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리장성은 대단히 강한 아우라를 가진 문화유산이다. 사람들이 장성을 제일 많이 참관하는 곳이 베이징 동북쪽 교외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인데, 놀라운 위용이다. 그런 웅장한 성곽이 도시 하나를 감싸도 대단한 물건인데, 그것이 1만 리도 넘는 길이로 뻗어 있다니!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바다링에서 장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고통과 치욕의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장성을 들먹인 것이다.


닉슨의 이 말은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The Great Wall, China against the World, BC 1000~AD 2000, 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장성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고 이 글을 쓰는 데도 참고가 된 책이므로 이 책에 관한 생각을 조금 적어둔다.

 

2006년 이 책이 나왔을 때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얼른 구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이런 책이 21세기에 나오다니!”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나왔으면 크게 환영받았을 책이다. 백 년 전의 선교사들보다 자료 수집을 좀 더 체계적으로 했다는 것 외에는 사고력과 분석력에 아무 차이가 없다. 무엇보다 중국을 깔보고 중국문명의 가치를 낮춰보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료를 멋대로 재단하는 난폭함에는 백 년 전 선교사 중에도 낯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큰 가르침을 얻은 선학 중에 영국의 조지프 니덤, 프랑스의 자크 제르네,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영국 출신인 조너선 스펜스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학풍을 은근히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오염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중국 때리기’가 연구비, 학위, 교수직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 지금까지도 서양 학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출간 직후에 입수했던 원서를 언제 누구에게 줘버렸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번역본을 빌려 보았다.

 

로벨의 책에 좋은 관점도 많이 있다. 장성을 쌓은 목적이 방어만이 아니라 공격에도 있었다는 관점은 훌륭한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공격‘에만’ 있었던 것처럼 우기는 건 지나치다. 중국의 호전성을 규정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느낌이다.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서 산시(陝西)성까지, 일찍부터 중원에 포괄된 지역의 북쪽으로 둘러쳐진 장성은 분명히 방어용이다. 그러나 그 서쪽으로 간수(甘肅)성 깊숙이, 둔황(敦煌) 부근까지 세워진 부분은 농경지역을 방어하는 목적이 아니다. 한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이 구역은 서역(西域)과의 교통로로서 감숙회랑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역사부도에 나오는 한나라 강역. 감숙회랑을 거쳐 사막지대에 이르는 서쪽 영역은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군사적 관리의 대상이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교통로는 기원전 2세기 말 장건(張騫)이 개척한 이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육상 교역로가 되었다. 서역(인도 포함)은 중국 부근의 가장 큰 문명권으로서 한나라 때부터 중요한 교역 상대가 되었는데, 해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가장 중요한 통로가 실크로드로 떠오른 것이다. 실크로드 대부분은 사막과 고산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크게 방해되는 세력이 없는데, 유일한 위협세력이 흉노 등 북방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기 위해 장성을 이어 쌓은 것이었다. 그런데 로벨은 이 구역의 특성을 장성 전체에 적용시키려 든다.

 

글 앞쪽에서 북경 가까운 바다링 언저리 장성의 위용을 보여드렸는데, 로벨은 장성 전체가 그런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 책이 2006년이 아니라 1906년에 나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다. 1793년에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건륭(乾隆)황제를 만나러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가는 길에 장성의 위용에 감동해서 장성에 사용된 석재의 양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모든 건물에 사용된 분량”과 맞먹고, 높이 2미터 두께 60센티미터의 벽으로 지구를 두 바퀴 감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했다. 이것은 5천 킬로미터 길이의 장성 전체가 자기가 본 곳처럼 두께와 높이가 각각 10미터 전후에 이르는 석축일 것으로 가정하고 계산한 것이다.

 

그런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큰 석재와 벽돌을 쓰는 그런 웅장한 축성법은 대포가 많이 쓰이게 된 명나라 때 북경 등 제국의 중심부를 보호하는 구간에만 사용된 것이었다. 명나라 이전에 세워진 성벽은 진흙과 돌멩이 등 현장 부근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최소한의 전술적 우위를 목표로 간략하게 건설되었다. 간수성과 랴오닝(遼寧)성 등 변두리 구간은 더 허술했다.

