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부강한 나라들을 따라잡으려는 야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강의에서는 근대화의 의미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서양의 계몽주의에서 나온 근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뒤덮은 서양 제국들로 확장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좋든 싫든 새로운 개념의 정치와 금융과 법률 안에 살아오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근대화“를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협식민지에서 서양으로 공부하러 간 사람들은 자기네가 행운아라고 배웠다. 그들은 진보와 발전의 이념을 가지고 인생의 유리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일본인들이 혁명가로 여기던 쑨원의 반청(反淸)운동에 관해 배우면서 중국의 근대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혁명“은 중국의 전통적 ”천명“ 개념을 근대적으로 응용한 말이다. 혁명가로서 쑨원은 왕조국가를 중화민국으로 바꾸려고 한 사람이다. 학생들이 나선 5-4운동은 한 발짝 더 나갔고, 뒤이어 공산당이 건립되고 쑨원의 ”3민주의“가 나왔다. 나는 1947-48년 난징에서 대학 신입생으로 3민주의를 배웠으나 그것을 가르칠 일은 없었다.

 

말라야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나는 중국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다. 19세기 해외 중국인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쑨원의 혁명 제창에 호응한 이유를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 알게 된 것은 페낭, 싱가포르, 바타비아, 방콕 같은 곳의 중국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근대화되어 있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중국 개항장의 조계구역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남중국해를 방문하는 청나라 관료들에게 근대적 통상과 행정에 대한 이해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쑨원 같은 반도(叛徒)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서양 기술의 습득과 근대적 학교의 설립 같은 일에서는 쑨원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아시아의 변화를 이끈 주체들에게도 관심이 끌렸다. 일본은 제일 먼저 서양을 바라보며 칙령을 통해 근대화를 수행한 나라였다. 인도의 엘리트계층은 영국의 근대성을 받아들였다. 오스만제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몇 개 아랍계와 투르크계 국가로 쪼개졌다. 오직 중국만이 근대화를 향해 혁명의 길을 걸었다. 한 번만이 아니었다. 1912년의 혁명도 힘들었는데, 37년 후인 1949년에 다시 겪었다. 그래서 의문이 떠올랐다. 첫 번째 혁명의 정치적 자유주의 ”근대성“이 중국의 연속성을 위협한 데 비해 두 번째 혁명의 ”인민 중심주의“가 중국인이 받아들이기에 쉬웠던 것은 아닐까?

 

현재와 과거의 연결점 사이에는 뜻밖의 것도 있었다. 쑨원의 싱가포르 방문을 살펴보다가 국민당 중국으로, 정치적 혁명에서 문화적 혁명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양 중국인을 살펴보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1945년 이후 유엔 체제로 모든 나라가 국가 건설에 나서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말라야의 국가사라는 과제 앞에서 전근대 중국사 연구라는 내 작업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과거의 복잡성으로는 현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래에 나타날 패턴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개별적 관계의 범위라는 것이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중국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천명을 바꾸는 혁명의 개념과 연결했다. 여러 국제학회에 다니면서 알고 싶은 마음이 깊어진 것은 왜 한 차례 혁명으로 부족했을까 하는 문제였다. 중국 해안 지역의 산업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 마오쩌둥의 마지막 꿈에서 문화란 어떤 것이었나? 몇 년 어디 가서 그런 질문들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거릿에게도 그런 생각을 이야기했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는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말라야를 우리 집으로 삼았고 아이들은 다니는 학교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집도 지어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왜 오스트레일리아로? Why Australia

 

1967년, 난데없이 초빙이 들어왔다. 연구 환경이 좋은 대학에 와서 전근대 연구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현대중국 연구팀을 이끌어달라는 두 번째 초청이 왔다. 그리고 또 들어온 세 번째 초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걸친 내 관심에 맞출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조건이었다. 셋 다 현대중국 관계 최신 자료를 잘 갖춘 기관들이었다.

