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로부터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한 갈래 반응을 “위정척사(衛正斥邪)”라 하는 것이 있다.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전통체제에 집착하는 극단적 보수 성향으로 흔히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태도다.

“옳은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내치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까닭이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에서 변화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이 필요성을 외면한 것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사의 구분을 앞세우는 태도가 독선과 독단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변화의 절대적 필요성을 판단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풍조에는 반성의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근대 서양의 사고방식에 너무 치우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서양 근대의학과 동양 전통의학의 자세에 차이가 있다. 서양 근대의학은 잘못된 현상이 있으면 그 현상을 직접 바로잡는 대증치료에 치중하는데, 동양 전통의학에서는 잘못된 현상의 배경 원인을 먼저 살피는 원인치료를 중시하고, 치료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원기(元氣) 배양을 앞세운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파 중에는 정말로 시대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외친 수구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게 마련이고, 머릿수가 많건 적건 역사의 흐름에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위정척사파 가운데 ‘합리적 보수’라 할 만한 자세가 있었음을 현대인이 간과하기 쉽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에는 내우와 외환이 겹쳐져 있었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진짜 ‘수구’ 입장이 아니고는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화 대처에도 내우를 앞세우느냐 외환을 앞세우느냐 하는 차이가 있었다. 내부 문제를 먼저 처리해서 자세를 바로잡은 뒤에 외부 문제에 대응하자는 것을 보수 노선이라 할 수 있고, 외부 문제 대응에 필요한 기준에 따라 내부 문제의 접근 방향을 정하자는 것을 진보 노선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이 필요하냐에 앞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냐를 더 중시하는 것은 ‘보수’로서 의미가 있는 정치적 태도다. 다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이 얼마나 ‘합리적’이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그 기준이 독단과 독선에 빠지면 ‘수구’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극단적 정통론에 집착해 사회의 생산성과 건강을 해친 것이 바로 독단과 독선 때문이었다. 같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끼리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이 극단성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같은 유학이라도, 심지어 같은 성리학이라도, 주자의 학설과 조금만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풍조가 만연했다.

같은 유학 내에서도 그토록 배타적이었는데, 외래 사상인 서학을 이단과 사학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서학 비판 중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해서 무조건 멸시하고 적대시하기보다 합리적으로 접근한 자세도 찾아볼 수 있다.

서학서를 널리 섭렵한 이익(1681~1763)은 <칠극(七克)>에 대한 논평에서 그 비유가 적절해 우리 선비들이 밝히지 못한 점을 밝힌 것이 있으므로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서학 전반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논설이 많으나 궁극적인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논평을 남겼다. 이단(異端)이기는 하지만 사학(邪學)까지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익의 제자 중 신후담(1702~61)과 안정복(1712~91)은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스승보다 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도 태도의 차이가 있다. 안정복의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1785)에 비해 신후담의 <서학변(西學辨)>은 훨씬 합리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예컨대 서학의 천당-지옥설에 대해 안정복은 불교에서 훔쳐온 것이라 하여 내용 자체를 따지기도 전에 사학으로 몰아붙이는데, 신후담은 천당의 유혹과 지옥의 공포로 사람의 행동을 농락하면서 이(利)를 앞세운다는 점을 비판한다. 본성의 선악을 접어놓고 득실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게 만든다면 이익을 좇는 도도한 추세에 천하가 휩쓸려 버릴 것을 걱정한 것이다.