 

또 하나 로벨의 심한 억지는 장성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장성을 세운 중국인을 사악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한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것이다. 장성이 제 구실을 못한 일이 역사를 통해 여러 차례 있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 구실을 한 때가 더 많았다. 제 구실 못한 것이 특이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장성은 돌로 쌓은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조물 자체가 방어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물을 이용하는 군사제도가 효능을 가진 것이었다. 제국을 옹위하는 제도는 일시적 상황이 제국을 쉽게 무너트리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러나 제국의 근거가 무너질 때는 제국의 한 부분인 제도가 어떻게 혼자 버틸 수 있는가? 

 

1644년 청군의 입관 장면을 보자. 요동(遼東) 지역의 숱한 방어선이 무너진 뒤까지 장성은 버텼다. 명나라가 무너져서 장성이 뚫린 것이지, 장성이 뚫려서 명나라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에게 유린당할 때 오삼계는 당시 중국인을 대표해서 선택을 내린 것이고, 그 선택의 기회는 장성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다. 명나라가 잃어버린 천하를 이자성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청나라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2006년 나온 로벨의 책 참고서목에 1997년 나온 패멀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The Manchus, 양휘웅 옮김, 돌베개 펴냄)가 빠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로벨이 그 책의 존재를 몰랐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입맛에 맞지 않아서 무시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장성은 중화제국이 존재한 2천여 년 동안 화하와 외이 사이의 장벽으로 서 있었다. 다른 어느 방면에서도 볼 수 없는 굳건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굳건한 장벽도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팎의 상호관계에 절제를 가함으로써 변화를 순조롭게 만든 효용도 장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화와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서 보다 긴밀하고 유기적인 측면을 찾는 작업의 초입에서 장성을 둘러싼 교섭관계를 먼저 떠올려본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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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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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 황하문화권, 장강문화권, 파촉문화권 등 기존의 중요한 농경지역이 모두 ‘중원’으로 통합되었다. 그에 따라 전국시대 이후의 외이는 농경문화를 갖지 않았거나 비중이 작은 부족들이 되었다. 그러나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발달에 따라 전에는 농업화가 어렵던 외이 지역으로 농경문화가 꾸준히 퍼져나갔고, 중원은 그런 외이 지역을 단계적으로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한반도는 농경문화가 고도로 발달된 뒤까지도 바다로 떨어져 있어서 중원에 흡수되지 않은 특이한 지역이었다.

 



농경문화의 확장 방향을 살피기 위해 중국의 건조지수도(乾燥指數圖, 中國水利水電科學硏究院水資源所 편)를 살펴본다. 건조지수(연 강수량에 대한 연 증발능력의 비율) 2.0 이하인 지역이 초기 농경에 적합했을 것 같다. 황하와 장강 유역, 남해안, 그리고 동북(만주) 지역 대부분과 감숙회랑(甘肅回廊,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도 한다.)이 이 조건에 맞는다. 


황하와 장강 유역의 중원에 자리 잡은 농경문명은 천여 년에 걸쳐 남해안, 지금의 푸젠(福建)성과 광둥(廣東)성 지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 남방지역의 초기 농업발달이 늦은 조건 두 가지가 흔히 지적된다. 온난-습윤한 기후 때문에 숲이 빽빽해서 개간이 어려웠으리라는 것과 강우량이 많은 곳의 대규모 개간을 위해서는 배수(排水)라는 고난도 수리(水利) 기술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철기 보급이 이들 조건의 극복에 큰 역할을 맡음으로써 농경문화의 남방 확장이 순조로워졌다는 설명이 따른다. 남방은 중국문명이 꾸준히 진격해 나아간, 방어보다는 공격의 방향이었다.

