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최종 교정을 보고 있을 때 참석한 어느 행사에서 한 젊은 역사학자의 질문을 받았다. 역사학의 작업방법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으로 인해 써놓았던 에필로그를 통째로 다시 쓰게 되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역사학자였는가? 역사학과 교수로 35년을 지냈으면 역사학자가 아닐 수 없다. 홍콩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도 역사학과 교수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역사에 관한 강연도 하고 역사학 학위눈문 심사도 했다. 동아시아연구소와 동남아시아연구소 일을 할 때도 싱가포르국립대학 역사학과는 남의 집 같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학자행세를 하기가 어색해진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생각과 글쓰기가 중국식 문인(文人)”의 길로 되돌아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고대그리스의 “histor”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history”의 원형 “historia”는 기록 열람을 통해 과거를 연구해서 실용적 목적이나 도덕적 목적을 위해 해석하는 일이었다.

 

나는 중국 역사서술에 훈련받지 않았으나 정사(正史)의 의미가 비슷한 전통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학인-관료들은 보존된 기록의 진정성과 정확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받았다. 사건의 취사선택을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둔 정책과 나쁜 결과를 가져온 정책을 구분했다.

 

오늘의 역사학자는 그와 달리 서유럽 계몽주의시대의 과학적 학술관에 입각한 존재다. 19세기에 레오폴드 폰 랑케는 공식 문서를 중심으로 모든 종류의 원사료를 중시하면서 비판적 분석을 요구했다. 그의 목적은 과거를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재구성하고 모든 주요 대학에 연구에 근거를 둔 학과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독일의 직업적 역사학자는 자신을 진실의 구도자(求道者)로 생각했다.

 

이제 돌아보면 나는 역사학 공부를 시작한 말라야대학에서 그런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않았다. 중국 혁명가들에 관한 자료나 남중국해의 교역활동에 관한 고문서에 관한 나 자신의 판단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사회과학자의 모든 기준으로부터 벗어났다.

 

런던의 소아스에서도 인문학의 전통에 따르는 그런 개방성을 다시 경험했다. 동남아시아사의 DGE , 중국사의 데니스 트위쳇과 인도사의 AL 바샴이 있는 가운데 과거를 향한 내 길을 찾을 여지가 있다고 늘 느꼈다. 그 느낌은 중세사 연구로 런던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확인되었다. -송 시대가 중세는 전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쿠알라룸푸르의 말라야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는 역사학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데 더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노력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건국에 대한, 중국계 주민에 대한, 말라야와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관심이 이끄는 데 따라 일어난 일들과 일어날 일들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과거를 인간의 온갖 경험과 가치와 생각의 거대한 창고로 보며 그 내용물을 알려진 사실에 비추어 검토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데도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서 실체와 의미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냈다. 그 모색에서 성과를 거둔 것은 고대의 학자들, 계몽주의시대 이후의 직업역사가들, 그리고 학식이 뛰어난 현대 학자들이 쓴 여러 종류의 역사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배운 것 덕분에 역사학자라는 딱지를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 과거 속의 진실을 찾으려 진심으로 애쓰는 이들에 대한 내 존경심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 자신이 현재의 이해와 미래의 전망에 과거를 이용하는 방식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 싱가포르에서 지내는 동안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끝으로 밝힌다. 조그만 섬 위에서든 오래된 대륙 안에서든, 경계선 없이 탐색하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지난 30년간 깨닫게 되었다.

 

 

회고록 <No Borders: Jouneys Across Islands and Continents>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내가 왕 교수에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 뽑아 놓는다.

