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역사를 길게 살펴보면 명심해야 할 또 하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해상력을 통한 세계화의 과정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례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대륙 위에 있고 영국은 섬나라입니다.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인 데다 독일, 프랑스 같은 거대한 대륙국가에 짓눌려서 해군력이 강해도 육상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반면 바다에 둘러싸인 영국은 역사상 최강의 해상력을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더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은 해상력을 뒷받침할 대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럽대륙과 거리가 가까워서 대륙세력이 강한 해군력을 키워낼 때는 큰 위협을 받게 됩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영국에게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해양국가이지만 넉넉한 자원과 안전한 기지를 보장하는 자기 대륙을 가진 미국이 영국을 구원해 주어야 했습니다.

 

지구 반대쪽에서 일본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도서 세력에게는 장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대륙의 근거를 못 가진 해상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미국처럼 대륙을 가져야 초강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체제 규범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일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대륙에 튼튼한 근거를 가지고 바다에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세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 대륙에 적대세력이 없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입니다. 남북 어느 쪽으로도 큰 위협이 없습니다. 미국은 확고한 대륙세력이면서 세 개 대양에서 해군력의 우위를 확보한 나라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물려받은 해상력의 전통을 대륙의 안정성이 지켜주고 키워주는 것입니다. 섬나라 영국이 바라볼 수 없었던 조건입니다.

 

한편 독일이나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에게도 나름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다로 나오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육상의 세력은 있으나 전 지구적 세력이 되는 데 필요한 해상력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쪽 다 패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처럼 육상 세력을 가지지 못한 일본은 대륙 진출을 꾀했습니다. 한국으로, 만주로, 그리고 마침내 중국을 넘봤습니다. 일본이 결국 패퇴한 이유는 결국 무리하게 뻗쳐나간 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엇이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중국은 언제나 육상의 힘을 가진 나라였고, 이제 해상력을 키울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5백 년 전 정화 함대로 그런 역량을 보였으나 그사이에 잃어버렸고, 이제 해군력을 키울 자세를 새로 가다듬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공한다면 굳건한 육상의 근거와 해군력을 겸비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해군력과 견줄 수준은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마침내 해상활동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시작된 새로운 상황입니다. 중국의 권력 중심부에는 해상력의 경험이 없습니다. 대적할 세력이 없던 정화의 시대 이후 중국은 해전의 승리를 맛본 일이 없습니다. 해군의 경험이 없는 중국의 해상력이 이웃나라들을 위협한다고 하는 요란한 경보음은 다른 속셈에서 울려대는 것이 분명합니다. 중국 연해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약화시킬 위험 같은 것을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두 가지 걱정거리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해상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경의 3분의 2가 육상에 있고 3분의 1이 바다에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달리 중국의 국경 밖에는 잠재적 적국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닙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중국 밖에는 적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국경을 접하는 십여 개 나라들과 불화를 겪은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 앞으로 중국과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나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과 비교할 만한 해상세력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일입니다.

 

 

Different Types of Deep Structures / 여러 종류의 심층구조

 

심층구조 이야기로 돌아가서, 대륙으로서 유라시아는 중국과 인도 문명권의 정치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중국이 바다 쪽에 더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 방향에서 온 적들에게 문명 파괴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해군력이 중국 해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중국 지도자들은 해군에 계속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국경의 3분의 2 이상이 육상에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고, 대륙의 인접국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수천 년간 대륙의 적들을 상대해 온 역사의 심층구조는 세계사에 대한 특이한 관점을 빚어냈습니다. 정화 함대가 바다에는 큰 적이 없다고 보고하자 함대가 폐기된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진짜 적은 여전히 육상으로 이어지는 대륙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종류의 심층구조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중해문명은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역사 초기부터 대륙 중심부와 전혀 다른 심층구조가 그곳에 형성되었고, 그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지중해 제국들의 세계화 사업을 준비해준 해양식민지와 수-륙 제국들에 관한 이야기를 앞에서 했습니다. 그밖에도 교회-국가 분리와 같은 다른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없던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분리 때문에 국가를 하나의 법적 제도로 보는 관점이 나타났습니다. 그 근거는 로마제국과 로마법의 경험에 있었지만, 기독교의 보편법 내지 자연법 관념도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이에서 비롯된 일련의 특이한 상황 속에서 또 하나 특이점이 발생했습니다. 지중해 북쪽 연안 사람들은 작은 규모의 정치조직을 발전시켰고, 이 도시국가들이 로마제국이 끝날 때 봉건국가와 도시국가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 국가들이 결국 민족국가로 진화해 나가는데, 가리발디-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프레데릭-히틀러의 독일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룩셈부르크나 스위스에 들어갈 도시국가들은 새로운 민족국가의 핵심부로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봉건국가와 도시국가의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빚어낸 사상과 제도들 덕분에 민족국가의 통합성을 뒷받침하는 시민 이념이 나타났습니다. 유럽-지중해문명 심층구조의 또 하나 핵심 요소입니다.

