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서 열린 시스템닫힌 시스템에 관한 생각을 적으면서 칼 포퍼의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열린사회와 그 적들>(1945)이 생각났다. 40여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을까 생각하며 우선 <위키피디아>에 실린 요약을 읽어보니 읽을 생각이 없어진다. 요약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당대의 주요 플라톤 연구자들과 달리 포퍼는 플라톤의 사상을 소크라테스로부터 떼어냈다. 후년의 플라톤은 스승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성향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체주의를 옹호한 것처럼 플라톤이 그렸다고 포퍼는 비판했다. 포퍼는 사회의 변화와 불만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을 격찬하면서 그를 위대한 사회학자로 추켜세우면서도 그가 제안한 해법을 배척했다. 포퍼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으키고 있던 인도주의적 이념들을 그가 사랑하는 열린사회의 출산의 고통으로 보았다. 플라톤이 거짓말, 정치적 기적, 미신적 금기(禁忌), 진실의 억압, 그리고 야만적 폭력까지도 정당화한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포퍼는 주장했다. 플라톤의 역사주의 경향은 자유민주주의가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한 결과라고 포퍼는 느꼈다. 또한 귀족의 일원이며 한때 아테네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의 친척으로서 플라톤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공감하면서 평민을 경멸했다고 포퍼는 보았다.”

 

이 책이 나온 것은 온 세계가 전체주의의 충격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30년 후 내가 이 책을 읽을 때도 자유민주주의의 열린사회가 한국사회의 열망이었다. 그러나 45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포퍼보다 플라톤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역사 공부 때문에 역사주의에 기울어진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열린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자신 닫힌 것보다 열린 것을 좋아하는 끌림이 있다. 어쩌면 이 끌림은 타고난 성정보다 내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린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에 따라 닫힌 것을 좋아할 때도 있고 열린 것을 좋아할 때도 있는 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생태계 위기를 어떻게 의식하느냐에 따라 열린 시스템닫힌 시스템의 선택도 갈릴 것이다.

 

지난 회에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에서 시간이 지나면 명나라 시대의 중국이 폐쇄적 성장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평화와 복지를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대목을 인용했다. 명나라 때 고도로 발달했던 중국의 물질문명이 발전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유럽에 추월당한 사실을 하나의 실패로만 규정해온 것과 다른 관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성장의 길에 개방적 성장만이 아니라 폐쇄적 성장(self-contained growth)”의 길도 인정하는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성장은 자연(nature)과 인성(human nature)에 변화를 가져온다. 궁극적으로는 성장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에 따른 변화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완급을 조절해서 균형을 취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조절의 필요를 부정하고 빠른 성장만을 바라보는 개방적 성장과 적극적 조절에 노력하는 폐쇄적 성장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근세 이전 유라시아대륙 여러 문명권의 발전 양상을 보면 중국문명의 고립성이 분명하다. 파미르고원과 중앙아시아초원 서쪽의 여러 문명권이 서로 뒤얽힌 상황에 비해 동쪽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하나의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으로 조직된 안정된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안정된 상태 속에서 닫힌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천하(天下)’사상이 자리 잡았다. 인식 가능한 모든 세계의 질서에 제국이 책임진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의 영향 아래 발전-확장보다 질서-균형을 중시하는 것이 대부분 기간 중화제국의 운영 기조가 되었다.

 

한동안 많은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데 몰두한 것은 발전과 확장을 숭상하는 근대세계에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발전과 확장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는 21세기에 와서, 문명의 역사 속에는 그와 반대되는 경향도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경향이 당시 사람들의 행복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데 공헌한 측면을 찾는다면 지금 세상에도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Open_Society_and_Its_Enemies#/media/File:The_Open_Society_and_Its_Enemies,_first_edition,_volume_one.jpg <열린사회와 그 적들> 초판 표지. “열린사회를 열망하던 20세기 중엽의 시대 분위기를 대표한 책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Eurasia#/media/File:Asia-map.png

https://en.wikipedia.org/wiki/Eurasia#/media/File:Eurasia_(orthographic_projection).svg 유라시아대륙. 문명의 발생과 확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진 곳이었다는 사실을 재레드 사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2.

 

유라시아대륙은 약 5500만 평방km의 면적으로 전 육지의 36.2%가량이다. 지금은 세계 인구의 약 70%가 이 대륙 위에서 살고 있는데, 근세 이전에는 그 비율이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륙이 (북아프리카의 지중해-홍해 연안을 포함해서) 인류문명 발전의 주무대였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유라시아대륙의 가운데쯤, 동경 90도 언저리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아열대 습지에서 산악지대와 사막을 지나 초원과 동토지대로 이어지는 이 장벽은 오랫동안 동서 간 교통을 어렵게 만들어 문명권의 경계선이 되었다. 이 경계선의 서쪽에서는 여러 문명권이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나란히 어울린 반면 동쪽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래 중화문명의 압도적 주도권이 2천 년간 이어졌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Guns, Germs, and Steel 총 균 쇠>(1997) 419-420쪽에서 중국문명의 고립성과 통합성을 설명했다.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의 생산성 높은 지역이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통합된 후로는 그 방대한 경제적-문화적 역량이 주변 지역, 나아가 동아시아 일대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벽의 서쪽에는 그처럼 압도적 규모의 생산력을 가진 지역이 따로 없기 때문에 여러 문명권이 병립하던 상황과 대비된다.

 

중화문명권의 고립성이 물샐 틈 없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문명, 페르시아문명과 교섭이 제국 초기부터 있었고, 이 교섭의 크기는 (서방 문명권들 사이의 상호 교섭보다) 작았지만 장기간 축적되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중화문명권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곤 했다. 중국사의 흐름을 치란(治亂)의 반복으로 흔히 보는데, 의 상태란 장기간 축적된 서방문명의 영향을 소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의 상태가 어느 기간 지난 후 의 상태로 번번이 돌아간 것은 궤도이탈 사태에 이를 만큼 원심력이 구심력보다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세기 이후 장벽 서쪽에 이슬람문명이 확장되면서 중국과 서방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 관계에서 매체 역할을 맡아 온 중앙아시아 유목세력에 대한 중국 측 통제력이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대폭 약화된 것이다. 당나라 후기부터 중화제국에 대한 유목세력의 군사적 우세가 오래 계속되다가 13세기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으로 귀착되었다.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은 중화문명권의 고립성이 끝날 (적어도 전과 다른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 큰 계기였다. 몽골제국이 그 정복 영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했다면 중국은 그 한 부분이 되어 다른 부분들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4한국(四汗國)으로 분열되고, 중국은 원 왕조로 중화제국의 모습을 회복했다. 4한국의 분열 원인은 몽골 지도부의 불화보다 아직까지 세계제국의 형성을 위한 조건이 부족했던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원나라 초기 쿠빌라이 시대에는 아직도 세계제국의 꿈이 남아있었다. 아흐마드와 상가 등 재정 확장에 주력한 이재파(理財派)가 그 꿈을 대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통치의 안정을 앞세운 한법파(漢法派)의 승리로 몽골세계제국의 꿈은 끝나고 말았다.

 

원나라가 초원으로 물러간 후 명나라는 닫힌 제국으로 돌아갔다. 영락제(永樂帝)가 정화(鄭和) 함대의 파견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든 대외관계를 국가의 통제 안에 두려는 기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닫힌 제국을 지향한 것이었다. 발레리 한센은 자신의 중국통사에 <열린 제국(The Open Empire)>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적절한 제목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목의 취지를 한센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새로운 접근법에 따라 1800년 이전의 중국을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제국은 그 형성 과정에서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 후에도 긴 역사를 통해 외부의 영향에 열린 상태를 유지했다. 외부의 영향이 차단된 센트럴 킹덤이 아니었다.” (5)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과 비교하면 열린 모습이 맞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후로는 그런 밀봉 제국의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가 없어졌다. 인도에서 지중해까지, 서방에 존재한 여러 제국들과 비교해서 볼 때 중국은 닫힌 제국이었던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na#/media/File:China_satellite.png 거대한 농업문명권의 입지조건을 중국의 위성사진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Mongol_Empire#/media/File:Asia_in_1335.svg 1335년경의 정치지도. 원나라는 서방의 3한국과 분리되어 동양의 길로 돌아갔다.

 

 

3.

 

중화제국은 황하 유역 북중국과 장강 유역 남중국의 통합으로 세워졌다. 한나라 때는 북중국의 비중이 컸지만 남북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중국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자라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송나라 때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영남(嶺南) 지역의 개발이 진척되면서 이를 포괄하는 남중국의 경제력이 북중국을 압도하게 되었다.

 

영남 지역의 경제력은 자체 생산력만이 아니라 해외교역에도 근거를 둔 것이었다. 해외교역은 농업생산에 비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기 쉽다. 중국의 동남해안 지역에는 교역의 이득을 발판으로 한 민간세력이 크게 발달했다. 홍무제(洪武帝)가 공신들을 대거 살육한 옥사(獄事)가 두 차례 있었는데, 그중 호유용(胡惟庸)의 옥사(1380)가 일어난 계기는 참파(占城)의 조공사절이 온 사실을 황제에게 감춘 일이었다. “조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교역이었고, 교역의 이득을 중간에서 가로챈 문제였던 것이다. 명나라 공신 집단이 대부분 남중국 출신이어서 교역의 이득에 밝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정화 함대를 일으킨 것도, 남중국의 민간세력을 견제하려는 뜻으로 이해할 측면이 있다. 건국 공신으로 조정을 장악한 남중국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북경으로 옮겨가고 남중국의 교역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대함대를 건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화 함대의 활동기간에도 계속되었던 해금(海禁)정책은 국가의 교역 통제를 꾀한 것인데, 남중국의 민간세력 억제에도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로는 정책의 실행력이 약화되어 밀무역이 늘어나고, 명목만 남은 해금정책은 밀무역 세력들의 경쟁 배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정제(1521-1566) 시기의 왜구 문제를 보면 밀무역의 이권이 조정을 뒤흔드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인다. 가정제가 죽은 직후의 융경개관(隆慶開關, 1567)은 밀무역을 둘러싸고 누적된 비리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밀무역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은()의 수입이었다. 폰 글란은 <중국의 화수분> 133-141쪽에서 1550-1645년 기간 동안 중국에 유입된 은의 총량을 7천여 톤으로 추정했는데, 그 대부분이 밀수품이었다. 금과 대비한 은의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50% 가까이 높았던 명나라에서 은 수입은 밀무역업자와 그 배후세력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 비단, 도자기 등 중국 백성의 노고가 들어간 수출품의 대가는 대부분 은의 형태로 들어와 부호와 세력가의 수중에 쌓이면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힘을 키웠다.

