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제자 이경자 선생님이 며칠 전 요양원에 다녀가셨다. 다녀가신 말씀을 원장님께 메일로 듣고 감사 인사를 전화로 드리려는 참에 먼저 전화를 주셨다. 마침 그 날 내가 올렸던 글 “역사학의 위기, 역사의 위기”가 각별히 마음에 드셨다고 치하해 주신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 퇴직 전 같은 학교에서 가까이 지내던 L 교수 말씀을 하신다. 나를 아는 분인 L 교수와 아까 통화했는데 L 교수도 그 글을 무척 좋아하더라고.


L 교수. 고등학교 때 서클활동 같이 한 분인데, 참 좋은 분이다. 대학 때 꼭 한 번 해수욕장에서 마주친 후로 40년간 안 보고 지내 왔는데, 내 글을 좋게 봐 주셨다니 실없는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L 교수 앞으로 메일을 쓰다 보니 불쑥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K 병장. 75년 늦깎이로 군대 갔을 때 나를 조수로 받아 업무를 넘겨주고 제대한 분이다. 혹시 이 분 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K 병장이 L 교수에게서 연상된 것은 그가 L 교수의 동생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비질비질 새어나온다.


어느 날 저녁 후 중대 사무실에서 K 병장에게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심심한 고참들이 나를 놀려먹으려 들고, K 병장은 업무 방해를 차단하기 바빴다. 한 고참이 내게 여자 전화번호 하나 내놓으라고 한다. 휴가 가서 연락해 주겠다고.


든든한 사수를 믿고 내가 겁이 없었다. 들이미는 종이에 “73-0001”이라고 적어줬다. 여자 이름도 달라기에 “박근혜”라고 적어줬다. 적어놓은 것을 보고 “이거 뭐야? 좀 이상한데?” 하고 고개 갸웃거리는 것을 보고 K 병장이 “왜 그래?” 종이를 당겨보고는 대뜸 “야! 이거 청와대 번호잖아? 내 친구 집이 72-0001번이라서 내가 알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런! 나도 친구 집 번호가 72-0001번이라서 청와대 번호를 알게 된 건데! (워낙 별난 번호라서 안 보고 지낸 지 여러 해가 돼도 기억하고 있었다.) K 병장에게 물었다. “그 친구가 혹시 L 씨 성 아닙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집에 제 친구도 있거든요.” “아니, 그럼... 니가 아무개 누나 친구란 말야?”


지금 생각해도 K 병장에게 미안하다. 말년 호강은 첫째로 조수 능력에 달린 것인데 친구 누나 친구라는 넘을 조수로 ‘모시게’ 되다니! 군대 밖의 관계는 군대 안의 위계관계에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피차 다짐을 하기는 했지만,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나? 표는 안 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떠날 때까지 그의 마음이 어떠했다는 것은 뻔히 짐작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 늙은 졸병이 눈치는 없고 곤조만 있어서 걱정 많이 시켜드렸지.


L 교수에게 전화번호를 받아 K 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L 교수 친구로 군대에서 K 사장님 밑의 조수로 근무했던 아무개인데, L 교수와 연락이 닿게 되니 옛날 고마운 생각이 나서 책이라도 하나 보내드리고 싶다고. 어리둥절한 채 주소를 불러주는데, 아무래도 좌표가 잘 잡히지 않는 기색이다.


그러고는 한 시간쯤 있다가 전화가 왔다. “아까 전화로 잘 파악이 안됐는데, 친구라는 L 교수가 누구시죠?” “K 대 있는 친구분의 C 대학에 있는 누님 말씀입니다.” “아! 아무개 누님?! 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네, 제가 군대를 좀 늦게 가서 폐를 많이 끼쳤죠.” 몇 마디 더 얘기를 하다가 K 병장과 각별히 친하던 B 병장 이름이 생각나 얘기하니 더욱 반가워한다. B 병장과는 아직까지 친분을 지키고 지낸다고.


그렇구나. K 병장과 B 병장은 군대 인연을 평생 잘 지키고 지내 왔구나. 나는 군대에서 만난 사람 아무도 안 보고 지내 왔는데. 군대 인연만이 아니다. L 교수와도 40년 만에 메일 나누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 수십 년씩 안 보고 지내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근래 와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을 보며 지내게 되니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살아가는 방식을 좀 바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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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