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명은 황하(黃河)문명?

1969년에 사학과로 옮기고 그 이듬해부터 중국사상사를 전공분야로 잡았다. 그리고부터 몇 해 동안은 고대사에 공부를 집중해서 학부 졸업논문도 석사논문도 그 영역을 다뤘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심이 묶인 것은 아니었고, 사상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점을 고대사에서 찾은 것이었다. 


통시적 관점을 추구한 것은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것이 시대별로 전공영역을 획정하는 역사학계의 관습과 맞지 않아서 제도권 학술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두기 교수와의 불화도 여기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38277] 그래서 학회활동을 동양사학회보다 과학사학회에서 하게 되었다.

 

아무튼 공부의 시작 단계 여러 해를 중국고대사에 집중하며 지냈는데, 지난 5월 충칭(重慶)-산샤(三峽)를 둘러보고 돌아온 후 그 시절 공부했던 내용을 오랜만에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황하 유역을 중국문명의 발상지로 여겨 온 믿음을 뒤집어보게 되었다. 스촨(四川) 분지의 고대문명이 중국문명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에 새로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50년 전까지도 스웨덴 고고학자 앤더슨(Johan Gunnar Andersson,1874~1960)의 관점이 중국 선사시대 연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1914년부터 중국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그는 중국의 고대문명이 서방에서 수입된 기술로 촉발된 것이라는 가설 위에서 서방으로부터의 통로로 보이는 간수(甘肅) 회랑(回廊) 지역을 중시했다. 그 통로를 통해 수입 기술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황하 유역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중국문명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제 돌아보면 그 가설은 흔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샤나이(夏鼐, 1910~1985)가 1945년에 간수성 한 유적에서 앙소(仰韶)문화와 제가(齊家)문화의 선후관계에 대한 앤더슨의 관점을 뒤집은 일이 있다. 서래설(西來說)을 확신한 앤더슨은 서쪽의 제가문화가 동쪽의 앙소문화보다 더 일찍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앙소문화의 지층 위에 제가문화의 지층이 겹쳐진 유적을 샤나이가 확인한 것이다.


샤나이는 장강 하류 항저우(杭州) 일대에서 1936년 이래 발굴되어 온 일군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량저(良渚)문화’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종래 중시되어 온 황하 유역의 선사시대 문화와 대등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의 관점은 중국 외부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중국문명의 덩치를 키워 보이려는 애국심이나 자기 고향의 선진성을 우기려는(그는 저장(浙江)성 출신이다.) 애향심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량저문화의 진면목은 샤나이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더 크게 드러나 왔다. 2007년에는 성곽 유적이 발견되었고 2015년에는 성곽 밖에서 대규모 수리시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앤더슨의 중국문명 서래설에는 중국에 대한 서양인의 경멸감이 중국문명의 문명사적 가치까지도 낮춰보던 한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 측면이 있는데, 그 영향력이 오래간 것은 중국의 ‘굴기’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의 발원지를 황하 유역으로 국한해서 보던 그의 관점은 중국 고고학의 발전과 발굴 성과 축적에 따라 빛을 잃어 왔다. 
중국고대사를 직접 연구하지 않게 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무래도 초년에 집중했던 분야인지라 관련 학술정보에 비교적 관심이 많이 간다. 량저문화 연구 소식에 간간이 접하며,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장강 하류 유역의 문화가 황하 유역과 대등한 수준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량저 유적 전경

 


이런 인상 위에서 춘추시대 몇 개 남방 국가들의 흥기에 관한 <사기(史記)>의 기록으로부터 새로 떠오른 생각이 있다. 예를 들어 초(楚)나라. 오랑캐로 여겨지던 초나라가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원(中原)의 강대국으로 부각되었다. 그 출발이 기원전 704년 웅통(熊通)이 ‘무왕(武王)’의 칭호를 채택한 일이다. 원래 ‘왕(王)’이란 주나라 천자(天子)만의 호칭이었고 제후국 임금들은 천자의 책봉을 받아 ‘공(公)’, ‘후(侯)’, ‘백(伯)’ 등 칭호를 갖는 것이었다. 국력이 급성장한 초나라가 높은 등급 제후로 책봉해 줄 것을 바랐는데 천자가 응해주지 않자 책봉 없이 스스로 ‘왕’ 칭호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새로 흥미를 느낀 점은 초나라 왕실이 3황5제 중의 전욱(顓頊)을 조상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주나라 천자에게 책봉을 청하면서 자기네 족보가 이렇게 대단하니까 높은 등급을 달라고 우겼을 것 같다. 유전자 감식기술이 없던 시절인 만큼, 전설상의 위대한 인물 중에 확실한 자손이 따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 가짜 자손이 많았을 것이다.


