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서 검단으로 이사한 후에도 치과 신세질 일 있으면 파주의 김 군을 찾아갔다. 그런데 한두 해 지나다 보니 너무 멀어 동네를 수소문해 미추*치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좀 고지식한 인상의 의사 선생이다.

 

몇 달 전 이빨 하나가 깨어져 찾아가니 살펴본 다음, 옆의 이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으니 뽑아버리고 두 대를 함께 임플란트 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견적의 절반을 선불한 다음 뿌리를 심었다. 그런데 예정했던 대로 한 달 전에 가 보니 뿌리 하나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뽑아 버리고 형편을 다시 보자 해서 보름 후에 가 보니 그 자리에 뿌리 심기는 어렵겠다며, 하나만 심은 대로 임플란트를 하고 하나는 걸치는 방법으로 (브리징?)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수가를 조정해야겠다 하고 "30만 원만 더 내시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해가 생겼다. 절반 남은 수가에 30만 원을 더 내라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이 엇갈리는 것을 너무 서둘러 따지기보다 천천히 생각해 볼 마음으로 아무 반응 없이 지나쳤다.

 

돌아와 생각하니 아무래도 소화가 안 됐다. 계획했던 시술이 부분적으로 실패해서 일이 커졌다면 그 책임을 전부 소비자가 져야 하나? 거듭거듭 생각한 끝에 그런 조건으로는 시술을 더 받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오늘 가서는 시술대에 앉지 않고 말했다. "먼저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주장을 듣던 의사 선생, 어느 대목에서 깨달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오해가 있었군요." 임플란트 가격은 한 대만 내면 되니 선불로 이미 해결된 셈이고, 또 한 대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비용이 30만 원이니 그것만 더 내시면 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아!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를 헤아렸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생각난다. 왜 나는 충분한 근거도 없이 나쁜 쪽으로 오해했을까? 다음 주 시술받으러 갈 때는 과일박스라도 하나 가져가야겠다. 오해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과 내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반성할 기회를 만들어준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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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Attaining Progress And Continuity / 진보와 연속성의 두 마리 토끼

 

세 번째 불균형은 중국이 지배 담론 속에서 당당한 자리를 찾고자 하는 희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명확히 설명하기 힘든 문제인데, 중국인이 원하는 진보와 연속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것을 나는 제안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11년 혁명 전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이 결합을 추구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동양의 선진성을 오랫동안 대표해 온 중국문명이 서양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새 생명을 얻기 바랐습니다. 중국의 학인들이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 나타나는 창조성에 탄복한 하나의 층위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층위에서는 서양의 과학적 성취와 유럽의 부강을 가져온 역동성에 대한 더 깊은 찬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유럽인의 여러 관점, 특히 통치와 정치 참여의 영역에 대한 관점들은 소화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1920년대 5-4운동 때부터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는 서양으로부터 어떤 것을 꼭 배워야 하고 자기네 전통 중 어떤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할지를 두고 심각한 의견 차이가 일어났습니다.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지는 사안을 놓고도 무엇이 더 급하고 무엇이 덜 급한지 생각이 갈렸습니다. 민국시대(1911-1949)를 통해 여러 정치단체와 새 세대 지식인들 사이에 공개적 토론이 진행되었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은 참혹한 내전의 혼란 속에서 먹고살기 바빴습니다. 중대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인데, 어느 단체나 조직도 길을 열어갈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새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완전한 몰락을 피하기 위해 근대화가 꼭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문화 쇄신의 과정에서 중국 자체의 전통을 어디까지 남겨둘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그래서 중국문명의 전통적 핵심 가치를 근대화하느냐, 아니면 서양에서 문명의 판별 기준으로 삼는 중심 명제들을 채용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로 좁혀졌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서양을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아 인기있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다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서양화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나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1920년대 중엽까지 대다수 사람에게 매력적이고 납득할 만한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산업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향하는 민족주의 노선이었습니다. 사업가 계층, 특히 연안 지역과 큰 강 유역에서 활발하던 서양인의 기업에 밀착된 사람들이 이 노선을 지지했습니다. 서양 정치계에서 유행하던 민주주의도 이 사람들은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중국공산당원들은 계급사회를 지향하는 이 노선에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중국을 분열시켜 멸망의 문턱에 끌고 온 제국주의와 똑같은 것을 자본주의가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다가는 중국의 농업경제가 참혹한 피해를 입을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사회주의 좌파가 표방하는 국제주의에 따라 반-자본주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쪽 다 말로는 중국의 전통적 권력투쟁 양상을 내세웠지만, 지도적 인물들은 서양 모델에 믿음을 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쪽을 자본주의 방식에 입각한 유럽중심주의-A, 사회주의 방식에 입각한 그 반대쪽을 유럽중심주의-B형으로 부르겠습니다.

