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에서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라는 내 의견을 밝혔다. 잘못된 의견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세기 중엽까지 자본체제에 대한 생각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라 하는 기술적(descriptive) 접근이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 하는 규정적(normative) 태도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념으로서 규정적 태도는 19세기 말에 형성되어 20세기에 들어와 널리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자본의 힘을 사회 질서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 설정을 뒷받침하는 도그마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 하는 믿음이다.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에 대한 믿음이므로 '도그마'라 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보는 관점은 애덤 스미스 이래 고전경제학의 핵심 명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인간이 이기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가진다는 가설적인 명제이지,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기만 하다는 믿음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믿음의 형태 자체가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특이한 현상이었다. 19세기 말 기술만능주의가 풍미하는 세태가 아니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처럼 편협한 도그마가 그토록 널리 유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근대 자본체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오랫동안 발전해 왔다. 황런위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재정 옮김, 이산) 4장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에서 시작해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1651), 제임스 해링턴의 <오세아나 공화국>(1656), 존 로크의 <통치 2론>(1689)을 거쳐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 이르기까지 이 흐름이 개관되어 있다. 이 장 제목을 "자본주의 사상체계의 형성"이라 한 것을 보면 황런위는 이 흐름이 자본주의 사상의 발전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20세기에 자본주의 이념이 맹위를 떨친 결과에 비춰보면 이 과정이 연속적인 인과관계 속에 진행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를 기준으로 과정을 재단하는 비역사적 관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과정 전개의 매 단계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음미해보면 이 과정의 흐름이 그리 연속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다.

<군주론>부터 살펴보자. '현실주의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정치를 도덕적 주제 아닌 기술적 주제로 다뤘다. 황런위가 마키아벨리를 자본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지목한 것은 이 책 속에 "중산층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는 의도가 보인다거나, "이미 자본주의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자유도시를 이상적인 도시로 내세웠다거나, 유물론을 주장했다거나 하는 이유인데, 그리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과에 맞춰 해석을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군주론>의 의미는 이상주의 정치론에서 현실주의 정치론으로의 전환에 있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장-자크 루소나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군주들의 통치수법을 까발림으로써 군주제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이 책의 숨은 목적이라고 본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냉소적 필치로 일관한 책이다. 그런 성격의 책에서 미래의 가치체계에 대한 긍정적 비전을 찾는다는 것부터 무리한 일 같다. 이 책에 선구적 의미가 있다면 정치의 도덕적 의미가 약화되는 근대 유럽의 변화를 앞서서 보여줬다는 데 있으며, 이것은 마키아벨리 시대 이탈리아의 혼란에 빠진 정치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17세기 후반부에 나온 홉스, 해링턴과 로크의 저술은 당연히 잉글랜드 내전(1641-51)에서 명예혁명(1688)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를 배경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변화는 기본적으로 왕권의 제한을 향한 것이었다. 왕의 전제권력을 탈피하는 변화라 하여 민주주의 발전으로 찬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후세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류가 다분히 개재된 것이다. 왕이 이 때 권력을 양보한 상대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과 유산계층, 즉 중간권력 담당자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가 1603년 엘리자베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열렸다. 큰 나라의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가체제 강화를 꾀하면서 신흥 유산계층만이 아니라 다수 귀족의 불만을 샀고, 1625년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 재위중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찰스 1세가 1629년부터 11년간 의회 소집을 거부, 의회세력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있다가 1640년 부득이한 필요로 의회를 열자 의회가 왕권에 대항하는 조치를 확대해 나간 끝에 내전에 이르게 되었다.

1646년 찰스 1세가 체포되고 1649년 처형된 후 9년간 크롬웰의 군사독재를 겪은 후에 1660년 의회가 찰스 2세를 불러들여 왕정이 복고되었다. 크롬웰의 극단노선에 환멸을 느낀 의회 세력이 타협책을 찾은 것이었다. 1685년까지 이 타협책은 불안하게라도 유지되었으나 제임스 2세 즉위 후 왕의 가톨릭 비호 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반대세력이 네델란드에서 오랑쥬 공 빌렘을 영입해 윌리엄 3세로 즉위시킴으로써 명예혁명이 진행되었다.