 

몇 주일 동안 가족들과 의논한 후 마거릿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의 극동사 교수직 수락에 찬성했다. 캔버라에서 3년쯤 지내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황에 대한 내 지식의 공백을 채울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장기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길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나는 태어난 자바에서든 자라난 말라야에서든 북쪽만 바라보며 살았다. 열여덟 살에 난징에서 말라야로 돌아올 때까지 그랬다. 그 후에도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었다. 일체의 중국 출판물에 대한 규제 때문에 직접 연구를 못하는 상황에서도 관심은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중국의 유산을 파괴하러 나서는 참에 진행 중인 상황을 모르는 채로 있던 나로서는 몇 해 ANU에 가 지내면서 연구를 따라잡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었다. 그런데 북쪽을 바라보기 위해 더 남쪽의 다른 대륙으로 간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마거릿도 나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부터 말라야대학 쿠알라룸푸르(KL) 캠퍼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새로 초빙하는 교수진 중에도 있었고, 연방 장학금으로 유학 오는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의 새 연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논문집을 편집하고 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고등판무관 톰 크리칠리(Thomas Critchley, 1916–2009)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연방의 건설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우리 정치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책 작업을 하면서 사라왁에 갔을 때 앨러스테어 모리슨을 만난 일이 있었다. 조지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 1862–1920),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중국 역사에 최초의 흔적을 남긴 인물의 아들이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베이징 상황을 취재하러 런던타임스에서 파견한 조지 모리슨은 후에 공화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었다. 앨러스테어는 후에 캔버라에 함께 있으면서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1962년 사라왁에서는 그를 통해 헤다를 만났다. 헤다가 찍은 1930년대 중국의 사진들은 그 시기를 보여주는 최고의 시각자료였다. [Hedwig Marie "Hedda" Morrison (née Hammer; 1908–1991)은 1933-1946년 기간 중국에서 지내며(독일인이라서 일본 점령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중요한 작품을 많이 남긴 사진작가. 1946년 앨러스테어와 결혼한 후 20년간 사라왁에 살면서도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중국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커넥션이 그런 식으로 내게는 잘 통했다.

 

크리칠리의 쿠알라룸푸르 주재 대리인 빌 모리슨도 알고보니 조지 모리슨의 먼 친척이었다. 1965년 내가 첫 아시아 방문교수의 하나로 ANU에 갈 때 빌이 캔버라의 외무 관계 동료들을 소개해준 덕분에 캔버라의 관계(官界)로 길이 잘 열렸다. 빌은 외무직에 사표를 내고 다음 총선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다. 노동당 새 당수 고우 휘틀럼의 KL 방문 때 만나도록 빌이 불러주어서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중앙정치 가까이 들어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방문교수로 가기 전에 그 나라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는데, 그중 세 권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매닝 클라크의 <오스트레일리아 역사> 첫 권, 러셀 워드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 그리고 도널드 혼의 <운 좋은 나라>였다. 클라크의 책으로 그 나라의 기원에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워드의 책은 초기 이주민들이 ”따라지(down under)“ 인생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의 모습을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한 줌의 운 좋은 ”하류“ 인간들이었다고 하는 혼의 주장은 센세이셔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대영제국의 압축시간(time warp)을 벗어나지 못한 심심한 것이라는 인상을 이 책들에서 받았다.

 

 

미리 맛본 오스트레일리아 Preview of attractions

 

방문교수 기회 덕분에 1965년에 두 달 동안 마거릿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냈다. 그 체류 동안 그 나라의 3개 주, 뉴사우스웨일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비토리아를 다녔다. 애들레이드, 멜버른과 시드니를 거쳐 캔버라로 돌아오는 2천 마일을 운전했는데 그 큰 나라의 작은 모퉁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그 나라의 역사에 관해 아는 것도 피상적인 것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방문 기간을 짐 데이비슨의 태평양사학과에서 지냈는데, 말라야대학의 은사 존 배스틴 교수가 초대 동남아시아사 주임을 지낸 곳이다. 이제 그곳에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 몇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말레이시아 출신인 내게는 그 학과가 합당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이미 매키(James Austin Copland Mackie, 1924–2011), 존 레그(John Legge) 같은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의 초대를 받았다. 시드니에서 그곳 동양학과의 버티 데이비스(Bertie Davis)를 방문할 때 그와 그 동료들이 중국학을 표방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중국학 궤도 밖에 있는 말레이시아 역사학자로 맞이했다. 나는 데이비스를 만나 기뻤으나 내 일차적 의무는 ANU가 동남아시아사 연구 개발에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인지 데이비슨에게 보고하는 데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기쁜 마음으로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여행 중 오스트레일리아 주재 타이완 대사가 첸즈마이(陳之邁, 1908-1978)라는 사실을 알고 ANU의 동료 왕링에게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광둥성의 명문가 출신인 첸즈마이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새 중화민족 건설에 일생을 바친 첫 세대 사회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공유하는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대사 로베르트 반 굴릭이었다.