 

<중국의 화수분> xiii쪽의 지도1에 명나라 때 동전경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북직예(北直隸, 북경 일대)와 남직예(南直隸, 남경 일대), 그리고 그 사이의 산동(山東)성과 하남(河南)성 일부가 포함되는 정도다. 동전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은 소민(小民)의 경제활동이 활발했다는 뜻인데 그 범위가 매우 좁다. 명 말기의 민중봉기가 섬서(陝西)성과 산서(山西)성을 휩쓴 다음 장강 유역으로 번져간 흐름도 동전경제가 취약한 곳일수록 민생이 불안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명 말기 정치가들도 은의 과도한 지배력을 걱정했다. <중국의 화수분> 199쪽에 서광계(徐光啓, 1562-1633)<농정전서(農政全書)> 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를 논하려면 먼저 그 뜻을 밝혀야 한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 는 동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와 달리 오로지 은만이 부의 척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전도 은도 그 자체가 부가 아니다. 부의 표시일 뿐이다. 옛날 성왕들이 말씀한 부는 백성을 먹일 곡식과 입힐 옷감이었다. 그래서 부를 늘리는 큰 길은 부를 생산하는 백성을 늘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제 은과 동전이 부를 대신한다면, 은과 동전을 늘림으로써 민생이 윤택해질 것인가? 한 집안을 놓고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온 천하를 놓고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은과 동전이 늘어나면 곡식과 옷감의 값이 올라가고 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중농주의 성향의 이 논설에 상업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아쉽다는 논평도 가능하겠지만, 중농주의는 중화제국 이념의 한 중요한 축이었다. 국가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무력만이 아니라 경제력도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은을 매개로 한 민간 경제력의 무질서한 성장이 명나라 제국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Xu_Guangqi#/media/File:Kircher_-_Toonneel_van_China_-_Ricci_and_Guangqi.jpg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 자크 제르네가 1982<Chine et christianisme, action et réaction 중국과 기독교: 작용과 반작용>에서 리치가 서광계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측면만이 아니라 서광계가 리치를 유교로 개종시킨 측면도 봐야 한다고 한 지적이 당시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 “Gernet shock”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충격적이었다.

 

 

4.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청 왕조의 시조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에게는 제국 창업의 야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파멜라 크로슬리가 <The Manchus 만주족의 역사>(1997) 3(47-70)에서 소상히 밝혔다. 명나라의 조공국 정도 독립성을 바라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주족 흥기 초기 상황에 대한 크로슬리의 실증적 고찰이 가치 있는 것은 만주족의 정복 의지를 부풀린 전통적 역사서술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청나라 관변 기록은 청 왕조의 천명(天命)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만주족에 반감을 가진 한족주의자들은 그 침략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목적으로 같은 주장을 함께 해왔다.

 

몽골제국 초창기부터 만주 지역은 몽골 세력 아래 놓여 있었고 누르하치 시대까지 여진족은 몽골에게 눌려 지내고 있었다. 중원에서 물러난 북원(北元)은 몽골 동부, 만주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만주 지역에는 세력을 지키고 있었다. 1582년 알탄 칸이 죽은 후 투멘 칸(Tumen Khan, 圖們汗, 1539-1592)이 세력을 확장하고 세첸 칸(Sechen Khan 徹辰汗)을 거쳐 리그단 칸(Ligdan Khan 林丹汗, 1588-1634)에게 이어졌다.

 

여진족은 명과 몽골 두 세력의 틈새에 끼어 있었다. 만주 방면의 명 세력은 1570년대 이후 이성량(李成梁, 1526-1618) 군벌로 변모하고 있었다. 15세기 중엽에 조선에서 이주한 집안 출신인 이성량은 40세에야 관직에 나섰으나 곧 요동(遼東) 총병(總兵)이 되어 수십 년간 지역을 호령했다.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의 주축은 요동병이었고 그 대장 이여송(李如松)은 이성량의 아들이었다.) 1591년에 수많은 비리가 적발되어 면직되었지만, 그가 지휘권을 내놓자 지역의 군사적 통제가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1601년에 복직되었다.

 

누르하치가 초년에 (위협적 존재가 될 것을 알아보고) 자기 목숨을 노리는 이성량의 마수를 기적적으로 벗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후견 아래 세력을 키웠다. 1583년 이성량의 작전 중에 그를 따르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일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명나라에 대한 칠대한(七大恨)’ 중에 첫 번째로 들어있지만 두 사람을 죽인 것은 누르하치 집안의 경쟁세력이었고 이성량의 뜻이 아니었다. 그 사건 후에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를 받았고, 얼마 후 두 사람을 죽인 원수를 이성량이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어 복수를 하게 해주었다. 누르하치가 1590년 북경에 조공을 간 것도 이성량의 후견 덕분이었다. 후금 건국은 1609년 이성량의 은퇴 후 와해되는 그의 세력 안에서 누르하치가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크로슬리는 누르하치 세력의 초기 상황을 밝히는 데 1595년 조선 사신으로 누르하치를 방문한 신충일(申忠一)<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많이 인용했다. 이 기록은 누르하치가 아직 집권적 군주권을 확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바필드 역시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에서 누르하치가 죽을 때까지 집권적 군주제가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8기제를 만들고 그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집중한 것을 보면 그는 부족 정치의 뛰어난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은 지역에 그칠 뿐, 제국 차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258) 후금 건국을 전후한 세력 확대도 확고한 군사적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본다. (254-255)

 

1626년 누르하치를 계승한 훙타이지(Hung Taiji 皇太極, r. 1626-1642)가 비로소 군주권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1636년 대청(大淸)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직도 명나라 천하를 빼앗겠다는 뜻은 아니고 요나라와 금나라가 송나라와 천하를 나눈 것처럼 대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것이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조선과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것이었고, 1636년의 병자호란은 조공국 조선을 명나라로부터 빼앗겠다는 목적이었다.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 상황에 관한 기록도 만주족의 정복 의지를 꾸며 보이는 것이 많다. 청나라 기록에는 청의 천명(天命)이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고, 반청(反淸) 논설에서는 청나라의 야욕이 확실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1629년 훙타이지의 북경 공격을 양쪽 다 그 근거로 거론한다. 그러나 이 공격의 진짜 표적은 북경이 아니라 원숭환(袁崇煥)이었고 그 목적은 만주 지역의 확보에 있었다.

 

원숭환이 1622년 요동에 부임할 때는 사얼후(薩爾滸) 전투로 명나라의 방어력이 무너진 뒤였다. (1619년의 이 전투에 광해군이 보낸 조선군도 참전했다.) 원숭환은 요하 서쪽으로 물러난 방어선을 강화했고 1626년 누르하치의 이례적인 패배와 그 부상으로 인한 죽음도 원숭환의 방어력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방어에만 전념하는 원숭환군을 서쪽으로 우회해 내몽골 방면에서 북경을 공격했고 원숭환은 그 책임으로 처형당했다. (1550년 알탄 칸의 침공을 뇌물로 회피했다가 처형당한 구란(仇鸞)과 같은 죄목이었다.) 훙타이지는 명 조정의 어지러운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원숭환이 제거된 후 명나라의 요하 방어가 무너지고 산해관(山海關)-영원(寧遠)이 대치선이 되었다. 청군의 침범을 명군이 저지하는 양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과에 따른 소급 해석일 수 있다. 요동 탈환을 위한 명군의 진공을 청군이 방어하는 양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군대 규모는 전 중국의 정복은커녕 북경 공략조차 바라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북경이 민중반란으로 무너진 후 바라지도 않는 천명(天命)이 청나라에게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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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8%A2%81%E5%B4%87%E7%84%95/132662/1/476217f7f17d5f7b720eecae?fr=lemma&ct=single#aid=0&pic=6159252dd42a283459e4deee52b5c9ea14cebf91 원숭환은 한족 영웅으로 극도로 미화된 인물이라서 관련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대략 통설에 따라 서술했다.

https://baike.baidu.com/pic/%E6%B8%85%E5%A4%AA%E7%A5%96%E5%8A%AA%E5%B0%94%E5%93%88%E8%B5%A4/9523044/1/55e736d12f2eb9380c1aad66df628535e5dd6f2b?fr=lemma&ct=single#aid=1&pic=55e736d12f2eb9380c1aad66df628535e5dd6f2b 누르하치의 야심은 천하제국은커녕 동북지역의 패권도 아닌, 여진족의 독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https://baike.baidu.com/pic/%E7%88%B1%E6%96%B0%E8%A7%89%E7%BD%97%C2%B7%E7%9A%87%E5%A4%AA%E6%9E%81/1323439/1/8435e5dde71190ef7733d99fc51b9d16fcfa60a1?fr=lemma&ct=single#aid=1&pic=8435e5dde71190ef7733d99fc51b9d16fcfa60a1 훙타이지는 대청(大淸)제국을 선포했지만 명나라의 천하를 몽땅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gdan_Khan#/media/File:NEAsia_1620-1630.jpg 1620년대 명-여진-몽골의 각축 상황. 여진이 만주를 석권하고 리그단 칸의 몽골이 밀려나 있다.

