. 출판사에서 점심 후에 출발했는데 3시 막 넘어 도착했으니 집에서 가는 것과 시간이 비슷하게 걸렸다. 볕이 살짝살짝 들기도 하지만 비도 살짝살짝 뿌리는 꽤 선선한 날씨다.

방에 누워 계셨다. 너스 스테이션으로 먼저 가서 안내를 받아 들어갈 때 간호사님이(서 선생 말고 또 한 분, 이름도 모르는 채로 오래 지내다 보니 새삼 물어보기도 쑥스럽다.) "할머니, 누구 오셨나 보세요." 하니까 고개를 들고 바라보시는데, 김 주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쌀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바라보며 "이 사람 난 모르는 사람인데?" 좋은 징조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공자님도 말씀하셨지. 기억에 자신이 없으면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얼렁뚱땅하실 텐데,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이만큼 자신있게 판별하시는 것은 상당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일이다.

김 주간이 "네, 저는 처음 인사드리는 거예요. 이 분은 아시는 분이죠?" 하면서 한 옆의 나를 가리키니까 눈길을 내게 돌리면서 순간적으로 얼굴이 허물어지신다. 그냥 기뻐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턱 놓이면서 긴장 수위가 푹 내려가는 것이다. "그럼, 알구말구." 하시고는 또 한 순간에 표정에 장난기를 떠올리며 "셋째야, 너 셋째 맞지?"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엉구럭떠는 것은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뻗쳐 내 손을 당겨서 입을 맞춰 주신다. 말씀이나 동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내가 "저도 어머니 뽀뽀해 드리고 싶어요."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이마를 내놓으며 "어떠냐, 이마가 넓어서 뽀뽀하기 좋지?"

오늘은 많이 누워 계셨다고, 그때부터 저녁식사 때까지 앉아 계셔도 좋겠다는 간호사님 의견에 따라 복도 가 지정석에 모시고 나왔다. 녹차와 과자가 먼저 나오고, 얼마 후 김 주간이 사 간 딸기가 나왔다. 과자보다 찻잔부터 집어 드시기에 "어머니, 너무 뜨겁지 않으세요? 조금 있다가 드시죠." 했더니 "이게 뭐가 뜨거워? 딱 좋구만." 같잖아 하신다. 잘 드시고 잘 권하신다. 음식을 남기면 죄가 된다는 강박관념은 그냥 남아 계신 것 같다. 과식하시지 않도록 우리도 열심히 먹어야 했다.

딸기를 어머니 드실 것은 얇게 저며 놓고 우리 것은 통째로 담아 왔는데, 내가 찍개로 한 조각 찍어 드리자 받아 잡순 다음 찍개를 빼앗아 손수 한 조각 찍어 잡수셨다. 그리고 다음에는 찍개를 저며 놓지 않은 통딸기에 들이박으시는 것이었다. 한 입 가득히 물고 우물우물하시는 표정이 맛은 차치하고 그 충족감과 촉감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며 놓은 딸기는 내 차지가 되었다.

간식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 테라스에 모시고 나오려고 숄과 모포를 걸쳐드리는데 그릇들을 가리키며 "우리 참 깨끗이 먹었지?" 하며 좋아하신다. 나중에 치료사 김 선생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요즘은 몸의 불편도 별로 느끼시는 것이 없고 식사도 잘 하신다고. 4월 중에는 식사를 힘들어 하실 때가 많아 몇 주일 동안 죽을 드렸는데도 대충 절반밖에 못 드셔서 조금 걱정이 되었었다고 한다. 요즘은 충분한 분량을 즐겁게 드신다고.

테라스에 나가니 화분의 꽃을 보고 좋아하셨지만, 몇 분 안 되어 "춥구나, 들어가자." 하신다. 이것도 좋은 징조로 보인다. 바깥 공기를 좋아하시지만, 오래 있어서 좋겠다, 안 좋겠다 하는 것을 쉽게 판단하시는 것이다. 복도 가 옅은 햇볕이라도 있는 자리에 돌아와 앉아서도 자연을 누리는 마음은 그대로 이어졌다. 정원과 건너편 숲의 나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저 나무에도 생명이 있지. 또 저 나무에도." 불쑥 말씀하시고는 한참 있다가 "생명이란 참..."