물론 이익이나 신후담 같은 상대주의 관점은 절대주의적 정통론이 우세하던 조선 후기 사상계에서 다수파가 아니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와중에 터져 나온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서양에 대한 주류 사상계의 시각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들어와 내외의 위기가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는 정통론의 관점도 극단적 순혈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 이항로(1792~1868)를 따른 화서학파가 당대 위정척사론의 본산이기도 했다.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등 위정척사론을 이끌고 의병활동에 큰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이 학파에서 나왔다. 이항로의 학설은 주리(主理)론으로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춘추대의(春秋大義), 즉 최고의 도덕적 명제로 삼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정치와 학술을 지배해 온 서인-노론 계열이 기(氣) 쪽으로 기울어졌던 경향과 대비된다. 기정진, 이진상 등 이항로와 같은 시기 거유들이 모두 주리론에 접근했던 것은 왕권의 쇠미가 심각해진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병” 조에는 조선 말기 의병의 신분구성에 관해 “의병전쟁의 주도세력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순수한 농민들의 봉기는 ‘의병’보다 ‘민란’이나 ‘농민항쟁’으로 규정되기 쉽다. 지도층이 주도하는 항쟁이라야 ‘의병’으로서의 명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의병장 중 신돌석이 평민 출신으로 각광을 받는데, 의병이 널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중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지, 지도층의 봉기가 없는 상황에서 평민들끼리 나섰다면 ‘의병’으로 인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란 위기에 처한 체제 지도층의 대응방식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유생들이 의병의 주체로 나섰다. (을사조약 이후 구식 군대 출신이 의병에 나서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몰락하는 체제를 대표한 것이다.) 피지도층은 평시에 지도층의 지도를 받으며 사는 것처럼 의병활동에서도 지도받는 입장이었다. 물론 항쟁이 장기화되면 원래의 피지도층에서도 지도자들이 나오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도층의 형성으로 보아야 할 현상이다.

유교 질서는 무력 사용을 억제하여 전쟁과 예악(禮樂)을 천자만이 주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제후는 천자의 위임을 받아 주재했다. 임금의 명령 없이 민간에서 무력을 일으키는 것은 명분에 관계없이 원천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의병이란 천하 질서가 비상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 의병이 나타난 후 1895년에 와서야 다시 의병이 나타났다.

궁궐이 짓밟히고 왕비가 살해당한 을미사변은 250년 만에 의병을 일으킬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국왕과 조정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따지는 것은 국왕과 조정이 지켜진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자 일부 의병이 무기를 내렸고, 1년 후 고종이 환궁하자 거의 모든 의병이 해산했다. 국왕과 조정이 주권을 회복한 상황에서는 의병의 명분이 해소되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전면적으로 침해됨에 따라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07년 7월 고종의 강압에 따른 퇴위와 뒤이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전국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초 1만 의병이 양주에 집결해 서울 입성을 시도함으로써 절정에 올랐던 의병운동은 이후 일본군의 적극적 토벌로 위축되었지만, 일부가 해외로 빠져나가 독립군의 기반이 되었다.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인식되어 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의병의 존재가 국면 전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천박한 역사 인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광복군과 독립운동은 일본 패전과 민족 해방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직접 작용한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패전국의 식민지에서 승전국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의병 운동의 위정척사 사상이 시대 변화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의병 지도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는 생각을 많이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술 내지 전략 차원에서 불가피한 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공격 대상인 일본 식민주의가 개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었고, 한국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침해가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과 전략을 넘어서는 철학 차원에서는 근대화를 핑계로 사리사욕을 꾀한 사람들보다 변화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느낀 의병들이 있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우주문답(宇宙問答)>이란 글을 남겼다. 정치, 사회, 학문, 종교, 윤리, 교육 등 문명 전반에 걸친 40개 주제에 관한 문답 형식의 이 글에는 당대 어느 개화론자 못지않은 넓고 깊은 식견이 담겨 있다. 이항로의 학파를 이어받아 의병 지도자 이전에 사림 지도자로 숭앙받던 유인석의 ‘근대적 석학’으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글이다.

의병에 나선 유생들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을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집단이었다. 그들 중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의 필요를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일본 식민주의가 ‘개화’의 아젠다를 선점해 버린 것이었다. <우주문답>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하여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하였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上下大小人)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하였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하였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더라도 내 자세를 바로 갖춘 뒤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표준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화를 특허 낸 일본을 상대로 싸우면서 개화 자체에 대한 반감을 키운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양심적 지식인들이 개화를 외면하게 만듦으로써 전통과 변화의 순조로운 연결을 차단한 것이 타율적 근대화의 피해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
2010. 5. 12. 00:34





이천 시내에서 박 처사를 태우고 요양원에 도착하니 두 시 반.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 박 처사는 어머니가 대자암 계실 때 어머니를 많이 보살펴드린 분이다. 그때는 절에 있던 누구보다 그분 덕분에 어머니 지내시는 걱정을 덜 하고 지낼 수 있었다. 쓰러지셨을 때도 백병원까지 모시고 왔었고, 병원 계시는 동안에도 이따금씩 문안 왔는데, 요양원으로는 어제 처음 길이었다.

