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대서양 항해에 나서려는 여행자들께서는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영국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 인근 해역이 전쟁 수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제국 정부의 공식적 경고가 있었던 것처럼 영국이나 그 동맹국 선박은 이 해역에서 공격 대상이므로 이 해역에서 영국이나 그 동맹국의 배를 타고 여행하시는 분들께서는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셔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워싱턴 D.C. 독일제국 대사관1915년 4월 22일


1915년 4월 22일 주미 독일 대사관에서 미국 여러 신문에 올린 광고다. 몇 신문에는 그 바로 옆에 5월 1일 루시타니아 호의 출항을 알리는 영국 큐나드 해운회사의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3만 톤급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는 5월 1일 예정대로 뉴욕을 출항했다. 1257 명의 승객과 702 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엿새 후 이 배는 아일랜드 남해안에서 11 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승선자 중 1198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의 수색작업으로 289 구의 시신만을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65 구는 신원조차 확인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사상 손꼽히는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민간인의 대량살상은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영국 정부와 군부는 국민의 적개심을 격화하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 공격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선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어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민간 여객선에 대한 경고 없는 어뢰 공격은 물론 부당하고 잔인한 일이다. 당시 국제 전쟁법으로 통용되고 있던 헤이그 협약(1899, 1907)도 여객선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다른 민간 선박에 대해서도 승선자를 대피시킨 뒤에야 침몰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루시타니아 호 공격은 역사상 인간이 해 온 짓 중 제일 나쁜 짓의 하나라고 굳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나쁜 짓이 악마 같은 U-보트 함장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발터 슈비거 함장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런 판단이 내려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져 있었다. 이런 참극이 다시 일어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슈비거 함장의 능력과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가 처해 있던 조건을 검토하는 것이 더 요긴한 일이다.


기본 문제는 헤이그 협약을 악용하려는 술수 때문에 협약이 사문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루시타니아 호만 하더라도 필요시 무장상선(AMC Armed Merchant Cruiser)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건조와 운영에 영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던 배였다. 함포를 탑재할 포좌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몰 당시에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런 종류의 배가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무차별 공격에 나선 조치에도 방어적인 측면이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해상 운송을 봉쇄하기 위해 1914년 11월부터 북해 전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민간 선박의 운항을 통제하고 있었다. 1915년 2월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한 것은 이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특히 자국 상선들이 중립국의 위장 국기를 달도록 한 영국 해군본부의 1915년 1월 31일 명령이 독일을 자극했다.


2월 4일 독일 해군이 전쟁 수역을 선포하고 2월 18일부터 무차별 공격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발표한 직후인 2월 10일에 영국 해군이 자국 상선들에게 내린 명령은 더욱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이 갑자기 전방에 나타나 적대적 태도를 보일 때는 전속력으로 항진해 들이받으라”는 것이었다. 열흘 후에는 선제발포를 권장하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영국 해군의 명령과 지시는 비밀로 내려졌지만, 독일 해군에게 바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헤이그 협약을 무력화시키는 명령과 지시였다. 아무리 민간 상선이라 하더라도 공격력을 가진 선박 앞에 잠수함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통보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니까. 큐나드 해운회사가 당시 루시타니아 호 선장에게 독일 잠수함을 들이받을 경우 상금을 약속했다는 사실도 후에 밝혀졌다.