족보 조작은 초나라만의 특허가 아니었다. 초나라보다 장강 하류에서 뒤늦게 일어난 오(吳)나라는 기원전 6세기 들어 두각을 나타내면서 역시 자의적으로 ‘왕’ 칭호를 취했다. 자기네 조상이 주나라를 개창한 문왕(文王)의 큰아버지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라고 했다. 조카인 문왕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에게 임금 자리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남방의 황량한 땅으로 스스로 몸을 숨겼다는 고사를 남긴 인물들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주나라 천자의 위세가 얼마나 떨어졌으면 오랑캐에서 일어난 신흥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큰집’이라고 나서게 되었을까.

 

오나라 곁에서 뒤따라 일어나 오나라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쟁투를 벌인 월(越)나라도 족보 조작에서 밀리지 않았다. 월나라 왕실은 하(夏) 왕조 사(姒)씨의 방계 자손을 자임했다.

 

춘추시대에 장강 유역에서 일어나 중원을 뒤흔들기까지 한 초-오-월 세 나라 왕실에 모두 족보 조작의 짙은 혐의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장강 유역에는 황하 유역과 맞먹는 수준과 규모의 문명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들어와 그곳에서 조직된 강력한 정치세력들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천하체제(天下體制)’에 끼어들면서 기존 천하체제의 상징적 인물들을 조상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북방과 맞먹는 문명 기반이 남방에 만들어져 있었다면 왜 북방의 천하체제에 남방 세력들이 편입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왜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추측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제철(製鐵)기술의 전파 방향에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춘추시대는 제철기술이 확장된 시대였다. 황하 유역에서 제철기술이 먼저 나타나 그에 따른 정치조직의 대형화가 천하체제의 성립을 가져왔고, 이 기술이 장강 유역까지 전파되면서 초-오-월 같은 세력들이 뒤따라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중원의 외곽세력이 중원문명의 상징적 인물을 조상으로 ‘입양(入養)’하던 풍조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 기자(箕子)조선의 성격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4세기에 조선의 존재가 중국에 뚜렷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설화가 생겨나고, 이것이 그 후의 사서 편찬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춘추시대에 양자강 유역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중국 무대에 등장하면서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의 후예를 자처한 일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 중국과 교섭이 많아진 조선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기자의 후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이런 모칭(冒稱)은 중국문명에 귀순하는 뜻을 가진 것이므로 중국 측에서도 족보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 65-66쪽)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황하 유역과 장강 (하류) 유역에 대등한 수준과 규모의 농경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가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천하체제로 통합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여러 해째 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충칭-산샤를 다녀오면서 그 시기에 장강 상류 유역, 스촨 분지는 어떤 상황을 겪고 있었을까, 궁금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바이두(百度) 백과>를 검색하던 중 “삼성퇴(三星堆)”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청두(成都)시 북쪽 약 40킬로미터 지점의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1200년경까지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어 ‘삼성퇴문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곡절이 순탄치 않았다. 1934년 최초의 발굴에서 꽤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1980년대 들어 몇 차례 대규모 발굴을 통해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삼성퇴 유적 전경


삼성퇴의 진면목을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사방 약 2킬로미터 크기의 성곽 유지였다. 기원전 1600년경 축조로 추정되는 이 성곽은 비슷한 시기의 상(商)나라 도성 정저우 상성(鄭州商城)과 비슷한 규모다. 뒤이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1986년에 발굴된 두 개의 제사갱(祭祀坑)이었다. 여기서 출토된 엄청난 분량의 유물은 종래의 통념을 벗어나는 양식을 보여주었고, 특히 청동기 유물 중에 놀라운 걸작품이 많았다. 이 청동기 유물의 가치가 시안(西安)의 병마용(兵馬踊)을 뛰어넘는다고 평가한 고미술 연구자도(대영박물관의 태스크 로전) 있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중국문명의 기원을 황하 유역 중심으로 보던 단선적 시각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삼성퇴 유적 출토 청동기

