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도양에 유럽인의 선단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97,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였다. 149778일 리스본을 떠난 네 척의 배는 1216일 남아프리카의 동남해안, 10년 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도달한 지점을 지나 인도양에 들어섰다. 동아프리카 해안을 북상해 414일 말린디(Malindi, 케냐의 항구도시)에 도착한 다 가마는 아랍인 항해사를 고용해서 인도의 칼리쿠트(Calicut, 지금의 Kozhikode)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424일 말린디를 떠나 520일 칼리쿠트에 도착했으니 매우 순조로운 항해였다.

 

거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가져온 상품도 예물도 현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푸대접을 받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829일에 서둘러 칼리쿠트를 떠났다. 바람이 맞지 않을 때 억지로 떠났기 때문에 20여 일에 건너간 항로를 100여 일 걸려 아프리카 해안까지 돌아오는 동안 선원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들 중에도 괴혈병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한 척의 배를 버리고 두 척만으로 귀로에 나서서 14997-8월에 포르투갈에 돌아왔다.

 

다 가마 자신은 이 항해를 실패로 생각한 것 같다. 그의 항해일지는 서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1499425일에 중단되는데, 그 직후 다 가마는 배 한 척을 먼저 귀국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산티아고 섬에서 병이 위중해진 동생을 돌보겠다며 마지막 배까지 부관에게 맡겨 귀국시켰다. 선장으로서나 함대 사령관으로서나 어울리지 않는 이 행동은 실패의 책임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막상 그가 몇 주일 후 다른 배에 편승해 리스본에 들어왔을 때는 열렬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교역을 벌이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주워오다시피 한 약간의 화물이(후추 등) 대단히 값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170명 가운데 55명이 살아 돌아온 이 항해를 성공으로 여겼기에 인도에 원정대 파견하는 것이 포르투갈의 연례 사업이 되었을 것이다. 1500년 출항한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는 칼리쿠트에 가서 협정을 맺고 상관(商館, factory)을 열었지만 곧 토착 상인들과 분쟁이 일어나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 카브랄은 이 사태를 현지 군주의 책임으로 돌려 항구의 배들을 약탈하고 수백 명을 살육하는 등 유럽 기독교인의 위엄을 떨치고 돌아왔다.

 

다 가마와 카브랄 이래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은 현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번스틴은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시아의 교역 세계가 ‘평화의 낙원’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인들이 관세를 지불하고, 현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고, 해적의 활동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만 한다면 인도양은 ‘자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가 해상운송을 통째로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상인들에게나 군주들에게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1498년 어느 날 전투태세를 완비한 바스코 다 가마가 칼리쿠트 항구에 들어서면서 이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인도양에 유럽인이 나타났을 때 그 해상전투력이 현지인을 압도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150923일의 디우 해전(Battle of Diu)이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해권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였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디우 포구에서 벌어진 이 해전은 현지세력과 포르투갈인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오토만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이 함대를 보내 구자라트 술탄과 연합함대를 만들었고, 베네치아도 많은 지원을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중동 지역을 거치는 기존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의 해로 개척을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양측 모두 카라크(Carrack)가 주력선이었다. 카라벨(Caravel)에 이어 개발된 카라크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대포를 적재하기 좋은 구조여서 카라벨과 함께 대항해시대 초기의 주역이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지중해에서 계속되는 접촉과 충돌을 통해 대포도 카라크도 이슬람세계에 잘 보급되어 있었다. 디우 해전에 동원된 카라크는 현지세력이 10, 포르투갈이 9척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가 포르투갈 측의 완승으로 끝난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함선과 대포의 우열보다 임전 자세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투의 준비와 진행 과정을 보면 포르투갈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점이 제일 눈에 띈다.

 

 

2.

 

양측의 임전태세가 왜 이렇게 달랐을까? 포르투갈 측이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상황에 처해 있던 사실부터 생각해야겠다. 다 가마의 제1차 원정대의 170명 중 55명이 살아 돌아온 사실을 앞서 말했다.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 역시 13척의 배 중 6척만이 돌아왔다. 이 시기 장거리 항해에 나선 유럽인 중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숫자보다 폭풍이나 괴혈병의 희생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몸 사린다 해서 살아 돌아갈 희망이 크지 않고, 돌아가기만 하면 팔자를 고칠 소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하나의 대륙으로 알고 있지만 유럽인에게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이남(Sub-Saharan Africa)’이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로코에서 이집트까지 지중해에 면한 지역과 홍해에 면한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까지는 유럽인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곳이었다. 이슬람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남쪽으로 사막 너머에는 산업이 미개하고 정치조직이 느슨한 광대한 초원과 열대우림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아프리카대륙의 중-남부에 농업문명 전파가 늦었던 까닭은 다이아몬드가 <Guns, Germs, and Steel , , > 179-180쪽에서 설명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포르투갈에게 적대적인 지역이었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곳이었고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었다. 반면 사하라이남 지역은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었다. 15세기 중엽에 포르투갈인은 서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했다. 서아프리카는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등 이름이 붙은 것처럼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곳이었다. 오랫동안 사하라사막의 대상(隊商)을 통해 다량의 황금과 노예를 이슬람권에 공급해 온 이곳에 포르투갈이 해로를 뚫으면서 해상활동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까지는 이슬람권의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초원지대(sahel)를 넘어 열대우림부터는 이슬람도 아직 침투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링컨 페인은 <The Sea and Civilization 바다와 문명> 387쪽에 아프리카 남부 지역 진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슬람의 영향과 아랍어 사용자가 있는 지역을 넘어서면 항해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보 수집에 지장이 생겼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이 대륙 남단을 돌아 동아프리카의 아랍어 사용 지역에 도달할 때까지 이 문제가 계속되었다. 언어 소통이 안 되고 참고할 만한 현지인의 연안항해 경험도 없는 지역에서 14세기 후반 내내 포르투갈인의 활동이 확장되기 어렵다가 인도양에 들어서자 확장이 빨라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는 이슬람 항구도시들이 적도 이남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아프리카를 돌아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다 가마 함대는 모잠비크에서 이슬람권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무슬림을 가장하고 현지 군주에게 접근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권에 들어와서는 이용할 만한 틈새를 찾을 수 있었다. 케냐의 몸바사(Mombasa)에서는 쫓겨났지만 몸바사와 적대관계에 있던 인근의 말린디에서 인도양 횡단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1487년 디아스의 항해 이래 포르투갈 원정대는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사이를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신 서남쪽으로 남대서양 깊이 들어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500년 카브랄의 함대는 이 항로를 예정보다 서쪽으로 벗어나는 바람에 뜻밖에 브라질에 상륙하게 되었고, 후에 스페인이 독점하는 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차지하는 단초가 되었다.

 

남대서양을 크게 우회하는 이 항로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로보다 거리는 멀지만 당시의 범선 항해에 적합한 조건이어서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에 큰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위험이 큰 항로였다. 다 가마 함대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레온을 떠난 후 90여 일 만에 남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 기간이 괴혈병의 한계선이었다.

 

괴혈병은 30일 이상 비타민C 공급이 끊기면 증세가 나타날 수 있고 90일 이상이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렇게 긴 기간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은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귤류 섭취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널리 확인되어 영국 해군에서 제도화된 것은 179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3백년간 약 2백만 명의 선원이 괴혈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 함대가 선상에 채마밭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남대서양 항로는 풍랑도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난파의 위험이 컸고, 일정이 조금만 길어지면 괴혈병의 위협이 크게 늘어났다. 인도양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줄어들었다. 그 위험을 뚫고 인도양에 들어선 포르투갈 선원들이 어떤 상황에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로 임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인도양 사정에 익숙해진 후 포르투갈인들이 본국과의 무역보다 현지의 중계무역에 더 힘을 쓰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3.

