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말 대원군의 퇴진은 극한 상황에 몰린 것은 아니었다. 10년 전 안동 김 씨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 앞에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지.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힘을 아껴서 쓰지 않는 강경노선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부 개혁정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상황은 갈수록 난감해지기만 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을 때, 실력은 지키는 채로 권력을 내놓을 기회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권력의 배타적 속성은 이런 편리한 진퇴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원군 자신이 안동 김 씨 세력을 본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몰아붙인 것처럼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민 씨 세력도 대원군의 재기 가능성을 없애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금 물러서는 정도로 민 씨 세력과 타협을 바라고 있던 대원군은 큰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원군 퇴진 이듬해 민승호의 폭사는 그의 배신감이 터져나온 일로 생각된다.

고종의 즉위로 안동 김 씨 세도가 대원군 세도로 넘어왔고, 대원군의 퇴진으로 여흥 민 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권력의 주체는 바뀌었지만, 왕이 왕 노릇 못하는 세도 정치의 본색은 바뀌지 않았다. 민 씨 세도에서 고종의 친정(親政)을 명분으로 내걸기는 했지만, 고종 자신이 유교 정치의 왕도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주변 세력에게 철저히 농락당할 뿐이었다. 대원군이 경연 봉쇄 등을 통해 허수아비로 키운 왕이 대원군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민 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었다.

임오군란(1882)까지 계속된 민 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체제의 부패는 극한에 이르렀다. 정규군 봉급을 1년 이상 체불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의 완전한 마비 상태라 할 일이다. 민심이 조정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대안으로 쉽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이 대원군이었다. 앞 회에 인용한 황현의 기록처럼, 위엄이나마 서 있었던 대원군 시절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널리 퍼져 대원군 부활의 발판이 되었다.

민비 시해(1895) 당시 일본 측이 조선군의 소행으로 꾸미려 획책하는 데는 뛰어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3년 전 조선 군인들이 민비를 죽이려 한 일에서 따 온 모티프일 뿐이다. 권력 투쟁이 왕비의 목숨까지 노리게 된 사태는 조선의 국가체제가 밑바닥까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정권의 향배가 명예나 성취감 정도가 아니라 관련자들의 목숨을 좌우하게 되니 생산적 담론보다 극단적 정통론에 쏠리게 되어 조선의 정치가 쇠퇴한 것을 서술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왕족 사이에서 서로 죽이려 달려들고,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폭력으로 정적들을 잡아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원군이 임오군란의 진행에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지는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민비를 원흉으로 추궁하는 난군을 그가 제지하려 애쓰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민비의 죽음을 서둘러 선포한 데서 민비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대원군의 극단적 폭력성은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불과 반 년 전 그의 서장자(庶長子)인 이재선의 모역사건 연루를 겨우 면한 일이 있다. 퇴진 이듬해의 민승호 폭사 때는 감히 그에게까지 손길이 뻗치지 않았지만, 7년 동안 손발이 잘려 온 1881년 시점에서는 그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재선 모역사건에는 사실 이재선 자신보다 대원군이 더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던 모양인데, 정황으로 그럴싸한 일이다. 황현은 이렇게 적었다.

이재선은 운현의 서자로, 갑자년(1864) 이후 별군직에 있었지만 머리가 아둔하여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운현에게 서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 이재선은 서대문 밖에 있는 민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 죄에 연루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슬퍼했다. 이 옥사를 왕후가 꾸몄다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안팎으로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 그러나 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변이 왕후에게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이 사건도 운현이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민 씨 세도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 편승해 정권을 손에 넣을 수는 있었으나 운용할 능력이 없었다. 국가가 처한 상황은 10년 전보다 어려워져 있었는데 왕년의 측근들은 제거되거나 곁을 떠나 동원할 수 있는 인재가 적었다. 게다가 군난의 와중에 잡은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이 더더욱 적었다.

청나라 군대를 끌고 온 마건충(馬建忠)이 대원군을 '납치'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일본과 경쟁하는 입장이었으며, 민 씨 세력의 친일 추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업고 정권을 탈환한 대원군은 청나라에게 의지하는 입장이었다. 친청 태도를 보이는 대원군의 정권을 왜 청나라 쪽에서 붕괴시킨 것일까?

