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방 계신 분들이 회의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어제 회의에서 중요한 안건들이 많이 논의되었다고 하던데... 행정복합도시 수정안도 백지화하기로 했다던가?
계시는 방 바로 앞의 복도 가 테이블에들 앉으셨군요. 뒤쪽이 거실이고 왼쪽 까만 카운터가 너스스테이션입니다. 원장님이 수시로 보내주시는 사진 덕분에 자주 가뵙지 못해도 일상생활의 단면들에 접할 수 있습니다. 한창 추울 때는 사진 속 근무자들의 반팔 차림만 봐도 마음이 놓이곤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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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젊었을 때는 몸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늙으면 몸을 달래고 돌봐줘 가며 살게 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씀이 근래 들어 절실하게 느껴진다. 작년 봄 혈당 문제가 드러난 것이 확실한 경고장이다.

생각날 때마다 내 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커녕 신경조차 별로 쓰지 않으면서, 특별히 혹사시키지는 않아도 너무 살펴주지 않고 살아 왔는데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작년 초에 문제를 느끼기 시작하고도 매주 한 차례 산에 가 걷는 습관을 세운 이후 많이 또 좋아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더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마침 이 전무가 자기 다니는 한의원을 권해 줬다. 잠깐 설명을 들어도 오 선생이란 분이 믿음직한 의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당동은 매주 두 차례 다니기에 너무 멀다. 고심 끝에 이 전무에게 부탁했다. 오 선생 아는 분 중에 일산 쪽에 추천해 줄 만한 믿음직한 분이 있는지 여쭤봐 달라고. 설 전에 연락이 왔다. 그래서 지난 주 일을 끝내 놓은 뒤 화정역 부근으로 한 선생을 찾아갔다.

과연 믿음직하다. 불필요한 말 별로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문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믿음직한" 의사를 가리는 데 나는 두 가지 기준을 생각한다. 첫째는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닐 것. 둘째는 독단이 심하지 않을 것. 그런데 이 두 가지 기준이 서로 상치되는 면이 있다. 의사질 하면서 돈에 환장하지 않으려면 주견이 분명해야 하는데, 주견이 분명하다는 것은 독단이 심하기 쉬운 조건이다. 주견이 분명하지만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잘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몸도 마음도 그런 사람, 자신을 잘 돌아보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

진찰 과정에서 나누는 몇 마디 이야기에서도 권위의 부담감 없이 '대화'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한 선생도 환자 중에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사람 마주친 게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진찰이 끝날 무렵 한 가지 기분좋은 말을 덧붙인다. "선생님 말씀하시는 태도가 아주 유연하십니다. 그런 태도가 건강에도 좋은 것이지요. 원래부터 성격이 그러신 건가요?"

이것도 진찰 내용으로 유의할 만한 사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자극이 되는 말씀이다. 원래는 학문적으로도 엄격하고 인간관계에도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는데, 약 3년 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으로 매사를 전보다 넓게 보고 뒷쪽까지 들여다보는 쪽으로 습관이 바뀌어 왔다는 대답을 하면서, 이 변화의 의미를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장 뚜렷한 계기는 어머니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모자간의 관계는 어머니 쓰러지신 후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그와 나란히 내 일과 생활의 모든 면에 변화가 일어나 왔음을 이제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몇 해 전과 달라진 것 같고, 무엇보다 글쓰기의 자세가 바뀌었다.

지금 매달려 있는 <망국 100년> 작업, 몇 해 전 같으면 이런 식으로 안 했다. 내 생각 중에서 꼬투리 잡힐 여지 없도록 확실히 다듬어낸 것이 아니면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몰려 덜 다듬어진 생각이라도 열심히 내놓는다. 어찌 보면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독자를 객체화하지 않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자 하는 측면을 나 자신 분명히 느끼는 것이다. 독자에게 필자가 권위자로 임하기보다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관계를 앞세우게 된 것이다.

유연한 태도가 건강에도 좋은 것이라는 한 선생 말씀을 요긴하게 마음에 새긴다. 몸을 잘 보살핀다는 것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생각한다. 아주 망가져버리기 전에 추스를 수 있다는 것은 체질이나 심질(心質)이나 괜찮은 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부모님께 새삼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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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역법(曆法)은 중국 천하체제의 상징적 요소의 하나였다. 시간을 관리한다는 일이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의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를 새로 열 때 그 왕조의 역법을 반포하는 것이 천명을 확인하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래서 왕조마다 자기 역법을 가지게 되었지만, 역법의 원리 자체가 바뀌는 일은 별로 없고, 기존 역법에서 역원(曆元) 등 상수(象數)만을 바꾸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 역법의 원리가 크게 바뀐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도입된 인도 천문학을 가미한 일이 있었고, 원나라 때 도입된 이슬람 천문학을 가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유럽 천문학을 가미하는 역법 변화가 일어났다.

