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9. 13:00



아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오늘이 화요일이면 지금 강의시간이 다 됐잖아?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나? 조금 늦겠지만 할 수 없지. 근데 들어가서 뭘 얘기하지? 두 시간 연속강의인데, 평소 실력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가는 길에 구상이라도 좀 해놔야지.

전번 시간에 무슨 얘기 했더라?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아니, 그러고 보니까 지난 주엔 강의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버렸네! 이럴 수가 있나!

그것만도 아냐! 개강하고 몇 주일을 그냥 지내버렸어! 이거, 오늘 강의가 아니라 이번 학기 강의를 어떻게 넘길지가 막막한 일이잖아!

애고~ 내가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 됐나. 오늘 두 시간 때울 일만 해도 벅찬데, 몇 주일씩 개강부터 늦춰져 있으니 이 일을 어쩌나.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구나. 이렇게 대책 없는 채로 강의실 들어가면 뭘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도착하면 강의 끝날 시간이네? 이렇게 또 한 주일 날리고, 다음 주 이 시간에는 한 주일의 짐이 더 얹혀져 있겠지? 어찌하나~


걱정은 계속 이어지는데, 이제부터는 여기까지처럼 선명하지 않다. 꿈속에서도 배 째라는 심정이 되어 잠속으로 빠져버리는 게 아닐지. 이런 형태의 악몽을 간간이 꾸게 된 것이 요 한 이태 사이의 일이다. 이 꿈을 꾼 생각이 아침에 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 마흔 나이에 학교를 떠나면서 강의를 그만둔다는 사실은 그저 기쁜 일이었다. 내 할 일은 학문이고, 강의는 학문활동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제도적인 필요악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학교를 떠남으로써 안정된 수입과 제도적 지원을 잃어버리는 손실을 상쇄해 주는 가장 중요한 보상이 '강의 해방'이었다.

학교 떠난 뒤 먹고 살기 위해 신문사, 출판사 일도 하고 번역 일도 했다. 그래도 교수로서 강의하는 것처럼 매여 있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공부에 노력을 집중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짧은 시간 내에 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일이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학문의 '자유'라는 측면에 집착했던 것이다. 방해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학문활동의 가치는 나 혼자의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학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개인'의 작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흐를 만한 여건이 있기는 있었다. 역사학계에서 연구성과를 인정하는 기준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연구자 본인도 의미를 모르는 사실 천착은 가치를 인정하면서 역사로부터 의미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외면받는 풍조, 학문의 존재 의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의미 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교육의 의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역사학을 전공하겠다고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들, 실제로 절대적인 목적은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이다. 뭐든 전공을 해야 하니까 편의상 역사학을 고른 학생들이다. 내가 임하고 있던 대학교육은 제도적 사기 행위였고, 학생들은 그 피해자였으며, 나는 사기꾼의 종범으로 떡고물 받아먹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뛰쳐나갔고, 그 때 그 때 공부 단계에 적합한 밥벌이를 할 만한 게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며 20년간 멋대로 공부해 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강의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찾아오는 것은 내 공부가 그런 대로 무르익어 왔다는 안도감이다. 학문이 개인의 일로 끝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학문의 가치가 자유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칠 만큼 무르익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년 들어 내 공부가 사회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비쳐 보여주는지에 스스로 관심과 노력을 모으게 되는 것은 학문이 사회 안에서 생각을 주고받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덕분이다.

4년간의 중단 뒤에 2년 전 재개한 <프레시안>의 "페리스코프"는 내게 강의실이 되었다. 전에 쓰던 칼럼은 아웃사이더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었다. 근년 써 온 글은 독자들과 고심과 모색을 함께 하는 현장이다. 이런 강의라면 할 만하다.

