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4. 18:21
 


얼마 전 <프레시안> 강 기자가 메일 하나를 전송해 줬다. 두 분의 작가가 새로 만드는 잡지에 "행복과 불안"을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일이었다. <망국 100년>에 전념하느라고 다른 일은 일체 피하고 지내는 터지만 뭔가 걸리는 데가 있어서 응할 생각으로 보내준 자료를 꼼꼼히 검토해 보았다.

사람 만나러 밖에 나가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고, 짧은 글 하나 보내면 거기서부터 메일 몇 차례 주고받으며 인터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며칠 전 "불안감의 정체"를 써서 보냈다. 그런데 다시 연락이 오기를, 일산까지 와서라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마침 선생님 뵈러 서울 갈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필드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생님 방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잘 못 잡아 약속보다 십여 분 늦게 와 보니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없는 채 녹음기를 틀어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헹복과 불안"이 주제라 했는데, "불안" 얘기는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써 보내면서 "행복"에 관해서도 필요하면 쓸 수 있는 게 있겠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두 분과 얘기하며 생각을 더듬어 보니 "행복"이란 것은 내가 쓰기 어려운 주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이준구 교수 홈페이지에서 옛날 얘기 주고받으며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 참 소심한 아이였다. 뭔가를 성취하려고 의욕적으로 나서는 일이 없고, 그저 두려운 것이 많아 피하는 데만 바빴다. 성격이 약하거나 내성적인 문제 정도로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나 나름의 인생관, 세계관이 비쳐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

그러다 이제 "행복"이란 말이 생각의 주제로 주어지니, 내가 어린아이의 소심함에서 벗어난 뒤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아 왔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뭔가 늘 열심히 해 오기는 했지만, 행복을 얻으려는 노력은 아니었다. 불행을 피하려는 노력이라면 몰라도.

몇 주 전 어머니께서 "나는 네 덕분에 행복하다."고 공치사를 하실 때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 행복하신 것보다 편안하신 것이겠죠." 슬쩍 비켜섰는데, 생활이 편안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건 몰라도 행복해지시라고 힘쓸 길은 내가 알지 못한다.

인생에 행복이란 게 없다는 생각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관적인 표현이요,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다. 본인이 느끼면 존재하는 것이고, 느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이나 사랑을 얻기 위해 뭐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그저 장애 요인이나 힘껏 줄여놓고 그냥 기다리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망국 100년> 작업과 관련된 생각도 난다. (정말 너무 몰두하다 보니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지경에 이른 건지 모르겠다.) 그 작업의 초점을 나는 근대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반성에 두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처럼 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산다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이고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문제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데 2백년 전 우리 조상들이 요새 사람들처럼 사랑이나 행복에 생각을 많이 쏟으며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또, 그렇다 해서 옛날 사람들이 요새 사람들보다 사랑을 덜 하고 행복을 덜 느꼈을 것 같지도 않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돈, 돈" 하며 산다 해서 사회 전체의 재부가 꼭 늘어날 것 같지 않다. 다소 늘어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신경 쓰고 노력 기울인 보람을 느낄 만큼 풍성하게 늘어날 리는 없다. 오히려 과당경쟁이 불필요한 비용을 유발해 재부를 줄이기가 더 쉬울 것 같다.

사람들이 "행복, 행복" 타령하며 사는 풍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지 않을까? 가시적이 아닌 대상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 이상으로 넘치면 행복의 본질보다 그 수단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수단이 돈이고. 눈에 보이는 수단에 매달리는 노력은 모르는 사이에 너와 나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 노릇을 하고.

나는 금욕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쾌락주의자에 가깝다. 내게 욕망이 있고 욕심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욕망과 욕심이 인생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금 줄이고 억누르려 애쓸 뿐, 아예 없애버릴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욕망과 욕심이 커야만 훌륭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부러 키우려고 애쓰지는 않는 것이다.

