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언저리에서 더러 인용되는 "깨진 유리창" 이야기가 있다. 어렴풋이 알던 이야기를 이제 조사해 보니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온 것이라 한다.
빵집의 유리창을 주인 아들이 실수로 깨뜨렸을 때, 새 유리를 끼우기 위해 돈을 내야 할 주인이 마음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유리가게 주인이 실제로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을 수밖에 없으니, 그 손실이 사회 전체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후의 경제학에서는 '기회 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바스티아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경제 활성화를 절대시하는 풍조는 계속되고, 오히려 더 확대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군사적 케인스주의(Military Keynesianism)'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군비 증강에 경제 활성화의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1930년대 나치 독일과 1980년대 미국의 상황을 예로 든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도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경제학 기본 개념들도 알 듯 말 듯한 내가 타당성을 논할 일이 아니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좁은 범위, 좁은 의미에서 타당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 정도다. 정부 지출을 늘려 고용을 확대하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이 대공황이나 전후 상황에서 큰 효과를 얻은 것은 자원의 활용도가 극도로 낮은 일시적이고 특수한 시장 상태 때문인 것으로 이해한다. 어느 정도 정상적 상태의 시장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특수 이해관계자'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들린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유리가게 주인이 동네 아이들에게 푼돈을 주며 유리창 깨뜨리는 '실수'를 적극적으로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군산복합체를, 동네 아이들에게 정부를 대입해 보자. 군산복합체에게는 사회 전체에 손해가 되는 전쟁이라도 일어나기 바라는 이해관계가 있고, 정부와 언론을 자기네 바라는 쪽으로 끌어당길 로비능력이 있다. 봉 잡히는 가게 주인이 세금 내는 시민들 입장이다. 20세기 후반 군산복합체 세력의 엄청난 규모를 생각하면 '군사적 케인스주의'라는 것에 그 입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4대강 사업도 특수 이해관계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추진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아무 쓸 데 없는 피라미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을 들먹이면서 정작 경제학자들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를 없애려고 타당성 검토를 회피하는 절차상의 문제까지 일으키고 있다. 유리가게 주인이 빵집에 들어와 "유리를 많이 깨뜨려 나한테 유리값을 많이 내야 그 돈이 돌고 돌아 빵집 매상도 올라갈 겁니다." 하면서 유리창에 몽둥이를 휘두르는 꼴이다. 그 몽둥이를 빵집 주인이 쥐어준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휘두르기 전에 그래도 되는 건지 이야기는 해야 된다.
특수 이해관계자 이야기에서 옆으로 잠깐 샜지만, 바스티아가 '깨진 유리창' 얘기를 꺼낸 시점이 주의를 끈다. 아직 케인스주의 같은 식으로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파괴는 건설의 아버지" 식의 '적극적 사고'가 19세기 중엽에 유행하고 있었기에 바스티아가 이를 반박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1832)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 책은 오랫동안 고전의 위상을 누렸고, 거기 담긴 "전쟁은 정치행위의 연장"이라는 말은 전쟁의 개념에 대한 권위 있는 정의로 퉁해 왔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에는 당시 유럽의 상황에 의해 규정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주제에 관해 그런 형태의 담론이 나왔다는 사실부터가 근세 이전과 달리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으로 떠오르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18세기까지도 전쟁은 그리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었다. 예산 규모가 파악되는 근세 잉글랜드 경우를 보더라도 웬만한 전쟁에는 경상 수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었고,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만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정권이 위기에 처하곤 했다. 전쟁 비용을 귀족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왕의 직할지를 떼어서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17세기부터 상업자본가가 전쟁 비용을 담당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1756-63년의 7년전쟁에 투자한 잉글랜드 자본가들은 엄청난 배당으로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겼을 경우의 이득이 졌을 경우의 손해보다 크지 않았다. 당사자 모두를 놓고 보면 제로섬이나 마이너스섬 게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와서는 차츰 플러스섬 게임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길 때의 이득이 질 때의 손해보다 큰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타당하게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량생산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자원의 활용도가 낮은 상태에서 소비의 촉진으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여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이 효과를 가지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생각된다. 전쟁 수행을 위한 소비와 파괴 복구를 위한 수요가 생산력 증대를 촉구했고, 그에 따른 기술 발전으로 생산비 자체를 대폭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혁명기 프랑스에서 징집제를 실시한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나폴레옹이 20년 가까이 유럽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군대 조직방법과 전쟁 수행방법을 앞장서서 바꿨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모든 유럽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종래의 전투가 적군 전투원의 살상을 목적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공간을 파괴 대상으로 하는 포격전이 전투의 주종이 되었다.
이 전투방식의 변화에는 화약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화약을 사용해 온 중국인들이 전쟁에서의 화약 사용을 크게 늘리지 않은 것이 유럽인들보다 덜 똑똑해서뿐이었을까?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이 남방 정벌 중 화약을 전투에 사용한 뒤 그 전술의 참혹성을 반성하는 이야기가 있다. 화약 사용 기술이 중국에서 크게 발달하지 않은 데는 이런 요인들도 작용했을 것이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전쟁이 성행한 일은 중국 고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전쟁이 크게 늘어나고 전쟁 수행방법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바뀐 사실이다.
춘추시대의 질서가 무너진 것도 생산력 발전에 주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거니와, 그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서 당시 중국 전역이 전쟁을 일상적으로 겪는 상태가 2백여 년이나 계속된 사실 역시 생산력 발전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생산력이 급속히 향상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전쟁 수행에 그토록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파괴를 초래하는 상황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성행하는 상황에서는 사상의 동향도 그 영향을 받는다. 제자백가 가운데 메이저급 학파를 보더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도가나 전쟁을 최소화하려는 유가에 비해 전쟁을 꺼리지 않는 법가사상이 전국시대에 힘을 썼다. 평화주의를 가장 앞세운 묵가까지도 방어전 전략을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전쟁이 줄어든 한나라 때에 와서야 도가와 유가가 역할을 키우게 되었다.
전쟁을 찬양하는 경향을 보인 헤겔과 니체가 19세기 유럽 사상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도 음미할 점이 있는 사실이다. 20세기 대표적 양심으로 꼽히게 될 토마스 만조차도 1차대전 발발 시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화란 시민사회를 부패시키는 것이고, 전쟁 속에 정화와 해방, 그리고 거대한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뒤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이 많이 퍼졌다. 전쟁을 찬양한 사상가들은 그 사실만으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겪어보면서 전쟁을 싫어하게 된 것이 직접적 계기이겠지만, 그를 뒤따르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길게 자리 잡힐 수 있었다. 기술 발전에 따른 급격한 생산력 확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특수 이해관계자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들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상당 범위 사람들까지 동조시킬 수 있는 선동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광범위한 반전 평화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무렵에 고개를 든 환경 의식과 얽힌 것이다. 생산력 확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환경운동은 평화운동과 사상적 친연성을 가진 것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이득을 앞세워 평화운동을 반대하는 선전에 커다란 족쇄를 채운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기 무렵에 일반 유럽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지금 사람들의 인식과 전연 다른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경제적 득실만을 기준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풍조가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져 가는 과정이었다. "하면 된다!"는 정신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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