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의 끝없는 길


버지니아大 E.D.허시 교수는 1987년 펴낸 “문화해독능력(Cultural Literacy)”에서 미국교육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을 지적,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금세기 초부터 미국 교육계를 지배해 온 자유주의 개혁이 교육의 실용성을 지나치게 침해해 미국교육의 생산성을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뜨려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교육이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는 데 실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正體性)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에 진보성향 지식인들까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후 그는 ‘핵심지식재단’을 만들어 ‘유능한 미국인’을 키워낼 교과내용을 개발-보급하는 일을 벌여 왔다.

작년 말 “우리에게 필요한 학교(The Schools We Need)”로 현대미국교육의 지나친 자유주의 경향에 다시 포문을 연 허시 교수의 주장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자유주의 개혁이 평등의 이념을 배반해 왔다는 역설이다. 교육의 성취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풍조가 학교교육의 전반적 기능을 저하시키고, 이에 따라 가정환경이 각 학생의 성취도를 좌우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했다는 것. 공교육 쇠퇴가 사교육 범람을 몰고 오는 우리 현실에도 맞는 통렬한 지적이다.

며칠 전의 4차 개혁안까지 우리 교육개혁위원회의 제안방향은 현대미국교육의 자유주의 개혁을 기본모델로 한 것 같다. 지금까지 교육계를 지배해 온 권위주의 풍조에 비쳐보면 참으로 신선한 내용이 많다. 때늦은 감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신속하게 이 개혁이 이뤄지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허시 교수의 미국 교육현실 비판을 보면서 목전의 우리 개혁이 교육문제의 궁극적 해결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점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4차 개혁안에 사교육비 대책이 뒤늦게야 포함되고, 또 그 대책이라는 것이 다른 부문에 비해 미온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근대 이전 교육과 근대교육의 첫 번째 차이점은 ‘국가사업’으로서의 면모에 있다. 근대국민국가의 이념이 근대적 보편교육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미국교육의 기능쇠퇴는 미 국민의 국가의식 약화와 맞물린 것이니, 이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정치는 이념을 따르더라도 교육은 현실적 기능을 잊어서 안 된다”는 허시 교수의 말을 우리도 지금부터 음미해야겠다.
(97. 6. 6)


공자가 한 일을 현대의 직업에 맞춰 보면 교사에 제일 가깝다. 인생의 후반기 동안 그의 일상은 제자들과의 대화로 이어졌고, 관직을 맡고 있을 때도 집에서 제자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공자 이전 중국의 교육은 기술의 전수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공자의 교육 역시 정치 기술의 전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 기술은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교육이 중국에서 본격적 학문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르치다”로 생각하는 뜻이 <논어>에는 “회(晦)”와 “교(敎)”의 두 개 글자로 나타나 있다. “교”는 몇 차례밖에 쓰이지 않았다. 이런 구절들이다.


"좋은 임금이 백성을 7년간 가르친 연후에 전쟁에 내보낼 수 있다." [13-29 子曰 善人 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가르치지 않은 채 백성을 전쟁에 내보내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3-30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가르쳐주지 않은 채 벌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20-2 子曰 不敎而殺 謂之虐]


"잘하는 자들을 모범으로 세우고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게 한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나아갈 것입니다." [2-20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擧善而敎不能則勸]


<설문해자>에는 “敎” 자를 “上所施, 下所效”라 하여 윗사람이 세운 모범을 아랫사람이 본받는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논어>의 사용 예를 보더라도 이 글자는 행동 기준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쓰였다.


훨씬 더 많이 쓰인 “회” 자는 <설문해자>에 “빛을 비춰줌으로써 가르친다(曉敎)”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말로 이야기해 줌으로써 가르친다(說敎)”는 뜻의 “훈(訓)” 자와 대비되어 있다. 그런데 <논어>에 “훈” 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주입식 교육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가르치는 일을 한 공자가 말로 가르치는 “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행동으로 가르치는 “교”에는 약간의 비중을 두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회”였다. 배우는 사람 마음속의 빛을 일으켜주는 가르침이었다.


