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은 16세기 초부터 동인도제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18세기 말까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물동량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제일 많이 가져온 것은 아메리카에서 캐낸 은이었고, 아시아에서 유럽어로는 향료와 비단, 차, 도자기 등 사치품을 실어갔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라 직물 등 유럽 공산품과 면화, 고무 등 원료를 대량으로 실어오고 실어가기 시작하면서 물동량이 많아졌다. 인도와 동인도제도의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플랜테이션이 확대되고 유럽 제품의 소비시장도 커졌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교역의 확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를 계속해서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의 비교적 안정된 상태의 사회들에도 점점 강한 자극을 주게 되었다.
산업혁명 전까지 교역의 규모는 유럽인이 조달하는 은의 분량으로 제한되었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에 가져가 팔 물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인의 아시아 산 사치품 수요는 은 채광의 확대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자라났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유럽 상품의 시장 확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대량생산으로 생산비를 절감한 유럽 공산품은 문턱만 없앨 경우 큰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아직 유럽 공산품의 시장성이 미흡한 단계에서 영국인이 들고 나온 아편은 틈새 상품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중국에는 아편에 대한 큰 잠재 수요가 있었는데, 이것을 청나라 행정력이 억누르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재배를 금지할 능력만 있지, 반입을 금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수십 년간 지탱할 수 있었다. 1860년대에 재배 금지가 풀린 후 중국의 아편 생산은 전 세계 생산량의 90% 이상까지 확대된다.
아편전쟁 이후 유럽 상품의 중국 시장 진출이 확대되었지만, 200년간 계속되어 온 중국의 수출초과가 억제되는 정도로, 중국 경제에 결정적인 파탄을 불러오지는 않는 상태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중영전쟁 후 1860년대에 시작된 양무(洋務)운동은 확대된 교역 수입을 발판으로 진행되었다.
양무운동을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능동적 개혁 노력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이 있다. 1884년 청불전쟁과 1894년 청일전쟁 패배가 증명하는 것처럼 근본 목적인 '자강(自强)'에 실패했다는 기능적 비판이 있고, 물질만 알고 정신을 알지 못했다는 양계초 류의 이념적 비판도 있다. 20세기 중엽 이후로는 봉건적 지배체제에 집착한 매판사업이라는 비판이 여러 각도에서 나왔다.
나도 학생 시절 양무 시기를 훑어보면서 양무파가 서양 열강에게 취한 저자세에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양무운동의 성과가 시원찮은 데 답답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무운동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함에 따라 그 의미와 한계를 보다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1860년대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1890년대와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랑캐에게 황도를 유린당하는 일이 역사상 흔한 일은 아니라도,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진짜 있어서 안될 것은 태평천국(1850-64)이었다. 제국의 영토를 분점하고 인민을 장악하는 내부의 적, 이것이 중국의 역대 왕조에게는 가장 무서운 '심복지환'이었다. 한 차례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외부 오랑캐의 침공은 그에 비하면 가벼운 걱정거리였다. 물론 오랑캐가 중국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복왕조를 세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까지 서양 오랑캐들은 통상 확대를 꾀하고 재물을 탐할 뿐, 중국을 삼켜버릴 기세를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태평천국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이 반란들의 원인 중 서양 세력 진출과 관련된 요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운 지 2백 년 넘은 왕조의 노쇠현상이었다. 양무운동의 당면 목표는 내부 불안을 극복하는 왕조의 '중흥'이었다. 그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외부와의 대결은 최대한 미루려고 애썼다.
양무운동의 지도자 증국번(曾國藩, 1811-72), 좌종당(左宗棠, 1812-85)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모두 태평천국 진압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1870년 증국번을 이어 북양(北洋)대신으로 청나라 대외정책의 칼자루를 처음 쥘 때 이홍장은 열강들의 도움으로 태평천국을 진압한 경험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열강과의 대립을 피하는 것이 이홍장의 금과옥조였기 때문에 매국노[漢奸]의 오명을 널리 뒤집어쓰기도 했다.