내전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비하면 약소국이었고, 네델란드에 비하면 후진국이었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따라가고 싶어 한 반면 반대파에서는 자유도시들이 주도권을 쥔 네델란드를 흠모했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란 으리으리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극도로 미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네델란드의 잉글랜드 정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시각도 유력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일부 세력이 오랑쥬 공과 합작해 정변을 일으킨 것임은 아무리 미화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윌리엄 3세 즉위 후 잉글랜드와 네델란드의 긴밀한 관계 속에 경제활동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옮겨지고 네델란드 해군력도 쇠퇴해 잉글랜드가 경제적-군사적 약진의 계기를 가지게 된 결과를 보면 의회세력의 '매국' 행위로 볼 수는 없겠다. 아무튼 명예혁명을 계기로 잉글랜드의 자본체제 지향이 확정되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크롬웰의 군사독재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를 비유한 '리바이어던'은 미증유의 괴수의 모습이다. 전에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나타나는 것을 홉스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류는 일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는 권력추구욕이다. 이는 인간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강렬한 쾌락을 바라거나, 보통의 권력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과 힘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ch 11, 황런위 책 241쪽에서 재인용)

인간성을 일의적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전통이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안정된 질서 속의 인간에게는 여러 특성이 균형을 이루고 나타나는 데 반해 혼란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은 한 쪽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회와 왕권 사이의 무장투쟁, 그리고 왕권을 굴복시킨 후 동지들까지 숙청한 크롬웰의 철권통치를 보며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홉스의 노력이 <리바이어던>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로크의 <통치 2론 제2논문>이 나온 것은 의회 세력과 윌리엄 3세 사이의 '계약'으로 반 세기를 끌던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이 비로소 안정된 틀을 짜고 있던 시점이었다. 홉스가 불안한 눈길로 내다보던 새로운 국가체제를 로크는 신뢰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로크가 사유재산권에 대한 안정된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상에 기여한 것으로 황런위가 간주했지만, 로크는 이론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나 확고한 중상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중상주의 체제도 자본체제와 공유하는 요소가 있지만, 대혁명 전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에서 보는 것처럼 중상주의는 질서의 근거를 시장에게 내맡기지 않는다는 본질적 차이를 가진 것이다.

마키아벨리에서 로크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전개는 경제사상보다 정치사상의 발전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정치권력은 현상 유지에 기본 목적을 둔 치안의 주체였다. 농업사회의 생산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 상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권력의 목적이 경쟁과 변화로 옮겨간다. 하나의 국가사회 안에서도 여러 요소들이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되면서 정치 참여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정치의 새로운 구조와 원리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을 통해 경제선진국 네델란드를 발전 모델로 확정하고 네델란드와 경제-군사 양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잉글랜드는 18세기 전반을 통해 압도적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국력을 추격해 가고, 1756-63년의 7년전쟁을 계기로 우월한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은 한 세기에 걸친 국력 성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시장을 질서의 주체로 삼는 자본체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전경제학이 <국부론>에서 출발했다고 할 만큼 이 책에는 중요한 경제 개념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경제현상에는 자체의 원리가 내재해 있으므로 외부 권력의 개입이 필요 없고, 개입이 적을수록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 정치권력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경제현상을 해방시키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완전 자유방임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스미스 당시까지 영국의 경제정책이 프랑스에 비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개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노선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는 개입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지금 '네트워크 산업'이라 부르는 분야처럼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이 필요한 공공 영역의 존재를 스미스도 인정했다.

시장 원리에 대한 스미스의 믿음은 계몽사상의 자연법 관념과 결합해 자유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무렵 궤도에 오른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과 유통이 대량화 되는 상황에서 시장 원리의 유효성이 폭넓게 확인되면서 '경제 자유주의'가 19세기 유럽을 풍미했다. 그 결과 시장에서 만들어진 자본권력이 자유주의의 다른 측면(사회와 정치)을 압박하기에 이르자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자유주의의 억제 내지 수정 제안이 나오게 된다.

