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유라시아대륙 교역 네트워크에 관한 파리 학술대회에서 나는 3개 대양에 둘러싸인 이 광대한 대륙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경제적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내 출발점은 기록으로 남아있는 근대 이전의 모든 역사가 이 대륙과 그를 둘러싼 바다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관심과 주의가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상에서 일어난 일에 비해 바다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기록은 허술하고 빈틈이 많습니다. 기록이 허술하다는 것은 문명 발전의 과정에서 바다 쪽의 역할이 작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유라시아대륙의 변두리에서 연속성과 특이성을 가진 세 개 문명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서쪽의 지중해문명에는 아시아 일부와 북아프리카와 유럽이 들어 있었습니다. 남쪽의 인도문명은 인도양에 면한 드라비다 지역까지 포함하며, 동남쪽으로 태평양 방면까지 뻗어갔습니다. 동쪽의 중국문명은 동남아시아 방면에 끼친 영향은 그만큼 크지 않았으나 태평양에 면한 일본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유라시아 중심부의 광대한 영역은 라인강 계곡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지나 인도 북쪽의 고원지대까지 펼쳐져 있고, 이 고원지대에서 발원하는 황하, 장강과 메콩강이 동쪽과 남쪽으로 서태평양을 향해 흘러갑니다. 세 개 문명 중 지중해문명은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의 꽤 큰 바다 하나를 끼고 있다는 점이 다른 두 문명과 다릅니다. 인도문명은 인도양에 접해 있고, 중국문명은 수많은 섬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접해 있습니다.

 

근대세계의 세계화는 지중해에서 번져 나온 해상활동 확장의 결과입니다. 이 변화는 18세기 중엽까지 전 세계 모든 경제권을 통합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통합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 팽창은 해상을 통해 진행되었고, 그 기원은 지중해에서 수천 년간 진행된 정치적-군사적 경쟁에 있었습니다. 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육상에서나 해상에서나 지배력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는 호전적 문화가 자라났습니다. 이 경쟁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오자 아무도 가로막지 못했고, 오래지 않아 인도양과 태평양까지 그 활동을 넓혔습니다. 그에 따라 세 개 문명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유라시아 밖의 새 대륙이 나타났습니다. (남북아메리카를 하나의 대륙으로 봅니다.) 이 대륙은 지중해문명의 유럽 쪽 절반에게 정복되어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상활동 확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들어갔고, 스페인인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도) 반대편으로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양측은 동남아시아에서 서로 마주쳤고, 수십 년 사이에 바다 위의 세계화가 이뤄졌습니다. 이 세계화를 통해 18세기까지 세상이 돌아가는 새로운 원리가 자리 잡게 됩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재부와 권력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가운데 나타난 민족제국이 빚어낸 원리였습니다.

 

 

Shaped by the Mediterranean / 지중해의 역할

 