 

 

5.

 

16444월 청군의 진군 과정을 살펴보면 청나라에게 아직 천하 제패의 뜻이 세워져 있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이자성(李自成)군이 1644319(당시 역법 기준) 북경 점령 후 가장 서두른 일 하나가 산해관의 오삼계(吳三桂)군 접수였다. 도르곤(多爾袞, 1612-1650, 순치제(順治帝, r. 1643-1661)의 숙부이자 섭정)의 청군이 심양(瀋陽)을 출발한 것은 49일이었다. 422-23일 산해관에서 오삼계군과 함께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52일 북경에 입성했다. 심양에서 북경까지 불과 24일간의 전광석화 같은 진군은 청군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삼계군의 향배가 결정적인 열쇠였고 청군은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다.

 

얼떨결에 북경을 차지한 후 청나라 지도부의 노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천명 같은 것 쳐다볼 필요 없이 만주 귀족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앞세웠고 또 한 갈래는 명나라보다 더 멋지게 천하를 꾸려나가기를 바랐다. 후자는 황제를 중심으로 모였고 전자는 섭정을 중심으로 세력을 뭉쳤다. 순치제와 강희제(康熙帝, r. 1661-1722)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섭정 기간이 길었고, 섭정을 맡은 도르곤과 오보이(鳌拜, 1610-1669)는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다.

 

도르곤은 섭정 7년 만에 사냥 중 사고로 죽었는데 그 직후의 대대적인 탄핵을 보면 그 죽음이 과연 사고였는지 의문이 든다. 오보이는 섭정 8년 만에 16세 소년황제의 친위쿠데타로 무너졌다. 1669년 오보이가 제거된 후 청나라의 천하제국 건설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청나라의 새 천명을 인정하는 자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민란의 파국을 처절하게 경험한 북중국 주민들은 청나라 통치를 최선의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중화제국을 모방한 제국 체제를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온 청나라가 민란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믿음직했다.

 

그러나 강고한 민간세력이 자리 잡고 있던 남중국은 달랐다. 청의 정복에 대한 남중국 지역의 치열한 저항은 화이관(華夷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화이관에는 남북 간의 차이가 없었다. 그보다는 민간세력의 강약 차이로 이해할 측면이 커 보인다. 명나라 때 남중국의 민간세력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실력을 키웠고 말기의 민란 중에도 자기 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청군의 진군 앞에 명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데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물론 왕조를 위해, 중화문명을 위해 순절한 열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 체제에 유격장군으로 편입되어 있던 해적 수령 정지룡(鄭芝龍)이 명나라 황실을 받드는 시늉만 하다가 청나라에 붙어버린 것도 당시 지방 실력자의 또 하나 전형이었다.

 

청나라는 1662년까지 명나라의 판도를 모두 수습했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鄭成功)이 대만(臺灣)에 근거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대만은 중화제국의 판도 밖에 있었다.) 남방 정벌의 주축은 항복한 명나라 군대를 편입시킨 한인팔기(漢人八旗)였다. 그들이 유용했던 것은 전투력이 뛰어나서보다 현지세력과 타협-절충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1645년의 변발령(辮髮令) 시행에 융통성을 두는 등) 정벌이 끝난 뒤에도 정벌군 사령관에게 정벌 지역의 통치를 맡긴 것이 삼번(三藩)의 단초였다.

 

삼번이란 운남(雲南)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尚可喜)와 복건의 경중명(耿仲明)이었다. 그들은 평서왕(平西王), 평남왕(平南王), 정남왕(靖南王)의 왕호를 받고 각자의 지역을 독립국처럼 통치했다. 해상교역의 이권을 끼고 있거나(광동, 복건) 광물자원이 풍부하다는(운남) 특성 때문에 중화제국의 경제구조에 큰 영향력을 가진 지역들이었다.

 

오보이가 이끌던 청나라 귀족세력은 중앙집권화를 꺼리는 입장에서 삼번의 분권화를 방조했다. 강희제는 오보이 제거 후 삼번에 대한 통제를 서서히 강화해 나갔다. 167370세의 상가희가 은퇴와 함께 번국(藩國)을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물려줄 것을 청하자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불허했다. 2년 전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의 세습을 허락한 것과 다른 조치였다. 이 변화에 경계심을 품은 번왕들이 조정을 떠보기 위해 짐짓 번의 철폐를 주청했다가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반란에 나섰다.

 

한나라가 창업 근 50년 만에 오-7국의 난을 제압하고 제국의 본궤도에 오른 것처럼 청나라는 입관(入關) 40년 만에 제국의 본궤도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희제의 61년 치세에 이어 옹정제(雍正帝, 1722-1735)와 건륭제(乾隆帝, 1735-1795)의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 중화제국의 번영은 인구가 약 15천만 명에서 약 3억 명까지 곱절로 늘어난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제국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완성 뒤에는 무엇이 따라올까?

 

https://en.wikipedia.org/wiki/Li_Zicheng#/media/File:Southern_Ming.png 1644년 말 중국의 군사적 상황. 하남-섬서의 이자성 세력, 사천의 장헌충(張獻忠) 세력이 남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Qing_dynasty#/media/File:Qing_Empire_circa_1820_EN.svg 청 제국의 중국 평정과 주변부 통제력의 확대 과정

https://baike.baidu.com/pic/%E4%B8%89%E8%97%A9%E4%B9%8B%E4%B9%B1/616398/1/8435e5dde71190ef52a0ffedc01b9d16fdfa60ac?fr=lemma&ct=single#aid=1&pic=bba1cd11728b47104bcc1be5c1cec3fdfc03233c 삼번의 난 형세도. 짙은 녹색이 삼번의 본거지이고, 한때 장강 이남과 서부지역 대부분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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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 실록(明 實錄)>에도 <명사(明史)>에도 오랑캐이야기는 동남방의 바다오랑캐보다 서북방의 유목민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명나라 당시에도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중화제국의 대외관계에서 서북방을 중시한 결과다.

 

만리장성부터 그렇다. 진 시황(秦 始皇)이 쌓은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그 전의 전국시대 장성(長城)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도 하며, 그 후 여러 시대에 쌓은 부분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그 전에 쌓은 구간의 길이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명나라 때 쌓은 부분은 훨씬 더 웅대하고 정교하다. 널리 알려진 장성의 이미지는 명나라 장성의 모습이다. 장성 전체 토목공사량 중 명나라 때 투입된 것이 90퍼센트가 넘는다.

 

명나라의 위기는 바다보다 초원에서 온 것이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북경 일대에 유목민이 쳐들어온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원정에 나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왕조도 북쪽 오랑캐의 한 갈래인 만주족에게 넘어갔다. 반면 바다로부터의 위협은 성가신 해적 수준이었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임진왜란도 명나라 본토에 미치지 않았다. 유목민이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면 바다오랑캐는 피부병 정도로 여겨졌다.

 

서북방의 대외관계에 치중한 중화제국의 관점은 역사 경험의 관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성립 시점부터 가장 중대한 위협이던 유목세력은 몽골제국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중화제국의 역사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요한 작용을 해왔다.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낸 명나라가 몽골세력의 반격을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의 역사가의 눈에는 당시 사람들이 크고 중요하게 여긴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인식하는 시간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ippe II 펠리페 2세 시기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1949)에서 시간의 흐름을 세 개 층위로 구분했다. 바닥의 흐름은 자연의 시간. 인간이 거의 느낄 수 없이 유장하게 흘러간다. 다음 층위가 문명의 시간. 사회-경제-문화의 구조적 변화가 전개되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표면에 있는 사건의 시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건의 시간을 넘어 문명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브로델은 역사가의 임무로 보고 장기지속(la longue durée)’ 현상을 말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유목세력의 동정에 주의를 집중한 것은 사건의 시간 속에서였다. 더 깊은 충위에서 문명의 시간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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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9%95%BF%E5%9F%8E/14251/1/c8ea15ce36d3d5396400b83d3c87e950352ab00b?fr=lemma&ct=single#aid=0&pic=2f738bd4b31c8701ef013887217f9e2f0708ff18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문구(九門口) 장성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Wall_of_China#/media/File:20090529_Great_Wall_8185.jpg () 장성

 

 

2.

 

명나라에 대한 유목세력의 위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일이 토목지변(土木之變)’(1449)이다. 영종(英宗, 1435-1449, 1457-1464)이 오이라트(瓦剌)를 정벌하겠다고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참혹한 패전 끝에 포로로 잡힌 사건이다.

 

중국 황제가 유목세력에게 포로로 잡혔다! 한 고조(漢 高祖)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곤경을 겪은 평성지곤(平城之困)’보다도 더 극적인 사태다. 그러나 토목지변은 황제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중화제국과 유목세력 사이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 일이 아니었다.

 

오이라트 지도자 에센(也先, 额森, Esen)은 명나라 원정군을 격파한 후 승세를 타고 침공하는 대신 포로로 잡은 황제의 몸값을 요구했다. 황제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명나라의 방어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포로로 잡힌 황제를 바로 포기하고 그 동생을 황제로 세워(代宗, 1449-1457) 임전태세를 갖추자 에센은 물러갔다가 1년 후 영종을 큰 보상 없이 돌려보냈다.

