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Another academic order / 학문의 새로운 풍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면서 그 나라를 더 잘 알 필요를 느꼈다. 신문 읽고 라디오 듣고 국영 티브이 보는 것으로 부족했다. 그 나라에 대한 내 이해는 1965년 방문 때의 ”행운의 나라“ 이미지에서 별로 늘어난 것이 없었다.
제프리 블레이니의 <공간의 지배력 The Tyranny of Space>을 읽으면서 상상의 역사학을 떠올렸다. 계몽주의 이후의 질서체계가 그려져 있는데, 이 나라의 뿌리 깊은 불안감을 생각할 좋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이 제국의 후광에서 벗어나자는 함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제프리 블레이니(Geoffrey Blaney, 1930~ )는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역사가로 널리 인정받는 인물인데도 보수적 입장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는다. 1990년대에 시작된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전쟁“에서 블레이니는 ”검은 완장 사관“(진보파)과 ”세 번 만세 사관“(보수파)을 나란히 비판했는데도 보수파로 지탄받는 것은 근년 오스트레일리아 지식계의 분위기가 진보 쪽으로 치우친 때문인 것 같다.]
캔버라에서의 처음 몇 주일 동안 보수파와 종교계 우익과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반대파에게 어떤 말을 퍼붓고 또 그들에게 돌려받는지 재미있기 짝이 없었다. 그 입씨름은 영국 언론에서 보던 공개논쟁과 맛이 비슷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가 아직도 영국이 짜준 틀 안에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새 세대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아시아에 너무 가까운 데서 오는 종래의 불안감을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관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치를 판단하는 데는 조심스러워졌다. 그 나라가 냉전에 얼마나 깊이 얽혀들었는지, 인도네시아공산당의 파괴를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얼마나 열심히 지지했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학생들의 월남전 반대 분위기를 알게 되면서 크게 놀랐다. 백호주의 정책에 대한 부끄러움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그 인종주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학생들을 보며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는 종래의 무미건조를 벗어나 극적인 변화의 시대를 따라가고 있었다. 많은 국민에게 중심지 런던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기네를 시골뜨기로 보는 영국인의 시선을 벗어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가. 그리고 그 열등감이 가장 오래된 이주민의 자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쓰라린 것이었다.
이 현상을 처음 들을 때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경험도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라야에서 이슬람식이나 중국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열등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주민 대부분이 영국계인데도 이런 열등감을 흔히 느낀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 건국 준비 단계에서 말라야 학생들이 끌리던 것과 같은 포용적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자기네 정체성이 다민족일 수도 있고 심지어 다문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떠올리며 백호주의를 가볍게 내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측면을 생각하면, 일반인의 태도가 막 변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온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곳의 새 세대가 평등의 이념과 인도적 가치를 앞세우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감의 바닥에는 중국 등 많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국제주의의 명색을 내건 소련의 갑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영-미 연합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었다.
그때까지의 내 역사 연구를 돌이켜보니 통치와 정치질서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근대 중국의 개혁가와 혁명가들, 그리고 전근대 조공체제와 연결된 남중국해의 교역활동 같은 주제로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10세기 중국의 무력(武力)국가들을 연구한 박사논문은 정치권력과 집권체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그 후에는 명나라와 주변국들 사이의 조공관계로 나아갔고, 명-청사 강의는 두 왕조의 흥망에 초점을 두었다.
내 관심이 너무 좁은 범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의 국가사 토론에 계속 참여한 덕분이었다. 동남아시아 모든 곳에서 공유하는 새 국가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토론이었다. 그에 더해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과목을 강의하면서 각 문명권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방법의 차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5년간 그 과목을 듣는 학생들에게 고대 지중해세계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정치질서에 관해 읽고 힌두교-불교세계 및 유교세계와 비교해 볼 것을 권했다. 학생들은 불교 사상이 유가 세계관을 파고든 현상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이며 왜 이슬람 사상은 그런 현상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 역사도 살펴볼 것을 권하면서 민족국가 역사서술의 편협성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나 자신 말레이시아 중국인 집단의 역사를 살펴보다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펼쳐진 그들의 국경 없는 활동 양상에 끌려 들어갔다. 토착민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식민지배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좋은 방식이었다. 이 집단들의 행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황에 갈수록 큰 영향을 받음을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는 중국사 연구를 넘어 마오쩌둥 중국의 시사에도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학의 용도를 안전 범위 밖으로 늘리고 있었던 셈이다.
중국을 둘러싼 캔버라의 연구자들 ANU and sinology
난징에서 내가 다닌 대학은 원래 지방대학이었다가 1928년에 새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으면서 국가의 간판 대학이 된 학교였다. 다음에 다닌 학교는 1949년 영국 당국이 말라야 독립을 앞두고 그 건국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세운 대학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국립“대학으로서, 몇 해 전 태평양전쟁 중 국가가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인재 유출이 많은 현실을 국가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데 따라 설립된 학교였다. 프린스턴의 고등학술원(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이나 옥스퍼드의 올소울스 칼리지(All Souls College) 같은 연구 중심 기관을 만들어 유출된 인재를 복귀시킬 필요가 제기되어 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태평양학의 4개 연구원(research school)이 설립되었다. 각 연구원에는 박사과정만을 지도하는 종신직과 계약직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내 첫 방문 때까지는 1930년에 세워져 멜버른 대학 출신으로 채워진 캔버라대학 교수들이 ANU 교수진이 되었고, 4개 연구원은 고등학술원 산하에 편성되어 있었다. ANU의 두 부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학생 구성도 서로 달랐다. 특이한 현상으로 보였지만, 쿠알라룸푸르(KL)로 돌아갈 때까지 몇 해 동안 연구에 전념하고 싶은 내 입장에 편리한 조건이어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 관심은 전근대 문화체계의 해체 현상으로부터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자금 지원이 넉넉한 연구대학에서 지내는 것은 바라 마지않던 호강이었다. 이 기회를 최대한 잘 활용해서 혁명기 중국이 보여주는 극심한 혼란을 설명할 관점과 지식을 갖추고 KL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잘 자리 잡혀 있는 ANU의 어느 학과에도 내가 특별히 공헌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풍성한 문서와 학술지와 도서에 빠져 지낼 뿐, 각자의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동료들을 내가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학생 중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뿐이었다.