다른 날에 비해 말씀 없이 앉아 계신 시간이 많았다. 나는 이것도 좋은 징조로 봤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기실 수 있는 것으로.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쭉 이어지지 않고 불쑥불쑥 이런 말씀이 나오다 저런 말씀이 나오다 해서 내용이 많이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인상적인 대목은 김 주간을 향해 "나는 우리 셋째 아들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서 좋아요." 별 맥락도 없이 꺼내셨던 말씀 같다. 또 한 대목은 나를 향해 "네가 이렇게 와 주니 내 마음이 감격스럽구나. 정말 기쁘고 고맙다." 그래서 "어머니, 어제는 와서 감격시켜 드리지 못한 것이 미안합니다." 능청을 떨었더니, "아니다, 너무 자주 감격하면 감격 값이 떨어진다. 가끔씩 와주면 된다."

기억력에는 문제가 있어도 사고력에는 별 문제가 없으시다고 여러 달 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런 말씀 하시는 걸 보면 기억력도 많이 향상되신 느낌이 든다. "너무 자주", "가끔씩", 이런 말씀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분명한 의식 없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니나다를까, 식탁에 앉혀 드리고 작별을 드리는데 언제 또 오겠냐고 물으시기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너무 먼 장래라는 인상을 드리고 싶지도 않아서 "다음 주에 또 와 뵙겠습니다." 정도로 대답했더니, "다음 주?" 되뇌며 생각하는 기색이시더니 "그러면 이번에는 조금 일찍 오겠다는 거구나?" 하시는 것이 아닌가!

4월에 한 차례 기력이 떨어졌다가 회복되시면서 3월 이전보다 더 좋아지신 것이 분명하다. 마침 <망국 100년> 연재도 다음 주에 끝나니, 이제부터 매주 와 뵙는 쪽으로 애써 봐야겠다. 생각이 저렇게 명민하시면 "어머니 책"에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원고보다 더 좋은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 같다.

모자와 숄을 참 좋아하신다. 테라스에서 들어와 숄을 벗겨드리려 했더니 "그냥 둬라. 난 이거 좋다." 모자는 우리가 들어올 때도 쓰고 계셨다. 주무실 때도 벗지 않으신다며 간병사님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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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경제는 말아먹더라도 남북관계만은...


1987년 민주화로 독재시대의 '기존 지배층'이 정말 무너졌던가? 엄밀히 말하면 '지배 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상징적인 몇 사람이 퇴출되었을 뿐, 계층으로서의 '지배층'은 거의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87년 체제'는 '벨벳 혁명'의 꿈을 담은 길이다. 그 길을 연 혁명 주체는 정치적으로 중도적이고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시민' 계층이었다. 정치적 지향성이 약한 이 계층이 주체로 나선 것은 기존 군사독재가 사회 기반 조건의 발전에 너무나 뒤쳐져 겉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량주의 성향의 이 계층이 바란 것은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변화 과정이었다.

 

20년간 계속된 87년 체제 속에서 바로 그런 과정이 일어나 왔다. 이런저런 곡절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좋은 변화가 참 많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21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권위주의 해소와 남북 간 긴장 완화 등, 어떤 과격한 혁명으로도 이루기 힘든 성취들이 그 동안 꾸준히 쌓여왔음을 생각하게 된다.

 

1987년 이후 10년간은 독재시대의 기존 지배층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이 (다른 이름을 쓸 때였지만) 정권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나라당은 1987년에 드러난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대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동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97년 이후 10년간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반 한나라당 세력이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2007년의 대통령선거는 벨벳 혁명의 허점을 드러낸 하나의 안티클라이맥스였다. 내가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 살리기' 같은 허구의 과제가 핵심 이슈가 된 상황이 문제라는 것이다. 경제가 죽었나? 죽어가고 있었나? 그만하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경제를 놓고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 정작 요긴한 과제들이 도외시되고 말았다.

