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부강한 나라들을 따라잡으려는 야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강의에서는 근대화의 의미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서양의 계몽주의에서 나온 근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뒤덮은 서양 제국들로 확장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좋든 싫든 새로운 개념의 정치와 금융과 법률 안에 살아오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근대화“를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협식민지에서 서양으로 공부하러 간 사람들은 자기네가 행운아라고 배웠다. 그들은 진보와 발전의 이념을 가지고 인생의 유리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일본인들이 혁명가로 여기던 쑨원의 반청(反淸)운동에 관해 배우면서 중국의 근대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혁명“은 중국의 전통적 ”천명“ 개념을 근대적으로 응용한 말이다. 혁명가로서 쑨원은 왕조국가를 중화민국으로 바꾸려고 한 사람이다. 학생들이 나선 5-4운동은 한 발짝 더 나갔고, 뒤이어 공산당이 건립되고 쑨원의 ”3민주의“가 나왔다. 나는 1947-48년 난징에서 대학 신입생으로 3민주의를 배웠으나 그것을 가르칠 일은 없었다.
말라야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나는 중국의 상황을 잘 알 수 없었다. 19세기 해외 중국인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쑨원의 혁명 제창에 호응한 이유를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 알게 된 것은 페낭, 싱가포르, 바타비아, 방콕 같은 곳의 중국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근대화되어 있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중국 개항장의 조계구역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남중국해를 방문하는 청나라 관료들에게 근대적 통상과 행정에 대한 이해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쑨원 같은 반도(叛徒)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서양 기술의 습득과 근대적 학교의 설립 같은 일에서는 쑨원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아시아의 변화를 이끈 주체들에게도 관심이 끌렸다. 일본은 제일 먼저 서양을 바라보며 칙령을 통해 근대화를 수행한 나라였다. 인도의 엘리트계층은 영국의 근대성을 받아들였다. 오스만제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몇 개 아랍계와 투르크계 국가로 쪼개졌다. 오직 중국만이 근대화를 향해 혁명의 길을 걸었다. 한 번만이 아니었다. 1912년의 혁명도 힘들었는데, 37년 후인 1949년에 다시 겪었다. 그래서 의문이 떠올랐다. 첫 번째 혁명의 정치적 자유주의 ”근대성“이 중국의 연속성을 위협한 데 비해 두 번째 혁명의 ”인민 중심주의“가 중국인이 받아들이기에 쉬웠던 것은 아닐까?
현재와 과거의 연결점 사이에는 뜻밖의 것도 있었다. 쑨원의 싱가포르 방문을 살펴보다가 국민당 중국으로, 정치적 혁명에서 문화적 혁명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양 중국인을 살펴보다가 두 차례 세계대전과 1945년 이후 유엔 체제로 모든 나라가 국가 건설에 나서는 상황을 생각하게 되었다. 말라야의 국가사라는 과제 앞에서 전근대 중국사 연구라는 내 작업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과거의 복잡성으로는 현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래에 나타날 패턴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개별적 관계의 범위라는 것이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중국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천명을 바꾸는 혁명의 개념과 연결했다. 여러 국제학회에 다니면서 알고 싶은 마음이 깊어진 것은 왜 한 차례 혁명으로 부족했을까 하는 문제였다. 중국 해안 지역의 산업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 마오쩌둥의 마지막 꿈에서 문화란 어떤 것이었나? 몇 년 어디 가서 그런 질문들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거릿에게도 그런 생각을 이야기했지만, 아무 행동도 취하지는 않고 있었다. 우리는 말라야를 우리 집으로 삼았고 아이들은 다니는 학교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 집도 지어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왜 오스트레일리아로? Why Australia
1967년, 난데없이 초빙이 들어왔다. 연구 환경이 좋은 대학에 와서 전근대 연구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현대중국 연구팀을 이끌어달라는 두 번째 초청이 왔다. 그리고 또 들어온 세 번째 초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걸친 내 관심에 맞출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조건이었다. 셋 다 현대중국 관계 최신 자료를 잘 갖춘 기관들이었다.
