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회에서 나는 갑신정변을 '친일' 행위로 규정했다. 물론 친일 외의 의미가 갑신정변에 전연 없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참여자 대다수는 '구국'의 목적을 앞세워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을 생각한 사람들, 정변에 희생당한 사람들 중에도 '구국' 의지가 그들 못지 않은 사람들은 많았다. 정변 참여자들을 특화시킨 것은 그 친일 행태였다.
1884년 시점의 '친일'을 죄악시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그보다 20년 후 침략자로서 일본의 태도가 확정된 이후의 친일은 그 자체로 반민족과 반역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영향력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나라와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무조건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태도다. 1880~90년대 상황에서 친일을 했든 친청을 했든 주체성을 가지고 외세 의존에 한계를 두었다면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 정세 판단이 정확했느냐, 효과가 있을 만한 정책이였느냐 하는 기술적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가 속한 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이나 작은 집단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기술적 문제에 앞서 도덕적 문제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 문제라 해서 현실과 무관한 관념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현실 문제를 도덕적 차원과 기술적 차원으로 갈라서 보는 것이다. 한 나라, 한 사회의 흥망성쇠는 기술적 조건과 도덕적 조건 양쪽에 다 걸린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위정척사의 도덕론이라도 기술적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쑬모가 없는 것이고, 아무리 기술적 효과가 뛰어난 정책이라도 도덕적 근거가 없으면 주체성의 훼손을 피할 수 없다.
비상한 위기에 처한 사회는 주체성의 부분적 훼손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명-청 교체 때 조선의 주전파는 정체성에 극단적으로 집착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과의 사대-책봉 관계에 정체성의 큰 축 하나를 두고 있었다. 중국의 주인이 바뀌었으면 새 주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그 축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런데 주전파는 상대에 집착하느라고 관계를 소홀히 했다. 주전파의 입장을 이어받은 노론 세력이 소중화주의에 빠져 청나라와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은 전통 체제의 대체(大體)를 약화시켜 정상적 발전의 길을 가로막은 소탐대실의 자세였다.
17세기 초반에 명나라가 종주국 노릇을 못하게 된 것처럼 19세기 후반의 청나라도 종주국 노릇을 못하게 되었다. 조선은 사대-책봉 관계의 보호를 잃고 근대 세계 속에 내던져진 입장이었다. 강대국으로 자라나고 있던 이웃 일본은 조선의 장래가 걸린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일본과의 관계를 잘 풀어가기 위한 '친일'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1890년대 이후 박영효의 행적에서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보다 '일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앞세웠다는 점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 1권 117-126쪽에 실린 윤해동, "박영효"에 그 행적이 서술되어 있다.) 갑신정변 때는 국가를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 그 후에 바뀌었을 이유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나는 갑신정변에서도 박영효는 이기심 때문에 나선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도망갔던 박영효는 1894년 8월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군의 등에 업혀 귀국했다. 12월에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이 내각을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라고 한다. 온건파인 김홍집과 대비되는 화끈한 친일파 박영효가 실세였기 때문이다. 그 5개월 후에는 김홍집이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박영효가 서리를 맡았다. 그러나 불과 달포 후인 1895년 7월 6일 다시 쫓겨 일본으로 도망갔다.
(윤해동은 위 글에서 "1895년 7월 을미사변에 연루되자 일본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2차 망명의 길을 떠났다."고 했는데,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왕비 살해는 박영효가 축출된 석 달 뒤인 10월 8일에 벌어진 일이고, 여기 참여한 우범선은 이듬해 아관파천 후에 일본으로 달아났다. 박영효가 7월 초 쫓겨날 때 "왕비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7월 이전부터 암살 음모가 떠올라 있었던 모양이다.)
박영효가 달아난 후 다시 총리대신을 맡은 김홍집이 아관파천 때 '친일'로 몰려 살해당한 것은 참 기막힌 일이다. 청일전쟁 후 갑오경장의 진행 속에 김홍집이 친일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야말로 주체성 있는 친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부득이한 선에서 일본의 힘을 인정하며 그 조건 위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그의 경력 전체를 일관한 태도였다.
오카모토 다카시는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소와당 펴냄)의 "프롤로그"에서 김홍집의 죽음을 부각시켰다.
"청일전쟁 직후 당시의 김홍집은 일본의 지지를 얻어 수차례 내각을 조직하고 근대화 개혁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국왕과 왕비를 정부에서 분리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왕실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1895년 10월 일본이 경복궁에서 민비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김홍집은 일본의 뜻대로 이 사건을 유야무야 수습하려다가 왕인 고종의 신임을 잃고 만다. (...)