‘U-보트’라는 말이 영어권에서는 독일의 공격형 잠수함을 일반 잠수함과 구별해서 가리키는 말로 쓰였지만, 독일에서는 ‘Untersee-Boot’가 모든 잠수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차 대전 및 2차 대전에 쓰인 독일 잠수함은 공격 기능에 절대적 비중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일반 잠수함과 다른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적군에게 적발되기만 하면 소형 화기로도 파괴될 수 있는 방어 기능의 취약성 때문에 모험성이 매우 강한 무기였다. 공격력이 크고 방어력이 약한 이런 무기의 존재를 헤이그 협약 때 의식했다면 민간 선박의 보호를 위해 더 실효성 있는 규정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슈비거 함장의 U-보트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도 참극을 빚어낸 판단에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잠수함은 아일랜드 서쪽 해역의 임무를 마치고 귀항하는 참이었다. 연료도 많지 않고 어뢰도 딱 한 발 남아 있었다. 운명의 날 우연히 루시타니아 호와 마주쳤을 때 루시타니아 호는 깃발도 올리지 않고 배 이름도 물감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며칠 전 조그만 화물선과 마주쳤을 때는 공격을 미리 알려 선원들이 구명정으로 옮겨 탄 뒤에 어뢰를 발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에 위험이 너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경고 없이 마지막 어뢰를 발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 방의 어뢰로는 통상 기대하기 힘든 참혹한 결과가 일어났다. 어뢰 폭발에 이어 또 한 차례 더 큰 폭발이 일어난 뒤 루시타니아 호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3만 톤급 배가 수면 밑으로 사라지는 데 십여 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48 척의 구명정이 대기상태에 있었는데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져서 제대로 내려진 것이 여섯 척뿐이었다. 선장은 배를 멈추려 했지만 기계 파손으로 동력을 끊을 수 없어서 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고속 항진을 계속, 침몰을 빠르게 하면서 안전한 하선을 더욱 어렵게 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극은 어뢰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울려 빚어낸 것이었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놓고 손해배상 소송이 벌어졌다면 꽤나 복잡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어뢰를 발사한 U-보트와 독일 해군의 책임이 물론 제일 크겠지만 전적인 책임일 수는 없었다. 두 번째 폭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독일의 전쟁 수역 선포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독일대사관의 공식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 수역으로 운항한 데 잘못은 없는지, 피격 후 계속 항진으로 인명 피해가 늘어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배의 화물 중에 적대행위를 유발할 군수품이 실려 있지 않았는지 등 많은 문제들이 검토되었을 것이다.


손해배상 소송은 없었다. 영국과 독일의 선전전만이 평행선을 그렸다. 선전전에서는 독일이 방어적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독일이었고, 그 결과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것이었으니까.


독일 정부는 루시타니아 호가 무장 상선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기를 싣고 있었으므로 전쟁 행위 중에 피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큐나드 해운은 화물목록을 공개하면서 소총 탄환 4,200 상자(420만 발), 포탄피 1,250 개, 뇌관 18 상자만이 군사물자로서 배에 실려 있었다고 밝혔다. 소총 탄환은 적재를 통제하는 군수품(munition)으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강력한 탄약이 실려 있어서 2차 폭발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독일 측에서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독일 측에 다소나마 유리한 사항이 2차 폭발이었다. 어뢰 공격 자체는 배를 침몰시키더라도 그렇게 큰 인명 피해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참극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측에서는 어뢰가 두 발 발사되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철저한 조사를 통해 결국 한 발뿐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선전전의 백미는 소위 ‘괴츠 메달’이었다. 뮌헨의 메달 제조업자 카를 괴츠라는 사람이 큐나드 해운의 무리한 여객선 운항을 풍자하는 내용의 메달을 만들어 팔았다. 무기를 잔뜩 싣고 가라앉는 배 모양과 함께 “밀수 금지!(Keine Bannware!)”, “장사가 제일(Geschaft uber Alles)” 등 문구를 새겨 넣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든 엉성한 물건이어서 날짜도 5월 5일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이 메달이 1년 후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1916년 5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사진이 실리면서 U-보트 승무원들이 받은 훈장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여기에 주목한 영국 외무성 홍보 책임자 뉴튼 경이 백화점 사업가 해리 셀프리지에게 제안해 복제품을 만들게 했다. 한 개 1실링에 25만 개나 팔린 이 ‘루시타니아 메달’에 딸린 팸플릿에는 이 메달이 독일 국민들에게 기념품으로 뿌려진 것이며, “5월 5일”이란 날짜를 보면 여객선 공격이 사전에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과 큐나드 해운의 책임에 관해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당시부터 불거진 것들이 있었다. 만약 영국이 패전국이 되었다면 새로운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식적 해난 조사위원회의 활동 경위부터 난맥을 보여준다. 1915년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36명의 증인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끈 것은 몇 해 전 타이태닉 호 조사위원회도 이끌었던 머지 경이었다. 위원회 시작 때 해군에서 선장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자료를 조작한 사실이 발견되자 머지 경은 수석검사 F. E. 스미스와 함께 진행을 거부했다. 결국 위원회는 선장에게도, 회사에게도, 해군에게도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이 독일 정부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머지 경이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에서는 개운치 않은 여운이 느껴진다. “루시타니아 사건, 골치 아프고 더러운 일거리였어! (The Lusitania case was a damned, dirty business!)” 머지 경은 이 위원회 활동의 수당 수령까지 거부했다.