1583년 이래 중국에서 지내며 현지 사정을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된 마테오 리치는 유럽 천문학을 중국 역법에 도입할 경우 역법을 중요시하는 중국 풍속에 따라 유럽 문명이 중국인의 큰 존경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학과 천문학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던 리치는 그 방면 고급 전문가의 파견을 예수회 상급자들에게 꾸준히 요청하는 한편 역법 접근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기하원본> 번역을 도운 서광계가 역법 편찬사업을 이끌었다. 레이 황(황런위)의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에 보이는 것처럼 말기의 명나라 왕조는 마비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서광계 같은 관료들은 왕조의 중흥을 위해 대대적 개혁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새 역법 편찬에는 개혁의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리치가 죽은 후 요하네스 슈렉, 아담 샬 등 고급 과학자들이 선교사로 오자 서광계는 그들의 힘을 빌려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해 냈다. (1634)

숭정역법이 몇 해 시행되지도 못하고 왕조가 바뀌자 청 왕조는 그 내용을 활용해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었다. 아담 샬 등 과학자 선교사들은 그 운용을 위해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민족 출신인 청 왕조는 다른 이민족들에게도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고, 유럽인 선교사들도 그 혜택을 받았다.

1660년대 강희제 초년 섭정기의 일시적 반동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긴 재위기간(1661-1722) 동안 페르비스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지켰다. 강희제 말년에 전례논쟁의 여파로 선교활동이 금지된 뒤에도 조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역법 외에도 지도 제작, 건축, 회화 등 수준이 높거나 특색 있는 유럽의 기술이 선교사들의 손을 통해 청나라 조정에서 계속 활용되었다.

17세기 초까지 항해활동을 이끌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17세기 후반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서 비중을 키우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새로운 가톨릭 강국으로 떠오르는 배경 위에서였다. 프랑스는 아직 동아시아 지역에 교역상의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학술과 기술로 중국 조정에 봉사하면서 중국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18세기 중엽까지 중국 고전의 라틴어 번역을 비롯한 중국 소개가 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으로 이뤄져 유럽 지식층에 '중국바람(Chinoiserie)'을 일으켰다. 수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가 음양과 8괘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8세기 중엽까지는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세워놓은 동남아시아-동아시아 교역 판도가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도 그 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7년전쟁(1756-63)의 결과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 지역을 장악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일으키기 시작한 영국인들은 광동의 중국 교역을 크게 늘리면서 다른 유럽국들을 압도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790년대가 되어 영국은 급속도로 성장해 왔을 뿐 아니라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가진 중국 교역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할 필요를 느끼고 사절단을 보냈다. 마드라스 총독을 지낸 죠지 매카트니가 이끄는 사절단이 1793년 북경에 도착했지만 국교 개설에 실패했다. 항간에는 매카트니가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1년 후 티싱이 이끌고 북경을 방문한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매카트니 사절단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없었다. 문제는 청나라 조정이 국교를 개설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가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매카트니를 통해 영국 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귀절들이 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 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요.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요.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요.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신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요."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요.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 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요.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에서 나는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소."

건륭제는 유럽인 관리, 즉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 사정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을 상대하기 위해 천하체제의 틀을 조금이라도 바꿀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점에서 매카트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그의 비망록에는 이런 귀절이 들어 있다.

"중화제국은 낡고 다루기 어려운 초대형 전함과 같은 존재다. 운이 좋아서 뛰어난 선장과 유능한 선원들을 계속해서 만나 왔기 때문에 지난 150년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고, 그 덩치와 생김새만 가지고도 그 이웃들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선장에게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기강이고 안전이고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아마 바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동안 난파선으로 떠 다니다가 어느 날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 배의 바닥 위에 고쳐 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중화제국의 침몰은(상당히 유력한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교역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중국인들의 근면성과 재능은 위축되고 약화되겠지만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중국의 항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나라의 모든 모험가들이 시장을 찾아 중국의 구석구석을 파고들 것이다. 상당 기간 갈등과 혼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정치적으로나 해상활동으로나 상업상으로나 세계 제일의 강국을 이룩한 영국이 이런 변화 앞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고 다른 모든 경쟁자를 앞서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북경의 선교사들이 청나라 조정에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중국에 살고 있으면서 당시의 유럽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그들 자신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까지 건륭제는 60년간 중화제국을 만족스럽게 이끌어오고 있었다. 그의 만족감을 나타내는 '십전(十全)'이란 말이 있다. 변경의 소요를 진압한 열 차례 출정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으로, 중국 전래의 천하체제를 완성 단계로 끌어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매카트니는 세계적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벵골 산 아편의 중국 밀반입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던 사정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몇십 년 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청나라 조정이나 그곳의 선교사들보다 매카트니가 더 정확한 예측을 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