 

나는 첸즈마이에게 반 굴릭이 KL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부임하러 도착할 때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접하러 나온 관리들을 그냥 지나치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조그만 중국인 그룹에게 달려갔다는 것이다. 중국 유금(柳琴)협회 회장으로서 그를 환영하는 그룹이었다. 반 굴릭은 그 환영이 다른 어디서 받은 것보다 더 흐뭇한 환영이었다고 말했었다.

 

반 굴릭이 말라야대학에 와서 강연할 때 중국 고금의 음악가와 화가들에 관한 일화들로 우리 학생들을 매료시킨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기 집의 ”스튜디오“에 나를 초대한 일도 있다. 전통적 학인의 서재를 본뜬 것이었다. 적인걸(Judge Dee) 소설을 쓰고 붓글씨를 쓴 곳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중국인 아내의 조부모님 초상이었는데, 그 앞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절을 시킨다고 했다. [Robert Hans van Gulik(1910-1967)은 네덜란드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였는데, 예술 분야의 특이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 업적 중에는 당나라 관리 적인걸(狄仁傑)을 소재로 한 18세기 소설 <적공안(狄公案)>의 번역도 있고 그 방식으로 자기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서예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van_Gulik#/media/File:%E9%AB%98%E7%BE%85%E4%BD%A9%E5%92%8C%E6%B0%B4%E4%B8%96%E8%8A%B3.jpg 반 굴릭의 결혼 사진(1943년 충칭에서).

 

첸 대사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중국 문화사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몇 해 전 ANU에서 ”중국 산수화의 황금시대“를 주제로 조지 모리슨 기념강연을 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 주 필리핀 대사로 있으면서 지역 상황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내 동료였던 마이클 설리번에 관해 묻는 것을 보면 관찰력이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설리번은 말라야대학에 미술사 강의를 도입했고, 대학의 수장품 확장에 공헌했다. 첸 대사는 중국 산수화의 초기 역사에 관한 설리번의 책을 아주 잘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학식을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보여주면서 국제관계의 문화적 측면에 내 주의력을 키워주었다. 나중에 캔버라에서 지낼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교활동에 나타날 그런 측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갈 때는 그 나라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식민활동의 산물로서 광대한 해양세계를 포괄하는 제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일본이 서양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려 할 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일본의 정복을 막아줄 나라가 미국뿐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영국과 유럽의 문화적 유대를 지킨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리가 갔을 때 아시아-태평양 세계에 편안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늘 영국 편에서 싸우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순응할 태세인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제 중견세력으로 일어설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말레이시아 둘 다 영-미 질서체제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영연방과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태평양전쟁 때부터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는 관계였다. 캔버라 체류의 마지막 날인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분리 뉴스를 들으며 느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레이시아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도 대경실색했다. 두 나라 관계가 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과연 동남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나라인가 여부에 전보다 조심스러운 입장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관한 내 지식은 어설펐다. 제임스 쿡의 이야기나 원주민 부족과 영국 유배죄수 사이의 관계는 대영제국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백호(白濠)주의가 입에 많이 올랐으나 그것은 정식 폐기의 단계에 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영령 말라야에서 싸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는 5개국 방위협정을 통해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하고 있다.

[5개국 방위협정(Five Power Defence Arrangements)은 1971년 영연방 소속의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영국 5개국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 대한 외부 방어 협력 체제를 위해 설립한 다자 안보 협정.]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학자 및 관료들과 많이 어울리는 말레이시아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방문교수로 다녀온 3년 후 ANU의 태평양학연구원 존 크로퍼드(John Crawford) 원장으로부터 패트릭 피처럴드의 뒤를 이어 극동사 주임을 맡아달라는 초빙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로퍼드는 내가 동남아시아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대 중국에 관한 연구를 원했고, 학과에도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ANU에 도착했을 때는 크로퍼드가 총장이 되어 있었고, 그 후임자 오스카 스페이트(Oscar Spate)가 연구원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다. 스페이트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리의 권위 있는 연구로 잘 알려진 사람인데 버마에서도 일한 적이 있고, DGE 홀의 동남아시아사 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났을 때는 스페인의 호수로서 태평양의 역사를 여러 권 책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와 남태평양 사이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내게도 동남아시아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열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북(近北) 지역이며 두 개 대양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아시아-태평양의 큰 틀 안에서 보는 시각의 좋은 출발점이었다.

