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에서 제국의 해체는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버마의 일본 점령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1945년에 이 세 곳 식민지에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국가건설 작업이 시작될 태세였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필리핀은 가장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새로 세워진 국가가 계속 미국에 의지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네덜란드의 귀환에 저항하며 광대한 섬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버마의 경우 영국이 최대한 빨리 철수했고, 일본의 훈련을 받은 군대가 주변의 고원지대를 장악하러 나섰다. 그 고원지대에는 자기 종족의 국가를 각자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947년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도 이런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말라야에 돌아올 때는 새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 국가의 국민으로 자리 잡는 길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또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지켜보았다. 1950년 마닐라의 작가회의에 갔을 때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절감했다.

 

스페인어로 작품을 쓰던 작가들은 영어로 쓰는 세대에게 밀려났고, 미국에서 명성을 얻는 작가들도 나타났다. 젊은 세대 민족주의자 중에는 이것을 못마땅해하고 새 국어로 채택된 타갈로그어 문학을 제창하기도 했다. 그 회의에 왜 영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만 초청받았는지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경우 모두 생활에는 영어를 쓰면서도 작품은 바하사어로 썼다. 내가 수라바야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난징에서 공부했고 영어로 시를 쓰고 말레이어는 더듬거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우스워했다. 그들은 차이릴 안와르의 작품을 내가 꼭 읽어봐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 시인이 인도네시아의 민족문학에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Chairil Anwar (1922–1949)는 인도네시아 문학의 본격적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1945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마닐라 여행을 하며 나의 말라야가 어떻게 특별한 종류의 나라일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마닐라대학 친구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을 살려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하는 정치놀이란 종족 기반 정당들이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런 추세에 반대하면서도, 우리의 민주정치체제가 일천한 만큼 유권자 집단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할 것은 인정했다.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고, 말라야의 행로를 내다보는 데 고려해야 할 사실이었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는 다른 길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로서는 학문의 진로에 집중할 생각을 했다. 마거릿의 격려와 런던의 박사과정을 위한 장학금 덕분에 학문을 통해 국가건설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로 우리는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해 온 마거릿과 나는 그 길이 간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국에 가서 대영제국의 구석구석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감이 흔들렸다. 국가라는 개념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확실히 정의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걱정이 공부할 것 공부하고 즐길 것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연극과 음악회에 다니고 주말에는 사적(史蹟)을 답사하며 지내는 동안 우리는 독립을 기다리고 있는 대영제국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말라야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식민지 당국에서 지은 말라야회관에서 친구들을 만나 말라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툰쿠 압둘 라만 수상이 영국의 철수계획을 확정하기 위해 수행단을 이끌고 런던에 왔을 때 유학생들과 만난 자리도 그런 기회였다. 툰쿠 수상과 싱가포르의 데이비드 마셜 수상이 크다 주 동남부의 발링에서 말라야공산당 지도자 친펭을 만난 기사를 잊을 수 없다. 무장투쟁을 중지하자는 툰쿠의 제안을 친펭이 거부했다는 데 우리 모두 놀랐다. 왜 민족주의자 중에 폭력을 피하며 협상을 통해 헌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고 원하는 것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말라야는 다종족 통합국가로서 조심스레 영국 통치를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곳에 있던 나는 뉴스만 챙겨보며 지냈다. 런던대학에서 “중세사”로 분류된 학위논문을 마침내 제출하고 통과되었다. 그 사이에 파킨슨의 법칙으로 유명인사가 된 파킨슨 교수가 말라야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맡겨주었고, 마거릿과 나는 런던에서 태어난 아들 밍을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났다.

