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0년대에 시작된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지리지(地理誌)' 범주의 서적이 수없이 나타났다. 1510년대부터 유럽인의 왕래가 시작된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보를 담은 서적들도 있었지만, 16세기 중에는 아직 접촉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14세기 초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넘어서는 대작이 없었다. 1610년대에 와서 유럽인의 주목을 널리 끈 두 권의 책이 나왔다.
두 책의 성격은 서로 판이한 것이었다. 하나는 지난 주에 이야기한 마테오 리치의 <중국지(원제: 중국에서의 예수회와 기독교 이야기)>로, 1610년 리치가 죽은 후 유고를 후배 예수회사들이 정리해 1615년 출판한 것이다. 초판은 라틴어로 나왔고, 프랑스어판,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이탈리아어판, 영어축역판이 그로부터 10년 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리치의 책이 27년간의 중국 체류 동안 체계적인 관찰과 정리를 축적한 결과임에 반해 1614년에 나온 페르낭 멘데스 핀토(1509-83)의 <순례기(Peregrinacao)>는 1537에서 1558년까지의 모험담을 엮은 것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핀토의 책에는 신빙성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본인이 그 기간 중 열세 번 포로로 잡히고 열아홉 번 노예로 팔린 사연이 담겨 있으니까. 그 이름 Fernao Mendes Pinto에 빗대어 "Fernao, Mentes? Minto!(페르낭, 뻥이지? 그래, 뻥이야!)" 하는 우스개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핀토의 이야기 대부분은 여러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을 자기 경험처럼 극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 일본 여행 이야기는 정황과 증거가 상당히 부합하기 때문에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543년 유럽인으로서 일본을 처음 방문해 교역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1549년 예수회사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일본 입국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 규슈 남부의 영주 오토모 소린을 개종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16세기에 명나라는 일본과 교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는데, 은의 교환가치가 일본보다 중국에서 갑절 가까이 높았다. 그래서 밀무역이 성행했고, 이 밀무역을 맡은 것이 왜구였다. 왜구의 본업은 해적이라기보다 무장밀수단이었던 것이다. 핀토의 일본 방문 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와 일본 사이에 카라카선을 운항, 이 무역의 상당 부분을 맡았다. 1630년대까지 계속된 이 무역선은 포르투갈인의 현지 교역 사업 중 가장 수익성 높은 노선의 하나였다.
포르투갈인의 무역에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해외 사업의 정당성과 권리를 교황이 뒷받침해 주는 댓가로 포르투갈 왕은 선교 사업을 지원할 의무를 가졌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상인과 모험가들은 관리들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선교사들을 우대했고, 선교사들은 무역에 투자해 선교 비용을 확보했다.
정치적 혼란이 극도에 달해 있던 16세기 중엽의 일본에 상인과 선교사가 힘을 합친 포르투갈인의 진출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3년 중국 선교가 시작되어 수십 명의 개종자를 얻기 시작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교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일부 서부지역 영주들이 수천 명에서 수만 명까지 영내 주민을 몽땅 이끌고 개종하는 사례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전란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도 새 종교에 상당한 호응을 보였다.
1590년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에 접근해 가면서 포르투갈인들에게(선교사와 상인 양쪽에) 불리한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고 1610년대에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안정돼 가면서 기독교 탄압이 강해진 데 비춰 보면 1580년대까지의 정치적 혼란이 포르투갈인의 활동을 위한 틈새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중국의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불신해서 교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인의 중개무역을 계속해서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민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포르투갈인의 역할을 넘겨받게 된다. 두 나라 상인들은 동인도회사를 배경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교황권과 결탁된 왕권의 배경 위에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처럼 선교 사업의 부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막부 당국은 손쉬운 통제를 위해 무역 주체를 일원화하고 싶어 했고, 영국이 양보함으로써 네덜란드인들이 이후 2백여 년 동안 일본의 서양인 접촉을 독점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1644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꾸준히 늘어나다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례논쟁의 결과로 대폭 위축되기에 이르는데, 일본에서는 1640년경부터 해금(海禁) 정책이 강화되어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해금 정책을 후세에 '사코쿠(鎖國)'라 흔히 부르게 되었는데, 그 원래 의미는 무역에 대한 막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것이지 국제적 고립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인에서 네덜란드인으로 이어지는 일본 무역활동은 중국의 해금 정책으로 제약받는 중일간 무역을 중개하는 것이었다. 1640년경 명나라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중개무역의 필요도 줄어들게 되었으므로 막부가 유럽인의 활동을 나가사키의 매립지 데지마(出島)라는 좁은 구역 안에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가사키에는 중국인의 상선도 기항했고 다른 무역 상대인 조선, 유구, 아이누와의 교역은 각 방면 영주들에게 맡겨졌다.