마건충은 양무운동의 지도자 이홍장(李鴻章)의 심복 막료였다. 양무파는 대결을 회피하며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현실주의 노선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대원군이 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일본의 항의를 적절히 처리할 길이 없었다. 이홍장이 이끄는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나라 영향력의 상대적 우세만을 원했고 절대적 우세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원군을 빼내고 온건한 인물들을 앞세워 일본과 타협을 맺었다.

조선 망국의 의미가 가장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사건이 임오군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적으로는 전통적 천하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치를 정해주고 있던 중국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과의 사대-책봉 관계는 현실적 힘에 의한 종속관계라기보다 자발적 이념에 따른 거래관계였다.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관계'를 전략적 이점으로 이용할 생각만 있었지, 그 특수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전통체제 속에서 '중전'의 상징적 권위는 국왕과 대등한 것이었다. 정권 쟁탈의 목적을 위해 왕비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쟁탈전의 구도에 따라서는 왕을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년 후 갑신정변에서 왕을 겁박해 인질로 삼는 사태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왕비를 잡아죽이려 한 대원군이나 왕을 겁박한 갑신정변 주동자들보다 왕권 몰락의 더 큰 책임을 가진 것은 고종과 민비 자신이었다. 그들은 온 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을 생각지 않고 탐욕을 위해 정권을 운용하는 모리배들 틈에 스스로 끼어들어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다. 황현의 아래 기록들이 사실 그대로일지에는 의문이 있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1) 남정철은 과거에 급제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외척이 아니고는 이처럼 갑자기 출세한 자가 근세에 없었다. 그는 감영에 있을 때 임금께 날마다 진상했는데, 임금은 그것을 충성으로 여겼다. 이에 그를 영선사로 임명하여 천진으로 보내 중용할 뜻을 보였다.

민영준이 남정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바쳤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꾸짖으며 말했다. "남정철은 정말 큰 도둑놈이었구나. 관서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먹었구나."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시들해졌고, 민영준은 날로 부리기 좋은 인물이 되었다.

(2) 만수절이면 감사나 수령들이 으레 진상품을 올리는데, 항상 척신을 통해 궁중에 바쳤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함께 들어가 임금을 모셨는데, 이때 김규홍이 전라감사이고 김명진이 경상감사였다. 민영환이 먼저 김명진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뿐이었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용상 아래로 내던졌다. 민영환이 황공해하며 이 목록을 주어 소매 속에다 넣었다. 이어 민영소가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춘주 오백 필과 갑초 오백 필, 백동 오 합, 바리 오십 개에 다른 물건도 이 정도였다. 임금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감사들이 이렇게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민영환이 나가서 자기 돈 이만 냥을 더해서 바쳤는데, 그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왕이 왕 노릇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맹자 말씀이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왕이 된 이래 20년간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왕의 권한만 생각했지, 왕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키우지 않은 것 같다. 1873년 말 친정을 시작한 이래 강화도조약을 비롯해 많은 정책 결정이 있었지만, 상황에 떠밀려 당장의 곤경을 면하기 위한 결정이었지, 확고한 국가관에 따라 어려움을 감당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갑신정변이 개화를 향한 적극적 노력으로 많은 평가를 받아 온 데 나는 의문을 느낀다. 1884년 조선의 상황에서 거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전연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제 정신 가진 사람 중에 없었을 것이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 변화를 난폭한 방법으로 성급하게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난폭하고 성급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비난 받을 일이다. 그런 이유를 그들이 주관적으로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웬만한 사고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쿠데타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그들이 뭔가 획책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하는데, 설마 그런 흉포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주동자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의 하나인 박영효(1861~1939)는 친일파 중에도 악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다. 그가 갑신년의 동료들 중에서 특출하게 도덕적 품성이 처지는 사람이었을까?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으므로 나는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갑신정변 일당을 대략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윤해동은 <친일파 99인>(돌베개 펴냄)에서 "'개화'된 조국에서의 박영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친일의 거두로 남았단 말인가." 하고 한탄했지만, 나는 한탄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미화에 일제 식민사관이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는데, 그런 관점이 우리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지고 잘 척결되지 않는 것은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화'가 아무리 필연의 대세라 하더라도, 사심이 개재한 것이 아니라면 그를 추구하는 방법이 그토록 독선적이고 난폭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Posted by 문천
 


지난 회에 대원군 정권의 성격에 관한 제 의견을 내놓은 데 대해 흥미롭게 여겨주는 독자들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통념과 다르면서 그럴싸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견은 확실한 근거 없이 정황(情況)과 정리(情理)에 따라 짜맞춘 것일 뿐입니다. 대원군 정권의 성격은 개항기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기초를 잘못 세워놓으면 이후의 진행을 바라보는 시각이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매천야록>의 몇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료총서>로 모습을 나타낸 이래 고종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대원군 집권기에 대한 '통념'도 이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황현은 1894년에 <매천야록> 집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정밀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야록'보다 '실록'에 가깝습니다. 기록을 위해 꽤 적극적인 조사까지 한 것 같습니다. 1894년 이전, 특히 황현 자신이 약관이 나이이던 대원군 집권기에 관한 기록은 이와 달리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야사'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 하는 것 못지 않게 그런 내용이 어째서 담겨 있을까 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죠.