병을 고치는 출발점은 증세의 자각이다. 섬뜩한 악몽에 수시로 시달리면서도 이런 불안감을 느끼게나마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학문을 했다는 사람에게 가르칠 자리 못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도 안하면서 긴 세월 잘~ 보냈다.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 없이 지낸 덕분에 밑천을 이만큼이라도 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풀어놓을 때가 되었음을 마음 밑바닥에서 알려주는 것이 이 악몽이고 이 불안감 아니겠는가.



<매뉴얼> 창간호에 보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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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향료(spice)라는 물건이 근세 이전의 교역에서 대단히 비중이 큰 상품이었다는 사실을 현대인, 특히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향료는 씨앗, 열매, 껍질, 뿌리 등 특정 식물의 여러 부위를 말려 요리의 맛을 돋우거나 식품의 보존을 위해 쓴 것이다. 향초(herb)는 원 재료를 거의 그대로 쓰는 것인데, 향료는 재료를 말려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가루로 빻아 쓰는 것이 보통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향료라면 생강 정도고, 그것도 말려서 오래 보관하는 풍속이 없었다. 고추가루도 근세에 들어온 것이다. 한국인의 식생활에서는 향료의 역할이 별로 없었던 셈이다. 계피 등 약재로 쓰인 것은 더러 있었지만.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향료를 유럽인들이 왜 그렇게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신대륙 발견 전까지 향료의 주산지는 동남아시아였다. 그런데 중세 말기 유럽에서 수입하는 향료의 양이 연간 2천 톤에 이르고 그 가치가 150만 명의 식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위키피디아> "spice" 조) 전체 식품비의 2%를 양념의 일부인 향료값으로 지출했다는 것 아닌가.

고대 이집트에 향료의 교역시장이 형성되고 1세기부터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향료의 길'이 개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약간의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집트, 페르시아 등 고대제국 전성기에 향료를 쓰는 음식문화가 서남아시아 지역에 널리 자리 잡고 있다가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온 것이 아닐까. 그것이 로마제국을 출발점으로 유럽 각지의 지배층에게 퍼져나간 것이 아닐까. 추측은 추측일 뿐이고, 지금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중세 후기 유럽의 교역상품 중에 향료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번영을 가져온 제일 중요한 상품이 향료였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여러 세기 동안 동로마제국을 통해 향료를 들여왔다. 그런데 15세기에 터키제국이 일어나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향료 수입이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새로운 교역로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길을 연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13세기 말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유럽의 서남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은 모로코 일대의 이슬람 세력과 다투는 과정을 통해 아프리카 서북해안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15세기 중엽 '항해왕 헨리'의 시대에 카라벨형과 카라카형 선박을 개발하는 등 항해술의 발전으로 원양항해에 나설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1470년대에 들어서서 겨우 적도를 넘어선 유럽인의 항해활동이 1488년 희망봉을 돌아서고 1498년에 인도에 도착했으며, 그 후 10여 년 사이에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막대한 비용이 들고 목숨의 위험도 큰 이 사업이 이 시기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향료 교역이라는 엄청난 이익 때문이었다. 카라카선 한 척에 실어오는 수백 톤 향료는 포르투갈 왕실의 몇 년 재정에 해당되는 가치였다.

원래 꿈꿨던 향료 무역만도 엄청난 대박이었는데, 항로가 일단 확보되자 생각 못했던 사업 기회가 속속 나타났다. 새로운 사업 중 가장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 현지 교역이었다. 유럽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왕복 항해에 아무리 빨라야 2년, 보통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포르투갈인들은 머지 않아 인도양의 교역로를 장악하고, 이어 교역로를 남중국해까지 확장했다. 마젤란의 뒤를 따라 필리핀을 점령한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연결하는 태평양 교역로도 열었다. (가치가 큰 인도양 교역로를 포르투갈인들이 단기간 내에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571년의 레판토 해전 상황을 보더라도 이슬람 세력의 해군력이 강하던 시절인데...)