자본권력이 공산주의와 제도학파 등의 도전에 반동적인 대응으로 시장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이념이 나타났다. 자본체제의 타당성을 넘어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파국을 겪으면서 이 이념은 힘을 잃었지만 냉전의 압력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의 경제 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라는 간판 아래 다시 모습을 나타내 지금에 이르고 있다.

 

Posted by 문천


1990년 가을, 4개월간의 파리 체류를 끝내며 약간의 여유시간을 가졌다. 1984년 초 타이완 구경으로 해외 나들이를 처음 시작한 이래 부지런히 다니기는 다녔지만, 연구 목적의 여행이기 때문에 다니는 곳이 뻔했다. 이제 귀국하면 학교도 그만뒀겠다, 밖으로 나다니기도 힘들어질 텐데, 좀 못 보던 것을 며칠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그냥 시골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어느 곳에서 바둑대회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같이 다닐 사람도 없는데, 바둑대회를 쫓아가면 고수라고 대접을 해주니까 지내기 좋을 것 같았다. 지방의 바둑대회에서는 외부 선수들, 특히 고수들 참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참가비까지 따로 주지는 않아도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다.

캉. 노르망디의 중심도시다. 과히 멀지도 않고 시골은 확실한 시골일 것 같고 괜찮다. 토요일 점심때 파리 발 기차가 캉 역에 도착하니 주최측에서 마중나와 있다. 지역 회원들이 모처럼의 큰 행사에 신이 나서 열심히들 일해주는 가운데 대회는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두 판씩 둔 뒤에 야외파티로 저녁을 함께 하고 주선해 준 모텔에 일찍 들어와 쉬었다. 대회 임원에게 부탁해 놓았다. 내일 대회 끝난 뒤 부근에서 이틀쯤 쉬다가 가고 싶은데, 좀 더 시골스러운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일요일 오전에 세 판씩 두고 점심때 대회가 끝났다. 나는 오전 첫 판에 앙드레에게 지고, 맥없이 두다가 또 한 판 날려서 입상은 못했다. 그래도 앙드레와 함께 정상급 고수로 대접받는 기분이 괜찮았다.

점심 먹을 때 어제 부탁해 둔 임원이 지역 회원 한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 이분이 선생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하는데, 가 보고 불편하시면 다른 숙소를 구해 드릴 거라고. 내 또래로 보이는데, 뼈대가 굵직굵직하고 표정이 순박한 것이 농사꾼 같다. 그런데 임원은 "독토르 콜송"이라 해서 좀 어리둥절했다. 좋은 친구가 될 피에르 콜송과의 만남이었다.

피에르의 차에 타서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큼직한 밴인데, 차 뒷칸이 어지러운 창고 같았다. 한참 둘러보고서야 싱크대도 있고, 침대도 있고, 자기 손으로 만든 모바일 홈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 푸랑수아도 입성이나 행동거지나 구김살 없는 촌 아이지, "독토르 콜송"댁 자제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계속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를 싣고 차는 어느 낡고 아담한 집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말끔한 집안은 어지러운 차 안과 달리 확실한 인텔리겐챠 중산층 분위기였다.

차츰 알게 되었다. "독토르 콜송"은 의사였다. 집의 옆 필지에 진료소가 있는데, 조그맣지만 단단한 석조건물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파괴된 건물의 일부만 살아남은 것이라 한다. 한 필지가 2~3백 평 정도 되는 꽤 오래된 동네 같은데, 전쟁의 파괴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집의 뒤 필지는 건물 없이 피에르의 집 뒷마당에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다 닭, 토끼, 오리, 거위까지 골고루 키우는 것이 피에르의 취미의 하나였다.

피에르는 취미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취미는 윈드서핑 같다. 신나던 서핑 경험을 설명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근년 몰입하고 있는 취미가 바둑. 바둑을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하나의 '도'로 여기는 친구들이 유럽 바둑꾼들 중에 많다. 5급도 안 되는 하수들이 바둑판을 무슨 숭고한 원리의 실험장이나 되는 것처럼 심각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깨물기 바쁘다.