재기발랄하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고, 이따금 기분좋은 반응을 보여줄 때는 행복도 느꼈다. 이런 시간을 더 가졌으면 하는 욕심도 느끼고 더 찐한 장면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하는 욕망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욕심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만큼 내 행복이 커지리라는 망상에는 빠지지 않는다. 생긴 대로 놀면서 때때로 찾아와 주는 행복에 만족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안분자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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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2. 13. 18:40
 


오늘은 강신항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일전에 원장님께 메일로 이런 분 모시고 간다고 간략하게 설명해 놓았다. 누가 찾아온다는 말씀을 미리 들으면 좋아하시고, 막상 찾아왔을 때는 미리 들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뜻밖의 기쁨"을 누리시기 때문에 모시고 갈 분이 있으면 원장님께 미리 알려둔다. 그리고 들었던 사실을 겉보기로는 잊어버리시지만, 온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해두시는 것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을 듣자 "그 사람 알지." 하시고, 어떤 분이냐 묻자 "강신항이 강신항이지, 누구야?" 내 메일의 설명대로 "교수님을 '사모님'이라 부르는 분이시라는데요?" 하니까 "그 사람 선생님이 내 남편이야." 하시더라고.

아마 40년도 더 된 일 같은데, 어머니 푸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강신항 그 사람은 아직도 나를 '사모님'이래!" 강 선생님은 원래 아버지 제자 맞다. 사변 당시 국문과 학부생이던 강 선생님이 아버지의 지명 조사 작업을 도와드리고 있었다. 그 사람됨을 아버지께서 아끼신 흔적이 일기에도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아버지가 전사편찬위원회 일을 맡았을 때 조수로 채용,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강 선생님은 아버지를 스승일 뿐 아니라 "목숨의 은인"으로까지 여기신다.

그런데 어머니가 서운하시다는 것은, 강 선생님이 그 후 국어학을 전공해 어머니의 직계 후배가 되고서도 "선생님" 아닌 "사모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선배로 인정해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념하시는 체하면서 사실은 강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알뜰히 받들어드리는 것이 고마우신 것이었다.

점심식사 바로 뒤에 도착했다. 얼굴을 보자 대뜸 "너 누구냐! 강신항이 아니냐?" 하시는 바람에 옆에서 나까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강 선생님 모시고 나오면서 여쭤봤다. 어머니가 선생님께 "너"라고 부르신 적이 있냐고. 학생 때도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다고, 아마 기분좋게 해주느라고 그러신 게 아니겠냐며 웃으신다. 학생 시절부터 사모님으로 모셔 온 분께 이제 여든 넘은 나이에 "너" 소리 듣고 정말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원장님께 며칠 전 얘기 들으신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과 관련된 생각을 여러 가지 떠올리신 것이 의식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오늘 아버지에 관한 말씀이 부쩍 많으셨던 것을 봐도 그렇다.

생각의 출발점은 아들들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눈앞에 있는 이놈부터다. "우리 셋째 아들을 나는 좋아해요~ 이놈이 멍텅구리라서 좋아해요~ 멍텅구리가 나는 좋아요~" 그리고는 눈앞에 없는 놈들도 하나씩 짚으며 "착한 아들", "훌륭한 아들"로 띄워놓은 다음 "아들들 잘 둬서 나는 좋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뭐가 있겠어요~" 하실 때까지도 '김 서방'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 후 사진첩을 펼쳐 보여드릴 때 아버지 얼굴을 짚으며 "생기기도 참 잘 생기셨네~ 세상에 참 잘난 사람이었지~ 씨 받아 줄 만한 남자였지~" 하시는 것을 듣고야, 아, 어머니가 오늘은 그분 생각이 많이 나시는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 사이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 나만큼 궁금증을 많이 갖고 살아온 자식도 많지 않을 것이다. "씨 받아 줄 만한 남자"란 말씀은 근년 내 마음속에 키워 온 한 가지 짐작을 뒷받침해 주는 분명한 힌트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에 입학한 데서 당시의 어머니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다는 것과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재능과 의식을 어떻게 연결시켜 펼쳐 나갈지는 당시 상황에서 무척 막막하셨을 것 같다.

강의실에서 만난 '늙은 학생'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최고의 스승이었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직종으로 꼽히는 금융조합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역사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가 역사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하기 위해 경성제대 학생이 된 아버지는 어머니가 승복할 만한 재능과 의식에다가 현실적으로 뜻을 이뤄나가는 방법론까지 갖춘 분이었으니까.

