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과거를 활용해서 우리 지역의 지금을 설명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 ANU에서 지낼 3년을 계획했다. ANU와 국립도서관 양쪽에 방대한 문서자료가 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소중히 아껴 온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하라고 마오쩌둥이 젊은 사람들에게 시켰는지를 둘러싼 불확실한 문제들이 내 직접 관심사였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의 젊은 추종자들의 광기 어린 눈에 과거의 어떤 요소들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일까?

 

문서만으로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정부와 공산당에서나 공장, 교육계, 예술계에서나 모든 권위를 배척하자는 외침의 반복만이 문서에 나타났다. 특정 인물을 거명하고 무자비한 규탄과 온갖 욕설을 붙인 문서들도 있었다. 그런데 누가 운동을 조직하는지, 어떤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문서가 알려주는 것은 혁명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신격화된 마오 주석 외에는 비판 대상 아닌 사람이 없었다.

 

양쪽 기관의 소장 문서 중에 중국어 원문도 (사진복사가 많음) 있었으나 대부분은 냉전 조직들의 자금으로 홍콩의 전문 업체들이 옮긴 번역문이었다. 신뢰도가 인정되는 문서들을 직접 다룬다는 데 신기함을 느끼는 한편으로 전국의 정치적-문화적 유물-유적 파괴가 전면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면서 안도감도 느꼈다. 앞선 시기의 인물과 정책과 사건들을 규탄한 문서들을 찾아보고, 지속적 공격 대상으로 뽑힌 사안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문서들의 세밀한 내용을 살펴보는 데 시간을 들였다.

 

큰 보람을 느끼는 배움의 시간이었고, 나는 주변의 정치적 조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해방감을 누렸다. 대학은 연구자들에게 자기 연구를 수행하고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동료들과 협력할 자유를 주었다. 같은 자료를 먼저 본 동료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고, 자기네가 보는 관점을 기꺼이 공유해주었다. 다른 대학도 찾아가서 마오쩌둥의 중국에 관한 연구를 아직도 뒤덮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더 넓은 협력을 모색해 보라는 동료들의 권유도 많았다.

 

현재 상황을 오랫동안 검토해 온 동료들에 비해 내 시야에는 한계가 있었다. 20세기 전반 중국의 행로에 관한 내 지식은 누더기 상태였다. 원사료를 다룬 연구를 해보지 못했고, 말레이시아 밖으로 여행할 때 입수한 연구성과를 읽었을 뿐이었다. 충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화혁명 때 역사학자 우한(吴晗, 1909-1969)이나 극작가 샤옌(夏衍, 1900-1995) 같은 사람들이 특별히 심한 공격을 거듭거듭 받은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사에 관한 중요한 서적과 논문들의 목록을 만들고 대출해 와서 저녁때 읽었다. 마거릿은 내가 평일에 그런 일과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낮에는 내가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게 가사를 살펴주고 저녁시간은 서재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아이들에게는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것 외에 함께할 일이 많지 않았다. 전임자 패트릭 피처럴드와 동료 로후이민 덕분에 ANU 도서관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중국어-일본어-영어 서적과 논문들이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

 

역사학자가 문화혁명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현대사를 공부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확고히 세워진 마오쩌둥주의 관점의 영향으로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역사 공부를 해 온 방식이 워낙 멋대로여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세기 혁명가들을 공부하다가 남해 교역으로, 10세기 북중국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용케 파탄을 면하고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전에 내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 주제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어서 재주넘다가 코가 깨져도 상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화혁명 때문에 공산중국이 위기에 빠졌다는 생각을 밝힌다면 수많은 냉전 전문가들이 몰려와 따져 물을 것이다. 국제정치의 윤곽에 관해 나보다 훨씬 해박한 사람들이.

 

참으로 새로운 도전이었다. 예견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마거릿에게 이야기했다. 내 아슬아슬한 짓들을 늘 봐 온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을 통해 배우는 내 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 내가 배우는 길을 잘 알고 나 자신의 배움을 위해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주었다. 막상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캔버라의 역사학자 하나가 문화혁명에 관심을 갖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한다는 소문이 관련 학계에 돌면서 강연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 더 많은 글을 읽고 더 생각을 열심히 정리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강연 초청에 부응하고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질문에 응답하려 애쓰는 가운데 나는 더 많은 공부를 더 빨리 하게 되었다.

