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ng Nationhool and Nationalism 민족은 무엇이고 민족주의는 무엇인가

 

군벌시대를 마침내 끝내는 데 성공한 세력은 국민당이었습니다. 민족국가라는 강력한 서양 개념에 집중함으로써 거둔 성공이었습니다. 민족의 개념이 없던 중국인에게는 민족국가도 당연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중국에 있던 왕조국가는 19세기에 “제국(empire)”으로 표현될 라틴어의 “imperium”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의 적들에게 대항하는 주체로서 민족의 개념은 국민당의 설립자 쑨원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쑨원과 그 추종자들은 군벌들에 대항해 무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28년 베이징 정부에서 권력을 넘겨받고 난징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민족주의의 깃발로 승리는 거두었으나 대다수 중국인에게 민족의 개념을 심어주기는 힘들었습니다. 민족주의의 실체를 세워준 것은 그 뒤를 이은 일본의 침략이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인은 자기네 민족이 유별나게 야심이 큰 한 근대국가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없던 중국인이 몽골족이나 만주족 같은 소수 집단의 정복을 받은 사실을 일본인들이 중시한다는 것을 중국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정복하는 길을 일본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에 닥친 과제는 인민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켜 또 한 차례 정복을 면하는 길이 오직 애국심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인에게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은 전시(戰時) 현상이었습니다. 아직 새로운 민족문화의 틀 속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중국은 승자 편에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중국이 국민당 정부 아래 통일된 국가로서 진정한 새 출발에 나설 때가 된 것 같았습니다. 국민당은 일본에 맞서 싸운 애국집단으로서 새로운 민족의식 위에 민족문화의 건설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에 또 하나 애국집단으로 나서서 전쟁을 통해 군사력을 키워낸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부와 내전을 재개했습니다. 3년이 안 되어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것은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결국 국민당이냐 공산당이냐 크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통치권을 위해 싸우기는 피차 마찬가지였고, 이기고 지고는 전투로 판가름날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국민당은 군벌을 격파해서 정통성을 획득했고 일본도 전쟁에 이겨 정통성을 획득하기 바랐습니다. 1949년에 공산당이 해냈습니다. 중국인들은 전쟁의 승리가 천명을 확인해준다는 문화에 익숙했습니다.

 

이제 공산당이 새 민족 건설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마오쩌둥 같은 지도자들은 아마 나름의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인민을 교화할 뜻이었을 것입니다. 대다수 인민에게 그 공산주의의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통성을 가진 정부가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인민의 생계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정부를 백년 동안 가져보지 못한 중국 인민은 그런 지도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문명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전통적 관점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인민의 대다수는 전통문화를 굳게 지키는 향촌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패하고 이기적인 부와 권력의 소유자들을 미워했지만, 혁명 지도자들이 청산하고자 하는 전통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지도자들은 정치적 변화를 넘어 사회적-문화적 혁명을 통한 중국의 근본적 변화를 서두르고 싶어 했습니다.

 

밖에서 보는 이론가나 정치학자에게는 일개 당이 군사력과 국가폭력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는 전체주의 통치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전통적 삶의 방식에 길든 중국인은 승자의 정통성에 쉽게 복종합니다. 중국을 떳떳한 나라로 되살리기 위한 급속한 산업화를 비롯해 국가에 복무하라는 권력의 요구를 그 요구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정당성을 확보한 혁명에는 변화의 여러 단계에서 이리저리 자라나는 민족문화의 탄생이 따릅니다. 정치적-경제적 혁명을 통한 권력구조와 경제제도의 변화로 시작해 전면적인 사회적-문화적 변신으로 나아갑니다.

 

 

Defining Revolutions “혁명”아런 무엇인가

 

“Revolution”의 번역어로 현대 중국에서 쓰이는 “혁명(革命)”이란 말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서양 개념을 번역한 많은 한자어와 달리 이 말은 새로 조합된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왕조를 전쟁에서 이기고 천명을 획득한 새 왕조가 대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고전 한문에 쓰인 말입니다. 권력이 합당한 새 지도자에게 넘어가는 과정이 “혁명”이었습니다.

