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의 끝없는 길


버지니아大 E.D.허시 교수는 1987년 펴낸 “문화해독능력(Cultural Literacy)”에서 미국교육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을 지적,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금세기 초부터 미국 교육계를 지배해 온 자유주의 개혁이 교육의 실용성을 지나치게 침해해 미국교육의 생산성을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뜨려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교육이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는 데 실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正體性)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에 진보성향 지식인들까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후 그는 ‘핵심지식재단’을 만들어 ‘유능한 미국인’을 키워낼 교과내용을 개발-보급하는 일을 벌여 왔다.

작년 말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The Schools We Need)”로 현대미국교육의 지나친 자유주의 경향에 다시 포문을 연 허시 교수의 주장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자유주의 개혁이 평등의 이념을 배반해 왔다는 역설이다. 교육의 성취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풍조가 학교교육의 전반적 기능을 저하시키고, 이에 따라 가정환경이 각 학생의 성취도를 좌우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했다는 것. 공교육 쇠퇴가 사교육 범람을 몰고 오는 우리 현실에도 맞는 통렬한 지적이다.

며칠 전의 4차 개혁안까지 우리 교육개혁위원회의 제안방향은 현대미국교육의 자유주의 개혁을 기본모델로 한 것 같다. 지금까지 교육계를 지배해 온 권위주의 풍조에 비쳐보면 참으로 신선한 내용이 많다. 때늦은 감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신속하게 이 개혁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허시 교수의 미국 교육현실 비판을 보면서 목전의 우리 개혁이 교육문제의 궁극적 해결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점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4차 개혁안에 사교육비 대책이 뒤늦게야 포함되고, 또 그 대책이라는 것이 다른 부문에 비해 미온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근대 이전 교육과 근대교육의 첫 번째 차이점은 ‘국가사업’으로서의 면모에 있다. 근대국민국가의 이념이 근대적 보편교육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미국교육의 기능쇠퇴는 미 국민의 국가의식 약화와 맞물린 것이니, 이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정치는 이념을 따르더라도 교육은 현실적 기능을 잊어서 안 된다”는 허시 교수의 말을 우리도 지금부터 음미해야겠다.
(97. 6. 6)


공자가 한 일을 현대의 직업에 맞춰 보면 교사에 제일 가깝다. 인생의 후반기 동안 그의 일상은 제자들과의 대화로 이어졌고, 관직을 맡고 있을 때도 집에서 제자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공자 이전 중국의 교육은 기술의 전수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공자의 교육 역시 정치 기술의 전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 기술은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교육이 중국에서 본격적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르치다”로 생각하는 뜻이 <논어>에는 “회(晦)”와 “교(敎)”의 두 개 글자로 나타나 있다. “교”는 몇 차례밖에 쓰이지 않았다. 이런 구절들이다.


"좋은 임금이 백성을 7년간 가르친 연후에 전쟁에 내보낼 수 있다." [13-29 子曰 善人 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가르치지 않은 채 백성을 전쟁에 내보내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3-30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가르쳐주지 않은 채 벌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20-2 子曰 不敎而殺 謂之虐]


"잘하는 자들을 모범으로 세우고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게 한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나아갈 것입니다." [2-20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擧善而敎不能則勸]


<설문해자>에는 “敎” 자를 “上所施, 下所效”라 하여 윗사람이 세운 모범을 아랫사람이 본받는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논어>의 사용 예를 보더라도 이 글자는 행동 기준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쓰였다.


훨씬 더 많이 쓰인 “회” 자는 <설문해자>에 “빛을 비춰줌으로써 가르친다(曉敎)”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말로 이야기해 줌으로써 가르친다(說敎)”는 뜻의 “훈(訓)” 자와 대비되어 있다. 그런데 <논어>에 “훈” 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가르치는 일을 한 공자가 말로 가르치는 “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교”에는 약간의 비중을 두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회”였다. 배우는 사람 마음속의 빛을 일으켜주는 가르침이었다.


“교육(敎育)”이란 글자 그대로 가르치고 키우는 일이다. 어버이가 자식의 성장을 돌봐주고(育) 생존방법을 가르쳐주는(敎) 것은 종족 보존의 차원에서 어느 동물이나 하는 일이고 문명과 관계없는 일이다. 문명 초기에 생존방법의 가르침이 기술 교육으로 확대되었다. “교”와 “훈”으로 이뤄지는 교육이었다.


