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과거를 활용해서 우리 지역의 지금을 설명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 ANU에서 지낼 3년을 계획했다. ANU와 국립도서관 양쪽에 방대한 문서자료가 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소중히 아껴 온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하라고 마오쩌둥이 젊은 사람들에게 시켰는지를 둘러싼 불확실한 문제들이 내 직접 관심사였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의 젊은 추종자들의 광기 어린 눈에 과거의 어떤 요소들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일까?
문서만으로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정부와 공산당에서나 공장, 교육계, 예술계에서나 모든 권위를 배척하자는 외침의 반복만이 문서에 나타났다. 특정 인물을 거명하고 무자비한 규탄과 온갖 욕설을 붙인 문서들도 있었다. 그런데 누가 운동을 조직하는지, 어떤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문서가 알려주는 것은 혁명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신격화된 마오 주석 외에는 비판 대상 아닌 사람이 없었다.
양쪽 기관의 소장 문서 중에 중국어 원문도 (사진복사가 많음) 있었으나 대부분은 냉전 조직들의 자금으로 홍콩의 전문 업체들이 옮긴 번역문이었다. 신뢰도가 인정되는 문서들을 직접 다룬다는 데 신기함을 느끼는 한편으로 전국의 정치적-문화적 유물-유적 파괴가 전면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면서 안도감도 느꼈다. 앞선 시기의 인물과 정책과 사건들을 규탄한 문서들을 찾아보고, 지속적 공격 대상으로 뽑힌 사안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른 문서들의 세밀한 내용을 살펴보는 데 시간을 들였다.
큰 보람을 느끼는 배움의 시간이었고, 나는 주변의 정치적 조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해방감을 누렸다. 대학은 연구자들에게 자기 연구를 수행하고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동료들과 협력할 자유를 주었다. 같은 자료를 먼저 본 동료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고, 자기네가 보는 관점을 기꺼이 공유해주었다. 다른 대학도 찾아가서 마오쩌둥의 중국에 관한 연구를 아직도 뒤덮고 있는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더 넓은 협력을 모색해 보라는 동료들의 권유도 많았다.
현재 상황을 오랫동안 검토해 온 동료들에 비해 내 시야에는 한계가 있었다. 20세기 전반 중국의 행로에 관한 내 지식은 누더기 상태였다. 원사료를 다룬 연구를 해보지 못했고, 말레이시아 밖으로 여행할 때 입수한 연구성과를 읽었을 뿐이었다. 충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화혁명 때 역사학자 우한(吴晗, 1909-1969)이나 극작가 샤옌(夏衍, 1900-1995) 같은 사람들이 특별히 심한 공격을 거듭거듭 받은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사에 관한 중요한 서적과 논문들의 목록을 만들고 대출해 와서 저녁때 읽었다. 마거릿은 내가 평일에 그런 일과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낮에는 내가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게 가사를 살펴주고 저녁시간은 서재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아이들에게는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것 외에 함께할 일이 많지 않았다. 전임자 패트릭 피처럴드와 동료 로후이민 덕분에 ANU 도서관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중국어-일본어-영어 서적과 논문들이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
역사학자가 문화혁명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현대사를 공부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확고히 세워진 마오쩌둥주의 관점의 영향으로 사건과 인물들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역사 공부를 해 온 방식이 워낙 멋대로여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세기 혁명가들을 공부하다가 남해 교역으로, 10세기 북중국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용케 파탄을 면하고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전에 내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 주제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어서 재주넘다가 코가 깨져도 상관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화혁명 때문에 공산중국이 위기에 빠졌다는 생각을 밝힌다면 수많은 냉전 전문가들이 몰려와 따져 물을 것이다. 국제정치의 윤곽에 관해 나보다 훨씬 해박한 사람들이.
참으로 새로운 도전이었다. 예견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마거릿에게 이야기했다. 내 아슬아슬한 짓들을 늘 봐 온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을 통해 배우는 내 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 내가 배우는 길을 잘 알고 나 자신의 배움을 위해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주었다. 막상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캔버라의 역사학자 하나가 문화혁명에 관심을 갖고 나름의 설명을 제시한다는 소문이 관련 학계에 돌면서 강연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 더 많은 글을 읽고 더 생각을 열심히 정리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강연 초청에 부응하고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질문에 응답하려 애쓰는 가운데 나는 더 많은 공부를 더 빨리 하게 되었다.
