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Another academic order / 학문의 새로운 풍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면서 그 나라를 더 잘 알 필요를 느꼈다. 신문 읽고 라디오 듣고 국영 티브이 보는 것으로 부족했다. 그 나라에 대한 내 이해는 1965년 방문 때의 ”행운의 나라“ 이미지에서 별로 늘어난 것이 없었다.

 

제프리 블레이니의 <공간의 지배력 The Tyranny of Space>을 읽으면서 상상의 역사학을 떠올렸다. 계몽주의 이후의 질서체계가 그려져 있는데, 이 나라의 뿌리 깊은 불안감을 생각할 좋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세계관이 제국의 후광에서 벗어나자는 함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제프리 블레이니(Geoffrey Blaney, 1930~ )는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역사가로 널리 인정받는 인물인데도 보수적 입장이라는 공격을 많이 받는다. 1990년대에 시작된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전쟁“에서 블레이니는 ”검은 완장 사관“(진보파)과 ”세 번 만세 사관“(보수파)을 나란히 비판했는데도 보수파로 지탄받는 것은 근년 오스트레일리아 지식계의 분위기가 진보 쪽으로 치우친 때문인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Geoffrey_Blainey#/media/File:Geoffrey_Blainey,_eminent_Australian_historian_--_head_shot.jpg 제프리 블레이니

 

캔버라에서의 처음 몇 주일 동안 보수파와 종교계 우익과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반대파에게 어떤 말을 퍼붓고 또 그들에게 돌려받는지 재미있기 짝이 없었다. 그 입씨름은 영국 언론에서 보던 공개논쟁과 맛이 비슷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가 아직도 영국이 짜준 틀 안에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새 세대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아시아에 너무 가까운 데서 오는 종래의 불안감을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관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치를 판단하는 데는 조심스러워졌다. 그 나라가 냉전에 얼마나 깊이 얽혀들었는지, 인도네시아공산당의 파괴를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얼마나 열심히 지지했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 학생들의 월남전 반대 분위기를 알게 되면서 크게 놀랐다. 백호주의 정책에 대한 부끄러움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그 인종주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학생들을 보며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는 종래의 무미건조를 벗어나 극적인 변화의 시대를 따라가고 있었다. 많은 국민에게 중심지 런던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기네를 시골뜨기로 보는 영국인의 시선을 벗어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가. 그리고 그 열등감이 가장 오래된 이주민의 자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쓰라린 것이었다.

 

이 현상을 처음 들을 때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경험도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라야에서 이슬람식이나 중국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열등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주민 대부분이 영국계인데도 이런 열등감을 흔히 느낀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1950년대 건국 준비 단계에서 말라야 학생들이 끌리던 것과 같은 포용적 민족주의가 자라나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자기네 정체성이 다민족일 수도 있고 심지어 다문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떠올리며 백호주의를 가볍게 내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측면을 생각하면, 일반인의 태도가 막 변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온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곳의 새 세대가 평등의 이념과 인도적 가치를 앞세우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감의 바닥에는 중국 등 많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국제주의의 명색을 내건 소련의 갑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영-미 연합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었다.

 

그때까지의 내 역사 연구를 돌이켜보니 통치와 정치질서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근대 중국의 개혁가와 혁명가들, 그리고 전근대 조공체제와 연결된 남중국해의 교역활동 같은 주제로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10세기 중국의 무력(武力)국가들을 연구한 박사논문은 정치권력과 집권체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그 후에는 명나라와 주변국들 사이의 조공관계로 나아갔고, 명-청사 강의는 두 왕조의 흥망에 초점을 두었다.

 

내 관심이 너무 좁은 범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의 국가사 토론에 계속 참여한 덕분이었다. 동남아시아 모든 곳에서 공유하는 새 국가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토론이었다. 그에 더해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과목을 강의하면서 각 문명권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방법의 차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5년간 그 과목을 듣는 학생들에게 고대 지중해세계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정치질서에 관해 읽고 힌두교-불교세계 및 유교세계와 비교해 볼 것을 권했다. 학생들은 불교 사상이 유가 세계관을 파고든 현상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이며 왜 이슬람 사상은 그런 현상을 일으키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 역사도 살펴볼 것을 권하면서 민족국가 역사서술의 편협성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나 자신 말레이시아 중국인 집단의 역사를 살펴보다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수백 년 동안 펼쳐진 그들의 국경 없는 활동 양상에 끌려 들어갔다. 토착민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식민지배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좋은 방식이었다. 이 집단들의 행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황에 갈수록 큰 영향을 받음을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는 중국사 연구를 넘어 마오쩌둥 중국의 시사에도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학의 용도를 안전 범위 밖으로 늘리고 있었던 셈이다.