 

이 심층구조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이후 역사 흐름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천 년에 걸쳐 대륙의 도전 속에 빚어진 구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업경제에 뿌리를 둔 중국의 심층구조는 대개 가족 위주입니다. 인도의 경우 이와 달리 계급(카스트) 층위가 겹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다 어떤 다른 제도보다 사회의 안정성을 강하게 해주는 혈통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정치 차원에서 볼 때, 중국의 대륙적 구조는 유럽-지중해 지역의 산업화-도시화 경험을 통해 빚어진 법률적 정치체제를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정치조직은 그와 달리 잉여농산물의 경제체제 위에 세워졌습니다. 제왕적 군주권에 중점을 두고 천명을 받은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는 경향이었습니다. 이 권력자는 일련의 통치 원리를 따르며 잘 훈련된 관료집단의 보좌를 받았지만, 권력은 그 한 사람에게 속했습니다. 애초에 안정성이 컸고 그 안정성이 보통 1-2백 년 동안은 유지되었습니다. 기동성이 뛰어난 유목민 침략자의 위협을 주기적으로 받던 거대한 농업국가에게 특별히 적합한 특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황제로 인해 체제가 약화되면 그 자리를 넘겨받을 다른 도전자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Posted by 문천

 

1950년대는 여러모로 불확실성이 넘치던 시기였다. 말라야는 아직 독립 이전이었고 대다수 중국계 주민은 중국 국적이지만 그것이 어느 쪽 중국인지는 1949년 이후 명확하지 않았다. 공산폭동 때문에 말라야 관리들은 중국인이라면 특별히 확인되지 않는 한 신중국에 협조적인 쪽으로 의심하도록 지침을 받고 있었다. 난징에서 막 돌아온 나는 친-베이징도 아니고 친-타이베이도 아니라 새로 내 나라가 된 말라야에 관해 열심히 배우고 있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내가 마주친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대상,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빚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내 생각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배우고 이해하게 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말라야에 사는 모든 중국인이 일시체류 중인 중국 국민으로 간주될 때였다. 해협식민지에서 태어나 영국 국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예외였다. 내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상황이었나? 말라야인이 되려는 나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갈 태세가 되어있었고, 그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 말라야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토론의 대상이었다.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새 말라야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이것이 내게는 “배우면서 행동한다”는 첫 번째 교훈이었고, 다음 교훈은 “나 자신의 행동에서 배운다”는 것이었다. 어느 교훈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호성을 걷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말라야대학은 영국인이 떠날 때 국가 경영을 넘겨받을 믿음직한 졸업생들을 배출할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로서, 말라야의 연속성에 대한 영국의 희망이 담긴 학교였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화교로 규정하지 않는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내 개인적 느낌이었다. 말라야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중국인으로 보였고, 그렇게 대접받았다.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내 간판의 교체가 가져오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영국문학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내 독서 습관과 태도가 영국문화 쪽으로 기울어지기는 했으나 중국계 혈통으로 중국 고전을 읽는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 공부할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Southeast Asia as a new region

 