 

인도양 진입 초기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다 가마였다. 1502년 제4차 포르투갈 원정대를 이끌고 갔을 때 특히 엽기적인 소행이 많이 전해진다.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는 짓이 예사였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칼리쿠트 군주가 사절로 보낸 승려를 첩자라 하여 혀와 귀를 자르고 개의 귀를 꿰매 붙여 돌려보낸 일이다. 4백여 명 순례자를 태운 배를 바다 한가운데서 나포해 참혹하게 약탈한 다음 사람들이 탄 채로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다.

 

테러리즘은 전쟁에 늘 이용되어 온 전술-전략이다. 문제는, 인도양의 현지인들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러 들어온 것이다. 디우 해전의 경위를 봐도 현지세력의 상황 인식이 허술했다. 이집트와 오토만이 함대를 보낸 것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한 기존 교역로가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우 항구의 장관은 두 길 보기를 했다. 이집트-오토만 함대에 협조하는 시늉만 하다가 포르투갈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얼른 발을 빼고 잡아둔 포로를 바로 반환했다. 디우 입장에서는 포르투갈 배든 무슬림 배든 교역이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레반트 지역 침공 때도 대다수 현지세력은 이슬람-기독교의 대립의식 없이 미시적 득실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십자군에게 틈새를 만들어주었다. 당시의 무슬림에게는 이교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면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큰 압력을 일으키고 수십 년이 지나자 비로소 전면적 항전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인도양의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 세력이 짧은 시간 내에 항로의 주요 거점들을 모두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어느 항구에도 성곽 등 견고한 방어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고 일반 선박의 무장 수준이 낮은 이유도 있었다. 유럽인의 교역활동에는 무력이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에 선박도 항구도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인도양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약간의 해적이 있었지만 선박을 납치해도 적정선의 몸값을 요구하는 정도로, 적극적인 토벌의 필요성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양의 교역은 많은 이득을 창출하는 사업이었고, 상인과 무역업자들도, 항구를 관리하는 공권력도, 간간이 끼어드는 해적들도, 이 교역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교란시키는 일 없이 자기 몫을 누리며 지내고 있었다. (차우두리는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5장에서 인도양 일대에 안정된 형태로 널리 자리 잡은 이 교역 패턴을 거점 교역(emporium trade)’으로 설명했다.) 15세기 초에 명나라 함대가 큰 규모의 무력을 싣고 나타났지만 이 생태계를 교란하기보다는 참여해서 한 몫을 맡는 데 그쳤다. 그런데 그 백년 후에 나타난 포르투갈 함대는 가장 큰 것이 정화 함대의 10분의 1이 안 되는 규모였음에도(인원 기준), 그 힘으로 모든 경쟁세력을 파괴하고 교역을 독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인도양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악질 해적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인도양의 교역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포르투갈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했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는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에서 여러 연구자의 분석을 종합, 16세기에 말라바르(인도 서해안) 지역산 후추 중 30%만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그중에도 절반은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레반트 지역을 통해 수송되었다고 밝혔다. (157) 인도양 향료 교역무대에서 포르투갈의 몫은 20%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가타 보세도 <A Hundred Horizons 1백 개의 수평선>에서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유럽세력)이 인도양 교역체계를 바꾸기보다 그에 적응하여 편입된 것으로 보았다.

 

“16-17세기 유럽인의 인도양 초기 진출이 그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통합성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무너트렸는가? 포르투갈인이 무장교역의 새로운 형태와 해상주권이라는 낯선 주장을 인도양 해역에 들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세기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파트너십의 시대’ 또는 인도와 인도양에서의 ‘억제된 분쟁의 시대’로 해석된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역사의 연구를 통해 경제적-사회적 쇠퇴라는 단순한 관점은 부정되었다.” (19쪽)

 

포르투갈인은 향료의 유럽시장 공급만을 생각하며 인도양에 들어왔고, 처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 무력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현지 사정에 익숙해지면서 그보다 위험이 적으면서 수익성이 높은 사업 영역에 눈뜨게 되었다. 폭풍과 괴혈병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복에 2년씩 걸리는 본국과의 교역보다 아시아 각 지역 사이의 중계무역이 더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1540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은 그 결과였고, 현지 여러 세력과 거래관계를 맺으면서 무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태도도 얼마간 바뀌게 되었다.

 

 

4.

 

차우두리는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에서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활동을 하나의 해상제국으로 규정하면서 그 역사를 세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65-67) 1515년까지의 개척기에는 그 지역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허를 찔린 상태에서 중요한 항구 여러 곳을 삽시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말라바르 해안의 고아(Goa)에 인도총독부(Estado da India)가 자리 잡은 후 1560년까지 전성기는 항로의 독점이라는 애초의 목표에 상당히 접근한 시기였다. 요새화된 일련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정기적으로 항로를 시찰하는 포르투갈 함대에 정면으로 맞설 다른 해상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도양을 항해하는 대부분 상선이 포르투갈인의 통제를 받았다. 인도총독부의 제1 과제는 유럽 시장을 향한 경쟁 노선인 중동 방면 교역의 봉쇄였다. 이 과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유럽 시장에서 향료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60년 이후 쇠퇴기의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차우두리는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인의 도전에 의해 항로의 독점이 약화된 것이다. 말라카해협을 장악한 포르투갈세력을 피해 순다해협(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을 무슬림상선이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그 거점이 된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술탄국이 강력한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무슬림상선이 중동 지역을 통해 지중해로 보내는 향료 때문에 유럽의 향료 가격이 떨어지고 포르투갈의 이익도 줄어들었다.

 

차우두리가 지적하는 또 하나 포르투갈 세력 쇠퇴기의 변화는 포르투갈 선단의 현지 교역 참여 비율이 커진 것이다. 중심 상품인 향료만 하더라도 유럽의 소비는 세계시장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도양의 해상교역에서 향료는 많은 상품 중 하나일 뿐이었다. 동아프리카,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주변 여러 지역 사이의 교역이 항로의 장악력을 확보한 포르투갈에게 갈수록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사업의 입체화라는 점에서 발전의 의미도 있는 변화였지만 참여자의 다변화라는 점에서 경쟁의 격화를 불러옴으로써 네덜란드와 영국 등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쉽게 해주는 조건이 되었다.

 

포르투갈인은 1513년부터 중국 연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40년 동안 교역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해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554년에 교역 허가를 받고, 3년 후에는 마카오 기지의 임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 포르투갈인의 중국 교역이 공식화된 데는 일본과의 교역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인은 1543년에 일본 교역을 시작했고, 1550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 고아와 나가사키(長崎) 사이의 운항이 시작되고, 마카오에 기항하게 되었다.

 

고아와 나가사키 사이를 운항한 배는 카라크였는데, 처음에는 5백 톤급 배가 다니다가 점점 커져서 1천 톤급이 다니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처음 보는 이 큰 배를 구로후네(黑船)’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은 ()의 배(nau da prata)'라 불렀다. 일본에서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별명이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아메리카의 거대 은광이 가동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고, 이 시기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3분의 1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51이었는데 유럽에서는 121이었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권력과 풍요> 214-216) 중국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외국상품은 많지 않았는데, 은 하나만은 거의 무한정의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제 시기에(1522-1566) 왜구 활동이 늘어난 것도 일본의 은 생산 급증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포르투갈인이 왜구 대신 중국의 은 공급을 맡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은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원인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의 팽창에 따라 화폐 유동성의 수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경제학자들의 설명도 알 듯 말듯하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명-청 시대의 중국에 막대한 양의 은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중국의 우월한 생산력이 뒷받침하는 수출초과 현상이 은의 수입으로 채워지면서 이 기간 동안 유지된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 은의 세계적 이동 상황은 핀들레이와 오루어크의 위 책 212-226쪽에 개관되어 있다.)

 

중국의 은 수요가 이끌어낸 또 하나의 현상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를 연결한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이다. 초기 대항해시대의 주역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494년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어 대서양 상의 어느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역으로 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는(브라질 제외) 스페인,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의 몫이 되었는데, 스페인은 동쪽 끝의 향료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젤란의 항해(1519-1522) 이래 아메리카로부터 아시아에 진입하는 길을 찾아 태평양 항해를 시작했고 결국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었다. 1560년대에 태평양 항로가 안정되면서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 상선의 왕래가 잦아졌고, 아메리카의 은과 중국의 비단이 그 주된 교역품이었다.

