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킨과 클린턴


자네트 랭킨(1880-1973)은 1916년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남편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 시민권을 여성에게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등 여권신장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여권운동 못지않게 정열을 쏟은 평화운동 때문에 의회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1917년 대 독일 선전포고에 반대한 연방의원은 모두 49명이었고, 이들은 거의 모두가 정계에서 매장됐다. 랭킨은 이 반대 때문에 공화당의 상원의원 후보지명 기회를 놓치고 무소속으로 낙선한 후 의회를 떠났다.

여권운동에 전념하던 랭킨은 1940년 전쟁반대 공약을 걸고 하원에 복귀했다. 이듬해 참전승인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투표로 온 국민을 분노시킨 후 그의 의회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의 평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1968년 1월 그는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사당 앞에서 월남전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때 함께 한 5천명의 여성을 ‘랭킨 부대’라 한다.

광기(狂氣)는 전쟁의 본질에 속한다. 아무리 컴퓨터게임을 닮아 가는 첨단전쟁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미국 하원도 이라크 공격을 시작하자 탄핵절차를 하루나마 늦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공화당 의원은 “우리 장병이 싸우고 있는데 탄핵절차를 예정대로 밀고 나갈 수는 없다. 바로 그래서 공격을 시작한 것 아닌가.” 하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흘간의 공격이 끝나자 억눌려 있던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적 반전주의자뿐 아니라 이라크 응징에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들까지 비판에 나서고 있다. 섣부른 공격으로 아랍권의 반감을 사고 우방들의 협조에 균열을 가져오는 등 오히려 사담 후세인의 입지를 강화시켜 줬다는 것이다. 유엔 사찰단(UNSCOM)의 활동재개 전망도 없다.

이번 전투의 서방측 첫 희생자가 유엔 사찰단의 리처드 버틀러 단장일 것이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클린턴이 필요로 하는 공격의 핑계를 만들어줌으로써 유엔의 권위와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결과 사찰단은 이라크 측의 철저한 거부대상이 됐고,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이라크 무기사찰을 위한 다른 채널을 구상하기 바쁘다.

‘클린턴의 애완견’이란 꼬리표가 붙게 된 블레어 총리도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클린턴의 이미지는 이번 공격으로 더 굳어졌다. 거기 장단을 맞춰주다가 스타일을 구겼으니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은 격”이랄까. 클린턴은 사담과 함께 세계적인 위험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같은 편에게 위험한 인물로.


1998년 말 탄핵 위기에 몰린 클린턴 미 대통령이 느닷없이 이라크 공격을 재개하고 이로 인해 탄핵 절차가 늦춰지는 것을 보며 분통을 터뜨린 글이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비굴하고 비열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전쟁을 이용한다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다. 뒤를 이은 부시의 광적인 호전성에 많이 가려졌지만,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클린턴을 ‘전범(戰犯)’으로 규정한다.


사회가 전쟁 분위기에 휩쓸리면 민주주의가 손상된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보통이고, 아주 뿌리가 뽑혀버리기도 한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아끼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희생당한다. 자네트 랭킨은 그런 희생자의 하나였다.


1917년 참전에 반대했던 49인의 미국 연방의원 대부분이 랭킨처럼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그중 예외적으로 펄펄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1855~1925)였다.


라폴레트는 미국의 참전 여론이 거대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된 것으로 믿고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했다. 참전에 앞서 상선 무장 법안에는 필리버스터로 대항했다. 루시타니아 호 참극의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다는 주장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참전 후에도 징병제에 반대하고 언론 자유를 주장했으며,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부자와 대기업들이 전쟁 비용을 대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전쟁 분위기에 들뜬 사회에서 이런 이성적인 주장은 미친 소리로 몰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런 미친 소리를 계속하는 정치인은 소속 정당의 공천도 잘리고 유권자들에게 외면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라폴레트의 정치적 입지는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진보세력의 지지를 모아 19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3당 후보로 이례적인 17% 득표까지 기록했다.


1924년 선거에서 진보당 후보 라폴레트는 11개 주에서 2위를 기록했고, 아성 위스콘신의 선거인단을 차지했다. 그의 두 아들이 후에 위스콘신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것을 보면 우리 머릿속에는 ‘지역주의’, ‘토호세력’ 같은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을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전초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위스콘신 사람들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미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위스콘신 아이디어’는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큰 획 하나를 그은 이념이었다.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내던 정치 초년에 라폴레트는 한 사람의 성실한 정치인일 뿐이었다. 그가 ‘튀기’ 시작한 것은 1891년 보스 정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였다. 공화당에서 왕따 당한 그는 정치개혁을 주도하면서 공화당 외부의 지지 세력을 끌어 모으고 공화당 안의 ‘반란파’를 키워내 1900년 주지사 자리에 올랐다.


