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법(曆法)은 중국 천하체제의 상징적 요소의 하나였다. 시간을 관리한다는 일이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의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를 새로 열 때 그 왕조의 역법을 반포하는 것이 천명을 확인하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래서 왕조마다 자기 역법을 가지게 되었지만, 역법의 원리 자체가 바뀌는 일은 별로 없고, 기존 역법에서 역원(曆元) 등 상수(象數)만을 바꾸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 역법의 원리가 크게 바뀐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도입된 인도 천문학을 가미한 일이 있었고, 원나라 때 도입된 이슬람 천문학을 가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유럽 천문학을 가미하는 역법 변화가 일어났다.

1583년 이래 중국에서 지내며 현지 사정을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된 마테오 리치는 유럽 천문학을 중국 역법에 도입할 경우 역법을 중요시하는 중국 풍속에 따라 유럽 문명이 중국인의 큰 존경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학과 천문학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던 리치는 그 방면 고급 전문가의 파견을 예수회 상급자들에게 꾸준히 요청하는 한편 역법 접근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기하원본> 번역을 도운 서광계가 역법 편찬사업을 이끌었다. 레이 황(황런위)의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에 보이는 것처럼 말기의 명나라 왕조는 마비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서광계 같은 관료들은 왕조의 중흥을 위해 대대적 개혁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새 역법 편찬에는 개혁의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리치가 죽은 후 요하네스 슈렉, 아담 샬 등 고급 과학자들이 선교사로 오자 서광계는 그들의 힘을 빌려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해 냈다. (1634)

숭정역법이 몇 해 시행되지도 못하고 왕조가 바뀌자 청 왕조는 그 내용을 활용해 시헌력(時憲曆)을 만들었다. 아담 샬 등 과학자 선교사들은 그 운용을 위해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민족 출신인 청 왕조는 다른 이민족들에게도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고, 유럽인 선교사들도 그 혜택을 받았다.

1660년대 강희제 초년 섭정기의 일시적 반동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긴 재위기간(1661-1722) 동안 페르비스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지켰다. 강희제 말년에 전례논쟁의 여파로 선교활동이 금지된 뒤에도 조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역법 외에도 지도 제작, 건축, 회화 등 수준이 높거나 특색 있는 유럽의 기술이 선교사들의 손을 통해 청나라 조정에서 계속 활용되었다.

17세기 초까지 항해활동을 이끌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17세기 후반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서 비중을 키우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새로운 가톨릭 강국으로 떠오르는 배경 위에서였다. 프랑스는 아직 동아시아 지역에 교역상의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학술과 기술로 중국 조정에 봉사하면서 중국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18세기 중엽까지 중국 고전의 라틴어 번역을 비롯한 중국 소개가 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으로 이뤄져 유럽 지식층에 '중국바람(Chinoiserie)'을 일으켰다. 수학자 라이프니츠(1646-1716)가 음양과 8괘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18세기 중엽까지는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세워놓은 동남아시아-동아시아 교역 판도가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도 그 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7년전쟁(1756-63)의 결과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 지역을 장악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일으키기 시작한 영국인들은 광동의 중국 교역을 크게 늘리면서 다른 유럽국들을 압도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790년대가 되어 영국은 급속도로 성장해 왔을 뿐 아니라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가진 중국 교역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할 필요를 느끼고 사절단을 보냈다. 마드라스 총독을 지낸 죠지 매카트니가 이끄는 사절단이 1793년 북경에 도착했지만 국교 개설에 실패했다. 항간에는 매카트니가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1년 후 티싱이 이끌고 북경을 방문한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매카트니 사절단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없었다. 문제는 청나라 조정이 국교를 개설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가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매카트니를 통해 영국 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귀절들이 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 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요.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요.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요.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신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요."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요.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 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요.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에서 나는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소."

건륭제는 유럽인 관리, 즉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 사정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을 상대하기 위해 천하체제의 틀을 조금이라도 바꿀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시점에서 매카트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그의 비망록에는 이런 귀절이 들어 있다.