 

 

중-소 관계의 굴곡 Impact on Sino-Soviet relations

 

ANU의 역사학 교수로 있으면서 문화혁명 공부를 통해 얼마나 넓은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저명한 “중국통(old China hand)”으로 공산중국의 탄생에 관한 책을 쓴 피처럴드의 후임자라는 사실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의 후임자인 나도 그쪽으로 아는 것이 꽤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세계에 몇 안 되는 국제관계학과가 ANU에 있고 그곳 교수들이 냉전의 정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학과가 같은 건물에 있어서 그 교수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런 자리에서 많이 떠오르는 주제 하나가 문화혁명이 중-소 관계에 끼친 영향이었다. 내게 더 흥미로운 것은 몇 해 전의 중-소 갈등이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런 질문들의 실마리를 찾다가 개혁 지향의 흐루쇼프 집권 후 나타난 소련의 “수정주의”를 추수한 당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마오쩌둥파의 많은 구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배경을 조금 알고 있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에서 접하던 반공 언론에서 인도와 서방을 향한 소련의 “유화적” 태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불만을 종종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소 갈등과 마오쩌둥의 야심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냉전 속에서 중국의 위치에 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코민테른에 고무받은 중국 청년들이 중국공산당을 설립한 시절 이래 소련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공산당 지도자들의 행적을 살펴보게 되었다. 읽을 것이 많았다. 수십 년에 걸쳐 코민테른과 러시아는 고문을 파견해 중국의 추종자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1930년대에 중국공산당이 많은 정책 실패를 겪는 것을 마오쩌둥은 목격했다. 그 후 1950년대까지 소련이 중국공산당에 보낸 지침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스탈린 사후 당 기관지에 나타난 비판 기사 중에는 마오쩌둥의 영도에 대항하는 간부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결국 중국 문서에서는 소련 지도자둘과의 갈등에 관해 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는 선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이 너무 많았다. 두 나라 이론가들이 펼친 논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피스(WE Griffith)의 <중-소 분열 The Sino-Soviet Split>과 그 책에 담긴 (국제관계학 분야의 동료들도 활용하던) 방대한 참고문헌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문제가 국내 권력투쟁에 있었던 것인지, 두 나라의 당 사이,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으나 내 생각을 남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공부하려 노력하는 중에 지식의 새로운 통로들을 찾게 되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ANU는 필요한 전문가를 찾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중국인들이 소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지면서 소련 전문가인 사회과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리그비(TH Rigby)의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에 관한 그의 책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리그비가 소비에트 블록 정치의 요점을 정리해 준 위에 한 가지 확실한 가르침을 준 것은 소련이 유럽에서 정말로 이루고자 한 목표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독과 발틱국가들과 동지중해에 걸치는 완충지대를 확보한다는 목표 같은 것들이다.

 

중-소 관계를 살펴보다가 사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은 더욱 뜻밖의 결과였다. 나는 원래 사상사에 끌리지 않았으나 말라야대학의 동료 유진 카멘카와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그 적용방법을 놓고 토론을 벌이곤 했었다. 카멘카는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중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고 마오쩌둥이 노력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중국사상사에서 마오쩌둥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열쇠를 찾기 바랐다.