아버지의 일기가 <역사 앞에서>(1993)로 출간될 때 거기 붙인 어머니의 회고문은 "조국 수난의 동반자"란 제목이었다. 그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는 남편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스승이기도 했는데, 특히 한문을 가르쳐준 은공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봉양 내려가서 첫아이 출산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씨름한 텍스트가 <열하일기>였다. 그냥 읽어내려가는 것은 그가 출근하기 전에 강을 바치고, 그것을 원고지로 옮기는 작업이 낮동안의 할 일이었다."

제천 봉양에서 지낸 것은 해방 직전 학병과 징용 소동을 피해 아버지가 학교를 떠나 금융조합에 돌아가 있을 때였고, 두 분이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큰형을 얻은 곳이었다. 해방 후 아버지 이름으로 <열하일기> 번역본을 출간하다가 완성을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노력이 합쳐진 작업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독자적인 외부 활동을 생각지 않고 '내조'만을 바라보며 지내셨던 모양이다.

출중한 재능과 강렬한 의식을 주체하기 힘들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그저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였다. "동반자"라곤 해도 앞장설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 동반자의 가르침과 이끔에 의지해 살아가며 생활과 학문의 내조, 그리고 그의 "씨 받아주는" 일을 어머니는 당신 몫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분이 세상을 떠나버렸을 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으셨겠지.

그분의 "씨"를 잘 키워내는 것이 어머니에겐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으랴만, 어머니의 과제는 특이한 것이었다. 세속적, 통상적 기준으로 잘되는 것보다 돌아가신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더 절실한 일이었고, "씨"의 타고난 소질을 있는 그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미국인이 되어버린 큰형, 세속을 돌아보지 않는 작은형, 힘겨운 일거리만 찾아다니는 나,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동생, 어머니 자식농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만족하신다. 억지로 자위하시는 게 아니라 "멍텅구리라서 좋아해요~" 식으로 흥겨워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편안한 마음자리를 얻으셨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며 그분을 위해 기뻐할 뿐이다.

혈연 없는 사이로 강 선생님만큼 절실하게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한 분이 별로 없다. 2년 전 그분이 찾아왔을 때는 어머니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실 때였다. 오랜만에 대하시는 얼굴에 "너 누구냐!", 아버지가 강 선생님께 하셨음직한 말씀을 대신 해주신 것이 아닐까? 요즈음 어머니 생각이 얼마나 명민하신가를 염두에 두고 떠올리는 상상이다.

아침에 혜화동 로타리에서 차에 오르자마자 "도서 반납하네." 하며 건네주신 꾸러미에도 여간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아니다. 1939년 간 <임꺽정전> 네 책. 전쟁 터지던 날 아버지가 빌려주셨던 책을 내게 반납받아 달라시는 것이다. 받아는 놓았다. 그러나 곧 형들 양해를 얻어 선생님께 다시 드리고 싶다. 그분께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뻔히 아는데.