그런데 문명이 어느 고비에 이르자 질서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발생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본능에 입각한 자연적 질서로는 사회의 더 이상 발전을 뒷받침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학문의 생명은 전파력에 있는 것인데, 공자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학문의 전파 방법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 전파 방법의 핵심이 있는 것을 옮겨주는 “훈”과 “교”를 넘어 없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해주는 “회”였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교육을 만들어낸 인물로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지만, 어느 고대문명에서도 누군가가 비슷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중국문명이나 그리스문명에서도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혼자 해낸 일은 물론 아니었다.


고대문명에서 만들어진 “회(晦)” 차원의 교육은 중세 말까지 지배계층 안에서 활용되었다. 사회 질서를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느냐 하는 이념은 지배계층에게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의 교육 독점 상황이 오래되면서 교육에는 계급 고착의 역기능도 자라나게 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며 교육은 앞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사업이 되었다. 근대 국민교육의 성립은 두 가지 필요가 결합된 결과였다. 한 가지 필요는 분업 현상의 폭과 깊이가 늘어남에 따라 산업사회의 인간에게 필요한 기술과 지식의 분량이 늘어난 것이고 또 한 가지 필요는 국민을 근대국가의 성격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근대교육의 순기능으로 본다. 국민을 국가에 순응시킨다는 목적은 국가주의 강화를 통해 제국주의 갈등의 격화에 공헌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것은 시대 상황에 따른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사회체제가 격변하는 근대 상황에서 개인을 변화에 적응시키는 것은 교육의 자연스러운 기능인데, 국가주의 시대가 국가주의 교육을 만든 것이지, 국가주의 교육이 국가주의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니다.


물론 교육의 원리를 엄밀히 따져 국가주의 풍조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만,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국가주의 시대에 국가주의를 완전히 외면하는 교육이란 현실 속에 성립될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순기능’이라 함은 좋은 도덕적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방향에 맞는다는 뜻이다. 어느 시점 한국 사회의 한국사 교육이나 국민윤리 교육도 그 시점의 상황에 비추어 어느 정도 옹호할 수 있는 관점이다. 이렇게 ‘순기능’을 넓은 범위로 설정하는 뜻은 이와 대비되는 ‘역기능’을 좁혀서 드러내려는 데 있다.


내가 중시하는 교육의 역기능은 계급 고착을 통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이다.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과 노력이 사회 전체의 역량 증대라는 공적 목표가 아니라 승자들에게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사적 목표를 위해 낭비되는 문제다.


1997년 위 칼럼을 쓸 때는 우리 사회의 교육이 권위주의 구조를 벗어나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할 때였다. 지나친 자유주의 경도가 교육의 공공성을 해칠 위험이 그때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문제는 이후 계속 심화되어 왔다. 독재시대의 권위주의 구조가 교육의 최소한의 공공성을 지키는 장벽 노릇은 했는데, 그 장벽이 제거된 후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찾지 못하는 채로 역기능만 확장된 셈이다.


교육 전문가가 아닌 내게는 교육계의 문제를 엄밀히 논구할 능력이 없다. 윤곽만을 보고 단순한 의견을 말한다면 교육이 시장 원리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어서 교육의 공공성이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다. 비생산적 학습 기능에만 매달려 마이너스게임의 양상을 심화시키고 극한적인 서열화로 사회구조를 경직시키는 역기능이 모두 이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이번 교육감 선거 관계 보도에서 ‘진보’ 후보와 ‘보수’ 후보로 구분하는 것을 보며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6인의 ‘진보’ 당선자가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같은 성향이라면 ‘진보’라는 이름이 적절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 중에 설령 진보주의 이념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한국 교육 상황은 이념을 펼칠 때가 아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급선무였던 것처럼.


6인의 ‘진보’ 교육감과 10인의 ‘보수’ 교육감 사이에 대립보다 경쟁이 펼쳐지기 바란다. ‘진보’ 교육감이라 해서 ‘보수’ 교육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급진적 정책으로 선명성을 과시하기보다, ‘보수’ 교육감이라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원칙과 상식’에 치중하기 바란다. 그런 범위 안에만도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16 대 0, 15 대 1의 상황에서 ‘보수’라는 이름도 부끄러운 ‘야만’이 우리 교육계에 횡행했다. ‘진보’의 성취보다 ‘야만’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장 큰일이다. 숫자로는 10 대 6의 열세지만, 칼자루는 ‘진보’가 쥐고 있는 상황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