16세기 중엽까지 세계를 휘감는 교역로의 그물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유럽의 수입품 가운데 향료에 대신해 비단, 도자기, 차 등 중국 상품의 비중이 늘어 갔다. 이 교역망에서 중국은 오랫동안 수출초과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 차이를 메우기 위해 다량의 은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멕시코와 페루 산 은괴가 수요의 대부분을 맡았다. 항로 개척 과정에서 아메리카를 찾지 못했다면 중국 시장에 접근하는 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렸을 것이다.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까지 28,000 톤의 은이 중국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은도 여기에 끼어들어 교역망에 포함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517년부터 중국의 광저우에서 교역을 시작했고 1557년부터 마카오에 기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1543년부터 일본과도 교역을 시작했다. 포르투갈 당국은 해마다 카라카선 한 척을 마카오와 일본 사이에 운항시켰고, 이 배를 일본인들은 '구로후네(黑船)'라 불렀다.

이 배로 화기를 비롯한 서양 상품도 일본에 흘러들어갔지만 화물의 대부분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품이었고, 수입이 많은 일본 측에서는 은으로 대금을 지불해서 은광 개발이 성행했다. 종래 일본과 중국 사이의 교역에는 왜구가 큰 몫을 했는데 유럽인의 개입으로 교역이 갑자기 커져 사회와 경제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임진왜란과 도쿠가와 막부 성립으로 이어지는 16세기 후반 일본의 정치적 격동도 이 충격에 기인한 바 크다.

17세기 들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세력도 아시아 해역에 진출해 활동을 넓혀간 끝에 18세기 들어서는 포르투갈을 제치고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료의 주산지 인도네시아 지역을 장악했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1757년 프랑스의 경쟁을 물리친 후 인도 통치를 시작하고 중국 교역에서도 주도권을 쥐었다.

그 사이에 유럽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중국 상품의 수입은 계속해서 커졌고, 중국은 '은 먹는 하마' 노릇을 계속했다. 인도 통치를 시작한 동인도회사는 중국에 쏟아넣을 은을 계속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수출이 늘어나고 있던 아편을 떠올리고 1770년대부터 아편 대량 재배를 시작했다. 동인도회사의 감독 하에 독점생산된 아편은 콜카타(캘커타)에서 경매로 팔렸고, 금령을 뚫고 중국에 재주껏 반입하는 것은 상인들의 몫이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1578)에 쾌락을 위한 아편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어서 그 무렵에 중국에 유행이 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14세기부터 사용되고 있던 이슬람권에서 배워온 것으로 보인다. 그 유행이 차츰 확산된 결과 1729년 처음으로 옹정제가 아편 금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중국 내의 아편 생산이 없어서 값이 매우 비싸고 특수층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인도산 아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금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산되었다.

인도산 아편은 60킬로그램 남짓의 상자로 반입되었는데, <위키피디아>("opium" 조)에 따르면 연간 수입량이 옹정제 때(1723-35) 약 200 상자, 건륭제 때(1736-95) 약 1,000 상자, 가경제 때(1796-1821) 약 4,000 상자에서 도광제 때(1821-51) 약 30,000 상자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그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대략 실제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건륭제 말년에 아편 유입이 급증하는 것을 보고 1799년 확대된 금령을 내렸지만 어마어마한 이권이 걸린 이 사업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839년 아편전쟁이 일어날 시점에서는 중국의 아편 수입액이 가장 큰 수출 품목인 차의 수출액과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 중국인들이 차를 키워 영국인들을 먹여준 대신 영국인들은 아편을 키워 중국인을 먹여준 셈이었다. 아편 교역의 부도덕성은 영국 본국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 아편전쟁 개전은 영국 의회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동인도회사의 온갖 획책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중국은 패전 후에도 아편 금령을 풀지 않았지만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실효성이 무너지고 아편 수입은 연간 10만 상자(1879년에 6,700 톤)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 한 차례 전쟁에서 패전한 후 금령이 해제되고(1860) 중국 내 생산이 시작되면서 수입은 1880년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전체 소비량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1906년에 중국은 전 세계 아편 생산량의 85%인 6만5,000 톤을 생산하면서 그것도 모잘라 4,000 톤을 수입하고 있었다. 당시 중독자는 1,300여만, 성인 남성의 27%로 추정되었다.