자기 집에서 지낼 만하겠냐고 묻기에 아주 좋다고 대답하니까 너무너무 행복해 한다. 그리고는 사실 그 전에 나를 봤다고 한다. 라데팡스 부근에서 내가 우승한 대회에 왔다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너무나 흠모해 마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묵게 되어 꿈처럼 행복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뭐가 그렇게 흠모스럽더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시계 누르는 내 폼이 너무나 멋지더라고. 체스용 시계를 쓰는 데 나는 익숙지 않아서 바둑돌을 누른 다음 시계로 손을 가져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익숙한 친구들은 번개처럼 후닥닥 손을 움직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엉성한 내 동작이 너무나 여유만만해 보여서 "아! 이것이 전정한 고수의 시계 누르는 자세구나!" 탄복했다는 것이다.

화요일에 돌아오려 했는데, 화요일에 자기 일을 치워놓고 같이 바람쐬러 나가자고 꼬셔서 하룻밤 더 지냈다. 친절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 대한 감각도 서로 비슷한 것 같아서 참 같이 지내기가 편안했다. 화요일에는 유명한 관광지에 데려다주었다. 관광지를 잘 안 돌아다니다 보니 이름도 잊었는데, 육지 바로 곁의 섬을 수도원이 덮어씌운 곳, 썰물 때만 걸어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경치도 아름답고 시설도 멋있었지만,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피에르에게 듣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학삐리 아닌 유럽인과의 넓고 깊은 대화는 처음이었다.

나를 우상처럼 쳐다보며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수아에게 떠나기 전날 밤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줬다. 여행 때 쓰고 다니던 군용 스타일의 모자를 주며(그 녀석 머리통이 참 컸다.) "이 모자를 쓰고 바둑 두면 좀 더 잘 둘 수 있을 거야." 하니까 "정말요?" 하면서 모자를 얼른 써 보는데, 얼굴이 마치 전등에 불 들어오듯이 확 밝아진다. 뒤에서 피에르가 표정으로 나타내는 감사의 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로 익숙해졌다.

85년부터 뻔질나게 유럽에 다니면서 즐거운 경험이 수없이 많았지만, 독토르 콜송 집에서의 편안함은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그 이듬해 프랑스에 다시 간 것은 자료조사 미진한 것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피에르네 집에 또 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재회의 즐거움에 이어 멀지 않은 앙쥬의 바둑대회에 함께 가 이번에는 마침 다시 마주친 앙드레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 우승상품은 지역 특산의 적포도주 여섯 병에 백포도주 여섯 병. 적포도주는 체류 중에 마셔 치우고, 백포도주는 피에르 진료소 지하에 있는 와인셀라에 넣어두었다. 그 백포도주 피에르랑 함께 따러 언제 가야 할텐데...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Parce que j'etait superieur.  (5) 2011.06.22
룸비니, 구자명, 서중석  (4) 2010.10.30
'촌놈 정신'이 그립다.  (11) 2010.01.23
프랑스 평정기  (2) 2010.01.19
교토의 난가일몽  (8) 2010.01.16
Posted by 문천
 

영어의 "~ism"은 그리스어에서 동사를 명사화하는 어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 관습, 상태, 원리, 신조, 특성, 지향 등을 나타내는 여러 용도로 쓰인다. 이것을 흔히 "~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의 용도 중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말에서 "~주의"라 하면 윈리, 신조, 지향 등 목적의식이 개재된 규정적(normative)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현상을 묘사하는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criticism, barbarism 같은 말은 "~주의"로 옮기지 못하지 않는가?)