“교육(敎育)”이란 글자 그대로 가르치고 키우는 일이다. 어버이가 자식의 성장을 돌봐주고(育) 생존방법을 가르쳐주는(敎) 것은 종족 보존의 차원에서 어느 동물이나 하는 일이고 문명과 관계없는 일이다. 문명 초기에 생존방법의 가르침이 기술 교육으로 확대되었다. “교”와 “훈”으로 이뤄지는 교육이었다.


그런데 문명이 어느 고비에 이르자 질서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발생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본능에 입각한 자연적 질서로는 사회의 더 이상 발전을 뒷받침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학문의 생명은 전파력에 있는 것인데, 공자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학문의 전파 방법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 전파 방법의 핵심이 있는 것을 옮겨주는 “훈”과 “교”를 넘어 없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게 해주는 “회”였다.


문명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교육을 만들어낸 인물로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지만, 어느 고대문명에서도 누군가가 비슷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중국문명이나 그리스문명에서도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혼자 해낸 일은 물론 아니었다.


고대문명에서 만들어진 “회(晦)” 차원의 교육은 중세 말까지 지배계층 안에서 활용되었다. 사회 질서를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느냐 하는 이념은 지배계층에게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의 교육 독점 상황이 오래되면서 교육에는 계급 고착의 역기능도 자라나게 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며 교육은 앞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사업이 되었다. 근대 국민교육의 성립은 두 가지 필요가 결합된 결과였다. 한 가지 필요는 분업 현상의 폭과 깊이가 늘어남에 따라 산업사회의 인간에게 필요한 기술과 지식의 분량이 늘어난 것이고 또 한 가지 필요는 국민을 근대국가의 성격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근대교육의 순기능으로 본다. 국민을 국가에 순응시킨다는 목적은 국가주의 강화를 통해 제국주의 갈등의 격화에 공헌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것은 시대 상황에 따른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사회체제가 격변하는 근대 상황에서 개인을 변화에 적응시키는 것은 교육의 자연스러운 기능인데, 국가주의 시대가 국가주의 교육을 만든 것이지, 국가주의 교육이 국가주의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니다.


물론 교육의 원리를 엄밀히 따져 국가주의 풍조에 지나치게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지만,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국가주의 시대에 국가주의를 완전히 외면하는 교육이란 현실 속에 성립될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순기능’이라 함은 좋은 도덕적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방향에 맞는다는 뜻이다. 어느 시점 한국 사회의 한국사 교육이나 국민윤리 교육도 그 시점의 상황에 비추어 어느 정도 옹호할 수 있는 관점이다. 이렇게 ‘순기능’을 넓은 범위로 설정하는 뜻은 이와 대비되는 ‘역기능’을 좁혀서 드러내려는 데 있다.


내가 중시하는 교육의 역기능은 계급 고착을 통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이다. 교육에 투입되는 비용과 노력이 사회 전체의 역량 증대라는 공적 목표가 아니라 승자들에게 우월한 위치를 보장하는 사적 목표를 위해 낭비되는 문제다.


1997년 위 칼럼을 쓸 때는 우리 사회의 교육이 권위주의 구조를 벗어나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할 때였다. 지나친 자유주의 경도가 교육의 공공성을 해칠 위험이 그때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문제는 이후 계속 심화되어 왔다. 독재시대의 권위주의 구조가 교육의 최소한의 공공성을 지키는 장벽 노릇은 했는데, 그 장벽이 제거된 후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찾지 못하는 채로 역기능만 확장된 셈이다.


교육 전문가가 아닌 내게는 교육계의 문제를 엄밀히 논구할 능력이 없다. 윤곽만을 보고 단순한 의견을 말한다면 교육이 시장 원리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어서 교육의 공공성이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다. 비생산적 학습 기능에만 매달려 마이너스게임의 양상을 심화시키고 극한적인 서열화로 사회구조를 경직시키는 역기능이 모두 이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이번 교육감 선거 관계 보도에서 ‘진보’ 후보와 ‘보수’ 후보로 구분하는 것을 보며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6인의 ‘진보’ 당선자가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같은 성향이라면 ‘진보’라는 이름이 적절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 중에 설령 진보주의 이념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한국 교육 상황은 이념을 펼칠 때가 아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급선무였던 것처럼.


