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체제(capitalism)란 구조와 운용에 자본이 중심적 역할을 맡는 사회경제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이란 생산의 요소 중 노동력을 제외한 것, 즉 물적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등 경제학에서 정의를 시도하지만, 그런 엄밀한 정의보다 "권력의 성격을 띨 만큼 규모가 큰 재산" 정도로 대충 생각하는 것이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두루 살펴보는 데 더 무난할 것 같다.
문명 발생 이전의 권력은 신체적 완력에서 출발했다. 문명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통해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사회관계가 복잡해지면서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양해졌다. 사람들의 믿음을 모을 수 있는 인품,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혜, 사람들에게 혜택을 나눠줄 수 있는 재력 등이 물리적 힘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합되어 상황에 적합한 권력의 형태를 빚어냈다.
권력의 요소들을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으로 크게 나눌 때, '야만'에 대비되는 '문명'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정신적 힘에서 나타난다. 물질적 힘에만 의존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는 문명의 질적 발전은 물론, 문명사회의 양적 규모도 제한된다. 평면적 대결에 쏠리고 패배자의 입장이 배제되기 쉬운 물질적 힘의 속성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물질적 힘이 완전히 통제되는 완벽한 문명사회가 존재할 수도 없다. 문명이 어느 수준 이상 발전한 사회에서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은 긴장된 평형상태를 이룬다. 사회의 번영이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물질적 힘이 득세하고, 그로 인한 파괴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정신적 힘이 다시 주동적 역할을 찾는 과정이 되풀이된다.
봉건체제를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자. 충성과 보호를 교환하는 봉건 계약관계는 기본적으로 힘의 균형 위에 이뤄지는 것이지만, 이 균형은 수시로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조그만 상황 변화로 인해 관계 자체가 뒤집히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나 도덕적 의무감 등 정신적 힘이다. 그런데 안정된 관계가 오래 유지되는 가운데 계약 주체들의 물질적 힘이 어느 수준 이상 축적되면 이성적 판단이 호전적인 쪽으로 옮겨가면서 도덕적 의무감의 억제를 벗어나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 봉건체제가 무너져 갔다. 새로운 질서의 원리를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모색한 결과 물질적 힘을 중시하는 법가 사상과 정신적 힘을 중시하는 유가 사상을 절충한 관료체제의 원리가 세워져 천하국가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중간권력층을 관료의 위상에 묶어놓는 관료체제는 농업사회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권력체제로서, 규모가 큰 정치조직이 오랫동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발판이 되었다.
관료체제의 중국에서 문(文)이 무(武)보다 우대받은 것은 체제 유지의 근거로 정신적 힘의 비중이 물질적 힘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민(四民)의 신분 관념에서 상(商)이 맨아래에 깔린 것도 물질적 힘을 억누르는 노력으로 생각된다.
사민 중 지배계층인 사(士)를 제외한 농-공-상은 1차, 2차, 3차 산업 종사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농업문명 초기에는 1차 산업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가 사회 발전에 따라 2차, 3차 산업의 비중이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중국에서 전국시대에 상공업이 크게 발달해 제후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거부들이 나타난 것은 <사기> "화식열전"에 나타나 있다. 진 시황 초년의 실력자 여불위도 상업자본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한 인물이었다.
"사민"이란 말은 <서경> "주관"편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당시의 봉건체제 아래서는 공인과 상인이 영주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어 농민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후의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상인 계층의 물질적 힘이 크게 자라났지만, 중국 문명권의 정치사회 이념이 이 힘을 종속적 위치에 묶어놓았다. 폭력적인 물질적 힘을 억제하는 정치의 역할이 주먹의 힘뿐만 아니라 돈의 힘에 대해서도 작용을 계속한 것이다.
몰론 전통시대의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돈의 힘이 질서에 도전하는 일은 부단히 일어났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 '검은 돈'이 문제를 일으키는 정도였지, 그 힘이 사회 전체를 뒤덮고 질서의 근본을 뒤집는 일은 없이 근세에 이르렀다. 왕권이 중간권력의 폭력을 통제함으로써 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동아시아 전통질서의 핵심으로 지켜진 것이다.
우리는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정치체제가 나쁜 것이었다고 배우며 자라났다. 첫째는 민주적이지 못한 전제정치라는 이유고, 둘째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폐쇄성이 이유다. 지금 돌아보면 두 가지 이유가 모두 근대적 기준에 얽매인 편협하고 자의적인 관점으로 생각된다. 넓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시행된 체제의 득실을 살피는 데는 더 대범한 관점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의 여불위의 활동과 그 백년 후 오초칠국의 난에서 상업자본의 힘이 천하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자라나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천여 년 후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기본 기능이 재정 운용에 집중된다는 '재정국가론'이 적용되기에 이른다. 무력국가에서 재정국가로의 전환은 국가가 통제할 물리적 힘의 중심이 주먹의 힘에서 돈의 힘으로 바뀐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돈의 힘도 동아시아 전통체제 아래서는 통제의 대상으로서 질서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돈의 힘이 체제의 주축을 이루는 자본체제가 성립되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11~13세기 이슬람권의 초국적기업 '카리미'는 자본체제에 상당히 접근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얼마만큼 접근한 것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그 현상이 해소되었는지는 아직 조사하지 못했다. 돈의 힘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키우고 나아가 체제의 주축으로 자리 잡는 현상이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근세 유럽이다.