Posted by 문천

나는 가르치는 일을 좀 별난 방식으로 시작했다. 교실에서 하는 수업이 아니었고 학생이 단 한 명이었다. 일본 점령기 때 아버지가 친구의 첩에게 표준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손수 하시기 불편했던 아버지가 열네 살이던 내게 그 일을 맡겼다. 그 여자에게 백화문 읽기와 말하기를 가르치는 일로 보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나 자신 배우는 것이 많았다.

 

말하기 쪽은 쉬웠다. 광둥어를 쓰는 학생에게 같은 내용을 표준어로 바꿔주는 일이 내게도 재미있었다. 읽기 쪽을 위해서는 준비를 좀 하고 중학교 교과서를 사용했다. 교과서의 백화문은 아버지에게 배운 고전한문과 달랐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식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을 통해 나도 새로 배우는 것이 있었다.

 

가르치는 자세의 준비가 대학 1학년 때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기숙사에서 우리는 식민지배의 해악을 토론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한 글도 좀 읽었다. 나는 <공산당선언>까지 읽어보았다. 그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눈에 띄어 라디오 말라야의 방송극에서 박서 역할을 [<동물농장>에 나오는 수레 끄는 말 박서는 성실하고 충직한 노동자의 역할이다.] 맡기도 했다. 친구들이 더러 마르크스에 관해 물을 때 두 책을 다시 읽어보고 마르크스는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친구들이 따져 물을 때는 설명하기가 꽤 힘들었다. 그 설명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것이 넉넉해야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깨달았다.

 

그 무렵에는 역사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자료에서 뽑아내는 사실과 해석일 뿐이다. 새로 발견되는 자료가 있으면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말라야대학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1500-1800년 간의 동아시아사를 문학부 교양과목으로 맡았다. 지식 기반을 넓히고 서양 지배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완화하려는 우리 학과의 시도였다. 강의는 영어로 진행했다. 지역의 어떤 언어도 필요 없는 강의였다.

 

내 관심에 따라 명나라 청나라의 역사에는 중국 자료에서 뽑은 세부 내용을 넣었는데, 일본사와 한국사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적절한 대목에서 세 나라의 역사를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의 활동,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그들을 우회해 중국과 일본에 접근한 상황과 연결해 설명했다. 서양인의 활동이 아무리 역동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결국 동아시아사에서 주변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렇게 설명함으로써 확인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유럽 근대사에 더 익숙해서 그 강의를 하던 7년 동안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중국 자료가 중국인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자만심 때문에 호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중국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교역을 경시하고 남중국해의 전략적 가치를 모르고 있었는지 해마다 설명해야 했다. 중국에 대륙만 생각하던 북방인과 바다를 향해 열린 자세를 취하던 남방인 사이의 차이가 있었음을 그 강의를 하면서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중국사의 중요한 한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듬어냈다.

 

 

기초가 되는 전통들 Different traditions as foundation

 