6인의 ‘진보’ 교육감과 10인의 ‘보수’ 교육감 사이에 대립보다 경쟁이 펼쳐지기 바란다. ‘진보’ 교육감이라 해서 ‘보수’ 교육감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급진적 정책으로 선명성을 과시하기보다, ‘보수’ 교육감이라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원칙과 상식’에 치중하기 바란다. 그런 범위 안에만도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은가. 16 대 0, 15 대 1의 상황에서 ‘보수’라는 이름도 부끄러운 ‘야만’이 우리 교육계에 횡행했다. ‘진보’의 성취보다 ‘야만’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장 큰일이다. 숫자로는 10 대 6의 열세지만, 칼자루는 ‘진보’가 쥐고 있는 상황이다.

 

Posted by 문천


커 오면서 일본인의 ‘침략성’ 얘기를 많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식민 지배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대동아전쟁을 일본이 일으킨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일본의 침략성이 크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특정 시점에서 문화적 조건 때문에 공격성이 크게 나타나는 상황이 이해되면서 민족성 자체의 편향성을 생각할 필요는 줄어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제국주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모든 국가가 먹느냐 먹히느냐 양단간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였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를 이룩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팽창 없는 근대화의 길은 새로 근대화를 시작하는 국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전 세계 열강들에게 최대의 침략 대상은 중국이었다. 일본이 짧은 시간 내에 열강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데 유리한 위치 덕분이었다. 중국 침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자라나기 위해 필연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한국이 있었다. 한국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여 놓는 것이 대륙 침략에 유리한 위치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일본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을 무력으로 병탄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무력을 갖추기 전부터 일어나 합방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보다 온건한 주장이 합방 직전까지 이에 맞서 펼쳐졌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무단(武斷)파와 문치(文治)파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초기의 갈등은 무단파의 거두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1877)으로 몰락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당시 문치파는 정한(征韓)의 필요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 침략에 앞서 내부 정비가 먼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일본이 치른 대외전쟁은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두 차례뿐이었다. 당시의 열강치고는 전쟁을 덜 치른 편이다. 내실을 중시하는 문치파 노선이 대체로 관철된 셈이다.


한국을 어떻게든 일본에 유리한 자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 기간 내내 문치파도 인정한 과제였다. 조선 정부를 메이지유신과 같은 길로 이끌어 일본과 협력하는 관계를 맺자는 온건 노선에서부터 조선을 정벌해 속국으로 만들자는 강경 노선까지 여러 노선이 엇갈렸다. 결국 합방은 강경 노선에 가까운 귀착이었지만, 문치파 주장도 가미된 타협적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 대해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했을 때 갑오경장을 유도한 것은 일단 온건 노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왕비 살해사건이 일어난 것은 무단파의 불만이 분출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관파천이 촉발되어 영향력의 지속적 행사가 막힌 것을 계기로 강경 노선의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은 당분간 문치파의 온건 노선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 이 온건 노선을 대표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아관파천 이래의 교착상태를 벗어나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영향력을 다시 확보했다. 이때의 온건 노선은 보호국화 정책이었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육성하려던 계획은 ‘광무개혁’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진도가 너무 처진 조선을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온건 노선이라 하더라도 10년 전보다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광무개혁’이라고 따옴표를 쓰는 것은 전혀 ‘개혁’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개혁적 요소를 가리키며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질을 갖춘 개혁이 아니다. 실용적 목적을 위해 피상적 변화 몇 가지를 체계성도 없이 진행시킨 것일 뿐, 시대적 요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반동성은 무엇보다 황제권의 전제화에 나타난다. 일본의 온건 노선이 조선 왕권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 측면에는 평가할 만한 의미가 있다. 권력 사유화는 대외관계에 앞서 조선 국내의 체제 문제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이 문제의 극복에 일본이 노력한 것은 조선의 향후 진로를 조선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군주권의 축소가 침략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무조건 침략을 하려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 없이 더 쉬운 길이 많이 있었다. 아직 일본이 군국주의에 빠져들기 전의 일이었다.