도착할 때 ANU 총장 잭 크로퍼드와 태평양연구원장 오스카 스페이트가 극동사학과 과장으로서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말해주었다. 나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여러 대학에서 중국사와 일본사를 강의할 박사과정 학생들을 돌봐주는 외에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과에는 전문성이 강한 연구자 몇이 종신직 교수로 있었다. 중국사에 다섯, 일본사에 둘이었다.
내 분야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주로 전근대사를 다루었고 런던대학 학위는 “중세사”로 표시된 것이었다. 중국학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반대로, 말라야 국가 건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해외 중국인의 역사에 대한 흥미 때문에 애초 생각보다 현대사에 가까워졌다. ANU에 올 때는 중국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의 기원을 연구해서 마오쩌둥 같은 인물이 중국사의 긴 흐름 속에서 가지는 위치를 설명할 길을 찾을 목적이었다.
일본에 관해서는 복잡한 일이 없어 보였다. 시드니 크로커와 앤드루 프레이저는 둘 다 현대사 전공이었다. 크로커는 경제사 연구자였고, 소아스 시절 급우이자 술친구였던 프레이저는 시코쿠 도쿠시마 지방권력의 뿌리를 깊이 들춰보고 있었다. 내 도착 무렵 크로커는 아시아학부 일본학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운 자리는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사 전공자 중 로후이민을 제외한 네 사람은 중국학 전통에 투철한 연구자들이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 초기 단계에서 주요 협력자였던 왕링(王鈴, 1918–1994)은 케임브리지에서 니덤과 함께 일하고 있을 때 만난 일이 있었다. 평범한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문헌 파악은 전설적 수준이었고, 니덤의 대담한 가설들을 뒷받침해 준 그의 문헌고증은 많은 사람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ANU로 공부하러 와서 우리 학과의 첫 박사학위를 받은 노엘 바너드(Noel Barnard)는 상-주(商-周) 시대의 청동기 기술 연구로 알려진 사람이고 청동기 명문(銘文)의 전문가였다.
학과의 초기 박사학위 수여자 또 한 사람 이골 데 라케윌츠(Igor de Rachewiltz, 1929–J2016)는 이탈리아 명문가 출신으로 유럽 중국학의 유서 깊은 중심지 나폴리대학에서 “동양학”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몽골어 공부로 시작해서 고전한문을 익힌 그를 1961년 뉴욕의 어느 학회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거란인 정치가 야율초재(耶律楚材) 연구에 탄복했고, 그가 영역한 <몽골비사> 초고를 보고 매료되었다. 그는 두 언어로 작성된 이 자료의 충실하고도 섬세한 번역을 계속해 왔다.
네 번째 연구자는 파리에서 중국학에 입문한 도널드 레슬리Donald Daniel Leslie, 1922–2020)였다. 케임브리지에서 처음 만날 때는 중국 초기 과학사상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파리에서 폴 드미에비유(Paul Demiéville, 1894–1979)의 지도 아래 전통적 고전으로 방향을 돌려 <논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했다. 카이펑(開封)에 남아있는 중국 유대인에 관한 책으로 이름을 날렸다. 내가 그곳에 갈 무렵에는 중국의 이슬람교에 관한 연구를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ANU에는 동양학부에 중국학 연구자 몇 명이 이미 있었다. 초대 학부장 한스 빌렌스타인(Hans Henrik August Bielenstein, 1920−2015)은 명성 높은 중국학 연구자 배냐드 칼그렌(Klas Bernhard Johannes Karlgren, 1889–1978)의 제자였다. 중국학과의 초대 주임교수는 칼그렌의 다른 제자 고란 말름크비스트(Nils Göran David Malmqvist. 1924–2019)였다. 내 도착 전에 빌렌스타인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으로 갔고 말름크비스트는 스톡홀름대학의 칼그렌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다. 그 후임자 류춘옌(柳存仁)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 전통에 깊은 소양을 쌓고 도가의 전통에 관한 뛰어난 연구를 이뤄낸 사람이었다.
중국학과에는 그밖에 스베틀라나 림스키-코르사코프 다이어(Svetlana Rimsky-Korsakoff Dyer, 1931~ )가 있었다. 청나라 때 카자크스탄으로 옮겨간 둥간(東干)족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나라 때 역사서술을 연구한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Richard Rafe Champion de Crespigny, 1936~ )가 있었다. 뛰어난 중국학 연구자이자 미술사가인 피에르 리크먼스(Pierre Ryckmans, 1935– 2014)는 곧 도착할 참이었다. 리크먼스는 사이먼 리스(Simon Leys)라는 이름으로도 글을 발표했다. 동양문명학과의 오토 판 데어 슈프렝켈(Otto Pierre Nicolas Berkelbach van der Sprenkel, 1906–1978)은 명나라 경제사를 연구했었는데, 이제는 유럽 중국학의 역사적 평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극동사학과 교수들까지 합쳐서 본다면 ANU는 남반구 최고의 중국학 연구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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