 

벨벳 혁명의 '허점'이라 함은 현실 정치에 작용할 수 있는 특정 집단의 조직력에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독재시대의 기존 지배층은 반대 세력을 압도하는 조직력과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 상황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이 흐름을 뒤집기 위해 그들은 집요한 노력으로 경제 이슈화에 성공,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집요한 선전 활동이 시대의 흐름을 잠깐 가릴지는 몰라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잠깐 가리는 데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이 비용의 단적인 예가 조중동의 위신 추락이다. 벅찬 목표를 따라가기 바쁘다 보니 예전처럼 은근히 풍기는 정도로는 약발이 충분치 않아 원색적 나팔질과 노골적 말 바꾸기를 일삼다가 꼴이 말씀 아니게 됐다.

 

촛불 사태는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는 이명박 정부의 반동적 역류가 일으킨 풍파다. 이제 선전 활동 정도로 국민의 이목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 왔다. 방송 장악에 목을 매고 있지만, 장악에 성공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권력을 정신없이 휘두르는 양상은 집권세력의 대응책이 얼마나 빈약한지 보여줄 뿐이다.

 

미국 쇠고기 정도 사안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나? 쇠고기보다 더한 폭탄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데. 교육과 의료의 시장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등등….

 

국민들의 눈에서 시대의 흐름을 오랫동안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이 시도할 일은 한 가지다. 시대의 흐름을 진짜로 뒤집어놓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의 절박함만으로는 평화와 민주적 가치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한반도의 긴장을 최대한 격화시켜 놓아야만 독재시대 억압 체제의 복원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쓰다가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너무 비현실적인 '음모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어쩌랴, 워낙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하려면 비현실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것을.

 

내가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전임 대통령들이 서명한 남북 간 조약들을 이명박 정부가 이행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조약 내용 중에 국익을 위해 도저히 승계할 수가 없는 것이 있다면 재협상이든 추가 협상이든 요구할 일 아닌가. 뉴라이트 일각의 주장처럼 북한을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조약 파기를 선언할 일 아닌가. 취임 반년이 넘도록 조약 내용을 준수할 뜻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칙을 유도하기 위한 고의적 더티 플레이가 아니면 무엇인가?

 

사장이 바뀐다 해서 법인체 회사가 맺은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온 나라가 들끓는데도 국제 신인도를 핑계삼아 미적거리더니, 강한 상대에게 굽실거리고 약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신인도 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 '악의 축'을 이용해 가공의 긴장 상태를 일으킴으로써 군사 정책을 편의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 신인도는 크게 훼손되었다. 클린턴도 탄핵 위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공습을 재개해 군사 정책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지탄을 받은 일이 있지만, 부시가 벌인 짓에 비하면 약과 중의 약과다. 10년 전에 비해 미국의 '깡패국가(rogue state)' 이미지는 매우 선명해졌다.

 

그런 부시 행정부도 설거지 단계에 접어들어서는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상식을 많이 되찾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미국과 함께 가장 북한에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던 일본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모두가 긴장 완화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홀로 경직된 태도를 지키고 있다. 긴장 지속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의 정부가 맞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남북 관계의 긴장 상태의 지속 내지 격화를 바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미국이 세계의 군사적 긴장을 키우는 군사 정책을 취한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빈부 격차를 늘려 제로섬게임의 한계를 최대한 확장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사회적 자유를 제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이런 소모적 정책을 택한 것은 파탄의 순간까지 강자의 입장에서 단물을 뽑아먹을 수 있는 이점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 가깝고 긴장 완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부적절한 정책이다.

 

그런 부적절한 정책을 '경제 살리기'라고 다수 유권자가 밀어주었으니, 경제는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시라. 환율 시장 개입, 몰상식하게 해도 괜찮다. 시장화도 좋고 민영화도 좋고 대운하도 좋다. 그러나 제발 대북관계만은 근시안적인 장삿속으로 망쳐놓지 말기를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재작년 가을에 쓴 <뉴라이트 비판>의 한 대목이다. 오늘아침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어느 분이 붉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을 인용해 놓고 “마치 오늘을 예언하고 쓰신 것 같다”는 논평을 붙여놓았다.

 

그렇다. 그 시점에서도 현 정권이 움직이려는 방향은 눈에 훤히 보였다. 내 눈에만 훤히 보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는 대로 적으면서도 나는 그것이 “비현실적 음모론”에 그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상상했던 최악의 사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이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든가,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든가 하는 상식적인 얘기를 되풀이하기도 귀찮다. 나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일을 아무도 막지 못하고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이 내게는 더 큰 걱정이다.