온건 노선이건 강경 노선이건 한국을 일본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이상 똑같은 침략 노선으로 보자는 주장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보는 태도다. 물리적 힘으로 강제하는 강경 노선과 한국 쪽의 자발성을 가능한 한 키워내려는 온건 노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에서 한국의 진로는 일본의 존재와 의지를 고려하지 않고 결정될 수 없었다. 개항기 이전까지 중국의 의지를,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의지를 고려하더라도 주동적 판단에 따른 자발적 대응이라면 이쪽 사회의 발전을 위한 선택의 기회를 스스로 찾을 여지가 있다.


절제 없는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민족자결’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국가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제한된 선택의 범위를 가진다. 한국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힘을 주어진 여건으로 받아들여 왔다.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힘이 무너진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질서에서는 일본의 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갑오경장 당시의 ‘친일’ 내각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일본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받아들이는 방법과 범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와 미국에 의지해 일본의 영향력을 거부하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을미사변이,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견제로 일본의 영향력이 봉쇄된 데 고종은 만족하고 권력의 사유화에만 일로매진해서 대한제국을 세웠다.


러일전쟁을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면서 일본은 10년 전 갑오경장 때의 ‘지도’ 방식에 비해 강압적인 ‘통제’ 방식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顧問)정치의 방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종이 겉으로만 이에 응하는 시늉을 하면서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고 온갖 획책을 했기 때문에 외교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하는 을사조약과 더욱 강압적인 통감(統監)정치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일본의 통제를 피하려는 고종의 노력에 주권 수호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권 수호를 하더라도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다. 전형적인 고종의 수법 한 가지는 의정부 대신들을 자주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책 결정이 황제 아닌 의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대신을 자주 바꿈으로써 의정부의 활동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대신들이 자기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해서라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제국을 운영하는 동안 고종은 방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규모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돈과 관계되는 사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궁내부로 끌어들인 것을 보면 비자금 조성에 그야말로 전력을 기울인 것 같다. 이 비자금으로 밀사들을 움직여 열강들, 특히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고종에게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이권으로 유혹하면 열강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환상을 그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천황의 특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듬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가 1909년 6월 통감 직을 그만둘 때는 합방 정책이 구체화되고 있을 때였다. 조선 통감 자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셈이다.


합방 후의 조선 총독은 대신 급과 총리 급 사이에서 임명되었다. 총리 급을 넘어 국가 최고 원로인 이토가 총독보다 가벼운 통감 자리를 맡은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온건 노선을 대표하는 이토가 무력 합방을 피하거나 늦추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통감 자리를 떠난 몇 달 후 하얼빈에서 자신을 저격한 것이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석도다.” 말했다는 데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변화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최대한 만들어주기 위해 통감 자리에서 강경 노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그가 인생의 마지막 몇 해를 바친 일이었다.


지난 회에 을사오적 중 이근택이 단순한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적었는데, 그 후에 이근택의 행적을 다룬 관계 연구를 더 읽어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지나친 상상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용익과 경쟁하며 권력을 추구하는 비열한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럴 리는 절대 없다, 하고 명쾌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너무나 많은 음모가 난무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가식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고종이 “술수와 책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라고 적었었다. 그렇다. 들여다볼수록 고종이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도 꼭 안 해도 될 거짓말을 그저 거짓말 하는 보람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종은 무슨 일에건 드러난 거래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뭐든 이면계약을 맺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민비가 살해당한 닷새 후에 엄 상궁을 불러들인 일을 놓고 황현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란 극단적 표현을 썼다. 아무리 ‘야록’이라지만 선비의 몸으로 그런 표현을 임금에게 쓴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1907년 7월 퇴위 압력 아래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하는 장면에 대한 황현이 뭐라 했을지, 그에 관한 논평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때 일본에 망명했고, 10년 후 갑오경장 때 일본 등에 업혀 돌아와 총리대신에까지 올랐으나 민비 암살 음모 혐의로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추종자들을 통해 독립협회의 움직임을 조종했고, 1900년에는 고종 폐위 음모가 발각되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종이 그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 것은 온 나라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져 안팎의 양위 압박에 몰리자 고종은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했다. 자기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세력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에 연줄이 많은 박영효에게 매달린 것이다. 박영효는 그 한 달 전 일본 당국이 모르는 채로 입국했는데, 그것부터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 또한 황제와의 협력을 통해 지위를 확보할 뜻이 있었던 듯, 그가 궁내부대신을 맡은 며칠 후 그가 관련된 쿠데타 첩보에 따른 군사행동이 있었다. 양위식 전날이었다.


