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번 여행의 중심 주제는 단연 장강(長江, 창장)이었다. 예전에는 양자강(揚子江, 양즈장)이란 이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장강 하류 지역에서만 부르던 이름이라고 한다. 선교사 등 서양인들이 하류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장강’을 ‘양자강’으로 근년까지 우리 사회에서 인식해 온 사실이 두 나라 사이의 오랜 단절을 말해준다. (출발 직전 에든버러대학의 브레이 교수에게 보낸 메일에서 ‘Sanxia’ 방면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는데 돌아와서 받은 메일에 ‘Yangzi’ 잘 보고 왔냐는 인사말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Yangzi’가 통용되는 듯.)


40여 시간을 배위에서 지낸 200여 킬로미터의 물길은 장강의 작은 일부, 중류와 상류 사이의 산샤(三峽) 골짜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골짜기는 중국의 역사를 통해 매우 큰 문화적-전략적 의미를 가진 곳이었고 지금도 중국 최대의 전략자산 산샤 댐을 품고 있는 곳이다. 그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중국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어렸을 때 <삼국지>를 보며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천하 3분지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방과 남방이 맞서는 가운데 내륙의 제3세력이 끼어든다? 바다에 가까운 곳이라야 평지도 많고 인구와 산업이 집중된다는 것이 내가 확보하고 있던 상식이었다. 수천 리 상류의 파촉(巴蜀)이란 곳은 험악한 지형에 의지해 방어에나 유리한 척박한 골짜기뿐일 텐데 ‘천하 3분’이라니?


중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의문은 차츰 풀렸다. 깊은 내륙에 있으면서도 강우량이 많고 넓은 평야를 가진 스촨(四川)분지(盆地)가 농업문명 초기 발전의 중요 지역이었음을 신석기시대 이 지역의 고촉(古蜀)문화에서 알아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촉문화권은 장강 하류 유역의 양저(良渚)문화권과 함께 황허(黃河) 유역에서 출범한 중화문명권에 통합되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패권의 물적 기반이 기원전 316년 촉(蜀)나라와 파(巴)나라 등 스촨 지역을 장악한 데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사기(史記)> “화식(貨殖)열전”에 스촨 지역의 경제활동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진한(秦漢)제국의 정치체제는 앞 시대의 황하문화권에 기초를 둔 것이었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철기 보급 과정에서 장강 하류의 양저문화권과 상류의 고촉문화권이 합류, 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변방이면서도 제국의 중심부에 필적하는 인구와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닐지. 그러다가 한제국의 쇠락을 맞아 오(吳)와 촉한(蜀漢)의 근거가 된 것 아닐지.


그렇다면 제갈공명의 ‘3분지계’란 스촨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조(曹操)가 장악한 북중국, 손권(孫權)이 자리 잡은 남중국에 필적하는 자원을 가진 스촨 분지는 ‘천하 3분’의 한 축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방어에 유리하면서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소극적 전략이라 하겠다. 


1937년 말 국민당정부의 충칭(重慶) 천도도 제갈공명과 같은 방식으로 스촨 분지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한 것이었다. 한 국가의 규모를 유지할 만한 인적-물적 자원을 품고 있으면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것이 그 전략적 가치다. 방어에 유리한 조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산샤 협곡이다.