 

 

5.

 

흉노제국이 진-한 통일과 동시에 나타난 이유를 생각하다가 그림자 제국의 개념을 떠올리고 무척 흡족했었다. 자체 동력에 의해서 제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원의 통일에 따른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의 결과로 흉노제국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흥기에서 쇠퇴까지 흉노제국사의 굴곡이 잘 설명되는 해석이다. 내 공부가 깊지 않은 영역에서는 독창적인 생각을 내놓기가 조심스럽지만, 이 개념은 설명력이 좋아서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The Shadow Empires: imperial state formation along the Chinese-Nomad frontier 그림자 제국: 중국-유목세계 접경에서 제국체제의 형성이란 제목의 토머스 바필드의 논문이 있다는 사실을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 (수전 앨코크 등 엮음, <Empires 제국>(2001) 소수) 그의 1989년 책 <위태로운 변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개념인데 그 사이에 다듬어낸 모양이다.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다. 내가 직접 연구하는 영역에서는 독창적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지만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독자들에게 설명해드리는 작업에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면 헛것을 본 것이기 쉽다. 그래도 이번 작업에서는 학계에서 융화되어 있지 않은 여러 영역에 걸친 주제를 다루려니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꽤 있다.

 

논문을 읽어보니 발표 후 20년이 되도록 널리 파급되지 않은 (그리고 본인의 후속 연구도 보이지 않는) 까닭을 알 듯하다. ‘그림자 제국의 특성을 너무 넓게 일반화하려 한 것 같다. 바필드는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반사형 제국(mirror empires)’, ‘해상-교역 제국(maritime trade empires)’, ‘포식형 제국(vulture empires)’, ‘추억의 제국(empires of nostalgia)'의 네 개 유형을 포괄하려 했는데, 이 유형들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 보인다.

 

포식형 제국추억의 제국은 지속성이 약하다. 제국의 해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포식형 제국의 사례로 요, , 청 등 만주세력이 세운 왕조들을 예시하는데, 그 왕조들은 이른 단계에서 본격 제국(primary empires)’의 틀을 갖추었으므로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머무른 것은 짧은 과도기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흉노, 돌궐 등이 포함되는 반사형 제국그림자 제국개념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추어 해상-교역 제국에 관해 생각할 점이 많이 있다. 서양 고대의 페니키아와 아테네, 근세의 포르투갈 해상제국과 대영제국 등 해상제국의 이름이 그럴싸한 현상이 많이 있었다. 중세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도 이 범주에 들어갈 것 같다.

 

본격 제국그림자 제국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생산력의 자족성(autarchy) 여부에 있다. (바필드는 본격 제국의 조건으로 (1) 다양성의 포용, (2) 교통수단, (3) 통신수단, (4) 폭력의 독점, (5) 통합의 이념을 꼽았지만, 생산력의 자족성이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생각된다.) 상업세력의 해상제국은 유목민의 초원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조직의 유지에 필요한 기초자원을 생산력을 가진 주변의 정착사회로부터 취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상제국은 몇 가지 초원제국과 다른 조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자원 취득의 기본 수단이 초원제국에게는 무력인데 해상제국에게는 교역이다. 해상세력에게는 항구의 범위를 넘어 육지를 공략하고 점거하는 데 적합한 무력이 없으므로 교역의 이득을 제공해야 필요로 하는 자원을 취득할 수 있다. 해상세력의 무력은 해상의 경쟁세력을 상대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둘째, 초원제국이 한두 개 본격 제국에만 의지해 성립-유지되는 반면 교통로가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상제국은 여러 개 육상세력과의 거래관계를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상세력에게 교역의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문턱이 낮아서 해상제국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조건도 된다.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해상제국이 상당 기간 유지된 것은 본국의 국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지의 교역 조건에 잘 적응한 결과였다. 무장 함대에 의한 공격적 항로개척은 현지의 잠재적 교역 수요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교역의 이득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1540년대부터는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생산이 늘어난 은을 중국과 인도 등 생산력이 높은 지역에 유입시키는 사업에 앞장섬으로써 교역의 주도권을 지킬 수 있었다. 17세기 들어 인도양의 현지세력 아닌 네덜란드와 영국 등 다른 유럽세력이 이 해상세력의 경쟁자로 부각된 데는 아메리카 은의 유럽 공급이 크게 늘어난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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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29 04:10

    유료로 읽어야 할 글을 무료로 감사히 읽었습니다. 우문이 하나 있습니다.

    "해상제국은 여러 개 육상세력과의 거래관계를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상세력에게 교역의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문턱이 낮아서 해상제국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조건도 된다."

    경쟁 문턱이 낮아지는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잘 이해하고 싶은데 압축을 조금만 풀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 2021.07.29 19:39 신고

      공짜로 읽어주셔서 감사~ 제가 돈 내면서라도 여러분께 읽히고 싶은 글인데~ ^^
      지적하신 대목은 확실히 설명이 친절하지 못했네요. 경쟁에 진입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으로 해상세력에게는 쉬운 일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육상세력에 비해 기술과 문자의 이동과 전파가 쉽기 때문이지요. 열린 시스템의 해상세력과 닫힌 시스템의 유상세력 사이의 대비는 앞으로도 몇 번 나올 것 같으니 이 대목에서는 그 정도로~

 

 

1.

 

근세 동아시아 3국의 대외정책을 쇄국(鎖國)’개항(開港)’으로 구분하는 담론이 오랫동안 펼쳐졌다. 이 담론은 19세기 중-후반 서방세력의 개방 압력이 닥쳤을 때 개방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이 꺼낸 것이다. 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 부정적 느낌을 주는 쇄국이란 이름을 씌운 것인데, 이 말은 19세기 초에 일본에서 나타난 것이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그 전의 개방 억제 정책은 해금(海禁)’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쇄국이란 말은 대외관계의 맹목적 봉쇄를 떠올리게 하는데, 실제 해금정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대로 대외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되 국가의 통제안에서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길든 현대인에게는 국가의 통제자체가 안 좋은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국가라는 것이 원래 통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질서에 대한 위협 요소라면 국내의 것이든 국외의 것이든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명나라는 중국의 왕조 중 해금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시행한 왕조였다. 개국 초에 홍무제가 해금정책을 확고하게 세웠고, 왕조 끝까지 유지되었다. 목종(穆宗, 1566-1572) 때에 이르러 해금이 완화된 것을 융경개관(隆慶開關)’이라 하여 개방정책으로의 선회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결과일 뿐 능동적인 전환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락제의 정화 함대 출동도 해금정책을 뒤집은 것이 아니었다. 함대 건설 착수와 동시에 민간의 해선(海船) 건조를 금지하며 기존의 해선도 원양항해가 불가능한 형태로 개조할 것을 명령했다. 정화 함대는 대외교섭을 국가가 독점한다는 의미에서 해금정책의 가장 적극적인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이후 해로를 통한 중국의 무역은 꾸준히 늘어났다. 당나라는 661년 이후 광주(廣州)를 비롯한 몇 개 항구에 해운을 관장하는 관서를 설치했고 송나라는 1107년에 이 관서들을 시박사(市舶司)라는 이름으로 정비해서 운영했다. 1220년대에 천주(泉州) 시박사 제거(提擧)를 지낸 조여괄(趙汝适)이 남긴 <제번지(諸蕃誌)>에 실려 있는 광범한 지리정보에서 시박사의 폭넓은 활동 범위를 알아볼 수 있다. 두 권으로 된 <제번지>의 상권에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은 물론 지중해 연안까지 여러 지역의 지리와 풍속이 적혀 있고 하권에는 그 지역의 물산과 자원이 기록되어 있다.