배스틴 교수로부터 학과장직을 넘겨받은 후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라야 역사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국민으로서 내 의무로 여겼다. 그러나 배스틴 교수가 석사반에 도입한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과목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나 자신 많이 생각한 주제는 아니었으나 그 필요를 강하게 느낄 때가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난징에서 공부할 때 마르크시스트 사관을 중국사에 적용하는 데 대한 민족주의 역사학자 먀오펑린의 극단적 비판이 기억난다. 그에 비해 나중에 홍콩에서 만난 치엔무(錢穆, 1895-1990)는 전통주의자이면서도 포용적이었다. 사마천과 반고가 이천 년간 지켜질 역사서술의 기준을 세워놓은 사실을 중국고대사를 공부하면서 배웠다. 중국사의 특이한 연속성을 보장해준 문서 작성을 위한 사관(史館)이 당나라 때 세워졌다. 중국에서 사실과 해석이 뒤섞이게 된 사정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대학원생이던 1957년 중국학 잡지 <대(大)아시아 Asia Major>에 내 첫 논문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오대(五代) 시기의 역사서술”을 발표할 수 있었다. 수집된 문서와 정사 내용의 비교를 통해 결론을 끌어낸 논문이었다.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강의를 맡으면서 역사학자 지망생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두 권의 책으로 시작했다.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가의 직업>과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역사서술을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방법으로 과거를 기록하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서양 역사학에 익숙했으므로 그리스와 로마의 출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읽으면서 그들이 유럽 역사서술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친 이유를 생각해 보았었다. 두 사람에 관한 강의는 학생들이 좋아했다. 로마에 관해서는 흥미가 덜했으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제국주의자의 야만인 인식으로 설명하는 데는 관심을 보였다. 대체로 정치와 군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분명했고, 헤로도토스를 더 좋아하는 학생이 많았다. 전쟁과 평화를 넘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학생 중에는 힌두교인도, 무슬림도, 기독교인도, 불교도도 있었고, 근대적 대학에서는 어느 신앙도 종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건에서 종교의 역할이 클 때가 많고, 역사기록 방법에 끼치는 영향도 분명하다. 기록에 작용한 신앙의 영향을 논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사실은 학생들도 알았다. 그러나 각 종교가 사건의 전개에, 그리고 그 해석 방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시대에 세계 여러 곳에서 작성된 연대기와 기사들의 성격을 더 공부했다. 성서와 경전, 그리고 종교인들의 명상 기록이 과거사의 전개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노력으로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공부에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잘한 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때때로 내가 더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가르치려고 나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 경험이 과거를 연구하려고 나선 길에서 또 하나 진전이었다. 10세기 북중국 상황을 논문으로 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얻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받은 훈련은 근대 역사학이었는데, 내 연구의 자료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개발하고 서양의 중국학 연구자들이 근대화한 방법으로 연구된 것이었다. 나는 그 방법에 훈련이 없었다. 논문 쓰는 데 3년 시간이 있었는데, 유학자들의 기록을 이용해서 중국인 아닌 오늘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써내기 위해 중세사라는 분과의 방법론을 그 시간 내에 익혀야 했다.

 

이 상황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내 논문은 제출한 대로 출판되었다. 중국학 잡지들 외에 <잉글리시 히스토리컬 리뷰>와 <아메리칸 히스토리컬 리뷰>에 서평이 실렸다. 이론과 방법 강의를 맡았지만, 그 강의를 함으로써 내가 이론가가 되지도 않고 방법론 전문가가 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이 의거한 ”이론과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내가 어떤 종류의 역사학자인지 학생들의 질문을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나 나름의 시각을 키워냈다. 훌륭한 전문적 역사학자가 되는 길은 아니라도, 현재 속에서 과거를 찾아내는 자세를 다듬어주었고,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과 사회학, 고고학, 언어학 등 다른 학문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도움에 개방적인 입장을 만들어주었다.

 

 

장소를 옮겨도 따라오는 중국인 정체성 Chinese identities can travel

 

말라야대학 사학과 학과장을 맡을 당시 나는 근대 동남아시아사에 부차적 관심을 가진 전근대 중국사 연구자로서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의 새 연방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역의 현실에 관여하다 보니 내가 새 국가의 역사학자로서 제 몫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해야 하는지 절실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은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나라들에 큰 인구집단을 만든 중국인 이주 현상이었다. 지역 역사학에 내가 할 수 있는 공헌은 말라야 일대의 중국인 이주 현상의 연구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은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집단에 집중하고 제자들에게 말레이국가들을 비롯한 역사의 다른 측면들을 권하려 했다.

 

1965-66년에 일어난 일들, 베트남의 열전과 수카르노정권의 붕괴, 뒤이어 중국의 문화혁명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지역 정세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국에 대한 내 이해도 불안해졌다. 두 개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해외 중국인집단에 집중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었다. 그러나 중국사 연구자로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계속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능력을 키워낸다면 중국과 중국사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몫을 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해외중국인의 연구가 쉬운 길이었다. 학부생 시절 해협식민지에 온 중국 개혁가와 혁명가들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중국인에 관한 WJ 케이터의 1936년 연구와 빅터 퍼셀의 <말라야의 중국인 Chinese in Malaya>를 읽으며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 4년간 그 방향 공부를 계속하지 않고 고대사에 빠져 지냈다.