중-소 관계의 굴곡 Impact on Sino-Soviet relations
ANU의 역사학 교수로 있으면서 문화혁명 공부를 통해 얼마나 넓은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 저명한 “중국통(old China hand)”으로 공산중국의 탄생에 관한 책을 쓴 피처럴드의 후임자라는 사실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의 후임자인 나도 그쪽으로 아는 것이 꽤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세계에 몇 안 되는 국제관계학과가 ANU에 있고 그곳 교수들이 냉전의 정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학과가 같은 건물에 있어서 그 교수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런 자리에서 많이 떠오르는 주제 하나가 문화혁명이 중-소 관계에 끼친 영향이었다. 내게 더 흥미로운 것은 몇 해 전의 중-소 갈등이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런 질문들의 실마리를 찾다가 개혁 지향의 흐루쇼프 집권 후 나타난 소련의 “수정주의”를 추수한 당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마오쩌둥파의 많은 구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배경을 조금 알고 있었던 것은 말레이시아에서 접하던 반공 언론에서 인도와 서방을 향한 소련의 “유화적” 태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불만을 종종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소 갈등과 마오쩌둥의 야심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냉전 속에서 중국의 위치에 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코민테른에 고무받은 중국 청년들이 중국공산당을 설립한 시절 이래 소련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공산당 지도자들의 행적을 살펴보게 되었다. 읽을 것이 많았다. 수십 년에 걸쳐 코민테른과 러시아는 고문을 파견해 중국의 추종자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1930년대에 중국공산당이 많은 정책 실패를 겪는 것을 마오쩌둥은 목격했다. 그 후 1950년대까지 소련이 중국공산당에 보낸 지침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스탈린 사후 당 기관지에 나타난 비판 기사 중에는 마오쩌둥의 영도에 대항하는 간부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결국 중국 문서에서는 소련 지도자둘과의 갈등에 관해 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자료 중에는 선동적이고 일방적인 내용이 너무 많았다. 두 나라 이론가들이 펼친 논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피스(WE Griffith)의 <중-소 분열 The Sino-Soviet Split>과 그 책에 담긴 (국제관계학 분야의 동료들도 활용하던) 방대한 참고문헌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문제가 국내 권력투쟁에 있었던 것인지, 두 나라의 당 사이, 국가 사이의 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었으나 내 생각을 남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공부하려 노력하는 중에 지식의 새로운 통로들을 찾게 되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ANU는 필요한 전문가를 찾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중국인들이 소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해지면서 소련 전문가인 사회과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리그비(TH Rigby)의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다. 레닌과 스탈린에 관한 그의 책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리그비가 소비에트 블록 정치의 요점을 정리해 준 위에 한 가지 확실한 가르침을 준 것은 소련이 유럽에서 정말로 이루고자 한 목표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독과 발틱국가들과 동지중해에 걸치는 완충지대를 확보한다는 목표 같은 것들이다.
중-소 관계를 살펴보다가 사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은 더욱 뜻밖의 결과였다. 나는 원래 사상사에 끌리지 않았으나 말라야대학의 동료 유진 카멘카와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그 적용방법을 놓고 토론을 벌이곤 했었다. 카멘카는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중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려고 마오쩌둥이 노력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중국사상사에서 마오쩌둥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열쇠를 찾기 바랐다.
사상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중국학 쪽 친구들은 카멘카가 바라는 열쇠를 찾아줄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나는 유용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정치사 쪽으로 기울어져서 사상사 쪽으로는 공부가 적었다. 사상사 쪽에는 그 주제를 더 잘 이해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대신 내게 중요해 보이는 면을 설명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이론가들이 열렬한 근대주의자였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 같은 사상가들이 계몽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유물사관에 관해 가르쳐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였다. 제1세대 공산당원 거의 모두가 유가사상의 유산을 공개적으로 배척했다. 그중 과격한 사람들은 “전면적 서양화”를 제창하기도 했는데, 자본주의 서양보다 사회주의 서양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1949년 마오쩌둥의 승리에 마르크스-레닌 사상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늘 궁금한 생각이 있었다. 영문 번역으로 런던에서 출판된(1956) 마오쩌둥 선집을 읽고는 그 역할이 크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스탈린을 놓고 보자면 소련이 인민해방군에 제공한 (특히 만주에서) 군사장비가 중요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에게는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같은 구호가 필요 없었다. 인민해방군을 주로 구성한 애국 농민이 단결한 것은 일본 침략군만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지하는 개항장의 자본주의자들과 결탁한 지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의 승리를 가져온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국 농민을 신뢰하고 이끈 그의 능력이었다. 후난성 농촌에서의 성장 과정과 중국 역사의 섭렵을 통해 그는 지도자들의 결의가 확고하고 정치적 조건이 맞을 때 농민반란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멘카에게는 이런 설명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계속 내게 물었다.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평등사상의 작용은 없었는가? 마오쩌둥이 젊은 추종자들을 선동해 소련 지도자들의 엘리트주의를 본받은 당의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한 것도 이런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중국 역사 속의 농민반란에 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해야 했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드러낸 대목을 막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 맹아”로 생각되는 것이 나올 수 있었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을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일어난 시기와 비교하면서 마오쩌둥은 만주족의 정복으로 가로막히지 않았다면 중국 사회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내게는 이 주장이 납득되지 않아 오랫동안 제쳐놓았었는데, 그 무렵에는 중국 내의 토론도 살펴보고 있었고 앨버트 퓨어워커가 조직한 1964년의 디칠리 학회도 참석했었다. 공산중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이 학회에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이 주장의 의미를 천착했다. 이것이 중국의 “인민 혁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마오쩌둥의 주장을 둘러싼 중국 내의 토론은 많은 학술지의 지면을 채웠다. 중국 내에서조차 이런 시각이 마오 자신이 생각하던 중국의 독특한 농민 주도 경험과 모순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카멘카에게 그런 “아이디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중-소 간의 “이념적” 분열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현대중국에 관한 내 연구의 한 주제로 설정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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