이 전환의 출발점을 파악하기 위해 지중해의 역사적 역할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5천 년 전 문명의 발생 이후 매우 특이한 경험이 쌓인 곳입니다.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도시들이 거대한 수-륙(水-陸) 제국의 기초를 닦은 후 여러 방향으로 확장해 나갈 역량을 가진 특이한 권력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7세기에 지중해세계가 유일신교의 서로 다른 두 개 갈래로 나눠져 오랫동안 대결 상태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 앞의 1천 년 동안 하나의 거대한 호수를 둘러싸고 수많은 국가와 제국들이 번영과 영광을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이 특이한 역사 속에서 해상전쟁의 긴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지중해에서처럼 기나긴 해상전쟁의 경험을 가진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1500년 이후 국부적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지중해의 분단 상태는 그대로 계속되었습니다. 유럽 측이 바다의 남쪽 절반을 7세기에 이슬람 아랍 세력에게 빼앗긴 상태는 지금까지 그대로입니다. 1500년에 걸친 이 분단 상태로 인해 서유럽은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에 있는 풍요로운 문명들과 접촉이 없어졌습니다. 서유럽 상인들은 인도 경제권으로 직접 찾아갈 수 없었고, 더 멀리 있는 중국의 도시들에 관해서는 알기도 어려웠습니다. 머나먼 그곳의 풍요로움을 어렴풋이 알고 교역에 나서고 싶었으나 지중해의 분단으로 육로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럽인 중 포르투갈인이 최초로 인도에, 그리고 뒤이어 중국에 항해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영국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월한 해상 전투력으로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등 현지 상인들에게 독점적 교역 방식을 강요했습니다. 유럽인이 3개 대양에 진입하면서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수천 년간 지중해의 해상 전투 전통으로 빚어진 특이한 해군력이 그런 지속적 해상 대결의 경험이 없던 다른 지역에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남중국해와 자바해 해역에서 말레이인과 참인의 교역 경쟁에 관한 기록이 있고 스리비자야해상력이 믈라카해협을 지배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인도 남부의 촐라 지배자들이 벵골만을 건너 함대를 보내 스리비자야의 교역권에 도전한 일도 있습니다. 마자파힛과 타이 해군이 잠깐 부딪힌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전의 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지중해에서처럼 지속적이고 치열한 해상 대결이 없었습니다. 지중해와 유럽세력 방식의 치열한 해전 양상은 16세기에야 인도양에 나타났습니다. 그후로는 아메리카대륙의 개척으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산업혁명을 위한 자원이 확보되면서 새로운 해상제국들이 세계의 모습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화였습니다. 봉건제국의 자리를 상업제국들이 넘겨받고 근대유럽의 열강으로 자라났습니다. 베스트팔렌조약(1648)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이어 영국 등 중상주의 민족국가들이 19-20세기를 호령하는 민족제국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유형의 이 제국들이 지난 2백 년 동안 앞으로 모든 국가가 따를 체제 규범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945년 민족국가를 회원의 자격으로 하는 유엔의 결성은 이 규범의 완성이었습니다. 민족국가를 벽돌로 삼는 새로운 세계 질서체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서유럽에서 만들어진 민족국가라는 제도는 널리 확산되어 세계 모든 곳에서 채용되고 있습니다. 식민지체제의 터 위에 민족을 세우고자 애쓰는 아시아의 새 국가들이 이 과업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다른 구조물이 2차대전 후에 나타났습니다. 두 개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세계가 쪼개지는 냉전에 따라 일어난 현상입니다. 두 초강대국의 행태는 민족국가는 물론 18-19세기의 민족제국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냉전이 끝나고 단 하나의 초강대국이 남게 된 것도 과거에 없던 일입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민족제국들이 일으킨 세계적 권력구조가 빚어낸 체제 규범이 두 개 초강대국 체제로 변형했다가 하나의 초강대국 체제로 바뀐 것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련의 변화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 경제권력의 성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산품을 전 세계 시장으로 내보내고 공장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들여오는 해운산업을 해군력이 뒷받침해준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

 

Is The Struggle Over? / 분투의 시기는 지나갔는가?

 

2013냔 시진핑이 집권에 이른 과정은 전혀 근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파벌투쟁의 외곽에 있었습니다. 푸젠성과 저장성에서 뛰어난 경제관료로 근무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수한 혁명지도자의 자제로서 “태자방”의 일원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 중심부의 부패상을 알고 있었고, 그 부패상이 계속된다면 당이 파탄에 이를 것을 깊이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의 지도권을 잡은 그에게 긴박한 과제는 부패를 척결하고 당의 신뢰를 회복해서 공산당의 당당한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소련공산당의 1990년 실패를 돌아보았습니다. 중국공산당이 모델로 삼았던 그 당이 백년도 못 가서 무너졌습니다. 중국공산당은 2021년의 백주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당의 방향감각과 사명감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동안 그 성공이 당의 부패를 키워온 것이었습니다.

