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강신항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일전에 원장님께 메일로 이런 분 모시고 간다고 간략하게 설명해 놓았다. 누가 찾아온다는 말씀을 미리 들으면 좋아하시고, 막상 찾아왔을 때는 미리 들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뜻밖의 기쁨"을 누리시기 때문에 모시고 갈 분이 있으면 원장님께 미리 알려둔다. 그리고 들었던 사실을 겉보기로는 잊어버리시지만, 온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해두시는 것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을 듣자 "그 사람 알지." 하시고, 어떤 분이냐 묻자 "강신항이 강신항이지, 누구야?" 내 메일의 설명대로 "교수님을 '사모님'이라 부르는 분이시라는데요?" 하니까 "그 사람 선생님이 내 남편이야." 하시더라고.
아마 40년도 더 된 일 같은데, 어머니 푸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강신항 그 사람은 아직도 나를 '사모님'이래!" 강 선생님은 원래 아버지 제자 맞다. 사변 당시 국문과 학부생이던 강 선생님이 아버지의 지명 조사 작업을 도와드리고 있었다. 그 사람됨을 아버지께서 아끼신 흔적이 일기에도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아버지가 전사편찬위원회 일을 맡았을 때 조수로 채용,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강 선생님은 아버지를 스승일 뿐 아니라 "목숨의 은인"으로까지 여기신다.
그런데 어머니가 서운하시다는 것은, 강 선생님이 그 후 국어학을 전공해 어머니의 직계 후배가 되고서도 "선생님" 아닌 "사모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선배로 인정해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념하시는 체하면서 사실은 강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알뜰히 받들어드리는 것이 고마우신 것이었다.
점심식사 바로 뒤에 도착했다. 얼굴을 보자 대뜸 "너 누구냐! 강신항이 아니냐?" 하시는 바람에 옆에서 나까지 깜짝 놀랐다. 나중에 강 선생님 모시고 나오면서 여쭤봤다. 어머니가 선생님께 "너"라고 부르신 적이 있냐고. 학생 때도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다고, 아마 기분좋게 해주느라고 그러신 게 아니겠냐며 웃으신다. 학생 시절부터 사모님으로 모셔 온 분께 이제 여든 넘은 나이에 "너" 소리 듣고 정말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원장님께 며칠 전 얘기 들으신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과 관련된 생각을 여러 가지 떠올리신 것이 의식 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오늘 아버지에 관한 말씀이 부쩍 많으셨던 것을 봐도 그렇다.
생각의 출발점은 아들들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눈앞에 있는 이놈부터다. "우리 셋째 아들을 나는 좋아해요~ 이놈이 멍텅구리라서 좋아해요~ 멍텅구리가 나는 좋아요~" 그리고는 눈앞에 없는 놈들도 하나씩 짚으며 "착한 아들", "훌륭한 아들"로 띄워놓은 다음 "아들들 잘 둬서 나는 좋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뭐가 있겠어요~" 하실 때까지도 '김 서방'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 후 사진첩을 펼쳐 보여드릴 때 아버지 얼굴을 짚으며 "생기기도 참 잘 생기셨네~ 세상에 참 잘난 사람이었지~ 씨 받아 줄 만한 남자였지~" 하시는 것을 듣고야, 아, 어머니가 오늘은 그분 생각이 많이 나시는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 사이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 나만큼 궁금증을 많이 갖고 살아온 자식도 많지 않을 것이다. "씨 받아 줄 만한 남자"란 말씀은 근년 내 마음속에 키워 온 한 가지 짐작을 뒷받침해 주는 분명한 힌트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에 입학한 데서 당시의 어머니에 관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다는 것과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재능과 의식을 어떻게 연결시켜 펼쳐 나갈지는 당시 상황에서 무척 막막하셨을 것 같다.
강의실에서 만난 '늙은 학생'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최고의 스승이었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직종으로 꼽히는 금융조합 일을 하면서 아마추어 역사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가 역사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하기 위해 경성제대 학생이 된 아버지는 어머니가 승복할 만한 재능과 의식에다가 현실적으로 뜻을 이뤄나가는 방법론까지 갖춘 분이었으니까.
아버지의 일기가 <역사 앞에서>(1993)로 출간될 때 거기 붙인 어머니의 회고문은 "조국 수난의 동반자"란 제목이었다. 그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는 남편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스승이기도 했는데, 특히 한문을 가르쳐준 은공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봉양 내려가서 첫아이 출산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씨름한 텍스트가 <열하일기>였다. 그냥 읽어내려가는 것은 그가 출근하기 전에 강을 바치고, 그것을 원고지로 옮기는 작업이 낮동안의 할 일이었다."
제천 봉양에서 지낸 것은 해방 직전 학병과 징용 소동을 피해 아버지가 학교를 떠나 금융조합에 돌아가 있을 때였고, 두 분이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큰형을 얻은 곳이었다. 해방 후 아버지 이름으로 <열하일기> 번역본을 출간하다가 완성을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노력이 합쳐진 작업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독자적인 외부 활동을 생각지 않고 '내조'만을 바라보며 지내셨던 모양이다.
출중한 재능과 강렬한 의식을 주체하기 힘들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그저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였다. "동반자"라곤 해도 앞장설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 동반자의 가르침과 이끔에 의지해 살아가며 생활과 학문의 내조, 그리고 그의 "씨 받아주는" 일을 어머니는 당신 몫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분이 세상을 떠나버렸을 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으셨겠지.
그분의 "씨"를 잘 키워내는 것이 어머니에겐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으랴만, 어머니의 과제는 특이한 것이었다. 세속적, 통상적 기준으로 잘되는 것보다 돌아가신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더 절실한 일이었고, "씨"의 타고난 소질을 있는 그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미국인이 되어버린 큰형, 세속을 돌아보지 않는 작은형, 힘겨운 일거리만 찾아다니는 나,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동생, 어머니 자식농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만족하신다. 억지로 자위하시는 게 아니라 "멍텅구리라서 좋아해요~" 식으로 흥겨워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편안한 마음자리를 얻으셨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며 그분을 위해 기뻐할 뿐이다.
혈연 없는 사이로 강 선생님만큼 절실하게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한 분이 별로 없다. 2년 전 그분이 찾아왔을 때는 어머니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실 때였다. 오랜만에 대하시는 얼굴에 "너 누구냐!", 아버지가 강 선생님께 하셨음직한 말씀을 대신 해주신 것이 아닐까? 요즈음 어머니 생각이 얼마나 명민하신가를 염두에 두고 떠올리는 상상이다.
아침에 혜화동 로타리에서 차에 오르자마자 "도서 반납하네." 하며 건네주신 꾸러미에도 여간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아니다. 1939년 간 <임꺽정전> 네 책. 전쟁 터지던 날 아버지가 빌려주셨던 책을 내게 반납받아 달라시는 것이다. 받아는 놓았다. 그러나 곧 형들 양해를 얻어 선생님께 다시 드리고 싶다. 그분께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뻔히 아는데.
<월간 불광> 3월호에 보낼 글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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