 

“Revolution”의 의미에 이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미국혁명이든 프랑스혁명이든 다른 어떤 혁명이든 서양의 정치혁명에는 폭력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을 벌이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새것이 옛것을 대치했습니다.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는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혁명은 왕 하나 머리 자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크롬웰의 공화국은 군주국이 아니었으나 너무 단명했기 때문에 왕조체제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는 혁명으로 왕국이 공화국으로 바뀌었고, 진정한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었습니다. 쑨원과 공산당 초기 지도자들은 두 나라 혁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중국은 정치혁명을 이루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중국의 “혁명”은 왕조 교체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정치구조나 가치관의 변화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을 쥐는 사람은 바뀌지만 새 권력자가 다른 변화도 원하는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새 왕조가 다음 왕조 나타날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0세기의 정치혁명은 이 틀을 깨뜨리고 두 개 공화국을 낳았습니다. 쑨원이 대표한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이 대표한 중화인민공화국입니다.

 

1949년 공산당의 승리는 새로운 통치체제를 가져왔습니다. 마오쩌둥은 정치-경제적 혁명을 넘어 사회-문화적 혁명으로 나아가 전혀 새로운 중국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인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전일주의(holistic) 유산은 건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1949년 혁명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산입니다.

 

이 전일주의 유산이 영원한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여러 행정부서 사이에 권력의 분할은 있지만, 행정, 입법, 사법 사이의 권력 분립은 없습니다. 전일주의 개념의 권력은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관료집단에 집중되어 하나의 뿌리만을 가집니다.

 

민국 시기 지도자들은 서양의 민주주의를 선망하며 서양 모델을 따른 헌법을 작성했습니다. 프랑스-독일을 바라본 사람들과 영국-미국을 바라본 사람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있기는 했으나 중국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의견이 모였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사회의 온갖 다양성과 복합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직시할 용의를 보였습니다. 서로 다른 여러 언어를 쓰고 이해관계와 지역문화가 엇갈리는 거대한 나라를 세우는 합당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유할 만한 정치문화를 빚어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권력투쟁이 횡행하면서 근대론자들이 내놓은 이상들은 아무리 잘 준비되고 실행가능한 것이라도 모두 파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했던 말입니다.

 

연안 지역과 공업도시에서 진행된 중국의 경제혁명은 성과가 나았습니다. 상업과 재부(財富)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뒤바꾼 기업가 계층의 흥기가 가져온 성과입니다. 상인은 유가 학인계층의 멸시를 받던 존재였습니다. 스스로 재화를 만들어내지 않고 남이 만든 재화에서 이윤을 뽑아내는 기생충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권력을 맡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양 상인들이 조계지역에 군림하면서 중국 상인들이 새 역할을 맡을 기회를 잡았습니다. 서양인의 교역 방식을 배워 중국의 전통적 사업 방식과 융화시키면서 성공을 거두는 상인이 늘어났습니다. 그에 따라 중국사회에서 그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자유화가 늘어난 시장경제 안에서 재산을 모으는 근대적 기업가들의 흥기는 대단한 현상이었습니다. 상류 엘리트계층이 이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걸렸으나 기술을 갖춘 기업가들이 아니고는 근대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현실을 결국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의 경제 개발은 기업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이 부도덕한 일도 아니고 탐욕 때문만도 아니라는 인식이 서서히 엘리트계층 내에 확산했습니다.

 