<월간 불광> 3월호에 보낼 글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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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베네치아 사람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말 원나라 치하의 중국에 20여 년간 머무르면서 관찰한 내용을 <동방견문록>에 적었다. 당나라 때나 원나라 때처럼 중국이 개방적인 시기는 말할 것 없고, 다른 시기에도 중국을 다녀간 사람이 꽤 있었겠지만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폴로처럼 오랫동안 체류하고 조정에 가까이 있던 사람에 관한 자료도 중국측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동서간 접촉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16세기까지의 접촉이 단편적인 것이었다는 데 있다. 폴로의 책은 잘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는데도 그가 말한 '카테이(Cathay)'가 중국을 가리킨 것이라는 사실조차 3백년 뒤에야 확인될 정도로 중국과 유럽 사이의 접촉은 엉성한 상태에 있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장악한 뒤 남중국해까지 진출하면서 중국과 지속적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1517년에 광저우에서 교역을 시작하고 1557년에는 마카오를 임대해 항구적 기지를 만들었다.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인의 교역활동은 중국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았다. 비단과 도자기 등 중국 상품이 수출된 반면 중국에는 유럽 상품의 수요가 없어서 종래 이슬람 상인들이 중국으로 가져오던 인근 지역의 상품을 대신 가져오는 정도였다. 중국 측에서 포르투갈인을 조공 대상인 오랑캐의 하나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 말까지 경제적 관계가 아직 크게 자라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진 문화교류 현상이 일어난 것은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중국에서는 유럽에서 유래한 지식과 사상을 중심으로 '서학(西學)'이 일어나고 유럽에서는 미지의 문명을 흠모하는 '중국바람(Chinoiserie)'이 일어났다. 학식과 조직력을 아울러 갖춘 선교사들이 효과적인 매체 역할을 맡은 덕분이었다.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정신적으로는 영적 권위가 손상되고 물질적으로는 교회의 영향에서 많은 지역이 벗어났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광범위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6세기 중엽의 이 움직임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과 '가톨릭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붙었는데,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 움직임이었다. 종교재판 강화 등 반동적 측면도 한편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마르틴 루터의 문제 제기를 대부분 받아들이는 듯한 개혁적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적 측면을 대표하는 주체의 하나가 예수회였다. 1534년 7인의 창시자가 파리에서 결성한 예수회는 1540년 교황으로부터 헌장 인가를 받은 후 새로운 종교사업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가 교육과 해외선교였다. 변화가 빨라지는 시대상황 속에서 교회의 권위를 유럽인의 마음속에 지키는 것이 교육사업의 목적이었고, 유럽에서 상실한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항해활동을 통해 넓어진 새로운 세계에서 만회한다는 것이 선교사업의 목적이었다.

예수회의 선교노선에는 기존의 기독교 선교와 다른 점이 있었다. 전통적 선교노선은 개인의 구원에 목적이 집중된 것이었다. 한 사람씩 붙잡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설득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예수회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선교 대상으로 잡았다. 개인이 자기 사회를 이탈해서 기독교로 건너오게 하는 것보다 사회 전체가 기독교에 접근해 오도록 하는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적응주의(accommodationism)'라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새로운 선교노선이 개발되었다.

적응주의 노선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맡은 것이 프란치스코 사비에르(1506-1552)였다. 예수회 창시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는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이후 중국 광둥성 해안 밖의 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아시아 선교사업의 길을 열었다. 1619년 시성되어 "모든 선교사업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사비에르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549년 8월부터 2년 남짓 일본에 체류하기도 했고, 죽기 전에는 중국에 들어갈 길을 찾고 있었다. 수준 높은 문명과 거대한 정치조직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개인의 개종으로는 선교의 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적응주의 노선을 구상한 것이다. 선교 대상 사회의 관습을 최대한 존중해서,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만 아니라면 개종자에게 관습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음은 물론, 선교사 자신이 그 관습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이 노선이 일으킨 신학적 문제가 '은총논쟁'에 나타난다. 미카엘 바이우스(1513-89)와 코르넬리우스 얀센(1585-1638) 등은 엄격한 기준의 '충족은총(gratia sufficiens)'을 주장했는데, 루이스 데 몰리나(1535-1600)와 프란치스코 수아레스(1548-1617) 등 예수회 신학자들은 '효능은총(gratia efficax)'으로 이에 맞섰다. 쉽게 말해서 공자와 맹자가 지옥에 있으리라는 것이 충족은총의 관점이고 천당에 있으리라는 것이 효능은총의 관점이었다.

사비에르는 아시아 선교사업의 궁극적 무대를 중국으로 보았고, 그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중국 선교를 지상 과제로 삼았다. 사비에르가 죽은 몇 년 후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항구적 거점을 가지게 되자 그곳은 중국 진출을 위한 선교사들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582년 두 명의 선교사의 내지 일시 체류가 허용되었고, 그 이듬해부터 지속적인 중국 내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583년 말 동료 선교사 한 사람과 함께 중국 땅에 발을 딛은 마테오 리치(1552-1610)가 교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 선교사의 개척자였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간 접촉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올린 거인이었다. 17년의 활동기간 중 유럽 문명을 중국인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 이른바 서학서(西學書) 여러 편이 그의 손에서 나왔고, 그 사업을 자기 후계자들이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리치는 중국을 면밀히 관찰해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서라도 지배계층을 포섭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큰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라는 전략을 세웠다. 종래의 선교에서는 사회의 소외계층이 손쉬운 선교 대상이었는데, 리치는 사회 주류를 선교 대상으로 잡은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기독교와 맺어진 유럽문명의 훌륭한 점이 중국 지식층의 인정을 받게 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중국인이 중시하는 역법(曆法) 운영에 유럽의 기하학과 관측기술이 유리한 점을 간파하고 그 방면 기술 도입에 역점을 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결과 몇십 년 후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에 유럽 기술이 대거 채택되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운영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17세기 초 상황에서 유럽 학술 수준이 중국보다 전체적으로 높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 앞선 영역이 있었다. 이런 영역을 리치 등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내용에 대개의 중국 지식인들은 지엽적인 가치만을 인정했다. 18세기 말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서학서를 총괄한 해설이 이런 관점을 보여준다.