아내와 박 처사를 먼저 올려보내고 사무실 볼일 본 다음 10분쯤 뒤에 올라가 보니 복도 가 '전용석'에 두 사람이 모시고 앉아 있었다. 최근 두 차례 와 뵐 때 기운이 떨어져 보이셔서 어제도 누워 계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운이 좋아 보이셨다. 박 처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어떻게 대하시던 사람인지 감이 잡히시는 것 같았다. 내가 앉을 때까지도 정중하게 말을 올리고 계셨는데,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예전 대하시던 가닥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제는 내게 손을 많이 뻗치셨다. 나타나자마자 말씀은 제쳐놓고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치시는데, 내가 손을 내밀어 맞잡아 드리니까 얼굴 주무르지 못하는 게 약간 서운하신 듯도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으신 기색이었다. 두 시간 남짓 모시고 있는 동안 손을 여러 차례 뻗치시는데, 기운이 좋으신 표시로 느껴졌다. 말씀으로 마음 표현하는 것은 이곳 올 때부터 아쉬움이 없었는데, 손길로도 표현하게 되신 것은 반가운 발전이다. 이런 발전에는 송 여사의 공이 컸을 것 같다.

그런데 반야심경 암송에서는 두 군데서 막혀 내가 막힌 곳부터 다시 외우는 데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외우셨다. 막히는 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기운이 넘쳐서 외우면서도 생각이 움직이시기 때문에 어디 외우고 있었던지 깜빡하시는 것 같았다.

얼마간 앉아 있으면서 홀에 평상시보다 사람이 적고 조용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변화가 있었던 내용을 나중에 원장님께 설명 들었다. 3층을 쓰기 시작해서 어머니 방 옆의 큰 방을 면회실로 바꿨다. 송 여사는 3층에 새로 맡은 방을 맡게 되어 어머니 방은 오 여사가 맡게 되었다. 오 여사는 젊은 편이지만(마흔 안쪽?) 성격이 차분한 인상이다. 어머니도 편안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금세 햇볕이 나오기도 하는, 매우 화려한 날씨였다. 전용석에 좀 앉았다가 안쪽 정원의 흐드러진 꽃나무들이 잘 보이는 면회식로 자리를 옮기고 좀 있으니 볕이 꽤 오래갈 것 같기에 테라스로 모시고 나왔다. 바람이 꽤 선선한데도 마냥 좋아하셔서, 춥지 않으시냐, 들어가시지 않겠느냐, 이따금 여쭈면서 괜찮다는 대답을 확인하며 꽤 오래 앉아 있었다.

꽃을 가꾸는 것은 이사장님 일인 모양인데, 마당가로 꽃나무를 잘 가꿔놓았을 뿐 아니라 테라스에 앉아서도 꽃을 즐길 수 있도록 화분까지 잘 배치해 놓은 정성이 참 고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여러 노인분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나도 열심히 배우고 싶다.

햇볕과 바람과 꽃. 그것으로 어머니는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시다. 찾아온 사람들은 덤으로 누리신다. 실내에 있을 때는 노랫가락 말씀이 별 여백 없이 이어졌었는데, 테라스에 앉아서는 말없이 자연을 즐기고 있다가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씩 던지신다. 장난스러운 말씀은 내게, 그리고 점잖은 말씀은 박 처사에게. 박 처사를 향한 말씀 중 이건 외워둬야겠다, 마음먹고 기억해 둔 대목이 하나 있다. "인생이란 게요, 지내다 보면 아름다운 것들을 갈수록 더 많이 찾아내게 된단 말입니다." 테라스에서는 노랫가락 화법도 별로 쓰지 않으셨다. 그 화법은 뭔가 불안한 심리가 작용하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해가 큰 구름조각에 가릴 때까지 3~40분 가량 테라스에 모시고 있었다. 면회실에 돌아와 앉아 계셔도 나가기 전과 기분이 다르시다. 햇볕과 바람 속에 앉아 있던 기분이 계속되시는 것 같다. 말씀을 많이 안 하고 하실 때는 여유 있는 태도이시다. 나 보고 노래를 부르라 해놓고는 부르실 줄 아는 노래도 따라 부르지 않고 열심히 들으신다.