고종 양위의 직접 원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을 황제 자리에 두고는 언제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불신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황제 자리를 지켜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종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받은 외국인 알렌도 고종에 대해 “나는 그가 어떤 짓이라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체념한지 오래되었다.”고 일기에 적은 일이 있었다.


일본이 1905년 11월 강압을 통해 을사조약을 맺은 것은 나쁜 짓이었다.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 즉 정미 7조약을 맺은 것도 나쁜 짓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일 모두 일본 측에서는 저지르지 않으려고 상당히 애를 쓴 사실이 있었다. 그런 짓까지 않고도 일본의 국익을 확보하려고 이토 히로부미는 노력했다.


이토는 가급적이면 덜 강압적인 방법을 찾아내려고 여러 단계에서 노력했다. 일본 내에는 그의 온건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고, 고종은 그들에게 계속 이토 노선을 공격할 꼬투리를 만들어줬다. 이토도 물론 조선보다 일본의 국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을 취하는 쪽이 장기적 효과가 좋다고 믿었다.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보다 보호국으로 관리하는 쪽을 그는 택했을 것이다.


하나의 왕조로서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다. 국가가 망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의 하나가 권력 사유화다. 하나의 국가체제가 노쇠현상을 일으킬 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은 쇄신을 촉구하기도 하고 파탄을 촉진하기도 한다. 개항기 이후 조선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대표한 것은 일본의 야욕이었다. 이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이 주효했다면 일본에서도 온건 노선이 득세할 많은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그 와중에도 극단적 권력 사유화에만 매진하며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조선 말기의 방문자 중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히는 영국의 비숍 여사는 조선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연해주에 가서 그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탄복했다. 서로 도와가며 질서를 지키고 생업을 키워나가는 그 모습이 국내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어 같은 민족인 줄 알아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고종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 왕으로 있어서 훨씬 더 대응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19세기 말 조선에 닥친 시련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에도 숭고하고 비천한 품격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한 국가의 멸망에서도 그 사회의 격조가 나타난다. 의로운 죽음에는 미래를 위한 밀알의 가치가 있다. 조선 왕조 멸망의 책임을 고종 한 사람에게 물을 일은 아니지만, 왕조 멸망에 임해 민족사회를 비참한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그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연초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5월 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6월로 들어오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꽤 남았네요. 그러나 주 2회 정기 연재는 이번 회로 일단 끝내겠습니다. 몇 주일 생각을 가다듬은 뒤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 달에 더 잘 정리해서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필자-)


Posted by 문천


며칠 전 뜻밖의 소설책 한 권을 택배로 받았다. 김종록의 <달의 제국>. 이완용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그 동안 이런저런 글에서 내가 제시해 온 ‘친일’에 대한 관점에 공감되는 것이 있어서 내게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완용을 미워하기보다 가엾게 보는 시각을 제시한다.


100% 공감이 가는 시각은 아니다. 나는 이완용을 생각하면 가엾은 생각보다 미운 생각이 더 든다. 그러나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 악마 같은 존재로 여기며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많은 사람들의 통념에 비해서는 김 작가의 시각에 공감이 간다. 이완용보다 더 근본적인 책임이 고종에게 있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에는 강하게 공감한다. 보다 깊이 있는 시각을 찾는 노력이 문학 방면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반갑다.