1949년에서 1954년까지 5년간 말라야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며 싱가포르 대학생활의 모든 면을 즐겼다. 대학생활의 구석구석에 너무 빠져 지내는 내게 장래의 아내 마거릿 림이 공부에 더 집중하도록 권고해준 일을 앞서의 책 <있는 곳이 집>에 적었다. 공부한 세 분야 중에서 문학사 학위를 위해 전공을 정할 때 나는 처음에 좋아하던 영문학도, 새 국가의 건설에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경제학도 선택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역사학이었다. 역사학의 CN 파킨슨 교수가 재미있는 분일 뿐 아니라 내가 연구주제를 마음대로 고르도록 허용한 개방적인 분이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말라야대학이 강점을 가진 영국사나 식민지사에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분은 알고 있었다. 한편 난징에서 1년 공부한 덕분에 중국사에 기초가 되어있었다. 내가 중국과 말라야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자 그분은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내 훈련은 지중해세계 여러 고대문명에 입문하고 그것을 유라시아대륙의 문명들과 비교하는 공부로 시작했다. 그 뒤에는 온통 아시아에서 유럽인 활동의 팽창 이야기였고, 말레이군도 향료 교역에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세력 사이의 대결에 집중되었다. 1800년 이후의 근대사에서는 인도 아대륙에 세워진 대영제국과 아시아 각지에 대한 그 영향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중국과의 차 무역 확대와 중국의 개항을 강요한 아편전쟁 이야기도 여기에 들어갔다. 훈련의 초점은 원사료 사용에 있었고, 공개된 각종 식민지 문서가 사료의 주종이었다. 지역 언어로 작성된 문서를 이용할 때는 각별한 조심이 필요하다는 주의를 받았다.

 

반-공산당 비상사태 때문에 현대 중국 관계자료가 모두 금지되어 중국 근대사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근대 이전 시기에서 석사논문 주제를 잡기로 했다. 파킨슨 교수는 학과 교수진 중에 근대 이전 중국사 연구를 지도해 줄 사람이 없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그래도 우리 지역이 교역에서 받은 혜택에 관해서는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지중해세력들이 해상활동 능력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된 상황을 배웠다. 수요가 큰 상품의 장악이 영토 확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거기서 받았다.

[말라야 비상사태(1948-1960)는 말라야공산당이 이끄는 말라야인민해방군(MPLA)의 게릴라전을 진압한 과정이었다. 일본 점령기에 영국의 지원으로 항일활동을 벌인 말라야공산당은 일본 패전 후 합법적 정당으로 잠시 활동했으나 곧 불법화되고 지하항쟁에 들어갔다.]

 

인도양의 모든 주요 항구에서 행해진 고대무역은 향료의 수요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포르투갈을 인도, 믈라카와 몰루카제도로 끌어들여 해군력을 발판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해상무역을 일으킨 것이 그 무역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였다. 후에는 순다해협을 통해 광둥으로 연결되는 인도양의 차 무역 성장에 따라 항해술 발전의 중요성이 더욱 확실해졌다. 가장 수익성 높은 상품의 자리를 아편이 차로부터 넘겨받을 무렵에는 산업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중국 쪽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 것은 해협식민지의 세 개 항구도시였다. 중국과 교역이 늘어나는 데 따라 페낭에는 1785년 이후, 싱가포르에는 1819년 이후 지역의 중국인들이 옮겨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 네덜란드와의 정치적 흥정으로 믈라카가 영국 쪽으로 넘어오면서 남중국해의 핵심 관문이 되는 싱가포르로 주변의 중국인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오래지 않아 중국인 남양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50년 후에는 싱가포르 인구의 4분의 3이 중국계로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남양에서 중국인 소학교가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고, 1919년에는 지역 최초의 중국인 중학교가 생겼다. 아버지가 처음 남양에 와서 가르친 그 학교였다. 그뿐 아니라 1948년 내가 중국에 작별을 고하고 말라야에 자리 잡으러 왔을 때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한 곳이 싱가포르에 세워진 식민지 대학이었다. 동남아시아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된 지역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보게 된 것도 그 대학에서였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 관한, 그리고 그곳의 여러 문화와 사회들, 그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에 관한 책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경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세대 말라야대학 학생들은 우리 학교 지리학과와 경제학과 교수들이 2차대전 후 강의가 재개되자 동남아시아를 중심 주제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교수들은 동남아시아가 실체를 가진 존재처럼 그에 관한 글을 썼고, 그 지역에 관한 1950년의 첫 교과서도 그중 한 분이 쓴 것이었다.