 

중국을 둘러싼 캔버라의 연구자들 ANU and sinology

 

난징에서 내가 다닌 대학은 원래 지방대학이었다가 1928년에 새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으면서 국가의 간판 대학이 된 학교였다. 다음에 다닌 학교는 1949년 영국 당국이 말라야 독립을 앞두고 그 건국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세운 대학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국립“대학으로서, 몇 해 전 태평양전쟁 중 국가가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인재 유출이 많은 현실을 국가 지도자들이 걱정하는 데 따라 설립된 학교였다. 프린스턴의 고등학술원(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이나 옥스퍼드의 올소울스 칼리지(All Souls College) 같은 연구 중심 기관을 만들어 유출된 인재를 복귀시킬 필요가 제기되어 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태평양학의 4개 연구원(research school)이 설립되었다. 각 연구원에는 박사과정만을 지도하는 종신직과 계약직 교수들이 초빙되었다.

 

내 첫 방문 때까지는 1930년에 세워져 멜버른 대학 출신으로 채워진 캔버라대학 교수들이 ANU 교수진이 되었고, 4개 연구원은 고등학술원 산하에 편성되어 있었다. ANU의 두 부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학생 구성도 서로 달랐다. 특이한 현상으로 보였지만, 쿠알라룸푸르(KL)로 돌아갈 때까지 몇 해 동안 연구에 전념하고 싶은 내 입장에 편리한 조건이어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 관심은 전근대 문화체계의 해체 현상으로부터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자금 지원이 넉넉한 연구대학에서 지내는 것은 바라 마지않던 호강이었다. 이 기회를 최대한 잘 활용해서 혁명기 중국이 보여주는 극심한 혼란을 설명할 관점과 지식을 갖추고 KL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잘 자리 잡혀 있는 ANU의 어느 학과에도 내가 특별히 공헌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풍성한 문서와 학술지와 도서에 빠져 지낼 뿐, 각자의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동료들을 내가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학생 중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뿐이었다.

 

도착할 때 ANU 총장 잭 크로퍼드와 태평양연구원장 오스카 스페이트가 극동사학과 과장으로서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말해주었다. 나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여러 대학에서 중국사와 일본사를 강의할 박사과정 학생들을 돌봐주는 외에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과에는 전문성이 강한 연구자 몇이 종신직 교수로 있었다. 중국사에 다섯, 일본사에 둘이었다.

 

내 분야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주로 전근대사를 다루었고 런던대학 학위는 “중세사”로 표시된 것이었다. 중국학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반대로, 말라야 국가 건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해외 중국인의 역사에 대한 흥미 때문에 애초 생각보다 현대사에 가까워졌다. ANU에 올 때는 중국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의 기원을 연구해서 마오쩌둥 같은 인물이 중국사의 긴 흐름 속에서 가지는 위치를 설명할 길을 찾을 목적이었다.

 

일본에 관해서는 복잡한 일이 없어 보였다. 시드니 크로커와 앤드루 프레이저는 둘 다 현대사 전공이었다. 크로커는 경제사 연구자였고, 소아스 시절 급우이자 술친구였던 프레이저는 시코쿠 도쿠시마 지방권력의 뿌리를 깊이 들춰보고 있었다. 내 도착 무렵 크로커는 아시아학부 일본학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운 자리는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사 전공자 중 로후이민을 제외한 네 사람은 중국학 전통에 투철한 연구자들이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 초기 단계에서 주요 협력자였던 왕링(王鈴, 1918–1994)은 케임브리지에서 니덤과 함께 일하고 있을 때 만난 일이 있었다. 평범한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문헌 파악은 전설적 수준이었고, 니덤의 대담한 가설들을 뒷받침해 준 그의 문헌고증은 많은 사람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ANU로 공부하러 와서 우리 학과의 첫 박사학위를 받은 노엘 바너드(Noel Barnard)는 상-주(商-周) 시대의 청동기 기술 연구로 알려진 사람이고 청동기 명문(銘文)의 전문가였다.

