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에서 제국의 해체는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버마의 일본 점령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1945년에 이 세 곳 식민지에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국가건설 작업이 시작될 태세였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필리핀은 가장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새로 세워진 국가가 계속 미국에 의지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네덜란드의 귀환에 저항하며 광대한 섬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버마의 경우 영국이 최대한 빨리 철수했고, 일본의 훈련을 받은 군대가 주변의 고원지대를 장악하러 나섰다. 그 고원지대에는 자기 종족의 국가를 각자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947년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도 이런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말라야에 돌아올 때는 새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 국가의 국민으로 자리 잡는 길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또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지켜보았다. 1950년 마닐라의 작가회의에 갔을 때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절감했다.
스페인어로 작품을 쓰던 작가들은 영어로 쓰는 세대에게 밀려났고, 미국에서 명성을 얻는 작가들도 나타났다. 젊은 세대 민족주의자 중에는 이것을 못마땅해하고 새 국어로 채택된 타갈로그어 문학을 제창하기도 했다. 그 회의에 왜 영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만 초청받았는지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경우 모두 생활에는 영어를 쓰면서도 작품은 바하사어로 썼다. 내가 수라바야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난징에서 공부했고 영어로 시를 쓰고 말레이어는 더듬거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우스워했다. 그들은 차이릴 안와르의 작품을 내가 꼭 읽어봐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 시인이 인도네시아의 민족문학에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Chairil Anwar (1922–1949)는 인도네시아 문학의 본격적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1945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마닐라 여행을 하며 나의 말라야가 어떻게 특별한 종류의 나라일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마닐라대학 친구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을 살려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하는 정치놀이란 종족 기반 정당들이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런 추세에 반대하면서도, 우리의 민주정치체제가 일천한 만큼 유권자 집단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할 것은 인정했다.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고, 말라야의 행로를 내다보는 데 고려해야 할 사실이었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는 다른 길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로서는 학문의 진로에 집중할 생각을 했다. 마거릿의 격려와 런던의 박사과정을 위한 장학금 덕분에 학문을 통해 국가건설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로 우리는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해 온 마거릿과 나는 그 길이 간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국에 가서 대영제국의 구석구석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감이 흔들렸다. 국가라는 개념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확실히 정의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걱정이 공부할 것 공부하고 즐길 것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연극과 음악회에 다니고 주말에는 사적(史蹟)을 답사하며 지내는 동안 우리는 독립을 기다리고 있는 대영제국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말라야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식민지 당국에서 지은 말라야회관에서 친구들을 만나 말라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툰쿠 압둘 라만 수상이 영국의 철수계획을 확정하기 위해 수행단을 이끌고 런던에 왔을 때 유학생들과 만난 자리도 그런 기회였다. 툰쿠 수상과 싱가포르의 데이비드 마셜 수상이 크다 주 동남부의 발링에서 말라야공산당 지도자 친펭을 만난 기사를 잊을 수 없다. 무장투쟁을 중지하자는 툰쿠의 제안을 친펭이 거부했다는 데 우리 모두 놀랐다. 왜 민족주의자 중에 폭력을 피하며 협상을 통해 헌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고 원하는 것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말라야는 다종족 통합국가로서 조심스레 영국 통치를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곳에 있던 나는 뉴스만 챙겨보며 지냈다. 런던대학에서 “중세사”로 분류된 학위논문을 마침내 제출하고 통과되었다. 그 사이에 파킨슨의 법칙으로 유명인사가 된 파킨슨 교수가 말라야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맡겨주었고, 마거릿과 나는 런던에서 태어난 아들 밍을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났다.