 

Posted by 문천

 

Towards A Modern Future / 근대적 미래를 향해

 

이제 지금 상황으로 돌아와 중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는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이 과거에 겪은 여러 단계와 수많은 접점을 되찾으려 하는 노력이 제게 놀랍습니다. 제일 먼저 지난 30년의 경험과 그 앞 30년의 경험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해방 후 60년의 시기를 쪼개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며, 중국인이 원래 좋아하는 연속성의 느낌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 두 차례 혁명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었으나 그 상황들을 과거와의 근본적 단절로는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상황을 일관된 변화의 두 개 단계로 보고 중국에 닥친 도전에 대한 강력한 대응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49년 이후 두 개 세대가 겪어온 경험은 지난 30년과 그 앞의 30년을 합쳐서 볼 마음이 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찾는 과거와의 접점은 쑨원과 국민당이 대표한 민족주의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민족주의는 중화문명의 기초에 닥친 실존적 위협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합당한 반응이었습니다. 민족주의가 이룩한 현대 중국의 통합성은 소련에서 들여온 국제주의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안에서 중국의 위치를 확보하는 데 민족주의의 결정적 역할을 지금은 서슴없이 긍정할 수 있습니다. 민국시대와의 접점을 확인하면 더 거슬러 명-청 왕조를 비롯해 중국의 역사 전체로 접점을 늘려갈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 사이의 재균형을 이루는 능력은 미래를 향한 중국몽의 확실한 첫걸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귀가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1911년 혁명 이후 새 세대 역사학자들은 중국 근대사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정했습니다. 이 판정이 진보적 관점으로 인정되어 모든 역사교재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 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1840년 이후 시기를 1644년 명나라 멸망 시점부터 연결해서 서술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조의 역사를 연결하는 장치가 정사(正史)인데, 명나라는 정사가 작성된 마지막 왕조였습니다. 청나라의 정사가 없기 때문에 1644-1840년 사이 근 2백 년의 공백이 남아있습니다. 후세의 정부들이 확인할 수 있는 청나라 역사가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19세기의 왕조 쇠퇴 이후의 진행과 느슨하게 맞춰진 여러 가지 서술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 멸망 후 전직 관료들이 표준적 청사(淸史)” 편찬을 시도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고, 1928년에 나온 <청사고(淸史稿)>는 품질과 정확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명나라 멸망 시기와의 재접속을 해주는 청나라 정사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지한 편찬 사업이 200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가 힘을 쏟고 있으나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중국에게 과거와 현재 사이의 재균형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 2백 년 공백을 메울 중요한 연구 대부분이 서양학자들이 세계사의 틀에 따라 내놓은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근세 역사의 비연속성을 부각시키는, 중국중심주의를 벗어난 <청사>의 편찬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는 상황입니다.

 

 

Rebalancing, The Way Forward / 재균형, 앞으로 나아가는 길

 