 

학과의 초기 박사학위 수여자 또 한 사람 이골 데 라케윌츠(Igor de Rachewiltz, 1929–J2016)는 이탈리아 명문가 출신으로 유럽 중국학의 유서 깊은 중심지 나폴리대학에서 “동양학”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몽골어 공부로 시작해서 고전한문을 익힌 그를 1961년 뉴욕의 어느 학회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거란인 정치가 야율초재(耶律楚材) 연구에 탄복했고, 그가 영역한 <몽골비사> 초고를 보고 매료되었다. 그는 두 언어로 작성된 이 자료의 충실하고도 섬세한 번역을 계속해 왔다.

 

네 번째 연구자는 파리에서 중국학에 입문한 도널드 레슬리Donald Daniel Leslie, 1922–2020)였다. 케임브리지에서 처음 만날 때는 중국 초기 과학사상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파리에서 폴 드미에비유(Paul Demiéville, 1894–1979)의 지도 아래 전통적 고전으로 방향을 돌려 <논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했다. 카이펑(開封)에 남아있는 중국 유대인에 관한 책으로 이름을 날렸다. 내가 그곳에 갈 무렵에는 중국의 이슬람교에 관한 연구를 새로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ANU에는 동양학부에 중국학 연구자 몇 명이 이미 있었다. 초대 학부장 한스 빌렌스타인(Hans Henrik August Bielenstein, 1920−2015)은 명성 높은 중국학 연구자 배냐드 칼그렌(Klas Bernhard Johannes Karlgren, 1889–1978)의 제자였다. 중국학과의 초대 주임교수는 칼그렌의 다른 제자 고란 말름크비스트(Nils Göran David Malmqvist. 1924–2019)였다. 내 도착 전에 빌렌스타인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으로 갔고 말름크비스트는 스톡홀름대학의 칼그렌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다. 그 후임자 류춘옌(柳存仁)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 전통에 깊은 소양을 쌓고 도가의 전통에 관한 뛰어난 연구를 이뤄낸 사람이었다.

 

중국학과에는 그밖에 스베틀라나 림스키-코르사코프 다이어(Svetlana Rimsky-Korsakoff Dyer, 1931~ )가 있었다. 청나라 때 카자크스탄으로 옮겨간 둥간(東干)족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나라 때 역사서술을 연구한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Richard Rafe Champion de Crespigny, 1936~ )가 있었다. 뛰어난 중국학 연구자이자 미술사가인 피에르 리크먼스(Pierre Ryckmans, 1935– 2014)는 곧 도착할 참이었다. 리크먼스는 사이먼 리스(Simon Leys)라는 이름으로도 글을 발표했다. 동양문명학과의 오토 판 데어 슈프렝켈(Otto Pierre Nicolas Berkelbach van der Sprenkel, 1906–1978)은 명나라 경제사를 연구했었는데, 이제는 유럽 중국학의 역사적 평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극동사학과 교수들까지 합쳐서 본다면 ANU는 남반구 최고의 중국학 연구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Posted by 문천

Part 2 Distance made the heart fonder 거리가 멀수록 커지는 그리움

 

Chapter 7 Capital with a difference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수도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에 자리 잡자 나는 중국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을 위협하는 소련 수정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격렬한 반응은 어떤 것인가? 그 질문을 따라 중국과 그 외부세계와의 관계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남방 해상세계의 배경을 벗어나 대륙 방면 중국사의 수수께끼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캔버라로 감으로써 거리는 더 멀어졌으나 북쪽을 바라보는 자세는 그대로였다.

 

캔버라는 난징, 런던과 쿠알라룸푸르(KL)에 이어 내가 네 번째 살아보는 국가 수도였는데, 다른 곳들과 아주 달랐다. 열일곱 살 때 난징에 가서는 한 나라의 수도라도 다른 정권으로 넘어갈 때는 위상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는 오래된 도시 런던의 맛을 즐겼고, 이어 독립 말라야의 수도가 된 지 2년도 안 된 KL과 만났다. 말라야대학 학생으로 싱가포르에서 지낸 5년도 수도의 경험으로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싱가포르는 백년 동안 여러 면에서 해협식민지의 실질적 식민지 수도 노릇을 했고, 50년 동안은 영령 말라야의 권력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이후로는 물론 자기 수도였다. 그러니 나도 일종의 수도 전문가로 행세할 만한 사람이다.