'자본주의"로 번역되는 "capitalism"은 원래 "자본을 가진 상태"라는 기술적 의미로만 쓰이다가 20세기로 넘어올 무렵부터 규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자본론>(1867, 85, 94)에서도 "capitalist"란 말은 수천 번 쓰이지만(물론 "자본주의자" 아닌 "자본주"의 뜻으로) "capitalism"이 쓰인 것은 총 10회도 되지 않는다. 대신 "kapitalistisches System", "kapitalistische Produktionsform" 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 것은 이념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서, 기술적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1902)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이 나올 무렵에야 "capitalism"이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19세기 이전의 'capitalism'을 규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anachronism)에 해당된다. 전근대 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런 의미의 한계를 가진 것이다. "맹아"라 함은 장차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잠재력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꽃과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적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 어느 시기에 나타난 현상을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현상의 예고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에 집착해 온 것은 자본주의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세태 때문에 마치 문명 발전의 필수적 단계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문명의 궁극인 것처럼, 또는 문명 그 자체인 것처럼 받드는 유사종교 행태까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득권 고수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주장하기 위한 정략적 행태가 더 많은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인상을 주는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19세기 이전 기술적 의미의 "capitalism"을 "자본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라 하면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체제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세 초부터 서유럽 지역에서 자라난 하나의 경제체제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힘을 키워 정치와 사회 방면까지 통합하는 강력한 세계체제로 자라나고 20세기에 들어와 이 체제의 원리에 대한 깊은 믿음이 널리 일어나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이 세워졌다고 나는 본다.

1861년 프루동이 내린 "capitalism"의 정의를 "자본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으로 자본에 작용을 하여 수입의 원천이 되게 하지만 이들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경제체제". (황런위,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20쪽에서 재인용)

 

자본체제의 특성을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사적 소유권의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 각 관점이 바라보는 측면들은 어차피 서로 얽혀 있는 것인데, 이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소유권의 절대화를 중심에 두는 것이므로 이에 맞춰 소유권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은 문명과 함께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문명 초기에는 '원시 공산제'가 존재했으리라고 인류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이고, 실제로 미개사회에는 소유권 개념이 미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농업문명이 발달하면서 소유권 개념도 자라나지만 농업사회 단계에서는 그 성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의 소유권 강화를 억제하는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농지의 경우가 명백한 예다.

농지는 경작하는 농부가 있음으로써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재산이다. 따라서 농부는 자기가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닐 수 없다. 대지주가 소작꾼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절대적 소유권은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이 넘쳐나게 되는 먼 후세의 일이다. 개간할 땅이 넉넉히 있는 데 비해 노동력이 아쉬운 것이 초기 농업사회에서는 보통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기록을 보면 영주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백성이 떠나가는 것이었고, 제일 바란 것이 백성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농부가 경작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농지의 획득과 유지에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력자와 경작자가 호혜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고 토지는 공유의 대상이 된다. 이 공유는 절대적 소유권 사이의 평면적 분할이 아니라 부분적 소유권의 중층적 결합이다.

권력과 생산력의 공생관계가 농업사회 질서의 본질이다. 권력과 생산력이 1 대 1로 만나면 공생관계의 효율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권력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된다. 권력 내부에서 몫을 다투는 중간권력의 경쟁이 배타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는 최고권력자가 말단의 문제를 모두 직접 보살피기 힘들기 때문에 중간권력이 만들어져 권력 자체가 중층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생산자 위에 소영주 계층, 그 위에 대영주 계층, 그리고 그 위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이다. 권력의 중층화는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권력의 유통구조가 복잡해서 비용이 많이 들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중간권력 사이의 경쟁으로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서 생산자와 최고권력자 양쪽의 부담을 크게 만든다.

중국에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왕토(王土)'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중간권력이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최고권력자의 소유로 선포함으로써 중간권력의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왕의 지배권과 농부의 경작권을 직접 결합시키면서 중간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배제하고 보조적 기능만 허용한 관념이다.

왕토사상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오랫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지지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이 이념이 언제나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 행정의 효율화 등 노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유럽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집권성과 안정성이 뛰어난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배층에게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與民爭利)"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도덕적 전통이 있었다. 권력, 학식 등 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계층의 경제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불공정 경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은 관념인데, 또한 중간권력층의 역할에 한계를 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는 중간권력의 비용을 줄이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권력자와 생산자 양쪽을 다 이롭게 해주었다. 이런 좋은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꼭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사회가 일찍 발달하고 인구밀도가 조밀해져서 갈등을 최소화할 압박을 더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에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적 요소였다.