재균형에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여러 형태의 유럽 사회주의와 중국의 국가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재균형이 있습니다. 중국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유럽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적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발전 목표를 위한 모든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체제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강력한 국가에 의한 사회주의적 진보를 통해 세계적 자본주의에 내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화문명의 핵심 가치들과 밖에서 들어온 이념들, 근대화 과업에 필요한 과학적, 경제적, 정치적 이념들 사이의 절충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충효(忠孝) 같은 전통적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충과 효는 가정과 국가의 두 이념을 이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얼마 전에는 젊은 중국인들이 그 가치에 회의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가치가 다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에는 가정과 국가 사이의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여 시민사회의 발전을 촉진할 장치가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개인에 대한 위로부터 국가의 요구와 아래로부터 가정의 요구 사이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결합 장치가 없습니다. 지금의 공산당이 당원들 사이에 그런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그 장치가 사회적 결합력을 가진다면 두 가치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로 생각하는 영역에는 각 왕조가 제국을 운영한 방법에 관한 모든 공식 기록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경()-고전의 원리들에 따라 편찬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바꿔 말하면, 각 왕조의 정책과 구조의 기록에 나타나는 이 원리들이 좋은 정치를 위한 지침이 된 것입니다. 그에 덧붙여 사()-기록은 현실 속에서 유가 원리들의 실효성을 확인해줌으로써 후세 학자들이 경-고전의 새로운 해석을 입증할 확실한 사례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송나라 때 신유가(新儒家) 철학자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기록의 이 중요한 기능이 청나라 말 유가가 국가 이념의 자리를 잃을 때 사라졌습니다. 1912년 이후 중국 사람들은 경-고전을 대신할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군벌 시대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고 국민당 정권의 삼민주의 제안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49년 이후로 마오쩌둥 사상도 덩샤오핑의 개혁 원리도 경-고전의 역할에 이르렀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록도 자리를 잃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근대적 방법론을 통해 중국의 과거를 세계사의 진행에 맞춰보려고 노력해 왔지만, -기록의 원래 기능이 회복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방법론 영역에서 새로운 과학과 철학을 적용해 찾아낸 새 지식을 근대 역사와 겹쳐서 본다면 경-고전을 다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방법론을 사-기록보다 위로 올려놓는 지식 영역의 재균형이 이뤄진다면 중국중심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사이의 차이가 의미를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균형의 대상이 무엇인지 모아놓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제일 손쉬운 과제는 대륙의 힘과 해양의 힘에 관심을 고르게 가지는 지정학적 재균형입니다. 지난 20년간의 해군력 건설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륙과 해양의 새로운 인프라를 결합하기 위한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으로 나타난 방향입니다. 그보다 어려운 과제는 만주족 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한족이 그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배경 위에서 그 강역을 물려받은 중국이 어떤 모습의 나라가 되어야 할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제국의 과거와 민국의 미래 사이의 재균형을 위해 그 문명의 뿌리와의 접속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진보의 과제를 실현하면서도 중국의 연속성에 가치와 의미를 가진 요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식의 주요 영역들 사이의 재균형을 취하는 것이 좋은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단계와 현재를 통합할 필요가 절실한 만큼, 중국인이 자기네 역사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 중국은 1911년 혁명 이후 그 사회 안에 흩어져 있던 구슬들을 모아 하나의 목걸이로 꿰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게는 강인하고 강력한 전통과 균형을 이루는 진보적 사회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빚어지는 사회주의가 중국의 특색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16년 12월 옌칭 아카데미 심포지엄에서 강연 "중국과 세계: 관찰-분석-전망" 원고.

Posted by 문천

 

일산에서 검단으로 이사한 후에도 치과 신세질 일 있으면 파주의 김 군을 찾아갔다. 그런데 한두 해 지나다 보니 너무 멀어 동네를 수소문해 미추*치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좀 고지식한 인상의 의사 선생이다.

 

몇 달 전 이빨 하나가 깨어져 찾아가니 살펴본 다음, 옆의 이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으니 뽑아버리고 두 대를 함께 임플란트 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견적의 절반을 선불한 다음 뿌리를 심었다. 그런데 예정했던 대로 한 달 전에 가 보니 뿌리 하나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뽑아 버리고 형편을 다시 보자 해서 보름 후에 가 보니 그 자리에 뿌리 심기는 어렵겠다며, 하나만 심은 대로 임플란트를 하고 하나는 걸치는 방법으로 (브리징?)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수가를 조정해야겠다 하고 "30만 원만 더 내시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해가 생겼다. 절반 남은 수가에 30만 원을 더 내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이 엇갈리는 것을 너무 서둘러 따지기보다 천천히 생각해 볼 마음으로 아무 반응 없이 지나쳤다.

 

돌아와 생각하니 아무래도 소화가 안 됐다. 계획했던 시술이 부분적으로 실패해서 일이 커졌다면 그 책임을 전부 소비자가 져야 하나? 거듭거듭 생각한 끝에 그런 조건으로는 시술을 더 받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오늘 가서는 시술대에 앉지 않고 말했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주장을 듣던 의사 선생, 어느 대목에서 깨달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오해가 있었군요." 임플란트 가격은 한 대만 내면 되니 선불로 이미 해결된 셈이고, 또 한 대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비용이 30만 원이니 그것만 더 내시면 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아!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를 헤아렸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생각난다. 왜 나는 충분한 근거도 없이 나쁜 쪽으로 오해했을까? 다음 주 시술받으러 갈 때는 과일박스라도 하나 가져가야겠다. 오해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과 내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반성할 기회를 만들어준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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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