‘을사오적’이란 말이 누구 입에서 시작된 것인지 조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당장 찾아보지는 못했다. 마녀사냥 내지 희생양의 의미가 다소 곁들인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침략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종과 대한제국을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신 몇 사람에게 상징적인 책임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대신들의 그 후 행적을 보면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은 차치하고 “인간이 어찌 저럴 수 있었을까?” 싶은 파렴치한 면모를 많이 보인다. 그러나 1905년 당시에는 고종에게 적어도 충성하는 척이라도 하며 그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종에 의해 그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었고, 고종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을사조약 체결에서 그들이 매국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그 역할은 고종의 대리인 노릇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당시 대한제국 의정부에는 참정 한규설을 위시해 8명의 대신이 있었다. (9인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태진, 사사가와 노리가츠 공편 <한국 병합과 현대>(태학사 펴냄) 소수 이태진, “1905년 ‘보호조약’에 대한 고종황제의 협상지시설 비판”에 나타난 8인뿐임.) 참정대신 한규설(1848~1930), 외부대신 박제순(1858~1916), 내부대신 이지용(1870~1928),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 법부대신 이하영(1858~1919), 학부대신 이완용(1858~1926), 탁지부대신 민영기(1858~1927)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1934)이다.


이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우선 정통 관료의 비중이 적다는 점과 대외관계 종사자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정통 관료에 제일 가까운 것은 문과 출신의 박제순과 무과 출신의 한규설이었다. 이지용은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인 종친이었고, 민영기는 여흥 민씨 척족이었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문과 출신이지만 일찍부터 대외관계에만 종사했다. 권중현은 ‘일본통’으로 등용된 인물이었고,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에 피신해 온 민비에게 잘 보여 고종의 측근으로 자라난 인물이었다.


이들 중 다섯 명이 ‘을사오적’의 이름을 받았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돌베개 펴냄)에서 이들의 행적 두드러진 것을 뽑아본다.


이완용은 원래 영어를 익히고 ‘미국통’으로 활동하다가 아관파천 때 친러파 정부에 참여해 정치적 위상을 키웠다. 독립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으나 대한제국 건립에 독립협회를 이용하는 목적을 넘어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산이 분명해지자 일본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해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합병조약 때는 총리대신으로서 주동적인 역할을 맡았다. 당시 대부분의 친일파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고 매달린 것과 달리 이완용은 일본 쪽에서 필요로 해서 손을 뻗쳐 온 경우라 볼 수 있다.


권중현은 개화파 중 일본통으로 평판을 누리고 있다가 1888년 일본 시찰을 계기로 친일 활동을 꾸준히 하게 되었다. 1897년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에 앞장선 공으로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1907년 군부대신 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적극적인 활동이 없었다.


이지용은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소문을 많이 일으킨 인물이다. 탐관오리로서의 악명도 쟁쟁했고, 너무 앞선 신여성이었던 그 아내 홍씨가 일본인들과 놀아나며 일으킨 엽기적 스캔들이 <매천야록>에까지 적혀 있다. 을사조약에 앞서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도 그가 외부대신 서리로서 저지른 일이었다. 을사오적이 일본의 뇌물을 받았다는 말도 떠도는데, 다섯 사람이 다 사전에 뇌물을 받은 것 같지 않지만 이지용이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왕실에 줄이 닿은 인물인데 대한제국 설립 무렵부터 중용되기 시작했다. 재정-외교 분야의 이용익과 나란히 군사-경찰 분야를 맡아 고종의 가장 큰 신임을 오랫동안 받은 친러파 기수였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이용익이 납치되다시피 일본에 끌려간 반면 이근택은 친일로 돌아섰고, 친일파 중에도 악질 친일파로 이름을 날린 사실이 <매천야록> 여러 기사에 나와 있다.


김윤식의 문인인 박제순은 친청파로 경력을 시작했고 1902~04년간에도 주청 공사 직을 지냈다. 한규설의 전기에는 박제순이 마지막까지도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하며 조약 반대의 뜻이 굳건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회의에서 무슨 이유로 뜻을 바꿨는지는 어느 자료를 봐도 석연하지 않다. 한규설이 축출된 후 참정대신 자리를 물려받았고 합방 후까지 계속 일제에 협력하였으나 특별히 두드러진 행동은 없었다.