유럽인을 대항해시대에 뛰어들게 한 향료는 산업화와 직접 관계 없는 소비재였다. 항해활동의 확대에 따라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지역에서 노예노동력을 비롯한 자원을 착취한 것은 산업화를 위한 준비였다. 그러나 18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가져간 것은 주로 사치품 소비재였고 산업화를 위한 자원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증기선이 보급되기 전의 운송수단으로는 자원의 대량수송이 힘들었다는 것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중국의 제조업 수준에 유럽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로 접어들어 대량생산과 대량수송을 갖출 단계까지 산업화가 진척된 뒤에야 중국 시장에 대한 전면적 침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산업자원의 대규모 플란테이션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39년 아편전쟁 시점은 유럽의 공산품이 아직 중국 시장에 위세를 발휘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런 시점에서 중화제국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유럽의 힘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중국이 평화를 누리는 200년 동안 수많은 전쟁을 통해 갈고닦은 군사력이었고, 또 하나는 아편이라는 상품이 가진 특성을 극한적으로 활용한 전략의 잔인성이었다. 유럽 근대문명의 특성이라 할 이 두 가지 힘은 19세기를 통해 갈수록 위력을 더해 갔다.

아편 교역은 근대적 시장 확대보다 전근대적 약탈의 성격을 가진 침략 양상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을 비롯한 유럽 공산품의 중국 시장 점령은 1856-60년의 제2차 중영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인구 조밀 지역을 산업화의 시장으로 편입시킬 전망이 비로소 세워진 것이다. 조선에 대한 개항 요구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유럽 열강들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만들던 추세에 비추어 동아시아 지역도 곧 식민지가 될 참이었다는 주장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곧잘 해왔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친 열강들의 대 중국 정책을 보면 그 전까지 통상적 의미의 식민지를 구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청나라를 유지시킨 채 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방침이 열강 정책의 주류였다. 영국이 겪어본 인도 경영의 어려움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에 대한 유럽 열강의 정책에는 중국에서의 경험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고 하는 일본도 1880년대까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약점을 파고든 것처럼 일본의 약점을 냉혹하게 파고든 열강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력 근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의 성장을 가로막으려는 의지를 가진 유럽세력은 러시아 하나뿐이었고, 일본보다 근대화가 크게 앞서지 못한 러시아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열강이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유럽 열강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말로 '찢어먹기(爪分)'('쪼개먹기(瓜分)'라고도 함)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청일전쟁(1894-95)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고, 일본과 러시아가 앞장서서 일으킨 사태였다. 제국주의 경쟁이 막바지에 이른 현상으로, 주류 열강들이 추진해 온 방향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 1890년대 이후 격화되는 데는 일본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이었고, 이것을 거든 것이 러시아의 역할이었다.



Posted by 문천
2010. 2. 7. 15:18

어제로 만 60세가 되었다. 회갑? 웃음이 픽픽 나온다. 이제 일을 일답게 시작하는 참인데...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도 써 오지 않았다. 따로 별 일 없어도 이따금씩 보며 지내는 친구들이나 평소보다 좀 넓게 불러 저녁이나 같이 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집에서 하잔다. 그래도 명색 있는 날인데, 바깥 음식 먹게 해서는 자기가 너무 면목없다고. 친구들이야 다 좋아하겠지. 아내를 알고 지내는 친구들은 다들 아내를 좋아하고, 내 인간성을 향상시켜 줬다고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니까.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주는 음식도 대개들 좋아한다. 못이기는 체하고 그러자고 했다.