 

에센이 명나라를 망가트릴 목적을 갖고 있었다면 영종을 돌려보낸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귀환 후 실권 없는 상황(上皇)이 된 영종은 1457년 정변을 일으켜 황제위를 되찾고 8년 전 북경을 지킨 우겸(于謙, 1398-1457) 등 유능한 신하들을 자신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센 자신이 그보다 먼저 몰락해버렸다. 휘하 세력을 만족시킬 당장의 이득을 가져오지 못한 그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1455년에 반란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토목보 사태의 어리석음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오이라트는 외경 전략(outer frontier strategy)’을 통해 외교와 교역 등의 방법으로 안정된 수입원을 명나라에서 찾은 것인데 강경일변도의 대응으로 양쪽 체제가 함께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이라트 세력은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그 후 백여 년간 유목세력을 통제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장성 수축공사도 이 기간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몽골의 양대 세력은 오이라트의 서부(西部)와 타타르(韃靼)의 동부(東部)였다. (19세기 서양에서 만주족을 ‘Tatar’라 부른 관행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타타르를 ‘Eastern Mongols’로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우세했으나 에센의 몰락 후 타타르가 득세해서 다얀 칸(達延汗, Dayan Khan, 1474-1517)과 알탄 칸(俺答汗, Altan Khan, 1507-1582)의 영도 하에 장기간 명나라를 압박했다.

 

자그치드와 사이먼스는 <Peace, War, and Trade along the Great Wall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1989) 3변경 호시(互市)”에서 에센, 다얀 칸, 알탄 칸의 시기 명나라와 몽골 사이의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이 시기 몽골의 주도세력들은 명나라와 전쟁보다 교역을 원하는 경향을 꾸준히 갖고 있었는데, 명나라가 이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피차 큰 피해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관점이다.

 

저자들의 관점이 명확하게 뒷받침되는 대목들이 많이 있다. 알탄 칸 시기의 흐름이 특히 분명하다. 알탄 칸은 큰 세력을 막 이룬 1541년에 사절을 명나라 변경의 대동(大同)에 보내 조공관계를 청원했다. 명 조정은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다시 대동에 온 사절을 보고도 없이 바로 처형한 관리들은 조정에서 상을 받았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1546-47년 알탄 칸이 다시 사절을 보냈을 때 명나라 장수들은 경쟁적으로 사절을 잡아 죽였다. 역대 명신(名臣) 중에 이름을 남긴 옹만달(翁萬達, 1498-1552)은 무단히 사절을 죽인 장수들을 엄벌에 처하고 알탄 칸의 청원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지만 그 자신이 견책을 받았다.

 

방어 능력을 갖추지도 않은 채 적대적인 정책만 취하던 명 조정은 1550년 알탄 칸의 대거 침공 앞에서 아무 대책이 없었다. 대동 방면을 막고 있던 대장군 구란(仇鸞)은 알탄 칸에게 뇌물을 주며 다른 방면으로 진공하게 한 죄로 나중에 처형되었고,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는 적군이 북경 일대에 이르렀을 때 성문을 닫고 북경성만 방어하는 소극적 전략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정여기는 희생양으로 몰린 감이 있다. 처형에 임해 엄숭 때문에 망했다(嚴崇誤我)!” 외쳤다는 말이 전해진다. 정여기의 소극적 전략은 당시의 권신 엄숭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꼬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대책 없는 상황은 여러 해에 걸친 무책임한 정책이 누적된 결과였지 몇몇 당사자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 불리는 1550년의 위기는 101년 전의 토목지변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황제의 무능을 둘러싼 조정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449년의 위기는 황제가 잡혀가는 덕분에 조정의 정비를 위한 한 차례 기회를 가져왔지만 1550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暗君)의 하나인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는 황제 자리를 지켰고, 손꼽히는 간신의 하나인 엄숭도 십여 년간 더 권세를 누렸다.

 

https://en.wikipedia.org/wiki/Tumu_Crisis#/media/File:Tumu_Crisis.jpg 토목지변이 일어난 장소

https://en.wikipedia.org/wiki/Altan_Khan#/media/File:Altan_Khan.png 알탄 칸의 세력 범위. 명나라와의 가장 중요한 접점이던 대동(大同)이 북경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3.

 

명나라 조정에서는 북방 유목세력을 늘 큰 위협으로 여겼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자들은 원나라가 물러간 후 몽골세력에게는 중국 정복의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여긴다. 아나톨리 카자노프가 <Nomads and the Outside World 유목민과 외부세계>(1983, Eng. tr. by J. Crookenden) 202-212쪽에서 유목사회의 특성에 입각해 이 점을 밝혔고, 자그치드와 사이먼스도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에서 이 관점을 따랐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와 상호보완의 관계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 사이에 자족성(autarchy)의 비대칭성이 있다. 농경사회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내부에서 생산하는데 유목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교역의 필요성이 유목사회 쪽에 더 강한 것인데, 농경사회에 통제력이 강한 체제가 세워질 때는 이 차이를 이용해서 갑질을 하려 든다. 유목세력의 불리한 조건이 어느 한도를 넘을 때 폭력을 쓰게 되지만 교역 등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는 평화적 방법이 주어지면 폭력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유목세력이 중국의 농경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려 든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 관점을 뒷받침해 준다. 원나라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 예외가 성립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얼마간의 실마리는 나타나 있다.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한 원나라 건국세력이 수십 년 정복 과정을 통해 유목세력의 특성을 벗어나 정착문명의 틀에 서서히 접근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만이 아니라 이슬람 등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늘어나 융합문명의 길이 열린 것도 이 변화에 작용했을 것 같다.

 

1368년 명나라의 진격 앞에 아직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고 있던 원나라가 쉽게 대도(大都)를 내놓고 초원으로 물러난 것은 다른 왕조들에 비해 제국의 정체성에 아직 가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재정이 엉망이 된 제국에 집착하기보다 백여 년 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원을 포기한 뒤에는 반격의 길을 찾을 수 없었고, 중국에 대한 원 왕조의 지배력은 그 후 20년 동안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북원(北元)의 권위가 사라진 후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성쇠는 전형적 유목세력의 양상으로 돌아갔다.

 

오이라트의 에센도, 타타르의 다얀 칸과 알탄 칸도, 중국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경제적 이득을 원했을 뿐이다. 알탄 칸이 1540년대에 여러 차례 보낸 사신을 명나라에서 죽인 후 1550년 북경 일대에 진공해 명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지만 호시(互市) 개설의 약속 등 약간의 양보를 얻자 쉽게 물러갔다. 그 결과 1551-2년에 대동과 선부(宣府)에서 호시가 열렸지만 명나라 측의 성의부족으로 곧 중단되고 적대관계로 돌아갔다.

 

수십 년에 걸쳐 명나라를 괴롭히던 알탄 칸이 1570년 명나라와 화친을 맺는 과정이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 96-105쪽에 소상히 그려져 있다. 알탄 칸의 부인이 무척 사랑하는 손자가 개인적인 문제로 (약혼자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는 데 불만을 품고) 명나라로 달아났을 때 명나라의 현명한 지방관이 그를 보호하며 조정에 주청하여 화친이 이뤄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화친을 원하는 알탄 칸의 태도는 수십 년간 일관된 것이었고, 명나라의 어리석은 황제가 사라진 덕분에 그 뜻이 이뤄졌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정제를 이어받은 목종(穆宗, 재위 1566-1572)은 이미 융경개관(隆慶開關)’으로 남쪽에서도 합리적인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명나라에게 북로(北虜)심복지환이 아니었다. 잘못 다루면 찰과상을 입을 수 있고 심해야 골절 정도에 그치는 외과적 문제였다. 정말 심복지환에 가까운 것은 경제체제의 혈액이라 할 수 있는 화폐 문제였고, 북로보다 남왜(南倭)가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umed#/media/File:Mongolia_XVI.png 16-17세기 몽골 정치세력도. 중앙에 북원(北元), 서쪽에 오이라트, 남쪽에 타타르(“Tumed"란 이름으로), 동쪽에 차하르(Chahar)와 우량카이(Uriangkhai), 북쪽에 칼카(Khalkha)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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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동전 중심의 화폐체제가 자리 잡았다. 한 무제(漢 武帝)가 기원전 118년 발행한 오수전(五銖錢)7세기 초 수()나라 때까지 통용되었고 당 고조(唐 高祖)621년 발행한 개원통보(開元通寶)는 더 오래 사용되었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자체 화폐를 아직 가지지 않은 주변 지역에서 가져가 화폐로 쓰기도 했다.

 

중세 이전 다른 문명권에서 귀금속(-) 주화가 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중국에서 동전이 널리 쓰인 것은 상인집단의 활동만이 아니라 서민의 일상생활까지 화폐경제로 조직된 사실을 보여준다. 화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한다. (1) 교환의 수단. (2) 가치측정의 기준. (3) 가치보존의 수단. 가장 본원적 기능인 (1)에서 동전은 금-은화보다 뛰어난 효용을 가진 것이었다. 다른 문명권에서 서민의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에 그치거나 곡식, 직물 등 대용 화폐를 이용하는 동안 중국 농민은 자급자족을 벗어나 환금작물 재배로 나아가고 있었다.

 

11세기까지 경제 팽창과 시장의 고도화에 따라 동전 체제의 효용성이 한계에 이르면서 재화를 대신하는 문서의 사용이 민간에 유행하자 송나라에서는 같은 성격의 문서를 교자(交子)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발행하기 시작했다. ---명 여러 왕조에서 이를 따라 교초(交鈔), 회자(會子) 등 이름으로 시행했다. 세계 최초의 지폐였다. 처음에는 경화(硬貨)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의 성격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법정화폐(fiat: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고 교환가치를 법적으로만 보장받는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리처드 폰 글란의 <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 중국의 화수분>(1996)에는 근세 초기 중국 화폐제도의 굴곡이 그려져 있다. 동전 체제의 대안으로 지폐 체제가 시도되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 체제로 낙착되는 과정이다.