"중화제국은 낡고 다루기 어려운 초대형 전함과 같은 존재다. 운이 좋아서 뛰어난 선장과 유능한 선원들을 계속해서 만나 왔기 때문에 지난 150년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고, 그 덩치와 생김새만 가지고도 그 이웃들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선장에게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기강이고 안전이고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아마 바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동안 난파선으로 떠 다니다가 어느 날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 배의 바닥 위에 고쳐 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중화제국의 침몰은(상당히 유력한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교역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중국인들의 근면성과 재능은 위축되고 약화되겠지만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중국의 항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나라의 모든 모험가들이 시장을 찾아 중국의 구석구석을 파고들 것이다. 상당 기간 갈등과 혼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정치적으로나 해상활동으로나 상업상으로나 세계 제일의 강국을 이룩한 영국이 이런 변화 앞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고 다른 모든 경쟁자를 앞서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북경의 선교사들이 청나라 조정에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중국에 살고 있으면서 당시의 유럽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그들 자신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까지 건륭제는 60년간 중화제국을 만족스럽게 이끌어오고 있었다. 그의 만족감을 나타내는 '십전(十全)'이란 말이 있다. 변경의 소요를 진압한 열 차례 출정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으로, 중국 전래의 천하체제를 완성 단계로 끌어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매카트니는 세계적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벵골 산 아편의 중국 밀반입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던 사정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몇십 년 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청나라 조정이나 그곳의 선교사들보다 매카트니가 더 정확한 예측을 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어제 찾아뵙기 전에 꼭 여쭤보려고 준비한 주제는 역사 발전의 법칙이었다. 나는 역사 공부에서 '법칙'을 논하는 데 대한 반감을 키워 왔는데, 그 반감이 어떤 근거를 가진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역사의 법칙에 대한 반감은 근대성에 대한 반감에서 번져나온 것이다.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은 근대적 사고의 핵심이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바탕을 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인간의 존재를 어떤 법칙이든 법칙을 통해 받아들이려 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컴퓨터의 등장이 근대적 사고를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시뮬레이션 기능 때문이다. 생태 연구 시뮬레이션 결과에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식물,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폐쇄된 공간에 넣고 분포의 변화를 추적한 시뮬레이션에서 똑같은 초기 투입으로도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경로 의존성이라는 요인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새로운 요인을 파악해 설명을 넓혀 나가는 것이 '과학적 설명'의 요건은 충족시키더라도 '근대과학적 설명'에서는 벗어나는 것 같다. 근대과학적 설명이라면 면도날의 법칙이 요구하는 것처럼 단순명쾌해야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서울이 점령된 며칠 후의 일기(50. 7. 7)에서 점령 당국이 요구한 진술서의 "사상 경향" 항목에 "역사적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우지지 못하여 온건한 학구로 지냈음"이라 써 낸 일을 적었다. 마르크시스트 사관이 요구하는 역사의 "법칙"에 대한 믿음까지 따라가지는 못해도 "필연성"에 대한 믿음으로라도 성의를 보여야 했던 상황으로 이해된다. '과학성'을 숭상한 것은 마르크시스트 사관만이 아니라 근대 역사학에서 보편적 현상이었다. 환원주의적 근대과학의 자세가 사료를 다루는 데는 몰라도 역사의 해석에까지 적용된 것은 일종의 '유사과학'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근대적 성향에 대한 반발로 역사학의 과학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 또한 지나치는 문제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근래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청한 것인데, 역시 선생님도 많은 고민을 해 오신 문제였다. 과학성에 대한 과신을 경계하면서도 믿음을 키워오신 대상은 있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역사 발전의 '논리'라고 표현하셨는데, 설명을 들은 후 내가 그것을 '원리'라고 부르면 어떨까 여쭈니 잠깐 생각해 보시고 일리 있는 표현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생각 들은 것을 이 자리에서 세세히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미묘한 주제이기 때문에 직접 글로 정리해서 보여주지 않으신 것을 제3자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설령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녹취해서 옮겨놓는다 하더라도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나타내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숙제 한 덩어리를 더 쌓아놓았다. 법칙이든 논리든 원리든 역사학의 뼈대에 대한 생각을 익히는 데 애를 써야겠다. 과학에 대한 근대적 맹신을 비판하는 데 만족하고 지내온 생각을 하니, 참 속 편하게 살아 왔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
 