이따금 친구들 집에 부를 때도 많아야 일고여덟 명인데, 이번엔 아무래도 열 명은 넘을 테니... 피난살이 같은 살림에 그릇부터 문제다. 요리접시와 앞접시, 그리고 술잔을 몇 개씩 사는 것도 아내는 아까워서 마음이 아프지만 이번엔 정말 큰 맘 먹고 준비할 것 다 한다. 밥상도 사야 하나 고심하다가 상각 선생이 차에 실을 만한 게 있다 해서 빌리기로 했다.

누구누구 부르나... 이럴 때는 내 미니멀리즘 취향이 스스로 생각해도 돋보인다. 다년간 의지해서 지내 온 이웃의 상각 선생과 일문 선생, 그리고 연식 선생과 동범 선생은 서로 얽힌 한 덩어리다. 그리고 유빠그룹에서 애환을 나눠 온 녹두님, 정신님, 째비님은 상각 선생, 일문 선생과도 정분이 쌓여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범위. 그리고 내 일에 요긴한 도움을 주는 돌베개의 김 선생과 조 선생, 프레시안의 강 기자도 이런 기회에 한 번 찾아와 주면 나쁘지 않겠다. 강 기자는 오기 힘들 것을 알지만 혹시 하는 생각으로 메일에 비쳐 놓았더니 역시 오지는 못했어도 박 대표를 찔러줬는지 굴을 택배로 보내줘서 비친 보람을 느꼈다.

제일 애매한 게 바둑친구들. 십여 년간 정든 사이인데 그냥 지나가기 미안하지만, 그 친구들 여기까지 오게 하면 하룻밤 놀게 해주기는 해얄텐데... 놀자고 어울리는 사이니까... 그런데 요즘 놀 틈 없이 지내는 신세에 놀이판 펼칠 엄두가 안 난다. 바둑 외의 일로도 왕래를 해온 작가 허방 선생과 사업가 건달 사범, 보솔 사범에게만 연락했다. 놀이판 없어도 일산에 가끔씩 찾아주는 분들이다.

그리고 썬생님 친구분 아드님 이 전무. 얼굴 두 번 본 분이 한 번 또 찾아오고 싶다는 메일이 있기에 기왕이면 어느 날 와서 산에나 같이 올라가자고 해놨는데... 무심코 메일을 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행여 부담스럽게 생각할까봐 걱정이 된다. 두 번 메일을 더 보내 절대 빈손으로 오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끝내 곶감 한 짐을 싸들고 왔다.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지는 않고, 낮에 내외가 함께 와 차 한 잔 마시고 갔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갖다주신 뜻을 받들어 맛있게 먹는 수밖에...

오후 산보는 유빠 세 분, 연식 선생, 일문 선생과 오랜만에 나타난 영진이가 함께 했다. 세 시에 출발했다가 다섯 시 반에 돌아왔다. 날씨가 각별히 맑아 심학산 정상에서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강화도 바깥쪽 황해도의 해안선까지 이렇게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다.

집에 들어와 조금 있으니 동범 선생과 상각 선생이 밥상을 갖고 와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 시점에서 나까지 아홉 명. 바둑 친구들이 허방, 보솔, 건달 순서로 시차를 두고 나타나고, 돌베개 두 분은 판이 다 무르익은 뒤에 나타났다. 자리에 거의 앉지 않은 아내를 빼고 술자리를 함께 즐긴 사람이 14명. 좋아하는 분들을 이렇게 많이 모아서 놀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백주 여덟 병과 돌베개 한 사장이 보내준 꼬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음식도 잘들 먹어줘서 아내가 흐뭇해 했다.

그런데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슬슬 걱정이 시작된다. 너무 일찍 시작했다. 아직 아홉시도 안 됐는데 꼭지가 돌기 시작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마주친 이들도 있는데, 기질이 발랄한 이 친구들이 모두 무사한 몸으로 내일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앞장서서 끼를 드러낸 것은 단연 허방 선생. 오랜만에 오면서 오기 전부터 너무 기분이 좋았다. 정말 모처럼의 이빨 작렬이다. 건달 사범이 힘껏 견제를 하지만 역부족. 할 수 없이 내가 간간이 찬물을 끼얹어주는 수밖에.