이 변화가 1949년 공산당의 승리로 단절되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정말로 신봉하거나 그 의미를 이해한 중국인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상인을 의심스럽게 보는 전통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인에게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널리 깔려 있었기 때문에 상인이란 잠재적으로 중국의 적인 자본주의자들과 같은 존재라고 공산당이 인민을 설득하기가 쉬웠습니다. 냉전의 맥락 위에서는 부유한 상인을 의심쩍게 보는 전일주의 문화가 공산당의 교리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마오쩌둥의 중국에는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일반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때가 되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중국에는 탐욕스럽기만 하고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종래의 지배계층을 제거할 사회혁명이 필요했습니다. 인민을 대표하며 인민을 위해 싸워 전쟁터에서 승리를 일궈낸 사람들이 그 자리를 넘겨받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새 정부가 훈련해서 임명한 간부들이 인민을 대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저항한 집단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혁명은 성공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 결과 혁명분자들과 그 가족과 지지자들이 새 지배계급이 되었습니다. 이념이 개재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문화전통 안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당의 동료들이 이 유산에 안주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대약진운동의 실패 후 치열한 당내 투쟁을 거쳐 문화혁명을 밀고 나갔습니다. 문화혁명, 즉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는 문화란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당 원로 간부들에 대한 폭력에서부터 사적과 유물의 무차별적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은 문화가 아니라 권력투쟁이 걸린 것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농민 배경이지만 고전 문헌과 사서에 나타난 중국 유산의 전일주의 성격을 이해할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화혁명”이라 표현한 것은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배계층과 반역자, 반동분자, 인민의 적의 제거에 그치지 않고 혁명의 완전한 성공을 방해할 수 있는 일체의 사상과 언어까지도 척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오쩌둥은 문화의 단일성,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모든 행위를 규정하는 종교에 비교할 만한 가치의 통일성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의 말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인민의 전면적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구호를 너무 극단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비교적 수동적인 사람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Posted by 문천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그 중국다움을 잃지 않기 바라는 지도자들은 문화의 문제가 과제의 핵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문화란 어느 언어에서나 어려운 단어인데 중국어에서 특히 까다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의 의미를 토론해 왔어도 애매한 점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옛사람들이 오래된 유산을 늘 포괄적인 것으로 보아 왔다는 데는 대다수 학자가 의견을 함께하면서 문화를 전일적(全一的)인 개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근대 서양과 마주치면서 다른 관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과학혁명을 계기로 사회현상의 연구에 과학적 연구방법을 적용하게 되어 경제학, 정치학, 지리학, 사회학, 심리학 등 사회과학 부문들이 발전했습니다. 새 세대의 학자들은 사회가 전일적 관점으로 연구하기에 너무 복잡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정교한 분석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의 전일주의 전통이 아직도 얼마나 중국인의 생각을 이끌고 있는지, 그리고 중국인이 미래의 문화를 창출하는 데 어떤 역할을 맡을지, 흥미로운 일입니다. 중국인들은 자기네 유산이 19세기에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20세기 중에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민국으로 바뀌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20년 동안 군벌들 사이,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분열과 내전을 겪으면서 중국은 더욱 약해졌습니다. 여기에 유혹받은 일본이 침략해서 근대적 경제건설을 위한 그때까지의 성과를 모두 파괴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혼란 상태에 빠지고 혁명의 새 세대는 전통문화를 통째로 내버릴 태세가 되었습니다. 문화를 철학, 종교와 문학, 예술에서 경제와 정치구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일적인 것으로 이해하던 중국인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파괴한다면 무엇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A Unitary Chinese Civilisation 중화문명의 전일성

 

중화문명이라 하면 안정된 농업경제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긴 세월에 걸친 지속적 성장의 연속적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질서를 주도하는 것이 유가 사상에 입각한 예법과 윤리의 원리들이고 넓은 범위의 불교와 도가 사상이 여기 보태졌습니다.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가치체계를 대다수 중국인이 받아들이며 자기네가 하나의 전일적 문명에 속한다고 느꼈습니다.

 

이 가치체계는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이래 서양에서 자라난 분석적 전통과 상극이었습니다. 서양문화에서는 새로운 방법론에 따르는 새로운 지식의 분야들이 만들어졌고, 그를 통해 정확한 결과를 얻고 우주의 성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유럽문명에 접한 중국 학자들은 지식에의 그 접근방법이 근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먼 옛날 지중해세계의 고대철학으로부터 발원한 것임을 이해했습니다. 그 후로 다른 모든 곳의 사람들은 대개 전에 하던 대로 가족과 부족의 신앙과 관습을 지켜나갔습니다. 자신을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네 독특한 지역문화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세상을 인식하는 전일주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나라였습니다. 그 세상은 천명을 받은 나라로서 중국인이 사는 곳이었고 그곳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단 하나의 세상이라는 인식에 중국의 특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중국은 이 인식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과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풍성한 문명을 키웠습니다. 그들 중에는 원래는 중국인이 아니었다가 중국 영토 내에 살며 중국인이 되거나 중국 밖에 살며 중국과 오랫동안 접촉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과 싸우거나 중국을 침략한 사람들 중에도 중국에 끌려 중국인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하나라는 인식은 표의문자의 공유로 강화되었습니다. 한자는 구어(口語)가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합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독해력을 가진 모든 사람이 한자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를 뺀) 유럽보다 더 큰 강역의 여러 민족집단이 유일한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이르자 중국 지식인들은 위대한 옛 문명이 파괴되었고 새로운 문명의 건설을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힘든 과업이 분명했습니다. 다른 문화를 그저 베껴오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이해하고 체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기 문명의 쇠퇴와 몰락이라는 서글픈 상황에 마주친 지식인들은 자기네 문화를 재생, 복원, 재발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접촉하게 된 근대적 문화들로부터 전혀 새로운 문화를 도출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접촉 대상은 당연히 중국 전통의 기초를 위협하고 있던 유럽문화였습니다. 그 세대 지식인들은 중국인이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전통의 잔해 중에서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재활용품을 건져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서양문화의 엉성한 모조품이 아니라 중국의 특색인 전일성을 지켜내는 새 문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국가의 생존 자체를 위해 그 전일성의 보존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전과 성장을 보장하고, 나아가 중국문명이 존중받게 해주는 그 위엄을 지켜줄 국가를 독자적 문화 없이 어떻게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고 힘을 키우는 데 필요한 사상과 기술을 비롯해 서양에서 들여올 수 있는 것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벅찬 일이었습니다. 외부의 적과는 물론, 자기들끼리도 싸워야 했습니다. 외부의 적은 해안과 내륙 조계지역의 기업들을 통제하며 중국 경제를 그 자본주의 회사들에게 종속시켰습니다. 군벌과 혁명세력은 내부의 적이 되어 서로 싸웠고, 그중에는 이익을 노리는 외부세력의 자금 지원을 받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Posted by 문천