 

캔버라의 첫 번째 놀라운 점은 그 나라의 중요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생활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본국“인 영국으로부터 먼 거리를 2중으로 체감하게 한다. 나처럼 새로 오는 사람에게 캔버라의 넉넉한 공간은 광대한 대륙에 적은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에 방문했을 때도 ANU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 밖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아시아와 남태평양 지역의 연구자이기 때문일 것이라 여기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번에 와서는 ANU에 외국 출신 학자들이 정말로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고 정부의 행정과 군사 요원 대부분도 국내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새삼 놀랐다. 마거릿은 만나는 사람 중 캔버라에 부모님 모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까이 없는 것이 자기들만이 아님을 곧 알아챘다. 덕분에 우리는 이방인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참 주민으로서 신참들을 맞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현실에서 동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이 대륙에 여러 대 살아온 사람들과 접촉이 별로 없었다.

 

이 대륙국가에 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지만, 더 잘 알기 위해 애쓸 필요도 크게 느끼지 않았다. 내게는 이 나라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한 다른 나라에 관한 방대한 문서를 점검하는 학문적 과제가 있었고, 그 과제를 하루빨리 완수하기 바라고 있었다. ANU 밖에서 알 필요가 있는 곳은 캔버라 도시와 그 주변부뿐이었다. 그때 캔버라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인구가 적은 만큼 외국 공관과 외교관들의 존재가 뚜렷했다. 모든 대륙에서 온 외교관들이 있었는데, 그중 유럽과 아시아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도착 신고를 하러 말레이시아 대표부에 들렀을 때 보니 말라야대학의 제자 아짓 싱이 정치 부문을 맡고 있었다. 그가 새 대표 도널드 (푸아드) 스티븐스에게 안내해 주었는데, 사바 주 수상을 지낸 사람이었다. <건국방략>을 편집할 때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여의치 않은 일이 있었다. 그 책이 나온 뒤에 KL에서 만난 일이 있다. 리콴유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구호가 떠올라 있을 때였는데, 스티븐스는 툰쿠 압둘 라만 수상과의 회담에서 사바 주에 유리한 결과를 얻을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캔버라에 와 있던 사실에는 싱가포르 이탈 후 그가 원하던 것을 이뤄내지 못한 결과로 볼 측면이 있었다. 연방 정치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인에서 외교관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다. 내 책을 기억한다며, 그 직후 싱가포르의 이탈 때문에 책의 가치가 퇴색한 사실을 아쉬워했다. 자기 주 사바의 장래에 대해 아직도 갖고 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때 나는 열심히 들으면서도, 그가 정치계를 떠난 사정은 언급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했다.

 

ANU 사람들 모두 연방 수도가 국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위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에게는 그 거리가 특이한 헌정질서의 척도로 느껴졌다. 공무원, 학자, 외교관들이 넘쳐났다. ANU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강연과 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하는 외교관이 많았고, 나도 그들과 근북(近北) 지역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다. 많은 사람이 민감하게 여기는 하나의 주제가 있었다: 어느 쪽 중국을 중국으로 인정할 것인가?

 

내 선임자 패트릭 피처럴드 교수는 풍부한 중국 경험과 중화인민공화국에 관한 최근의 저술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중화인민공화국 승인을 지지하고 공산당이 지원하는 호-중(濠-中) 우의협회 회원이기 때문에 꼭대기의 사람들이 그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여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직 장제스의 중화민국(타이완)과 국교를 유지하고 있었고, 타이완에서는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고위 외교관을 이곳에 보내고 있었다. 타이완 대사관에서는 우리 동료 중에 베이징 편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떤 편인지 궁금해할 것이라고 내가 도착할 때 주의를 준 동료들이 있었다.

 

나는 말라야(후에는 말레이시아) 국민이지만, 속인주의(jus sanguinis) 원칙을 따르는 중국의 국적법으로는 무시되는 사실이었다. 내 아버지가 중국인이면 나도 중국인이고, 타이완 정부는 나 같은 사람이 국적을 포기하는 길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영국 입장을 물려받아 베이징과 타이완 양쪽과 비공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중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상관하지 않는 실리적인 상인들은 어떤 때는 베이징과 어울리다가 어떤 때는 타이완과 어울리는 식의 행태가 가능했다.