이러한 불온한 공기 속에 민비 살해 이래로 고종과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끼던 친러파 관료들이 결탁한다. 그들은 곧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고 거기에서 신정부를 조직한다. 그런 뒤 김홍집 등 구정권의 요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포박을 명령했던 것이다.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실현되었다. 상하 관민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상실한 것에 절망했기 때문일까? 김홍집은 담담하게 죽을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김홍집(1842~96)은 개화당 인사들과 함께 박규수의 문인이었지만 김윤식(1835~1922)과 함께 온건개혁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이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뒷처리 등 중요한 외교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는 자세를 보여 마건충(馬建忠)에게 "조선에서 첫째가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친일파보다 친청파라 해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그런 김홍집을 갑오경장에 앞세운 것은 민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박영효처럼 노골적인 친일파를 내세웠다가는 큰 반발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김홍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길로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아관파천 당시 그가 피할 수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사실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가 떠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관직을 탐하지 않은 인물로 널리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96년 2월 11일 아침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고종이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이 김홍집 등 당시의 대신들을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불러다 죄를 따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 등이 재판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고종은 김홍집 등을 공적인 죄인이 아니라 사적인 원수로 여긴 것이다. 신하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런 식으로 때려잡는 것은 법도에 없는 짓이었다. '전제군주제'라 하여 왕이 멋대로 하던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교 국가의 실상과는 다른 상상이다. 물론 비상사태 아래 왕의 판단에 따라 처리하는 권한은 현대의 국가 원수가 위임받는 비상대권보다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상사태를 넘기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유교 국가의 원칙이었다.
신민이 임금을 공경하는 것은 일방적 예속이 아니었다. 임금도 신하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켜야 했고, 그 존중을 상징적으로 받는 것이 대신이었다. 판서 급 이상의 대신의 신상에 관한 일은 절차를 엄격하게 지켜서 처리하는 데 군신 관계 균형의 원리가 있었다. '전제정치'도 아무 균형 없는 일방적 지배는 아니었다. 균형 없는 정치에는 지속가능성이 없다.
전라 감사의 진상품을 받고 고종이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했다는 <매천야록>의 기록을 앞 회에 소개했는데, 그것이 고종의 실제 모습이 설령 아니더라도, 당시 백성들의 마음속에 비쳐진 고종의 모습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개인의 득실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필부(匹夫)의 모습이다.
김홍집을 죽이는 데서도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에게는 박영효 같은 소인과 김홍집 같은 군자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가로막는 사람은 똑같은 자기 적일 뿐이었다. 안경수, 이완용 같은 소인배라도 자기 원하는 일을 밀어주기만 하면 최고의 충신으로 여겼다. 고종은 암군이며 폭군이었다.
이태진은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실은 "고종황제 암약설 비판" 맺음말에 이렇게 썼다.
"한국사에서 고종시대는 근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방향은 아주 달라질 수 있다. 이 시대의 군주정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거나 진행되었으면 일본의 36년간의 한국지배는 그것을 꺾은 불법강점이 되고, 그 반대라면 일본의 한국통치는 한국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고종 암군설-암약설 등은 바로 후자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참 답답한 이야기다. "침략주의자들이 고의적으로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장담하는데, 황현이 침략주의자들 말에 따라서 <매천야록>을 썼단 말인가? 대통령이 돌대가리라고 떠든 사람이 국가기밀누설죄에 걸렸다는 어느 시절 우스개 생각이 난다. 고종이 암군이라는 이야기는 일본 침략을 지지하려는 목적 없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태진은 고종의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 제3자라 할 수 있는 외국인의 증언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위 책 97-98쪽에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이 1903년 쓴 일기 한 대목의 번역문과 원문이 나란히 실려 있다.
"나는 황제가 - 마음이 약하므로 -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승낙하리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황제가 모든 일을 다 책임을 지고 처리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 (I can scarcely believe that the emperor - weak as he is - would consent to a thing that would harm me, but I have long given him up as liable to do most anything. ...)"
"weak as he is"는 역접의 뜻인데 순접으로 해석했다. 알렌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고종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워낙 줏대 없는 인간이라서 약간은 걱정이 된다는 것이 알렌의 뜻이다. 뒷부분도 고종을 나쁘게 보는 뜻인데, 나쁘지 않은 뜻으로 해석하느라고 이 교수가 애를 너무 쓴 것 같다. 아래와 같이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알렌도 고종을 암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제가 아무리 대가 약한 사람이긴 하지만 설마 내게 해가 되는 일을 승낙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짓이라도 가리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체념한지 오래되었다."
왜 이런 무리한 번역이 나오는가? 고종 암약설을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고종이 암군이었다면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까봐 걱정인 모양인데, 참 이상한 걱정이다. 나는 고종이 보기드문 암군이었다고 믿지만, 그렇다 해서 일본 침략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19세기 후반에 조선 왕조국가는 원리가 무너지고 기능이 떨어져 망하기 쉬운 상태에 와 있었다. 게다가 왕까지 암군이어서 국가 중흥에 공헌할 만한 양심적이고 유능한 인재들은 국가 운영의 기회를 맡기 힘들고, 더러는 죄 없이 잡혀죽기까지 했다. 일본의 침략은 왕조의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지, 멀쩡한 나라를 망가뜨린 것이 아니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 자체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큰 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선 왕조는 일본의 도움 없이도 망할 길을 오랫동안 잘 찾아 왔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진짜 피해자는 왕조가 아니라 민족사회였다. 왕조가 왕조 노릇 못한 것은 이 피해를 막거나 줄여주지 못한 하나의 주변조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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