번역문은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서해문집, 2006)을 이용했습니다. 허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필자-


조금 길지만, 내가 매천의 기록을 귀하게 여기는 대표적인 대목부터 하나 내놓겠다.

한 사람이 다른 곳에서 시험을 보고자 하면 증명서를 받아 와야만 했는데 이를 '월소越所'라 한다. 증명서가 없이 월소한 자는 비록 합격하더라도 그 이름을 뺐는데, 이를 '발거拔去'라 한다. (...) 이시원이 영남 좌도에서 향시를 주관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그 뒤 영남 우도에서 식년시를 주관했다. 대구는 영남 좌도의 관할 구역이었다. 대구의 응시자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지난번 이시원이 주관한 향시에서 뽑혔는데, 올해는 서울로 가서 시험을 보려고 새재를 지나다가 이시원이 영남 우도의 시험을 주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남 우도로 오며 생각했다. "이분이 온 걸 일찍 알았더라면 어찌 꼭 서울로 갔으랴. 내 반드시 합격하리라."

과연 그는 수석으로 뽑혔다. 수석으로 뽑힌 자의 답안지는 곧 조리棗籬에 내다 걸었는데, 이를 휘장麾壯이라 한다. 이시원이 휘장 뒤로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글은 대구에 사는 이 아무개의 글이 아닌가. 이 사람은 내가 예전에 뽑은 사람으로, 그가 아니면 이런 글을 지을 수가 없다.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왔을 것이고, 또 휘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빙 문서가 없으니 법을 어긴 것을 어찌하랴. 부득이 발거할 수밖에 없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한탄했으나 그 사람은 기뻐 뛰면서 말했다. "휘장도 세상에 있고 발거도 세상에 있다. 또한 시관의 귀신같은 감식안도 있으니, 오늘의 나처럼 기이한 인연도 있지 않으랴."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무되어 돌아갔다.

이런 기록이 나를 잡아 끄는 힘은 그 유머 감각에 있다. 과거제의 타락을 한탄하는 글이지만, 옳은 입장에서 그른 일을 꾸짖는 경직성이 없다. 발거당한 개인의 불행을 발거의 원칙이 살아 있다는 기쁨이 덮어버리는 역설 속에 과거제의 원칙이 무너진 데 대한 한탄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념에만 기대는 엄격한 논설보다 마음의 밑바닥을 열어 보이는 이런 유머에 나는 더 신뢰가 간다.

이시원 같은 훌륭한 시관과 대비되는 엉터리 시관 이야기도 있다.

흥인군 이최응과 심순택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관命官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몽매하여 '어魚' 자와 '노魯'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권을 대할 때마다 잘되고 못된 것을 분간하지 못했으므로 운이 좋으면 급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졌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시험을 주관하면 문장 솜씨가 없는 자들이 모두 좋아했다.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에 대한 매천의 평가는 무척 박했다.

인군 이최응은 아우 대원군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민승호가 이최응을 추대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대원군과 맞서도록 했다. 임금에게 아뢰기 난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최응을 시켜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게 했다. 이최응이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그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자 운현이 몹시 한탄했다. 운현이 그의 침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휘장을 걷어올리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시니 수양대군 같은 음모라도 꾸미는 것입니까?" 당시 이최응은 병중임을 알려 왔다.

대원군 실각 후 이최응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은 대원군 집권기 동안 조정에 종친의 비중이 많아졌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외척의 세도를 물리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대원군의 명분은 매천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컸을 것이다.

병인년(1866) 이후에 이따금 대과大科를 베풀었는데, 종친에게만 응시를 허용하여 종친과라고 불렀다. 또 대동보를 만들어 본관이 완산인 이씨는 모두 붙여 주었으니, 한번 이 족보에 오르면 사족士族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천민들 중에서 본관을 완산 이씨로 고쳐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석한 자가 육, 칠만이나 되었다. 흥선군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 무진년(1868)에 대종회를 열고 종친문무과를 베풀었다.