[Cyril Northcote Parkinson(1909–1993)은 말라야대학 초대 역사학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업무의 분량은 주어진 시간을 채울 때까지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을 발표해(1955년에 <이코노미스트>지 논문으로, 1958년에 책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60년에 교수직을 떠나 강연과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우리 배가 싱가포르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있던 1957년 8월 31일 연방 독립이 선포되었다. 1년 반 후 쿠알라룸푸르(KL)에 새로 만드는 캠퍼스에 지원한 것은 새 국가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었다. 마거릿은 싱가포르에서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고 KL의 다른 기관에서 비슷한 일자리를 잡았다. 역시 연방 시민이 된 아버지는 조호르바루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으러 그곳으로 옮겼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싱가포르에서 계속 살았다. [싱가포르-이포-KL-조호르바루가 표시된 지도]

 

1959년에 우리의 새 생활과 함께 새 나라에 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 해에 싱가포르가 자치 식민지가 되었고 머잖아 연방의 한 구성원이 될 것을 우리는 기대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우리 친구와 동료 대부분이 말라야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KL에서 우리 생활은 행복하게 펼쳐졌다. 우리 캠퍼스에는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학생들과 여러 나라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문학부는 동남아시아에 초점을 두었고, 말라야 연구의 발전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다. 공학부, 농학부와 의학부, 세 개 학부가 더 세워졌다.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서 동아시아사 한 과목을 맡았으나 새 대학의 현지인 교수로서 동남아시아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 이 점에 주목한 KL의 아시아재단에서 미국 대학의 순방을 권했다. 아시아에 관한 연구와 교육의 중요한 중심지들이 미국에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해안에서 시작해 중서부를 거쳐 동해안의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둘러보았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관련 프로그램이 있는 20개 대학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조그만 몇 개 주를 포괄하는 지역 중심지 역할의 학교들도 있었다. 아시아 연구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미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 놀라웠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국가 건설과 근대화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새로운 현상이며 미국이 아시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들의 지배에서 풀려난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사실을 동남아시아 출신의 중국사 연구자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아시아재단 측에서는 생각한 것 같았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근대적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노력을 연구하는 데 여러 가지 학문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의 동양학 전통이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지만, 크고 작은 연구 중심지에서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의 협력을 위한 연구비가 새로 제공되고 있었다.

 

아시아 여러 사회에서 새로운 과제에 적응해 가는 방식을 연구할 새 세대 연구자의 양성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시아 지도자 중에 무장혁명의 길을 택하며 소련과 공산중국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특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 새로운 관심 때문에 동양학의 전통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다른 학술방법으로 대치될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지역학으로의 이행은 분명했다. 사회과학자들이 연구 대상 지역의 언어를 익혀 지역의 자료를 활용하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이 기술을 갖추고 있는 동양학자들이 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이해를 도우러 나서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이 학술방법의 변화 추세를 보고서에 담았고, 역사학계 동료들은 그것이 합당한 상황 파악이라고 동의해주었다. 몇 해 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에 참여할 때 보니 이 방법이 분과 경향이 강한 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자기네 연구방법이 보편적이고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믿는 사회과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학 연구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고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이론들만 득세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과거를 탐구하는 다른 방법들에 마음을 열어놓고 사회과학 연구방법에서 배울 만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문학의 배경에서 출발한 나로서 모든 연구를 지배하는 보편적 이론의 주장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1960년 런던의 소아스에서 다시 1년을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전통시대 중국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때 가르치고 있던 영역까지 연구분야를 넓혔다. KL에 돌아왔을 때 우리 초대 학과장 존 배스틴 교수가 갑자기 퇴임하고 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첫 말라야인 역사학 교수로서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동아시아사 강의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과장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발전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 교과서에 식민주의 편향성이 남아있다는 지적이 몇 해 전부터 있었다. 그에 대응하는 연구가 필요했고, 나는 우리 학과 교수들의 역할을 바랐다.

