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2. 00:34





이천 시내에서 박 처사를 태우고 요양원에 도착하니 두 시 반.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 박 처사는 어머니가 대자암 계실 때 어머니를 많이 보살펴드린 분이다. 그때는 절에 있던 누구보다 그분 덕분에 어머니 지내시는 걱정을 덜 하고 지낼 수 있었다. 쓰러지셨을 때도 백병원까지 모시고 왔었고, 병원 계시는 동안에도 이따금씩 문안 왔는데, 요양원으로는 어제 처음 길이었다.

아내와 박 처사를 먼저 올려보내고 사무실 볼일 본 다음 10분쯤 뒤에 올라가 보니 복도 가 '전용석'에 두 사람이 모시고 앉아 있었다. 최근 두 차례 와 뵐 때 기운이 떨어져 보이셔서 어제도 누워 계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기운이 좋아 보이셨다. 박 처사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어떻게 대하시던 사람인지 감이 잡히시는 것 같았다. 내가 앉을 때까지도 정중하게 말을 올리고 계셨는데,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예전 대하시던 가닥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제는 내게 손을 많이 뻗치셨다. 나타나자마자 말씀은 제쳐놓고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치시는데, 내가 손을 내밀어 맞잡아 드리니까 얼굴 주무르지 못하는 게 약간 서운하신 듯도 하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으신 기색이었다. 두 시간 남짓 모시고 있는 동안 손을 여러 차례 뻗치시는데, 기운이 좋으신 표시로 느껴졌다. 말씀으로 마음 표현하는 것은 이곳 올 때부터 아쉬움이 없었는데, 손길로도 표현하게 되신 것은 반가운 발전이다. 이런 발전에는 송 여사의 공이 컸을 것 같다.

그런데 반야심경 암송에서는 두 군데서 막혀 내가 막힌 곳부터 다시 외우는 데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외우셨다. 막히는 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기운이 넘쳐서 외우면서도 생각이 움직이시기 때문에 어디 외우고 있었던지 깜빡하시는 것 같았다.

얼마간 앉아 있으면서 홀에 평상시보다 사람이 적고 조용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변화가 있었던 내용을 나중에 원장님께 설명 들었다. 3층을 쓰기 시작해서 어머니 방 옆의 큰 방을 면회실로 바꿨다. 송 여사는 3층에 새로 맡은 방을 맡게 되어 어머니 방은 오 여사가 맡게 되었다. 오 여사는 젊은 편이지만(마흔 안쪽?) 성격이 차분한 인상이다. 어머니도 편안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금세 햇볕이 나오기도 하는, 매우 화려한 날씨였다. 전용석에 좀 앉았다가 안쪽 정원의 흐드러진 꽃나무들이 잘 보이는 면회식로 자리를 옮기고 좀 있으니 볕이 꽤 오래갈 것 같기에 테라스로 모시고 나왔다. 바람이 꽤 선선한데도 마냥 좋아하셔서, 춥지 않으시냐, 들어가시지 않겠느냐, 이따금 여쭈면서 괜찮다는 대답을 확인하며 꽤 오래 앉아 있었다.

꽃을 가꾸는 것은 이사장님 일인 모양인데, 마당가로 꽃나무를 잘 가꿔놓았을 뿐 아니라 테라스에 앉아서도 꽃을 즐길 수 있도록 화분까지 잘 배치해 놓은 정성이 참 고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여러 노인분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나도 열심히 배우고 싶다.

