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소박하면서 함축적인 한 마디에 많은 사람들 속이 후련했다. 말도 안 되는 시비에 최대한 간결한 반박이다. 그 한 마디를 넘어 신문에 답변할 필요도 없다. 말 아닌 말에 말 섞으면 내 말까지 버릴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도 한 말씀 하셨다는데, 음미할 점이 많은 말씀이다. 한 총리처럼 자신감을 담은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고 겸손의 말씀도 아니고. 어이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쇠퇴하신 지 십여 년 되신 분의 자기 인식이 어찌 저렇게 늠름하실 수 있는 것인지, 참 신기하다.

제자인 이미희 선생이 엊그제 요양원에 찾아가 뵙고 보내준 메일에는 흥분이 넘쳐난다. 몇 주일 전 나랑 함께 간 것이 십여 년만에 뵙는 것이었고, 그 날 어머니가 어렴풋이 알아보기는 해도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으셨다. 엊그제 혼자 가면서는 알아보지 못하실 것을 각오하고 갔을 것이다.

예전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을 이 선생이 말씀드려도 별로 기억하시는 것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생을 흥분시킨 것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씀이었다고. 집에 불러 손수 밥을 해 먹여주신 일 말씀에도 "내가? 그럴 리가...", 어머니 작품 보여주신 일 말씀에도 "내가 제자에게 그랬을 리가 있나?", 어머니에게 엽서 받은 일이 있다는 말씀에는 "나는 그런 선생이 아니었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반응이셨다고 한다.

이 선생이 색바랜 엽서를 꺼내 보여드렸을 때 어머니 표정을 나도 봐야 하는 건데!

이 선생의 흥분과 기쁨도 눈에 선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데," 하는 뚜렷한 자기 인식부터 노쇠하신 어머니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어머니는 학생들과의 거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셨던 모양인데, 그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있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시는 예외가 이 선생 자신이었고, 그런 예외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기가 와서 일깨워드리고 있는 것이다.

요즘 가까운 사람들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머니가 보이시는 반응으로는 살아오신 위치와 자세를 대략 기억하시는 것 같고, 학생들을 대하시던 태도도 웬만큼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옛 제자가 친밀했던 경험을 일깨워드릴 때 "나는 그런 선생이 아니었는데..." 하실 정도로 확고한 인식은 기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식을 또 뛰어넘는 굴곡에 마주치시다니.

'팔림세스트 palimpsest'란 말이 생각난다. 유럽 중세에는 양피지 값이 비싸기 때문에 한 번 썼던 내용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지우고 다른 내용을 새로 쓰는 일이 많았다. 현대 서지학자들이 지웠던 내용을 복원해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얻곤 한다. 당시 기준으로 보존 필요가 없던 내용이 지금 연구에 요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옛 자료에도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값싸면서 재활용이 힘든 종이라는 재료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중요한 현상이 아니다.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는 '팔림세스트'가 비유로도 널리 쓰이는 말이다. 이미희 선생의 등장으로 어머니의 자기 인식에도 '팔림세스트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

나는 어머니가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면서 자라났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졸업반이던 4-19, 5-16 때부터 학생들과 거리를 지키는 편으로 태도를 굳히셨던 것 같다. 관계를 오래 지켜온 제자들은 그래서 대개 나보다 열 살 이상 윗분들이다. 4-19를 계기로 학교 개혁 주장에 나섰다가 한 차례 된서리를 맞고 위축되셨던 모양이다. 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이효재, 윤정옥 선생님과 보조를 맞춰 정치적 태도를 조금이나마 표명하신 것은 자식들을 다 키워놓은 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씀을 마음대로 하실 수 없는 상황이 제자들 대하시는 태도에도 제약을 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80년 신군부 때도 조사받으러 들어가셨으니,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조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음 통하는 학생들과 할 소리 못할 소리 가리지 않고 지내셨다면 탈이 나도 큰 탈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희 선생이 (73학번인가?) 다닐 때는 4남매 다 대학 졸업까지 하고 어머니가 모처럼 하고 싶은 일 조금이라도 찾아 하기 시작하실 때였다. 이 선생에 관해 여기가 시시콜콜한 얘기 꺼낼 자리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이 선생에게 각별한 동류의식을 느끼셨던 것 같다고 그는 회고한다. 어머니 나름으로는 딸처럼 대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 자식 대하시는 태도가 여느 어버이와는 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이 선생과 마주치면서 내게도 팔림세스트 현상이 일어났다. 20여 년간 내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던 일들이 생각나게 된 것이다. 이 선생 관계된 조그만 일 하나를 내게 도와주라고 어머니가 부탁하셨던 일이다. 떠올리고 보면, 어머니가 제자 일을 내게 부탁하신 일이 그것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 선생이 어머니와의 지난 일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어머니가 그렇게 학생을 대하신 일이 있었나? 새롭게 들리는데, 이 선생과의 관계는 어머니에게도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험이었음이 틀림없다.