 

1987년 항쟁에 앞장섰던 “정치적으로 중도적이고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시민 계층”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사회의 상태에 근본적인 불만을 가진 ‘진보주의자’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불만은 없으면서 크게 잘못되는 일을 막으려는 ‘개량주의자’의 역할이 요긴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큰 변화를 바라는 진보주의자는 지금의 체제가 망가져버리기를 바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음으로써 변화의 필요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나는 보수주의자며 개량주의자다. 진보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보수의 파탄을 통해 진보의 독재에 빠지기보다 진보와 보수의 생산적 경쟁을 바라기 때문에 개량주의자인 것이다. 지금의 체제를 가능한 한 정상적으로 운용하면서 바람직한 진보의 방향을 이 사회가 선택할 수 있기 바란다.

 

“남북관계는 말아먹더라도 경제만은...” 1987년 이 나라를 파탄에서 건져낸 ‘시민’들 중에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라는 사실을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노후 보장, 아이들 교육, 취직 문제, 어느 한 가지 일을 생각해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금강산도 식후경이야.”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가 간다.

 

계량적, 미시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는 경쟁에서 이기기 힘든 세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경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경쟁의 틀이 지켜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 1987년 6월이 그런 상황이었다. 군사독재가 무리하게 계속되어서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여건 자체가 너무나 크게 훼손되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크게 바뀔 것을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경쟁을 위한 개인적 노력을 잠시라도 접어놓고 사회의 틀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남북관계 악화는 23년 전 군사독재의 연장보다도 우리 사회에 더 큰 위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남북관계 악화가 북한의 도발에 앞서 현 정권의 획책의 결과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 아닌가? 나는 한국 ‘시민’ 계층이 정의를 위해 개인적 이해관계를 도외시하고 어떤 행동에든 나설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23년 전에 이 사회의 위기를 직시했던 것처럼 지금의 위기를 직시하기 바랄 뿐이다. 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23년 전의 성과마저 잃어버릴 상황에 우리는 서 있다.

 


 

Posted by 문천


경고

대서양 항해에 나서려는 여행자들께서는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영국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 인근 해역이 전쟁 수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제국 정부의 공식적 경고가 있었던 것처럼 영국이나 그 동맹국 선박은 이 해역에서 공격 대상이므로 이 해역에서 영국이나 그 동맹국의 배를 타고 여행하시는 분들께서는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셔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워싱턴 D.C. 독일제국 대사관1915년 4월 22일


1915년 4월 22일 주미 독일 대사관에서 미국 여러 신문에 올린 광고다. 몇 신문에는 그 바로 옆에 5월 1일 루시타니아 호의 출항을 알리는 영국 큐나드 해운회사의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3만 톤급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는 5월 1일 예정대로 뉴욕을 출항했다. 1257 명의 승객과 702 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엿새 후 이 배는 아일랜드 남해안에서 11 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승선자 중 1198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의 수색작업으로 289 구의 시신만을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65 구는 신원조차 확인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사상 손꼽히는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민간인의 대량살상은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영국 정부와 군부는 국민의 적개심을 격화하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 공격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선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어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민간 여객선에 대한 경고 없는 어뢰 공격은 물론 부당하고 잔인한 일이다. 당시 국제 전쟁법으로 통용되고 있던 헤이그 협약(1899, 1907)도 여객선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다른 민간 선박에 대해서도 승선자를 대피시킨 뒤에야 침몰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루시타니아 호 공격은 역사상 인간이 해 온 짓 중 제일 나쁜 짓의 하나라고 굳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나쁜 짓이 악마 같은 U-보트 함장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발터 슈비거 함장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런 판단이 내려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져 있었다. 이런 참극이 다시 일어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슈비거 함장의 능력과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가 처해 있던 조건을 검토하는 것이 더 요긴한 일이다.


기본 문제는 헤이그 협약을 악용하려는 술수 때문에 협약이 사문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루시타니아 호만 하더라도 필요시 무장상선(AMC Armed Merchant Cruiser)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건조와 운영에 영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던 배였다. 함포를 탑재할 포좌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몰 당시에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런 종류의 배가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무차별 공격에 나선 조치에도 방어적인 측면이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해상 운송을 봉쇄하기 위해 1914년 11월부터 북해 전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민간 선박의 운항을 통제하고 있었다. 1915년 2월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한 것은 이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특히 자국 상선들이 중립국의 위장 국기를 달도록 한 영국 해군본부의 1915년 1월 31일 명령이 독일을 자극했다.