 


삼성퇴 성곽은 촉(蜀)나라의 도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촉나라에 관한 역사 기록은 아주 적다. <화양국지(華陽國志)> 등 자료에 약간의 설화가 실려 있고, <사기>에는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할 때 촉나라도 참여했다는 기사와 기원전 316년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장의(張儀) 등을 보내 촉나라를 병탄했다는 기사 정도가 보인다.

 

진나라의 촉나라 병탄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촉나라가 진나라의 도움을 얻으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혜왕은 그 기회에 촉나라를 잡아먹으려고 꾀를 썼다. 큰 석우(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촉왕에게 준다며, 꼬리 밑에 금 조각을 붙여놓고 금똥(屎金)이라고 했다. 대단한 보물로 여긴 촉왕이 장사들을 보내 석우를 끌어오게 해서 넓은 길이 생겼다. 그 길로 혜왕이 군대를 보내 촉나라를 공격했다는 것. 산시(陝西)성에서 스촨성으로 들어가는 ‘촉도(蜀道)’의 험준함을 이백(李白)이 “촉도난(蜀道難)”에서 “한 사람이 지켜도 만 사람이 열지 못한다(一夫當關 萬夫莫開)”고 그린 구절이 회자되는데, 어떤 천혜의 요새도 사람의 탐욕은 막을 수 없다는 교훈을 담은 설화다. 이 길에 ‘석우도(石牛道)’라는 별명이 남아있다. 


삼성퇴 유적을 중심으로 스촨 지역 고대사를 더듬어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중국 고대문명의 그림이 새로 그려진다. 이제까지의 그림은 황하 유역과 장강 (하류) 유역 사이의 대칭을 틀로 한 것이었는데, 장강 상류 유역에 또 하나 굵은 줄기가 나타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초기 단계의 농업문명 발전에 적합한 또 하나의 지역이었다. 기상학의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 깊은 내륙의 스촨 분지 강우량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도 비가 많이 오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한반도 또한 초기 단계 농업문명의 발전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과 비슷한 성격의 농업문명을 발전시킨 것인데, 그러면서도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지킨 원리를 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중화제국의 내부 구조를 살피는 데도 이 원리를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여러 갈래로 생각이 떠오르는데, 나중에 한 차례 차분히 정리해 볼 숙제로 남겨둔다.

Posted by 문천

Life in Openness

 

"Desperation leads to change. Change leads to openness. Openness leads to stability.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It is one of the core messages of <Yi Jing(易經)>. When things get to extremes, a change is inevitable, the change will bring you to an openness, and in the openness your standing will be durable. It means that the accumulation of menial changes can bring along a fundamental change to you, which will open new ways for you to proceed. Ways for you to live on.

 

통즉구(通則久)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열려있으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양적 축적은 결국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질적 변화가 막힌 상황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열려 있을 때만이 그 생명이 지속됩니다. 


<처음 처럼> 신영복의 언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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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6월 14일 06:00 버스로 연길 출발. 07:40 화룡(和龍)시 공안국 출입경관리국에서 출국 수속. 10:00 고성리(古城里) 구안(口岸)에서 입국 수속. 11;00~13:30 조선 삼장리 구안에서 삼지연까지 버스로 이동. 15:30 점심식사 후 삼지연 혁명성지를 참관하고 평양행 비행기 탑승. 17:00 평양 도착 후 만경대와 김일성광장을 구경하고 저녁식사 후 호텔 투숙.
6월 15일 07:00 원산으로 출발(버스). 12:30~15:00 원산에서 점심식사 후 금강산으로. 15:30~18:30 해금강, 삼일포 구경 후 온천욕(옵션)을 하고 저녁식사 후 고성의 호텔 투숙.
6월 16일 07:30~12:30 외금강 구룡연 구역 관광. 13:30 평양으로 출발.
6월 17일 07:30 개성으로 출발. 10:30~15:30 판문점과 개성 관광. 18:00 평양 도착 후 지하철 구경.
6월 18일 08:00~09:30 개선문, 우의탑 등 구경 후 공항으로. 12:00 삼지연공항 도착 후 백두산 관광.
6월 19일 07:30 삼지연 출발. 11:00 삼장리-고성리 구안을 거쳐 연길 귀환.