6년간 주지사로 있으면서 라폴레트가 빚어낸 것이 ‘위스콘신 아이디어’였다. 좁은 뜻으로는 대학 교수들을 대거 정책 입안과 집행에 참여시킨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이다. 전문성 없는 정치인들이 쪼물딱대던 관행으로부터 비약적 발전을 정치-행정에 가져온 아이디어다. 그러나 더 넓은 뜻으로는 철도회사로 대표되는 대기업의 횡포에 민중이 맞서는 길을 열어준 새로운 시대의 ‘민주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철도회사의 소유 재산에 재산세를 물리는 조치. 정치계에서 나오지 못하던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그리고 강력한 착상을 그는 학자들에게서 얻었다.


1917년 그가 참전에 반대하고도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순진한 평화주의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사 로버트 Fighting Bob”가 그의 별명이었다. 그의 참전 반대는 평화의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얻을 대기업과 대자본에 대한 적극적 공격이었다. 20년간 꾸준하고 치열하게 진행해 온 공격의 연장이었다. 그에게 정치란 ‘일반인’들과 ‘이기적 이해집단’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었다.


불꽃같은 라폴레트의 연설 중에서도 특히 대중을 열광시킨 것이 ‘출석부 낭독 roll call’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행이 되어 있는 투표 실적 공개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개혁 법안에 반대한 입법자들의 명단 공개가 관행에 젖어 보스만 쳐다보던 의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 힘을 몰아 당내 후보 경선에도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위스콘신 주에서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위스콘신 주의 중심도시 밀워키 지역에서 사회당이 강세를 보인 것도 라폴레트가 구축한 민주주의 인프라 덕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0년에 밀워키는 미국 최초의 사회당원 시장과 사회당 연방의원을 배출했고, 1940년까지 거의 대부분 기간을 사회당에게 시정을 맡겼다. 밀워키 기반의 사회당 세력을 “하수도 사회주의 sewer socialism”라 흔히 부르는 데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평가하는 뜻과(밀워키 시의 위생 정책은 오랫동안 전 미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념에 투철하지 못함을 비난하는 뜻이 엇갈려 있다.


밀워키의 사회당 세력은 라폴레트가 이끄는 진보주의 세력과 치열한 정책 대결을 벌였고, 선거에서의 공조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큰 그림 안에서 두 세력은 대중의 각성이라는 배경조건 위에서 보완과 공생 관계에 있었다. 위스콘신이 보수적인 양대 정당의 분위기를 벗어난 ‘개혁 특구’ 노릇을 할 때 그 중심부 밀워키는 ‘좌익 특구’ 노릇으로 ‘특구 구조’를 뒷받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지방정치의 새로운 단계가 열릴 것을 기대하면서 100년 전 위스콘신 주의 정치개혁을 되돌아본다. 남북전쟁 이후 대기업과 대자본의 주도 하에 성장과 팽창에 도취되어 있던 미국 사회에 각성의 씨앗을 싹틔운 곳이었다. 개혁파도 사회당도 그곳에서 ‘이념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다. ‘민생’ 문제를 철저히 파고들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민생 문제의 잘못이 정치 관행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한국에서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제 구실을 못해 온 것은 100년 전의 미국과 대동소이한 상황이다. 위스콘신 정치개혁이 큰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원칙과 상식’을 억누르는 부패와 비리가 과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지방정치가 제 구실을 하게 되면 더 큰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서울, 경기도 등 단체장과 의회 다수파가 여야 간에 엇갈린 지역에 특히 큰 기대를 건다. 파당적 입장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파국을 일으켜 자기편의 결속과 지지를 강화하려는 반동적 시도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라도 지역민의 사랑을 놓고 생산적 경쟁을 통해 정치력을 키우는 노력이 일어난다면 지역민들에게 다행한 일일 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공헌이 될 것이다.


라폴레트가 1917년 참전 반대의 목소리를 당당히 모을 수 있었던 데는 위스콘신 정치개혁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1910년 최초의 사회당 하원의원이 된 빅터 버거는 반전 활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의회에서 쫓겨났지만 밀워키 시민들은 1918년에서 1926년까지 그를 다섯 차례나 하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비록 참전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참전의 문제점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미국 사회의 피해를 얼마만큼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정치의 극단적 퇴행을 보여주는 천안함 사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지방정치의 새 무대이기에 더욱 큰 기대를 걸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