며칠 후 가 뵐 때 이 선생 얘기하면 엊그제 일도 거의 기억을 못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생이 옛날 일 떠올려드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자극이 자꾸 겹쳐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기억이 화통해지실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일이 설령 있더라도 크게 좋아할 일인지 판단할 수 없다. 글쎄? 어느 책갈피에 큼직한 채권 꽂아두신 거라도 생각나신다면 몰라도.

그래도 어머니 인생이 그만큼 더 충실해지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오는 느낌일 것이다. 나 자신도 겪어온 일들 가운데 기억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많다. 주변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눈 일도,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 드린 일도. 지금까지도 할 일에 쫓겨 떠오르려는 기억마저 억누르며 지내는 꼴이지만, 좋은 인연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고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반성할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오죽잖은 한 인생이라도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옛날 일을 지금 기억하신다 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실 여지는 별로 없다. 그저 자기 인식이 확충되는 것일 뿐이고, 그것도 인식하시는 순간 뿐, 기억으로 쌓이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식의 조건이 아닐까? 행동의 부담은커녕 기억의 부담조차 없는. 요양원 옮기신 뒤로 언제 뵈어도 보살도에 이른 것 같은 모습이시다. 이런 상태에서 자유로운 자기 인식을 넓혀 드리는 것이 성불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님 전 상서  (1) 2010.05.16
10. 5. 11  (1) 2010.05.12
10. 4. 23  (6) 2010.04.23
10. 4. 9  (2) 2010.04.09
10. 3. 27~28  (0) 2010.03.30
Posted by 문천
 


유럽인은 16세기 초부터 동인도제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18세기 말까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물동량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제일 많이 가져온 것은 아메리카에서 캐낸 은이었고, 아시아에서 유럽어로는 향료와 비단, 차, 도자기 등 사치품을 실어갔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직물 등 유럽 공산품과 면화, 고무 등 원료를 대량으로 실어오고 실어가기 시작하면서 물동량이 많아졌다. 인도와 동인도제도의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플랜테이션이 확대되고 유럽 제품의 소비시장도 커졌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교역의 확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를 계속해서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의 비교적 안정된 상태의 사회들에도 점점 강한 자극을 주게 되었다.

산업혁명 전까지 교역의 규모는 유럽인이 조달하는 은의 분량으로 제한되었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에 가져가 팔 물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인의 아시아 산 사치품 수요는 은 채광의 확대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자라났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유럽 상품의 시장 확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대량생산으로 생산비를 절감한 유럽 공산품은 문턱만 없앨 경우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아직 유럽 공산품의 시장성이 미흡한 단계에서 영국인이 들고 나온 아편은 틈새 상품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중국에는 아편에 대한 큰 잠재 수요가 있었는데, 이것을 청나라 행정력이 억누르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재배를 금지할 능력만 있지, 반입을 금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수십 년간 지탱할 수 있었다. 1860년대에 재배 금지가 풀린 후 중국의 아편 생산은 전 세계 생산량의 90% 이상까지 확대된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 상품의 중국 시장 진출이 확대되었지만, 200년간 계속되어 온 중국의 수출초과가 억제되는 정도로, 중국 경제에 결정적인 파탄을 불러오지는 않는 상태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중영전쟁 후 1860년대에 시작된 양무(洋務)운동은 확대된 교역 수입을 발판으로 진행되었다.

양무운동을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능동적 개혁 노력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이 있다. 1884년 청불전쟁과 1894년 청일전쟁 패배가 증명하는 것처럼 근본 목적인 '자강(自强)'에 실패했다는 기능적 비판이 있고, 물질만 알고 정신을 알지 못했다는 양계초 류의 이념적 비판도 있다. 20세기 중엽 이후로는 봉건적 지배체제에 집착한 매판사업이라는 비판이 여러 각도에서 나왔다.

