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 작업 중 <망국 100년> 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식민지 경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점을 확충할 필요를 느껴서였다. 뉴라이트에서 황당한 역사관을 들고 나오는데, 그것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소극적 대응일 뿐이며, 21세기 상황에서 시민들이 보다 의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적극적 대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금년 상반기 중에 집필해서 국치 100주년 전에 책을 내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 그런데 작업이 궤도에 오를 무렵부터 깨닫게 되었다. 원래 계획한 작업 규모로는 이 주제에 관한 내 생각을 충분히 담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시즌2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망국에 이르는 과정의 서술에 그치고 망국의 상황 자체를 시즌2에서 다루겠다고.

시즌2는 1910년에서 2010년 사이에 한국 사회가 겪은 일을 다루는 것이다. 역사보다는 시사 쪽 의미가 더 클 것으로 생각하는데, 시사의 의미를 차분하게 제시하기 위해 역사를 앞세우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0년에서 1945년 사이를 연대기적으로 훑어내리면서 1945년 이후의 일을 그 위에 비쳐보이는 방식을 생각하게 되었다. 서술 구조에 아쉬운 점도 있을 듯하지만, 어차피 엄청나게 큰 주제인 만큼 어떤 구조로 가든 상당한 제약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젯밤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를 읽다가 새로운 구상이 떠올랐다. 김구, 여운형, 안재홍 등 아까운 지도자들의 흔적을 송건호님의 감동적 서술 속에서 더듬다 보니 인물에 더 바짝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 아까운 지도력을 지금의 사회에 보다 절실한 모습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에서 내 몫을 찾을 수 있지 않을지.

8-15에서 6-25에 이르는 소위 '해방공간'. 식민지시대보다 이 시기에 초점을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다가 필요에 따라 그 이전의 일, 이후의 일, 그리고 바깥 사정을 곁들여 설명하는 식으로. 제대로 된 국가를 가지지 못한 20세기 역사를 개관하는 데는 역시 그 중심부에 초점을 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방향을 떠올리다가 기발난 생각이 이어졌다. 일기를 쓰면 어떨까! 2010년 8월 15일에 첫 회를 쓰자. 그리고 2015년 6월 24일까지 계속해서 '65년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65년 전의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써 나가면... 아버지의 전쟁일기와 내 시병일기로 (어머니 육아일기는 실종 상태지만) 우리 집안 일기 전통만큼은 확고하지 않은가.

이 방향으로 나선다면 진짜 큰일이다. 지난 반년간의 긴장된 작업을 5년간 계속할 각오를 해야 한다. 못난 놈 보인다고 흉볼 틈도 없고, 나쁜 놈 보인다고 욕할 틈도 없이 이 일 하나에 매달려야 한다. 5년 동안... 다른 글은 쓸 생각 접어놓아야 한다. 엄두가 잘 안 난다.

그러나 제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일생의 보람을 느낄 일이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밑천을 이 작업으로 풀어낸다면 5년 동안 상당수 독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성격과 문제점을 보다 더 진지하게 살펴볼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5년 후면 학교에 있었을 경우 정년퇴직할 나이다. 지금까지 사회의 요구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공부를 해 왔으니 5년 정도는 봉사활동에 바쳐도 괜찮지 않을까? 글쎄... 5년? 아무래도 너무 긴 거 같은데...

그래도 해야 할 것 같다. 편안하게 살아온 결과 나는 국민연금 월 40만원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몸이 되지 않았는가. 5년 동안 짭짤한 글을 꾸준히 쓰면 10여 권 책이 될 거고, 한 질 정가 20만원으로 보면 한 달에 50질만 팔려도 100만원 인세 수입이 된다. 품위있는 노후까지는 못돼도 처참하지 않은 노후를 위해 분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 알아봐야겠다. 내가 의지를 세우더라도 5년의 작업을 밀고 나가려면 최소한의 여건이 필요하니까. <프레시안>이건 돌베개건 수익성 하나만 생각해서는 충분한 여건을 만들어주기 힘들 것이고... 이 작업이 언론과 출판 사업에 대단히 귀중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꼬셔야 할 텐데... 뭐라고 꼬시나?