1609년부터 히라도(平戶) 섬에 거점을 두고 무역활동을 시작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41년 데지마로 옮긴 후로는 나가사키 부교(奉行)를 통해 막부의 엄밀한 감시 아래 놓여졌다. 일본인이 데지마에 들어가는 것도 네덜란드 인이 데지마 밖에 나오는 것도 모두 허가를 받아야 했고 거주 인원도 제한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의사 한 명을 데지마에 배치했는데, 일본 란가쿠(蘭學)의 촉매가 된 것이 의사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란가쿠의 주춧돌을 놓은 것은 1649-51, 2년간 체류한 카스파르 샴베르거였다. 공교로운 사정으로 그는 체류기간의 태반을 에도에서 지냈고, 그 동안 유럽 의술의 장점을 일본 지배층에 널리 인식시켰다.
샴베르거 이래 유럽 의술에 대한 존중은 란가쿠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1720년까지 서양 책의 출판 금지령은 데지마의 고립성과 함께 서양 지식 보급의 장벽이 되었다. 1년에 한 차례 쇼군에게 인사 올리러 에도에 가서 해외 정세와 유럽 사정을 보고하는 일 외에는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이 일본 지배층과 접촉을 가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1720년 출판 금령이 해제된 후 서양에 관한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다. 그 대부분은 얄팍한 호기심에 영합하는 것이었지만 더러 중요한 작업도 있었다. 스기타 겐파쿠가 일군의 역관과 의사들을 이끌고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번역해 1774년 내놓은 <가이타이신쇼(解體新書)> 작업은 대단히 치밀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어의 "neus"가 "코"를 뜻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는 데도 며칠간의 토론을 거쳤다고 한다. 1798년에 나온 <레키쇼신쇼(曆象新書)>도 유럽의 고전물리학을 제대로 옮겨온 치밀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17세기 중국의 서학서는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었음에 반해 18세기 중엽 이후 일본에서 나온 란가쿠쇼(蘭學書)는 일본인들이 고르고 번역한 것이었다. 자발성이라는 측면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중국 서학서의 치밀한 기획과 비교하면 체계성이 떨어지고, 유럽 사상의 핵심 요소보다 흥미거리나 실용적인 주제에 치우쳐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근대화의 성공에 자부심이 넘칠 때, 란가쿠의 존재를 성공의 중요한 한 가지 이유로 내세우는 풍조가 일어났다. 서양문명에 대해 개방적인 풍조가 있어 왔기 때문에 오만한 중국이나 폐쇄적인 조선과 달리 일본이 근대적 문물의 도입에 쉽게 나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일리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개항을 앞둔 19세기 초반 란가쿠가 펼쳐진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란가쿠의 전통과 메이지유신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샴베르거가 씨앗을 뿌렸다면 가장 큰 열매를 거둔 것이 필립 폰 지볼트(1796-1866)라 할 것이다. 동인도회사 파견 의사로 1823에서 1829년까지 6년간 일본에 체류한 폰 지볼트는 1824년에 나루타키숙(鳴瀧塾)을 열어 막부에서 보낸 50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막부에서 이 학교를 열어준 목적은 의술의 전수에 있었지만 실제 교육과 활동은 의술에 제한되지 않아서, 폰 지볼트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박물학 분야를 중심으로 유럽 학술을 폭넓게 접수한 '란가쿠샤(蘭學者)' 집단이 자라났다.
그러나 이 란가쿠샤 집단은 개항에서 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개방과 근대화 과정에 큰 공헌을 남기지 않았다. 1839년 해금정책의 강화에 반대하는 일군의 란가쿠샤들이 투옥된 이른바 '반샤노고쿠(蠻者獄)' 외에는 정치에 관계된 일이 없고, 1854년 개항 이후 서양인들과의 접촉면이 넓어지자 란가쿠샤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반면 폰 지볼트는 란가쿠샤들의 도움으로 수집한 일본 동식물의 방대한 표본을 유럽으로 가져가 유럽인의 일본 연구에 크나큰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의 길에 중국이나 조선보다 쉽게 뛰어든 데는 물론 일본의 특이한 조건들이 작용했다. 그러나 란가쿠의 존재를 중요한 조건으로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란가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배경조건이 메이지유신에도 나란히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명확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원리인 유교 이념의 뿌리가 일본에서는 그리 깊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주자학이 들어와 통치 이념으로 세워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중국과 조선에서처럼 지배계층의 사고가 유교 이념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개항 전에는 란가쿠가 이단이나 사학으로 탄압받지 않을 수 있었고, 개항 후에는 유교 이념이 쉽게 포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항 전 일본이 데지마에 서양인과의 교섭을 제한한 것은 중국이 광저우와 마카오에 서양인의 활동을 제한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두 나라를 비교한다면 중국보다 일본이 해외의 상품과 지식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중국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대외교섭의 절실한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란가쿠가 중국의 서학보다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초반부터 중국과 일본에 왕래하기 시작하고서도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을 찾아오지 않은 것은 조선의 존재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중국의 사치품이나 일본의 은 같은 교역의 뚜렷한 목표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이 17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서학서를 보고 서학 운동을 일으킨 것은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깊이 있는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데지마 한 모퉁이에라도 서양인이 계속 상주한 일본에서 일어난 란가쿠가 실용적인 주제나 얕은 호기심을 넘어서지 못한 것에 비하면 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조선의 서학은 사상적 대안에 대한 더 진지한 검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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