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애초의 파천 자체는 친위쿠데타의 성격을 가진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당연한 결과였는데, 일각에서 영향력 증대 정도가 아니라 일거에 지배권 확립을 노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로 인해 민비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의 극단적 폭력성이 조선인들을 분격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판을 일으킨 상황에서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방침을 따르던 정부를 전복시켰다.

친위쿠데타라면 친일 정부 전복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인데, 고종은 왜 1년 넘는 긴 기간 동안 공사관에 머물렀을까? 고종에게도 러시아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빌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측이 고종의 신변 확보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종의 작은 이익과 러시아의 큰 이익이 합쳐져 파천 상태가 길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획책은 누가 했든 최종 결단은 고종의 몫이었다. 개인적 결단이라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본인의 품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앞서 이태진의 고종 옹호를 반박하면서 알렌의 일기가 잘못 번역되었다고 지적한 일이 있는데, 알렌이 고종에게 심한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매천야록>에도 있다.(허경진 옮김 <매천야록>에서 발췌함.)

미국 공사 안련이 가고 모간이 대신 왔다. 안련은 우리나라에 머문 지 수십 년 되었는데, 돌아갈 때 사람들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사천 년에 한국 황제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

<매천야록>에는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태도에 관한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시사점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예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씨를 입궁시켰다. 왕후가 있을 때는 임금이 두려워하여 감히 곁눈질도 하지 못했다. 십 년 전에 우연히 엄씨를 총애한 적이 있었는데, 왕후가 크게 화를 내며 죽이려 했다. 임금의 간곡한 만류로 엄씨는 죽음을 면했지만 밖으로 쫓겨났다. 이제 다시 불러들이니, 변란을 당한 지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 장안 백성들은 임금이 양심도 없다며 모두 탄식했다. 엄씨는 생김새가 민비와 비슷하고 권모와 지략까지도 그와 닮아 입궁한 뒤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정사에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으니, 점점 민비가 있을 때와 같아졌다.

상처한 사람은 웃음이 나와도 변소 가서 웃는다는데, 일 터지고 닷새만에 엄씨를 불러들였다니 왕의 자격보다 인간의 자격부터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민비의 죽음을 발표도 못한 채 왕비에서 폐하고 있던(10월 10일) 시점의 일이 아닌가. 오랫동안 고종을 가까이서 접해 본 알렌이 그 사람됨에 진절머리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난 회에 을미사변 날짜를 1895년 11월 6일로 적었는데, 10월 8일로 바로잡습니다. 김안국 외 엮음 <동아시아사 연표>(청년사 펴냄, 1992)의 착오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알렌 못지 않게 고종을 많이 접했던 외국인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였다. 1885년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임한 베베르는 아관파천 당시까지 주한 외교단의 원로일 뿐 아니라 왕실과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고종이 공사관으로 건너왔을 때 베베르는 이임 발령을 받아놓고 후임자 스페에르에게 업무를 인계 중이었는데, 상황이 터지자 스페에르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를 유임시킬 정도로 요긴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종이 환궁한 뒤에야 조선을 떠났고, 4년 후 고종 즉위 40주년 축하 사절로 다시 와서 반년간 머무르며 러일전쟁을 앞둔 외교전에서 한 몫을 맡기도 했다.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 묻혀 있다가 십여 년 전부터 널리 활용되고 있는 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1902년 대한제국 방문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관파천 당시 상황을 베베르는 이렇게 기록했다. (노주석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 131~149쪽 "베베르 수기 전문"에서 발췌함.)

민 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마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새벽 7시 30분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여자 복장으로 변장하고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오는 데 성공했다. (...) 친일파 세 사람은 타살당하였다.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이때 러시아 공사관 경비 해군은 100명이었으나 서울 주둔 일본 수비대는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자 서울 남쪽에 있는 일본인 조계지로 이동한 분노에 찬 군중이 일본인의 목제가옥을 파괴하지 않을까 염려해 방어를 하였다.

병력에서는 러시아 측이 상대가 안 되는 약세였지만, 일본이 그 단계에서 러시아와 정면 대결을 벌일 태세가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을미사변 후 조선인의 극심한 반일 감정이 일본군의 발목을 잡아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고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러시아 측의 어려운 사정은 베베르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고종이 처음 공사관으로 피신해 오셨을 때 공사관 입장은 난처했었다. 고종의 생명에 대한 염려와 또 밖에서 일본인과 한인 사이 충돌에 대한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에 청국군과 일본군의 전쟁과 일본인들의 개혁 강요로 나라는 온통 무정부적인 환란에 빠진 상태였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를 서울로 납입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파천으로 인해 러시아가 얻게 된 기회의 가치를 강조했다.

사실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 년간 대한제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다소 무관심했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주 관심은 청국과 시베리아의 경제여건을 호전시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문제는 뒷전에 있었다. 외무성에서는 대한제국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때문에 공사관은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국과 일본에 침해당하지 않도록 순수한 조언만을 하는 것으로 국한하고 독립을 지지하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온 후 상황은 급격히 변했으며 모든 국사는 러시아 제국국기가 게양된 러시아 공사관의 보호 아래 행해지고 있었다.