이 5박6일 관광의 참가비는 1인당 인민폐 4300원(한화 70여만 원). 중국 내의 관광에는 옵션이 많이 붙어있어서 참가비 외의 비용이 많이 드는데,(지난 달 10일간 산샤(三峽)를 다녀올 때는 입장료 등 옵션이 1인당 1000원가량 들었고 식사도 십여 끼를 본인이 해결해야 했다.) 이 조선 여행에는 일정표에 온천욕 하나만 옵션으로 들어있고 ‘자유식사’도 전혀 없어서 부대비용이 별로 필요 없었다.


일정표에 표시되지 않은 중요한 옵션이 하나 있었다. 평양 도착하는 날 저녁의 집단체조 참관이었다. 800원씩(약 15만 원) 내고 부부가 참관을 예약했는데 공연이 취소되어 환불받았다. 나중에 들으니 6월 20일 시진핑 방문 때의 공연 준비에 총력을 집중하기 위해 그 전의 공연을 취소한 것이라 한다. 시진핑의 평양 방문은 6월 17일 공식 발표되었는데, 그 사흘 전의 공연이 취소된 것을 보면 준비가 벌써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취소가 임박해서 이뤄진 것을 보면 ‘14년 만의 중국 최고지도자 조선 방문’치고는 매우 촉박하게 진행된 것 같다.


이 관광을 다녀온 것은 아쉽게도 우리 부부가 아니라 김용길 선생 부부였다. 두 분이 한국에서 몇 해 살 때 가까이 지냈다. 아내에게는 두어 살 위인 부인이 “언니”였고 김 선생은 두어 살 위인 내게 “형님”이라 불렀다. 책 읽기 좋아하는 김 선생에게 내 책 나올 때 한 권씩 드리곤 했는데, 한번은 속표지에 뭐를 좀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莫上莫下 龍吉 兄께”라고 적었더니 보고 “막상막하?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인가?” 하기에 “아마 그렇겠지요.” 하고 함께 박장대소를 한 일이 있다. 어제(6월 23일) 집에서 두부를 한다고 불러서 시내에서 좀 떨어진 댁에 갔다가 막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십년쯤 전 칠보산 관광 갔을 때와 달라진 몇 가지 사정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보안의 압력이 줄어든 것. 28명 여행단에 동행한 것이 기사와 가이드, 그리고 하는 일 없이 따라다니는 아저씨 하나였다고. 이 아저씨가 보안 요원일 텐데,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좀 귀찮은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족 관광객들은 곳곳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때때로 한족 관광객을 위해 통역을 해주기도 하는데, 이 보안 아저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야기가 아주 길어질 때 한두 번 나서서 “이제 그만 하시지요.”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도시환경이 깨끗해진 것. 평양은 깨끗할 뿐 아니라 으리으리하기까지 해서 중국인들이 부러워할 정도였고, 고성과 개성 등지도 생활환경이 훌륭해 보이더라고 한다. 우발적으로 마주친 주민들에게 받은 인상도 10년 전보다 당당해 보이더라고. 중국인 관광객에게서 담배, 과자 등 중국 물건을 얻기 바라는 사람들도 거저 얻기보다는 뭔가 바꿀 궁리를 하더라고 한다. 피워보라고 김 선생이 “금강산”과 “아리랑” 두 가지 담배를 권하는데, 중국 담배에 품질을 맞춘 것이었다. 예전에 도문(圖們) 교두(橋頭)에서 팔던 ‘조선 담배’와는 아주 다르다.