이렇게 다섯 사람이 ‘을사오적’이다. 8인의 대신 중 3인이 이 오명을 피했으나, 그중에서 친일을 끝내 거부한 사람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이하영과 민영기는 을사조약 한 가지 일에만은 나서지 않았지만, 어느 친일파 못지않게 일제에 열심히 협력했고 합방 때 작위도 받았다.


이지용이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는 오늘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매천야록>과 정교의 <대한계년사>에 나와 있다. 당시의 친일파도 나름대로 자기합리화에 애썼음을 알겠다. 그러나 이건 너무 얄팍하다. 최명길에게는 벌어져 있는 전란으로부터 구해줘야 할 백성이 있었고, 청나라에 항복해서 잃는 것은 명나라와의 관계뿐이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도 물론 중요한 것이었지만, 비현실적 정통론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과는 댈 것이 아니었다. 1905년의 상황을 1636년의 상황에 갖다대다니, 정말로 두터운 낯가죽이다.


이지용과 함께 <매천야록>에서 많이 씹힌 것이 이근택이다. 그런데 이근택의 처신은 이지용처럼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에 관한 <매천야록> 기사를 뽑아 본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해서는 그를 결박지워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아내에게 억지로 맺은 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뛰어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종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이근택은 임오군란 때 충주에 피신해 온 민비에게 매일 신선한 생선을 바쳐 점수를 땄다고 한다.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그러고도 미관말직을 겨우 얻어가지고 있다가 민비가 죽은 후 어느 일본상점에서 민비의 것으로 보이는 수대(繡帶)가 눈에 띄어 거금으로 사다가 고종에게 바치면서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100% 사실일 것 같지 않다. 조폭 스타일의 충성관계에 너무 전형적인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임금과의 밀착관계를 적당히 설명하는 데 쓰인 얘기 같다. 마찬가지로 임오군란 때 민비와 인연을 맺었던 이용익과 함께 다년간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 노릇을 한 것은 이런 식의 개인적이고 직선적인 충성 외에는 이유를 생각할 길이 없다. 그런 인물은 부귀영화를 찾더라도 한 구멍에서만 찾는다.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며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꿔 타는 스타일이 아니다.


미천한 신분 때문에 어차피 선비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쉽던 그는 친러파 치안 책임자로 일할 때도 위악적 태도로 “더럽고 악랄한 놈”이란 악명을 자청했을 것 같다. <매천야록>에 적힌 정도의 행태는 욕을 일부러 사서 먹음으로써 의도하는 방향의 처신을 쉽게 하기 위한 책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절의가 분명히 드러날 인물인 한규설이 그와 사돈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겉보기만으로 판단해 버릴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근택의 ‘변절’이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종은 술수와 책략에 사족을 못 쓰는 임금이었다. 을사조약 같은 상황 앞에서 그가 양다리 걸치기를 시도하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한편으로는 밀사들을 통해 조약 체결이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국권 회복을 도와달라고 열강들에게 읍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믿을 만한 충복을 친일파에 들여보내 정보도 수집하고 조그만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다.


“5적”이란 이름이 굳어져 있지만, 사실 당시의 8대신 중에 ‘7적’이 있었다. 대한제국 신하 노릇을 온전히 한 대신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이들을 대신으로 임명하는 데 일본의 강압이 있은 것도 아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고종의 선택이 남긴 결과였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앞에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들도 있었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1905년 11월에 국사를 앞장서서 맡고 있던 8인의 대신 중 7인이 을사조약 체결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면서 사태의 진전에서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사양 없이 받아들였다. 대한제국 의정부는 당시의 국민들 또는 지식인 계층과 다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밤중에 조약이 날인된 후 일본인들이 군인들을 이끌고 물러간 뒤에야 연금 상태에서 풀려난 한규설을 둘러싸고 대신들이 한바탕 방성통곡을 터뜨렸다고 한다. 통곡 중에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지나가고 있었을까 궁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자기 옆의 동료 대신이 자기와는 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함께 일해 오면서 각자 잘 알게 되어 있었을 텐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