살피건대 구라파인들의 天文推算이 치밀한 것과 工匠製作이 정교한 것은 실로 옛 제도를 넘어선다. 그 의론이 誇詐하고 迂怪함 또한 이단 가운데 두드러진다. 國朝에서는 그 기능은 취하되 그 학술은 전하는 것을 금하였으니, 具存의 깊은 뜻이다. 그 책들은 원래 冊府의 編에 올릴 만한 것이 못되지만, <환有詮> 같은 것들은 <명사> "예문지" 속에 이미 그 이름이 올라 있어, 빼어버리고 논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미혹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나게 올려놓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 <명사>에는 이 책들이 道家의 것으로 실려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을 보면 3敎의 理를 아울러 표절하였고 또 3敎를 싸잡아 배척하였다. 變幻하고 支離하여 따질 수도 없게 만든 것이 참으로 雜學이로다. 따라서 雜家 속에 그 存目을 둔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 중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렬히 호응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하원본> 번역까지 맡을 만큼 깊이 개입한 서광계(徐光啓)는 재상급인 내각대학사의 신분에 오른 거물이었다. 교회사가들은 이것이 이것이 기독교 내지 유럽문명의 우월성을 보여준 증거라고 환호해 왔지만, 근래의 치밀한 연구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명나라 말기의 위기의식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노력의 한 갈래였으며, 유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요소를 서학에서 찾으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유교가 원래는 대단히 훌륭한 사상이었는데,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이것을 원래의 훌륭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데 기독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는 것이 마테오 리치 선교노선의 핵심인 보유론이었다. 중국에서는 사상의 혁신을 꾀할 때 "공자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적 간판을 내놓는 경향이 있는데, 리치는 여기에 편승하려 한 것이었다.

적응주의가 원래 선교 대상 사회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이지만, 보유론은 그중에서도 극단으로 간 것이었다. 리치가 죽은 후 이 노선이 기독교의 본질을 저버린 것이라는 항의가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나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이라는 또 한 차례의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630년대에 시작되어 18세기 초에야 마무리된 이 논쟁에서 예수회의 적응주의 노선이 패퇴한 결과 서학서의 사상 관계 내용 중 중요한 것들이 교황청에 의해 부정되었고, 중국 선교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문명의 소개자료로서 서학서의 가치는 19세기 초까지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지되었다. 이익과 정약용 등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도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존재를 인식했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만든 서학서는 17세기 초반의 시점에서 동서 문명의 대단히 수준 높은 접점이었다. 그러나 두 문명의 융화를 간절히 바라는 제작자들의 의도가 당시 유럽인의 일반적 태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양인들이 서양을 바라보는 통로로서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이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정조 때의 서학운동이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은 서학서의 많은 내용에 감명을 받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보유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 1783-4년 북경에 가서 선교사를 찾아가 보니 보유론은 이미 폐기된 지 오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학을 기능적 차원 내지 학술사상의 차원에서 고려하던 사람들은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만이 신앙운동으로서 서학을 지켜나가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유럽인의 힘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회의 서학서 다음 단계를 맡을 통로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개신교 선교사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란가쿠(蘭學)'를 전개한 일본의 경우와 대비가 된다. 란가쿠의 실제 내용에 별것 없었다는 평가절하도 있지만, 일본인의 자발적 관심을 보여준 현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