 

동쪽과 남쪽으로의 확장이 바다에 막혔다면, 서쪽으로의 확장은 산악과 사막에 막혔다. 티베트 고산지대와 신장(新彊)-칭하이(靑海)의 건조지대는 농경만이 아니라 어떤 산업에도 적합지 않은 곳이어서 인구가 희박했다. 바다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인간 활동의 장벽이었다.

 

북쪽이 변화의 여지가 큰 방면이었다. 정북방에서 동쪽으로는 강우량이 꽤 되고 지형도 평탄한 지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많은 유목민이 생활할 수 있는 초원지대가 있고,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사회가 자라날 수 있는 지역도 많이 있었다. 흉노(匈奴)로부터 선비(鮮卑), 돌궐(突蹶),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고(蒙古), 만주(滿洲)족에 이르기까지, 중원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오랑캐의 대부분이 이 방면에서 나타났다. 장성(長城)이 필요한 방면이었다.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중국 쪽에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있다. 중국 입장에서 남긴 이 기록에는 중국의 우월성을 강조 내지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경향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를 크게 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화-이(華-夷) 관계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경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중국 기록 내용에 비해 오랑캐와 중국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양자 간에는 공유하는 것이 많았으리라고 나는 추정한다.

 

북방의 만리장성은 화-이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현장이었다. 화-이 관계가 이질적 존재들 사이의 단순한 대립관계가 아니었으리라는 내 추정을 이곳에서 제일 먼저 확인해 본다. 대립이란 것 자체가 공유하는 것이 꽤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소 닭 보듯” 하는 이질적 존재들 사이에는 대립조차 일어나기 어렵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중국 왕조는 한나라와 명나라였다. 한나라에게는 흉노라는 숙적이 있었고 명나라는 몽고족과 오랫동안 다투다가 나중에는 만주족에게 유린당했다. 흉노, 몽고족, 만주족은 당시의 중국과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을까? 나중에 더 세밀히 살펴보겠지만, 오늘은 약간의 실마리를 뽑아두겠다.

 

진 시황이 흉노에 대비해서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시황이 경계한 것은 ‘호(胡)’였다. <<사기>>에 ‘동호(東胡)’로 나오는, 당시에 흉노보다 강성한 세력이었다. 흉노건 동호건 전국시대에는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인접한 제후국인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그럭저럭 통제하던 작은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나라의 통일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나타난 것이 어찌된 일일까?

 

전국 말기 중원의 대혼란을 피해 많은 인구가 북방으로 달아났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였다. 망명자 중에는 큰 세력을 이끈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한왕(韓王) 신(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 같은 제후들까지 흉노로 넘어갔다. 그런 망명자들이 많은 선진기술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제철(製鐵)을 비롯한 생산기술부터 정치기술과 병법(兵法)까지. 대규모 기술 유입이 아니라면 이 시기 흉노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사기>> <흉노열전>에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이 보인다. 문제(文帝) 때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에 귀순한 환관인데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선우(單于)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유목사회에 없던 행정기술을 전파해준 것이다.

 

진나라 또는 한나라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흉노는 대안을 제공해준 것이다. 한왕이나 연왕에게는 만족할 만한 신분과 생활양식을 보장해줄 수 있었고, 중항열 같은 인물에게는 경륜을 펼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전혀 이질적인 야만사회라면 그런 조건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흉노가 중국문명을 상당 수준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망명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래서 중화제국을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고조가 천하를 차지한 후 진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의 연합세력이던 이성(異姓) 제후를 핍박하기 시작하자 기원전 201년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했다. 이듬해 고조가 32만 병력으로 흉노를 원정했지만 오히려 포위당해 곤욕을 겪었다. 그 후 70여 년간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저자세로 흉노를 대하다가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경우에는 몽고족 아닌 만주족에게 천하를 넘겨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이후 명나라를 내내 위협한 것은 몽고족이었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일도 있고 북경까지 쳐들어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접수할 때 몽고족은 일부가 그 밑에 편입되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신흥세력인 만주족이 결정적 단계에서 주도권을 쥔 이유가 무엇일까?