 

이 책의 최종 교정을 보고 있을 때 참석한 어느 행사에서 한 젊은 역사학자의 질문을 받았다. 역사학의 작업방법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으로 인해 써놓았던 에필로그를 통째로 다시 쓰게 되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역사학자였는가? 역사학과 교수로 35년을 지냈으면 역사학자가 아닐 수 없다. 홍콩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도 역사학과 교수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역사에 관한 강연도 하고 역사학 학위눈문 심사도 했다. 동아시아연구소와 동남아시아연구소 일을 할 때도 싱가포르국립대학 역사학과는 남의 집 같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학자” 행세를 하기가 어색해진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생각과 글쓰기가 중국식 “문인(文人)”의 길로 되돌아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고대그리스의 “histor”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history”의 원형 “historia”는 기록 열람을 통해 과거를 연구해서 실용적 목적이나 도덕적 목적을 위해 해석하는 일이었다.

 

나는 중국 역사서술에 훈련받지 않았으나 정사(正史)의 의미가 비슷한 전통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학인-관료들은 보존된 기록의 진정성과 정확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받았다. 사건의 취사선택을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둔 정책과 나쁜 결과를 가져온 정책을 구분했다.

 

오늘의 역사학자는 그와 달리 서유럽 계몽주의시대의 과학적 학술관에 입각한 존재다. 19세기에 레오폴드 폰 랑케는 공식 문서를 중심으로 모든 종류의 원사료를 중시하면서 비판적 분석을 요구했다. 그의 목적은 과거를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재구성하고 모든 주요 대학에 연구에 근거를 둔 학과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독일의 직업적 역사학자는 자신을 진실의 구도자(求道者)로 생각했다.

 

이제 돌아보면 나는 역사학 공부를 시작한 말라야대학에서 그런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않았다. 중국 혁명가들에 관한 자료나 남중국해의 교역활동에 관한 고문서에 관한 나 자신의 판단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사회과학자의 모든 기준으로부터 벗어났다.

 

런던의 소아스에서도 인문학의 전통에 따르는 그런 개방성을 다시 경험했다. 동남아시아사의 DGE 홀, 중국사의 데니스 트위쳇과 인도사의 AL 바샴이 있는 가운데 과거를 향한 내 길을 찾을 여지가 있다고 늘 느꼈다. 그 느낌은 중세사 연구로 런던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확인되었다. 당-송 시대가 중세는 전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쿠알라룸푸르의 말라야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는 역사학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데 더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노력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건국에 대한, 중국계 주민에 대한, 말라야와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관심이 이끄는 데 따라 일어난 일들과 일어날 일들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를 인간의 온갖 경험과 가치와 생각의 거대한 창고로 보며 그 내용물을 알려진 사실에 비추어 검토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데도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서 실체와 의미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냈다. 그 모색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고대의 학자들, 계몽주의시대 이후의 직업역사가들, 그리고 학식이 뛰어난 현대 학자들이 쓴 여러 종류의 역사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배운 것 덕분에 “역사학자”라는 딱지를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 과거 속의 “진실”을 찾으려 진심으로 애쓰는 이들에 대한 내 존경심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 자신이 현재의 이해와 미래의 전망에 과거를 이용하는 방식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 싱가포르에서 지내는 동안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끝으로 밝힌다. 조그만 섬 위에서든 오래된 대륙 안에서든, 경계선 없이 탐색하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지난 30년간 깨닫게 되었다.

 

 

회고록 <No Borders: Jouneys Across Islands and Continents>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내가 왕 교수에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 뽑아 놓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