근세 유럽에 정치사상의 축적이 빈약했다는 점이 자본체제 성립을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 생각된다. 로마제국시대 이후 16세기 초 <군주론>이 나오기까지 유럽에서 본격적 국가론이 나오지 않고 있었던 사실은 국가 기능이 미개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주먹의 힘이 별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급격한 경제 발전에 따라 돈의 힘이 마음껏 자라나며 활개를 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7세기 이후 유럽 정치사상의 발전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인간의 가치를 파악하는 여러 시각 가운데 유독 '재산'이 부각되어 '생명'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부터 특이한 것이다. '생명'이야 워낙 기본 중의 기본 가치지만, '명예', '인격'이나 '존엄성'을 '재산'보다 앞세우는 사회들도 있었다. 자본체제 형성을 향한 움직임이 이 시대 유럽 역사 전개의 배경이었고 재산을 가진 계층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움직임은 소유권의 절대화에서 시작된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가가 절대적 소유권을 보장해 주지 않은 것은 민간의 무기 보유를 통제한 것과 같은 뜻이다. 질서 유지를 저해하는 폭력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 보유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미약하던 근세 유럽에서는 소유권의 절대화에도 별 장애가 없었다.
자라나는 돈의 힘 앞에 유일한 장애물은 주먹의 힘이었다. 이것도 장애물만은 아니었다. 돈의 힘이 자라나는 초기 단계에서는 주먹의 힘과 경쟁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점차 협력의 양상이 늘어나고 돈의 힘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식민지 개척 활동이 두 힘의 협력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주먹의 힘과 돈의 힘을 통제하는 국가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권신수설이 대표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 의지한 왕권신수설은 효력에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지만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혁명(1789)이라는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다. 잉글랜드에서는 17세기 초 스튜어트 왕조 군주들의 왕권신수설 시도가 잉글랜드 내전(1641-51)으로 초전에 박살나고 말았다. 주먹의 힘과 돈의 힘이 일찍부터 결탁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1801년 토리당 의원들이 휘그당 의원들을 "자유주의자(liberals)"라 부른 데서 자유주의의 실체가 나타났다. 당시 토리당 의원들이 이 말을 쓴 것은 혐오감을 담기 위해서였다. 전통과 질서를 무시하는 "방종한 자들"이란 뜻이었다. 휘그당 의원들이 "그래, 우린 자유주의자야!" 하고 냉큼 받아친 것은 계몽사상이 '자유'의 관념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유'와 함께 19세기 유럽에서 맹목적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 '진보'였다. 반대로 '정체(停滯)'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바뀌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바뀌지 않으면 무조건 나쁜 것, 이것은 역사를 무한한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Whig interpretation of history) 특정한 세계관에 입각한 관념이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돈의 힘을 국가권력의 통제로부터 풀어주었고, 진보주의는 돈의 힘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돈의 힘이 확장되고 강화되는 동력을 제공했다.
돈의 힘이 체제의 중심축 역할을 하려면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을 필요로 한다. 요즘 말로 파이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파이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야 끌고 가는 자들이 강한 동기를 가질 수 있고 끌려가는 자들의 저항도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지만 시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그 모순을 잠복시킬 수 있다. 불황이 닥치기만 하면 체제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바로 제기된다.
대항해시대 이후 4백년 동안 유럽 자본가들은 빠른 속도의 시장 확대 상황을 누렸다. 초기에는 해외 교역과 약탈이 시장을 키워주었고, 자본 축적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제조업 발전이 시장 확대를 더욱 가속시켰다. 초기의 식민지는 자원 약탈 수준의 간단한 이용 대상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의 식민지는 원료 및 노동력 조달과 완제품 소비시장 등 이용이 입체화하면서 가치가 심화되었다. 산업혁명으로 개발된 대량생산 기술은 자원의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경제 성장을 더욱 촉진, 자본의 대형화와 권력화를 도와주었다.
국가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운영한 자본체제는 경제 성장의 경쟁에서 우위를 과시했다. 우열은 전쟁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체제를 도입하고 강화하는 변화가 19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중부 유럽까지 확산되었다.
19세기 자본체제 구축의 필수적 요소는 산업화와 식민지 획득이었다. 자본체제의 치명적 한계는 그 성립을 위해 경제의 고속성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20세기 후반에는 그 한계가 환경과 자원 방면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19세기 후반에 먼저 닥친 한계는 식민지를 더 확보할 여지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체제를 구축한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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