스촨 분지에서 외부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길과 서북쪽으로 한중(漢中) 고원지대를 거쳐 산시(陝西) 방면으로 나가는 길이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 아쉬운 점이 시안(西安)에서 스촨으로 들어가는 길을 밤중에 지나느라 지형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기세를 피해 “잔도를 불사르고” 한중에 칩거했다는 대목을 보면 역시 험준한 지형인 모양인데... 한편 삼국지에서 촉한과 조위(曹魏)가 한중에서 일진일퇴를 오랫동안 거듭하는 장면을 보면 험준한 지형보다는 대규모 보급이 어려운 지리적 조건이 더 중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대적 교통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단계에서 장강은 스촨 분지의 교통로로서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산샤... 삼협 이야기는 많은 글에서 읽었다. 사진도 꽤 봤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 보니...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강릉 거리에 맞먹는 길이의 협곡 거의 전부가 7-80도 넘는 수백 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었다. 김준엽과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출해 충칭으로 갈 때 이 일대를 강 따라 이동하지 못하고 절벽 뒤의 산길로 지나갔다는데,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이었을지 이제야 제대로 상상이 되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와 여행 중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바이두(百度)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놀란 대목 하나. 산샤 댐 저수지 면적이 1084평방킬로미터인데 그중 632평방킬로미터만이 수몰 면적이고 나머지는 원래의 하천부지였다는 것이다. 큰 댐으로 만들어지는 저수지에는 평지와 구릉이 많이 잠기기 마련인데 산샤 댐 저수지는 가파른 협곡을 채웠을 뿐, 평지가 물에 잠긴 곳이 아주 적은 것이다. 정밀한 지도를 봐도 충칭에서 이창(宜昌) 사이에 원래의 강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조금 굵어졌을 뿐이다. 


산샤 댐의 이력서를 바이두에서 줄여 옮겨놓는다.

1992년 4월 제7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 《关于兴建长江三峡工程的决议》 통과.
1994년 12월 착공.
1997년 11월 강물을 가로막는 데 성공.
2003년 6월 담수 시작, 135미터 높이까지 물이 찬 후 5단 도크를 통한 선박 통항과 발전 시작.
2006년 5월 댐 완공. 9월 제2차 담수로 156미터까지 물을 채워 방홍(防洪) 기능까지 완성.
2008년 9월 175미터 정상수위를 향한 첫 담수 시도, 172.8미터에 이름.
2008년 10월까지 댐 좌우에 70만 킬로와트 발전기 26대 설치. (2012년까지 6대 증설)
2009년 17년의 공기 끝에 완전 준공.

이 대협곡의 지형을 수력발전에 이용할 가능성은 일찍부터 탐색되기 시작했다. 1918년 순원(孫文)의 <건국방략(建國方略)>이 그 출발점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1930년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항일전쟁에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미국과 합작으로 추진할 길을 찾게 되었다. 1944년 미국 기술자 소비지(J L Sovage)가 현지를 답사하고 제출한 보고서에 지금의 산샤 댐과 비슷한 규모의 모델이 제시되었다. 지금의 댐에서 30여 킬로미터 하류 지점에 225 미터 높이의 댐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계획의 실행이 추진되어 수십 명 중국 기술자가 미국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퇴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공산정권도 장강 수리(水利) 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제대로 착수할 형편이 되지 못했는데, 1970년 문화대혁명의 열기 속에서 거저우 댐(葛洲坝) 사업이 시작되었다. 소비지가 생각한 위치보다 몇 킬로미터 하류에 높이 40여 미터의 낮은 댐을 세우는 공사가 1971년 시작되어 곡절 끝에 1988년 완공되었다. 그 과정에 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는지 <바이두 백과>에 세밀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계획을 급박하게 잡고 설계와 준비와 시공을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공사를 시작한 후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났”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방면의 경험이 축적되어 산샤 댐 공사를 위한 전면적인 실전 준비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거저우 댐 공사의 전반부가 1981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진짜 댐’ 건설 논의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1984년부터 150미터 높이의 댐 건설 논의가 구체화되었고, 180미터까지 높여 달라는 충칭시 정부의 제안이 이어 나왔다. 그렇게 해야 1만 톤급 선박이 충칭까지 항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8년간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1992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결정이 나왔다. 4월 3일 투표에서 출석 2633인 중 찬성 1767인, 반대 177인, 기권 664인에 25인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바이두 백과>에 기재된 것은 이 사업이 과학적일 뿐 아니라 민주적인 원리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는 중국 당국의 자랑을 비쳐 보이는 것이다.