원래 대원군의 처남이면서 민비 집안으로 입양되어 민비의 오라버니가 되고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쥔 민승호도 매천의 눈에는 흥인군 못지않게 무능한 위인이었다.

민승호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아둔하고 잘 잊어버렸다. 하루아침에 국정을 맡다 보니 기강을 제대로 잡지 못해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곧잘 속였다. 결국 반년도 채 되기 전에 모든 법도가 해이해지고 보는 이들이 어지러워했다. 얼마 안 되어 생모 상을 당했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여막을 지키느라 대궐에 나가지 못했다. 이에 봉서로만 의견을 주고받으니 때에 맞게 정사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임금을 사사롭게 뵙는 무리가 또한 중전의 뜻에 따라 정사를 돌보니, 정문政門이 쥐구멍 같아지고 권력도 많이 새어 나갔다.

이에 앞서서는 대원군 실각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을 적어놓았다.

운현이 정권을 잡은 것은 십 년간 안팎으로 위엄이 두루 미쳤다.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가 삼천리에 바람처럼 행해졌는데, 천둥이나 끓는 물 같아서 관리와 백성들이 무서워했으며, 관청의 법률이라면 언제나 두려워했다. 아침저녁으로 헛소문이 마구 나돌았고,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오면 붙잡아 죽인다고도 했다.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현이 정권을 내어놓자) 서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정권을 내어 놓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해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는 후한後漢 백성들이 슬퍼 탄식하면서 망조莽朝 시절을 다시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운현의 어진 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민씨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대원군 정권을 왕망에 비유한 것을 보면 대원군에 대한 비판 자세는 확고하다. 그가 말하는 "백성"이 아무 교양 없는 무지렁이 얘기는 아니고 명색이 선비들 얘기일 텐데, 민심의 경박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매천은 대원군의 '공포정치'를 그려놓았다.

대원군이 나랏일을 맡던 갑자년(1864)에서 계유년(1873)까지 십 년간은 온 나라가 떨며 무서워했다. 백성들은 서로 혀끝을 경계하며 조정의 일을 감히 말하지 못했으니, 언제나 귀신이 문 앞에 와서 두드리는 것 같았다. 예전 제도에서는 교령 아래에 반드시 '왕약왈王若曰'이라는 글자로 첫머리를 삼았는데, 이 십 년간은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만으로 안팎으로 명이 시행되었다. 갑술년(1874)에 임금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부터 비로소 예전의 제도가 회복되었다.

사람을 쓰는 데도 공포정치의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지적했다.

이경하는 운현이 가장 부리기 좋은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대장에다 포도대장까지 아울러 맡았으므로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운현이 이렇게 말했다. "이경하는 다른 장점이 없다. 오직 사람을 잘 죽이므로 쓸 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경하는 사람을 마구 죽이지 않았다. 사학邪學이나 사주私鑄처럼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만 죽였다."

매천은 대원군을 비판하면서도 살림 잘한 것은 인정했다.

원자가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과 중전이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운현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 이 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매천이 대원군을 아무리 비판하려 해도 민씨 정권의 엽기적 행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벼슬과 과거를 팔아먹은 것은 안동 김 씨 세도정치에서도 횡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창고지기가 주인 눈치 봐가며 빼낸 것이라면, 민씨 정권에 와서는 주인이 나서서 마구 팔아치우는 지경이었다.

이런 대목을 보면 매천도 대원군의 개혁정책 자체는 지지했다.

군정軍丁 명부에 오른 자들에게 군역을 베로 대신하게 하면서 폐단이 많아졌다. 이는 약한 백성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된 반면, 사족들은 한가롭게 노닐며 죽을 때까지 신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 이름난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관습에 끌려 끝내 개혁하지 못했다. 갑자년(1864) 초에 운현이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힘껏 떠맡으면서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장정 한 사람 당 이 민緡씩을 내게 했으니, 이를 동포전이라 했다.

서원 철폐에 대해서는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역시 유림에 몸담은 입장이어서인지 대원군의 사적 원한으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곁들인다.