 

나 자신의 연구업적은 중국과 해외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둘 다 우리 지역의 국가건설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냉전이 아시아로 확장되고 열전이 베트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금 혁명에 관한 지식도 필요했다. 지역 정치지도자 중에는 서양 제국들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마오쩌둥주의의 기원과 동남아시아 중국인들에 대한 그 영향을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이 과제가 어려웠던 것은 현대 중국에 관한 모든 도서와 자료의 열람이 금지되어 있고 지역 중국인의 정치적 태도가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사만 강의하면서 중국 관계 학회와 워크숍에 참석하러 해외에 다닐 때 나는 구할 수 있는 최신 출판물을 통해 지금의 중국에 관한 새 연구의 방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체계적인 연구방법이 못 되었으나 나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학과장이 되어 학과의 진로를 설정할 책임을 갖게 되자 다른 길을 더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까지 베트남의 혁명, 인도네시아의 반동혁명과 중국의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 자신이 중국 연구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1967년 초 시카고의 “중국의 위기” 학회에서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시대와 현대 두 부문으로 구성된 학회였다. 전통시대 부문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국가유산의 파괴를 몰고 온 과정 등에 관해 새로운 시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 부문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내가 너무 모르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지금 중국 청년들이 사적지를 훼손하고 당 간부들을 능욕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중국의 과거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말라야의 제한된 연구조건 아래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걱정하고 있던 상황을 그 학회에서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중국에 관한 내 지식의 공백이 커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말라야와 동남아시아의 역사학자로서 내 몫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까지 해온 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마거릿은 내 걱정을 이해했고, 중국 연구를 계속할지 말라야로 관심을 돌릴지 토론도 했다. 걸려 있는 문제는 알겠는데, 해결할 길이 있을지는 확실한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Posted by 문천

 

대학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교수님들 말씀을 잘 듣고, 필요한 일을 하고, 흥미를 끄는 것을 무엇이든 찾아 읽었다. 잊어버리거나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도록 기록하는 습관도 익혔다. 지식이 더 많아지면 언제고 훌륭한 교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은 공부를 계속해 나갈 자유를 찾기에 좋은 곳이다.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문학작품에 관해, 또는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관해 논문이나 책을 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이론적인 사고도 내키지 않았다. 두 가지 기술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것인데, 나는 무엇을 가지고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차이에 대한 내 관심, 사실과 해석의 차이, 원인과 결과의 차이, 그럴싸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역사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나 사람들 사이, 그리고 정치조직과 사회들 사이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착각한 연결점을 내가 찾아낼 수 있다면 학문에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유산에 둘러싸여 Living with heritages

 

유산에 대한 내 관심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내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어머니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왕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내 교육에 책임감을 보였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줘야 하고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거듭거듭 일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서예 연습을 하고 중국 고전을 가르쳐줌으로써 우리 유산의 시범을 보였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그분들의 고향은 과거였고, 그곳에 나를 데려다주는 것을 내 미래로 생각했다.

 

중국 고전은 아버지에게 한쪽 유산의 핵심이었는데, 그분은 거기 만족하지 않았다. 영문학 공부의 즐거움을 또 하나 유산으로 찾아낸 그분은 형편이 될 때 내가 영어를 일찍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학교 때 나는 영국인 여교사 두 분에게 맡겨졌고, 두 분은 내가 영어를 제대로 쓰게 만들어 자기네 유산에 대한 의무를 수행했다. 그 뒤에는 스리랑카인과 인도인 교사들에게 영어로 여러 과목을 배웠다. 아버지는 내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유산을 갖게 된 사실을 알고, 어느 쪽에서든 배울 만한 것을 내가 알아서 배우도록 맡겨두었다.

 

일본 점령 때문에 물려받는 유산이 더 늘어났다. 나는 중국인학교에 몇 달 다니다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그만두게 했다. 친구 자제들에게 중국 고전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반에 나를 넣었다. 그 안에서 경쟁하며 중국어가 늘었으나 그 유산에 대한 내 이해는 어설프고 뒤죽박죽이었다.

 

하카계나 광둥계 친구들은 아버지가 표준어로 고전 읽는 것을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아버지는 방언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만다린”, 또는 “궈위(國語)”라 불리는 표준어만 썼다. “페킹 방언”이라고도 하는데 틀린 이름이다. 표준어 중 북방계가 “만다린”인데, 남쪽 수도 난징의 관료들이 쓰던 남방계가 따로 있었다. “남방 만다린”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집에서 쓰던 표준어가 이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하카어와 광둥어도 내 유산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배워서 썼다.