 

폰 글란의 책에서 내가 얻은 부수입 하나는 경제사 방면을 이해하기 어려운 데 대한 오래된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다 보니, 경제사 분야의 중요한 연구 중에는 특정한 경제발전 이론을 의식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경제사는 20세기 이데올로기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과도한 이론화 경향은 유럽중심주의와 함께 근대역사학의 한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학에도 어느 학문분야나 마찬가지로 이론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론과 실험-관찰이 나란히 진행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학에서는 현상의 파악이 어느 정도 확실해질 때까지 성급한 이론화를 삼갈 필요가 있다.

 

화폐론에서 통상 거론되는 세 가지 기능 외에 전통시대 중국의 중요한 화폐 기능 또 한 가지를 덧붙이는 데서 근대적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폰 글란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4) 조세와 녹봉 등 국가의 출납 기능. 시장의 힘이 국가를 능가하게 되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전의 국가는 시장의 관리자일 뿐 아니라 참여자로서도 비중이 큰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리는 중국 화폐체제의 변화 과정은 시장 참여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위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는모습이다.

 

화폐의 기능 중 교환의 수단가치 보존의 수단에는 상치되는 측면이 있다. 민간에서 재산 축적을 위해 화폐를 쌓아놓기만 하면 교환 수단으로서 기능이 약화된다. 사유재산의 과도한 축적은 유교 정치이념에서 꺼리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토지를 왕토(王土)’ 사상에 묶어놓은 것도 그 까닭이다. 재력(財力)은 인간사회에서 무력(武力) 못지않게 강한 힘을 가진 것이므로 그 통제에 질서의 중요한 원리가 있었다.

 

()은 민간의 사유재산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매체였다. 중국의 부호들이 재산을 보유하는 전통적 형태는 토지와 전호(佃戶)였지만 그 과도한 보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았다. 서화, 골동품, 보패 등 고가품은 가치 보존의 수단은 되지만 보유자의 권력을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화폐의 기능을 갖춘 귀금속이 소유자의 권리와 권력을 제일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사유재산의 형태였다.

 

전 세계의 은 생산량은 1500년까지 연간 50톤 수준이었다가 16세기 동안 600톤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폰 글란은 위 책 133-141쪽에서 1550-1645년 기간 동안 중국에 유입된 은의 총량을 7천여 톤으로 추정했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도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2007) 212-216쪽에서 이 추정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에 중국인이 보유하고 있던 은의 총량은 확실한 추정을 보지 못했지만, () 세기동안 들여온 분량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공급량이 엄청나게 크던 수백 년간 수요-공급의 법칙에 불구하고 은의 높은 가격이 중국에서 유지된 것은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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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9%93%9C%E9%92%B1/10984993/1/7af40ad162d9f2d3572c517164a09d13632762d06652?fr=lemma&ct=single#aid=1985635587&pic=fcfaaf51f3deb48f1abf6eb6f21f3a292cf57880 한나라의 오수전

https://baike.baidu.com/pic/%E5%BC%80%E5%85%83%E9%80%9A%E5%AE%9D/4325599/1/d53f8794a4c27d1e180cf47815d5ad6eddc43860?fr=lemma&ct=single#aid=1&pic=d53f8794a4c27d1e180cf47815d5ad6eddc43860

https://baike.baidu.com/pic/%E5%BC%80%E5%85%83%E9%80%9A%E5%AE%9D/4325599/1/d53f8794a4c27d1e180cf47815d5ad6eddc43860?fr=lemma&ct=single#aid=1&pic=d50735fae6cd7b899e518251316e55a7d933c995a085 당나라의 개원통보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Flavian_dynasty_Aurei.png 1세기 후반 로마의 금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MithridatesIParthiaCoinHistoryofIran.jpg 기원전 2세기 파르티아의 은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Al-Mu'tamid-coin.jpg 11세기 아바스 칼리프조의 금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Potos%C3%AC_8_reales_1768_131206.jpg 18세기 스페인 은화. 은의 전 세계 확산에 매체가 되었다.

https://baike.baidu.com/pic/%E4%BA%A4%E5%AD%90/564925/1/5243fbf2b21193137fd55e9867380cd791238d00?fr=lemma&ct=single#aid=1&pic=34fae6cd7b899e51fac2e7ab4aa7d933c9950dc5 송나라 교자

https://en.wikipedia.org/wiki/Banknote#/media/File:Yuan_dynasty_banknote_with_its_printing_plate_1287.jpg 원나라 교초와 인판(印版)

 

 

5.

 

16-18세기 수백 년 동안 중국을 은 먹는 하마로 만든 엄청난 수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국에서 은의 용도가 확장된 것을 생각해야겠다. 은은 문명 초기부터 귀금속으로 용도를 가졌고, 화폐로서 용도가 뒤이어 자라났다. 그런데 근세 초기의 중국에서 은은 역사상 드물게 큰 힘을 가진 슈퍼화폐가 되었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달러와도 차원이 다른 엄청난 그 힘은 아직까지 결합되어 있지 않던 여러 문명권을 휩쓸면서 국가권력에게 침해받지 않는 사유재산권의 강화를 뒷받침해주었다.

 

17세기 말 명나라에 온 마테오 리치에게는 사람들이 무기를 갖지 않고 다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민간의 무기 소지 금지는 중화제국의 오랜 전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무기는 국가의 통제 밖에 있었다. 국가가 동전을 발행하며 녹봉과 납품대금을 은 한 량에 700 ()으로 지불해도 시중에서는 1500 , 2000 잎으로 거래되었다. 국가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만 손해였다. 그래서 관리들은 녹봉 외의 부수입을 얻기 위해 부정을 행해야 했고 납품업자들은 뇌물을 써 가며 올려치기를 해야 했다.

 

명나라 후기의 동전은 모두 시중에서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통용되었다. 어쩌다 마음먹고 품질 좋은 동전을 만들어도 동전을 천시하는 풍조에 휩쓸려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구리의 재활용을 위해 가마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가치 보존의 기능은 은이 절대적이었고, 교환 수단의 기능도 은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은 수요가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부의 축적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축적된 은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민간권력이 되었다.

 

중국의 왕조가 멸망할 때 왕조를 배반하고 침략자에게 협력하는 한간(漢奸: 매국노)에게 책임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명나라의 멸망을 놓고도 오삼계(吳三桂)를 비롯한 한간들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오삼계가 청군을 이끌고 북경을 점령한 것은 명나라가 민란으로 멸망한 뒤의 일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진정한 한간은 외부 침략자에게 충성을 옮긴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국가보다 재물에 충성을 바친 수많은 재력가들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의 축적을 통한 경제력의 집중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결과가 걷잡을 수 없는 민란이었다.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2006)는 최신 연구 성과를 적극 수용하기보다 기존 학설을 잘 정리한 보수적성격의 통사다.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논하는 데도 ()유교의 이념적 경직성 때문에 발전의 길을 스스로 등졌다고 하는 해묵은 관점의 소개에 치중하지만,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말미에 붙이기도 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20세기 말의 맥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 전 세계 인류의 생활 모든 측면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명의 전면적 파괴를 늦출 만한 새로운 질서의 원리들이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면 명나라 시대의 중국이 폐쇄적 발전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평화와 복지를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실패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 나름의 성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139-140)

 

-청 교체는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6813()의 난이 진압되고 1683년 타이완(臺灣)의 정()씨 세력이 평정됨으로써 청 왕조의 중국 통치가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1644년 직후 청군에 앞장서서 중국 남부를 평정하고 그곳을 분봉(分封)받았던 오삼계 등 3번이 청 제국의 통합성에 걸림돌로 남아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정씨 세력의 중요성은 간과되기 쉬운데, 경제 측면에 대단히 의미가 큰 존재였다. 바다를 통한 대외관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 글란은 1660~1690년의 30년간 청나라의 디플레이션 현상에 주목한다. 물가의 극심한 하락으로 경제가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그 결정적 원인으로 폰 글란은 중국의 은 수입 감소를 지적한다. 1640년대 이후 종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수분> 232쪽 표23) 3번의 난과 정씨 해양세력을 평정한 뒤 경제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청나라의 안정된 중국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씨 세력의 창업자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복건성 천주(泉州) 출신으로 마카오를 거쳐 일본 히라도(平戶)에서 활동기반을 쌓았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인의 하청을 받아 일하다가 1627년까지 강력한 해적단을 키워 명나라 수군과 네덜란드 세력을 모두 물리치고 남중국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기근 때 해안 주민에게 구휼사업을 벌이고 빈민의 타이완 이주를 도와주는 등 좋은 평판을 누리며 명나라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받기도 했다. 명나라 후기의 해적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지룡은 쇠약해진 명나라와 공생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들어설 때 명 황실 후손 하나를 옹립했다가 청군이 닥치자 큰 저항 없이 항복한 것은 청나라와도 공생 관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장남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은 함께 투항하지 않고 핵심세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정지룡을 후대하면서도 감시 하에 두었다가 1660년대 들어 정성공이 3번과 결탁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굳히자 그를 처형했다(1661).