만동묘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데, 묘를 창건한 것은 우암 송시열의 뜻이었다. 그래서 그 옆에 우암의 사당을 세웠는데, 세상에서는 화양동서원이라 부른다. 서원을 책임지는 자들은 대개 충청도에서 행패를 일삼던 양반집 자제들로서 묵패로써 평민들을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렸다. 백 년이 지나도록 수령들은 그 무리가 두려워 죄를 따지지 못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이 서원에 들렀다가 유생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하여 정권을 잡은 뒤 그 유생을 죽이고 서원을 철폐하라고 명했다. 운현은 이것이 편파적인 것으로 비칠까 봐 전국에 있는 서원과 사묘도 모두 철폐하라고 명했다.

남겨둔 곳은 마흔여덟 군데였는데, 모두 승무명현과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만동묘를 없애고 황묘위판皇廟位版은 북원 대보단으로 옮겨 모시니, 화양동서원은 드디어 철폐되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서원 철폐를 지지하는 뜻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원군에 대한 불신의 뜻은 거두지 않는다.

처음에 서원은 좋은 뜻으로 설치되었지만 오래되면서 점점 어지러워졌다. <심경>과 <근사록>을 읽으며 몸을 수양하던 사람도 변방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 자손들이 많은 곡식을 쌓으면서 마음이 교활해지기 시작했다. 단청이 화려한 집에 재물이 즐비했으니, 물질이 극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참다운 이치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만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때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서원에 소굴을 만들던 유생들은 마치 비상지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처소를 잃었다. 미쳐 날뀌고 부르짖으며 잇달아 대궐 문밖에 엎드려서 상소했으니, 양식 있는 이들이 비웃었다.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매천은 서원 철폐 정책이 정당하다고 보면서도 대원군이 이 정책을 추진한 동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것이다. 위 글에서 대원군이 젊었을 때 화양동서원에 들렀다가 모욕당한 일에 원한을 품은 이유를 상정했는데, 대원군에게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면이 있기는 있다. 대원군이 실각한 1년 후 민승호가 선물로 위장된 폭탄에 목숨을 잃은 것은 동기와 수단 양쪽에서 대원군이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수심이 강하고 복수의 수위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이다.

서원 철폐 후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기록을 남길 때 매천이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찬성하면서도 석연치 못한 마음을 보인 점이 두드러진다. 대원군 실각 후 나라 꼴이 더 엉망으로 되는 것을 보며 백성들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그 자신이 적었지만, 그는 대원군 정권의 근본적 한계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직설적으로 가리킨 것은 없다. 대원군의 노선이 왕도의 정치철학에 이르지 못한 패도의 정치공학에 머무른 것으로 매천이 본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Posted by 문천
한승동 기자가 정말 잘 써 줬다. 내 책에서 좋은 점을 잘 찾아내고, 또 잘 나타내 줬다. 지금까지 내 책이 받아본 리뷰 중 일간지 리뷰로는 최고급이다. 한 기자에게 매우 고맙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학과 깊은 내공으로 무장한 채 잠망경(페리스코프)을 뽑아올려 특권구조를 노려보며 직격탄을 날리는 새로운 유형의 이 걸출한 정치평론가의[내 얘기인 듯! ^^] 출현을, 정치적 견해가 다를지라도 누구든 반기지 않을까."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걸출한 평론가가 나와도 반갑지 않은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 상황이라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도 현실이 그렇다. 그러니 제목에 "유감"이라고 낚시질을 했지만, 기사가 아니라 현실이 유감이라는 거다. 굳이 걸고 넘어지자면, 현실이 그런 편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인다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하다.

나도 사실 일전에 홍세화 선생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추천 말씀 주신 분들 모두 고맙지만, 형님과 이정희 의원께는 특별히 더 고맙습니다. 불편한 입장에서 어려운 말씀을 꺼내 주셨으니까요." 홍 선생 추천말씀에도 언급되었지만, 사실 "몽상가" 운운은 내가 지나쳤다. 막 돌아가신 분 걸고 넘어지는 데 누깔이 뒤집혀서 평소 생각보다 오버한 거다. 아무튼 이 책에서 노빠질의 비중이 적지 않은데, 노 대통령에 대해 냉정한 시각을 지키고자 애쓰는 정당에 속한 분들로서는 이 점이 좀 난처했을 거다.

이 사회 정치 담론에서 '진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책 내면서 작년에 쓴 글을 돌아보니, 그 과제와 관련해 나 자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문제가 느껴진다. "몽상가" 운운은 그쪽의 몇몇 극단적 논설을 보며 반감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자극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도 공감해 줄 만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미있는 글쓰기'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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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