댐 구경에서 제일 흥미로운 것이 선박 통행로였다. 5단계로 된 갑문통행로(船闸)는 한 칸이 길이 280미터, 폭 34미터, 최소 깊이 5미터로 1만 톤급 선박까지 지나가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따로 되어 있다. 한 차례 통과에 4~5시간 걸린다고 한다. 따로 선박엘리베이터(升船机)가 있다는데, 길이 120미터, 폭 18미터, 물 깊이 3.5미터로 3천 톤급 유람선을 담은 1만여 톤 무게의 케이지를 한 시간 내에 올려 보내고 내려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바이두를 뒤져보다가 놀란 일 또 하나는 댐 건설을 통한 하운(河運) 수송량의 증가다. 거저우 댐 완성 후 수송량이 연간 4백만 톤에서(1982) 1천만 톤으로(1994) 늘어났다 하고 산샤 댐 완성으로 5천만 톤까지 늘어났다 한다. 장강은 유사 이래 스촨 지역의 최대 수송로였다. 그러나 댐 건설 이전 산샤 협곡의 모습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조그만 배가 물이 얕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인부들이 강 양쪽에서 밧줄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등에 짐을 실은 말이나 나귀를 험한 길로 몰고 다니는 것보다는 효과적인 수송로였을지 몰라도, 1만 톤급 선박이 충칭까지 편안하게 오르내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철도와 도로가 개설될 만큼 개설된 지금까지도 화물 수송의 통로로 큰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큰 화물선들이 줄을 이어 산샤 댐 갑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산샤 댐의 발전용량은 2250만 킬로와트다. 70만 킬로와트 발전기 32대와 5만 킬로와트 발전기 두 대. 70만 킬로와트라면 수풍댐 발전용량이다. 2250만 킬로와트는 중국 전체 발전용량의 2%, 전국 수력발전용량의 10% 규모다. 그리고 저수량이 393억 톤이라는데 그중 222억 톤이 홍수 방지에 활용될 수 있는 용량으로 초당 2만7천 톤 내지 3만3천 톤의 조절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2012년 7월 12일 순간 유입량이 초당 7만1200 톤으로 최고기록을 세울 때도 댐의 홍수 방지 능력이 충분히 확인되었다고 한다.


문명사를 공부하면서 근대인의 자연에 대한 오만한 태도와 자연을 ‘정복’하려는 무모한 자세에 비판의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에 눈감고 자연을 신외지물(身外之物)로서 소유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이 현대문명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게 되었다. 산샤 대협곡의 웅장한 자연을 물속에 가라앉힌 이 댐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연 ‘정복’의 한 사례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은 내가 ‘친중파’이기 때문일까? 그런 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근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보지만 극단적 러다이트(Ruddite)는 아니라는 사실부터 분명히 하고 싶다. 자연의 착취가 심화(深化)되는 문명의 발전 방향을 나는 수긍한다. 다만 그 방향에 아무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자연 파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變態)를 걱정하는 것이다. 산샤 댐을 만들어야 하게 된 사정이 슬프다. 그러나 댐을 만들면서도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는 고마움과 연대감을 느낀다.


굴원(屈原, -340 ~ -278)도 이런 마음으로 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댐 인근에 있던 그의 사당이 물에 잠기게 되어 옮긴 곳이 댐을 1 킬로미터 남짓 거리에서 바라보는 언덕 위였다. 사당 앞에 세워진 거대한 입상이 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문장(文章)의 시조이자 지조(志操)의 상징으로, 중국문명의 큰 스승으로 모셔져 온 굴원의 시선이 이 거대한 사업으로 하여금 문명 파괴의 길로 흘러가지 않도록 지켜주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2019.06.08 01:21

Fact or Truth?

 

It was a rainy day, just ahead of the holidays. My eyes landed on the elderly jailbird looking out the window. A gloomy sight, it was. I thought to myself, if this man were to have another chance with his life, wouldn’t he wish to live rather the kind of life in the story he cooks up for new inmates, than the one he has actually lived? I thought that the dramatized version of his life reflected both his humble hope and some sense of regret. In this sense the invented life story can be seen as a 'truthful' one. This is how I came to realize how different it is, whether you look at a person on the basis of facts, or on the basis of the truth.

