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교수신문>에 대한제국의 성격에 관한 일련의 논설이 실렸고 이것이 정리되어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푸른역사 펴냄)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대한 김재호의 비평과 이에 대한 이태진의 반론에서 시작된 한 차례 논전이었다. 이 책 중에서 내가 제일 공감한 대목은 왕현종의 논평 한 마디였다. (이하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에서 인용.)


고종의 절대화만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역사적 구조 변화의 동인과 주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51쪽)


“부적절”하다는 말이 참 정확하다. 고종이 정치를 잘한 것이라면 일본의 침략이 부당한 것이었다고 하는 이태진의 전제는 마치 고종의 정치가 엉터리였다면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 같다. 고종은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극히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 것이었다. 침략의 정당성을 고종의 정치 수준에 연계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적절한 일이다.


왕현종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성격을 부정하는 김재호의 시각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근대화 지상주의’라 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세계적 차원의 근대화 지상주의는 결국 자민족의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52쪽)


김재호는 이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이 오히려 근대화 지상주의라고 반박했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화 이전에 왜곡되지 않은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에 의한 왜곡과 좌절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그러한 왜곡을 바로잡는다면 제대로 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 근대가 추구할 지상의 가치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투했겠는가? 왜곡되지 않은 그 근대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56~57쪽)


일리 있는 지적이다. 내재적 발전을 주장하려는 의지는 근대화를 바람직한, 또는 불가피한 진로로 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김재호가 말하는 ‘근대화’는 유럽식 근대화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근대 경제성장을 통해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했으며 도시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세속화되며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는 등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됐다. 우리가 현재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55쪽)


넓은 의미에서 ‘근대화’란 중세사회의 해체에 따른 모든 대안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럽식 근대화는 그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다.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계급 재편성, 모두 어떤 종류의 ‘탈중세’ 과정에도 나타날 현상들이다. 이 현상들이 각각 어떤 속도로 어느 정도까지 나타나느냐, 그리고 어느 현상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근대화의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유럽식 근대화가 근대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한 근대화의 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프랭크의 <리오리엔트>나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처럼 다른 종류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탐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김재호는 근대화의 여러 현상을 나열만 했을 뿐, 더 이상의 분석을 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럽식 근대화만을 당연한 표준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내재적 발전론자 중에도 유럽식 근대화만을 근대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항기 이전의 조선,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럽식이 아닌 근대화가 “왜곡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왜곡을 바로잡는다 해서 그 노선이 그대로 되살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질적 방식의 근대화에 이미 휩쓸려버렸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근대화라면 필연적인 것이니 ‘지상주의’라는 말이 붙을 여지가 없다.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식 근대화라는 좁은 뜻의 ‘근대화’에 대한 태도가 ‘지상주의’ 여부를 따질 대상이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자 중에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 분명히 있다. 이 논쟁에도 참여한 이영훈이 단적인 예다.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이 어려운 질문에 부닥칠 때마다 나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자연과 사회의 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또는 공과 사의 분리 등과 같은 명제로 평범히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상식으로서의 근대에 비추어 볼 때 앞과 같은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교의체계는 근대가 아니다.(96~97쪽)


재작년 <뉴라이트 비판> 작업 때도 기발한 착상을 평범한 상식처럼 내놓는 이영훈의 화법이 참 신기했는데,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자연과 사회, 공과 사가 근대에 와서야 분리된 것이라고? 단어만 이어 놓는다고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상식과 전통은 결국 어느 위대한 지성에 의해 무너지기 마련”이라며 이태진을 야유하는데, 그 야유를 본인에게 돌려주고 싶다.


김재호의 근대화에 대한 시각은 이와 분명히 다르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 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됐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비난하면서 말문을 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추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반증하면 된다. 근대 경제성장을 통해서 비로소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근대가 문명의 얼굴만 보여주었던가. 식민지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56쪽)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서세동점 오래 전부터 ‘탈중세’라는 의미의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주의 맹아’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탈중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고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유럽식 근대화가 동아시아 제 사회의 완만한 근대화에 충격을 가해 교란시킨 것이다.