 

1370~1374년 시박사 철폐는 명나라 출범 후 첫 정책의 하나였고 해금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종래의 시박사는 다른 행정기구와 어울리지 않는 하나의 특수기관으로 운영되어 왔다. 철폐에 따라 그 기능을 예부(조공 관계), 호부(재정 관계)와 지방행정관서(질서 유지)로 넘긴 것은 행정조직의 이념적 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정비였다. -송 시대에 크게 늘어나는 해외무역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만든 시박사는 <주례(周禮)>에 명기된 유가 원리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고 관련된 이권 때문에 물의가 잦았다. 홍무제는 유가 이념을 표방한 왕조를 세우면서 이념적 근거를 갖지 못한 시박사를 없앤 것이다. 이 조치에는 해외무역의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농본(農本)국가의 틀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해외무역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명나라는 농본의 원리를 굳게 지켰다. 그러나 경제 발전에 따른 산업의 고도화는 국가정책으로 틀어막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주례>가 작성된 시대에 비해 제조업과 상업의 비중이 크게 자라나 있어서 농본국가의 틀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해외무역이 특히 두드러진 문제를 일으킨 것은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해외 상황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의 해외활동 증가는 해외 화교(華僑)사회의 생성에 비쳐져 나타난다. 중국 밖의 여러 지역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이 소략하고 각국의 집계를 모으기 어렵지만 근년의 연구로 윤곽이 밝혀지고 있다. <바이두백과>华侨항목에는 해외 화교의 인구가 송나라 때 10만 명 선, 19세기 초 청나라 중기까지는 100만 명 선에 이르고 아편전쟁 후 중국인의 해외 이주가 급증해서 20세기 초까지 1천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어 있다. 거대한 화교사회는 20세기 초에는 민국혁명(民國革命)의 큰 지원세력이 되었고 그 백년 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발판을 마련해 주기에 이른다.

 

 

2.

 

정화 함대는 제1차 항해(1405-1407)의 귀로에 진조의(陳祖義)가 이끄는 팔렘방의 해적을 토벌했다. 진조의는 명나라가 들어선 후 온 가족이 남양으로 나가 해적질을 했다고 한다. 1만 명 무리를 끌고 1백 척의 함대로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주름잡으며 1만 척의 배를 약탈하고 50여 개 항구를 공략했다고 하는 마환(馬歡) 등의 기록은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영락제가 50만 량의 현상금을 내건 역사상 최고의 현상수배범이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진조의 토벌에 협조한 다른 중국인 집단의 존재다.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은 일찍부터 스리비자야(Srivijaya, 三佛齊) 왕국의 중심지였는데 11세기 이후 세력이 꺾여 자바섬의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1397년 스리비자야 왕국 소멸 후 1천여 명 현지 중국인들이 양도명(梁道明)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양도명은 1405년 영락제의 칙서를 받고 입조했다고 하는데,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칙서를 전한 모양이다. 정화 함대의 귀로에 양도명의 수하였던 시진경(施進卿)이 진조의가 꾸미고 있던 음모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토벌할 수 있었다고 하며, 시진경은 그 공으로 선위사(宣慰使)의 직함을 받아 양도명 대신 현지의 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진조의, 양도명, 시진경, 모두 남양 일대의 중국인 집단 지도자였다. 양도명-시진경 집단이 정화 함대의 신임을 얻으며 경쟁관계에 있던 진조의를 해적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보인다. 진조의를 희대의 해적왕으로 그린 것은 양도명-시진경이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진조의 집단이 가진 선박이 십여 척에 불과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남양으로 진출한 중국인 집단에게 해적이 인기 있는 직종이었을까? 동남아시아로 나간 중국인은 대개 상업 아니면 농업에 종사했다. 중국 내에도 아열대작물 재배 지역이 많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품종과 재배기술을 갖고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후일 유럽인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기술이 좋은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메란츠와 토픽,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교역이 빚어낸 세계> 15)

 

상업에 종사한 중국인들은 현지인에 비해 우월한 자본과 조직력, 그리고 중국 시장으로 통로도 가졌기 때문에 유리한 조건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리비자야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위를 위해서도 무장은 필요했고 활동 범위를 놓고 집단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을 것이다. 양도명-시진경 집단과 진조의 집단 사이에도 그런 경쟁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해적의 이름도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시진경의 출신이다. 양도명과 진조의는 광동(廣東) 출신이었는데, 시진경은 항주(杭州) 출신의 무슬림이었다. 진조의는 압송-처형되고 양도명은 조공을 바치러 남경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팔렘방에 남은 시진경이 선위사로 임명받아 그 아들딸까지 그 지역의 노릇을 했다. 중국 출신으로 기술력과 조직력을 가진 위에 종교를 통해 현지인과의 유대관계를 겸비한 것이 그의 역할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해외무역의 대부분은 민간의 불법 사업이 되었고 해적의 창궐을 불러왔다. ‘불법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법외(法外)’ 사업이었다. 부분적,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해적의 행태가 이목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그 배경의 비교적 점잖은 무역 기능이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역 기능의 지속적 존재는 생활양식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후추(胡椒)가 하나의 예다. 명나라 이전에는 후추가 대단한 사치품이었는데 명나라 말까지 그 값이 10분의 1 이하로 떨어져 서민의 부엌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정화 함대가 다량의 후추를 실어오면서 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민간 상인들에 의해 후추의 대량 수입이 계속된 결과였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 134)

 

 

3.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모든 대외무역을 조공무역의 형태로 모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자유무역 원리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조공무역이 미개한 관행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조공무역과 같은 통제무역이 적합한 상황도 있었다. 포메란츠와 토픽은 <교역이 빚어낸 세계> 8-9쪽에서 아스텍제국의 장거리 교역과 지역 내 교역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 사실을 지적한다. 지역 내 교역은 상인과 주민들이 저자거리에서 행하는 것이었지만 장거리 교역은 귀족과 관리들이 궁정에서 행하는 것으로 조공무역과 비슷한 형태였다. 사치품을 주고받는 장거리 교역은 주민들의 일상적 활동과 별개로 행해진 것이다.

 

산업 발전과 사회 분화는 교역량 중가를 가져온다. 지역 간 분업의 진행에 따라 지배계층의 사치품만이 아니라 직물과 공산품 등 서민의 생필품까지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늘어나고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라 운송비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당-송 시대에 국내 교역과 해외무역이 모두 크게 늘어났다. -원 시대에는 민간의 해외무역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지 않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는 해외무역이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정화 함대의 원정은 국가의 무역 통제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였다. 통제할 대상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 함대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보여준다. 왕조 초기에는 재정이 넉넉하다. 종래의 기득권이 척결되고 새로운 기득권은 아직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무제와 당 태종의 적극적 대외정책도 초창기의 재정 여유 위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여유가 사라진다. 20여 년 함대를 운영해 본 뒤 거대한 함대를 유지하는 적극적 해금정책에서 물러서 항구를 지키는 소극적 해금정책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홍무제가 철폐했던 시박사도 영락제 때 ()’의 이름으로 다시 조직되어 조공단의 응접과 사무역의 통제 등 해금정책 집행기관의 역할을 계속했다.

 

국가의 기능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확장되었지만 그 확장이 산술적인 확장이라면 같은 기간 대외교역을 포함한 교역의 확장은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대외교역의 대부분을 조공무역의 틀에 담을 수 있었지만 송나라 이후는 어렵게 되었다. 영락제가 왕조 초기의 기세를 타고 조공무역의 틀을 키우려고 시도했으나 20여 년 만에 한계에 부딪쳤다. 그 후의 해금정책은 국가 통제의 원칙을 겉으로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현실의 변화를 완만하게 받아들이는 길이었다.

 

표방하는 원칙과 수용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가 겉으로 드러날 때 해적(海賊)’의 형태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진조의의 해적을 소탕하고 이에 협조한 시진경을 선위사로 임명해 현지 세력으로 인정했다. 진조의 집단과 시진경 집단 사이에 성격 차이가 컸을 것 같지 않다. 둘 다 유랑해 온 중국인들이 같은 상황 속에서 조직을 만든 것이고 (영락제를 대신한) 정화 입장에서는 그 경쟁 상태를 방치하기보다 어느 한 쪽으로 몰아주는 것이 관리하기에 편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 같다.