“명절이 가까운 어느 날, 그 노인이 철창 가에서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을 제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참 처량했어요. 만약 저분이 다시 자기 인생을 시작한다면 실제로 살았던 사실 그대로의 인생을 또 반복하기보다는 적어도 각색된, 신입자들을 앉혀놓고 들려줬던 이야기 정도로는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각색된 그의 인생이야기는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이야기이고 동시에 일정한 반성이 담긴 이야기라고 느껴졌어요. 그런 점에서 각색된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건가. 사실을 중심으로 볼 건가, 진실을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할 건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되었어요.”

 

- 영남대 특강, “나의 대학시절” 중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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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여 년 전 하이텔 어느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이다가 화가 난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조직 활동이라고는 아무것도 못할 사람이요!” 악담으로 한 말씀이 내게는 덕담으로 들렸기 때문에 기억에 깊이 남은 말인데 이번 여행을 다녀오며 절실하게 떠올랐다. 나는 정말 조직 활동 싫다!


여러 사람과 긴 시간 함께 지내는 일이 29년 전 대학을 떠난 이후 좀체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바둑친구들과 밤새워 논 일 밖에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두어 차례 학회 참가와 중앙일보 몇 사람과 함께 한 한 차례 유럽 출장 정도?


40여 명 여행단에 끼어 11일간 돌아다닌 이번 여행 중 관광 대상인 명승고적보다 여행단 자체가 내게는 더 중요한 구경거리였다. 신영복 선생이 “서삼독(書三讀)”에서 문면만 읽을 것이 아니라 저자를 읽고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이치가 저절로 작동되었다. 문면에 해당되는 명승고적보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나 자신을 포함해서) 자세와 방식이 더 흥미로웠으니까. 여러 날에 걸친 조직 활동 자체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여행단 중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둘러싸고 몇 개의 보호막이 겹쳐져 있어서 좋은 시점(視點, vantage point)을 지키며 편안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제1보호막은 아내. 제2보호막은 이번 참가를 권해준 이용순 씨 부부. 그리고 제3보호막은 이용순 씨 부부와 가까운 신 선생 부부와 김 선생 부부. 6인이 하나의 소(小)그룹으로 여행을 몇 차례 해 왔는데 이번에 우리를 받아준 것이다. 중국의 관광 사업은 한국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개인으로 참가하기보다 소그룹으로 참가해서 수시로 필요한 조치를 진행 측에 요구하는 ‘교섭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 교섭력의 첫 번째 효과로 보인 것이 침대차를 롼워(軟臥)로 바꾼 것이다. 원래 여행단의 표준은 3층 침대로 된 잉워(硬臥)인데 우리 일행 8인은 백여 원씩 더 내고 2층 침대의 롼워로 바꿨다. 문까지 달린(잉워 칸에는 문이 없다.) 두 칸을 우리끼리 쓸 수 있어서 쉬고 옷 갈아입는 데뿐 아니라 먹고 노는 데까지 훨씬 편안했다. 화장실과 세면대 사용에도 별 불편이 없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지린(吉林) 발 충칭(重慶) 행이었다. 12:05분 창춘(長春)을 떠난 열차가 선양(瀋陽)을 지나며 해가 지고 밤중에 탕산(唐山)과 톈진(天津)을 지났다. 열차의 진동이 잠에 어울려, 큰 역에서 오래 머물면 눈이 떠졌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잠속으로 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날이 밝고 보니 허베이(河北) 평원을 달리다가 스자좡(石家庄)을 지나고 있었다. 타이위안(太原)과 옌안(延安)을 지나 시안(西安)에 이르기까지 ‘황토(黃土)지대’의 풍경을 눈에 익힐 수 있었다. 시안에 이르기 전에 해가 넘어갔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스촨(四川)성의 다저우(達州)를 지나고 있었다. 시안 지역에서 스촨으로 넘어오는 길의 지형도 궁금했는데 밤중에 지나와 버렸다. 43시간 열차여행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황토지대였다.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궁금하던 풍경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이런 장거리 열차여행은 흔치 않은 일 같다. 아내도 작년에 언니들과 유람하러 창춘에서 하이난다오의 산야(三亞)까지 51시간 달려보기 전까지 제일 멀리 가본 것이 한 차례 후난(湖南)성 출장이었다고 한다. 이용순 씨의 열차 경험은 군 복무 시절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군복을 입고 기차에 타면 민간인에게 자리를 꼭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 고단할 때 군복을 벗어 감추고 자리에 앉은 일도 있다고 한다.