 

본토 안에서 큰 군대를 일으킨 3번에 비해 주변부에 있던 정씨 세력은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지만, 중화제국 체제에 대한 위협은 더 심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번의 난이 사건의 시간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면 정씨 세력의 성쇠는 문명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번 평정에 따른 영토 통합보다 정씨 세력의 격파로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화폐시장을 통합하여 30년 디플레이션을 극복한 것을 대청제국완성의 더 중요한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baike.baidu.com/pic/%E9%83%91%E8%8A%9D%E9%BE%99/2180310/1/4e4a20a4462309f790520e31ff451bf3d7ca7bcb78f6?fr=lemma&ct=single#aid=0&pic=4bed2e738bd4b31c23ebc07f8ad6277f9f2ff81b 정지룡 초상. 일본에 거점을 두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과 연계하면서 해적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명성이 후세에 아들 정성공만큼 떨치지 못한 것은 명나라 충신이라는 포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청나라에 투항한 진의는 확인할 길이 없다.

https://baike.baidu.com/pic/%E9%83%91%E6%88%90%E5%8A%9F/142/1/d8f9d72a6059252d4b568766379b033b5bb5b90b?fr=lemma&ct=single#aid=0&pic=d4239b355f6f5e5d91ef3924 타이난(臺南)의 정성공 동상. 서양에 “Koxinga"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실이 재미있다. 정씨 세력이 옹립한 융무제(隆武帝)에게 황실의 성을 하사받았다 하여 국성야(國姓爺)“를 자칭했는데 그것을 후젠(福建)지방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 청나라로부터 독립된 세력임을 주장하고 반청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명 왕조와의 관계를 과장해서 선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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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0.03 17:38

    사건의 시간과 문명의 시간 개념의 대비가 아주 멋있습니다!

    정성공에 대해 알기로는 어머니가 일본 사람이었던것 같은데 정지룡을 대표하는 대만파(?)가 일본산 은의 수입 창구가 아니었을까요? 16세기 초 일본 은광의 발견으로 급격히 증가한 은이 대륙으로 유입될 때 유구-대만 세력의 활약이 컷으리라 생각됩니다.

    정지룡이 이 창구를 청에 개방하면서 합법적 사업자로 변모하려는 찰나 아들의 개입으로 무산되면서 동시에 은 공급도 급감하여 디플레가 일어난 요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2021.10.04 23:57 신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일본산 은의 시장이 커지면서 처음에 큰 지분을 가졌던 포르투갈인이(구로후네) 차츰 주변화되고 "왜구"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던 복잡한 양상이 정지룡 세력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었을까, 정지룡-성공 부자는 외경전략과 내경전략으로 서로 호응하면서 청조와의 거래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고 꾀를 부린 것이 아닐까 등등 생각이 떠오르지만, 연구로 확인된 범위는 그리 많지 않군요.

  2. 2021.10.05 11:59

    정지룡은 1604년 복건성 천주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일관. 젊은 시절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니콜라스다. 히라도 번 3대 번주인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가 주최한 연회에서 우연히 다가와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게 되는데 이는 장래가 창창한 정지룡과 인맥을 쌓고 싶었던 다가와가 계획한 만남이었다. 재미있게도 히라도 번주 가문인 마츠우라(松浦)는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에서 수군(해적)으로 활약했던 해상 세력인 마츠우라토(松浦党)의 당주, 즉 해적 출신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거점으로 지목된 삼도(三島) 가운데 한 곳이 마츠우라토의 마츠우라(나머지 두 곳은 쓰시마와 이키 섬)였을 정도. 히라도에는 에도 막부 이전까지 네덜란드 상인들이 교역하는 상관(商館)이 있었고 마츠우라 가문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선포하고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버리면서 쇠락, 지금은 일본의 한적한 어촌 정도로 남았다. - 위키피디아 -

    위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당시 일본 내부에서 지방 세력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중앙집권화가 약화되는걸 막으려는 시도가 엿보입니다. 이를 타개하고자 기존 네덜란드 상관대신 중국채널을 새로 구축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혈연관계로까지 맺어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성공은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인데요, 표면적으로는 유교를 신봉하며 복명을 외치면서도 정작 반청 세력인 이정국의 군사적 요청을 뿌리치거나 말년에 필리핀 정벌 계획을 세우는 등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듯한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육지세력과 동화하려한 정지룡보다 어쩜 더 야망이 큰 오리지널 해상세력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더 큽니다. 이런 관점에서 반청복명 과정에서 남경을 포위한 사건은 한참 후대의 아편전쟁시 북경을 정벌한 사건과 겹쳐보입니다. 아편전쟁시기가 해상세력이 완숙하였다면 정성공 시기는 성장기로서 아직은 그 세력이 육상세력을 필적할 수는 없었겠죠. 이런 관점에서 남경 포위 사건을 단순히 지방 세력의 반란으로 여기기보다 큰 관점에서 해상세력의 1차 대규모 침공으로 카테고리화 하는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1.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은 주변의 타자(他者)와의 대비를 통해 문명인으로서 자긍심을 누렸다. 중국에서 이 타자들을 부른 이름에는 융, , , (, , , ) 등 여러 글자가 있었지만 이 글자들의 훈()이 모두 오랑캐라는 사실은 타자=오랑캐의 관념이 일반적 현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춘추시대까지는 중원(中原) 지역에도 모자이크처럼 오랑캐가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거자오광은 <歷史中國的內與外 역사 속 중국의 안과 밖>(2017)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오랑캐가 뒤섞여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사료를 인용하면서 그 시대의 중국이란 함곡관(函谷關) 동쪽으로 황하 중하류 유역일 뿐이었으며 서북의 융적도 남방의 만이도 포괄하지 않는것이었다고 설명했다. (5-10)

 

https://baike.baidu.com/pic/%E4%B8%AD%E5%8E%9F/1415/0/2cf5e0fe9925bc315c6083a094979ab1cb134954daf8?fr=lemma&ct=single#aid=0&pic=9a504fc2d5628535ee4a9dcb92ef76c6a6ef63b5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나오는 구주(九州)’는 처음에 천하 전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다가 차츰 중화제국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https://baike.baidu.com/pic/%E4%B8%AD%E5%8E%9F/1415/0/2cf5e0fe9925bc315c6083a094979ab1cb134954daf8?fr=lemma&ct=single#aid=0&pic=9e3df8dcd100baa1f03d0b894910b912c8fc2eea 춘추시대 말기의 제후국들을 그린 이 지도에 흰 색은 오랑캐의 영역인데 실제로는 제후국들 사이에 빈틈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화문명이라고 불릴 농경문명이 전국시대에 중원을 채운 뒤로 오랑캐는 외부의 존재가 되었다. -(-)제국 이래 중국인의 의식을 가장 많이 사로잡은 오랑캐는 서방과 북방의 유목민이었다. 중국 동해안 일대의 동이가 제국에 흡수된 뒤 바다 건너 한반도의 동이는 농경을 비롯한 중국문명을 전수받아 중화제국에 종속하는 길로 들어섰고, 백월(百越) 등 남방의 오랑캐는 중화제국에 큰 위협을 가하는 일 없이 꾸준히 정복-흡수되었다.

 

다른 방면의 오랑캐와 달리 서북방 유목민이 오래도록 중화제국의 문젯거리가 된 까닭이 무엇일까?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1) 동쪽과 남쪽으로는 중국의 농경문명이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중화제국에 편입되거나(남쪽) 안정된 조공관계를 맺었다(동쪽). 농경문명의 확장이 불가능한 서쪽과 북쪽의 건조지대는 중화제국에 편입되기 어려웠고, 억지로 편입시켜도 불편이 많았고, 안정된 조공관계를 길게 끌고 갈 만한 농업국가가 들어서지도 못했다.

 

(2) 유목은 꽤 생산성이 높은 (농업보다는 못해도 수렵-채집보다는 우월한) 산업이었고 특이한 생활방식을 통해 강한 전투력과 상당한 조직력을 가진 사회를 키워냈다.

 

(3) 서방의 힌두-페르시아 문명권과 중국 사이의 교역이 자라남에 따라 그 사이의 공간에 대한 지배력이 유목민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1)(2)는 역사상 유목세력의 연구에서 많이 밝혀져 온 사실인데, (3)의 조건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개연성은 분명하다.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실크로드는 많은 각광을 받아 왔는데, 페르시아인과 중국인의 장거리교역보다는 중간 지역 주민들의 중계무역이 실크로드의 실체였다. ()나라 장안(長安)파사인(波斯人)’이 많이 살았다고 하지만 페르시아 중심부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페르시아 주변의 유목민으로 보인다.

 

유목민을 포함한 중간 지역 주민들이 중계무역에 종사한 것은 그로부터 얻는 이득이 충분히 크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교역의 이득만이 아니라 양쪽 문명의 기술적 장점을 함께 섭취할 수 있다는 조건도 유목세력의 강화를 뒷받침해준 일이 많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Silk_Road#/media/File:SeidenstrasseGMT.JPG 19세기 말부터 유럽인이 생각한 실크로드는 중국과 유럽을 이어주는 교통로였다. 그러나 문명권 간의 좁은 통로로서 실크로드는 중국과 페르시아 지역 사이에 한정된다. 페르시아 지역부터 서쪽으로는 육상-해상의 여러 교통로가 얽혀 있어서 하나의 특정 교통로가 부각되지 않는다.

 

방대한 초원제국이 세워져 있을 때 동서간의 교섭이 활발했던 것은 중간세력 수취의 일원화에 따라 통과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몽골제국에서 그런 상황이 나타났으나 교역 규모가 커지는 만큼 그 이득을 향한 경쟁도 격화되었다. 4칸국 분열에도 경쟁 격화의 결과로 이해할 측면이 있는 것인데, 그에 따라 교통로의 효율성이 손상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해로의 이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나라 영락제(永樂帝)가 대함대를 건설한 것은 교역로의 비중이 육로에서 해로로 옮겨지는 추세에 맞춘 것이었다. 경제적 이득보다 제국의 안보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교역의 이득이 큰 곳에 강한 중간세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초원에서 거듭거듭 확인된 일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초 영락제 당시에는 중국이 위협으로 느낄 만한 조짐이 해양 방면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함대 운항을 중단하고 소극적인 조공무역으로 돌아갔다.