 

내가 강의를 시작할 무렵 중국사와 관계된 동료로는 19세기 영국의 대 중국 정책을 연구하던 렌 영(Len Young)과 대륙 방면, 특히 티베트와 신장에서 영국과 중국의 접촉을 연구하던 앨러스테어 램(Alastair Lamb, 1930-2023)이 있었다. 나는 1500-1800년 명-청 시대를 초기근대사로 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밖 사람들이 내게 듣고 싶어 한 것은 새 국민국가 안에서 해외중국인의 위치와 장래였다. 

 

반공 선전가들이 그 주제와 관계된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 들던 때였다. 결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나를 좌익으로 몰아붙일 기세였다. 또한 ”애국 해외중국인“을 향한 중국어 선전문에도 잘못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바로잡기 위해 <남양 중국인 약사 A Short History of the Nanyang Chinese>를 썼다. 이 방향 공부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모리스 프리드먼(Maurice Freedman, 1920-1975), 톈루캉(田汝康, 1916-2006)과 G 윌리엄 스키너(George William Skinner, 1925-2008), 세 사람이었다. 셋 다 인류학자로, 프리드먼은 남중국과 남양 사이의 관계에 관한 출판된 자료를 활용했고, 톈루캉과 스키너는 사라왁과 태국에서 여러 해 필드워크를 수행했다.

 

말라야의 중국인 연구를 시도하며 보니 모든 것이 지역 정치와 얽혀 있었다. 푸젠이나 광둥 출신이 아닌 나는 그쪽 동향(同鄕) 조직에 속하지 않았다. 그 차이 위에 20세기 초 이래의 중국 정치가 덧씌워진 결과, 무엇을 어떻게 쓰든 이쪽 아니면 저쪽의 오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넓은 관점을 취했다. 지역 내 각국의 정치와 그 나라 중국인집단의 경험을 비교했다. 그 결과가 말라야의 역사학자로서 내 입장을 강화해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각 집단이 각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싱가포르와 말레이국가들의 중국인이 다른 곳 중국인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한편 15세기 초 명나라 함대의 인도양 항해에 관한 내 연구는 중국 밖의 중국인의 또 하나 측면에 초점을 잡아주었다. 10세기 남중국의 해상교역 의존과 송나라의 함대 건설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쿠빌라이칸이 이 함대를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활용한 것이 백년 후 정화 함대의 배경이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의 믈라카 술탄국 지원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중국이 대외관계에 조공체제를 이용한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존 K 페어뱅크의 <중국의 세계질서 Chinese World Order>에 이 주제의 글을 부탁받으면서 전통적 국가관계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류 서양 담론에서 벗어나는 중국 밖의 중국의 다양한 모습을 펼쳐볼 의욕이 일어났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중국 문화혁명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요란한 사태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에 접근할 길이 없는 나는 내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Posted by 문천

 

우리 지역에서 제국의 해체는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버마의 일본 점령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1945년에 이 세 곳 식민지에서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국가건설 작업이 시작될 태세였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필리핀은 가장 실용주의적인 입장으로 새로 세워진 국가가 계속 미국에 의지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네덜란드의 귀환에 저항하며 광대한 섬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버마의 경우 영국이 최대한 빨리 철수했고, 일본의 훈련을 받은 군대가 주변의 고원지대를 장악하러 나섰다. 그 고원지대에는 자기 종족의 국가를 각자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947년 우리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도 이런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말라야에 돌아올 때는 새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 국가의 국민으로 자리 잡는 길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또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지켜보았다. 1950년 마닐라의 작가회의에 갔을 때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절감했다.

 