 

사상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중국학 쪽 친구들은 카멘카가 바라는 열쇠를 찾아줄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나는 유용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정치사 쪽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사 쪽으로는 공부가 적었다. 사상사 쪽에는 그 주제를 더 잘 이해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대신 내게 중요해 보이는 면을 설명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이론가들이 열렬한 근대주의자였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 같은 사상가들이 계몽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유물사관에 관해 가르쳐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였다. 제1세대 공산당원 거의 모두가 유가사상의 유산을 공개적으로 배척했다. 그중 과격한 사람들은 “전면적 서양화”를 제창하기도 했는데, 자본주의 서양보다 사회주의 서양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1949년 마오쩌둥의 승리에 마르크스-레닌 사상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늘 궁금한 생각이 있었다. 영문 번역으로 런던에서 출판된(1956) 마오쩌둥 선집을 읽고는 그 역할이 크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스탈린을 놓고 보자면 소련이 인민해방군에 제공한 (특히 만주에서) 군사장비가 중요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에게는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같은 구호가 필요 없었다. 인민해방군을 주로 구성한 애국 농민이 단결한 것은 일본 침략군만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지하는 개항장의 자본주의자들과 결탁한 지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의 승리를 가져온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국 농민을 신뢰하고 이끈 그의 능력이었다. 후난성 농촌에서의 성장 과정과 중국 역사의 섭렵을 통해 그는 지도자들의 결의가 확고하고 정치적 조건이 맞을 때 농민반란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멘카에게는 이런 설명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계속 내게 물었다.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평등사상의 작용은 없었는가? 마오쩌둥이 젊은 추종자들을 선동해 소련 지도자들의 엘리트주의를 본받은 당의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한 것도 이런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중국 역사 속의 농민반란에 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해야 했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드러낸 대목을 막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 맹아”로 생각되는 것이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을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일어난 시기와 비교하면서 마오쩌둥은 만주족의 정복으로 가로막히지 않았다면 중국 사회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내게는 이 주장이 납득되지 않아 오랫동안 제쳐놓았었는데, 그 무렵에는 중국 내의 토론도 살펴보고 있었고 앨버트 퓨어워커가 조직한 1964년의 디칠리 학회도 참석했었다. 공산중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이 학회에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이 주장의 의미를 천착했다. 이것이 중국의 “인민 혁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마오쩌둥의 주장을 둘러싼 중국 내의 토론은 많은 학술지의 지면을 채웠다. 중국 내에서조차 이런 시각이 마오 자신이 생각하던 중국의 독특한 농민 주도 경험과 모순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카멘카에게 그런 “아이디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중-소 간의 “이념적” 분열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현대중국에 관한 내 연구의 한 주제로 설정하겠다고 약속했다.

 

Posted by 문천

 

내가 중국사 교수직에 임명될 때 많은 사람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동남아시아사 외에는 연구 실적이 별로 없는 대학에서 온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다. 1968년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올 때 나를 맞이한 기자들에게 받은 질문은 베트남전쟁이나 그 전해에 반공기구로 결성된 아세안에 관한 것뿐이었다. 다른 학교에서 온 강연 초청은 말레이시아 정치에 관한 것뿐이었다. 중국에 관해 내게 질문한 사람은 극히 적었는데, 내게는 개의할 일이 아니었다. 내 자리가 종신직이어서 65세까지 지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몇 해 안 있어 말레이시아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캔버라에 온 지 일곱 달이 안 되어 계획을 재검토하게 된 것은 마거릿도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969년 5월 13일 이후 시작되어 우리를 슬프게 한 일이었다. 중국인들이 대개 그러듯 나는 변화를 정상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삶이란 빨리 바뀔 수도 있고, 너무 천천히 바뀌어서 무엇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음을 깨닫기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너무 갑자기 닥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5월에 말레이시아 연방의회 선거가 있을 것은 알고 있었다. 몇 개 선거구에서 종족 간 긴장 사태가 보도되었으나 선거 당일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놀라운 것은 중국계가 주도하는 야당이 뜻밖으로 많은 의석을 획득한 사실이었다. 5월 13일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나는 정말로 모른다. 야당이 페낭과 클란탄 두 주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른 두 주 슬랑오르와 페락에서 상당한 성적을 거뒀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아있다.

 

선거 결과 발표 다음 날 야당의 승리 축하행사가 쿠알라룸푸르(KL)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주로 중국계인 비-말레이 군중이 그 전날 말레이 주민들에게 모욕을 가하고 집권당인 연합당의 지역 말레이인 지도자들이 이 군중의 응징을 호소한다는 이야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던 기억이 난다. 밤사이에 말레이인과 비-말레이 군중이 모여들어 싸움을 시작했다.