 

영락제의 함대가 규모에 걸맞는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사라진 70여 년 후 그 함대가 정말 필요했음직한 상황이 포르투갈인의 인도양 진입으로 펼쳐졌다. 인도양에서 유럽인의 활동이 그 후 꾸준히 늘어나 중국의 해외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을 때, 중국인들은 그들을 새로운 유형의 오랑캐, ‘양이(洋夷-바다오랑캐)’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 제국 이래 1천수백 년 동안 중국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초원의 유목민이었다. 그러나 바다오랑캐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될 때까지 군사적 긴장은 북쪽에 쏠려 있었지만 중화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바꾸는 변화는 남쪽 바다에서 꾸준히 일어났다. 바다오랑캐의 역할이 계속 커져서 수백 년 후에는 그 힘 앞에 중화제국이 무너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2.

 

“이탈리아(意大里亞)는 대서양 가운데 있으며 예부터 중국과 통교가 없었다. 만력(萬曆)간에 그 나라 사람 리마두(利瑪竇)가 경사(京師)에 이르러 <만국전도(萬國全圖)>를 지어 이르기를 ‘천하에 대륙이 다섯 있으니, 첫 번째가 아세아주로 그 속에 무릇 백여 나라가 있고 거기서 첫째가는 것이 중국이요, 두 번째가 구라파주로 그 속에 무릇 칠십여 나라가 있고 그 첫째가는 것이 이탈리아요’ … 모든 구라파 제국은 다 같이 천주 야소(耶蘇)의 교(敎)를 받든다. 야소는 유대(如德亞)에서 태어났으니 그 나라는 아세아주 안에 있는데, 서쪽으로 구라파에 교를 행한 것이다. … 그 나라 사람으로 동쪽에 온 이들은 모두 총명하고 특출한 성취가 있는 선비들이며, 오로지 교를 행하는 데 뜻을 들 뿐, 녹리(祿利)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은 책에는 중화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많은 까닭으로 한 때 별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이를 우러렀으며, 사대부로 서광계, 이지조 같은 무리들이 앞장서 그 설(說)을 좋아하고 또 그 글을 윤색해 주었으므로 그 교가 힘차게 일어날 때 중국 땅에 그 이름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

 

<명사(明史)> 326 “이탈리아열전(意大里亞列傳)”의 이 내용에 담긴 정보는 마테오 리치(1552-1610) 등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럽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유럽이 표시된 세계지도도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중국과 직접 조공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칸국 바깥의 야만 지역으로만 인식되었다. 16세기 중엽까지 포르투갈인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마카오 기지를 허용하면서도 그들이 가져오는 은()의 가치를 인정했을 뿐, 그들의 문명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583년 리치를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들의 중국 내 활동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모습이 중국인들의 눈앞에 새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https://baike.baidu.com/pic/%E5%9D%A4%E8%88%86%E4%B8%87%E5%9B%BD%E5%85%A8%E5%9B%BE/4311044/1/78310a55b319ebc491988f728826cffc1f17167c?fr=lemma&ct=single#aid=1&pic=78310a55b319ebc491988f728826cffc1f17167c 마테오 리치가 1602년에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리치 등 선교사들은 중국 진입 초기부터 선교 사업의 성공을 위해 유럽의 문명 수준을 중국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 아래 유럽의 자랑할 만한 면모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의 중국어 저술을 1629년 이지조(李之藻, 1565-1630)가 모아 편찬한 <천학초함(天學初函)>에서 그 노력 방향을 알아볼 수 있다. 이편(理編)과 기편(器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편은 기독교 교리를 소개한 것이고 기편은 종교 이외의 유럽 문화와 학술을 소개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Matteo_Ricci#/media/File:Matteo_Ricci_2.jpg 유사(儒士) 복장으로 흔히 그려지는 마테오 리치 초상에 성모자상(聖母子像)과 함께 천문의기와 하프시코드가 곁들여져 있어서 그의 매력의 포인트를 보여준다.

 

이지조 같은 명나라 최고급 지식인-관료 중에 유럽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선교사들의 저술과 출판을 적극 지원한 사람들이 있어서 서학(西學)’의 흐름을 일으켰다. 그중에 최고위 관직에서 활동한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선교사들을 동원한 역법(曆法) 개정 사업을 벌여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했고(1629-1634), 이것이 청나라에서 채용한 시헌력(時憲曆)의 토대가 되었다.

 

역법은 황제의 통제력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에까지 미친다는 이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중화제국의 가장 핵심적 제도의 하나다. 그런 중요한 제도에 유럽 수학과 천문학이 활용되었다는 것은 유럽문명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보장해주는 일이었다. 중화제국의 역사를 통해 외부 문명의 도움으로 역법의 발전을 본 일은 그 전에 두 차례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인도문명의 도움을 받은 일과 원()나라 때 이슬람문명의 도움을 받은 일이다. 이제 인도문명과 이슬람문명의 뒤를 이어 유럽문명이 중국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몽골세력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쓸던 13세기에 유럽은 중국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에 비해 산업, 학술, 예술,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미개한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말에는 여러 면에서 격차가 크게 줄어들고, 어떤 부문에서는 앞선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과학혁명이 시작된 그 사이의 기간에 유럽문명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유럽문명의 탄생 과정을 해명한다는 것은 내게 벅찬 과제다. 17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명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문명권에 비해 짧은 기간에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이 문명이 어떤 특성을 보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정도에 그쳐야 하겠다.

 

17세기 이후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권에 갈수록 큰 영향을 끼치면서 근대문명의 주역이 되었다. 이 근대문명 속에서 전개된 근대역사학은 유럽의 주도적 역할을 인류문명의 역사 전체에 투영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사관이다. 이 관점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 오랑캐의 역사작업 후반부의 중요한 목적이다.

 

 

3.

 

학생 시절 읽은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 서양의 흥기>(1963)를 다시 읽으면서 예전보다 읽기가 쉬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50년 전에는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너무 많아서 순순히 읽히지가 않았다. 그때는 유럽중심주의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려다보게 되었기 때문에 읽기가 쉬워진 것 같다.

 

유럽중심주의 사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책이다. 1963, 서양의 동양에 대한 우위에 대한 의심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던 시절, 역사의 추동력도 서양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믿음이 세상을 휩쓸던 시절에 나온 책이다.

 

https://www.amazon.com/Rise-West-History-Human-Community/dp/B0006AYML2/ref=sr_1_2?dchild=1&keywords=The+Rise+of+the+West&qid=1627188568&s=books&sr=1-2 1963년에 나온 <서양의 흥기-인류공동체의 역사>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관을 충실하게 담은 책이다.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그 아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역사서라기보다 신자유주의 노선의 선전물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의 1991년 개정판 앞머리에 “25년 후에 되돌아보는 <서양의 흥기>”라는 저자의 글이 붙어 있다. 이 글에서 맥닐은 책을 쓸 당시의 세계정세에 자신의 관점이 좌우된 면이 적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스스로 지적했다. 그중 하나가 11-15세기 중국문명의 우월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서양의 흥기>를 구성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1000년에서 1500년 사이 중국의 우월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특히 후회된다. 그렇게 했으면 책의 구조가 우아한 단순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단순한 구조로 과거를 구성하는 방식을 이어나가 1000-1500년은 중국의 동아시아가, 그리고 1500-2000년은 유럽의 서양이 문명을 꽃피워 전면적 주도권을 가졌던 시대로 설정했다면 사실과도 부합하는 깔끔하고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내 식견의 부족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의 찌꺼기) 때문이었다.” (xix쪽)

 

원래의 책에는 보이지 않던 유럽중심주의라는 말이 괄호 안에라도 나오게 된 것은 그 동안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시점에서도 맥닐이 유럽중심주의를 정말 깊이 반성한 것 같지는 않다.

 

공정성의 의미가 지금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채점만 엄정하게 하면 공정성이 담보된다고 하는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더 앞서는 문제가 출제 내용에 있다. 직원이나 학생을 뽑으면서 직원 노릇, 학생 노릇을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 아닌, 특정 범위의 지원자에게 유리한 조건만 따진다면 공정한 선발이 될 수 없다.

 

역사의 평가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가치관에 있다. 과거의 어느 사회나 국가가 걸었던 길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치관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 그 가치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음미할 수 있다. 오늘날의 특정한 가치관을 통해서만 역사를 바라본다면 동어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제목에서부터 맥닐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서양의 흥기과정으로 보았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주도권이 잠깐 지나가는 경유지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 역사의 목적지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근대세계의 가치관이 언제 어디서나 유효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맥닐의 1991년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1500년 이후) 유럽에서 도시국가들의 주권을 빼앗은 몇몇 왕국과 새로 나타난 민족국가들은 상인과 은행가들에게 시장 활동의 확장을 위한 길을 제한 없이 풀어주었다. 반면 중국과 대부분 이슬람세계에서는 민간의 자본 축적을 싫어하는 정치체제가 자리 잡았다.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한편으로 선한 정치의 이름 아래 몰수 성격의 세금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소비자 보호의 이름 아래 자의적 가격통제를 통해 대규모 기업 활동의 발생을 가로막았다.”(xxviii쪽)

 

민간의 기업 활동 확장과 자본 축적 확대가 인간사회에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은 1991년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1000-1500년 기간의 중국을 이런 기준에서 과소평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채점의 오류만을 인정한 것이다. 자본 축적의 지나친 확대가 체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나 기업 활동의 지나친 확장이 자원과 환경에 일으키는 위험에 대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본주의 가치관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가치관은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환경론자 바츨라프 스밀은 인간에게 주어진 생활공간이 지구 하나뿐이라며 우주 개발에 나서자는 일론 머스크를 야유한다. 인간의 세계를 지구에 한정된 것으로 보느냐 여부에 따라 두 사람의 가치관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16세기 유럽인은 머스크처럼 무한한확장 공간을 바라본 반면 같은 시기 중국인은 스밀처럼 닫힌 천하를 잘 관리하는 데 정치의 목적을 두었다. 유럽인이 잘하고 중국인이 잘못했다는 맥닐의 재단에 1963년에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1991년까지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21년 지금 시점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세계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맥닐의 1963년 관점을 오늘날의 일반적 관점을 기준으로 무조건 부정할 것은 아니다. 세상을 닫힌 것으로 보는 세계관도 열린 것으로 보는 세계관도 각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다만 1963년에는 사람들의 관점이 열린 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었고 그 사이에 균형이 꽤 되돌아온 것이다. 맥닐의 책은 한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 관점을 충실히 담은 것으로서 참고의 가치가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일반 독자들의 이용에 맞지 않게 된 재고식품과 같은 것이다. 그에 비해 21세기 들어서까지 신자유주의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같은 논점을 계속 우려낸 논설들은 아예 불량식품이다. 니얼 퍼거슨의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2011)이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의 번역본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에 대한 서평을 2011826일자 <프레시안>에 올린 일이 있다.)