1880년대에 접어들며 제국주의가 고조됨에 따라 이홍장의 북양대신 업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중요한 조공국인 베트남과 조선이 불안하게 되었다. 메이저리거인 프랑스가 달려든 베트남에서 너무 쉽게 물러선 이홍장은 좌종당에게 "천고에 더러운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그 대신 조선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인 것은 일본에게까지 밀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 청나라의 군비 증강은 대외용이 아니라 대내용이었다. 열강에게 얻은 군사력으로 내부 반란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84년 청불전쟁 때는 정면대결을 피해 물러섰던 것이다. 1880년대의 군비 증강은 그보다 한 등급 위였다. 일본을 의식한 것이었다. 1874년 일본군의 대만 원정 때부터 품은 경계심이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 사정을 둘러싸고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서양 열강의 존중을 받고 동맹 상대로서 동아시아 지역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그런 상황만은 청나라가 막고 싶었을 것이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으로 근대세계에서 두 나라의 운명이 드러났다. 이홍장이 이끈 청나라 양무파는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는, 안전한 노선을 기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최소한의 목표도 이루지 못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청나라의 구체제로는 시대 변화에 적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 속에서 변법운동, 의화단, 입헌운동, 혁명운동 등이 어지럽게 뒤얽혀 전개되기 시작했다.
1854년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 앞에 문을 열 때, 40년 후 청나라를 격파할 힘을 키우는 길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일본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문을 두드린 서양인 중에도 그 나라가 50년 후 러시아를 이길 것을 상상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근대 서양의 기준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준으로도 미개한 작은 나라였다. 개항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기회 아닌 위기였을 뿐이다. (1798년 <세이이키모노가타리(西域物語)>에서 동양의 대일본섬과 서양의 에게레스섬이 대부국, 대강국(大剛國)으로 출현할 것을 내다본 혼다 도시아키(本田利明)는 분명히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이 미국 입장에서 급한 일은 아니었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오랫동안 거래관계를 유지해 왔고, 갑자기 교역을 크게 늘릴 상품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지나는 길에 있으니까 장래의 가능성을 막연히 바라보며 일단 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페리 개항 이후에 마침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나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러시아를 공격하러 일본 북방에 출동하면서 접촉이 자연스럽게 늘어났을 뿐, 일본에 대해 별다른 전략적 접근이 없는 상태에서 십여 년이 지난 후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보다 '개화'에 성공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 있었는데,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요인들이 지금까지 더 많이 거론되어 왔다. 연구자들의 치밀한 검토가 앞으로도 많이 필요한 주제인데, 일단 상식의 차원에서 나도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외부 세력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연착륙'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1837년에 서양 열강의 본토 침략을 당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개항 6년 후인 1882년부터 외국군의 주둔이 시작되었다. 그 12년 후에는 외국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는 그처럼 강한 외세의 작용이 없었다.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은 러시아에게 있었지만, 개항 전부터 영국이 철저하게 견제해 주고 있었다.
특히 개항에서 유신에 이르는 14년간 외세의 존재는 일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의 자극을 주었다. 1863-4년 조슈와 사츠마 번이 독자적으로 벌인 적대행위에 대한 영국 등 서양 세력의 절제된 반응은 두 웅번과 막부 사이의 갈등이 빠른 속도로 풀려나가는 배경이 되었다. 이 14년간 일본, 특히 유신의 주역이 될 웅번들은 극히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침략의 야욕을 가진 외세가 없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여유였다.
또 한 가지 일본이 '개화'에 유리했던 점은 중국과 조선 같은 중앙집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앙집'권'이란 권력만이 아니라 권위도 뜻하는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에서는 개혁을 위한 노력의 대부분이 권력과 권위의 중심축인 왕조로 집중되었는데, 두 나라 다 왕조의 기능이 퇴화 단계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일본에서는 '개화'의 과제 앞에서 권력과 권위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과정에 외세의 과도한 작용이 없었던 것이 일본 성공의 극히 중요한 조건이었다.
메이지유신의 출발점인 1868년의 '대정봉환(大政奉還)' 후에도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어졌다. 20년이 지난 후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1889)을 전후해서야 근대 일본의 국체(國體)가 안정된 모습을 드러냈고, 그 5년 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성공'이 확인되었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처럼 외세의 강한 압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개항 후의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 시대 변화에 대한 대응방식의 모델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두 나라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는 시점에서부터 일본 모델을 더 중시하는 추세가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추세가 갑신정변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델의 올바른 선택이 행복한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일본보다 더 큰 관성을 가지고 급진 노선의 실행에 제약을 주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과 달리 조선에게는 강한 침략 의욕을 가진 외세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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