 

1968년까지 타이완 대사가 두 번 바뀌었다. 전임자였던 제임스 셴은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장 총통과 가까운 전직 언론인으로 내가 가기 조금 전에 캔버라를 떠나 외교부 부부장에 취임했다. 후임자인 샘슨 C 셴은 고참 외교관으로, 스탈린 시대의 야만성을 폭로한 빅토르 크라프쳉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의 번역자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1964년 프랑스의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후 그곳 신생국들이 배를 갈아타는 모습을 본 사람이었다. 베이징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늘어나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지도자들의 태도가 엇갈려 있는 상황을 그는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 관해 대사관에서는 내가 말레이시아 사람으로서 타이완 쪽 초청을 받아들인 일이 없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 봉쇄를 잘못된 일로 여기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ANU 관계 업무에서 나는 신중하고 엄정한 자세를 지켰다. 셴 대사와는 끝까지, 1973년에 대사관을 닫고 부지와 건물을 처분할 때까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25년 전 내가 난징에서 겪은 상황이 떠올라 애틋함을 느꼈다.

 

 

적응의 여러 단계 Levels of adaptation

 

도착 후 몇 달 동안 마오쩌둥 중국의 건국 과정과 괴이한 문화혁명에 관한 도서와 문서를 멘지스도서관에서 열심히 찾아보았다. 중국학 동료들이 좋아할 일 같지는 않았으나 각자의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 한 불평은 없었다. 근대사 연구자인 로후이민(駱惠敏, 1925-2006) 한 사람만이 근대사 분야의 교수 초빙과 학생 모집을 도와주었다.

 

캔버라에서 3년 지내면 중화인민공화국에 관해 충분히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KL을 떠나기 전에 구할 수 있는 대로 언론 보도와 잡지와 책을 훑어보았고 지난 십 년간 만난 시사를 다루는 학자와 활동가들의 업적을 되짚어보았다. 도착 후에는 ANU와 캔버라 국립도서관의 소장 문서를 파악하고 멜버른과 시드니의 도서관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다녔다.

 

마거릿은 1965년의 방문 기억이 아직 생생해서 쉽게 자리 잡았다. 새로 친구들을 사귀고, 따뜻한 환영을 베푼 내 동료들을 부부동반으로 집에 초대했다. 그곳 생활의 속도와 방식을 쉽게 받아들였다. 20년 넘게 싱가포르와 KL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정규직을 갖고 있었고 집에서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동안은 자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양보해주어서 고마웠다. 열한 살의 밍, 아홉 살의 메이와 일곱 살의 란이 모두 제 앞을 가리고 나아가 집안일도 도와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내가 내 할 일에 시간을 마음껏 쓰기 바라는 마거릿의 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는 다른 중국계 학생이 없었다. 영어를 제대로 하고 학교공부에 어려움이 없도록 마거릿이 살펴주었다. 아이들도 금세 자리 잡았다. 그러나 처음 몇 주일 동안은 그곳 아이들의 노는 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 좀 있었다. 밍의 학교 친구들이 밍을 떠밀어도 밍은 되떠미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거릿은 캔버라가 KL과 어떻게 다른 곳인지 설명해주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떠미는 일이 종족 갈등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밍은 유도를 배우고 친구들을 되떠밀면서 잘 어울려 놀게 되었다.

 

딸애들은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나무 위에서 사는지 친구들이 묻는다고 했다. 우리가 멋진 새집에서 살고 하녀들도 있다고 대답하면 물은 아이들이 놀랐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았고, 아이들이 새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데 마음을 놓았다.

 