유럽식 근대화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가 국가 기능의 급격한 확대였다. 영주들이 맡고 있던 주민 관리를 국가가 직접 하게 되고,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관리 업무의 폭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교통의 발달과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격증하는 대외관계도 국가의 전적인 책임과 권한이 되었다. 이렇게 확대된 국가 기능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고차원의 제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유럽식 근대국가는 입헌정치와 권력 분립 등의 수단으로 통치자의 자의성을 줄이면서도 국가권력 자체는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유교 질서는 군주와 평민 사이에서 중간권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핵심적 원리가 있었다. 임금 이외의 어떤 실력자도 재산과 무력을 어느 수준 이상 쌓지 못하게 하는 이 질서는 성장보다 분배에 역점을 둔 사회주의 성향 체제였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억제하는 힘을 가진 질서이므로 중세사회 해체의 조건이 형성된 뒤에도 느린 속도의 탈중세 과정을 겪게 된다.


중국의 경우에는 11세기경부터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등 탈중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19세기까지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17세기 이후 탈중세 현상이 분명해졌다. 그런데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국가가 탈중세 현상을 촉진하기보다 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9세기까지 두 나라에서 왕조의 위기는 있을지언정 문명 전복의 위기는 겪지 않는 채로 변화가 완만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17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국가의 기능이 동아시아 지역보다 약했는데,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강력한 근대국가들이 출현했다. 19세기 들어 이 근대국가들이 열강의 모습으로 동아시아에 나타나자 질서만을 아끼며 변화를 억제하고 있던 동아시아 사회는 그 폭력성 앞에 맞설 길이 없었다. 국가의 보호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동아시아 사회의 사회경제 질서는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너져 갔다.


유교 질서의 관성이 비교적 약하던 일본이 열강을 본받기 위해 첫 번째 한 일이 유럽식 근대국가 수립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열강의 부강을 본받기 위해 양무운동을 벌이면서도 국가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거부했다. 청일전쟁 참패 뒤에야 변법운동이 나타났다.


조선도 청나라의 영향 아래 국가체제 변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가 청일전쟁 후 일본의 입김 속에 갑오개혁으로 제도의 전면적 변화를 시작했다. 갑오개혁에 임하는 일본의 태도는 침략의 야욕을 앞세우기보다 근대적 국가 운영체제를 조선에 우선 세워놓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진은 “꼭두각시 내각을 급조해 총리대신에게 통치 전권을 부여코자 했다”고 일본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보지만(앞의 책 30쪽) 박영효보다 김홍집을 밀어준 것은 꼭두각시 아닌 내각을 만들려고 애쓴 태도로 생각된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통제력을 무력화시킨 후 대한제국을 만든 것은 고종의 독자노선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구조에는 갑오개혁의 개혁방향이 많이 반영되었다. 다만 결정적 차이는 군주의 절대권력이었다.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은 황제 1인에게 집중되었다. <대한국 국제>로 명문화되어 나타난 황제 전제 체제가 대한제국의 제1 원리였다.


1인 전제 체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군주제가 아니다. 전통적 군주제는 군주를 정점에 두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균형과 견제가 작용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정치의 퇴행은 권력의 사유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의 1인 전제 체제는 이 권력 사유화가 극한에 이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근대국가의 틀이 될 수도 없는 체제였다. 이태진은 고종이 서양의 개명군주를 지향한 것이라고 하는데, 개명군주는 18세기 후반 절대왕정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성공한 개명군주에게는 실력을 갖춘 지지층이 있었다. 고종의 주변에는 그의 권력에 기생하는 친위세력만 있을 뿐, 자기 기반을 가지고 그와 함께 국가를 책임질 세력이 없었다. 전통적 정치세력인 학자-관료 계층이 정치력을 잃었기 때문에 고종의 자의적 움직임에 견제가 없었을 뿐이다.


대한제국의 구조적 문제점은 김동노의 <근대와 국민의 서곡>(창비 펴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공적인 실체로서 중앙집권화된 경우에는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거두는 모든 조세는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반면, 왕실과 정부가 분리된 상황에서 왕실이 거두어들인 수익을 공적인 용도로 쓸 것인지 혹은 사적인 용도로 쓸 것인지는 군주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 따라서 대한제국 시기에 왕실과 정부의 분리는 국가의 공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왕권(왕실)의 강화를 국가의 강화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갑오개혁은 청국의 경쟁을 따돌린 일본이 한껏 여유를 가지고 조선의 개혁을 유도한 노선이었다. 침략의 야욕은 바닥에 깔려 있더라도 이 여유 덕분에 야욕을 앞세울 필요 없이 비교적 원론적인 개혁 방향을 내세울 수 있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기 입맛에 따라 대한제국을 만들었다.