 

정부가 예견하지 못한 사태였던 것 같다. 보안군이 투입될 때는 외국 기자들이 보이는 대로 보도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마거릿과 나는 KL에서 보내오는 오스트레일리아 라디오 뉴스의 생방송을 듣다가 시내 한복판 대로에서 사람들이 총을 맞고 있다는 뉴스에 공포감을 느꼈다. 몇 달 동안 떠오를 때마다 우리를 진저리치게 한 장면이다. 그 뒤로 내가 받는 강연 초청 주제가 동남아시아와 중국계 주민들로 더 쏠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변질 Crafting a new Malaysia

 

여러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유학생 단체, 특히 멜버른, 시드니, 캔버라 소재 대학의 단체들이 곧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초청했다. 상황을 목격한 KL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학생들도 많았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던 것은 KL의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승리감과 분노를 표출하게 만든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사건들의 배경을 설명하는 정도였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를 파탄으로 이끌 것이 분명한 이 비극을 학생들과 함께 걱정하지만, 완전한 조사가 끝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툰쿠 압둘 라만 수상은 곧 계엄 내각을 구성했다. 툰 라작 부수상과 이스마일 압둘 라만 내무장관에게 신속한 조치를 취할 특별 권한이 부여되고, 야당들은 각자의 지지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혈 사태가 다른 도시로 번지지 않고 KL에서도 곧 그치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을 놓았다. 오랫동안 두려워해 온 사태를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먼 곳에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평등의 정치로부터 끝없는 종족 간 불신의 정치로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을 제쳐놓고 봉건적-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정치가 펼쳐진다면 위험한 장래를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내 말레이인 친구 중에도 귀족주의적 종족 간 분쟁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계엄법에 따라 체포되었다. 그래도 몇 달 동안은 너무 심한 정치의 변질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흥분하지 않도록 권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5월 13일 이후 침착하려고 애쓰던 내 자세는 <말레이시아 5월의 비극 The May Tragedy in Malaysia>(1969)에 수록된 멜버른에서의 첫 강연록 “말레이시아: 새로운 단계로? Malaysia: a new phase?”에 나타나 있다.

 

1969년 후반의 두 개 국제학회 참석을 폭동 사태 한참 전에 예약해 놓고 있었다. 하나는 케임브리지, 하나는 홍콩이었다. 캔버라 출발을 앞당기고 KL과 싱가포르에 들러 친구들에게 장래 전망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두 도시에 보름 있는 동안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것을 보며 온갖 걱정스러운 견해를 들었다. 떠나기 전 마거릿에게 쓴 편지에 우리 귀국 계획을 재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우리나라에 무슨 심각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도 홍콩에서도 말레이시아 계엄 사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나는 언론으로부터나 동료 학자들로부터나 많은 질문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하던 것처럼 조심스러운 분석을 제시하면서 오는 길에 들렀을 때 떠오른 생각을 조금 덧붙였다. 내가 한 강연 중에는 시드니와 멜버른에서 하던 이야기를 기초로 한 것들이 있었다. 더러 언론에 보도되었고, 많이 인용된 것도 있었다. “말레이시아: 귀족주의의 대두 Malaysia: Contending Elites”. “말라야 중국인의 정치 Chinese Politics in Malaya” 같은 글들이 있었다. 홍콩에서 발표한 글 하나는 도쿄에서 “말레이시아 정치의 변화 Political Change in Malaysia”로 나오기도 했다. 이제 돌아보면 그 강연들은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한 내 최선의 희망을 담은 것이었고, 언젠가 돌아가기 위해 문을 열어두려는 안간힘이었다.