말레이시아를 떠나기 직전에 구입한 차를 가져와 그것을 몰고 캔버라 교외와 이웃 도시 퀸베이언, 관목지대와 진더바인 너머 구릉과 계곡을 돌아다녔다. 뉴사우스웨일스 해안의 별장으로 초대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북쪽으로 아보커 해변까지 가보기도 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우리가 아주 긴 휴가를 왔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Posted by 문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부강한 나라들을 따라잡으려는 야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강의에서는 근대화의 의미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서양의 계몽주의에서 나온 근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뒤덮은 서양 제국들로 확장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좋든 싫든 새로운 개념의 정치와 금융과 법률 안에 살아오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근대화“를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협식민지에서 서양으로 공부하러 간 사람들은 자기네가 행운아라고 배웠다. 그들은 진보와 발전의 이념을 가지고 인생의 유리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일본인들이 혁명가로 여기던 쑨원의 반청(反淸)운동에 관해 배우면서 중국의 근대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혁명“은 중국의 전통적 ”천명“ 개념을 근대적으로 응용한 말이다. 혁명가로서 쑨원은 왕조국가를 중화민국으로 바꾸려고 한 사람이다. 학생들이 나선 5-4운동은 한 발짝 더 나갔고, 뒤이어 공산당이 건립되고 쑨원의 ”3민주의“가 나왔다. 나는 1947-48년 난징에서 대학 신입생으로 3민주의를 배웠으나 그것을 가르칠 일은 없었다.

 

말라야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나는 중국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다. 19세기 해외 중국인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쑨원의 혁명 제창에 호응한 이유를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 알게 된 것은 페낭, 싱가포르, 바타비아, 방콕 같은 곳의 중국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근대화되어 있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중국 개항장의 조계구역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남중국해를 방문하는 청나라 관료들에게 근대적 통상과 행정에 대한 이해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쑨원 같은 반도(叛徒)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서양 기술의 습득과 근대적 학교의 설립 같은 일에서는 쑨원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아시아의 변화를 이끈 주체들에게도 관심이 끌렸다. 일본은 제일 먼저 서양을 바라보며 칙령을 통해 근대화를 수행한 나라였다. 인도의 엘리트계층은 영국의 근대성을 받아들였다. 오스만제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몇 개 아랍계와 투르크계 국가로 쪼개졌다. 오직 중국만이 근대화를 향해 혁명의 길을 걸었다. 한 번만이 아니었다. 1912년의 혁명도 힘들었는데, 37년 후인 1949년에 다시 겪었다. 그래서 의문이 떠올랐다. 첫 번째 혁명의 정치적 자유주의 ”근대성“이 중국의 연속성을 위협한 데 비해 두 번째 혁명의 ”인민 중심주의“가 중국인이 받아들이기에 쉬웠던 것은 아닐까?

 

현재와 과거의 연결점 사이에는 뜻밖의 것도 있었다. 쑨원의 싱가포르 방문을 살펴보다가 국민당 중국으로, 정치적 혁명에서 문화적 혁명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양 중국인을 살펴보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1945년 이후 유엔 체제로 모든 나라가 국가 건설에 나서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말라야의 국가사라는 과제 앞에서 전근대 중국사 연구라는 내 작업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과거의 복잡성으로는 현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래에 나타날 패턴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개별적 관계의 범위라는 것이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중국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천명을 바꾸는 혁명의 개념과 연결했다. 여러 국제학회에 다니면서 알고 싶은 마음이 깊어진 것은 왜 한 차례 혁명으로 부족했을까 하는 문제였다. 중국 해안 지역의 산업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 마오쩌둥의 마지막 꿈에서 문화란 어떤 것이었나? 몇 년 어디 가서 그런 질문들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거릿에게도 그런 생각을 이야기했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는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말라야를 우리 집으로 삼았고 아이들은 다니는 학교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집도 지어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왜 오스트레일리아로? Why Australia

 

1967년, 난데없이 초빙이 들어왔다. 연구 환경이 좋은 대학에 와서 전근대 연구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현대중국 연구팀을 이끌어달라는 두 번째 초청이 왔다. 그리고 또 들어온 세 번째 초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걸친 내 관심에 맞출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조건이었다. 셋 다 현대중국 관계 최신 자료를 잘 갖춘 기관들이었다.

 