고종이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불안정한 성격의 고종과 협조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협상에 따라 러시아 정책을 조정할 필요에 대비해 러시아 측이 궁극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고종은 심성이 선량하나 성격은 유약했다. 본인은 왕의 권위와 자유의사에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추고 매일 밤 늦게까지 계속된 고종과의 좌담에서 이런저런 정책에 대해 충언을 드렸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모든 대신들은 공사관 건물 안에 병풍을 쳐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대신들과 단둘이서 어떤 사건이든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 어느 경우나 본인은 자주 장문의 상소로 개혁을 즉시 이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일본인의 요구를 사전에 평가하기를 피했으며 고종이 사적으로 문의한 문제 해결에만 협력을 하는 것으로 자숙하였다.

이 상황이 조선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매천야록>의 기록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12월 27일(음력)에 임금이 경복궁을 나갔다. 이범진과 이윤용 등이 임금을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기고 김홍집과 정병하를 잡아 죽였지만,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달아났다.

임금은 처음부터 헌정(憲政)에 묶인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더불어 아라사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 했다. 아라사인들도 우리나라에 기반을 닦으려고 엿보다가 왜국에 선수를 빼앗기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8월(을미사변) 이후 이범진 등이 아라사 공사관에 숨어들어 많은 뇌물을 주고 말했다. "만약 정국을 뒤엎는 데 원조한다면 마땅히 온 나라가 왜국을 섬기듯(아라사의) 명령을 듣겠다."

아라사 공사가 매우 기뻐하며 그 청을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니, 인천에서 잇달아 입성했다. (...) 임금이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홍집 등의 목을 베게 했다. 이때 김홍집은 직방(直房)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달아나라고 권하자 탄식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를 본받아 역적이라는 이름을 얻겠는가!"

이에 그는 정병하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병하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외쳤다. "대신인 우리를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뒤에 죽게 해주시오." 그러자 김홍집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찌 말이 많은가. 나는 마땅히 죽겠네."

일본이 주도한 갑오경장은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것이었고, 그 가장 중요한 지향점의 하나가 입헌정치였다. 입헌정치가 당시의 우국지사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명분이었음을 황헌이 갑오경장을 "헌정"이라고 요약해 표현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고종이 근대적 입헌정치를 싫어한 것은 후에 독립협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거듭 나타나는 일이거니와, 전통적 전제정치의 기준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자의적 '통치'를 원했던 것으로 황현은 보았다.

하루는 임금이 조희연에게 노하여 군부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여러 각료들이 그는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했다. "대신 하나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옥새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져가라."

대신들이 벌벌 떨며 감히 아무 말도 못했는데, 어윤중이 천천히 일어나 물러서면서 말했다. "성인이 말하길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써 섬긴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들을 이렇게 대하시니, 장차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여움을 푸시고 굽어 살피시어 공의를 펴소서." 임금이 잠자코 있었다.

민주공화정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전통시대의 전제군주가 일방적 통치권을 가졌던 것처럼 상상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모두 바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질서는 나름대로 균형잡힌 구조 속에서 긴장을 소화시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임기에 관계없이 자리를 싹쓸이하는 오늘날의 행태를 '제왕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 진짜 제왕들에게 매우 실례되는 얘기다. 옛날의 임금들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신하들을 대하지 못했다.

1890년대의 조선에서 고종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옥새를 집어던지는 짓을 하기에 이른 것은 유교 정치의 원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무너져 온 결과였다. 충과 예 사이의 균형관계를 당당히 내세운 어윤중 같은 사람이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가 된 상황을 황현은 개탄한 것이다. 황현도 어윤중도 벌벌 떨고 있던 대신들도 올바른 정치 원리가 어떤 것인지는 모두 공부를 통해 똑같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원리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 되어 있었다.

갑오경장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파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 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을 갖춰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벼락출세를 한 김홍륙이란 자가 있었다. 함경도 출신으로 소시쩍에 연해주에 다니며 러시아어 익힌 밑천을 가지고 궁내관으로 통역을 맡고 있었는데, 파천 기간 동안 고종과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전담하면서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대한제국 출범 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설 땅을 잃었다. 1898년 여름 비리가 적발되어 유배가게 되었는데, 떠나기 전에 고종과 황태자의 커피에 아편을 넣어 독살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다.

서영희는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에서 이 이른바 '독다(毒茶)' 사건을 하나의 의옥(疑獄)으로 보았다. 고종이 김홍륙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독다 사건 반년 전 이재순의 김홍륙 살해 음모 사건도 고종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본다. 합당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유배 가는 것이 억울해서 독살을 시도했다는 얘기는 너무 황당하다.

어윤중이 조희연을 옹호할 때는 옆에서 벌벌 떨고만 있던 대신들도 어윤중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알고 그렇게 나서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관파천을 지낸 후 대한제국을 세울 무렵의 조정에서 누가 어윤중과 같은 말을 했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것 같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