[Cyril Northcote Parkinson(1909–1993)은 말라야대학 초대 역사학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업무의 분량은 주어진 시간을 채울 때까지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을 발표해(1955년에 <이코노미스트>지 논문으로, 1958년에 책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60년에 교수직을 떠나 강연과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우리 배가 싱가포르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있던 1957년 8월 31일 연방 독립이 선포되었다. 1년 반 후 쿠알라룸푸르(KL)에 새로 만드는 캠퍼스에 지원한 것은 새 국가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었다. 마거릿은 싱가포르에서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고 KL의 다른 기관에서 비슷한 일자리를 잡았다. 역시 연방 시민이 된 아버지는 조호르바루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으러 그곳으로 옮겼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싱가포르에서 계속 살았다. [싱가포르-이포-KL-조호르바루가 표시된 지도]
1959년에 우리의 새 생활과 함께 새 나라에 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 해에 싱가포르가 자치 식민지가 되었고 머잖아 연방의 한 구성원이 될 것을 우리는 기대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우리 친구와 동료 대부분이 말라야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KL에서 우리 생활은 행복하게 펼쳐졌다. 우리 캠퍼스에는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학생들과 여러 나라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문학부는 동남아시아에 초점을 두었고, 말라야 연구의 발전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다. 공학부, 농학부와 의학부, 세 개 학부가 더 세워졌다.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서 동아시아사 한 과목을 맡았으나 새 대학의 현지인 교수로서 동남아시아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 이 점에 주목한 KL의 아시아재단에서 미국 대학의 순방을 권했다. 아시아에 관한 연구와 교육의 중요한 중심지들이 미국에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해안에서 시작해 중서부를 거쳐 동해안의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둘러보았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관련 프로그램이 있는 20개 대학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조그만 몇 개 주를 포괄하는 지역 중심지 역할의 학교들도 있었다. 아시아 연구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미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 놀라웠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국가 건설과 근대화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새로운 현상이며 미국이 아시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들의 지배에서 풀려난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사실을 동남아시아 출신의 중국사 연구자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아시아재단 측에서는 생각한 것 같았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근대적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노력을 연구하는 데 여러 가지 학문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의 동양학 전통이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지만, 크고 작은 연구 중심지에서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의 협력을 위한 연구비가 새로 제공되고 있었다.
아시아 여러 사회에서 새로운 과제에 적응해 가는 방식을 연구할 새 세대 연구자의 양성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시아 지도자 중에 무장혁명의 길을 택하며 소련과 공산중국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특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 새로운 관심 때문에 동양학의 전통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다른 학술방법으로 대치될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지역학으로의 이행은 분명했다. 사회과학자들이 연구 대상 지역의 언어를 익혀 지역의 자료를 활용하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이 기술을 갖추고 있는 동양학자들이 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이해를 도우러 나서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이 학술방법의 변화 추세를 보고서에 담았고, 역사학계 동료들은 그것이 합당한 상황 파악이라고 동의해주었다. 몇 해 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에 참여할 때 보니 이 방법이 분과 경향이 강한 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자기네 연구방법이 보편적이고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믿는 사회과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학 연구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고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이론들만 득세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과거를 탐구하는 다른 방법들에 마음을 열어놓고 사회과학 연구방법에서 배울 만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문학의 배경에서 출발한 나로서 모든 연구를 지배하는 보편적 이론의 주장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1960년 런던의 소아스에서 다시 1년을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전통시대 중국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때 가르치고 있던 영역까지 연구분야를 넓혔다. KL에 돌아왔을 때 우리 초대 학과장 존 배스틴 교수가 갑자기 퇴임하고 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첫 말라야인 역사학 교수로서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동아시아사 강의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과장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발전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 교과서에 식민주의 편향성이 남아있다는 지적이 몇 해 전부터 있었다. 그에 대응하는 연구가 필요했고, 나는 우리 학과 교수들의 역할을 바랐다.
나 자신의 연구업적은 중국과 해외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둘 다 우리 지역의 국가건설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냉전이 아시아로 확장되고 열전이 베트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금 혁명에 관한 지식도 필요했다. 지역 정치지도자 중에는 서양 제국들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마오쩌둥주의의 기원과 동남아시아 중국인들에 대한 그 영향을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이 과제가 어려웠던 것은 현대 중국에 관한 모든 도서와 자료의 열람이 금지되어 있고 지역 중국인의 정치적 태도가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사만 강의하면서 중국 관계 학회와 워크숍에 참석하러 해외에 다닐 때 나는 구할 수 있는 최신 출판물을 통해 지금의 중국에 관한 새 연구의 방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체계적인 연구방법이 못 되었으나 나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학과장이 되어 학과의 진로를 설정할 책임을 갖게 되자 다른 길을 더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까지 베트남의 혁명, 인도네시아의 반동혁명과 중국의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 자신이 중국 연구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1967년 초 시카고의 “중국의 위기” 학회에서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시대와 현대 두 부문으로 구성된 학회였다. 전통시대 부문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국가유산의 파괴를 몰고 온 과정 등에 관해 새로운 시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 부문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내가 너무 모르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지금 중국 청년들이 사적지를 훼손하고 당 간부들을 능욕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중국의 과거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말라야의 제한된 연구조건 아래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걱정하고 있던 상황을 그 학회에서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중국에 관한 내 지식의 공백이 커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말라야와 동남아시아의 역사학자로서 내 몫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까지 해온 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마거릿은 내 걱정을 이해했고, 중국 연구를 계속할지 말라야로 관심을 돌릴지 토론도 했다. 걸려 있는 문제는 알겠는데, 해결할 길이 있을지는 확실한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