 

난징에서 대학 다닐 때는 누구나 어떤 종류든 표준어를 썼다. 언어 능력의 표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이 내 쪽이었다. 교수님과 급우들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는지 늘 불안했다. 장난과 저장에서 온 사람들은 우(吳) 말씨가 두드러졌다. 충칭 시절의 학교를 따라온 쓰촨 사람들은 말씨가 하도 달라서 알아듣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장시와 푸젠 경계 지역에서 온 한 친구는 통역 없이 대화가 안 되었다. 내 유산에 자신감을 느낀 것은 문학 강의뿐이었는데, 교수님이 고대 시문에 문헌학 주석을 많이 붙여 가르쳐주는 강의였다. 원문에 비해 우리 이해가 가능한 보통 고전한문으로 주석이 붙어 있어서 교수님의 지독한 푸저우 방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라야에 돌아와서는 중국의 기억들을 구석에 치워놓고 새 나라의 유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라야대학은 출발점으로 좋은 곳이었다. 학생 중에 모든 지방 출신이 있었고, 싱가포르 출신 외의 남학생들이 모두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페락 외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도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어느 주나 출신 학생이 있었고, 덕분에 말라야연방 출신의 우리 모두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새 친구들과 늘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정보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

 

말레이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말레이어를 잘 배울 필요와 여러 지방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이해할 필요가 분명해졌다. 말레이인 정치지도자들이 새 말라야연방에서 말레이-무슬림 유산이 보호받도록 힘을 합쳐 노력하고 있음을 들으며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비-말레이 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썼는데, 자기네 언어도 따로 쓰는 친구들이 있었다. 비-말레이인 비율이 큰 지방들이 있고 도시마다 인도인과 중국인 비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내게는 즐거웠고, 자기 출신지 이야기를 많이 해달라고 친구들을 늘 졸랐다. 열심히 묻는 것이 배우는 데 제일 좋은 길임을 그렇게 하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말라야인이 되기 위해서는 글을 영국인처럼 쓰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어서 몇 편 시를 시험삼아 써본 것이 1959년 <맥박(Pulse)>이란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그 책에 실린 “달 생각(Moon Thoughts)”이 제일 처음 쓴 것인데, 잠 안 오는 밤 늦은 시간에 기숙사 복도의 형광등 아래 쓴 것이다.

 

이 시집을 대단하게 여겨준 친구는 없었으나 나는 시인으로 통하게 되었고, 몇 달 후 마닐라의 작가 워크숍에 록펠러재단의 초청을 받았다. 재단의 아시아 담당 이사 찰스 파스가 우리 영문학 교수 그레이엄 하우를 만났을 때 <맥박> 한 부를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워크숍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작가들로부터 민족문학의 의미를 배웠다.

 

Moon Thoughts “달 생각”

 

The moon, impure as ever, like tea-leaves,

Coffee dregs, on a cup of cream, cleaves

On to drooping leaves of rubber trees,

Scatters bright thieves to steal the keys

That open to mem’ries of home.

 

Distracted, home seems distant, fades

Into the light of nascent night, the same

That shone on ancient heroes born.

Thought loiters among the glorious shades,

And martyrs and lovers, alike they, came,

Welcome as dewdrops on to the evening lawn;

How they embalm the thought-cells,

How they sweeten the deepest depths of mind’s own dells.

 

The Truly Great adorn these green arcades,

Marble images, idols, now but shadows,

Spectre-like in the moonlit glades,

Have-beens; the night returns, but their lives

Come no more.

Think no more, home appears nearer;

The moon, impure as ever, becomes clearer.

 

워크숍을 주재한 미국 소설가 월리스 스테그너는 나에 관해 이렇게 썼다: “하나의 극단적 예로 말라야의 젊은 시인 한 사람을 생각해 보시라. 중국어와 인도네시아어(말레이어)를 알면서도 굳이 영어로 작품을 쓴다.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출생지인 인도네시아 국민도 아니고 부모의 출생지인 중국의 국민도 아니다. 살고있는 말라야의 국민도 아니고, 종족 때문에 될 수도 없다. 여권에는 ‘영국 보호령 주민’으로 표시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대변할 사람도 없는, 뿌리를 잃어버린 아시아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이다. 깨어진 제국의 한 조각 파편으로서 자기 것 아닌 언어로 누구인지 모를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다.”