중국인의 열차 여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다. 통계를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처음 왔던 17년 전에 비해도 여객 수가 다섯 배는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때 연변 밖으로 나가는 여객열차가 하루 다섯 편이 안 되었다. 침대표를 구하려면 연줄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속철[高鐵]만 하루에 20여 회 운행하고 일반열차도 더 늘어난 것 같다. 연길공항의 항공편도 국내선이나 국제선이나 17년 사이에 모두 다섯 배는 늘어난 것 같다.
우리 여행단의 연령은 60대가 주축이다. 버스 자리를 고령자부터 앞쪽에 배치한다 해서 멀미에 약한 아내가 모처럼 나그네 덕을 (연변에서는 남편을 ‘나그네’라 하고 아내를 ‘안깐’이라 한다. ‘안깐’은 그렇다 쳐도 ‘나그네’는 참 묘한 호칭이다.) 보나 했는데, 막상 충칭역에서 버스에 올라 보니 가운데쯤이었다. 대개 한창나이가 지난 후에 관광여행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소그룹의 6인도 해마다 한두 차례씩 장거리여행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 두어 해 전이라고 한다.


조선족과 한족이 반반쯤 되었다. 그런데 며칠 함께 다니며 행태를 살펴보니 민족의 차이보다 도시인-촌사람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한국에 비해 도시인과 촌사람의 차이를 크게 의식하는 것은 연변만이 아니라 중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TV 드라마에도 많이 나타난다.) 근년까지 사회유동성이 낮아서 도시와 농촌의 교양 습득 여건에 차이가 컸던 것으로 이해된다. 촌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은 새로운 경험 앞에 혼란스러운 반응이 많고 구경에 악착스럽다. 


한국의 관광 사업에 비해 취향에 따른 장르 분화가 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기차여행을 제외한 5박6일의 일정 중 자연경관의 감상이 압도적 비중이다. 역사-문화 방면은 전체 비중도 작은 데다 그 중에도 정치적 의미를 가진 현대사 유적과 신기한 볼거리로서 소수민족 민속 소개가 많아서 먹물 관광객의 흥취를 특별히 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먹물이든 아니든 ‘중국’에 관심 가진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은 많이 있었다. 지목된 관광 대상만이 아니라 관광이 이뤄지는 환경 자체에 놀라운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충칭 이후 첫 코스였던 언스(恩施) 대협곡. 웅장하고 교묘한 풍광에 깜짝 놀랐다. 후난(湖南)성의 ‘장가계(張家界)’는 우리 발음으로 통할 만큼 잘 알려진 관광 명소인데, 일행 중 그곳에 가본 사람이 비슷한 풍광이라고 한다. 이곳 관광의 핵심은 절벽 위와 틈새를 잔도(棧道)로 이어 만든 스카이워크(sky-walk)다. 15리(7.5km) 길이인데 오르막내리막과 볼거리가 많아서 주파에 세 시간 걸린다.


