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말 대원군의 퇴진은 극한 상황에 몰린 것은 아니었다. 10년 전 안동 김 씨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 앞에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지.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힘을 아껴서 쓰지 않는 강경노선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부 개혁정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상황은 갈수록 난감해지기만 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을 때, 실력은 지키는 채로 권력을 내놓을 기회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권력의 배타적 속성은 이런 편리한 진퇴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원군 자신이 안동 김 씨 세력을 본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몰아붙인 것처럼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민 씨 세력도 대원군의 재기 가능성을 없애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금 물러서는 정도로 민 씨 세력과 타협을 바라고 있던 대원군은 큰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원군 퇴진 이듬해 민승호의 폭사는 그의 배신감이 터져나온 일로 생각된다.

고종의 즉위로 안동 김 씨 세도가 대원군 세도로 넘어왔고, 대원군의 퇴진으로 여흥 민 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권력의 주체는 바뀌었지만, 왕이 왕 노릇 못하는 세도 정치의 본색은 바뀌지 않았다. 민 씨 세도에서 고종의 친정(親政)을 명분으로 내걸기는 했지만, 고종 자신이 유교 정치의 왕도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주변 세력에게 철저히 농락당할 뿐이었다. 대원군이 경연 봉쇄 등을 통해 허수아비로 키운 왕이 대원군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민 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었다.

임오군란(1882)까지 계속된 민 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체제의 부패는 극한에 이르렀다. 정규군 봉급을 1년 이상 체불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의 완전한 마비 상태라 할 일이다. 민심이 조정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대안으로 쉽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이 대원군이었다. 앞 회에 인용한 황현의 기록처럼, 위엄이나마 서 있었던 대원군 시절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널리 퍼져 대원군 부활의 발판이 되었다.

민비 시해(1895) 당시 일본 측이 조선군의 소행으로 꾸미려 획책하는 데는 뛰어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3년 전 조선 군인들이 민비를 죽이려 한 일에서 따 온 모티프일 뿐이다. 권력 투쟁이 왕비의 목숨까지 노리게 된 사태는 조선의 국가체제가 밑바닥까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정권의 향배가 명예나 성취감 정도가 아니라 관련자들의 목숨을 좌우하게 되니 생산적 담론보다 극단적 정통론에 쏠리게 되어 조선의 정치가 쇠퇴한 것을 서술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왕족 사이에서 서로 죽이려 달려들고,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폭력으로 정적들을 잡아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원군이 임오군란의 진행에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지는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민비를 원흉으로 추궁하는 난군을 그가 제지하려 애쓰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민비의 죽음을 서둘러 선포한 데서 민비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대원군의 극단적 폭력성은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불과 반 년 전 그의 서장자(庶長子)인 이재선의 모역사건 연루를 겨우 면한 일이 있다. 퇴진 이듬해의 민승호 폭사 때는 감히 그에게까지 손길이 뻗치지 않았지만, 7년 동안 손발이 잘려 온 1881년 시점에서는 그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재선 모역사건에는 사실 이재선 자신보다 대원군이 더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던 모양인데, 정황으로 그럴싸한 일이다. 황현은 이렇게 적었다.

이재선은 운현의 서자로, 갑자년(1864) 이후 별군직에 있었지만 머리가 아둔하여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운현에게 서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 이재선은 서대문 밖에 있는 민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 죄에 연루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슬퍼했다. 이 옥사를 왕후가 꾸몄다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안팎으로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 그러나 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변이 왕후에게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이 사건도 운현이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민 씨 세도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 편승해 정권을 손에 넣을 수는 있었으나 운용할 능력이 없었다. 국가가 처한 상황은 10년 전보다 어려워져 있었는데 왕년의 측근들은 제거되거나 곁을 떠나 동원할 수 있는 인재가 적었다. 게다가 군난의 와중에 잡은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이 더더욱 적었다.

청나라 군대를 끌고 온 마건충(馬建忠)이 대원군을 '납치'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일본과 경쟁하는 입장이었으며, 민 씨 세력의 친일 추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업고 정권을 탈환한 대원군은 청나라에게 의지하는 입장이었다. 친청 태도를 보이는 대원군의 정권을 왜 청나라 쪽에서 붕괴시킨 것일까?