 

유럽에서 이 무렵부터 19세기까지 성행한 프라이버티어링(privateering)’을 떠올린다. (‘사략선(私掠船)’이라는 일본식 번역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다.) 대항해시대에서 제국주의 팽창기까지 유럽인의 해상활동에서 화려한 역할을 맡은 사업이었다. 영국만 하더라도 월터 롤리,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 사업으로 명성을 쌓았다. 적국 선박을 나포할 권한을 국가가 민간 사업자에게 부여하는 제도였는데, 실제 운용이 어지러웠다. 해적질(piracy)의 합법화 내지 국가 차원의 해적질로 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국가의 통제력은 해상에서 효과를 일으키기 어렵다. 해상에서는 통제할 대상이 쉽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버티어링은 어차피 통제가 힘든 해상세력의 활동을 억지로 통제하려 드는 대신 국가가 오히려 도와주면서 국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한 제도였다. 시진경이 받은 명나라의 선위사 직함을 유럽의 프라이버티어들이 받은 나포인허증(letter of marque)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4.

 

약탈만 하는 단순한 해적은 그 세력 규모에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모든 육상세력과 적대관계여서 세력이 커질수록 공격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큰 세력을 가진 해적은 육상세력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맺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은 유럽의 프라이버티어가 단적인 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 아래 조공무역의 틀에 담길 수 없는 해외무역은 민간의 법외사업이 되었다. 이 사업의 종사자들은 약탈이 아닌 무역에서 이득을 찾는 무역업자였지만 국가의 법망 밖에서 활동하며 무력을 많이 활용한다는 점에서 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을 단순한 해적과 구별해서 해적업자라 부르고 싶다.

 

해적업자들은 연해지역의 토착세력과 긴밀한 협력관계 아래 활동했다. 이 업자들이 수입한 물품은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그 유통을 위해 육상세력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역활동의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자극하는 약탈 행위는 스스로 삼갔고 따라서 중앙정부도 그 퇴치에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대 해적의 대명사가 된 왜구(倭寇)’의 성격 변화가 해적업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14세기 중엽에 나타난 초기 왜구는 약탈만 하는 단순 해적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일부 지방세력이 해적으로 나서면서 왜구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왜구의 주된 침공 지역은 1차적으로 한반도, 다음으로 산동성 등 북중국 해안지대였다. 그런데 15세기 들어 잦아들었던 왜구가 16세기에 급증하는데, 그 주무대는 중국의 동남해안이었다. 이 후기 왜구의 구성에는 중국인이 다수를 점했다고 한다.

 

후기 왜구의 활동이 남쪽으로 옮겨가고 중국인의 역할이 커진 것은 그 활동 내용이 무역 관계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키피디아> “Wokou" 기사 중 첸 마오헝의 <明代倭寇考略>(1957)에서 인용된 중국 측 왜구 관련기사의 빈도표가 흥미롭다. 명나라 7대 경제(景帝)에서 11대 무종(武宗)까지 72년간(1450-1521) 6개 기사가 나타날 뿐인데 12대 세종(世宗) 때는 45년간(1522-1566) 601개 기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다음 13대 목종(穆宗)14대 신종(神宗)53년간(1567-1619) 나타나는 기사는 34개다.

 

한 황제의 재위기간에 왜구 기사의 대부분이 집중된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떠오르는 추측은 세종, 즉 가정제(嘉靖帝) 재위기간의 왜구 관련 정책에 특이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다음 황제 목종이 즉위 직후 융경개관을 행하자 왜구 기사가 드물어진다.

 

레이 황의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만력 15,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해>에 신종 만력제(萬曆帝, 1572-1620)가 정무를 사보타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신종의 할아버지 가정제가 황제 사보타주의 원조였다. 가정제는 후사를 정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사촌형 무종의 제위를 15세 때 물려받은 후 백부인 효종(孝宗)에게 입양 절차를 밟을 것을 거부하고 자기 생부의 추존(追尊)을 고집하면서 주류 관료집단을 등지기 시작했다. 몇몇 총신과 환관만을 신임하고, 1539년부터 25년간 조회(朝會)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엄숭(嚴崇) 같은 희대의 간신의 발호는 물론이고, 1542년에는 학대를 못 이긴 비빈(妃嬪)들이 황제의 교살(絞殺)을 시도한 임인궁변(壬寅宮變)까지 일어났다.

 

명나라에 시원찮은 황제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정제는 그중에서도 심한 편이었고 게다가 재위기간이 무척 길었다. 가정제의 정치 실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구문제였다.

 

 

5.

 

가정제(이 황제를 세종이라고 부르기 싫은 마음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를!) 시기 왜구에 관한 기록은 분량이 많지만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향된 내용이 많기 때문일 것 같다. 몇 개 인상적인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분위기 파악에 만족하려 한다.

 

1555년 여름에 일어난 가정왜란(嘉靖倭亂)”의 기록은 무협지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53인의 왜구가 80여 일 동안 절강(浙江)-안휘(安徽)-강소(江蘇)) 3성을 휩쓸고 다니면서 4천여 명의 관병을 살상했다고 한다. 그 섬멸전에 참모로 참여한 정약증(鄭若曾)은 이런 말을 남겼다. “8개 군()에 걸쳐 3천리를 돌아다니며 싸우는데 ... 사람을[비무장 민간인] 죽이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지 않고 부녀자를 범하지 않았다. 이렇게 깊이 쳐들어온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53인의 특수부대는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무예의 고수들이어서 통상적인 병력과 전술로는 도저히 막아낼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제2의 황도 남경(南京)에 들이닥치자 천여 명 수비대가 이틀 동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쩔쩔맸다고 한다. 결국 수천 명을 동원한 치밀한 작전으로 겨우 섬멸했다고 한다. (<바이두백과> “嘉靖倭乱”)

 

이 왜구의 정체가 무엇인지, 침공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본 사츠마(薩摩)의 낭인(浪人) 출신 해적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석연치 않다. 정약증 등 당시 사람들은 대거 침공을 위한 정찰대로 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석연치 않다. 어쩌면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석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겨둔 것이 가정제 시기 대 왜구 정책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명말청초의 문학작품에 많이 등장한 해적으로 서해(徐海)와 그 아내 왕취교(王翠翹)가 있다. 일본 규슈(九州)에 근거를 두고 중국 동남해안에 큰 세력을 이룬 서해는 절강-남직예(南直隸, 즉 안휘) 총독 호종헌(胡宗憲, 1512-1565)의 초무(招撫)에 응해 1556년 투항했으나 호종헌은 서해를 용납하는 척하면서 섬멸할 준비를 계속해서 그를 끝내 제거했다.

 

왕취교는 강남의 명기(名妓)였던 여인으로 서해 일당의 약탈 때 잡혀가 서해의 아내가 되었다. 호종헌이 서해를 초무하기 위해 연락할 때 서해의 수준 높은 서신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알고 보니 왕취교가 써준 것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된 호종헌이 왕취교에게 따로 예물을 보내며 서해의 설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해가 죽은 후 그 시신을 예를 갖춰 매장하게 해주고 자신이 여승이 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호종헌이 모두 거부하고 부하 장수의 첩으로 주려고 하자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 수많은 희곡과 소설에 나타나는 왕취교의 모습이다.