 

부패 역시 전혀 근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모든 정권은 부패를 경험하고 그 확산을 경계해 왔습니다. 부패 척결에 대한 시진핑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가 지휘하는 관리팀은 좋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구조조정을 겪은 공산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기강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명감과 안정성과 신뢰도가 모두 향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더해 이 반-부패 활동을 통해 시진핑에 대한 인민의 지지가 높아졌습니다.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120년 전에 시작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이 노력을 체계적-지속적으로 기울일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공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40년은 근대화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이뤄진 기간입니다. 중국은 서양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며 필요한 것을 골라냄으로써 근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택지가 늘어나면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가려낼 자신감을 키웠습니다. 이제 중국은 물질적 발전을 진행하는 자기 방식을 갖게 되었으므로 투쟁적 근대화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20년은 시진핑과 그 동료들이 중국에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가려낸 기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한 꼭 통제해야 할 영역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방법을 서방과 동맹국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는 한편으로 인민이 과학과 기술, 경제와 금융 등 자본주의체제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역량에 제한을 두지 않고자 합니다. 중국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세계 어디서나 경쟁력을 가질 기업들을 설립하는 방법을 계속 배워나갈 것입니다. 경제적 발전의 계속을 위해 세계적 시장경제의 이용을 계속할 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좋지 않다고 판별한 것은 지나친 자유, 개인의 권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리고 자유주의 서방의 선거 관행들입니다. 그런 것 없는 편이 중국에 좋다고 그들은 확신합니다. 세세한 점들에 관한 토론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필요에 부합하는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는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외국 세력이 자기네 정치관을 중국 청년들에게 주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중국인에게 교육할 결의가 충만합니다.

 

The China-US Divide / 중국과 미국

 

위에 그려 보인 중국 근대화를 위한 투쟁 현장의 그림을 보면 중국은 주로 외부세계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통해 근대화를 이뤄 왔습니다. 중국이 배우지 않기로 한 대상은 본질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고 중국의 역사 내용으로 대치함으로써 정체성에 대한 인민의 자신감을 지켜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중국의 핵심 가치들을 지킴으로써 서양이 제시한 것과 다른 근대화의 모델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남반구의 다른 나라들이 이것을 본다면 근대서양의 가치체계가 보편적인 것이고 최선의 것이라고 하는 미국의 주장에 하나의 도전이 될 것입니다.

 

중국이 세계 곳곳에 경제적인 손을 뻗치고 있으며 언젠가 미국이 제시하는 것보다 꼭 낫지는 않더라도 비교할 만한 수준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 전략가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제게는 예측할 능력이 없으나 그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중국이 성공 사례가 된 비자유주의-권위주의 자본주의 모델을 향해 자유주의 자본주의 모델을 등지는 나라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전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자기 나라 경제를 소홀히 한 결과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미국 국민들이 위기감을 느낄 것입니다. 중국이 언젠가 유라시아의 패권을 쥘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대다수 미국 지도자들이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상호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 국민은 근대화 성공의 결과 자기네 정치적 전통과 재접속을 이뤘습니다. 권위주의 통치체제의 회복이라 하더라도 중국이 경제발전을 계속하고 과학기술의 모든 발전을 수용하고 군사적 안보를 확보하기만 한다면 과거로의 회귀라고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이 과제들을 해낸다면 그 정치체제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중국이 자신감을 가지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이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2천 년간 잘 작동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연속성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유산을 물려받음으로써 중국은 그 국민이 근대세계에서 습득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미국이 신봉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직접 통제는 자본주의 제 원리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이 이념적이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미국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국가가 통제하는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직접 통제는 공산주의이고, 박멸해야 할 자본주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그 적들 사이의 전쟁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박멸하려 하는 냉전 양상으로의 복귀가 될 것입니다. 선한 자본주의와 악한 공산주의 사이의 흑백론적 대결에서는 양측 사이의 협력이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경쟁의 길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의 근대화 노력이 새로 배운 것을 자기네 정치구조에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입니다. 중국은 미국의 힘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산으로 물려받아 키워내야 할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세계의 모든 기술을 계속해서 배워 나가려는 것입니다.

 

2019년 화교협회에서 탄카키 기념강연

Posted by 문천

 

Mao Zedong and Modernization / 마오쩌둥의 근대화

 