루시타니아 호의 선체는 해안에서 약 11 킬로미터, 수심 약 100 미터 위치에 누워있는데도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국 정부가 아직까지도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1995년 아일랜드 정부가 이 선체를 역사기념물로 지정, 탐사작업을 어렵게 만든 것도 영국 정부의 입김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1990년대 초에 탐사작업을 한 어느 잠수부가 뜻밖의 사실을 터뜨렸다. 선체에 구멍이 펑펑 뚫려 있고 부근 일대에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인근 어민들은 1950년대 어느 시점에서 해군 함정들이 두 주일 동안 부근을 맴돌고 많은 폭발음이 들렸던 사실을 기억했다. 작년 2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보물찾기 Treasure Quest> 시리즈 중 “드러난 루시타니아”란 제목으로 무인 잠수정의 촬영을 방영한 일이 있는데, 그 화면에도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분명히 나타났다고 한다. 1915년에 머지 경을 괴롭힌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난 사고는 지상의 사고에 비해 명확히 밝혀지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다. 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명확한 해명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관계자들끼리 전쟁 같은 대립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각자의 극한적 주장에만 매달리고, 그 어느 것도 입증과 반증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통로가 될 뿐이다. 어느 사고에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상식은 무시당한다.


나는 지난 주 발표된 천안함 관계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 그 발표 내용과 다른 사실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이라고 우기는 증거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루시타니아 호를 둘러싼 선전전과 같은 소통 거부의 의지만 보이기 때문이다.


설령 북한의 공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안보와 관련해 그보다 더 중요한 많은 사실들이 얽혀 있는 사건이다. 왜 음파탐지기(소나)가 작동하지 않았는가? 이 하나의 질문만 하더라도 호전적인 이웃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안보에 더 절실한 문제다. 그런 수많은 문제들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북한 책임으로만 덮어버리려 하는 현 정권의 선전전을 나는 경멸한다. 영국 선전전처럼 효과라도 있을 만하면 미워하기나 할 텐데, 경멸밖에 안 된다.

Posted by 문천

1898년 4월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미국 시장과 더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미국 사회에 1890년대 들어 팽창주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기는 했지만,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1895년부터 시작된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이 상황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소요로 인해 쿠바 관계 미국인들의 사업에 지장이 생긴데다가 스페인 당국의 가혹한 진압작전을 미국의 황색 언론이 열심히 선전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미국의 매킨리 행정부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재에 따라 스페인 정부도 1898년 1월부터 쿠바의 자치권에 동의,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월 15일 21:40분경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 호가 폭발을 일으키고 침몰해 탑승자 355명 중 27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1890년 진수된 메인 호는 같은 때 건조된 텍사스 호와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해군 함정이었다. 침몰의 원인은 배 앞부분에 있던 탄약고 폭발이었다. 사고 직후 스페인 측과 미국 측은 별도의 조사를 행하고 서로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스페인 측 조사는 탄약고 옆의 연료실에서 불이 나 탄약고 폭발로 이어졌다고 했는데, 미국 측 조사는 기뢰 폭발이 있었고, 탄약고 폭발은 그로부터 촉발된 것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는 동안 미국에서는 퓰리처의 <뉴욕월드>지와 허스트의 (뉴욕저널>지가 경쟁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매킨리 대통령과 토머스 리드 하원 의장은 전쟁을 막기 위해 합심 노력했으나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4월 하순 전쟁이 선포될 때까지 메인 호 침몰은 개전 이유로 제기되지 않았다.


