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9. 20:02


아내가 먼저 올라가고 나는 사무실에서 볼일을 본 뒤 20분쯤 후에 올라갔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한 시간도 안 되었을 때였는데 예상 외로 복도 옆 '지정석'이 비어 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침대에 모로 누워 며느리를 마주보고 계셨다.

전번 왔을 때도 기운이 조금 떨어지신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송 여사 등 여러분께 설명을 들었다. 기운이 몇 주일째 약간 떨어지셔서 앉아 계시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전에는 8시 소등시간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가 방으로 모시려면 한참씩 투덜대곤 하셨는데, 요즘은 한 시간만 앉아 계시면 눕혀달라고 하신단다. 요즘은 날씨도 따뜻해져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분들은 욕창이 조심스러워 어차피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고.

기운 떨어지신 얘기를 하면서 어느분도 전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 기운은 떨어져도 기분은 떨어지지 않으시는 때문일 것 같다. 모로 누워서도 환한 얼굴로 인사 다 차리시고 하실 농담 다 하신다. 욕설("쌍년")이 요즘 느셨다는데, 순간적 통증이나 불편을 느낄 때 반사작용으로 나오는 것 같다는 서 선생(간호사) 의견. 그런데 욕설이 너무나 산뜻한 느낌이어서 누군지 모르는 실습생들조차도 불쾌하게 느끼는 일이 전혀 없다고 덧붙인다. 자기는 욕먹기를 즐긴다는 눈치다.

반야심경을 외워 보니까 정신이 더할 수 없이 맑으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창때 즐겨 외우시던 가락이 그대로 나오신다. 잘 외워지니까 기분이 더 좋으신 듯, 늘 한바탕씩 하시는 내 칭찬이 나오는데, 평소보다 더 창의적이다. 멍청-신통하다는 합성어를 만들어내셨다. "사람이 신통하기만 하면 뭐해? 멍청하기도 해야지."

늘 듣기 좋아하시는 <송아지> 노래에 "멍청"을 넣어서 불러드리니까 너무너무 좋아하며 바로 따라 부르신다. "송아지 송아지 멍청송아지 / 엄마소도 멍청소 엄마 닮았네. / 강아지 강아지 신통강아지 / 엄마개도 신통개 엄마 닮았네."

한 시간 가까이 누우신 채로 모시고 앉았다가 바깥바람 쏘여 드려도 괜찮겠다는 원장님 허락을 받았다. 휠체어에 앉혀 드리는 동안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치료사 김 선생과 마주쳤다. 최근 몇 차례 주말에만 오는 바람에 한 달만에 만난 김 선생, 반갑게 인사하고 어머니 몸 상태에 관한 의견을 얘기해 준다. 악화되는 일을 막는 소극적 측면만이 아니라 회복될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잘 살려내려는 적극적 태도를 늘 보여주기 때문에 참 미덥다.

테라스에 모시고 나가니 기분이 좋으시다. "야! 참 햇볕이 좋구나." 유리를 통하지 않고 쏟아지는 햇볕이 실내에서보다 더 좋으신가보다. "바람도 좋죠?" "그래..." 바람이 좀 센 편이라 춥지 않으시냐고 며느리가 이따금씩 여쭤도 마냥 괜찮다며 싱글벙글. 사진 몇 커트 찍어드리는데 편안하게 포즈를 잡으신다. 카메라 앞에 불편해 하는 것이 나랑 비슷하셨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신 것이 이런 데서도 느껴진다.

큰형이 장학기금 만드는 일을 어머니께 전화로 말씀드렸다고 했기에 혹시 기억하시나 여쭤 보니 역시 아무 생각 없으시다. 전화드렸을 때는 멀쩡하게 대꾸도 하고 칭찬도 해서 큰형 기분 좋게 해주셨겠지.