몇 주일 동안 가족들과 의논한 후 마거릿은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ANU)의 극동사 교수직 수락에 찬성했다. 캔버라에서 3년쯤 지내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황에 대한 내 지식의 공백을 채울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장기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갔다가 돌아올 때는 길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나는 태어난 자바에서든 자라난 말라야에서든 북쪽만 바라보며 살았다. 열여덟 살에 난징에서 말라야로 돌아올 때까지 그랬다. 그 후에도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었다. 일체의 중국 출판물에 대한 규제 때문에 직접 연구를 못하는 상황에서도 관심은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중국의 유산을 파괴하러 나서는 참에 진행 중인 상황을 모르는 채로 있던 나로서는 몇 해 ANU에 가 지내면서 연구를 따라잡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었다. 그런데 북쪽을 바라보기 위해 더 남쪽의 다른 대륙으로 간다는 것이 기묘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마거릿도 나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낯선 곳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부터 말라야대학 쿠알라룸푸르(KL) 캠퍼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새로 초빙하는 교수진 중에도 있었고, 연방 장학금으로 유학 오는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의 새 연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논문집을 편집하고 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고등판무관 톰 크리칠리(Thomas Critchley, 1916–2009)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연방의 건설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우리 정치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책 작업을 하면서 사라왁에 갔을 때 앨러스테어 모리슨을 만난 일이 있었다. 조지 모리슨(George Ernest Morrison, 1862–1920),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중국 역사에 최초의 흔적을 남긴 인물의 아들이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베이징 상황을 취재하러 런던타임스에서 파견한 조지 모리슨은 후에 공화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었다. 앨러스테어는 후에 캔버라에 함께 있으면서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1962년 사라왁에서는 그를 통해 헤다를 만났다. 헤다가 찍은 1930년대 중국의 사진들은 그 시기를 보여주는 최고의 시각자료였다. [Hedwig Marie "Hedda" Morrison (née Hammer; 1908–1991)은 1933-1946년 기간 중국에서 지내며(독일인이라서 일본 점령기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중요한 작품을 많이 남긴 사진작가. 1946년 앨러스테어와 결혼한 후 20년간 사라왁에 살면서도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중국으로 이어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커넥션이 그런 식으로 내게는 잘 통했다.
크리칠리의 쿠알라룸푸르 주재 대리인 빌 모리슨도 알고보니 조지 모리슨의 먼 친척이었다. 1965년 내가 첫 아시아 방문교수의 하나로 ANU에 갈 때 빌이 캔버라의 외무 관계 동료들을 소개해준 덕분에 캔버라의 관계(官界)로 길이 잘 열렸다. 빌은 외무직에 사표를 내고 다음 총선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다. 노동당 새 당수 고우 휘틀럼의 KL 방문 때 만나도록 빌이 불러주어서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중앙정치 가까이 들어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방문교수로 가기 전에 그 나라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는데, 그중 세 권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매닝 클라크의 <오스트레일리아 역사> 첫 권, 러셀 워드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 그리고 도널드 혼의 <운 좋은 나라>였다. 클라크의 책으로 그 나라의 기원에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워드의 책은 초기 이주민들이 ”따라지(down under)“ 인생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나라의 모습을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한 줌의 운 좋은 ”하류“ 인간들이었다고 하는 혼의 주장은 센세이셔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대영제국의 압축시간(time warp)을 벗어나지 못한 심심한 것이라는 인상을 이 책들에서 받았다.
미리 맛본 오스트레일리아 Preview of attractions
방문교수 기회 덕분에 1965년에 두 달 동안 마거릿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냈다. 그 체류 동안 그 나라의 3개 주, 뉴사우스웨일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비토리아를 다녔다. 애들레이드, 멜버른과 시드니를 거쳐 캔버라로 돌아오는 2천 마일을 운전했는데 그 큰 나라의 작은 모퉁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그 나라의 역사에 관해 아는 것도 피상적인 것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했다.
방문 기간을 짐 데이비슨의 태평양사학과에서 지냈는데, 말라야대학의 은사 존 배스틴 교수가 초대 동남아시아사 주임을 지낸 곳이다. 이제 그곳에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하는 박사과정생이 몇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는 중국사 연구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말레이시아 출신인 내게는 그 학과가 합당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제이미 매키(James Austin Copland Mackie, 1924–2011), 존 레그(John Legge) 같은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의 초대를 받았다. 시드니에서 그곳 동양학과의 버티 데이비스(Bertie Davis)를 방문할 때 그와 그 동료들이 중국학을 표방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중국학 궤도 밖에 있는 말레이시아 역사학자로 맞이했다. 나는 데이비스를 만나 기뻤으나 내 일차적 의무는 ANU가 동남아시아사 연구 개발에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인지 데이비슨에게 보고하는 데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기쁜 마음으로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여행 중 오스트레일리아 주재 타이완 대사가 첸즈마이(陳之邁, 1908-1978)라는 사실을 알고 ANU의 동료 왕링에게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광둥성의 명문가 출신인 첸즈마이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새 중화민족 건설에 일생을 바친 첫 세대 사회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공유하는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대사 로베르트 반 굴릭이었다.