(7월 3일 돌베개에 보낸 메일)

저 자신 막 떠오른 구상을 충분히 정리하지 않은 채 급히 검토를 부탁해서 여러분께서 다소 어리둥절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구상이 매우 강력한 함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모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저지르는 쪽으로 갈 공산이 크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서둘러 검토 부탁드린 겁니다.

며칠 동안 이 일의 의미 생각한 것을 만나기 전에 설명드리죠.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고, 자기도취로 보여도 상관없다는 배짱으로 제 생각 그대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는 교수직을 떠난 후 최대의 베팅 찬스로 보고 올인 비슷한 베팅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평생 무엇을 위해 학문을 한답시고 했느냐는 물음에 늠름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을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의 강좌를 5년(또는 그 이상이라도) 동안 끌고 나가려는 겁니다. 독자들을 학생처럼 여기며 정기적으로 (주 2회 내지 매일) 읽을거리를 통해 한국 사회와 역사에 관한 생각을 촉구하는 강좌입니다.

지금까지 제 글쓰기는 단행본 출판을 주 목적으로 하고 <프레시안> 연재는 보조수단으로 여겨 왔는데, 이번 작업은 강좌 의미를 가진 연재에 치중합니다. 출판은 강좌의 의미를 정리하는 마무리 작업으로 생각하고요.

따라서 작업 진행 중 생계도 출판사보다 연재 매체에 의지할 생각입니다. 책은 4개월 또는 6개월에 하나씩 내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적어도 2천 부 이상은 유지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기간의 작업인 만큼 작업의 밀도는 지금까지의 <망국 100년>보다 낮춰 잡고, 스토리텔링 서술방식을 많이 활용하려 합니다. 컨텐츠 확보의 노동량을 줄이는 대신 발표방법의 효과성에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고요. 연재 외에 강의실 강의도 병행할 길을 알아볼 겁니다.

강좌에서 다룰 이야기 범위는 1910~2010년간의 한국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실패의 역사로 보면서 실패의 이유를 반성하되 실패의 과정 속에서라도 가치있는 노력을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그 시점의 여건 때문에 현실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노력이라도 그 기본 정신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지금 시점에서 그 가치를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요. 나쁜 놈들 욕하기보다는 좋은 노력을 부각시키고, 그 좋은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보다 슬픔을 이끌어내는 멜로드라마 수법을 생각합니다.

비슷한 범위를 다룬 한홍구의 <대한민국사>와 이런 차이점이 있기 바랍니다.
(1) 일기 형태의 연속성을 통해 다루는 주제와 소재들 사이의 연관성을 강하게 제시한다.
(2) 자유와 평등 등 근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접어놓음으로써 주제를 향한 접근로를 넓힌다.
(3) 화자의 도덕적 권위의 바탕을 '정의'의 하드웨어가 아닌 '온정'의 소프트웨어에 둔다.
 

이 작업의 가장 큰 모험성은 저 자신이 도덕적-사상적 지도자의 위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좁은 범위라도 수강생들에게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건네려는 거니까요. 기능적인 교사가 아니라 포괄적 의미의 스승이 되려는 겁니다. 지도자의 길에 많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적인 사실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모험이 꽤 필요한 입장이기도 하고, 또 위험을 견뎌낼 만한 조건도 꽤 갖춘 편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우선 제 아버님의 배경이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사명감 없이 인생을 살아오려 애쓴 사람이지만 아버님의 유업을 이어받으려는 의지는 분명히 있고, 이런 사명감은 꽤 넓은 범위의 독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작업의 정신과 기준을 <역사 앞에서>의 연장선 위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생활 자세에 대해 저 스스로 마음을 놓고 있습니다. 무척 빈한한 생활을 이어 오면서 재물 때문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랄 정도입니다. 이만하면 세상을 편하게 대해도 될 만큼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인간관계에서 밝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세를 꾸준히 지켜온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통합니다. 분노와 슬픔을 느끼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고 그 의미를 조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좌의 전체 내용을 단편적 지식과 관점의 집합체가 아닌 총체적 인간관으로 묶어낼 엄두를 낼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끝으로 지난 2년간의 글쓰기가 이 작업에 임하는 내 자격에 대한 신뢰를 상당 범위의 독자들에게 심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헛발질만 하지 않는다면 상당수 독자가 좋은 기대감을 가지고 강좌에 임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 작업을 통해 독자층이 크게 늘어날 희망도 가지고 있지만, 일단 집토끼 지키는 것을 당면한 지상 과제로 생각하면서 묶어서 내는 책도 2천 부 이상은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힘의 원천이 '유머리스트'의 면모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쓴 일이 있지요. 제 아버님 글의 가장 좋은 점도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근년의 글쓰기에서 유머리즘에 치중해 온 셈인데, 이번 작업에서는 그 방향으로 더 집중하려 합니다.
 

