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오늘이 화요일이면 지금 강의시간이 다 됐잖아?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나? 조금 늦겠지만 할 수 없지. 근데 들어가서 뭘 얘기하지? 두 시간 연속강의인데, 평소 실력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가는 길에 구상이라도 좀 해놔야지.
전번 시간에 무슨 얘기 했더라?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아니, 그러고 보니까 지난 주엔 강의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버렸네! 이럴 수가 있나!
그것만도 아냐! 개강하고 몇 주일을 그냥 지내버렸어! 이거, 오늘 강의가 아니라 이번 학기 강의를 어떻게 넘길지가 막막한 일이잖아!
애고~ 내가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 됐나. 오늘 두 시간 때울 일만 해도 벅찬데, 몇 주일씩 개강부터 늦춰져 있으니 이 일을 어쩌나.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구나. 이렇게 대책 없는 채로 강의실 들어가면 뭘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도착하면 강의 끝날 시간이네? 이렇게 또 한 주일 날리고, 다음 주 이 시간에는 한 주일의 짐이 더 얹혀져 있겠지? 어찌하나~
걱정은 계속 이어지는데, 이제부터는 여기까지처럼 선명하지 않다. 꿈속에서도 배 째라는 심정이 되어 잠속으로 빠져버리는 게 아닐지. 이런 형태의 악몽을 간간이 꾸게 된 것이 요 한 이태 사이의 일이다. 이 꿈을 꾼 생각이 아침에 나면 한참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 마흔 나이에 학교를 떠나면서 강의를 그만둔다는 사실은 그저 기쁜 일이었다. 내 할 일은 학문이고, 강의는 학문활동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제도적인 필요악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학교를 떠남으로써 안정된 수입과 제도적 지원을 잃어버리는 손실을 상쇄해 주는 가장 중요한 보상이 '강의 해방'이었다.
학교 떠난 뒤 먹고 살기 위해 신문사, 출판사 일도 하고 번역 일도 했다. 그래도 교수로서 강의하는 것처럼 매여 있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공부에 노력을 집중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짧은 시간 내에 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일이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학문의 '자유'라는 측면에 집착했던 것이다. 방해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학문활동의 가치는 나 혼자의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학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개인'의 작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흐를 만한 여건이 있기는 있었다. 역사학계에서 연구성과를 인정하는 기준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연구자 본인도 의미를 모르는 사실 천착은 가치를 인정하면서 역사로부터 의미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외면받는 풍조, 학문의 존재 의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의미 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교육의 의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역사학을 전공하겠다고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들, 실제로 절대적인 목적은 대학 졸업장을 따는 것이다. 뭐든 전공을 해야 하니까 편의상 역사학을 고른 학생들이다. 내가 임하고 있던 대학교육은 제도적 사기 행위였고, 학생들은 그 피해자였으며, 나는 사기꾼의 종범으로 떡고물 받아먹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뛰쳐나갔고, 그 때 그 때 공부 단계에 적합한 밥벌이를 할 만한 게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하며 20년간 멋대로 공부해 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강의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찾아오는 것은 내 공부가 그런 대로 무르익어 왔다는 안도감이다. 학문이 개인의 일로 끝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학문의 가치가 자유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칠 만큼 무르익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년 들어 내 공부가 사회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비쳐 보여주는지에 스스로 관심과 노력을 모으게 되는 것은 학문이 사회 안에서 생각을 주고받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덕분이다.
4년간의 중단 뒤에 2년 전 재개한 <프레시안>의 "페리스코프"는 내게 강의실이 되었다. 전에 쓰던 칼럼은 아웃사이더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었다. 근년 써 온 글은 독자들과 고심과 모색을 함께 하는 현장이다. 이런 강의라면 할 만하다.
병을 고치는 출발점은 증세의 자각이다. 섬뜩한 악몽에 수시로 시달리면서도 이런 불안감을 느끼게나마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학문을 했다는 사람에게 가르칠 자리 못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생각도 안하면서 긴 세월 잘~ 보냈다.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 없이 지낸 덕분에 밑천을 이만큼이라도 쌓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풀어놓을 때가 되었음을 마음 밑바닥에서 알려주는 것이 이 악몽이고 이 불안감 아니겠는가.
<매뉴얼> 창간호에 보낸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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