나는 첸즈마이에게 반 굴릭이 KL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부임하러 도착할 때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접하러 나온 관리들을 그냥 지나치고 활주로를 가로질러 조그만 중국인 그룹에게 달려갔다는 것이다. 중국 유금(柳琴)협회 회장으로서 그를 환영하는 그룹이었다. 반 굴릭은 그 환영이 다른 어디서 받은 것보다 더 흐뭇한 환영이었다고 말했었다.
반 굴릭이 말라야대학에 와서 강연할 때 중국 고금의 음악가와 화가들에 관한 일화들로 우리 학생들을 매료시킨 이야기도 해주었다. 자기 집의 ”스튜디오“에 나를 초대한 일도 있다. 전통적 학인의 서재를 본뜬 것이었다. 적인걸(Judge Dee) 소설을 쓰고 붓글씨를 쓴 곳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중국인 아내의 조부모님 초상이었는데, 그 앞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절을 시킨다고 했다. [Robert Hans van Gulik(1910-1967)은 네덜란드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였는데, 예술 분야의 특이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 업적 중에는 당나라 관리 적인걸(狄仁傑)을 소재로 한 18세기 소설 <적공안(狄公案)>의 번역도 있고 그 방식으로 자기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서예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van_Gulik#/media/File:%E9%AB%98%E7%BE%85%E4%BD%A9%E5%92%8C%E6%B0%B4%E4%B8%96%E8%8A%B3.jpg 반 굴릭의 결혼 사진(1943년 충칭에서).
첸 대사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중국 문화사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몇 해 전 ANU에서 ”중국 산수화의 황금시대“를 주제로 조지 모리슨 기념강연을 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 전에 주 필리핀 대사로 있으면서 지역 상황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내 동료였던 마이클 설리번에 관해 묻는 것을 보면 관찰력이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설리번은 말라야대학에 미술사 강의를 도입했고, 대학의 수장품 확장에 공헌했다. 첸 대사는 중국 산수화의 초기 역사에 관한 설리번의 책을 아주 잘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학식을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보여주면서 국제관계의 문화적 측면에 내 주의력을 키워주었다. 나중에 캔버라에서 지낼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교활동에 나타날 그런 측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갈 때는 그 나라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식민활동의 산물로서 광대한 해양세계를 포괄하는 제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일본이 서양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려 할 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일본의 정복을 막아줄 나라가 미국뿐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영국과 유럽의 문화적 유대를 지킨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리가 갔을 때 아시아-태평양 세계에 편안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늘 영국 편에서 싸우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순응할 태세인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제 중견세력으로 일어설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말레이시아 둘 다 영-미 질서체제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영연방과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은 태평양전쟁 때부터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는 관계였다. 캔버라 체류의 마지막 날인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분리 뉴스를 들으며 느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말레이시아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도 대경실색했다. 두 나라 관계가 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과연 동남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나라인가 여부에 전보다 조심스러운 입장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관한 내 지식은 어설펐다. 제임스 쿡의 이야기나 원주민 부족과 영국 유배죄수 사이의 관계는 대영제국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백호(白濠)주의가 입에 많이 올랐으나 그것은 정식 폐기의 단계에 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영령 말라야에서 싸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말레이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는 5개국 방위협정을 통해 안보상의 이해관계를 함께하고 있다.
[5개국 방위협정(Five Power Defence Arrangements)은 1971년 영연방 소속의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영국 5개국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에 대한 외부 방어 협력 체제를 위해 설립한 다자 안보 협정.]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학자 및 관료들과 많이 어울리는 말레이시아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방문교수로 다녀온 3년 후 ANU의 태평양학연구원 존 크로퍼드(John Crawford) 원장으로부터 패트릭 피처럴드의 뒤를 이어 극동사 주임을 맡아달라는 초빙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로퍼드는 내가 동남아시아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대 중국에 관한 연구를 원했고, 학과에도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ANU에 도착했을 때는 크로퍼드가 총장이 되어 있었고, 그 후임자 오스카 스페이트(Oscar Spate)가 연구원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다. 스페이트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리의 권위 있는 연구로 잘 알려진 사람인데 버마에서도 일한 적이 있고, DGE 홀의 동남아시아사 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났을 때는 스페인의 호수로서 태평양의 역사를 여러 권 책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도와 남태평양 사이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내게도 동남아시아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열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북(近北) 지역이며 두 개 대양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아시아-태평양의 큰 틀 안에서 보는 시각의 좋은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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