스페인어로 작품을 쓰던 작가들은 영어로 쓰는 세대에게 밀려났고, 미국에서 명성을 얻는 작가들도 나타났다. 젊은 세대 민족주의자 중에는 이것을 못마땅해하고 새 국어로 채택된 타갈로그어 문학을 제창하기도 했다. 그 회의에 왜 영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만 초청받았는지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작가들의 경우 모두 생활에는 영어를 쓰면서도 작품은 바하사어로 썼다. 내가 수라바야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 난징에서 공부했고 영어로 시를 쓰고 말레이어는 더듬거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우스워했다. 그들은 차이릴 안와르의 작품을 내가 꼭 읽어봐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한 시인이 인도네시아의 민족문학에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Chairil Anwar (1922–1949)는 인도네시아 문학의 본격적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1945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마닐라 여행을 하며 나의 말라야가 어떻게 특별한 종류의 나라일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마닐라대학 친구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특성을 살려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하는 정치놀이란 종족 기반 정당들이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런 추세에 반대하면서도, 우리의 민주정치체제가 일천한 만큼 유권자 집단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권을 행사할 것은 인정했다. 반갑지 않은 현상이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고, 말라야의 행로를 내다보는 데 고려해야 할 사실이었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는 다른 길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로서는 학문의 진로에 집중할 생각을 했다. 마거릿의 격려와 런던의 박사과정을 위한 장학금 덕분에 학문을 통해 국가건설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로 우리는 결정했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해 온 마거릿과 나는 그 길이 간단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국에 가서 대영제국의 구석구석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감이 흔들렸다. 국가라는 개념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확실히 정의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걱정이 공부할 것 공부하고 즐길 것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연극과 음악회에 다니고 주말에는 사적(史蹟)을 답사하며 지내는 동안 우리는 독립을 기다리고 있는 대영제국의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말라야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식민지 당국에서 지은 말라야회관에서 친구들을 만나 말라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툰쿠 압둘 라만 수상이 영국의 철수계획을 확정하기 위해 수행단을 이끌고 런던에 왔을 때 유학생들과 만난 자리도 그런 기회였다. 툰쿠 수상과 싱가포르의 데이비드 마셜 수상이 크다 주 동남부의 발링에서 말라야공산당 지도자 친펭을 만난 기사를 잊을 수 없다. 무장투쟁을 중지하자는 툰쿠의 제안을 친펭이 거부했다는 데 우리 모두 놀랐다. 왜 민족주의자 중에 폭력을 피하며 협상을 통해 헌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고 원하는 것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unku_Abdul_Rahman#/media/File:Aankomst_van_premier_van_Malakka_Abdul_Rahman,_Bestanddeelnr_911-2803.jpg 툰쿠 압둘 라만 수상(1903-1990)

https://en.wikipedia.org/wiki/David_Marshall_(Singaporean_politician)#/media/File:Lennox-Boyd.jpg 데이비드 마셜 수상(1908-1995)

https://en.wikipedia.org/wiki/Chin_Peng#/media/File:Chin_Peng_(portrait).jpg 친펭(1924-2013)

 

말라야는 다종족 통합국가로서 조심스레 영국 통치를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 곳에 있던 나는 뉴스만 챙겨보며 지냈다. 런던대학에서 “중세사”로 분류된 학위논문을 마침내 제출하고 통과되었다. 그 사이에 파킨슨의 법칙으로 유명인사가 된 파킨슨 교수가 말라야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맡겨주었고, 마거릿과 나는 런던에서 태어난 아들 밍을 데리고 싱가포르로 떠났다.

 

우리 배가 싱가포르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지르고 있던 1957년 8월 31일 연방 독립이 선포되었다. 1년 반 후 쿠알라룸푸르(KL)에 새로 만드는 캠퍼스에 지원한 것은 새 국가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었다. 마거릿은 싱가포르에서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고 KL의 다른 기관에서 비슷한 일자리를 잡았다. 역시 연방 시민이 된 아버지는 조호르바루의 중국인 중학교 교장을 맡으러 그곳으로 옮겼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싱가포르에서 계속 살았다. [싱가포르-이포-KL-조호르바루가 표시된 지도]

 

1959년에 우리의 새 생활과 함께 새 나라에 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 해에 싱가포르가 자치 식민지가 되었고 머잖아 연방의 한 구성원이 될 것을 우리는 기대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우리 친구와 동료 대부분이 말라야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KL에서 우리 생활은 행복하게 펼쳐졌다. 우리 캠퍼스에는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학생들과 여러 나라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문학부는 동남아시아에 초점을 두었고, 말라야 연구의 발전에 특히 노력을 기울였다. 공학부, 농학부와 의학부, 세 개 학부가 더 세워졌다.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서 동아시아사 한 과목을 맡았으나 새 대학의 현지인 교수로서 동남아시아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 이 점에 주목한 KL의 아시아재단에서 미국 대학의 순방을 권했다. 아시아에 관한 연구와 교육의 중요한 중심지들이 미국에 건설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해안에서 시작해 중서부를 거쳐 동해안의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둘러보았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관련 프로그램이 있는 20개 대학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조그만 몇 개 주를 포괄하는 지역 중심지 역할의 학교들도 있었다. 아시아 연구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미국에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 놀라웠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국가 건설과 근대화가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새로운 현상이며 미국이 아시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들의 지배에서 풀려난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사실을 동남아시아 출신의 중국사 연구자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아시아재단 측에서는 생각한 것 같았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근대적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노력을 연구하는 데 여러 가지 학문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의 동양학 전통이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지만, 크고 작은 연구 중심지에서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의 협력을 위한 연구비가 새로 제공되고 있었다.