 

이로부터 비롯된 내전은 격렬한 양상을 보였고, 일본과의 전쟁(1937-1945) 동안에도 대립이 계속되었습니다. 중국 인민에게는 평화롭고 현실성 있는 균형이 가능했으면 좋았겠으나 이 대립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본 패퇴 후 4년 만에 국민당이 격퇴되고 중국은 유럽중심주의-B형의 사회주의 깃발 아래 재통일되었습니다. 인민이 좋아하든 말든 러시아혁명 후의 동유럽 소비에트 방식 국제주의 모델을 향한 길이 열렸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 국제주의는 하나의 환상이었고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식 소비에트주의의 대안으로 대약진운동을 제창했습니다. 그 결과 당내 투쟁이 벌어지고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에는 서로 모순되는 강령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급진적 변혁을 제창하면서 전통적 평등주의 구호를 외치는 식이었습니다. 그 결과 경제가 파탄에 직면했습니다.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마오쩌둥의 실험을 굳이 설명하자면, 진보주의와 전통적 가치를 결합하려는 시도의 실패였습니다.

 

실패의 가르침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은 후 덩샤오핑은 공산당을 해방 직후에 세웠던 원래의 경제발전계획으로 되끌고 갔습니다. 중국을 세계시장경제에 접속시키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덩은 세계를 놀라게 한 수십 년간의 고속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그 다음은? 경제개혁이 인민의 환영과 지지를 받던 바로 그 시점에 중국 지도자들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명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재균형을 향한 또 하나의 명제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진보적 사회주의에 중국문화 중 사회주의 목표에 적합한 요소들을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세우는 특색을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아도, 중국 정치 전통의 핵심 가치를 재확인하는 노력이었습니다. 중국의 특색을 빚어 온 역사에 접속하면서 이제 사회주의는 남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변화를 사회주의적 진보의 성과로 이해한다면, 중국은 유럽중심주의 편향성에 굴복하지 않고도 세계사의 진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 특색은 미래의 변화과정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현대사의 가장 특출한 변화 중 하나의 주체로 중국이 세계인의 눈에 비쳐지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문천

 

Maritime Orientation / 바다를 향한 시선

 

청나라 지배자들은 바닷길로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흥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머나먼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학술이 우월하고 새로운 세력에 쉽게 응대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그들은 지켰습니다.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였고 중국의 역사를 통해 바다 쪽에서 중대한 위협을 겪은 일이 없었습니다. 19세기 동안 중국 해안에서 거듭된 민족제국들에 대한 패배조차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해군력과 신기술을 습득할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베이징의 조정이 왕조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것은 내부의 적이었습니다. 여러 지방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큰 세력인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하고 조정을 따로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윈난과 신장의 아득한 내륙에서 일어난 회교도 반란의 진압에 방대한 인력과 재력이 소모되었습니다. 서양 열강들이 해전 한 번 이길 때마다 장강을 따라 내륙으로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동안 이런 반란들도 일어난 것입니다. 경종이 크게 울린 것은 일본이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재빠른 대응으로 아시아에 처음 세운 자본주의 민족제국의 힘을 과시했을 때였습니다. 1894년 일본과의 해전에서 패하자 청나라 지배자들은 왕조를 지켜내기 위해 서양 학술을 익힐 것을 관리들에게 명했습니다.

 

서양세력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지 판단에 웨이위안(魏源)<해국도지(海國圖志)>가 나온 1843년 이후의 10년이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저작이 청나라 관계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일본에는 즉각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여기서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읽어내고 국가 개조에 한 세대의 총력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민족제국은 중국을 대하는 방식에서 서양 제국들을 본받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뜨게 되었습니다. 적대적인 해양세력의 존재, 그것도 가까운 곳의 존재가 중국의 생존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 일본이 보여주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너무 늦었던 것이 왕조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왕조가 무너지고 유교국가가 파괴된 후 그 뒤를 이은 공화국은 절실하게 필요한 해군을 건설할 재력도 여건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후 20세기 내내 대륙과 해양 사이의 불균형은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반세기 동안 중국 해안에서 해군력의 우위를 누렸습니다. 그 결과 군함 한 척도 없는 내륙의 인민해방군이 국민당 정권을 몰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민당이 바다 쪽에서 자유주의-자본주의 서양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949년 이후 냉전 속의 공산당 정부는 미국 해군력의 위협을 피해 많은 산업시설을 내륙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대륙 편향성은 더 심해졌고,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보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환으로 연해 지역이 경제성장의 엔진이 되었고, 이제 중국은 늘어나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해군력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십년 전 전환(pivot)”이란 말을 오바마 대통령이 쓴 것은 미국이 세계적 역할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의 힘을 운용하는 방법을 바꾼다는 뜻이었습니다. 중국은 여기에 도전할 뜻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전환은 방대한 군사자원의 기동성으로 세계적 주도권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 말입니다. 중국이 겪고 있는 사고방식의 변화에는 재균형이란 말이 더 적절합니다. 전에 마주친 일이 없는 새로운 정치적, 이념적, 과학적, 경제적 힘 앞에서 자기네 역사적 유산을 몽땅 뒤집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이 자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데는 재균형이라는 말이 더 적절합니다.