 

금강산 등 관광지에는 내국인 관광객도 꽤 있었는데, 판문점에만은 외국인 관광객만 허용되고 있다고 했다. 남북 정상 ‘번개’ 회담의 현장 판문각을 포함해서 판문점 북측 구역을 마음껏 돌아다녔다는 이 ‘외국인’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에너지 부족 상황은 변함이 없더라고 한다. 호텔방까지도 밤이 늦으면 전기를 끊더라고. 그런데 평양은 차등이 있는 모양이다. 부인이 “평양에서는 밤에 전기를 안 끊더라고요.” 하니까 김 선생 반박하기를, “당신은 잠만 자니까 안 끊은 줄 알지. 나는 옆방에서 술 먹다가 11시 반에 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휴대폰 켜고 (LED 불빛으로) 먹었어.” 고성과 삼지연에서는 10시에 전기를 끊었다고 한다.

 

평양의 점 하나만 보이는 북한의 야간 위성사진. 다른 곳의 불이 꺼진 밤 10시와 평양의 불이 꺼지는 11시 반 사이에 찍은 것일까?

 

금강산과 개성 다녀오는 길에 비해 삼지연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비행장 주변도 호텔 부근도 모두 공사판으로 어수선한데, 동력 장비가 없어서 곡괭이로 바위를 깨뜨리는 식의 공사를 하는 것이 마치 50년 전의 풍경 같더라고. 공사 인력은 거의 군인으로 보였다고 한다. 백두산의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도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개방에서 제일 급한 목표가 관광 사업에 있다고 하는데 경제제재 하에서는 그 준비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더라고.


북한의 전력 사정이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지 보려고 <위키피디아>에서 “각국의 전력소비량”을 찾아보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electricity_consumption) 2014~2017년의 데이터에 입각해 만든 표인데, 북한 항목에 중대한 오류가 있다. 연간 총 소비량 15,000,000,000 kWh, 1인당 평균소비량 1347 kWh이라고 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들여다보니, 인구가 11,134,588 명으로(2016년 기준) 되어 있다. 실제 인구가 그 갑절이 넘으니 1인당 평균소비량을 650 kWh가량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항목 “Energy in North Korea“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Energy_in_North_Korea)

남한 통계청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 데이터를 근거로 작성한 통계에 의하면 (북한의) 연간 1인당 평균 소비전력은 1990년의 최고점 1247 kWh에서 2000년의 최저점 712 kWh까지 떨어졌다가 2008년 819 kWh까지 회복되었지만 아직 1970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항목에는 북한 인구가 2004년 2238만 명, 2013년 2490만 명으로 나와 있어서 큰 오류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내용이 있다. 북한이 에너지 수출국이며 2004-2009년 간 인구 비례 에너지 생산량은 남북한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첨부된 표에는 2013년 북한의 에너지 생산이 280 TWh, 수출이 112 TWh, 1차 소비량이 168 TWh로 되어 있다. 이것은 경제제재 심화에 따라 석탄 수출만 하고 석유 수입을 못하는 상황이 비쳐진 것 같다. 2007~2009년에 생산이 229~242 TWh, 수출이 6~15 TWh, 소비가 214~236 TWh로 나와 있는 상황이 정상 상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TWh는 10억 kWh를 표시하는 단위다.)

 

이 표는 이렇게 말해준다. “북한의 연간 에너지 생산량은 2008년경 230 TWh대에서 2013년 280 TWh로 20% 가량 늘어났다. 반면 소비량은 220 TWh대에서 168 TWh로 30% 이상 줄어들었다.” 외화 획득을 위해 석탄을 바득바득 캐내면서 소비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으로 읽힌다. “에너지 수출국”! 얼른 듣기 좋은 이 이름이 사실은 참혹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점을 두고 있는 관광 산업의 핵심 기지 삼지연의(‘삼지연관현악단’의 위상을 보라.) 개발에도 동력 장비를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전력 생산량을 들여다보면, 2008년 19.54 TWh에서 2013년 16.44 TWh로 줄어들었다. <위키피디아>의 “전력 생산(electricity generation)” 항목에 주요국의 발전량이 표로 나와 있는데, (https://en.wikipedia.org/wiki/Electricity_generation#Production_by_country) 한국의 연간 발전량은 446 TWh로 북한의 20배 이상이다. (2008년 기준. 미국은 4369 TWh, 중국은 3457 TWh, 일본은 1082 TWh.) 그런데 한국 발전량의 98% 이상이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의지한 것이고 수력발전은 5.6 TWh에 불과하다. 수력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재생에너지 발전량의 비율이 세계적으로 18%인데 한국에서는 1.5%에 불과하다. 남한은 확실한 ‘에너지 수입국’이다.