햇볕과 바람과 꽃. 그것으로 어머니는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시다. 찾아온 사람들은 덤으로 누리신다. 실내에 있을 때는 노랫가락 말씀이 별 여백 없이 이어졌었는데, 테라스에 앉아서는 말없이 자연을 즐기고 있다가 생각나는 대로 한 마디씩 던지신다. 장난스러운 말씀은 내게, 그리고 점잖은 말씀은 박 처사에게. 박 처사를 향한 말씀 중 이건 외워둬야겠다, 마음먹고 기억해 둔 대목이 하나 있다. "인생이란 게요, 지내다 보면 아름다운 것들을 갈수록 더 많이 찾아내게 된단 말입니다." 테라스에서는 노랫가락 화법도 별로 쓰지 않으셨다. 그 화법은 뭔가 불안한 심리가 작용하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해가 큰 구름조각에 가릴 때까지 3~40분 가량 테라스에 모시고 있었다. 면회실에 돌아와 앉아 계셔도 나가기 전과 기분이 다르시다. 햇볕과 바람 속에 앉아 있던 기분이 계속되시는 것 같다. 말씀을 많이 안 하고 하실 때는 여유 있는 태도이시다. 나 보고 노래를 부르라 해놓고는 부르실 줄 아는 노래도 따라 부르지 않고 열심히 들으신다.

지난 주 이OO 선생이 어머니 뵙고 가서 보내준 메일 생각이 난다. 이 선생은 나보다 몇 살 아래의 어머니 제자로, 몇 주일 전 나와 함께 와 뵙고, 이번에는 혼자 와서 뵈었다. 메일에서 흥분이 넘쳐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생 때 어머니와 무척 가까웠고,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어머니를 따르다가 몇 해 연락이 끊겼던 것을 내게 연락을 취해 같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도 어머니가 어렴풋이 알아보기는 해도 명확하지 않으셨는데, 혼자 오면서는 알아보지 못하실 각오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30년 전 일을 뜻밖에 잘 기억하시더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들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당신이 학생들을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기억하시는 것이다. 이 선생을 집에 불러 손수 밥을 해 먹여주신 일, 어머니 작품을 보여주신 일, 어머니께 엽서 받은 일을 말씀드릴 때마다 “내가? 그럴 리가?”, “나는 그런 선생이 아니었는데” 어리둥절해 하시더라고.

이 선생이 십여 년 전 어머니께 받은 엽서 간직해 뒀던 것도 보여드리고, 이런저런 일의 정황을 설명드리니 구체적인 일들도 차츰 기억이 살아나시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재직 때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지낸 데 아쉬운 마음이 있으셨던가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가까이 대하던 제자가 찾아와 옛날 일을 일깨워드리고 있으니...

'팰림세스트 palimpsest'란 말이 생각난다. 유럽 중세에는 양피지 값이 비싸서 한 번 썼던 내용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지우고 다른 내용을 새로 쓰는 일이 많았다. 현대 서지학자들이 지웠던 내용을 복원해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얻곤 한다. 당시 기준으로 보존 필요가 없던 내용이 지금 연구에 요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옛 자료에도 비슷한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값싸면서 재활용이 힘든 종이라는 재료가 일찍부터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중요한 현상이 아니다.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는 '팰림세스트'가 비유로도 널리 쓰이는 말이다. 이미희 선생의 등장으로 어머니의 자기 인식에도 '팰림세스트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닐까?

이 선생 얘기를 어제 해도 전혀 기억을 못하신다. 그렇다면 옛날 일 떠올려드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자극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떠올리는 그때뿐, 기억력이 크게 늘어나실 것 같지 않다. 기억에 근거해 무슨 행동을 취하실 여지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런 기억이 바로 자유로운 자기 인식 아닐까? 행동의 부담은커녕 기억의 부담조차 없는. 인생을 충실하게 채우는 것으로 자유로운 자기 인식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좋은 인연에 대한 고마움을 되살리고 지난날의 고통을 되새기는 데 굳이 행동과 기억까지 꼭 필요한 것일까?

어제 내가 뵌 어머니 모습에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바뀐 측면도 은연중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제 우리와 나누신 이야기를 통해 바뀐 측면을 주변 분들에게 지금 보여주고 계실지 모른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을 지금도 살고 계시는 것이다.

(<월간불광>에 보낸 글입니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5. 25  (2) 2010.05.26
어머님 전 상서  (1) 2010.05.16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5) 2010.05.03
10. 4. 23  (6) 2010.04.23
10. 4. 9  (2) 2010.04.0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