지난 주 이OO 선생이 어머니 뵙고 가서 보내준 메일 생각이 난다. 이 선생은 나보다 몇 살 아래의 어머니 제자로, 몇 주일 전 나와 함께 와 뵙고, 이번에는 혼자 와서 뵈었다. 메일에서 흥분이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생 때 어머니와 무척 가까웠고,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어머니를 따르다가 몇 해 연락이 끊겼던 것을 내게 연락을 취해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도 어머니가 어렴풋이 알아보기는 해도 명확하지 않으셨는데, 혼자 오면서는 알아보지 못하실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30년 전 일을 뜻밖에 잘 기억하시더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들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당신이 학생들을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기억하시는 것이다. 이 선생을 집에 불러 손수 밥을 해 먹여주신 일, 어머니 작품을 보여주신 일, 어머니께 엽서 받은 일을 말씀드릴 때마다 “내가? 그럴 리가?”, “나는 그런 선생이 아니었는데” 어리둥절해 하시더라고.

이 선생이 십여 년 전 어머니께 받은 엽서 간직해 뒀던 것도 보여드리고, 이런저런 일의 정황을 설명드리니 구체적인 일들도 차츰 기억이 살아나시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재직 때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지낸 데 아쉬운 마음이 있으셨던가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가까이 대하던 제자가 찾아와 옛날 일을 일깨워드리고 있으니...

'팰림세스트 palimpsest'란 말이 생각난다. 유럽 중세에는 양피지 값이 비싸서 한 번 썼던 내용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지우고 다른 내용을 새로 쓰는 일이 많았다. 현대 서지학자들이 지웠던 내용을 복원해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얻곤 한다. 당시 기준으로 보존 필요가 없던 내용이 지금 연구에 요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옛 자료에도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값싸면서 재활용이 힘든 종이라는 재료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중요한 현상이 아니다.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는 '팰림세스트'가 비유로도 널리 쓰이는 말이다. 이미희 선생의 등장으로 어머니의 자기 인식에도 '팰림세스트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

이 선생 얘기를 어제 해도 전혀 기억을 못하신다. 그렇다면 옛날 일 떠올려드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자극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떠올리는 그때뿐, 기억력이 크게 늘어나실 것 같지 않다. 기억에 근거해 무슨 행동을 취하실 여지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런 기억이 바로 자유로운 자기 인식 아닐까? 행동의 부담은커녕 기억의 부담조차 없는. 인생을 충실하게 채우는 것으로 자유로운 자기 인식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좋은 인연에 대한 고마움을 되살리고 지난날의 고통을 되새기는 데 굳이 행동과 기억까지 꼭 필요한 것일까?

어제 내가 뵌 어머니 모습에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바뀐 측면도 은연중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제 우리와 나누신 이야기를 통해 바뀐 측면을 주변 분들에게 지금 보여주고 계실지 모른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을 지금도 살고 계시는 것이다.

(<월간불광>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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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은 을미사변 당시 친일 개화정권에서도 있었다. 이 움직임은 영국, 미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의 반대 의견을 감안한 고무라 일본 공사의 권고에 따라 중단되었다고 한다.