 

 

캔버라에서 구경꾼이 되어 View from Canberra

 

친구 중에는 그 시점에 우리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었던 것이 묘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는 한 세기에 걸친 인종차별에서 벗어나며 “백호(白濠)”를 청산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 대학에서는 아시아 학생들을 환영하며 아시아인 교수들을 초빙하고 있었다. 새 세대 학자와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백호주의 반대운동을 계속해 왔고 이제 그 종말이 가까웠다. 중국인인 내가 동남아시아의 대학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 소속 연구원의 교수직으로 곧바로 초빙된 사실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내 전임자 패트릭 피처럴드가 중국학 연구자일 뿐 아니라 윈난성 다리(大理)의 바이(白)족 연구자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중국 소수민족 연구를 해왔고, 그로부터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고찰할 상당한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피처럴드의 후임으로 내가 임명된 사실은 극동 개념의 유연성을 확인해주었다. 19세기 이래 대영제국의 시각으로는 인도와 태평양 사이가 모두 극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떠나온 지역에는 “동남아시아”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한편이던 미국과 영국이 이 지역의 한 무더기 조그만 탈-식민 국가들을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떼어내려 한 데는 충분히 검토된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 생각이 사로잡혀 있는 채로 ANU 설립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태평양세계의 중견국가로 역할을 맡을 필요를 느꼈다. 그들은 태평양연구원을 설립하면서 아시아-오세아니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영국과 유럽의 유산으로부터는 거리를 두는 길을 찾았다. 그 과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ANU 지도자들은 태평양사학과와 극동사학과, 두 개 역사학과를 태평양연구원에 설치해서 지역 연구의 한 몫을 맡겼다. 태평양사학과의 짐 데이비슨(Jim Davidson) 교수는 빈틈 하나를 알아보고 동남아시아 역사까지 관심을 넓혔다. (극동사학과의) 피처럴드는 중국과 일본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동남아시아를 데이비슨에게 맡겼다.

 

KL 폭동 이후 말레이시아 정치의 진행 방향이 궁극적인 “말레이 패권 Ketuanan Melayu”을 향한 첫 단계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겪은 영국 패권과 다른 성격의 패권이지만 소수민족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영향은 비슷할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마거릿과 나는 우리가 믿음을 가진 “말라야”가 연방 헌법의 보호를 받으리라는 희망을 지켰다. 나는 차분한 자세로 일단 낙관적인 전망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귀국 계획을 늦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NU의 사택 제공은 3년이 한도였기 때문에 거처 문제도 결정이 필요했다. 마거릿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가족과 친구들 의견을 들은 후 캔버라에 집을 새로 짓기로 결정했다. 투자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묘한 일이기는 했다. 과거의 편견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지내며 우리나라의 인종차별 전망을 걱정하고 있다니.

 

내 마음속에서 중국인이라는 의식으로부터 말라야인, 그리고 말레이시아인으로 의식을 옮긴 지 근 20년이 되었을 때 캔버라로 건너왔다. 그 기간 동안 내가 다중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성쇠와 지역의 탈-식민 독립운동의 흐름 때문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과 함께 중국 시민에서 남양 화교가 되었다가 다시 말라야 중국인이 되었다. 캔버라에 올 때 우리는 “말라야인”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이 만족스러웠다.

 

 

중국인의 다양한 존재 양식 Many shades of being Chinese

 

우리 대부분이 “말라야” 개념에 싱가포르 식민지를 넣어서 생각하던 시절에 나는 해외 중국인과 남중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곳에 있는 그들의 뿌리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국계의 유력한 집안 중에는 현지에 자리 잡은 지 5-6대가 되는 집안이 많고, 새로 온 사람 대부분은 19세기에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 해안을 개방한 후에 나온 사람들이다.

 

더 후에, 특히 20세기 중에는 사무원, 언론인, 교사들과 정치적 망명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정착한 집안의 아이들 교육을 위해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탈식민지 과정이 시작하자 지역 곳곳의 젊은 중국인들이 지역 정치에 끌려 들어갔고, 중국의 내전과 공산당이 이끄는 “신중국”에 관심을 키운 사람들도 있었다.

 

런던에서 지내며 이 변화들을 바라볼 때 나는 말라야에 남양 중국인을 위한 대학을 세워 그곳 중학 졸업생들이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취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말라야대학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으나 학교 밖에서 당송 시대에 관한 내 연구나 명청 교체기에 관한 내 강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글이나 말로 발표하도록 꾸준히 요청받은 주제는 남양의 해외 중국인과 그들의 역사였다.