 

당대 최강의 해적왕으로 명성을 떨친 왕직(汪直) 역시 호종헌의 초무에 응하다가 1559년에 처형당했다. 왕직은 1553년 관군의 토벌을 피해 일본에 가 있었는데 이듬해 총독에 부임한 호종헌이 그 가족을 옥에서 풀어주고 우대하면서 왕직에게 사람을 보내 초무했다. 왕직은 이를 믿고 무역의 허가를 청하러 절강으로 왔다가 순안사(巡按使) 왕본고(王本固, 1515-1585)에게 체포되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호종헌이 왕직을 꼭 죽이기 위해 속여서 불러온 것 같지는 않다. 호종헌은 당대의 세도가 엄숭의 1562년 실각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자살에 이른 인물이다. 왕직의 무역업을 양성화시켜 주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고자 한 것 같은데, 고지식하기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왕본고가 나서는 바람에 왕직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후반에 잠잠하던 왜구가 16세기 초-중엽 가정제 시기에 폭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가 부실해서 암묵적으로 진행되어 온 해외무역의 틀이 흔들린 데 문제가 있었을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지만, 배경조건의 큰 변화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에 아편이 부각되기 전까지 중국은 대외교역에서 은 먹는 하마였다. 해외의 중국 상품 수요에 비해 중국의 해외상품 수요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수백 년간 계속해서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은의 중국 대량 유입이 시작된 것이 16세기였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이 일본의 구매력을 크게 늘려줌에 따라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주로 펼쳐지고 있던 중국인의 해외 활동이 일본 방면으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https://en.wikipedia.org/wiki/Wokou#/media/File:Een_zeeslag_tussen_Japanse_zeerovers_en_Chinezen.jpg 왜구와의 해전을 그린 18세기 중국 그림.

 

https://en.wikipedia.org/wiki/Gwanggaeto_Stele#/media/File:Koukaidoouhi_hibun02.jpg 왜구라는 이름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 14세기까지 왜구는 악탈 위주였으나 16세기 들어 일본의 은 생산 급증에 따라 무역의 역할이 커졌다.

 

https://baike.baidu.com/pic/%E5%85%AD%E6%A8%AA%E5%B2%9B/4554237/1/b812c8fcc3cec3fdd7750cb6d488d43f869427ad?fr=lemma&ct=single#aid=2237156839&pic=d058ccbf6c81800ad29e6bf0b83533fa838b47d1 가정제 시기 왜구무역활동의 중심지 쌍서(雙嶼)항이 있던 주산(舟山)열도의 육횡도(六橫島).

 

https://en.wikipedia.org/wiki/Zhu_Fan_Zhi#/media/File:%E8%AB%B8%E8%95%83%E5%BF%97%EF%BC%88%E5%9B%9B%E5%BA%AB%EF%BC%89.jpg <제번지> 첫 장의 교지(交趾) 소개. 이 책에는 직접 정보와 간접 정보가 함께 들어있지만 정보의 범위가 대단히 넓으면서 정확성도 상당한 수준으로 인정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Brooklyn_Chinatown.png 브루클린의 차이나타운. 뉴욕은 서양에서 가장 많은 중국인이(90만 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San_Francisco_China_Town_MC.jpg 유서 깊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Chinatown_Melbourne_at_night_in_September_2014.jpg 유서가 덜 깊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차이나타운.

 

https://en.wikipedia.org/wiki/Palembang#/media/File:Bird's_eye_view_of_Palembang.JPG 1682년에 그려진 팔렘방의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Malacca_City#/media/File:AMH-6156-NA_Map_of_the_city_of_Malakka.jpg 1665년경 그려진 말라카의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Malacca_City#/media/File:2016_Malakka,_Budynki_nad_rzek%C4%85_Malakka_(23).jpg 중국풍과 포르투갈풍이 결합된 말라카의 한 건물. 미술관 이름에 정화(鄭和)’가 들어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Privateer#/media/File:Bermuda_Gazette_-_12_November_1796.jpg 17961112일자 <버뮤다 가제트>에는 민간 해운업자들에게 스페인 선박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는 총독(대행)의 포고문이 실려 있고, 그 옆에 프라이버티어링을 위한 인원 모집 광고가 붙어있다. 프라이버티어링을 위해서는 평시보다 전투인력도 더 필요하고 제압한 배를 관리할 선원도 더 필요했다.

 

https://baike.baidu.com/pic/%E4%B8%A5%E5%B5%A9/538335/1/4e4a20a4462309f76e5ca4c8700e0cf3d7cad63d?fr=lemma&ct=single#aid=1&pic=4e4a20a4462309f76e5ca4c8700e0cf3d7cad63d 1548년부터 1562년까지 가정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엄숭(1480-1567)<명사(明史)> “간신(奸臣) 열전에 명대 6대 간신의 으뜸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가 실각한 후 그 아들 엄세번(嚴世蕃)이 처형당할 때(1564) 죄목 중에 왜구와 결탁하여 불궤(不軌)를 꾀함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왜구 관계 정책에도 흑막이 있었던 듯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Tanegashima#/media/File:Hokusai_1817_First_Guns_in_Japan.jpg 1542년 몇 명의 포르투갈인이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와서 화총 등 신기한 물건들을 전해줬고, 때문에 일본에서는 화총을 다네가시마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을 데려온 것이 중국인 해적 왕직이었다. 아메리카의 은이 아직 터져 나오기 전인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일본의 은을 중국과의 교역에 활용하는 삼각무역을 시작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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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06 23:10

    정화 원정의 주제로 명나라의 해외 무역에 대한 인식과 정책에 대해 잘 설명해 주셔서 그동안의 해소되지 못한 궁금증이 다 해소되었습니다! 역시 입체적으로 조망해봐야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어려운 작업인데 혼자 힘으로 해내셨어요!!

    이해하기론 조공무역에 기초한 국제 해상 무역을 직접 관장하는건 포기하고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입구만 틀어쥐는 방법으로 범위를 좁혀나가게 되었고, 이는 향후 주변 정치적 지형도를 결정하였다고 요약해도 틀리진 않겠지요?
    물론 아쉬운 쪽은 유럽이라 해상무역을 적극 추구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에 비해 자족이 가능한 명의 입장에서 굳이 큰 돈 들이며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 사실도 합리적 판단으로 생각됩니다.
    단 명이 계속 해상 루트를 계발하고 그 거래를 단단히 움켜쥐었다면 20세기의 서세동점이 많이 저지되었을거라 상상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이어 인도까지 손에 얻은 유럽에 비해 거대한 섬으로 고립되길 자초한 중국의 결과를 보며 그리고 이제서야 허둥지둥 해상루트를 확보하려는 시도에서 조급함이 느껴집니다. 물론 해상세력들의 단단한 결집을 출혈을 감내해서라도 뚫고자 할지는 의문이고 수년내로 가시화될 저들의 선택이 사뭇 궁금합니다.
    역사의 큰 분기점을 역사책이 아니라 생전에 볼 수 있을것도 같습니다.

    • 2021.07.07 23:57 신고

      축하에 감사~ 사실 그 불가사의한 함대에 대해 이만큼 그럴싸한 억측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뿌듯합니다. ^^
      인도양을 둘러보고 이 규모의 함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백년 후에 뒷골목에서 듣보잡 주먹이 나타나 판을 휩쓸리라는 예측은 불가능했겠고... 역사를 살펴보다가 "새옹지마"의 뜻을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2. 2021.07.09 09:47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 주제로 책을 집필하시면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합니다.
    가능하면 번역팀과 함께 영문으로 집필하시어 아마존에 내놓으심이 어떨까요? :)
    아니면 소설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하시면 더 큰 흥행을 거두실 것도 같습니다. ㅎㅎ
    최근의 미 중 대립 구도하에 그 근원이 되는 주제로서 많은 주목을 끌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세상의 관심이 교수님의 관심이 아닐수도 있겠지만요..
    응원 드리겠습니다!