나도 학생 시절 양무 시기를 훑어보면서 양무파가 서양 열강에게 취한 저자세에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양무운동의 성과가 시원찮은 데 답답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무운동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함에 따라 그 의미와 한계를 보다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1860년대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1890년대와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랑캐에게 황도를 유린당하는 일이 역사상 흔한 일은 아니라도,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진짜 있어서 안될 것은 태평천국(1850-64)이었다. 제국의 영토를 분점하고 인민을 장악하는 내부의 적, 이것이 중국의 역대 왕조에게는 가장 무서운 '심복지환'이었다. 한 차례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외부 오랑캐의 침공은 그에 비하면 가벼운 걱정거리였다. 물론 오랑캐가 중국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복왕조를 세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까지 서양 오랑캐들은 통상 확대를 꾀하고 재물을 탐할 뿐, 중국을 삼켜버릴 기세를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태평천국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이 반란들의 원인 중 서양 세력 진출과 관련된 요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운 지 2백 년 넘은 왕조의 노쇠현상이었다. 양무운동의 당면 목표는 내부 불안을 극복하는 왕조의 '중흥'이었다. 그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와의 대결은 최대한 미루려고 애썼다.

양무운동의 지도자 증국번(曾國藩, 1811-72), 좌종당(左宗棠, 1812-85)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모두 태평천국 진압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1870년 증국번을 이어 북양(北洋)대신으로 청나라 대외정책의 칼자루를 처음 쥘 때 이홍장은 열강들의 도움으로 태평천국을 진압한 경험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열강과의 대립을 피하는 것이 이홍장의 금과옥조였기 때문에 매국노[漢奸]의 오명을 널리 뒤집어쓰기도 했다.

1880년대에 접어들며 제국주의가 고조됨에 따라 이홍장의 북양대신 업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중요한 조공국인 베트남과 조선이 불안하게 되었다. 메이저리거인 프랑스가 달려든 베트남에서 너무 쉽게 물러선 이홍장은 좌종당에게 "천고에 더러운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그 대신 조선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인 것은 일본에게까지 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 청나라의 군비 증강은 대외용이 아니라 대내용이었다. 열강에게 얻은 군사력으로 내부 반란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84년 청불전쟁 때는 정면대결을 피해 물러섰던 것이다. 1880년대의 군비 증강은 그보다 한 등급 위였다. 일본을 의식한 것이었다. 1874년 일본군의 대만 원정 때부터 품은 경계심이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사정을 둘러싸고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서양 열강의 존중을 받고 동맹 상대로서 동아시아 지역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그런 상황만은 청나라가 막고 싶었을 것이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으로 근대세계에서 두 나라의 운명이 드러났다. 이홍장이 이끈 청나라 양무파는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는, 안전한 노선을 기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최소한의 목표도 이루지 못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청나라의 구체제로는 시대 변화에 적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 속에서 변법운동, 의화단, 입헌운동, 혁명운동 등이 어지럽게 뒤얽혀 전개되기 시작했다.

1854년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 앞에 문을 열 때, 40년 후 청나라를 격파할 힘을 키우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일본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문을 두드린 서양인 중에도 그 나라가 50년 후 러시아를 이길 것을 상상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근대 서양의 기준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준으로도 미개한 작은 나라였다. 개항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기회 아닌 위기였을 뿐이다. (1798년 <세이이키모노가타리(西域物語)>에서 동양의 대일본섬과 서양의 에게레스섬이 대부국, 대강국(大剛國)으로 출현할 것을 내다본 혼다 도시아키(本田利明)는 분명히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이 미국 입장에서 급한 일은 아니었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오랫동안 거래관계를 유지해 왔고, 갑자기 교역을 크게 늘릴 상품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지나는 길에 있으니까 장래의 가능성을 막연히 바라보며 일단 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페리 개항 이후에 마침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러시아를 공격하러 일본 북방에 출동하면서 접촉이 자연스럽게 늘어났을 뿐, 일본에 대해 별다른 전략적 접근이 없는 상태에서 십여 년이 지난 후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보다 '개화'에 성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 있었는데,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요인들이 지금까지 더 많이 거론되어 왔다. 연구자들의 치밀한 검토가 앞으로도 많이 필요한 주제인데, 일단 상식의 차원에서 나도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외부 세력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연착륙'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1837년에 서양 열강의 본토 침략을 당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개항 6년 후인 1882년부터 외국군의 주둔이 시작되었다. 그 12년 후에는 외국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처럼 강한 외세의 작용이 없었다.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은 러시아에게 있었지만, 개항 전부터 영국이 철저하게 견제해 주고 있었다.