마건충은 양무운동의 지도자 이홍장(李鴻章)의 심복 막료였다. 양무파는 대결을 회피하며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현실주의 노선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대원군이 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일본의 항의를 적절히 처리할 길이 없었다. 이홍장이 이끄는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나라 영향력의 상대적 우세만을 원했고 절대적 우세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원군을 빼내고 온건한 인물들을 앞세워 일본과 타협을 맺었다.

조선 망국의 의미가 가장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사건이 임오군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적으로는 전통적 천하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치를 정해주고 있던 중국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과의 사대-책봉 관계는 현실적 힘에 의한 종속관계라기보다 자발적 이념에 따른 거래관계였다.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관계'를 전략적 이점으로 이용할 생각만 있었지, 그 특수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전통체제 속에서 '중전'의 상징적 권위는 국왕과 대등한 것이었다. 정권 쟁탈의 목적을 위해 왕비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쟁탈전의 구도에 따라서는 왕을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년 후 갑신정변에서 왕을 겁박해 인질로 삼는 사태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왕비를 잡아죽이려 한 대원군이나 왕을 겁박한 갑신정변 주동자들보다 왕권 몰락의 더 큰 책임을 가진 것은 고종과 민비 자신이었다. 그들은 온 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을 생각지 않고 탐욕을 위해 정권을 운용하는 모리배들 틈에 스스로 끼어들어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다. 황현의 아래 기록들이 사실 그대로일지에는 의문이 있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1) 남정철은 과거에 급제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외척이 아니고는 이처럼 갑자기 출세한 자가 근세에 없었다. 그는 감영에 있을 때 임금께 날마다 진상했는데, 임금은 그것을 충성으로 여겼다. 이에 그를 영선사로 임명하여 천진으로 보내 중용할 뜻을 보였다.

민영준이 남정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바쳤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꾸짖으며 말했다. "남정철은 정말 큰 도둑놈이었구나. 관서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먹었구나."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시들해졌고, 민영준은 날로 부리기 좋은 인물이 되었다.

(2) 만수절이면 감사나 수령들이 으레 진상품을 올리는데, 항상 척신을 통해 궁중에 바쳤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함께 들어가 임금을 모셨는데, 이때 김규홍이 전라감사이고 김명진이 경상감사였다. 민영환이 먼저 김명진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뿐이었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용상 아래로 내던졌다. 민영환이 황공해하며 이 목록을 주어 소매 속에다 넣었다. 이어 민영소가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춘주 오백 필과 갑초 오백 필, 백동 오 합, 바리 오십 개에 다른 물건도 이 정도였다. 임금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감사들이 이렇게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민영환이 나가서 자기 돈 이만 냥을 더해서 바쳤는데, 그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왕이 왕 노릇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맹자 말씀이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왕이 된 이래 20년간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왕의 권한만 생각했지, 왕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키우지 않은 것 같다. 1873년 말 친정을 시작한 이래 강화도조약을 비롯해 많은 정책 결정이 있었지만, 상황에 떠밀려 당장의 곤경을 면하기 위한 결정이었지, 확고한 국가관에 따라 어려움을 감당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갑신정변이 개화를 향한 적극적 노력으로 많은 평가를 받아 온 데 나는 의문을 느낀다. 1884년 조선의 상황에서 거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전연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제 정신 가진 사람 중에 없었을 것이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 변화를 난폭한 방법으로 성급하게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난폭하고 성급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비난 받을 일이다. 그런 이유를 그들이 주관적으로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웬만한 사고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쿠데타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그들이 뭔가 획책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하는데, 설마 그런 흉포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주동자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의 하나인 박영효(1861~1939)는 친일파 중에도 악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다. 그가 갑신년의 동료들 중에서 특출하게 도덕적 품성이 처지는 사람이었을까?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으므로 나는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갑신정변 일당을 대략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윤해동은 <친일파 99인>(돌베개 펴냄)에서 "'개화'된 조국에서의 박영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친일의 거두로 남았단 말인가." 하고 한탄했지만, 나는 한탄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미화에 일제 식민사관이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는데, 그런 관점이 우리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지고 잘 척결되지 않는 것은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화'가 아무리 필연의 대세라 하더라도, 사심이 개재한 것이 아니라면 그를 추구하는 방법이 그토록 독선적이고 난폭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