(7월 6일 <프레시안>에 보낸 메일)

목적:
 
<망국 100년>을 바탕으로 망국 후의 한국을 개관하는 작업이다. 한국의 국가 기능이 망국 이후 지금까지 회복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시대 변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국가 실패"의 원인을 개인들의 악의보다 최대한 구조적 문제로 해명하면서, 여러 시점 여러 위치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이 이뤄진 사실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노력들이 당시의 제반 조건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을 밝힘으로써 조건이 바뀐 상황에서 그 기본 가치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방법:
 
<프레시안>에 매일(주 5회 또는 6회) 10~15매 분량을 연재함으로써 지속적인 독자를 끌어들인다.
 
망국 후 한국 사회 진로의 가장 큰 기로였던 해방공간(1945. 8. 15 ~ 1950. 6. 25)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2010년 8월 초순부터 2015년 6월까지 65년 전 같은 날자에 있었던 일을 적시하면서 그 일의 배경, 상황, 여파 등을 덧붙여 기록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서술 내용의 여러 영역은 대략 이런 비율을 점할 것으로 전망한다.
해방공간의 사건 30%
식민지시대 역사 25%
전쟁 이후 역사 20%
국제적 상황 15%
한국사회의 현재 상황 10%
 
관점을 세움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근대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더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도록 한다. 예컨대 산업화나 경제성장보다 "기아의 억제"를, 자유나 평등보다 "인간다운 대접"을, 민족의 존엄성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앞세우는 것이다.
 
서술방법에 있어서는 높은 담론 수준이나 기발한 관점으로 독자의 '관심'을 강하게 끌어들이기보다 독자의 '신뢰'를 장기간에 걸쳐 키우고 지키는 데 역점을 두고 가급적 재미있고 부담 없는 '읽을거리' 가 되도록 노력한다.
 

 
Posted by 문천
2010. 6. 29. 23:15



어제는 이정희 선생님과 김호순 선생님을 보셔 가기로 여러 날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강인숙 선생님 생신을 하루 늦게라도 세 분이 축하하는 점심 뒤에 어머니께 가시겠다고 나까지 점심 자리에 부르셨다. 마침 한국 다니어 온 예화도 양할머님 인사드리러 가고 싶다 해서 선생님들께 양해를 얻고 같이 갔다.


세 분 선생님은 십여 년 동안 평창동에서 서로 걸어다닐 만한 거리에 살며 교분을 다진 사이다. 어머니도 87년 퇴직 후 1년 남짓 그 동네에서 지내신 것이 그 분들 의지하는 마음에서였다. 포천 마명리의 형 집으로 가시기 전의 중간 단계였던 셈이다. 출근할 필요 없는 생활을 서울에서 지내실 취향이 아니신데, 그래도 익숙했던 서울 생활의 마무리를 하기에 북한산 등산로에 바로 접어들 수 있는 평창동이 괜찮은 곳이었다.


강 선생님만이 아직도 평창동에서 사신다. 부군 이어녕 선생님과 함께 운영하는 영인문학관 일이 여간 많지 않으신 것 같다.


김 선생님은 오래 지내시던 평창동 아담한 집을 떠나 ‘경희궁의 아침’인가? 편리한 거처로 옮기신 지 몇 해 된다. ‘내 집’ 가꾸며 사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학교 그만두고 서울 올라와 제주도 가기 전까지 그 댁 지하실에서 지내며 박사논문 쓰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되어 가는구나. 평창동 떠나실 무렵부터 운전도 그만두신 것 같다.