 

읽는 것이 늘어날수록 중국계 주민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리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라디오 말라야의 연재 강연을 묶어서 낸 <남양 중국인 약사 Short History of the Nanyang Chinese>에서 나는 각지의 중국인 집단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각 집단이 현지 민족주의에 대응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 관점은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말라야 국민을 바라보는 내 시각에도 적용되었다. 그런 국민을 이뤄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믿었다.

 

이제 돌아보면 너무 순진한 믿음이었다. 새 출발에 나서려는 작은 집단들과 중국과의 관계에 사람들을 묶어놓는 거대한 조직들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의 형성을 위해서는 질서 있는 사회 안에서 문화적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가 필요했다.

 

남양 중국인에 관해 그런 글을 쓴 입장에서 오스트레일리아가 한 세기 동안의 아시아 차별 시대를 뒤로 하고 바로 그런 자유를 제공하려 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를 축하하러 거기 간 것이 아니었다. 중국사 연구 확충이 내 목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를 읽으면서 골드러시 시대 이래 그곳의 “중국 문제”를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ANU에 도착할 때 옛 친구들과 새 동료들의 환영은 그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이제 오히려 KL의 폭동 사태가 “중국 문제”의 정치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하나 불편한 문제는 말레이시아 중국인 입장으로 초청받은 자리에서 중국공산당의 영향력 확장에 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라야공산당이 아직도 정글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중국인 교수였다. 공산당원도 아닌 이 사람이 왜 캔버라의 도서관에서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관한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왜 이 사람은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들과 아직도 다른 태도를 보이는가? 왜 이 사람은 시드니와 멜버른 같은 도시의 중국인 집단에 접근해서 그들이 지난 세기 동안 겪은 일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가?

 

사실은 내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현대 중국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고, 이 지역과 중국의 관계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은 더 많았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온 것은 가장 두드러진 공백들을 채우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할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는 것도 내게는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지지에 의문이 일어나고 유엔에서 베이징 대신 타이베이를 승인하는 정책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중국을 연구하는 내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으나 우리 지역에서의 열전(熱戰)도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배제도 불합리한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고 바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KL에서 오스트레일리아노동당 지도자 고우 위틀럼을 만났을 때 유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가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들은 기억이 난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왔을 때 열렬한 반공주의자 중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 밖에 두기보다 안에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견해에 찬성하는 뜻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 주제의 토론에 나서지는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복잡한 사정을 더 잘 알고 세계적 상황에 대한 마오쩌둥주의 입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폭동 사태로 인한 정치 지형의 변화 속에 해외 중국인으로서 내 위치에 대한 자의식이 민감해지는 동안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인의 역사에 손을 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인과 중국인 학자들의 그 분야 연구가 늘어나고 있어서 그 성과를 살펴보는 데 만족했다. 아서 허크(Arthur Huck)가 최근에 주목할 만한 책을 냈고,[The Security of China; Chinese Approaches to Problems of War and Strategy] AT 야우드(AT Yarwood)와 폴프리먼(AC Palfreeman)의 책도 읽었다. 중국 자료를 이용한 용칭팟(Yong Ching Fatt)과 CY 초이(CY Choi)의 연구는 백호주의 정책 아래 중국인의 사업과 정치에서 새로운 측면들을 밝혀주었다.

 

만났던 중국인사회 지도자 중 윌리엄 럼 류(William Lumb Liu)와 연락을 계속했다. 백호주의 시대 내내 활동한 끝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중국인의 새로운 위상을 경험하기에 이른 인물이다. 그는 내 입장을 이해하면서, 만날 때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 속에서 중국인의 모습을 더 잘 알아보게 도와주었다. 이곳 중국인들이 만주족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를 지지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차별적인 백호주의 정책이었다고 가르쳐주었다. 그 세대 중국인들이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를 계속 지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외면하는 한 가지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1969년의 후반부 동안 나는 KL에서 일어난 일의 보도와 소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마오쩌둥을 신격화된 황제로 옹립하려 한 문화혁명에 관한 읽기를 꾸준히 해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삶의 조건이 걸린 새 국가정책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던 가족과 친구들, 동료 교수와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KL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걱정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 귀국 계획을 재고하라고 권해주었고, 우리도 사실 재고하고 있었다.