북한 전력생산에서 수력발전의 비중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세계 평균보다 크게 높을 것은 짐작이 된다. <위키피디아>를 뒤져보던 중 북한의 국장(國章)에 수풍댐의 모습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8년 정부 출범 때 채택된 이 국장에 담겼다는 데서 수풍댐이 북한 지도부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943년 완성된 이 댐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상징하는 뜻을 가진 것인데도 북한 건설의 근거로 워낙 큰 가치를 가진 것이기에 국장 속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왼쪽은 1948년 채택된 북한 국장. 오른쪽은 1993년에 개정된 국장으로, 배경의 산이 백두산으로 바뀌었다. ‘백두 혈통’을 중시하는 뜻의 개정이었지만 수풍댐의 중요성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압록강에는 수풍댐(63만 kW)에 이어 운봉댐(1967, 40만 kW), 태평만댐(1987, 19만 kW), 위원댐(1987, 39만 kW)이 건설되었는데, 수풍댐의 모습이 이 여러 댐들을 대표하는 듯하다.

 


북한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남한의 20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단 접어두자. 생산과 소비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게 되어 있다면 소비 규모에 열 배 스무 배 차이는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2008년에서 2013년 사이에 소비가 30% 줄었다는 사실을 남한 사회에 대입해 본다면, 과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본다면, ‘북한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구경 이야기를 한참 해주다가 잠깐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기던 김 선생이 말한다. “앞으로... 조선이 많이 가까워질 것 같아요.”


우리 또래 연변사람들은 북한이 가깝던 시절을 초년에 겪었고, 그 후에 점점 멀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1956년생의 작가 한 분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조선의 친척 아저씨로 연길에 출장 올 때마다 자기 집에 묵던 분이 있었는데, 올 때마다 과자도 가져오고 옷도 가져오는 반가운 아저씨였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가져오는 선물이 빈약해지더니, 어느 때부터 그분 다녀갈 때 값진 물건이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란다. 참다못해 어머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달래시더라고. “사람 행동은 형편 따라가는 것 아니냐. 그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우리 다 잘 아는 사실인데, 지금 행동만 따지지 말고 잘 대해 드리려무나.”


문화혁명 시기에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멀어지고 1980년대 이래 북한 경제는 침체의 길에 빠졌다. 그 후 남한과 중국의 관계가 커지고 중국 경제가 발전하는 동안 북한은 소외되어 있었다. 연변에서 눈에 띄는 ‘조선사람’은 초라한 행색의 탈북자뿐이었다. 연변은 조선과 접경해 있다는 위치에서 덕 보는 것은 없고 불편만 느끼는 상황만을 오랫동안 겪어 왔다.


그 상황이 바뀔 조짐을 김 선생은 느끼는 것이다. 그가 이번 여행에서 본 북한사람의 모습은 연길 시내를 배회하던 탈북자들은 물론 10년 전 여행 때 본 모습과도 다른 것이었다. “사람 행동은 형편 따라가는 것”이라는 리 작가 어머님의 생각은 많은 조선족이 공유하는 것 같다. 북한의 개방과 발전이 조선족의 위상에도 도움이 될 것을 그들은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감에는 같은 민족을 아끼는 ‘민족심’에서 우러나오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조선족자치주가 조선과 연결됨으로써 ‘벽지(僻地)’의 조건을 벗어나기 바라는 공리적 타산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 발전이 조선족사회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지만 노동 인구의 대거 유출로 지역 발전의 길은 막힌 채로 사회 붕괴의 위험만 커져 왔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컨센서스는 남한이나 북한보다 연변에서 더 잘 이뤄져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더 큰 발언권과 결정권이 있었으면.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