 

(1449년 명 영종(英宗)이 몽고 오이라트부를 정벌하러 출병했다가 오히려 포로로 잡히는 토목지변(土木之變)을 겪었다. 그리고 1550년에는 알탄 칸의 군대가 북중국 일대를 휘젓고 북경 성문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몽고족보다 만주족 사회가 중국문명에 더 접근해 있어서 중국인들이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는 점에서 나는 결정적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그 차이는 농업화의 수준에 있었다고 본다. 만주족의 주된 구성원이 된 거란족과 여진족은 10세기 초에서 12세기 초까지 북중국을 통치한 일이 있고 몽고족은 12세기 초에서 13세기 중엽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농경문화가 전파될 기회였다. 그런데 몽고족의 본거지인 초원지대는 너무 건조해서 농업화가 힘든 반면 동북 지역은 농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만주족이 동북 지역에 세운 후금(後金)은 상당 규모의 농업사회를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 좌절감을 느낀 중국 지식인과 기술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1644년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쉽게 문을 열어준 이유 하나는 만주족이 선포한 청나라가 중화제국의 체제에 접근해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아닌 청나라의 천하에서도 그는 장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이 몽고족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한 뒤에 패멀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양휘웅 옮김, 돌베개)를 읽었는데, 입관 당시 만주족의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다. 만주족이 몽고족과 달리 농업사회에 큰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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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문명의 본질은 농업문명이다. 석기시대까지는 농업의 생산성이 수렵-채집과 차이가 아직 적었다. 농업사회가 다른 사회들을 압도할 조직력을 키울 만큼 잉여생산이 크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농업사회의 치밀하고 거대한 조직이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의 발생으로 표현되는 이 단계가 중국에서는 하-상 왕조로 기록되었다.


상나라 탕왕(湯王)이 하나라를 정벌할 때 천여 개 나라가 따랐는데,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는 백여 개 나라가 따랐다고 한다. 무왕이 탕왕보다 인기가 덜했던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숫자가 줄어든 것이다. 온 천하의 지지를 받은 것은 탕왕이나 무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주 무왕 때의 백여 개 나라 중 태반이 지금의 허난성 영역에 있었다고 보면 한 나라의 크기는 우리의 일개 면 내지 일개 군 정도가 보통이었을 것이다. 아직 도시국가 단계였다. 나라의 크기는 계속해서 커지고 숫자는 줄어들어서 영토국가 단계로 나아갔다. 춘추시대에 접어들 무렵에는 대부분 지역이 영토국가에 편입되어 있었고,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7웅(七雄)을 비롯한 10여 개 영토국가가 중원(中原, 화하의 영역)의 모든 땅을 나눠 가진 상태가 된다.

 

춘추시대 초기의 제후국
전국시대 초기의 제후국


‘중원’의 범위도 넓어졌다. 중국에는 초기 농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 넓은 지역으로 황하 중류 유역, 양자강 중하류 유역과 양자강 상류 유역을 꼽을 수 있다. 청동기문명의 발전에 따라 이 세 지역에서 나란히 ‘나라(國)’로 불리게 되는 큰 정치조직이 자라났다. 이 단계에서는 세 지역의 문명수준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상호 접촉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황하문화권과 장강(長江)문화권, 파촉(巴蜀)문화권이었다.

 

기원전 13-11세기 상나라 수도의 유적인 은허(殷墟)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

 

우한(武漢)시 인근의 반룡성(盤龍城) 유적. 기원전 15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성내 면적이 75499평방미터로 측정되었다.
반룡성 등 우한시 인근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청두(成都)시 인근 삼성퇴(三星堆) 유적 일부

 



삼성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황하-장강문화권과 전혀 다른 양식의 유물이 많다.


중국문명 초기의 역사기록이 황하문화권 입장의 서술로 남아있는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 이래 문명권의 통합이 황하문화권의 주도 하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문명이 ‘황하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고학 발굴과 연구의 진행에 따라 황하문화권은 초기 중국문명권의 일부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다.