대한제국이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을 많이 이어받았다는 점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나는 수긍하기 힘들다. 고종과 친위세력의 기획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변 요소까지 모두 다 바꾸지 못했던 것이지, 핵심 요소는 고종의 입맛에 따라 바꾼 것이다. 정부와 왕실의 분리는 갑오개혁에서 국가의 공공성 제도화에 목적을 둔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에서는 전통 왕조보다도 공공성을 더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설립은 기본적으로 반동쿠데타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
2010. 5. 16. 11:26
어머니,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일전에 서해문집과 계약했습니다. 재작년 11월부터 작년 6월까지 쓴 시병일기와 요양원 옮기신 후의 방문기를 중심으로 하고, 책으로 묶기 위해 무엇을 덧붙일지는 차츰 결정해 나가야지요. 오는 10월 중에 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적인 글을 대중 독자에게 내놓는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죠. 아버지 일기 낼 때보다 더 조심스럽습니다. 아버지 일기는 '일기'라고는 하지만 공적 성격이 강했던 글이니까요.

책으로 낼 가능성이 시병일기를 서너 달 쓴 시점부터 생각했던 것이기는 합니다. 애초에 큰형을 비롯해 어머니 상황 궁금해하는 분들께 소식 알려드리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쓰다 보니 제딴에 글다운 글을 쓰려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생각도 들게 되었던 거죠.

그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니 어머니를 뵈며 떠오르는 생각 중에서도 독자들을 염두에 둔 방향으로 글의 흐름이 잡힌 면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모르던 사람에게도 알려주는 내용. 그리고 저랑 비슷한 입장에서 노인 모시는 사람들이 함께 생각할 만한 내용.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매일 가 뵈면서 눈에 보이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적기에 바빠 그 가능성을 어렴풋이 생각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생각을 하거나 글쓰기에 의식적으로 반영할 경황은 없었습니다. 요양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어머니 생활이 자리 잡히신 것을 보고 금년 들어서면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죠.

막연히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마음에 걸린 것이 돈 문제였습니다. 책을 만들면 얼마라도 돈이 생길 것이고, 생긴 돈은 제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효도를 빙자해 노모를 팔아먹는 꼴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나데요.

이 걱정 때문에 책 만드는 명분에 생각이 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싸한 명분이 있어야 "책은 이런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돈은 부수적으로 생긴 것일 뿐이다." 우길 수 있잖아요? 옛날 어느 도둑놈이 "저는 새끼줄 하나밖에 집어온 게 없어요. 그 새끼줄에 소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던 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우기더라는 얘기가 생각나네요. 쪼잔하죠? 제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역사 앞에서>를 통해 아버지 모습이 세상에 전해지고 남은 것처럼 어머니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드리는 책이 된다면 명분이 그럴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는 핑계거리로 짜낸 생각인데, 막상 떠올리고 보니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굳어지네요? 이것도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이 즐겨 행하는 자기최면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최면이 너무 깊이 걸렸는지 이제 벗어날 수가 없네요.

계약을 맺고 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불안이 남아 있어요. 그래도 저지르는 쪽으로 나서는 것은, 이 일이 제가 원래 안하던 짓인 만큼 마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할 만한 일이라는 개연성이 이만큼 있다면 용기를 내서 움직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글 팔아먹고 산 지 20년이 되어 가지만 지금까지는 글의 실용적 가치만 팔아먹은 셈인데, 이번 일은 글 자체를, 인격 자체를 팔아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해문집과의 묘한 인연 덕분에 이 일 진행이 빨라졌네요. 지난 달 낸 책, 책으로 묶어 낼 가치가 있는지 저는 자신이 없던 것을 열심히 만들어줬고, 만들어놓고 보니 정말 괜찮은 책 한 권이더라구요. 그러니 제가 자신 없고 불안한 구석이 있어도 좋은 결과로 이끌어줄 능력이(또는 인연이) 있는 회사 같잖아요.

<망국 100년> 작업을 7월 중순 끝낼 때까지는 이 책을 만들 방향에 관심 가진 분들 의견을 들으며 만연하게 생각하고 지내다가 7월 하순부터 달포 가량 작업으로 원고를 준비하려 합니다. 어머니도 의견 있으면 주세요.

기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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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5월 19일 출판인 모임 인사회 강연을 위해 준비한 원고입니다.)