몇 주일 동안 가족들과 의논한 후 마거릿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의 극동사 교수직 수락에 찬성했다. 캔버라에서 3년쯤 지내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황에 대한 내 지식의 공백을 채울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장기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길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나는 태어난 자바에서든 자라난 말라야에서든 북쪽만 바라보며 살았다. 열여덟 살에 난징에서 말라야로 돌아올 때까지 그랬다. 그 후에도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었다. 일체의 중국 출판물에 대한 규제 때문에 직접 연구를 못하는 상황에서도 관심은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중국의 유산을 파괴하러 나서는 참에 진행 중인 상황을 모르는 채로 있던 나로서는 몇 해 ANU에 가 지내면서 연구를 따라잡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었다. 그런데 북쪽을 바라보기 위해 더 남쪽의 다른 대륙으로 간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마거릿도 나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부터 말라야대학 쿠알라룸푸르(KL) 캠퍼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새로 초빙하는 교수진 중에도 있었고, 연방 장학금으로 유학 오는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의 새 연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논문집을 편집하고 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고등판무관 톰 크리칠리(Thomas Critchley, 1916–2009)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연방의 건설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우리 정치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책 작업을 하면서 사라왁에 갔을 때 앨러스테어 모리슨을 만난 일이 있었다. 조지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 1862–1920),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중국 역사에 최초의 흔적을 남긴 인물의 아들이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베이징 상황을 취재하러 런던타임스에서 파견한 조지 모리슨은 후에 공화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었다. 앨러스테어는 후에 캔버라에 함께 있으면서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1962년 사라왁에서는 그를 통해 헤다를 만났다. 헤다가 찍은 1930년대 중국의 사진들은 그 시기를 보여주는 최고의 시각자료였다. [Hedwig Marie "Hedda" Morrison (née Hammer; 1908–1991)은 1933-1946년 기간 중국에서 지내며(독일인이라서 일본 점령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중요한 작품을 많이 남긴 사진작가. 1946년 앨러스테어와 결혼한 후 20년간 사라왁에 살면서도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중국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커넥션이 그런 식으로 내게는 잘 통했다.

 

크리칠리의 쿠알라룸푸르 주재 대리인 빌 모리슨도 알고보니 조지 모리슨의 먼 친척이었다. 1965년 내가 첫 아시아 방문교수의 하나로 ANU에 갈 때 빌이 캔버라의 외무 관계 동료들을 소개해준 덕분에 캔버라의 관계(官界)로 길이 잘 열렸다. 빌은 외무직에 사표를 내고 다음 총선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다. 노동당 새 당수 고우 휘틀럼의 KL 방문 때 만나도록 빌이 불러주어서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중앙정치 가까이 들어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방문교수로 가기 전에 그 나라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는데, 그중 세 권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매닝 클라크의 <오스트레일리아 역사> 첫 권, 러셀 워드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 그리고 도널드 혼의 <운 좋은 나라>였다. 클라크의 책으로 그 나라의 기원에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워드의 책은 초기 이주민들이 ”따라지(down under)“ 인생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의 모습을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한 줌의 운 좋은 ”하류“ 인간들이었다고 하는 혼의 주장은 센세이셔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대영제국의 압축시간(time warp)을 벗어나지 못한 심심한 것이라는 인상을 이 책들에서 받았다.

 

 

미리 맛본 오스트레일리아 Preview of attractions

 

방문교수 기회 덕분에 1965년에 두 달 동안 마거릿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냈다. 그 체류 동안 그 나라의 3개 주, 뉴사우스웨일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비토리아를 다녔다. 애들레이드, 멜버른과 시드니를 거쳐 캔버라로 돌아오는 2천 마일을 운전했는데 그 큰 나라의 작은 모퉁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그 나라의 역사에 관해 아는 것도 피상적인 것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방문 기간을 짐 데이비슨의 태평양사학과에서 지냈는데, 말라야대학의 은사 존 배스틴 교수가 초대 동남아시아사 주임을 지낸 곳이다. 이제 그곳에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 몇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말레이시아 출신인 내게는 그 학과가 합당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이미 매키(James Austin Copland Mackie, 1924–2011), 존 레그(John Legge) 같은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의 초대를 받았다. 시드니에서 그곳 동양학과의 버티 데이비스(Bertie Davis)를 방문할 때 그와 그 동료들이 중국학을 표방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중국학 궤도 밖에 있는 말레이시아 역사학자로 맞이했다. 나는 데이비스를 만나 기뻤으나 내 일차적 의무는 ANU가 동남아시아사 연구 개발에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인지 데이비슨에게 보고하는 데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기쁜 마음으로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여행 중 오스트레일리아 주재 타이완 대사가 첸즈마이(陳之邁, 1908-1978)라는 사실을 알고 ANU의 동료 왕링에게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광둥성의 명문가 출신인 첸즈마이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새 중화민족 건설에 일생을 바친 첫 세대 사회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공유하는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대사 로베르트 반 굴릭이었다.