이 선생님은 정말 도깨비시다. 나도 도깨비 소리 꽤 들으며 살지만, 이 선생님 앞에서는 작은 도깨비다.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인 90세이신데, 아직도 세상을 치열하게 사신다. 80년 신군부 때 어디 잡혀가서 “두 사람 조직도 못해 여태 독신으로 살아온 사람한테 무슨 조직 활동 같은 것 뒤집어씌울 생각 말라”고 큰소리치신 이야기를 말로 글로 몇 번 풀다보니, “두 사람 조직도 못한 분”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대개 알아듣는다.


평창동 시절이 이 선생님께는 ‘도깨비 전성시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네 꼭대기 해원사던가? 절 옆에, 으리으리한 저택들보다 더 넓은 대지인데, 축대 빼놓고는 완전 자연 상태의 솔밭 가운데 열 평가량 오두막집이 이 선생님 거처였다. 그 외진 곳에서 “나는 자연이 좋아!” 문명을 냉소하며 지내실 때 얼마나 뽀다구 나셨는지! 김 선생님 댁에서 지낼 때, 산책길에 들르면 대한민국에서 잘 나간다는 이들이 그 외진 곳까지 찾아온 것을 마주칠 때가 많았다. 그분들도 이 선생님의 뽀다구에 나처럼 뿅 간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양평동의 오피스텔로 옮기신 후 문명 누리시는 것을 보면서는 한쪽으로 마음이 놓이면서도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낀다. 어제 들으니 에어컨까지 즐기며 사신단다.


도깨비니 뭐니 하며 노인께 무례한 언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놀라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선생님은 도무지 예의 차릴 상대가 아니시다. 사람들 대하실 때(우리 어머니 포함해서) 당신께서 워낙 무례하시다. 남이 당신께 예의 차리는 것도 못 견뎌 하신다. 그런데 근년에 내가 현 정권 까는 거 보고 너무너무 예뻐하신다. 말씀하시는 데 내가 가로막는 것은 많이 노여워하시지 않을 정도다. 모시고 있을 때 말씀 가로막을 필요를 수시로 느낀다. 함께 있는 다른 분들을 언어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같은 편인 나까지 괴로울 때가 많은 것을 보면 언어폭력 이전에 음성폭력이시다.)


수십 년간 자별하게 지내오신 분들이 요즘 정치상황 때문에 힘들어들 하신다. 이 선생님이 김대중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사실은 오래된 것인데, 친구 분들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표현이 격해지신 것은 근년의 정치 상황 탓이 큰 것 같다. 김 선생님도 강 선생님도 친여 성향이기는 하지만 그리 편협한 분들이 아니고, 이 선생님의 정치 성향을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즘은... 현 정권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다년간 한나라당을 지지해 온 분들이 너무들 힘들어 하신다.


어제는 어머니를 많이 관찰하지 못했다. 3시 반경 도착해 5시에 식탁에 앉혀 드리고 떠날 때까지 현관 앞 테라스에 모시고 앉았었는데, 두 분 선생님과 회포를 푸시게 하고 나는 운영을 맡고 있는 이사장님 작은 아드님과 탄원서 의논을 많이 했다.


지난 주 원장님이 메일로 도움을 청했었다. 노인보험공단의 감사에서 문제점이 지적되어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벌칙을 통고받았다는 것이다. 입원자 보호자 중 내가 이런저런 사정을 잘 아는 편이니 보호자 입장에서 탄원서를 써줄 수 없겠느냐고 청했다. 지적된 문제는 간병인으로 무자격자를 고용한 사실이라고 한다.


그 문제라면 운영자들의 부탁이 아니라도 기회가 있다면 보험공단에 의견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기꺼이 탄원서 초안을 만들어 보내놓았다가 어제 만나 조정할 내용을 의논했다.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는 요양원에서는 입원자 몇 명당 한 명씩 자격증 가진 간병인을 고용하게 되어 있다. 당연한 기준이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 현실 조건에 더 잘 맞출 길이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해 왔다. 병원에 계신 2년 동안 거의 매일 들르면서 간병인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꽤 식견을 쌓아 왔다.