 

 

Chinese Attitude To Empire And Nation / 제국과 민족에 대한 중국의 입장

 

이제 중국이 겪은 두 번째 불균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19세기 말 근대 민족제국의 일원이 될 때 겪은 일입니다. 1911년까지 청나라는 자기네 문명 유산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만주족 지배자들은 외부의 나라들이 중국과 관계를 맺을 때만 의미있는 존재로 보는 중국의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자기 위치를 인정하고 그에 맞춰 처신하는 나라들만 상대하면 되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다른 나라들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문명 중심부의 안전에 별 관계가 없는 나라들을 상대로 소중한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중국 황제들은 국력을 키우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자기네 우월한 가치체계가 존중받고 보호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중국의 필요에 맞추는 이 세계관이 중국중심주의입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제국의 시대가 끝나자 중국은 새로 만들어진 유엔을 구성하는 신생국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국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새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유럽의 급속한 변화의 힘이 세계사의 진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이 자라났고, 근대 역사서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1945년 이후 많은 세계사 교재가 미국에서 나오면서 초점이 북대서양을 건너갔습니다. 그래도 유럽은 여전히 세계를 휩쓴 힘의 원천으로 인정되고, 그 힘은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됩니다.

 

청나라는 몇 개 제국으로부터 위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다를 통해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육지를 통해서는 러시아가 마치 중국이 하던 것처럼 서서히 밀고 들어와 청 황실의 발상지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 제국들은 모두 청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천하(天下) 개념이 경계가 없는 것이지만 천자(天子)를 칭하는 지배자들은 왕조의 행정 범위를 대략 정해놓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진나라 통일을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같은 틀로 이해해서 자기네가 아는 제국과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천자와 러시아 차르가 대등한 위치에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인 1689년의 네르친스크조약에는 중국이 천국(天國)”으로 표시되었습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공유하는 전통의 모습이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해양제국들은 서유럽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었습니다. 과학혁명으로 산업자본주의의 발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의 지배에서 풀려나온 네덜란드와 미국 같은 국민국가들은 종교와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의 주권을 부각시켰습니다. 그것이 유럽 근대국가의 모델이 되었고 지금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받는 정치적 기본단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국(帝國)”이라는 번역어에는 근대 제국들의 성격을 잘 나타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18-19세기에 일어난 제국 팽창의 배후에 있던 국민국가의 존재가 표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팽창의 힘이 새로운 종류의 제국주의를 만들어낸 자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국민국가의 시민들이 제국의 건설에 참여한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시민의 민주적 권리가 국민국가를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가 진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인은 이 역사관에 마주쳤을 때 자기네 중국중심주의 역사관을 어떻게 지켜낼지 고심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대부분 사상가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관점을 지켰습니다. 중국과 서양 학술의 이러한 2분법이 이후 대부분 중국 담론을 지배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할 때 중국중심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이 없었습니다. 중국의 학술은 3천 년간 발전의 성과였습니다. 그 긴 기간 동안 중국은 그 존속에 대한 모든 위협을 이겨내면서 부근 세력들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강화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통합성과 저항력을 갖춘 국가체제는 위대한 문명을 지켜낼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 유산이 중국중심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인들은 그 핵심에 대한 도전이 예상보다 심각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새 세대 지도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에 입각한 도덕과 정치의 뿌리 깊은 원리들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중심 세계관은 지중해 지역 고대문화에 연원을 둔 다른 종류의 세계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월한 해군력을 가진 새 제국들이 대서양으로부터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나와 세계경제를 지배했습니다. 그때부터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쓰게 되었고, 그것이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입니다.

 

중국인이 볼 때 경제력과 군사력에 기초한 유럽중심주의는 자기네 문화적 중국중심주의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국중심주의는 한 지역에서 3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연속적 변화의 과정을 통해 빚어진 것입니다. 이 사상은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대신 외부의 새 사상들을 흡수하고 많은 정복자를 동화시키면서 강력한 문명으로 자라났습니다. 그 연속성에 몇 차례 매듭은 있었으나 19세기까지 이 과정이 계속되어 중국인은 중국 중심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독특한 문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중국인이 새로운 세계사의 관점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공헌이 인정받는 한 자리를 가지기 바랄 뿐입니다. 근대적 발전에 따르는 진보의 흐름에 중국인도 동참하기 바랍니다. 다만 자기네 전통 중 뛰어난 것들이 그 발전 속에 역할을 가지는 균형 잡힌 성장을 바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