 

워크숍에서 돌아올 때는 내 생각이 조금 자라나 있었다. 학생회에서 1학년 대표로 뽑힌 뒤 학생회보 편집을 맡은 것은 많은 것을 배울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에서 나중에 학생회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말라야대학에서 마침내 학생들의 정치모임을 허용하기로 했을 때 결성된 사회주의클럽의 회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나는 온갖 학생 정치운동에 관여하고 반-식민주의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 말에는 학문의 길로 나아갈 결정을 내리고 학생운동에서 역할을 정리했다. 학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 과정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런데 역사학을 전공으로 정하고 보니 내게 말라야 유산이 없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동료 학생들과 내가 공유하는 조건은 영어 학교에 다녔다는 것뿐이었다. 영국의 개입에 관해 읽은 것이 좀 있고, 바바(해협식민지의 중국인)와 신커(新客, 새로 이주한 중국인)에 관해 들은 것이 있었으나 인도인과 말레이인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관해서는 이해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 유산에 이끌려 말라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중국 고대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문서에만 의존하지 않으려면 남중국해 건너 중국과의 관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주제를 석사 과정의 첫 연구과제로 삼기로 결정했다.

 

1953년 늦게까지 나는 남해의 고대 교역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서 배우고 토론하는 모든 것이 서양의 패권에 연결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경제 이론 과목도 그랬고, 진행 중인 탈-식민 과정을 지배하는 교역과 화폐의 자본주의 기반도 그랬다. 오직 영국문학의 고전에서만 열등감 없이 인간의 조건에서 재미와 어리석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다.

 

대륙 중국으로 눈을 돌려 중국사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석사논문의 경험 덕분이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고전한문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런던대학 소아스에 있을 때 나는 우리 지역의 역사와 완전히 떨어져 지냈다. 그 대신 초원에서 온 오랑캐 전사들이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던 정치적 분열의 시대로 눈길을 돌렸다. 그 상황에서 한족의 송나라가 새로 키워낸 학인 계급은 관직을 담당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천 년간 지속될 유가 유산을 정리해내고 있었다.

 

이제 돌아보면 그때 내가 한 일은 여러 갈래 유산을 통해 공부를 쌓아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주변의 여러 문자를 통해 공부하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한 갈래 유산의 스승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다른 유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아마 그런 방식이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역사 공부를 접어놓고 북중국에서 벌어진 한족과 돌궐족 사이의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유산을 살펴볼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주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공부한 내용을 전달해 주는 근대적 방법론을 습득한 것이다.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공부를 해낸 경험으로 생각한다. 근대적 역사서술과 고전적 중국학을 내 나름대로 결합한 내 글쓰기 방식은 주관적이고 주변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설명에 타당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식의 글쓰기에서 어떤 전문적 기술을 터득한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으나, 서로 다른 문명들 사이에 여러 분야 학술을 활용하는 통행로의 건설 같은 일로 생각했다.

 

방법에 관한 생각 없이 공부를 해나가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오래된 문명에 더 이상 소속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나의 새집은 아직 모습을 갖추지 않은 말라야로서 말레이인 귀족과 평민들의 열망 속에 지어지고 있었고, 외지 출신의 상인-노동자 집단이 그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복잡한 배경 위에서 결국 어떤 모습의 국가가 나타날지 그려보는 데는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다.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지 아직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홍무제와 영락제가 다스리던 명나라와 같은 시기의 몽골 지도자 티무르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티무르가 죽자 그가 통합해 놓았던 몽골-투르크 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반면 명나라는 영락제와 건문제 사이의 숙질간 투쟁을 겪고 몽골족의 공격을 계속 받으면서도 2백 년간 안정을 지켰습니다. 이 왕조국가는 가족관계 위에 세워져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지만 치밀하게 조직된 관료제도가 통치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런 치밀한 관료제도가 근대 이전의 유럽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중세 유럽에는 중국에서와 같은 직업적이고 사명감을 가진 관료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이후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놀라운 제도에 탄복해서 보고서에 담았습니다. 이런 1인 전제체제는 안정성이 어느 수준이든 통치자의 초법적 위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통치자의 권력이 자연법이나 어떤 법적 장치로 제한될 수 있다는 관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관건은 통치자의 영도력과 보좌하는 직업적 관료집단의 역량에 걸려있었습니다.