일본 측의 조선 칭제 추진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청산을 분명히 하는 데 일차 의미가 있었고, 다음으로는 메이지유신의 모델에 따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의 위상을 유도하는 뜻이 있었다. 정치의 중심이던 국왕을 배제함으로써 좋게 생각하면 개화정책 추진을 순조롭게 하자는 것이었고, 나쁘게 생각하면 일본의 영향력 내지 지배력에 대한 저항을 없앤다는 뜻이었다. 각국 공사들이 이에 반대한 것은 칭제 자체보다 칭제를 통해 일본의 영향이 너무 빨리 커지는 것을 꺼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한 몇 달 후 그 주변에서 칭제 추진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물론 일본 측의 칭제 추진과 다른 의도였다. 고종은 전제군주의 위상을 더 강화하고 싶어 했다. 1897년 8월 광무 연호를 세우면서부터 칭제를 공론화하여 두 달 후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일본이 앞장서서 황제 칭호를 승인한 것은 일단 사대관계 청산이라는 한 가지 목적은 이뤄지는 것이므로, 황제권의 제도화라는 또 한 가지 목적은 서서히 추구해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대한제국 건립은 당시 상황으로는 비교적 자주적 의지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정책 수립과 추진에도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과 주도에 따르던 데 비하면 상당한 자주성이 있었다. 1897년 2월의 환궁부터 1904년 2월의 러일전쟁 발발까지 7년간이 시대 변화에 대한 조선 왕조의 주체적 반응을 제일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극심한 침체와 혼란에 빠져 조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견제할 외부 세력이 없었다. 러시아가 얼마간의 견제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일본의 야욕에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관파천 등 유리한 상황을 소극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쳤다. 러일전쟁에서 충돌한 이해관계도 조선이 아니라 만주를 둘러싼 것이었다.


7년간의 소강상태에 임하는 조선 왕조의 자세는 대한제국 건립으로 시작했다. 고종 개인에게는 위신을 높이고 절대 권력을 쥐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명목상의 칭제라 하더라도 개인의 욕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종은 칭제를 통해 종래보다 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외세에 극심하게 시달리는 상황을 겪는 동안 조선 조야에는 근왕(勤王)의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다. 왕이 왕 노릇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기에 앞서 왕이 왕 자리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절박한 과제로 널리 인식된 것이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을미사변처럼 황당한 사태를 겪고는 나라 지키는 일을 더 절박하게 여기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뒤를 잇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구호가 힘을 얻었다.


고종의 칭제에는 정통 성리학을 고수하는 일부 보수파를 제하고는 큰 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칭제에 찬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칭제의 실제 의미에 대한 생각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고종과 그 친위세력이 황제권의 절대화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그 의구심이 표현된 큰 통로의 하나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에서 상징적 역할을 맡은 인물이 서재필(1864~1951)이었다.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5년 말 귀국해 이듬해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독립신문을 통해 제창한 독립문 건립운동을 계기로 하여 7월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통해 주장한 ‘자주독립’과 ‘충군애국’이 독립협회의 기본 강령이 되기는 했지만, 독립협회는 출범하면서부터 넓은 범위의 당시 유력계층의 정치적 욕구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정치 참여집단과 민간의 유력계층이 모두 이 운동에 합류했고, 안경수, 이완용 등 친러 정부 고관들이 초기에 조직을 이끌어서 당시 협회 수뇌부는 고급관료 친목 모임 같은 성격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고관들이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한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고종과 그 친위세력에 대항하는 힘을 얻는 것이었다. 아관파천 상태에서 고종은 이범진을 필두로 하는 친위세력에게 절대적 신뢰를 주며 조정 대신들의 정책 제안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친위세력 성장은 임오군란 때부터 왕실이 거듭해서 위험을 겪는 가운데 계속되어 온 현상이었는데, 아관파천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회에 언급한 김홍륙이 친위세력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데, 출신이나 자격이 정상적 관리 등용에 적합지 않은 사람들이 임금과 사적인 관계를 통해 권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서영희는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에서 이 집단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96쪽)


이처럼 광무연간 권력의 핵심에 진출한 근왕세력의 정치적 부침은 매우 극단적이었다. 원래 아무런 정치적 기반 없이 정계에 진출한 이들로서는 오로지 황제의 신임만이 그 지위를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였으므로, 황제의 총애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한 인물이 다시 황제의 신임을 잃고 곧바로 실세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따라서 황제의 총애와 지근거리 확보를 두고 근왕세력 내부에서도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에게 같은 하위계층 출신으로서의 횡적인 연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황제와의 수직적인, 그러면서도 사적인 연관 관계만 존재하였다. 황제의 최고신임을 받았던 이용익과 이근택의 대립도 바로 그러한 근왕세력 내부의 암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홍륙은 한때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몰락한 인물이었는데, 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독다(毒茶)사건이라는 희한한 수법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비리가 적발되어 귀양 갈 참이었던 그를 서둘러 처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김홍륙의 뒤를 이어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김영준이란 자도 희한한 뒤끝을 보여줬다. 일본 공사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김영준은 무고(誣告)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99년 경무사로 있을 때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순에 넣자고 동료인 시종 신석린에게 제안했다가 응하지 않자 신석린을 체포하고 당시의 고관 태반을 역모사건에 연루시키려 했다. 이 고변은 효과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고종은 그를 두둔했다. 충성심으로 인한 잘못이니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법 담당관의 업무 수행을 공의가 아닌 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권력이 사유화된 결과였다.