작은형 언제 다녀갔나 여쭤보니 "언젠가 왔었어." 무슨 말씀 드리더냐 여쭈니 "말씀은 무슨... 그놈은 가끔 왔다가 금방금방 가 버려." 많이 놀아 드리지 않아 서운하신가? 닷새 전 순옥이 왔던 기억은 더 생생하시다. 접시에 썰어놓은 한라봉을 가리키며 "걔가 가져온 거야." 순옥이 생각이 떠오르시는 듯, 표정이 풀어지며 무심결에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웃고, 노래부르고, 한참 놀다 보니 건물 그림자가 마루를 깔아놓은 테라스 끝까지 왔다. 모시고 들어가기 전에 잔디 위로 한 바퀴 돌며 마당 가의 꽃을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루 끝 3~4 센티미터 가량 턱진 곳을 내려오는데 휠체어가 약간 덜컹거리자 과장된 표정으로 소리지르신다. "이놈이! 에미를 내다버리는구나!" 제비꽃인가, 조그만 꽃 몇 떨기 피어 있는 것을 내려다보면서는 도취된 표정으로 한참 말씀이 없으시다.

지정석에 며느리를 데리고 앉아 계시는 동안 한옆에서 송 여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순환근무를 할 텐데 이번에 그 방을 오래 지키시는 것 같다고 했더니, 두 달 동안 교체가 없었는데 곧 있지 않겠냐고. 송 여사가 그 방을 막 맡았을 때 원장님이 "이번 여사님은 어머님이랑 특히 궁합이 잘 맞으시는 것 같다"고 하던 생각이 나는데, 정말 이분은 어머니와 이심전심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직접 더 모시지 못하게 되면 서운하겠지만, 즐거움이 더하고 덜한 정도 문제이지, 어머니 지내시는 일이 걱정되지는 않는다.

여기 모셔 온 지 10개월째. 이제 중국에 돌아갈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에 세 차례 정도씩 와 뵈며 지냈는데, 중국 가 있으면 1년에 서너 차례 와 뵙게 되겠지. 중국 갈 생각을 시작할 때는 얼핏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병원에 계신 2년 동안 매일 찾아뵙다가 이리로 옮겨 모실 때에 비하면 훨씬 적은 차이다.

여기 환경도 좋아 보이고 일하는 분들도 믿음직해 보여서 결단을 내렸지만, 얼마나 잘 적응하실지 옮기시는 시점에서는 마음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환경과 근무자들에 대해 더 확인도 됐거니와, 무엇보다 어머니의 '생활' 태도가 믿음직하다. 병원에 계실 때 우리가 어머니에게 필수품이었다면 이곳 오신 후로는 기호품이 되었다. 사치품 자리로 물러서서 안 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필요가 아니라 내 필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국에 가더라도 대략 1년 후의 일일 테니까 서서히 준비를 해야겠다. 지금부터 월 2회로 방문을 줄이고 지내다가 어느 시점에서고 월 1회로 줄일 수 있다면 떠날 준비가 되는 셈이다. 지난 10개월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붙어 있지 않은 동안의 생활을 잘 채워드릴 만한 것을 더 열심히 궁리해야지. 찾아와 주실 만한 분들 한 번씩이라도 길 안내 해드리고.

홀에서 오락회가 흥겨워지고 있는데 원장님이 이쪽으로 막 손짓을 한다. 어머니 모셔오라는 줄 알고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청중에게 가수를 소개하신다. "이제 이남덕 할머니의 보호자분 노래를 듣겠습니다." 돌아보니 눈치빠른 아내는 벌써 복도 반대편 끝까지 도망가 있다.

피할 수 없는 일은 즐겨라! "여러 어르신들께서 저희 어머님을 예뻐해 주셔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제일 듣기 좋아하시는 노래를 어르신들께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개사한 곡을 꺼냈다. "송아지 송아지 멍청송아지~" "얼룩" 대신 "멍청"이 나오는 데서 어리둥절한 기색이다가 "강아지 강아지 신통강아지~"에 이르자 모두들 알아채고 파안대소가 터져나온다. 덧붙여 "병아리 병아리 예쁜 병아리~"까지 내보내니 막 흥이 겨워서 "엄마닭도 예쁜 닭~" 앞질러 나가는 분들까지 계시다.

어머니께서 한량없이 좋아하신다. 노래 끝내고 곁으로 다가서는데, 오른쪽 분에게 "이놈이 내 아들이예요.", 왼쪽 분에게 "우리 셋째 아들이예요." 자랑이 바쁘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긴장 속에 활동하실 때는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하셨지만, 이제 "함께 사는 세상"이 편안하고 즐겁기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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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