2월 4일 독일 해군이 전쟁 수역을 선포하고 2월 18일부터 무차별 공격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발표한 직후인 2월 10일에 영국 해군이 자국 상선들에게 내린 명령은 더욱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이 갑자기 전방에 나타나 적대적 태도를 보일 때는 전속력으로 항진해 들이받으라”는 것이었다. 열흘 후에는 선제발포를 권장하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영국 해군의 명령과 지시는 비밀로 내려졌지만, 독일 해군에게 바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헤이그 협약을 무력화시키는 명령과 지시였다. 아무리 민간 상선이라 하더라도 공격력을 가진 선박 앞에 잠수함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통보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니까. 큐나드 해운회사가 당시 루시타니아 호 선장에게 독일 잠수함을 들이받을 경우 상금을 약속했다는 사실도 후에 밝혀졌다.


‘U-보트’라는 말이 영어권에서는 독일의 공격형 잠수함을 일반 잠수함과 구별해서 가리키는 말로 쓰였지만, 독일에서는 ‘Untersee-Boot’가 모든 잠수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차 대전 및 2차 대전에 쓰인 독일 잠수함은 공격 기능에 절대적 비중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일반 잠수함과 다른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적군에게 적발되기만 하면 소형 화기로도 파괴될 수 있는 방어 기능의 취약성 때문에 모험성이 매우 강한 무기였다. 공격력이 크고 방어력이 약한 이런 무기의 존재를 헤이그 협약 때 의식했다면 민간 선박의 보호를 위해 더 실효성 있는 규정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슈비거 함장의 U-보트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도 참극을 빚어낸 판단에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잠수함은 아일랜드 서쪽 해역의 임무를 마치고 귀항하는 참이었다. 연료도 많지 않고 어뢰도 딱 한 발 남아 있었다. 운명의 날 우연히 루시타니아 호와 마주쳤을 때 루시타니아 호는 깃발도 올리지 않고 배 이름도 물감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며칠 전 조그만 화물선과 마주쳤을 때는 공격을 미리 알려 선원들이 구명정으로 옮겨 탄 뒤에 어뢰를 발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에 위험이 너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경고 없이 마지막 어뢰를 발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 방의 어뢰로는 통상 기대하기 힘든 참혹한 결과가 일어났다. 어뢰 폭발에 이어 또 한 차례 더 큰 폭발이 일어난 뒤 루시타니아 호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3만 톤급 배가 수면 밑으로 사라지는 데 십여 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48 척의 구명정이 대기상태에 있었는데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져서 제대로 내려진 것이 여섯 척뿐이었다. 선장은 배를 멈추려 했지만 기계 파손으로 동력을 끊을 수 없어서 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고속 항진을 계속, 침몰을 빠르게 하면서 안전한 하선을 더욱 어렵게 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극은 어뢰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울려 빚어낸 것이었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놓고 손해배상 소송이 벌어졌다면 꽤나 복잡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어뢰를 발사한 U-보트와 독일 해군의 책임이 물론 제일 크겠지만 전적인 책임일 수는 없었다. 두 번째 폭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독일의 전쟁 수역 선포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독일대사관의 공식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 수역으로 운항한 데 잘못은 없는지, 피격 후 계속 항진으로 인명 피해가 늘어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배의 화물 중에 적대행위를 유발할 군수품이 실려 있지 않았는지 등 많은 문제들이 검토되었을 것이다.


손해배상 소송은 없었다. 영국과 독일의 선전전만이 평행선을 그렸다. 선전전에서는 독일이 방어적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독일이었고, 그 결과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것이었으니까.