기기묘묘한 풍광에 수시로 압도되며 걷는 가운데 십여 년 전 시작되었다는 이 관광지 개발의 규모와 방식에 생각이 미친다. 좋은 계절이고 주말이기도 해서 관광객이 많은 날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많은 사람이 큰 불편 없이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시설이 잘 되어 있다. 대중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빵과 서커스”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관광 사업이 서커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알아보지 않았지만 개발 주체가 민간 사업자 아닌 성(省) 정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기적 수익성을 노린 난개발의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고 공공성을 최대한 추구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여행단의 주축인 60대 관광객들은 대개 연금을 경제적 기초로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연금 조건이 좋다. 연금 적립을 1대 1로 직장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본인이 10원 적립하면 직장에서 10원 보태주는 식) 20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하면 퇴직 전의 본봉보다 더 많은 액수의 연금을 타게 된다. 그 수준의 연금만 있으면 생활수준 유지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연금에만 의지해서는 이런 여행에 나서기 힘들다. 기본 참가비가 한 달 연금 수준이고 그 절반가량의 부대비용이 필요하다. 부부가 함께 나선다면 석 달 생활비가 드는 셈이다. 1년에 한두 번씩 관광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밑천을 가진 것이다. 우리 소그룹 사람들을 보면, 중년에 한국 가서 몇 해 돈을 벌어 온 이들이 있고, 개혁개방 과정의 민영화에서 주식으로 돈을 번 이들이 있다. 그들이 40대와 50대를 지나는 동안 중국의 경제 상황이 내내 좋았기 때문에 그만한 밑천을 어떻게든 마련해 놓지 못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소비 행태 측면에서 아내가 가장 놀라는 현상은 “한족(漢族)이 돈을 쓴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이웃부터 직장생활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한족은 “돈이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는 사람들”로 일관되게 인식해 왔는데, 이제 조선족과 똑같이 돈 쓰며 다니는 사람들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중국 안팎에서 접해온 중국인들을 놓고 볼 때 한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연변지방의 특별한 조건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한국에서 ‘뙤놈’, ‘짱꼴라’를 돈 좋아하고 불결한 존재로 보던 인식과 통하는 것 같다. 한국 와서 살던 화교들은 공동체의 보호가 약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각자의 노력이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 한국 와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은 중국인 전체의 모집단과 꽤 다른 특성을 가진 집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연변의 한족도 한국의 화교처럼 뿌리가 약한 조건을 갖고 있다. 2-3대째 지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에 비해 공동체의 보호가 약하기 때문에 각개약진의 자세가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돈에 헤픈” 조선족과 “돈에 굳은” 한족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상당부분은) 그런 여건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연변에서 한족의 취약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계절일꾼’이다. 연변의 건설 사업이 늘어나면서 봄에 와 막노동으로 돈을 벌다가 겨울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아무 데서나 자고 값싼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그들을 한국에서 비슷한 식으로 지내본 조선족들은 착잡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다니다가 적응이 되어 연변에 자리 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연변의 조선족 인구 비율 하락에 한 몫을 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 중 들고 다니며 틈틈이 본 책 하나가 패트릭 드닌의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펴냄)였다. 몇 주일 전 프레시안에 실린 김창훈 씨의 글[링크]에 소개된 것을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급하게 입수한 책이다. 관광산업에 나타나는 중국의 번영을 눈으로 보며 생각이 머무는 대목이 있다.

로크의 테제는 꾸준히 증대하는 부와 자산이 사회적 결속과 연대의 대체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이해한 대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받아들이는 사회는 불평등을 장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빠른 진보는 균일한 전선을 이루며 나아갈 수 없고 계층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 로크처럼 하이에크도 급속히 발전하며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사회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미 빠른 데다 가속까지 하는 발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 성공을 누리는 즐거움은 전체적으로 아주 빠르게 진보하는 사회에서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정적인[정체된?] 사회에서는 올라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발전에 참여하려면 사회가 상당히 빠르게 발전해야 한다.” (196쪽)

중국의 경제 성장은 그 덩치로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다년간 유지해 오고 있다. 그 효과가 인민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을 관찰해 왔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더욱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불평등과 갈등을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원만하게 처리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함께 하는 여행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열린 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소강(小康)’에 접근하는 길이 분명하다. 그런데 앞으로는? 생각할 것이 참 많은 문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