근대화의 의미가 이렇게 정치화하면서 마오쩌둥은 모든 근대화 노력이 혁명정신에 따라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세대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역사의 발전단계를 물질적 진보로 이해하는 마르크스의 직선적 역사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노예제로부터 자본주의 흥기에 이르기까지 발전단계를 찾아내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자본주의에 이른 뒤에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세상을 결국 이상주의 공산주의 단계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마음에서는 중국 국가와 사회의 역사적 뿌리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근대에 관한 서양의 이념을 모방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중국의 혁명이 러시아와 똑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중국인은 자기네 조건과 이해관계에 가장 잘 맞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에 관해 아는 것이 적고 빈곤과 불안에 시달리는 인민을 만족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조심스럽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파탄에 빠진 준-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아직 남아있던 반공세력을 지원하는 미국의 적대정책에 저항하는 데도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후 흐루쇼프가 이끄는 소련이 수정주의 노선으로 돌아선다고 판단한 마오는 근대화를 향한 독자적 혁명노선에 나섰습니다. 강력한 경제의 기초를 쌓기 위한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했고, 중공업 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고등교육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또한 지배계층의 무사안일에 빠져드는 공산당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행태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이 아직도 필요로 하는 투쟁 정신을 좀먹는 풍조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가르침을 주지 못하는 소련 모델에서 벗어나는 일련의 캠페인을 벌이게 됩니다. 대약진운동과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는 많은 논설에서 다뤄져 왔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중국의 경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사회혁명 앞에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지위를 잃거나 의욕을 잃은 공산당은 예상치 못했던 희생자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오쩌둥은 중국의 유교 전통을 배척한 데 이어 자유-자본주의와 소비에트 방식 양쪽 다 등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근대화는 산업혁명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방향감각을 잃은 그의 “영구혁명”은 막힌 길이었고, 중국의 경제는 붕괴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China Opens Up / 중국의 문호 개방

 

1978년 중국의 새 지도자로 덩샤오필의 복귀는 공산당의 권위 회복에 도움이 되었으나 그 경제개혁이 새로운 종류의 근대성을 중국에 가져오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극도로 조심스러운 자세의 덩은 무엇을 기대하라는 아무런 청사진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지도자답지 않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고 하면서 다리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현대세계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와 같은 5-4세대가 바라보던 서양이 아니라 대전 후 갈수록 높아지는 발전 기준에 따라 나타난 전세계적 근대를 가리킨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만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부근의 일본과 네 마리 용(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이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덩은 중국의 이웃 몇 나라가 제조업, 경제, 교역과 법질서의 여러 면에서 발전해 온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중국에서 진지하게 생각한 일이 없던 방식으로 근대화를 이룬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공산당이 중국을 구원했다고 믿은 덩샤오핑은 이제 당을 구원하러 나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이 제구실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이 만든 병을 고쳐야 했습니다. 규율과 책임감과 능력을 갖춘 집단지도체제가 필요했습니다. 당의 신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덩이 겉으로는 경제개혁 이야기를 늘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제도로서 당의 권위 회복에 마음이 쏠려 있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세계를 향해, 특히 서방을 향해 문호를 활짝 개방하는 과제가 떠올랐습니다. 수천 명 학생과 당 간부를 해외에 보내 중국이 세계를 따라잡고 자라날 길을 찾는 교육과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문화혁명기에 자라난 젊은 세대는 물론 애국심이 강했지만, 오랜 기간의 박탈감으로 인해 자기 발전을 위해 공부하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해외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비판하도록 교육받았던 온갖 새로운 사상들, 자유와 법적 권리 등 사회적-정치적 이념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덩샤오핑이 가로막지 않은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덩샤오핑의 개방이 너무 급격한 것이어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초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외부세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도록 권장하는 후야오방 같은 지도자들의 개방성을 좋아했습니다. 공산당의 권위를 보장하는 경계선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톈안먼 사태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공산당의 주도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국가의 모든 성취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 주도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한 중국 근대화의 행로는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기업활동은 권장되고 그 목적을 위한 학습과 실험의 자유는 보장되었습니다. 주룽지 총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칙을 받아들였습니다. 대단한 조치였습니다.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당 지도자들도 있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중국경제의 도약을 위한 특별한 기회라고 본 주 총리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본주의 근대화의 길에는 손해가 따랐습니다. 경제 개방에 따라 돈의 움직임이 커지면서 거래의 투명성 보장을 위한 법률체계가 뒷받침하는 강력한 규제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견제와 균형이 충분하지 못하면 모든 층위 관직에서 부패의 확산을 막을 수 없습니다. 중국경제는 21세기의 첫 십년 동안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공산당은 그 관리에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부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특히 공산당의 최고 지도층에 만연했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