 

이 지역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진 일인지 <있는 곳이 집>에서 설명한 대목이 있다. 육지와 바다를 건너 전해진 문명들로부터 영적, 심미적, 정치적 영양분을 뽑아내어 풍성한 문화를 키워낸 다양한 집단들이 이 지역에 있었다. 그 집단들의 어울림이 형체를 갖추게 된 것이다. 교정에서 주고받는 반-식민주의 토론을 통해 우리는 이 개방성이 산업자본주의 세력에게 이용당해 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 년간 유럽 민족제국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지역의 경계선들이 제국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그려졌다. 2차대전 종결 후의 식민지 해방 과정에서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 새로 그려진 경계선 안에서 통합성이 약한 인민을 이끌고 국가건설의 과업에 나서게 되었다.

 

런던의 전략가들은 이 지역의 완전한 해체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사령부를 세웠었다. 전쟁 후 제국들이 신생국가들로 자리를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새 “민족”들이 중국의 민족주의나 인도의 반영주의에 휩쓸리지 않기 바랐다. 해방되는 식민지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서양 세력들이 그곳에서 주동적 역할을 이어갈 희망이 있었다. 자기네 귀환이 환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나 내 친구들은 배경의 이런 정치적 고려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지역이 하나의 이름을 가질 필요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학문적 소망이 있었다. 그 후 오랫동안 중요한 연구업적은 고고학자, 문헌학자와 언어학자들에게서 나왔다. 그에 자극받은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도 수천 년 동안 하나의 실체로 인정받지 못해 온 이 지역의 통합성을 확인하기 위한 수수께끼 풀기 작업에 따라나섰다.

 

근대 중국의 연구로 나아가겠다는 내 결정은 이런 사정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는 바람에 그 방향 연구가 불가능하게 된 상황을 확인한 나는 이 지역과 중국의 초기 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옛 중국인들이 “남해(南海)”라 부르던 지역이 눈에 들어온 것은 동남아시아라는 개념과 많은 공통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도로서 아주 유쾌한 출발점이었다. 1954년 중엽 석사논문을 끝낼 때 나는 중국 남해안이 남중국해의 일부로서 동남아시아 6개국과 한 덩어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뒤에 내가 런던대학 소아스(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박사과정을 위해 받은 장학금은 동남아시아 출신 연구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학과의 동남아시아분과 주임 DGE 홀 교수의 학생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홀 교수는 명나라 시대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겠다는 내 계획을 승인해주었다. 그런데 1954년 후반 소아스에 도착할 때 내가 지도를 받고자 했던 사학과 동아시아분과의 오토 슈프렝켈 교수가 떠나는 참임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관계 다른 주제를 찾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Daniel G. E. Hall (1891–1979)은 버마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영국 역사학자로,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사의 표준서가 된 <A History of Southeast Asia>(1955)를 저술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공중에 떠 버렸다. 내가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동남아시아 언어는 말레이어뿐이었기 때문에 중국어 자료의 취급 능력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몇 주일 이것저것 읽으며 생각한 끝에 중국사의 다른 국면으로 들어갈 결정을 내렸다. 당 후기와 북중국의 오대(五代)를 연구 분야로 잡은 것이다.

 

홀 교수는 이 결정을 승인해주었다. 그는 내 연구를 도와줄 중국학-역사학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중국학과의 데니스 트위쳇에게 부탁했다. 트위쳇은 일본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당나라 시대 경제사를 연구해 왔다. 문헌자료의 파악이 뛰어난 연구자였다.