불과 석 달에 끝난 전쟁을 통해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켜 보호국을 만드는 외에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해 제국주의 대열에 진입했다. 미국이 원하고 스페인이 회피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기뢰 폭발이 메인 호 침몰 원인이었다고 하는 당시 미국 측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미국인들 자신이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후 몇 차례 조사가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1910년 말 메인 호 선체를 아바나 항에서 치우기로 결정하면서 정확한 재조사를 위해 선체 주변에 담을 쌓고 물을 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에서 12월에 걸쳐 브릴랜드 제독이 이끄는 조사위원회가 모든 조사 내용을 검토했다. 이 검토로 1898년 미국 측 조사의 핵심 내용 일부가 번복되었다. 외부의 폭발이 있기는 했지만 문제의 탄약고보다 훨씬 뒤쪽에서 일어난 조그만 것이었으며, 기뢰 폭발의 ‘결정적 증거’라 했던 선각의 휜 상태는 잘못 관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74년에 미국의 하이먼 로코버 제독은 1910년의 재조사 결과에도 만족하지 않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 개인적인 조사 작업을 행했다. 그는 연료실 화재가 폭발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How the Battleship Maine was Destroyed>(1976)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1998년 침몰 백주년을 맞아 <내셔널지오그래픽> 지에서 최신 기술을 동원해 또 한 차례 재검토를 했다. 그 결과는 로코버의 주장에 비해 연료실 화재의 가능성을 낮추고 기뢰 폭발의 가능성을 높인 것이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메인 호 침몰을 ‘영구미제’ 사건으로 규정한 셈이다.


비록 메인 호 침몰을 개전 이유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사회 분위기를 전쟁 쪽으로 몰고 가는 데 메인 호가 결정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음모론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뢰 공격의 가능성과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을 모두 낮춰 본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철저한 조사가 자해설을 더 부추기기도 하고 있다. “도둑 귀족”이라 불리던 당시 미국 대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전쟁에 워낙 크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음모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1898년 당시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이뤄진 미국 측 샘슨 위원회의 조사가 편파적이었다는 사실은 1911년의 재검토로 분명히 드러났다. 샘슨 위원회는 폭발한 화약고와 가까운 선각에 기뢰 폭발로 보이는 구멍이 있고 구멍 주변이 안쪽으로 휘어 있으므로 선각 밖에서 폭발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스페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와 적대감을 최대한 이끌어낸 보고였다. 같은 시기에 이뤄진 스페인 측 조사 내용은 미국 신문에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증거의 확보와 보전 기술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미개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선체 상태에 관한 정보가 대통령의 눈도 속인 채로 해군 내에서 ‘마사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를 받아들인 매킨리 대통령의 태도는 신중했다. 의회와 여론에 떠밀려 전쟁으로 끌려가면서도 메인 호 침몰에 대한 스페인의 책임 문제는 극력 차단했다. 아무리 우리 쪽 조사라 하더라도 전쟁처럼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그 신빙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1890년대의 미국 사회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들떠 있었다. 원래 ‘명백한 운명’은 대서양 연안에서 출범한 미국이 서쪽으로 확장해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서부개척시대의 구호였다. 이 목표가 완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떠오른 더 큰 목표가 쿠바 등 인접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이었다. 당시의 미국인들은 확장을 원하고 있었고, 그중 대다수는 쇠퇴하고 있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한 급속한 확장을 원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로 제국주의를 지향해 가고 있던 미국의 팽창주의에 방향을 잡아준 것이 앨프레드 메이헌 제독의 <역사에 대한 해상력의 영향 The Influence of Sea Power on History: 1660-1783>(1890)이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1832)에 버금가는 전쟁론으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의 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당시 미국이 처해 있던 위치를 말해준다.


미국의 대기업과 황색언론은 전쟁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팽창주의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호전적 분위기(jingoism)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황색언론은 쿠바인들이 당하는 압제를 과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명백한 운명’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했다. 메인 호의 침몰은 여러 해에 걸친 선동 작업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만이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도 이 선동에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매킨리 대통령은 끝까지 냉정을 지켰다. 전쟁을 다수 국민이 원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정성이 강하면서 근거가 박약한 이유에 전쟁이 휩쓸리는 것만은 막았다.