농업사회 후기로 넘어오면서 내부 압력이 늘어나 변화 방향이 모색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난 일이다. 변화의 중심축이 소유권 강화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권력자의 경쟁 못지않게 생산자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최고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질서가 개인을 직접 보호해 주는 힘이 약해지면서 각자가 자기 안전과 번영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각개약진에 나서면서 들고 나온 무기가 소유권이었다.

농업사회 안에서도 소유권 강화 현상이 일찍부터 나타난 영역이 있었다. 상업 영역이었다. 농업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 비생산 인구가 늘고 지역적 분업이 형성되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상업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활동은 안정된 소유권의 발판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안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강한 소유권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리고 상업활동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 제도를 비롯해 많은 '근대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이 지역에서 나타나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소유권을 전제로 하는 제도들이었다. 그래서 근대 자본체제의 출발점을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찾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특별히 똑똑해서 안정성 높은 중앙집권체제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선진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나타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의 유럽에는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도시국가들이 특화된 기능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권력의 통제가 약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지역은 생산력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제도들이 북해-발틱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 이식되는 데는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시기 이탈리아의 금융-경제 제도 발전의 배경에 '이슬람 자본체제'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Wikipedia>의 "capitalism" 항목을 보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근년 활발한 것을 알아볼 수 있고, 약간의 설명 중에는 8~12세기 '이슬람 농업혁명'에 힘입은 '이슬람 황금시대'에 화폐, 회사 제도 등 선진적 금융-상업 제도들이 고도로 발전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걸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활동에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시기에 이슬람권의 문화가 기독교권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증적 연구결과에 접해 보지 않았더라도 이런 정도 배경 위에서 가설을 세울 만한 길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슬람권의 선진적 제도와 문물을 가장 앞장서서 배워 온 유럽인이었다."

근대 자본체제의 뿌리를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 관점은 유럽 중심주의의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라는 본질을 떠나 자본체제의 존재를 논하는 의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자본체제'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 이 관점의 밑바닥을 흔들고 있다. 상업활동이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에서 교역활동을 벌인 여러 미개지역 중 하나가 유럽이었고, 그 방면의 창구 역할을 맡은 이탈리아인들이 거래 과정을 통해 선진 기술을 배워 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Wikipedia>의 "Islamic capitalism" 항목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 나도 읽으면서 놀랐지만 독자 여러분도 놀랄 것이라 믿는다.

"11-13세기에 카리미(Karimi)라는 기업이 이슬람세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초기 다국적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카리미를 통제하는 50명 가량의 상인들도 역시 '카리미'라고 불리웠는데, 그중에는 예멘인, 이집트인, 그리고 더러 인도인도 있었다. 카리미 상인들은 상당한 재산가여서 각자 최소한 10만 디나르, 많으면 100만 디나르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동방의 많은 주요 시장, 그리고 더러는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활동의 고객으로 왕후(Emir), 술탄, 대신(Vizier), 외국 상인,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까지 넓은 접촉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미 그룹은 지중해, 홍해와 인도양의 많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북쪽으로는 프랑키아,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너머까지 그 교역 범위 안에 들어갔다. 카리미 그룹이 발명한 제도 중에는 대리인 제도, 자금 동원을 위한 프로젝트 제도, 그리고 대출과 예금을 위한 은행 제도 등이 있다. 카리미 그룹이 그 당시까지의 다른 기업들과 다른 점 또 하나는 세금 징수자나 지주가 아니라 순전히 교역과 금융거래만을 통해 구축된 자본체제라는 것이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 여행의 배경도 보다 석연해지는 설명이다. 아직 이슬람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성과에 직접 접해 보지 못했지만, 12-13세기의 이슬람권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권보다는 훨씬 '세계체제'에 근접한 현상을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차후 조사로 흥미로운 내용을 얻는 것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전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