 

KL 폭동 사태는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몇 달 동안 캔버라에 찾아온 친구와 친척들은 입을 모아 그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떠난 것이 대단히 현명한 일이었다고 칭송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3년가량 나와 있을 생각이어서 그 후에 KL에서 어떤 자리라도 찾을 수 있으면 돌아가려고 페탈링자야의 집도 팔지 않고 두었다. 폭동 사태 후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더 길게 지낼 준비를 했다.

 

Posted by 문천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은 중국 연구의 역량을 잘 갖춘 곳이었다. 우리 동료들의 연구 영역은 고대 기술로부터 초기 과학사상, 수입된 종교들, 정복왕조들과 혁명적 근대성의 도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모여있는 학생들의 관심도 그 못지않게 다양했다. 경극(京劇)의 기원, 선종(禪宗)불교의 선문답(禪問答), 남송 수도 항저우 주민들의 생활상과 청동기 명문에 나타난 작위(爵位) 수여를 연구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1911년 혁명을 연구하는 학생은 적어도 두 명 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 학교에 중국학 연구자는 넉넉히 있었으나 중국근대사 연구자가 아쉬웠다. 내 전임자 패트릭 피처럴드가 떠나고는 근대사 연구자가 로후이민 한 사람뿐이었다. 로후이민은 내가 영국에서 박사과정 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중국 외교사를 연구했고, 최근에는 시드니의 미첼도서관에 있는 언론인 조지 모리슨의 일기와 편지의 연구를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 초기의 외교관들이 중국에 쏟아지는 열강의 무리한 요구에 대응하려 분투하던 어려운 상황을 밝혀내는 연구였다. 모리슨의 눈에는 그 상황이 알아보기 쉽게 비쳐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예산만 넉넉하다면 근대사 연구자를 찾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쿠알라룸푸르 쪽 사정 때문에 ANU 체류를 늘릴 생각을 하면서는 (10장에 상술할 것임) 교수직에 따르는 책임의 범위를 더 넓게 생각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면서 우리 학과의 특수한 조건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럽인의 위치에서 바라본 “극동” 개념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릴 것도 없이, 내가 아는 어느 대학에도 “극동사”를 위한 학과가 없었다. 우리 교수진과 학생들은 온갖 종류 동양학과와 역사학과 출신이었다. 졸업생 대부분은 중국사와 일본사 비중이 크지 않은 역사학과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계약직 연구교수를 초빙할 예산을 활용해서 20세기 중국사를 맡을 콜린 매커라스(Colin Mackerras), 팀 라이트(Tim Wright)와 레엉 소우텡(Leong Sow-theng)을 불러오면서 우리 학과의 균형이 더 잘 맞춰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예산이 없다면 극동사학과에 근대사 연구자를 초빙하기 위해 중국학 연구자를 줄여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대학 당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연구를 늘릴 결의가 확고했다. 국제관계학과장 브루스 밀러(Bruce Miller)와 경제학과장 하인츠 아른트(Heinz Arndt)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우리는 외부 자원을 확보해 현대중국센터를 설립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오드리 도니손(Audrey Donnithorne)을 초대 주임으로 초빙했다. 얼마 전 나온 도니손의 책 <중국의 경제체제 China’s Economic System>(1967)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1949년 이후 중국 경제의 변화를 명쾌하게 그려내고 대약진운동을 견뎌낸 원인을 설명한 책이었다. 그의 초빙 응낙은 우리 행운이었고, 덕분에 ANU가 필요로 하는 균형에 현대중국센터가 도움이 되었다. ANU가 중국사의 어느 기간의 연구에도 둘 이상의 방법론을 확보하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역량을 갖춘 연구기관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단 하나일 뿐 아니라 서방세계 전체에도 몇 되지 않았다.