전쟁은 어차피 벌어졌지만 매킨리의 자제력이 가져온 차이가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3개월간의 전쟁을 마무리할 때, 메인 호의 ‘피값’이 개전 이유에 명시되어 있었다면 타협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쿠바를 미국 식민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텔러 수정안이 개전 직전 상원에서 채택된 것도 행정부의 자제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매킨리가 미국의 ‘국격(國格)’을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대기업과 황색언론의 선동에 휘말려 메인 호 침몰에 대한 스페인 측 책임에 목청을 높였다면 당장의 ‘국론 통일’에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 후 재조사에서 당시의 미국 측 조사가 편파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미국 정부의 신뢰도는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매킨리 행정부는 온 사회가 호전적 분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기네 해군의 조사 결과에 지나친 믿음을 두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별로 ‘결정적’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증거들을 내세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시나리오를 그려 보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 시나리오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만 봐도 반역자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상식적 의문조차도 ‘국론 통일’에 저해되는 것이라면 이미 대한민국이 전쟁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 정부와 여당은 1898년의 미국에서 대기업과 황색언론이 맡고 있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자임할 만한 역할인가 생각이나 해보고 하는 짓인지? 당시 미국에게는 전쟁에 이길 실력도 있었고 전쟁으로 얻을 것도 있었다. 실력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면서 그저 엄살을 떨어서 큰형님이 편들어 주기만 바라고 있다. 도대체 한 국가에서 정부의 역할이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Posted by 문천

표트르 대제(1672-1725) 때 제국의 틀을 잡았다고 하지만, 러시아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터키제국과 별 차이 없이 머나먼 곳의 광대하고 불가사의한 나라였다. 18세기에 서유럽에서 근대를 향한 여러 가지 변화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동안 러시아에는 서방의 귀족문화가 겨우 궁정 주변에 도입되고 있을 뿐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중부 유럽을 휩쓸 때까지도 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웨덴, 터키 등 인접국 외에는 거의 아무런 대외관계가 없는 은둔의 나라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주역을 맡으면서 유럽의 강국으로 갑자기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러시아의 유럽 문명 수입이 활발해졌다. 19세기 초까지 러시아가 중세적 농노제를 지키고 있었던 일차적 이유는 기후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낮은 데 있었다. 19세기 들어 새로운 기술과 품종을 들여오면서 급속도로 생산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사회경제적 변화가 집약적으로 진행되어 1861년 농노 해방에 이르렀다.


변화가 집약적으로 일어난 만큼 러시아는 사회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심한 혼란을 겪었다.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러시아의 산업화 수준은 중부 유럽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친 농업 생산성의 빠른 발전은 변화를 위한 상당한 동력을 제공했다.


덩치가 큰 다민족-다종교 국가로서 러시아는 종족보다 영토를 중시하는 특이한 국가주의 성향을 가진 나라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로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서방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유럽 근대문명을 선망하고 러시아가 유럽의 확실한 일원이 되기 바라는 풍조가 일어났다. 슬라브주의(러시아주의)와 유럽주의 사이의 문화적 대립이 러시아 사상계의 바닥 흐름으로 깔려 있는 가운데 19세기 후반에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등 강렬한 정치사상이 새로 형성되는 지식인층 사이에 도입되고 자라났다.


크리미아 전쟁(1853~56)으로 서유럽 세력과 대형 충돌을 겪으면서 러시아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농노 해방을 앞두고 알렉산더 2세 차르의 널리 알려진 말이 있다. “농노들이 밑에서부터 스스로 해방시키러 나오기 전에 농노제를 위에서부터 철폐해버리는 편이 낫다.” 알렉산더 2세는 18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계몽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그는 의회는커녕 자문을 위한 귀족 대표회의 정도 회의체조차 군주권에 저촉되는 것으로 보았다.


농노가 국민이 되면서 러시아가 근대적 국민국가에 접근하기는 했지만, 정치사회적 불안이 크게 일어났다. 예전의 농노들은 귀족과 지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네는 우리를 소유합니다. 그러나 땅은 우리가 소유합니다.” 농노 시절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경작권 대신 근대적 소유권을 얻기 위한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 러시아는 지주의 온정을 바라던 농노들 대신 자기네에게 유리한 정책을 차르에게 요구하는 국민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차르 체제에 기대를 접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2세(1855~81)는 농노 해방만이 아니라 지방의회(zemstvo)와 선출직 치안판사 설치 등 차르 전제권력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라도 근대적 개혁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암살을 계기로 러시아 정부는 개혁적 보수의 길을 버리고 반동적 보수의 길로 치우쳤다. 이에 따라 지방의회에 근거를 둔 개혁파에서도 차르 체제를 부정하는 경향이 늘어갔다.