 

나는 첸즈마이에게 반 굴릭이 KL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부임하러 도착할 때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접하러 나온 관리들을 그냥 지나치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조그만 중국인 그룹에게 달려갔다는 것이다. 중국 유금(柳琴)협회 회장으로서 그를 환영하는 그룹이었다. 반 굴릭은 그 환영이 다른 어디서 받은 것보다 더 흐뭇한 환영이었다고 말했었다.

 

반 굴릭이 말라야대학에 와서 강연할 때 중국 고금의 음악가와 화가들에 관한 일화들로 우리 학생들을 매료시킨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기 집의 ”스튜디오“에 나를 초대한 일도 있다. 전통적 학인의 서재를 본뜬 것이었다. 적인걸(Judge Dee) 소설을 쓰고 붓글씨를 쓴 곳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중국인 아내의 조부모님 초상이었는데, 그 앞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절을 시킨다고 했다. [Robert Hans van Gulik(1910-1967)은 네덜란드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였는데, 예술 분야의 특이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 업적 중에는 당나라 관리 적인걸(狄仁傑)을 소재로 한 18세기 소설 <적공안(狄公案)>의 번역도 있고 그 방식으로 자기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서예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van_Gulik#/media/File:%E9%AB%98%E7%BE%85%E4%BD%A9%E5%92%8C%E6%B0%B4%E4%B8%96%E8%8A%B3.jpg 반 굴릭의 결혼 사진(1943년 충칭에서).

 

첸 대사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중국 문화사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몇 해 전 ANU에서 ”중국 산수화의 황금시대“를 주제로 조지 모리슨 기념강연을 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 주 필리핀 대사로 있으면서 지역 상황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내 동료였던 마이클 설리번에 관해 묻는 것을 보면 관찰력이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설리번은 말라야대학에 미술사 강의를 도입했고, 대학의 수장품 확장에 공헌했다. 첸 대사는 중국 산수화의 초기 역사에 관한 설리번의 책을 아주 잘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학식을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보여주면서 국제관계의 문화적 측면에 내 주의력을 키워주었다. 나중에 캔버라에서 지낼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교활동에 나타날 그런 측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갈 때는 그 나라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식민활동의 산물로서 광대한 해양세계를 포괄하는 제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일본이 서양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려 할 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일본의 정복을 막아줄 나라가 미국뿐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영국과 유럽의 문화적 유대를 지킨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리가 갔을 때 아시아-태평양 세계에 편안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늘 영국 편에서 싸우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순응할 태세인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제 중견세력으로 일어설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말레이시아 둘 다 영-미 질서체제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영연방과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태평양전쟁 때부터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는 관계였다. 캔버라 체류의 마지막 날인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분리 뉴스를 들으며 느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레이시아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도 대경실색했다. 두 나라 관계가 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과연 동남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나라인가 여부에 전보다 조심스러운 입장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관한 내 지식은 어설펐다. 제임스 쿡의 이야기나 원주민 부족과 영국 유배죄수 사이의 관계는 대영제국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백호(白濠)주의가 입에 많이 올랐으나 그것은 정식 폐기의 단계에 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영령 말라야에서 싸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는 5개국 방위협정을 통해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하고 있다.

[5개국 방위협정(Five Power Defence Arrangements)은 1971년 영연방 소속의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영국 5개국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 대한 외부 방어 협력 체제를 위해 설립한 다자 안보 협정.]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학자 및 관료들과 많이 어울리는 말레이시아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방문교수로 다녀온 3년 후 ANU의 태평양학연구원 존 크로퍼드(John Crawford) 원장으로부터 패트릭 피처럴드의 뒤를 이어 극동사 주임을 맡아달라는 초빙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로퍼드는 내가 동남아시아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대 중국에 관한 연구를 원했고, 학과에도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ANU에 도착했을 때는 크로퍼드가 총장이 되어 있었고, 그 후임자 오스카 스페이트(Oscar Spate)가 연구원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다. 스페이트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리의 권위 있는 연구로 잘 알려진 사람인데 버마에서도 일한 적이 있고, DGE 홀의 동남아시아사 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났을 때는 스페인의 호수로서 태평양의 역사를 여러 권 책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와 남태평양 사이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내게도 동남아시아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열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북(近北) 지역이며 두 개 대양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아시아-태평양의 큰 틀 안에서 보는 시각의 좋은 출발점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