독일 정부는 루시타니아 호가 무장 상선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기를 싣고 있었으므로 전쟁 행위 중에 피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큐나드 해운은 화물목록을 공개하면서 소총 탄환 4,200 상자(420만 발), 포탄피 1,250 개, 뇌관 18 상자만이 군사물자로서 배에 실려 있었다고 밝혔다. 소총 탄환은 적재를 통제하는 군수품(munition)으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강력한 탄약이 실려 있어서 2차 폭발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독일 측에서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독일 측에 다소나마 유리한 사항이 2차 폭발이었다. 어뢰 공격 자체는 배를 침몰시키더라도 그렇게 큰 인명 피해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참극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측에서는 어뢰가 두 발 발사되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철저한 조사를 통해 결국 한 발뿐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선전전의 백미는 소위 ‘괴츠 메달’이었다. 뮌헨의 메달 제조업자 카를 괴츠라는 사람이 큐나드 해운의 무리한 여객선 운항을 풍자하는 내용의 메달을 만들어 팔았다. 무기를 잔뜩 싣고 가라앉는 배 모양과 함께 “밀수 금지!(Keine Bannware!)”, “장사가 제일(Geschaft uber Alles)” 등 문구를 새겨 넣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든 엉성한 물건이어서 날짜도 5월 5일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이 메달이 1년 후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1916년 5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사진이 실리면서 U-보트 승무원들이 받은 훈장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여기에 주목한 영국 외무성 홍보 책임자 뉴튼 경이 백화점 사업가 해리 셀프리지에게 제안해 복제품을 만들게 했다. 한 개 1실링에 25만 개나 팔린 이 ‘루시타니아 메달’에 딸린 팸플릿에는 이 메달이 독일 국민들에게 기념품으로 뿌려진 것이며, “5월 5일”이란 날짜를 보면 여객선 공격이 사전에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과 큐나드 해운의 책임에 관해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당시부터 불거진 것들이 있었다. 만약 영국이 패전국이 되었다면 새로운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식적 해난 조사위원회의 활동 경위부터 난맥을 보여준다. 1915년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36명의 증인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끈 것은 몇 해 전 타이태닉 호 조사위원회도 이끌었던 머지 경이었다. 위원회 시작 때 해군에서 선장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자료를 조작한 사실이 발견되자 머지 경은 수석검사 F. E. 스미스와 함께 진행을 거부했다. 결국 위원회는 선장에게도, 회사에게도, 해군에게도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이 독일 정부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머지 경이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에서는 개운치 않은 여운이 느껴진다. “루시타니아 사건, 골치 아프고 더러운 일거리였어! (The Lusitania case was a damned, dirty business!)” 머지 경은 이 위원회 활동의 수당 수령까지 거부했다.


루시타니아 호의 선체는 해안에서 약 11 킬로미터, 수심 약 100 미터 위치에 누워있는데도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국 정부가 아직까지도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1995년 아일랜드 정부가 이 선체를 역사기념물로 지정, 탐사작업을 어렵게 만든 것도 영국 정부의 입김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1990년대 초에 탐사작업을 한 어느 잠수부가 뜻밖의 사실을 터뜨렸다. 선체에 구멍이 펑펑 뚫려 있고 부근 일대에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인근 어민들은 1950년대 어느 시점에서 해군 함정들이 두 주일 동안 부근을 맴돌고 많은 폭발음이 들렸던 사실을 기억했다. 작년 2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보물찾기 Treasure Quest> 시리즈 중 “드러난 루시타니아”란 제목으로 무인 잠수정의 촬영을 방영한 일이 있는데, 그 화면에도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분명히 나타났다고 한다. 1915년에 머지 경을 괴롭힌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난 사고는 지상의 사고에 비해 명확히 밝혀지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다. 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명확한 해명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관계자들끼리 전쟁 같은 대립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각자의 극한적 주장에만 매달리고, 그 어느 것도 입증과 반증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통로가 될 뿐이다. 어느 사고에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상식은 무시당한다.


나는 지난 주 발표된 천안함 관계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 그 발표 내용과 다른 사실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이라고 우기는 증거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루시타니아 호를 둘러싼 선전전과 같은 소통 거부의 의지만 보이기 때문이다.


설령 북한의 공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안보와 관련해 그보다 더 중요한 많은 사실들이 얽혀 있는 사건이다. 왜 음파탐지기(소나)가 작동하지 않았는가? 이 하나의 질문만 하더라도 호전적인 이웃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안보에 더 절실한 문제다. 그런 수많은 문제들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북한 책임으로만 덮어버리려 하는 현 정권의 선전전을 나는 경멸한다. 영국 선전전처럼 효과라도 있을 만하면 미워하기나 할 텐데, 경멸밖에 안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