 

 

4.

 

명나라에서 외부세력의 위협을 북로남왜(北虜南倭)’라는 말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가정제(1522-1566) 때의 일이다. 북쪽 오랑캐는 흉노 이전부터 중화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어 온 존재다. 반면 남쪽 오랑캐는 기껏해야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역사시대를 통해 남쪽 오랑캐는 중화의 정복 대상이었고 어쩌다 일으키는 저항도 변경의 소요에 불과했다.

 

그런데 명나라 중엽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와 나란히 지목될 만큼 부각된 남쪽 오랑캐는 바다 너머 있는 존재였다. , 즉 일본이 대표선수로 나섰지만 그 배후에는 해상활동의 전반적 변화가 있었다. 명나라의 해외교역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을 조공무역의 틀에 묶으려는 시도는 정화의 항해와 함께 끝났다. 강남 지역의 지방 세력이 참여하는 사()무역이 번성하면서 중국 내외의 세력구조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가장 먼저 첨예하게 나타난 곳이 일본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사를 공부한 내게는 일본의 위상을 낮춰보는 습성이 있다. 한국에 비해 중국문명 도입에 불리한 입장에 있던 일본이 임진왜란(1592-1598)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킨 것은 유목세력이 종종 중국을 침공한 것과 같이 문명의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공부가 넓혀지는 데 따라 상황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16세기 일본이 넓고 깊은 변화를 겪은 끝에 참으로 큰 힘을 키우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의 발전을 가로막아 온 최대의 약점, 다른 지역과의 교섭이 어렵다는 고립성의 문제가 13세기 이후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에 따라 완화되어 오지 않았는가?

 

중세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이 늘어나면서도 깊이 살펴볼 겨를이 없던 차에 재미있는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노엘 페린의 <Giving Up the Gun 총 버리기>(1979). 총을 버린다는 것은 군인이든 무장 강도든 항복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가 총질에 한 번 맛을 들인 뒤에, 더 쎈 무기로 대치되는 것도 아닌데 총의 사용을 없앤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17-19세기 도쿠가와(德川)시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문 60쪽밖에 안 되는 짧은 책에서 페린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

 

임진왜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조총(鳥銃)’이 어쩌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 정도로 생각했던 데부터 문제가 있었다. 1543년 규슈(九州)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들어온 포르투갈인에게 처음 얻은 화승총(火繩銃, arquebus)다네가시마란 이름으로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적-전술적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뤄 50년 후에는 유럽인보다 더 유용하게 총기를 구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페린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가츠요리 사이의 나가시노(長篠) 전투를 페린은 예시한다. 38천 명 오다 군 중 1만 명이 총을 갖고 있었고, 그중 정예 3천 명을 다키 강 한쪽에 3열로 배치해 강을 건너오는 적군 기마대를 저격한 것이 결정적 승인이었다고 설명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agashino#/media/File:Battle_of_Nagashino.jpg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병풍. 가운데 강가로 철포대(鐵砲隊)의 배치가 보인다.

https://en.wikipedia.org/wiki/Tanegashima_(gun)#/media/File:Strings_for_night_firing.jpg 철포대의 모습. 야간사격에서 총신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띠와 총신 사이에 끈을 매어 놓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Tanegashima_(gun)#/media/File:Choshu_tanegashima.JPG 도쿠가와 시대 철포의 격발장치

 

도입한 지 50년 만에 유럽인보다 더 총기를 잘 쓰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제련 기술과 장인(匠人) 정신 두 가지가 지목된다. 이 두 가지가 당시 일본의 도검(刀劍) 제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역사상 최고의 도검 명장(名匠) 중 하나로 꼽히는 한케이가 원래 총포 장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한 것이 흥미롭다.(62-63) 철판을 두드려 펴서 접기를 수십 차례 거듭해서 강인하고 예리한 칼날을 만드는 제련 기술이 총포 제작에도 활용되었다면 유럽보다 튼튼한 총신(銃身)을 만들 수 있었을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Japanese_sword#/media/File:Japanese_sword_sharpener_at_work_1909.jpg 1909년의 사진에 담긴 일본도 다듬는 모습

 

제련 기술이나 장인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배경조건이 필요하다. 다수의 장인들이 품질 향상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안정된 사회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 조건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나는 세밀히 살피지 못했지만, 13세기 후반 몽골 침공을 계기로 급속한 발전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15세기 후반 센고쿠(戰國)시대에 접어든 것도 경제성장의 여파로 이해한다.

 

중국의 전국시대와 일본의 센고쿠시대 사이에는 1천수백 년의 시차가 있지만 공통된 특징이 적지 않았다. 양쪽 다 경제성장에 따라 군대와 전쟁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된 결과였고, 정치사상과 제반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국시대를 통해 중화제국이 빚어져 나온 것처럼 센고쿠시대는 도쿠가와 막부(幕府)체제로 귀결되었다.

 

16세기 센고쿠시대의 일본은 또한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나타날 여러 현상의 특징을 앞서서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바다오랑캐의 면모를 유럽세력보다 먼저 맛볼 수 있던 대상이었다. 16세기 북로남왜남왜는 해상세력을 대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독일인 의사이자 박물학자인 엥겔베르트 켐퍼(Engelbert Kaempfer, 1651-1716)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파견으로 1690년부터 2년간 나가사키에 체류했고, 그 사후에 출간된 <일본사>는 일본의 개항 때까지 서양에서 일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참고서였다. 페릴의 책에 <일본사>의 마지막 문단이 인용되어 있다.(77)

 

“통일되어 있고 평화로운 이 나라, 신들을 공경하고, 법치에 순종하고, 윗사람들을 받들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끼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공손하고 친절하며 덕성을 지니고 누구보다 뛰어난 기술과 생산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 훌륭한 나라는 서로간의 통상과 교역을 통해 풍요를 누린다. 이 용감한 사람들은 모든 필수품이 풍성하게 주어진 속에서 평화와 안정의 모든 혜택을 누린다. 이러한 번영 속에서 그들은 종래의 방종한 생활태도를 돌아보든 아득한 과거를 살펴보든 그 나라가 어느 때보다 좋은 상황에 처해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Engelbert_Kaempfer#/media/File:Engelbert_Kaempfer_cartouche.jpg 1730년에 그려진 켐퍼의 이 초상은 상상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이 보통 생각하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나라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국인의 일본 인식이 임진왜란과 식민지 경험에 쏠려 있어서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또 켐퍼에게는 자기 고향과 비교해서 일본의 평화로움이 두드러지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켐퍼보다 약 백 년 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받은 인상과 비교해 본다.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전쟁에 출동하는 길이나 훈련에 나가는 경우만 예외다. 그리고 적은 수의 고급관원들은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릴 수 있다. 그들(중국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 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M. Ricci, L Gallagher (tr.), <China in the Sixteen Century: The Journal of Mattew Riccl>(1953), 58-59쪽)

 

https://en.wikipedia.org/wiki/Matteo_Ricci#/media/File:Ricciportrait.jpg 유사(儒士) 모습으로 그려진 마테오 리치 초상

 

16세기 말의 중국이나 17세기 말의 일본을 면밀히 관찰한 유럽인에게 가장 놀라운 현상이 질서였던 모양이다. 질서 수준의 차이는 세계를 열린 것으로 보느냐 닫힌 것으로 보느냐 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전국시대를 마감하면서 닫힌 천하가 표준적 세계관이 되었다. 천하의 중심부를 중화제국으로 운영하면서 주변의 오랑캐들이 천하 질서를 교란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 정치사상의 뼈대가 되었다.

 

일본 역시 센고쿠시대를 마감할 때 그 동안 섭취한 유가사상에 입각한 ()천하를 막부(幕府)체제로 안정시킨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초기부터 총기 제작을 엄격히 통제해 결국 사라지도록 만든 것은 이 소천하 내의 질서를 위해서였다. 인간사회에 갈등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칼질까지는 완전히 막지 못하더라도, 충동적으로, 또는 보이지 않게 타인을 상해하는 수단은 억제한 것이다.

 

가까이 있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닫힌 세계관을 갖고 이웃을 지나치게 넘보지 않는 경향이었기 때문에 이 소천하의 격절성은 꽤 오랫동안 지켜질 수 있었다. 2백여 년이 지난 후 일본의 소천하는 중국의 대천하와 나란히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서양세력에 의해 깨어졌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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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23 23:33

    유목민족이 실크로드의 중계자 역할을 하며 실력을 키워오다 대륙 자체를 장악했듯이 일본도 해상 실크로드의 중간자 역할을 통해 비슷한 전처를 밟았군요.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한편으로 선한 정치의 이름 아래 몰수 성격의 세금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소비자 보호의 이름 아래 자의적 가격통제를 통해 대규모 기업 활동의 발생을 가로막았다.'
    현재 중국 정부의 기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의 배경이 맑시즘인줄 알았는데 나름 역사적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세계관의 차이가 실제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질지 흥미롭게 지켜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