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몸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늙으면 몸을 달래고 돌봐줘 가며 살게 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씀이 근래 들어 절실하게 느껴진다. 작년 봄 혈당 문제가 드러난 것이 확실한 경고장이다.

생각날 때마다 내 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커녕 신경조차 별로 쓰지 않으면서, 특별히 혹사시키지는 않아도 너무 살펴주지 않고 살아 왔는데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작년 초에 문제를 느끼기 시작하고도 매주 한 차례 산에 가 걷는 습관을 세운 이후 많이 또 좋아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더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마침 이 전무가 자기 다니는 한의원을 권해 줬다. 잠깐 설명을 들어도 오 선생이란 분이 믿음직한 의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당동은 매주 두 차례 다니기에 너무 멀다. 고심 끝에 이 전무에게 부탁했다. 오 선생 아는 분 중에 일산 쪽에 추천해 줄 만한 믿음직한 분이 있는지 여쭤봐 달라고. 설 전에 연락이 왔다. 그래서 지난 주 일을 끝내 놓은 뒤 화정역 부근으로 한 선생을 찾아갔다.

과연 믿음직하다. 불필요한 말 별로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문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믿음직한" 의사를 가리는 데 나는 두 가지 기준을 생각한다. 첫째는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닐 것. 둘째는 독단이 심하지 않을 것. 그런데 이 두 가지 기준이 서로 상치되는 면이 있다. 의사질 하면서 돈에 환장하지 않으려면 주견이 분명해야 하는데, 주견이 분명하다는 것은 독단이 심하기 쉬운 조건이다. 주견이 분명하지만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잘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몸도 마음도 그런 사람, 자신을 잘 돌아보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

진찰 과정에서 나누는 몇 마디 이야기에서도 권위의 부담감 없이 '대화'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한 선생도 환자 중에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사람 마주친 게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진찰이 끝날 무렵 한 가지 기분좋은 말을 덧붙인다. "선생님 말씀하시는 태도가 아주 유연하십니다. 그런 태도가 건강에도 좋은 것이지요. 원래부터 성격이 그러신 건가요?"

이것도 진찰 내용으로 유의할 만한 사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자극이 되는 말씀이다. 원래는 학문적으로도 엄격하고 인간관계에도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는데, 약 3년 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으로 매사를 전보다 넓게 보고 뒷쪽까지 들여다보는 쪽으로 습관이 바뀌어 왔다는 대답을 하면서, 이 변화의 의미를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장 뚜렷한 계기는 어머니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모자간의 관계는 어머니 쓰러지신 후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그와 나란히 내 일과 생활의 모든 면에 변화가 일어나 왔음을 이제 돌아보며 확인할 수 있다. 주변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몇 해 전과 달라진 것 같고, 무엇보다 글쓰기의 자세가 바뀌었다.

지금 매달려 있는 <망국 100년> 작업, 몇 해 전 같으면 이런 식으로 안 했다. 내 생각 중에서 꼬투리 잡힐 여지 없도록 확실히 다듬어낸 것이 아니면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몰려 덜 다듬어진 생각이라도 열심히 내놓는다. 어찌 보면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독자를 객체화하지 않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자 하는 측면을 나 자신 분명히 느끼는 것이다. 독자에게 필자가 권위자로 임하기보다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관계를 앞세우게 된 것이다.

유연한 태도가 건강에도 좋은 것이라는 한 선생 말씀을 요긴하게 마음에 새긴다. 몸을 잘 보살핀다는 것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생각한다. 아주 망가져버리기 전에 추스를 수 있다는 것은 체질이나 심질(心質)이나 괜찮은 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부모님께 새삼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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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