 

역사 연구의 다른 영역에 대한 ANU의 역량도 살펴보았다. 두 개 연구원에 각각 두 개씩의 역사학과가 있었다. 태평양연구원에는 극동사학과와 태평양사학과가 있었고 사회과학연구원에 역사학과와 경제사학과가 있었다. 그밖에 태평양연구원에는 선사학과가 있었고, 같은 건물을 쓰는 사회과학연구원에는 사상사 연구팀이 있었다. 대학원생까지 넣어서 보면 ANU에서 가장 큰 역사학 연구자 그룹이 두 연구원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유념했다.

 

극동사와 태평양사의 우리 영역에는 광대한 육지와 바다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북” 지역으로 새로 나타난 동남아시아 지역에 큰 공백이 있었다. 사회과학연구원에 남아시아의 대영제국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갈 무렵에는 모두 떠나 버리고 두 역사학과에서는 영국사와 오스트레일리아사만을 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학과의 사상사 연구팀은 근대 아시아의 지도자들에 대한 서양사상의 영향을 연구하는 유진 카멘카(Eugene Kamenka, 1928-1994)가 주임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카멘카는 스탈린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도대체 마르크스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잠깐 나와 동료로 있을 때는 중국사의 “동양적 전제주의”를 함께 토론했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문화혁명의 뿌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세계 전파를 살펴보고 있었다.

 

매닝 클라크를 비롯한 문학부의 역사학자들도 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세계 안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치를 지역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는데, 역사를 보는 데도 그 시각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에 관한 클라크의 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Charles Manning Hope Clark(1915–1991), A History of Australia(6 vols, 1962-1987)] 그 동료들, 특히 케네스 잉글리스(Kenneth Inglis), 에릭 플라이(Eric Fry)와 로빈 골런(Robin Gollan)의 책들을 더 찾아 읽었다. 브루스 켄트와 대프니 골런이 유럽과 아시아의 근대 혁명들에 관한 강의를 함께 진행하고 있던 사실을 그 강의에 중국이 경험한 혁명들도 비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알게 되었다. 내가 당시 읽고 있던 내용을 맥락에 맞춰 정리할 기회여서 반가운 부탁이었다.

 

ANU의 아시아 연구 역량을 발판으로 파리 중심의 동양학대회를 유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열린 대회에 이어 아시아-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회였다. ANU가 대회 유치를 신청할 때 나는 앤아버 대회에 참석 중이었다. 2년 후 중국과 한국에 관한 패널을 내가 조직하고 있게 될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캔버라 대회는 1970-71년에 열렸다.

 

캔버라는 동양학 연구자들이 밀집해 있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참석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시아에는 자기 연구 분야를 동양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가까운 곳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호 개방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호응이 컸다. 그리고 ANU가 동양학대회를 개최하면서도 동양학부의 이름을 아시아학부로 바꾸는 절차가 진행 중이던 사실을 주목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 직전인 1971년 1월에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회가 열리자 비교적 젊은 학자들이 아시아에서 왔고, 근대와 현대의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사회과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오스트레일리아 다른 대학에서 온 참석자들도 젊은 편이라는 사실이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인접 지역과의 접촉이 늘어나는 데 고무된 그들은 유럽의 시각 아닌 다른 시각으로 아시아를 보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아시아학과 비슷한 방향으로 아시아학협회를 결성하자는 제안이 개회 직후에 자연스럽게 나왔다. 5년 후 존 레그를 초대 회장으로 한 협회 결성은 아시아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새로운 관심을 보여주면서 학술활동의 전개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태평양연구원에서 근대사 연구가 확장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 결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 사이에 경계선이 많이 허물어지고 연구활동의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ANU의 이런 변화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주변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비쳐 보여준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의 한 “신생국가”에서 온 젊은 중국인 연구자, 그것도 제한된 범위의 작업을 길지 않은 시간 내에 하려고 온 나 같은 사람을 현대중국 연구의 교수직에 임명할 태세를 ANU는 보여주지 않았는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