병원의 간병인은 거의 다 중국 국적 조선족으로, 병원에 상주하는 분들이었다. 병원 측은 간병인의 상주가 환자들 관리를 위해 여러 모로 좋고, 간병인들은 숙식 문제가 해결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환자들도 익숙한 간병인이 계속해서 돌봐주니 좋다. 이렇게 모두에게 해피한 일이 보험공단의 기준에 따를 때는 힘들게 된다.


먼저 자격증 문제. 간병인은 의료직이 아니다. 능력보다 품성과 태도가 중요한 역할이다. 제한된 기간 동안 국내에 체류하는 조선족 중에 간병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 달씩 시간을 내고 돈 들여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은 없다. 집 근처의 간병인 양성소를 찾아가 알아본 일이 있는데, 별 교육 내용이 없다. 간병인 교육은 민간 사업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보험공단이나 보건소 같은 공공기관에서 하루 이틀 정도 이론교육을 받고 보름 정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연수를 받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둘째, 고용 인원 문제에서 상주 간병인의 고용을 1.5인으로 인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월 200시간인가 얼마인가 이상 근무하는 사람을 1인 고용으로 인정해 준다고 하는데, 시설에 상주하는 간병인은 휴식시간이라도 입원자들 가까이 있다는 사실로 해서 실질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하루 8시간의 본격 근무 외에 8시간의 ‘준 근무’를 인정해 준다면 간병인, 시설, 입원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간병인 전원이 상주할 필요는 없다. 입원자들 중에는 생활의 일부에만 간병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는 정해진 시간 동안 도움을 드려도 된다. 그러나 전면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은 간병인들이 시간 맞춰 교대하며 돌봐드리는 것보다 정해진 간병인이 내내 가까이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가족과 같은 전면적 인간관계가 바람직한 것이다.


간병인 중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출퇴근을 바란다. 한편 일하러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나, 종교관, 또는 인생관에 따라 별도의 생활 없이 간병인 일에 몰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급적 우대받고 또한 잘 활용되는 것이 ‘복지’의 효과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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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연변 사회는 한국 사회에 비해 사람을 비판하는 방식이 두루뭉술한 느낌이 들었다. 두 가지 이유가 생각된다. 중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최근까지 연변 조선족 사회는 외부와의 연결이 적은 편이어서 '좁은 사회'였기 때문에 '체면'을 조심스럽게 여긴 편이었을 것 같다. 또, '근대화'가 덜 되어 있어서 '엄밀함'이 덜한 전통시대 분위기가 많은 남은 편이었을 것도 같다.

두루뭉술한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행방 없음"이다. 크게 봐서 두 갈래로 쓰이는 것 같다. 부드러운 편으로는 전혀 악의가 없는 사람인데 기능적인 판단력이 모잘라 엉뚱한 짓을 한다는, 감싸주는 뜻이다. "어리숙하다"는 뜻에 가깝다. 보다 가혹한 뜻으로는 잘못을 저지를 이유가 없는 데도 잘못을 저지른다는, "대책 없다"는 뜻이다. "그 사람 행방 없다." 고 하면 두 가지 뜻 사이의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어떤 뉘앙스를 띤 것인지 알아서 이해해야 한다.

반대말은 아니라도 대비되는 말이 "도리 없음"이다. "그 사람 도리가 없다"고 하면 단호한 비판이다. 비판을 넘어 비난에 가깝다. 말하는 데건 행동하는 데건 '도리'가 없다는 것은 존중할 만한 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니 "사람도 아니다." 하는 뜻이다.

"행방 없음"은 보통사람들의 영역이고, 그런 말 듣는 사람은 행방을 찾으려고 애쓸 마음이 드는 것이 보통이다. 애쓸 마음도 들지 않는다면 "도리 없음"으로 넘어가게 될 것 같다.

어제 올린 평등에 관한 글은 내가 행방이 없었던 것 같다. 도리 없다는 말 듣기 전에 행방을 되찾도록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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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