  3. 2021.07.20 12:54

    이성규 교수님의 고대 중국 화폐에 대한 논문을 읽고 이성규 교수님의 연구 업적을 찾다가 이성규 교수님과 박사과정을 같이 하신 교수님의 스토리를 발견하게 되어 교수님의 블로그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는 진솔한 옛날 이야기들이어서 저도 모르게 교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기글에 일부 거론하신 정화함대와 관련하여서는 저는 이것이 거의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https://m.cafe.daum.net/coreahistech/L00c/239?listURI=%2Fcoreahistech%2FL00c 의 '정화함대 보선의 크기에 대해서'에서 논의하는 바와 같이 명대 중국의 대양 항해 배의 건조능력에 대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상기 교수님의 글은 정화함대와 관련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저의 평소의 생각과 달라서 의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이참정권은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투표연령 제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일기> 작업 중 19475월 남조선입법의원에서 투표연령을 25세 이상으로 결정한 일을 살펴보면서였다. 51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670)

 

선거법 초안 중 선거권 자격을 만25세 이상으로 한 점이 눈에 띈다. 선거법 준비는 우익에서 앞장선 일인데, 전 세계에 유례없이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도 25세라면 몰상식하게 높은 나이인데, 하물며 그 시절에. 평균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중학교만(지금의 고등학교) 졸업해도 지식인으로 통하던 그 시절에. 젊은이들의 투표를 수구파에서 두려워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확인된다.

 

이 일을 들여다보며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권의 연령 제한이 하나의 근원적 결함이란 생각이다. 어린이들의 주권이 배제되어 유권자 평균 연령이 높기 때문에 10년 뒤 20년 뒤에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아랑곳 않는 정책 노선이 득세하기 쉬운 것 아닌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채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갓난아기에게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면 어떨까? 법률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선거권은 그 보호자가 대신 행사하게 한다. 아이들 수대로 부모들이 투표권을 더 행사한다면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쪽으로 정치에 압력이 일어날 것 같다.”

 

이 문제가 마음속에 남아있어서 틈틈이 그에 관한 조사를 해보니 1947년 당시 투표연령은 거의 모든 국가가 20세 이상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부터 18세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미니 투표권을 알게 되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729)

 

“514일자 일기에서 선거권 연령 문제를 언급할 때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것이 있다. 미성년자라 해서 선거권을 주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일일까, 갓난아이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고 미성년자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몇 해 전부터 널리 검토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후 알게 되었다.

 

<Wikipedia>'Demeny voting' 조에 이 움직임이 소개되어 있다. 미성년자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는 것은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1986년에 발표한 의견인데 여기에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을 붙여 제창하는 운동이 2000년대 들어 확산되고 있다. 미성년자의 투표권을 부모가 절반씩 대신 행사하게 하자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아동투표권(Kinderwahlrecht)이란 이름으로 2003년 이 원칙의 도입이 투표에 붙여졌다가 부결된 일이 있고 헝가리에서는 연립 정권이 도입을 한 때 고려했다고 한다. (...)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의 선택에 있어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된 입법 기관과 행정 기관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정책 노선을 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미니 투표권이 환영받는 것이다. 아동 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 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 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 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몇 차례 적기는 했지만 이것이 장래 언젠가는 고려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었지, 그 현실적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2년 후 세월호 침몰사건 앞에서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몇 차례 칼럼을 쓰게 되었다.

 

선거의 노령화는 정책 선택에서 기성세대가 혜택을 누리고 사회의 빚을 늘리는 방향으로 압력을 일으킨다. 젊은 층의 선거권에 더 비중이 커야 선출되는 위정자들이 사회의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 투표권이 실현될 경우 정치에서 환경에 대한 배려가 늘어나고 청소년층의 참여 의식이 자라날 것이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은 인권의 핵심 요소다. 어린이들의 참정권이 배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당장의 혜택을 제시하는 후보들을 선택해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망치고 국가와 사회의 빚을 늘리게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길도 아니고 사회의 발전을 바라보는 길도 아니다. 세월호에서 보았듯이, 잘못된 정치의 피해는 미성년자에게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가 아니라 "대표 없이 피해 없다!"를 생각해야 한다.

 

의무교육이 끝나는 만 16세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세계적 변화의 추세에도 맞는 길이다. 갓난아이를 포함해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연령층 어린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이들의 법적 책임을 대신해주는 보호자(부모)가 대신 행사하게 하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절반씩 대신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7483)

 

그때는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좋겠다는 정도 생각이었고, 이런 점도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글 하나 쓴 후 나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봄 세월호 침몰과 그 뒤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절실한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정책 여하가 어린이들의 행복은 물론 생명까지도 좌우하는 일이 많은데, '당사자'가 미성년이라 해서 정책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그래서 참정권에 관해 더 알아보고 더 생각해 보니 어린이 참정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두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필수적인 제도를 지금까지 내버려두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근대민주주의의 역사적 조건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 주권'의 원리도 '보통 선거'의 원칙도 미성년자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선거 연령의 제한은 현실정치의 민주주의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결함이다.

 

백여 년 전 여성 참정권은 지금 어린이 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 못지않게 엉뚱하게 보이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을 배제한 '보통 선거'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여성 참정권이 겪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린이 참정권이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 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2791)

 

 

7년 만에 다시 생각하는 어린이참정권

 

 

이 글들을 읽은 이들 중에는 어린이참정권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이 꽤 있었지만, 현실적 가능성을 크게 생각한 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 책상물림의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두어 달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김원태 선생이 불쑥 연락을 주고 찾아와 이에 관한 이야기를 모처럼 나누게 되었다. 어린이참정권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니 내가 제일 열심히 이야기한 사람이라서 만나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동안의 공부로 이 주제에 관한 생각이 더해진 것이 더러 있다. 그래서 한 차례 다시 정리할 마음이 들었는데 마침 정치계의 분위기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탁상공론으로 묶어놓은 것이 무엇보다 젊은 연령층의 투표권 확대에 대한 보수정당의 결사반대라고 나는 생각해 왔는데, 그 자물쇠가 풀릴 모처럼의 기회 아닐까?

 

어느 사회단체 기관지의 원고 청탁이 있어서 조금 긴 글 하나를 써 보내고 나니 이 주제에 관한 생각을 모두 발표했던 <프레시안>에 그 동안 진척된 생각도 내놓을 마음이 든다. 2014년까지 발표한 내용과 가급적 중복을 피하면서 정리해 본다.

 

 

여성참정권은 평화운동의 표현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보통선거(universal suffrage)의 원리는 일찍부터 근대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제 가리키는 범위는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의 자격 제한에 가장 널리 적용된 기준이 재산, 성별과 연령이었다.

 

대표 없이 세금 없다!” 미국 독립전쟁의 간판 구호였다. 뒤집어 말하면 세금 내는 사람이라야 대표 뽑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재산을 갖고 세금을 내는, 즉 사회의 구성과 유지에 경제적 공헌을 하는 사람이라야 참정권을 가진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철폐하는 결정적 계기는 18482월혁명 후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만들어졌다. 세금을 안 내는 사람들에게까지 머릿수대로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당시의 상식에 어긋나는 조치였다. 그런 몰상식한 조치가 취해진 것은 집권세력의 지지기반을 넓힐 필요 때문이었다. 그런데 권리라는 것은 한 번 주어진 뒤에는 다시 거둬들이기가 몹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종래의 몰상식이 상식으로 돌변하면서 보통선거의 원리가 강화되었다.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의 철폐, 즉 여성참정권의 도입은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앞 단계는 19세기 말까지 식민지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소규모로 도입된 것이고 뒤 단계는 20세기 들어 주권국가 단위로 진행되어 전 세계의 보편적 원칙으로 확립된 것이다.