[Denis Crispin Twitchett (1925–2006)은 영국의 중국사 연구자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시리즈 편집에 큰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제국주의시대의 그 역사가 내 시야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거릿이 런던에 와서 같이 살게 된 후 말라야 친구들을 계속 만나면서 말라야의 독립과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필리핀의 정치에 관해 함께 생각했다. 지역의 국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로 가는 것 같았다. 지도자 중 수카르노만이 자기 나라의 역할을 넓게 내다보고 있었다. 지역 내의 역할을 넘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냉전에서 균형추 역할이었다.

 

그 관심은 지워지지 않았고 남중국해는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세계사 속의 중국에 집중하려 노력하는 중에도 남양이라 불리는 그 바다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9-10세기 북중국의 권력구조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1957년 싱가포르로 돌아왔을 때 그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내가 학부 시절에 쓴 쑨원에 관한 논문 이야기만 하고 남양 화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불렀다. 말라야의 역사와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남아시아라는 새 이름의 지역이 계속해서 내 생활을 압박했다.

 

Posted by 문천

 

제 1부 출발점은 바다에 Beginnings at Sea

 

제 1장 남중국해를 건너 Across the South China Sea

 

나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자라났다. 부모님이 나를 이포로부터 중국의 고향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내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6년, 내가 여섯 살 때 결행하려 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침략이 임박한 때였고, 조부모님이 아버지에게 가족 부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말라야에서 그냥 살라고 했다. 부모님은 7년 만의 귀향이었고, 나를 데려가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짧은 여행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고향 방문 계획을 그대로 추진했다.

 

우리는 기차로 이포를 떠나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를 건너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부모님은 많은 가족에게 아들을 보여주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어머니는 내 준비를 열심히 해주고 내가 친척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중국 아이의 모습을 대체로 잘 지키는 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할아버지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할머니는 자애로웠다. 사촌들과 노는 것이 즐거웠고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같은 바다를 건너 이포로 돌아왔다.

 

몇 주일 사이에 남중국해를 두 차례 건너면서 그보다 10년 전 아버지가 그 바다를 처음 건너던 이야기를 어머니가 해주었다. 1926년에 아버지는 싱가포르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영령 말라야로 왔다. 3년 후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리고 수라바야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아 어머니와 함께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아버지에게는 세 번째였고 어머니에게는 처음이었다.

 

2년 후인 1931년에 두 분은 아기인 나를 데리고 그 바다의 한 모퉁이를 건너 페락의 이포로 갔다. 아버지가 그곳의 중국인학교 부장학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두 차례 항해가 어두운 바다 위를 지나가는 것일 뿐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캄한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분이 우리가 있는 곳에 관한 말씀보다 있어야 할 곳에 관한 말씀을 훨씬 더 많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본 "남양" Nanyang as a Chinese frame

 

앞선 책 <집 아닌 곳에서>에서 나는 영국식 식민지 학교에 다닌 일을 이야기하고 이포에 서로 다른 두 개 도시가 병존하던 사실, 그리고 중국과 유럽에서 퍼져나간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설명했다. 1941년에 일본은 전쟁을 남중국해에 몰고 왔고 그 바다는 3년 반 동안 일본의 호수가 되었다.

 

남양 중국인들은 1945년 일본의 패배에 안도감을 느꼈으나 서양 제국들의 귀환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일본 통치가 남중국해 모든 해안 지역을 하나의 권력이 통제한 최초의 사례였다는 사실을 오랜 후에 음미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다시 펼쳐지기 바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 없을 것이다.

 

전쟁 때문에 내 영국식 학교교육은 중단되었다. 일본 점령기 동안 아버지는 내게 고전한문만 가르쳤다. 나는 손 닿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해외 영국인 주부들이 좋아할 만한 영문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밖에 일상생활에 관한 내 교육은 이포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돌아다니며 새로 얻은 다양한 출신의 친구들에게 광둥어와 하카어로 배우는 것이 위주였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인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점령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어서 중국 귀환을 위한 자금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대학 입학자격이 안 되고, 중국에서 원만한 진학의 길을 찾기가 어려울 전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을 칠 때까지 이포에서 1년 더 지내기로 했다. 1947년 시험 합격 후 세 식구가 중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해서 남중국해와 다시 만났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엄격한 영국 지배와 가혹한 일본 통치를 겪은 뒤였다. 남중국해를 다시 건너며 이번에는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졸업시험 합격증 덕분에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그 시험에도 합격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가족의 귀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심각한 건강 문제 때문에 난징의 추위를 피해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펼쳐졌을 것이다.