100년 전의 ‘국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는 허점이 많다. 일본의 야욕에 의한 대형범죄라는 것이 표준적 인식의 골자인데, 그 범죄행위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이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행한 것이었다는 상식에 역행하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여자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의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서 강간한 남자에게 꼭 감사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출생 배경으로 인해 아이가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독수(毒樹)에는 독과(毒果)만 열린다 하여 강간으로 얻은 원치 않는 아이를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생겨난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것도 훌륭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것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가 축복받은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보다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더 조심스럽게 키울 필요가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이 ‘근대화’다. 어둠 속에서 잉태된 불륜의 씨앗이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맥베스>의 대사처럼 폭력 속에 잉태된 조선의 근대화가 강인한 체질을 보이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 강인한 체질을 잘 살리라고 아이를 폭력적 성격으로 키워내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어미가 만족을 얻고 아이가 행복을 얻는 길일까?


아이가 사회 속에서 좋은 역할을 맡으며 행복하게 살고, 그럼으로써 어미가 낳고 키운 보람을 거두기 위해서는 아이의 소질과 능력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폭력에 유린당한 경험을 가진 인간은 폭력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이 폭력으로 결정된다는 관점에 빠져 폭력을 숭상할 수도 있고, 폭력의 해악을 뼈저리게 느껴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도 있다.


어느 사회에나 두 가지 태도가 병존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폭력보다 평화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일반적 성향이고, 상황에 의해 휘몰리는 일이 없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화적 성향을 보이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폭력적 성향으로 휘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 법칙과 같은 형태의 현상이다. 폭력의 확산 특성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미꾸리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려 놓는” 것처럼 폭력을 숭상하는 소수가 사회를 폭력으로 흐려 놓으면 평화적 성향의 사람들도 자기방위를 위해 폭력을 쓰는 일이 잦아지다가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폭력의 확산 억제는 인류 문명의 원초적 과제다. 종교, 도덕, 법률, 국가 등 문명의 여러 제도들이 폭력 확산의 억제, 즉 질서 기능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여러 문명의 서로 다른 전통들은 서로 다른 질서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질서 구조가 진화를 계속 일으켜 왔다. 전통의 1차적 기능은 질서 유지에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특이하게 폭력성이 강한 문명이다. 폭력성이 강한 문명은 쉽게 파멸에 이르는 법인데, 이 근대문명은 산업기술, 즉 자연에 대한 폭력성을 고도로 발전시킨 덕분에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세계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므로 인류에게는 이 현상을 억제할 수단이 없었다. 각지의 문명 전통이 근대문명의 폭력성 앞에 퇴화하거나 파괴되었다.


폭력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근대문명이 순전히 폭력성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온 세계가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잠긴 것처럼 보여도, 각 지역의 문명 전통은 위축된 형태로라도 근대문명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허용해 준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상태가 한계에 이르면서 질서 구조의 강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탈근대 상황이다. 전통적 하부구조가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빚어나갈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경제의 ‘고도성장’에 도취되어 왔다. 고도성장은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대표하는 명제다. 유럽 선진국들이 자원 공급의 증가가 둔화되는 저성장 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근대의 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전통의 상실에 있다.


전통 질서의 형태는 지역과 문명마다 달랐지만 어디서나 공통되는 것은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이다. 어느 사회에도 무력과 재력과 정보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엘리트 계층이 존재하고, 엘리트 계층은 다른 계층보다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소속한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도덕성은 질서 구조의 핵심적 요소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가 이 도덕성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가 된다. 엘리트 계층이 사회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도덕적 실천을 통해 사회 자체를 지키려는 자세가 보수주의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한국 사회 고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 보편적 가치인 재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미국 등 다른 사회에 편입하는 데 대한 저항감이 약하다. 한국 사회의 특성에 대한 애착이 적고, 안보에 대한 의식도 피상적이다. 내부적 안보에 대한 경계심이 약하기 때문에 양극화 등 불안 요소를 걱정하지 않고 고도성장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엘리트 계층의 의식구조는 독립국가의 정체성에 맞춰져 있지 못한 것이다.


‘국치’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허점도 이 의식구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19세기 후반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인식의 속도가 상황 변화의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망국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이 실패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조선 왕조의 국가 기능이 퇴화해 있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야욕이 상황을 급박하게 만든 것이었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망하고 어떤 식의 식민 지배가 펼쳐졌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가 된 조선이 쉽게 독립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펼쳤고,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었다. 조선의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조선인들을 식민지인의 의식구조에 빠뜨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한국이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정해진 식민 지배자가 없는데도 미국이든 국제 거대자본이든 상전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식민지 사회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