 

소규모 도입이라도 지속적 추세가 시작된 것은 1869-70년 미국의 준주(territory: 새로 취득한 영토가 아직 주(state)로 승격되기 전의 행정조직) 와이오밍과 유타에서였다. 그리고 아일오브맨(1881), 뉴질랜드(1893), 남오스트레일리아(1894) 등 영국 식민지들이 뒤를 이었다. 유럽 본토에서 이 흐름에 처음 올라탄 것은 러시아의 대공국이면서 주권국가 성격에 가깝던 핀란드(1906)였다.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을 먼저 도입한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가 중앙부나 본국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저개발지역에 유입되는 인구 중에는 독신남성의 비율이 높았다. 독신남성은 정책의 선택에서 사회의 안정보다 투기 기회의 확장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1860년대 와이오밍에서 독신남성들은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에 비해 원주민에 대해 공격적이고 개발을 촉진하는 정책을 선호했다. 이런 투기세력의 과잉 대표를 막기 위해 온건한 사람들이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여성참정권 도입은 1913년 노르웨이에서 시작해 1919년 독일까지 대다수 유럽국에서 이뤄졌고 1920년 미국이 뒤를 따랐다. 이 흐름에서 뒤처진 영국과 프랑스에도 1928년과 1944년에 도입되었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1953년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1910년대 여성참정권 보편화는 한 마디로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은 두 방향에서 여성참정권을 밀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여성 인력의 동원을 위해서였다. 가정 안에 머물러 있던 여성의 외부 활동이 늘어나면서 여성의 역할이 강화된 것이다.

 

또 하나 전쟁의 영향은 평화운동의 발전이었다. 극도로 참혹해진 전쟁 양상 앞에서 국가들은 지금 벌어져 있는 전쟁만 넘기고 나면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약속의 확실한 표현 방법이 여성참정권 도입이었다.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은 긴밀한 관계 속에 발전해 온 것이었다.

 

재산과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의 철폐 과정에서 두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만인평등이념의 확장-강화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가 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 하나다. 자본주의체제의 발전에 따라 경제활동의 참여 계층의 확장이 필요할 때 참정권이 평민에게까지 주어졌고, 그 체제가 한계에 부딪쳐 위기에 이르렀을 때 여성참정권이 주어진 것이었다.

 

또 하나는 참정권의 확장이 편입되려는 집단의 의지와 노력보다 기존 유권자 집단의 위기의식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민 중에도 여성 중에도 일찍부터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실제 변화가 이뤄진 것은 평민과 여성 집단의 주동적 권리 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 주류의 의식 전환에 따라서였다.

 

 

위기의식이 변화를 불러온다.

 

 

정치하나의 집단이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이루는 일련의 행위이고 그 결정 대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자원의 배분이다. 20세기 초까지 이 과정에서 여성이 배제되어 있던 상황이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참정권 문제가 부각된 것이다. 백년이 지난 이제 연령에 따른 정치의 제한이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참정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고 나는 본다.

 

자원의 배분문제를 과거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는 자원만을 배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미개발 자원은 무제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되지 않은 천연상태의 자원이 소중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소유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체제 덕분에 시장에서는 기()개발 자원이 아직도 힘을 쓰고 있지만, 인류의 장래를 위한 가치는 미개발 자원에 더 많이 담겨 있는 상황에 와 있다.

 

자원의 가치를 보는 시각은 연령층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10세 어린이에게는 50년 후의 상황을 고려해서 미개발 자원의 가치를 높여 볼 필요가 있다. 오염을 억제해서 천연상태를 최대한 보존해야 노년까지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70세 노인에게는 10년 후의 상황도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못 된다. 후손의 장래를 걱정해주는 마음도 없지 않겠지만 개발 억제로 인해 당장 내가 겪을 불편과 고통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사회 노령화의 문제가 겹쳐진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기면 고령화사회로 보는데, 한국은 2000년경 이 선에 도달한 후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계속되어 지금은 20%를 바라보며 더 심각한 단계인 고령사회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 노령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산인구 비율의 감소와 함께 미래에 대한 관점의 취약성이 지적된다. 목전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경향의 연령층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의 도입은 인류사회의 한 차례 가치관의 전환을 반영한 현상이었다. 무한한 진보의 믿음 위에 창조적 파괴에 몰두하던 19세기 분위기를 깨진 유리창의 우화가 대표했다. 빵집 아이가 유리창을 깨트렸을 때 유리가게 일거리가 늘어나 경제를 활성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빵집에는 손해가 되어도 사회 전체에는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기개발 자원의 가치만 보고 미개발 자원의 가치를 보지 않는 이 풍조를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로 반박했다. 그런데 1849년에 발표된 이 글의 주장이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란 이름으로 경제학계에 받아들여진 것은 1914년 폰 비저에 의해서였다. 자원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바스티아의 가치관이 경제학계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여성참정권이 정치제도에 도입된 것도 모두 세계대전의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20세기의 위기는 세계대전으로 나타났고, 21세기의 위기는 환경과 자원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백 년 전 위기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에서 온 것이라면 21세기의 위기는 인간사회와 외부(라 생각되어 온) 환경과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생각한 평화는 인간사회 안에서 싸움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 자연환경을 최대한 착취하는 것은 당시까지도 사람들이 생각하던 평화에 공헌하는 길이었다.

 

21세기의 위기의식은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타난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에게 지구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일부였다. 지구의 자원을 다 소진하고 나면 더 많은 자원을 찾아 우주로 나갈 것을 꿈꿨다. 1969720일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을 때, 사람들은 몇 년 안 있어 달에 항구적 기지가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곧이어 화성에도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우주비행사들을 신대륙을 열어준 콜럼버스의 후예로 생각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캐나다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은 <Weekly Noema> 인터뷰에서(2021. 2. 27, “Want not, Waste not") 이렇게 말했다.

 

일론 머스크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태계에게 회복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무한정 계속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주로부터 자원의 반입이 불가능한 것이 확실해진 지금까지 우주정복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머스크가 우주관광장사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바로 암스트롱의 달 착륙 무렵부터 환경과 자원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밀의 최근 책 <거대한 전환 Grand Transitions>(옥스퍼드대학출판부, 2021)에는 인구, 식량, 에너지, 경제체제, 환경의 다섯 개 측면에서 이미 널리 지적되어 온 위험들이 최근 통계를 통해 정밀하게 파악되어 있다. 21세기에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확인해준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 도입은 인류사회가 경쟁보다 협력을 통해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는 지침을 세우는 계기였다. 지금 인류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인간사회 내부의 협력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도 협력관계를 세움으로써 미래에 대응하는 것이다. 어린이참정권의 도입이 그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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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6.27 14:15

    수능 준비할 때는 다수결의 원리 에 대해 한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다가, 대학을 가고 이후에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아졌고 다수결의 의미가 무섭도록 처연하게 느껴졌어요.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성립 원리이자 치명적인 한계 옆에 어린이 참정권을 올려 놓는 일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반대해서는 안되는 모순적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수결의 파괴력은 터부시하면서 어린이참정권은 왜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요. 무시하고 배제할수록 민주주의에 합치하지 못하는 것일텐데요. 자기 자신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은 괜찮고 어린이에게 투표권을 주는 일은 안괜찮은가 봅니다.

    • 2021.06.27 23:10 신고

      간판을 '민주주의'로 걸든 '능력주의'로 걸든 이념이 완벽하게 실현될 수는 없죠. 그래도 덜 나쁜 세상 만들려는 노력이 제일 집약된 성과물로서 민주주의에 아낄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지금 단계 민주주의에서 어린이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수준 이하의 결함으로 보입니다.

  2. 2021.06.28 10:57

    네! 어린이참정권이 담론으로라도 기능하면 좋을텐데 우스개소리로 치부되니 제가 좀 비아냥스럽게 말한 것 같아요. 원리에 치우친 면이 있다며 참정권의 역사 등을 세심히 해부하면서 쓰신 글인데, 일단 나오는대로 말하게 되어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2021.06.28 21:01 신고

      30년 전 학교 떠난 후 명목상 소속을 만든다는 게 (소속 없이는 여권 발급도 어려울 때였죠.) 신문사 연구위원이 되어... 시사칼럼도 일삼아 쓰게 되었다가 근년에 삼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어린이참정권 같은 주제는 버릴 수가 없군요.

  3. 2021.06.29 23:11 신고

    앞서 올렸던 글을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글로 바꿔놓습니다. 원래 글은 어느 사회단체 기관지의 기고문인데 발행이 한참 뒤가 될 것이라서 너무 일찍 여기다 공개해 놓는 게... 바꿔 올린 글은 오늘 프레시안에 발행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