 

관료집단의 역량은 커질 때도 있고 작아질 때도 있었지만, 유럽-지중해 지역에서 익숙한 공동체(gemeinschaft)와 사회(gesellschaft) 사이의 구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구별이 있었다면 공동체 쪽으로 완전히 쏠렸을 것입니다. 공동체 관념은 통치자의 초법적 위상을 뒷받침해주었을 것입니다. 동쪽으로 확장해 나오는 유럽-지중해 세계와 오랫동안 접촉을 가지는 가운데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국가와 통치자를 동일시하는 관점은 그대로입니다. 공산당이 초법적 위상을 가지는 중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황제의 위치를 넘겨받은 공산당은 꼭 “1인” 체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당을 이끄는 소수집단은 황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지중해 지역에 적용되는 법률적-헌법적 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통치자와 국가는 중국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의 통치자에게 국가의 진로를 맡기는 전통은 떨쳐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세계적 해양경제의 필요에 따른 새로운 체제 규범이 도입되어 중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심층구조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새 지도자들은 필요한 변화에 적응해 나가고 인민은 과학과 기술, 자본주의 방식의 사업과 금융 등 중요한 경제제도를 포함하는 근대적 관행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에 필요한 방법과 기술을 확보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학습의 진도가 빠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물려받은 심층구조를 버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대세가 된 새로운 체제 규범 앞에서도 심층구조가 견뎌내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는 과학사상과 기술 발전 앞에 심층구조가 해소되고 세계화된 세계에 더 적합한 사상과 제도의 구조로 바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도 정치계와 사상계의 지도자들은 물려받은 유산을 지키는 데 애쓰고 있습니다.

 

정치적 힘과 경제적 힘 사이의 관계가 대표적 현상입니다. 도시화-산업화된 근대국가에서는 두 힘이 분리되어 균형관계를 이룹니다. 독립성을 가진 경제적 힘이 정치적 힘을 견제합니다. 많은 신생국에서는 세계경제의 방식과 방법을 아무리 많이 도입하더라도 이 분리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정치력과 군사력이 앞섭니다. 그 힘 없이는 재부(財富)를 일으키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힘듭니다. 법률이 대신해줄 수 없는 일입니다. 대륙의 유산 속에 자리 잡은 심층구조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The Southeast Asian Chinese Context /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제가 글을 쓴 일이 있는 주제인 해외화교에 관한 이야기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이 대목에서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해외화교는 대륙세계 밖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그들은 말레이군도 지역의 조그만 나라들을 드나들며 그곳의 지중해 비슷한 조건에 적합한 방식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국과 전혀 다른 해양 환경에 익숙해졌습니다. 교역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고향과의 관계를 위해 고향의 풍속을 지켜 왔습니다. 가문의 관행에 따르는 활동 방식을 가능한 한 따랐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가족 중심의 심층구조는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전통적 질문 하나를 다루는 학술회의에 얼마 전 참석했습니다. “가문의 사업이 3대를 이어갈 수 있는가?” “3대 가는 부자가 없다(富不過三代)”는 중국 속담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100명 넘는 참가자들이 지금 세상에도 이 속담이 통하는지 토론을 벌였습니다. 심층구조에 관한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생 때 선바오(申報) 등 상하이 신문에서 중국의 사업가들이 족벌회사를 벗어나 진짜 회사로 나아가는 길에 관한 토론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많은 사람이 걱정하던 문제였습니다. 중국인은 아직도 가업(家業)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국가의 이름으로 모든 경제활동과 제도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시진핑 같은 강력한 지도자 아래 그 통제는 더욱더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산당의 초법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심층구조 덕분에 공산당은 법을 이용해서 경제발전의 모든 국면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경제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가족관계의 신뢰보다 더 큰 신뢰가 필요하게 되는 상황에서 법률의 역할이 중요해졌습니다. 제도 운용에 법률의 역할이 필요한데도 아직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습니다. 공산당이 법률을 이용하고 통제하는 힘을 지키기 위해 법률 위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외화교는 중국 밖에서 오래 지내고도 가업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 드뭅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오에이티옹함(黃仲涵, 1866–1924)이 드문 예외의 하나입니다. 네덜란드에서 설탕 사업을 벌이면서 세계적 기업들과 연계를 맺었습니다. 사업을 키우는 데 네덜란드의 법률과 관행에 의지하면서 중국의 전통에서 벗어났습니다.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두 가지 다른 예를 보지요. 태국은 유럽의 지배를 받지 않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밖의 동남아시아는 모두 유럽인의 식민지로서 새로운 통치 이념과 외래의 법률체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국가가 없던 곳에 식민지를 거쳐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식민지의 통치기구를 물려받았습니다.