자기 바둑이 나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열렬히 강조하는데, 건달이 "허방 형님은 나보다 하수고, 문천 형님이 나보다 조금 쎄." 하고 아무리 초를 쳐도 굽히지 않는다. 바둑 모르는 분들이 내게 사실(내지는 내 의견)을 밝혀달라고 하기에 "나이가 60대가 되면 그런 데 신경이 쓰이지가 않아요." 했더니 허방 선생, 조금 머쓱해한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허방 선생이 손님들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였다.

허방 선생이 자청해서 노래를 뽑았는데, 평소 실력보다도 잘 빠졌다. 나부터 시작해서 많은 청중이 감명받은 기색을 보이니 신명이 났다. "내 자랑 하는 거 같아서 뭐하지만... 내가 서라벌예대 문창과 다닐 때 성악과 교수가 나한테 성악과로 전과하라고 권한 일도 있어요." 이럴 때 한 마디 찔러주지 않고 못 배기는 건 내 인간성이 아직도 순화되지 못한 면을 보여준다. "그 교수님이 허방 선생 글을 읽어보고 그렇게 권합디까?"

결국 자리를 정리한 것은 타고난 해결사 건달 사범이었다. 9시 반이 되었을 때, 술과 피로를 이기지 못해 방에 들어가 쉬고 있던 허방 선생과 영진이, 그리고 아내를 빼놓고는 모든 손님이 나랑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내일의 일을 위해 먼저 일어선 보솔 사범과 동범 선생, 그리고 술 오르면 소문 없이 사라지는 상각 선생을 제하고 여덟 사람이 길거리에 몰려나갔다가 돌베개 두 분이 먼저 찢어졌다. 남은 여섯이 맥주집에 들어가자 하는 것을 내가 제안해 당구장으로 갔다.

당구장에 자리 잡은 뒤 건달 사범에게 합류하라고 전화했더니 득달같이 쫓아왔는데, 같이 놀자는 게 아니라 나를 우악스럽게 끌고 나온다.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는 다른 손님들에겐 "오늘은 우리 형님 쓸 데가 따로 있으니까 보고 싶으면 다른 날 보셔!" 외쳐 놓고 집에 끌고 와서는 "오늘은 땃 짓 말고 형수님이랑 노셔!"

쉴 만큼 쉬고 나온 영진이랑 얘기를 좀 나누는 사이에 책임 완수한 건달 사범은 허방 선생이 쉬고 있는 방에 따라들어가 골아떨어졌다. 영진이를 보내고 아내와 자리에 들었다가 날 밝을 때 문 열리는 소리에 깨어나 나가 보니 현관문은 열려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건달 사범 전화를 돌리니 "저 이제 집에 들어왔어요. 잘 놀았어요." 뒤이어 허방 선생 전화를 돌리니 "대화역까지 왔습니다. 잘 놀고 갑니다. 다음에 더 확실히 폐를 끼치죠."

회갑잔치가 이렇게 수월한 건 줄 몰랐다. 이 정도라면 매달이라도 하겠다. (읔! 아내가 볼라!)

정겨운 선물 이것 저것 모두 마음이 흐뭇한데, 하나 마음에 쎄게 걸리는 물건이 있다. 디카. 상각 선생과 동범 선생이 구해 왔는데, 내 필요를 알뜰하게 살펴준 마음도 고맙거니와, 돈도 만만치 않은 물건인데. 과분한 선물이지만 요긴한 물건이니 잘 쓸 수밖에. 그래~ 마음에 새겨 뒀다가 즈그들 회갑 때 답례를 잘 해야지~ (아직 십여 년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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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