 

문명권의 통합에서 황하문화권이 주도권을 쥐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철기(鐵器) 보급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여러 해 동안 검토해 왔다. 중국의 철기시대에는 세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는 광석에서 추출한 철괴를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빚어내는 단조(鍛造)가 오랫동안 주종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높은 온도로 녹여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주조(鑄造)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단조가 수공업이라면 주조는 공장공업이라 할 만큼 생산성이 높은 방식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철기의 사용량이 다른 지역보다 많아서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사실을 한(漢)나라에서 철기가 소금과 함께 중요한 전매품목이 되고 외국에 대한 수출금지 품목이 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철기시대 진입의 의미가 특별히 컸다는 점을 생각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에도 큰 배경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유럽 고고학계에서 선사시대의 시기 구분방법으로 확립된 석기-청동기-철기의 3분법을 중국에는 적용시키기 어렵다는 학자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문자기록이 일찍 시작되어 청동기시대 중에 이미 역사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는 철기시대가 한참 진행된 뒤에 문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근년에 춘추전국시대의 유적 발굴이 많이 이뤄졌는데, 철기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것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유적뿐이다. 철기의 대량생산이 그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춘추시대 이전에 황하문화권이 중화문명의 주도권을 쥐는 과정과 연결시킬 수 없다.

 

청동기시대 말기에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지중해 동부 지역의 ‘후기 청동기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는 현상이 서양 고대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원전 12세기 전반기의 짧은 기간 중에 그리스의 미케네, 바빌론의 카시트,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이집트 왕조 등 당시의 문명 중심지가 거의 모두 파괴되거나 몰락한 사실에 관심이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변화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지만 철기의 출현과 그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미케네는 기원전 16세기 이래 그리스문명의 중심지였는데 기원전 12세기 들어 급속히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바빌론 지역을 통치하다가 기원전 1153년에 동쪽에서 온 엘람 족에게 정복당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1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180년경 붕괴해서 여러 개 도시국가로 쪼개졌다. 이집트 신왕조는 람세스 3세(기원전 1186-1157 재위) 이후 통치력을 상실했다.)

 

장강문화권이 춘추시대를 통해 중화문명권에 합류한 사실은 초(楚)-오(吳)-월(越) 세 나라의 등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세 나라 모두 중원의 기존 세력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았지만 강대국의 위용을 뽐냈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에서 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송나라 양공은 춘추5패(春秋五覇)에 꼽힐 만큼 큰 위세를 떨친 군주였으나 초나라에게 뜻밖의 패전을 당해 몰락했다. 송군이 포진한 앞에서 초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며 양공의 좌우에서 공격하기 좋은 기회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양공은 거절했다. “상대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초군이 강을 건너와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때 좌우에서 다시 공격을 권했으나 양공은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갖춘 초군이 공격해 오자 송군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고사는 양공 개인의 지나치게 어진 품성만이 아니라 송-초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중화의 일원을 자부하며 전쟁에도 격식을 차리는 송나라와 “이기는 게 장땡!”이라며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초나라의 차이다. 공자는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찾아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전쟁 방식에는 확실히 오랑캐의 가르침이 통했다. 춘추 초기에 비해 춘추 말기의 전쟁은 “너 죽고 나 살기”의 오랑캐 방식으로 옮겨가 있었다.
또 하나 큰 문화권인 장강 상류의 파촉은 기원전 316년에 진(秦)나라에게 정복당했다. 막대한 생산력을 가진 이 지역에서 진나라가 거둔 변법(變法)의 성과가 이후 백년간 진나라의 통일 사업을 뒷받침해 주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장강문화권은 ‘남만’, 파촉문화권은 ‘서융’이었다. 오랑캐의 이름을 가졌지만, 화하와 비슷한 수준의 농업문명과 정치조직을 발전시키고 있던 지역들이었다. <<예기>> <왕제>에 “중원과 이, 만, 융, 적, 모두 자기네 거처와 음식, 의복, 도구, 기물이 있으며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5방의 서로 다름만을 말하고 우열(優劣)을 논하지 않은 것은 농업문명권이 아직 중원에 모두 포괄되지 않고 있던 이 단계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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