김영준은 이듬해 고종의 신임을 갖고 경쟁하던 내관 강석호를 무고하다가 이번에는 관직을 빼앗겼다. 강석호가 미국 공사관과 짜고 공화제 추진을 획책한다는 무고였다. 고종이 공화제라면 원수처럼 여기는 점을 노린 것인데, 강석호는 조정 대신들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영준은 그리고도 부족해서 친미파와 친러파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또 추진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김영준의 발호 과정에서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 등 외세 줄서기 현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개항 초기의 친일-친청 대립과 다른 양상이었다. 1880년대까지 친일-친청은 크게 봐서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급진파와 양무운동에 동조하려는 온건파 사이의 정책 대립이라 할 수 있는데, 청일전쟁 이후의 외세 결탁은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기울어졌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고 핵심 인물 몇이 살해당한 후 고종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국내정치의 메커니즘이 사라졌다. 고종의 사유화된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외세뿐이었다. 조정의 대신으로 있어도 고종의 변덕 앞에 신분보장의 길은 어느 외세든 골라서 스폰서로 삼는 것뿐이었다. 국익을 위해 외교관들과 접촉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개인적 이해관계가 더 일반적인 동기였다.


열강의 외교관들은 이권 확보를 위해, 그리고 자국에 유리한 정책을 유도해 내기 위해 인맥 관리에 나섰다. 외국 공사들을 영수로 하는 당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줄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이 전통시대 당쟁과 달랐을 뿐이다.


외세 줄서기 현상은 독립협회에서도 나타났다. 창립 초기의 협회에는 여러 성향의 개화파만이 아니라 보수파까지 참여하여 ‘독립’을 내세운 기념사업을 함께 벌였으나 1년이 지나 대한제국 건립을 앞두고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열면서 친러파와 친일파 사이의 노선 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종은 칭제 지지 운동을 이끌어내는 통로로서 협회를 이용하다가 협회의 정치활동이 강화되는 데 따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898년 2월 구국운동 선언을 계기로 활동이 확대되면서 독립협회는 황제에 종속되지 않은 유일한 정치기구로서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그에 따라 친정부적 인사들은 협회에서 탈퇴하거나 뒷전으로 물러서고 정부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정부에 불만을 가진 민심이 독립협회에 크게 모이던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장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이를 갈았지만 일어설 만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립협회가 공의를 지킨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뒤질세라 달려왔다. 고관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비분강개하며 뜻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자 윤치호가 일곱 대신들을 공격했고, 고영근도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을 오흉이라 지목하고는 여섯 차례나 상소하여 죽이라고 청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궐을 지키며 땅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으며, 종로에 커다란 목책을 설치하고 단결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임금이 엄한 비답과 온화한 말로 타이르며 여러 차례나 해산하라고 명했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변란의 조짐이 이미 뚜렷이 나타났다.


독립협회에는 정부의 태도와 시책에 불만을 가진 여러 부류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중 강한 조직력을 가진 것이 친일파였다. 특히 일본에 도망가 있던 박영효의 추종자들이 협회의 소장 간부층에 대거 침투해 협회를 강경노선으로 이끌어갔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익명의 투서를 계기로 독립협회가 고종의 해산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거니와, 독립협회에는 분명히 시정개혁 운동 차원을 넘어서는 정체(政體)변혁 운동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대한제국 건립의 기본노선은 권력의 사유화였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이런 권력 사유화는 유교 정치의 원리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오랜 세도정치를 통해 정치의 공공성이 쇠퇴한 끝에 대원군 납치(1882)에서 민비 살해(1895)에 이르는 외세의 격렬한 개입까지 겹쳐져 조선의 정치에서 유교적 질서가 말살된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