 

아시아 여러 사회에서 새로운 과제에 적응해 가는 방식을 연구할 새 세대 연구자의 양성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아시아 지도자 중에 무장혁명의 길을 택하며 소련과 공산중국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특별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 새로운 관심 때문에 동양학의 전통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다른 학술방법으로 대치될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지역학으로의 이행은 분명했다. 사회과학자들이 연구 대상 지역의 언어를 익혀 지역의 자료를 활용하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이 기술을 갖추고 있는 동양학자들이 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이해를 도우러 나서게 될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이 학술방법의 변화 추세를 보고서에 담았고, 역사학계 동료들은 그것이 합당한 상황 파악이라고 동의해주었다. 몇 해 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협의회에 참여할 때 보니 이 방법이 분과 경향이 강한 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자기네 연구방법이 보편적이고 어디에나 적용된다고 믿는 사회과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역학 연구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고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이론들만 득세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과거를 탐구하는 다른 방법들에 마음을 열어놓고 사회과학 연구방법에서 배울 만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문학의 배경에서 출발한 나로서 모든 연구를 지배하는 보편적 이론의 주장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1960년 런던의 소아스에서 다시 1년을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전통시대 중국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때 가르치고 있던 영역까지 연구분야를 넓혔다. KL에 돌아왔을 때 우리 초대 학과장 존 배스틴 교수가 갑자기 퇴임하고 내가 자리를 넘겨받았다. 첫 말라야인 역사학 교수로서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동아시아사 강의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과장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발전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 교과서에 식민주의 편향성이 남아있다는 지적이 몇 해 전부터 있었다. 그에 대응하는 연구가 필요했고, 나는 우리 학과 교수들의 역할을 바랐다.

 

나 자신의 연구업적은 중국과 해외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둘 다 우리 지역의 국가건설에 관계되는 것이었고, 지금 상황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냉전이 아시아로 확장되고 열전이 베트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금 혁명에 관한 지식도 필요했다. 지역 정치지도자 중에는 서양 제국들의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마오쩌둥주의의 기원과 동남아시아 중국인들에 대한 그 영향을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이 과제가 어려웠던 것은 현대 중국에 관한 모든 도서와 자료의 열람이 금지되어 있고 지역 중국인의 정치적 태도가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사만 강의하면서 중국 관계 학회와 워크숍에 참석하러 해외에 다닐 때 나는 구할 수 있는 최신 출판물을 통해 지금의 중국에 관한 새 연구의 방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체계적인 연구방법이 못 되었으나 나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학과장이 되어 학과의 진로를 설정할 책임을 갖게 되자 다른 길을 더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까지 베트남의 혁명, 인도네시아의 반동혁명과 중국의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 자신이 중국 연구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1967년 초 시카고의 “중국의 위기” 학회에서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시대와 현대 두 부문으로 구성된 학회였다. 전통시대 부문에서는 마오쩌둥주의가 국가유산의 파괴를 몰고 온 과정 등에 관해 새로운 시각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현대 부문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내가 너무 모르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지금 중국 청년들이 사적지를 훼손하고 당 간부들을 능욕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중국의 과거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말라야의 제한된 연구조건 아래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걱정하고 있던 상황을 그 학회에서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중국에 관한 내 지식의 공백이 커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말라야와 동남아시아의 역사학자로서 내 몫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까지 해온 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마거릿은 내 걱정을 이해했고, 중국 연구를 계속할지 말라야로 관심을 돌릴지 토론도 했다. 걸려 있는 문제는 알겠는데, 해결할 길이 있을지는 확실한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