알렉산더 3세(1881~94)와 니콜라이 2세(1894~1917)는 군사력과 산업의 근대화만을 생각하고 정치와 사회의 근대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농촌에는 정책적으로 방기된 상태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서방에서 도입되어 생산성을 향상시켜 준 농업기술은 노동력을 절감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농노 해방은 이 특성을 적극 활용하는 풍조를 일으켰다. 그런데 산업과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 말의 러시아 농촌에서 인구 과잉 문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1900년경, 1억이 넘는 러시아 인구 중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약 100만, 1%가 안 되는 비율이었고, 대학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던 사람은 다시 그 10분의 1 숫자였다.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5백만이 안 되었다.


그 유리한 자원조건을 가지고도 철강 산업이 자급자족 수준에 도달한 것이 1890년대의 일이었다. 1897년에야 통화의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외국 자본을 본격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서방의 자본과 그에 따른 서방 기술의 도입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1900년의 러시아는 귀족층과 소수의 신지식인 계층이 유럽 문화와 문명에 친숙하다는 점을 제하고는 같은 시기의 일본보다도 근대국가의 면모가 투철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본과 충돌을 일으킬 때 러시아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다. 1850년대의 일본 개항 이래 러시아는 다른 유럽국과 달리 일본과 직접 부딪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때까지는 대체로 원만하게 관계를 풀어가고 있었다. 1895년의 3국간섭이 갈림길이었다. 일본을 적대적으로 압박하고 만주 지역에 러시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이 정책은 비테 재무상이 이끄는 기술관료 집단의 동방 중시 노선을 반영한 것이었다.


만주를 동서로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를 시베리아와 연결하는 동청(東淸)철도 건설권을 1896년 러시아가 따낼 때까지도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1898년 일본이 원하던 요동반도에 러시아가 진출하고 만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철도를 따낸 일,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러시아군이 대거 주둔하게 되면서 러일전쟁에 이를 갈등이 시작되었다.


만주에서 러시아가 약간의 우선권을 가지는 대신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맡긴다는 ‘신사협정’이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러시아 조정에서도 양국 간의 절충점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러시아에게 조선은 사석(捨石)이지, 요석(要石)이 아니었고, 아관파천은 사석의 가치를 늘려준 행운일 뿐, 요석으로 바꿀 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파천 석 달 후에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야마가타-로바노프 교섭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부동항 획득에 큰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따라서 부동항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러시아에게 큰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부동항이라도 어느 바다로 나가는 항구냐에 따라 가치의 차이가 있다. 1900년경의 러시아에게 서해 진출은 동해 진출보다 비교가 안 되게 큰 가치를 가진 방향이었다. 다른 유럽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게도 중국 진출에 극동 정책의 초점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을 몰고 온 갈등 중에서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문제가 제일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한국 문제는 부수적인 요소였다.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도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꺼린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중국을 표적으로 놓고 서양 열강들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와 일본은 특별한 지리적 이점을 가진 나라들이었는데, 경쟁상대로 러시아를 더 꺼렸기 때문에 일본을 지원했던 것이다.


1895년 청나라의 경쟁을 따돌린 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는 더 이상 큰 장애가 없었다. 을미사변이라는 자충수로 인해 10년 가까이 진출 방식에 제약을 가졌을 뿐이다. 청나라와 일본 다음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러시아에게조차 한국은 중국 진출이라는 큰 과제의 주변 요소였을 뿐이다. 다른 서양 열강들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입장이었다. 대한제국이 던져주는 이권이 있으면 입맛이 당기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뿐이지, 그 이권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부담을 무릅쓰고 달려들 대상이 아니었다.


고종의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통해 일본의 야욕을 봉쇄한다는 환상을 오랫동안 추구했다. 그 환상을 실현시켜 줄 대상으로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를 쳐다봤다. 일본에게 요긴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는 것이 대한제국에 얽매이는 것보다 러시아의 국익에 더 유리한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 고종의 개인적 환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종이 개명군주를 지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러시아의 차르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알렉산더 2세 같은 개혁적 개명군주는 아니고 알렉산더 3세나 니콜라이 2세 같은 반동적 전제군주가 모델이었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