 

태국은 이와 달랐습니다. 전통적 통치구조가 그대로 있으면서 부분적 변화만 겪었습니다. 그곳에 온 중국인들은 식민지에 가면 식민지체제에 적응하듯 태국의 체제에 적응했습니다. 그래서 태국의 상황은 유럽의 제도가 들어오지 않은 1인 전제체제 아래 중국인이 어떤 활동 방식으로 나아가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수코타이왕국과 아유타야왕국 이래 태국의 왕조 통치는 불안정했습니다. 일찍 들어온 중국인들은 태국 사회에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왕과 왕족, 그리고 다른 귀족들과 유대를 튼튼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영국이 만들어낸 싱가포르를 봅니다. 기대하지 않던 독립을 하게 된 싱가포르는 식민지의 법률과 제도를 국가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인민행동당 정권은 군주가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는 중국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가부장적 원리에 따라 작동합니다. 영국의 법률체계와 공무원제도와 의회제도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근대적 법률적 권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제도는 영국식이지만 통치의 정신은 지역민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권력자와 가부장은 자애로운 존재입니다. 중국인과 태국인이 기억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두 나라 사람 모두 민족국가로 이뤄지는 지금 세계의 체제 규범에 적응했다고 주장하지만, 유럽-지중해 방식의 체제 규범에 얼마나 접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 나라가 새로운 민족을 만들려고 애쓰는 국가라고 합니다. 국경선이 있고 행정조직이 있으나 국가로서 추상적 개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강한 지도력과 명확한 지향성과 발전의 목표를 가지고 약속을 이행하는 지도자의 존재에 더 끌립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한 차례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권력자가 역할을 물려받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세계에서 지중해세계와 비슷한 조건을 알아볼 수 있지만, 심층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지난 2백 년간 새로운 체제 규범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심층구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제시한 두 가지 사례 중 태국의 경우에는 중국인이 기존의 상황에 대응한 방식을 알아볼 수 있고,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서양식 체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강력한 지도자에게 의지하는 전통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체제 규범과 오래된 심층구조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 세계에 하나의 초강대국이 있는데 그 초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의 도전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긴장에도 같은 문제가 보입니다. 초강대국이 추구하는 체제 규범이 바닥에 깔려있는 심층구조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심층구조에 반격의 힘이 있을까요? 아주 강력한 체제 규범이 나타나더라도 그 구조가 그대로 지켜질까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경제와 금융의 새 기술을 구조 안에 받아들이면서도 변화를 최소화하고 원래 구조를 최대한 지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할까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화된 세계에서는 유럽-지중해문명의 흐름이 재생한 문명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된 심층구조들이 결국은 새로운 전 세계적 지중해문명을 빚어내 더 널리 공유될 것입니다.

 

2014년 11월 제2차 유라시아 관계사 학술대회 기조강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