 

2학년의 첫 학기가 끝날 무렵 공산군이 난징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학 문을 닫고 학생들을 집에 돌려보내기로 정부가 결정했다. 수도 방어 전투를 벌일 것이 예상되었다. 걱정이 된 부모님은 내게 얼른 이포로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1948년에 나는 남중국해를 다시 건넜다. 슬프게도 이 항해가 중국이라는 집과의 작별이었다. 그 후 부모님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을 다시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중국해의 이미지는 내 마음속에 생생히 남았다. 열 살 때 알아낸 사실이 다시 기억났다. 아버지가 세계지도를 사주었을 때 나는 세계를 뒤덮는 붉은색으로 표시된 제국 안에서 내 위치를 확인했다. 지도에는 모든 바다가 표시되어 있었다. 영어책과 잡지에서 읽은 모든 것이 그 지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전쟁 후에 본 수백 편 영화도 그 뒤를 이었다. 고향과 연관된 남중국해는 더 큰 세계질서 속의 핵심적 요소가 되어있었다.

 

이포로 돌아온 나는 말라야연방, 남중국해로 튀어나온 반도국가에 관해 배우기 시작했다. 페락에서 산 기간 덕분에 나는 연방 시민증을 땄고, 케임브리지 졸업증서도 가진 나는 1949년 싱가포르에 세워진 말라야대학에 입학해 문학사 자격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떠나가고 있던 식민지체제 속에서 새 출발점을 찾은 나는 말라야를 새 집으로 삼는 길에 나섰다.

 

남중국해는 내 공부에 계속해서 자극을 주었다. 입학 다음 해에 그 바다를 건너 마닐라의 작가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 후에는 콜롬보와 뉴델리의 행사에 참석하러 벵골만을 비행기로 두 차례 건넜다. 그 여행을 통해 인도양이 믈라카해협을 통해 남중국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1년 후 학문의 길로 나설 결정을 하면서 영문학 대신 역사학을 택한 것은 역사학 담당 CN 파킨슨 교수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는 말라야에서 구할 수 없는 원사료를 볼 수 있도록 홍콩 여비를 주선해주었다. 남중국해를 또 한 차례 왕복하는 길이었다.

 

홍콩에 간 것은 남양을 중국 근대화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개혁가와 혁명가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쑨원을 따르던 사람들이 찾아간 항구마다 중국인 교민사회에 마주치던 과정을 공부했다. 그들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일으킬 반란을 위한 인력과 자금을 교민사회에서 찾았다. 다른 곳 대학에서 온 학생인 나는 홍콩에서 화교, 즉 해외중국인으로 간주되었다. 부모님은 수십 년 동안 인정하지 않던 신분인데, 이제는 인정해야겠다고 말씀했다.

 

개혁 시기와 혁명 시기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을 기꺼이 이야기해 주는 학자, 언론인과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이 보여준 문서 중에는 내 졸업논문 “1900-1911년간 해협식민지의 중국 개혁가와 혁명가들”(1953) 작성에 도움이 된 것들이 있었다.

[해협식민지(Strait Settlements)는 페낭, 믈라카, 싱가포르 등 일찍부터 영국 식민지가 된 믈라카해협의 항구도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시아 진출 초기에 영국은 항로 장악에 집중하며 주요 항구도시만을 식민지로 삼다가 19세기 들어 영토를 확장했다. 새로 영국 지배를 받게 된 말레이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대개 술탄국의 형태를 지키며 영국과 보호조약을 맺었다. 보호조약의 법적 내용은 1905-1910년 대한제국의 을사보호조약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양-남중국해 지역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냈다. 그로부터 말라야와 인도네시아, 마닐라, 사이공, 하노이 등 항구도시, 그리고 방콕과 랑군 등지의 해외중국인 조직들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과연 남양을 말라야의 중국인 해외 근거지의 배경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