특히 개항에서 유신에 이르는 14년간 외세의 존재는 일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의 자극을 주었다. 1863-4년 조슈와 사츠마 번이 독자적으로 벌인 적대행위에 대한 영국 등 서양 세력의 절제된 반응은 두 웅번과 막부 사이의 갈등이 빠른 속도로 풀려나가는 배경이 되었다. 이 14년간 일본, 특히 유신의 주역이 될 웅번들은 극히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침략의 야욕을 가진 외세가 없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여유였다.

또 한 가지 일본이 '개화'에 유리했던 점은 중국과 조선 같은 중앙집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앙집'권'이란 권력만이 아니라 권위도 뜻하는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에서는 개혁을 위한 노력의 대부분이 권력과 권위의 중심축인 왕조로 집중되었는데, 두 나라 다 왕조의 기능이 퇴화 단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일본에서는 '개화'의 과제 앞에서 권력과 권위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 것이 일본 성공의 극히 중요한 조건이었다.

메이지유신의 출발점인 1868년의 '대정봉환(大政奉還)' 후에도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어졌다. 20년이 지난 후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1889)을 전후해서야 근대 일본의 국체(國體)가 안정된 모습을 드러냈고, 그 5년 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성공'이 확인되었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처럼 외세의 강한 압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개항 후의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 시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모델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두 나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는 시점에서부터 일본 모델을 더 중시하는 추세가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추세가 갑신정변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델의 올바른 선택이 행복한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일본보다 더 큰 관성을 가지고 급진 노선의 실행에 제약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과 달리 조선에게는 강한 침략 의욕을 가진 외세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자신이었다.



Posted by 문천

경기도박물관의 두 분 학예사가 다녀갔다. 6월 19일부터 8월 15일까지 임진각 내 경기평화센터에서 열릴 <6-25전쟁 60주년 특별전>에 아버지 일기를 전시하기 위해 대여하러 온 것이다.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가 전화로 소개를 해주며 "좋은 전시회"라고 보장하기에 마음놓고 응한 것인데, 학예사들이 와서 설명해주는 것을 들으니 정말 좋은 전시회 같다. 6-25 기념사업이라면 그저 "반공"만 외치던 시절과는 격세지감이 든다. 이런 구성이라고 한다.

1부 : 끝나지 않은 전쟁
2부 : 이방인의 아리랑
3부 : 삶과 죽음의 기억, 피난일기
4부 : 철마는 달리고 싶다.

아버지 일기는 3부에 전시할 것이고, 1부에는 좋은 사진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2부에서 외국인 참전 장병들의 사연을 나타낸다는 것도 참 좋은 방향 같다.

잠깐 앉아 얘기하다가 한 차례 셋이 크게 웃은 것은 1994년인가? KBS에서 만들었던 다큐 때문이었다. 아버지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니까 그것도 필름을 구해서 전시하려 한다고 하기에 "그 다큐는 나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사람들도 보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니까 어리둥절해서 왜 그러냐고. "유인촌이 주연이었거든요." 했더니 그 자리에서 뒤집어진다. 두 분 다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기색이다.

연락을 받은 뒤 생각한 일 한 가지를 얘기했다. 이 일기에 보존이나 전시의 가치가 있다고 경기도박물관이든 어느 기관이든 인정한다면 기증하고 싶다고. 책으로 내는 데는 일기에 지우고 고쳐 쓴 곳이라든가 미묘한 내용을 다 담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런 내용을 다 확인하고 싶은 연구자가 있을 경우 유족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보다 적절한 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유물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면 개인보다 사회에 귀속시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두 분 중 선임자인 박 선생이 의견을 얘기해 주었다. 경기도박물관을 선택하신다면 반갑게 받아들일 것을 확신한다고. 그러나 더 적절한 기관이 있을지 생각해 보고 알아보겠다고. 진짜 모범답안이다.

최근 낸 책 머리말에서도 밝혔지만, 그 일기는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름대로 크고작은 영향을 이 일기로부터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그 원본이 개인 서재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보다 공공 관리를 받는 편이 쓰신 분의 뜻에 더 맞을 것 같다.

(이 글 읽는 분들 중에 어느 박물관이나 도서관이 일기 원본을 관리하기에 좋은 곳일지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K 병장님! 돤~결! 김 이병입니다.  (1) 2010.06.07
고마워요, 희진님  (1) 2010.05.05
4월 27일 산행  (5) 2010.04.25
17일 한겨레 기사 유감  (3) 2010.04.18
천리마의 뼈를 팔아먹다.  (0) 2010.04.15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