1480년대에 시작된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지리지(地理誌)' 범주의 서적이 수없이 나타났다. 1510년대부터 유럽인의 왕래가 시작된 동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보를 담은 서적들도 있었지만, 16세기 중에는 아직 접촉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14세기 초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넘어서는 대작이 없었다. 1610년대에 와서 유럽인의 주목을 널리 끈 두 권의 책이 나왔다.

두 책의 성격은 서로 판이한 것이었다. 하나는 지난 주에 이야기한 마테오 리치의 <중국지(원제: 중국에서의 예수회와 기독교 이야기)>로, 1610년 리치가 죽은 후 유고를 후배 예수회사들이 정리해 1615년 출판한 것이다. 초판은 라틴어로 나왔고, 프랑스어판,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이탈리아어판, 영어축역판이 그로부터 10년 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리치의 책이 27년간의 중국 체류 동안 체계적인 관찰과 정리를 축적한 결과임에 반해 1614년에 나온 페르낭 멘데스 핀토(1509-83)의 <순례기(Peregrinacao)>는 1537에서 1558년까지의 모험담을 엮은 것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핀토의 책에는 신빙성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본인이 그 기간 중 열세 번 포로로 잡히고 열아홉 번 노예로 팔린 사연이 담겨 있으니까. 그 이름 Fernao Mendes Pinto에 빗대어 "Fernao, Mentes? Minto!(페르낭, 뻥이지? 그래, 뻥이야!)" 하는 우스개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핀토의 이야기 대부분은 여러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을 자기 경험처럼 극화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중 일본 여행 이야기는 정황과 증거가 상당히 부합하기 때문에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543년 유럽인으로서 일본을 처음 방문해 교역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1549년 예수회사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일본 입국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 규슈 남부의 영주 오토모 소린을 개종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16세기에 명나라는 일본과 교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는데, 은의 교환가치가 일본보다 중국에서 갑절 가까이 높았다. 그래서 밀무역이 성행했고, 이 밀무역을 맡은 것이 왜구였다. 왜구의 본업은 해적이라기보다 무장밀수단이었던 것이다. 핀토의 일본 방문 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와 일본 사이에 카라카선을 운항, 이 무역의 상당 부분을 맡았다. 1630년대까지 계속된 이 무역선은 포르투갈인의 현지 교역 사업 중 가장 수익성 높은 노선의 하나였다.

포르투갈인의 무역에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해외 사업의 정당성과 권리를 교황이 뒷받침해 주는 댓가로 포르투갈 왕은 선교 사업을 지원할 의무를 가졌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상인과 모험가들은 관리들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선교사들을 우대했고, 선교사들은 무역에 투자해 선교 비용을 확보했다.

정치적 혼란이 극도에 달해 있던 16세기 중엽의 일본에 상인과 선교사가 힘을 합친 포르투갈인의 진출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3년 중국 선교가 시작되어 수십 명의 개종자를 얻기 시작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교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일부 서부지역 영주들이 수천 명에서 수만 명까지 영내 주민을 몽땅 이끌고 개종하는 사례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전란에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도 새 종교에 상당한 호응을 보였다.

1590년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에 접근해 가면서 포르투갈인들에게(선교사와 상인 양쪽에) 불리한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고 1610년대에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안정돼 가면서 기독교 탄압이 강해진 데 비춰 보면 1580년대까지의 정치적 혼란이 포르투갈인의 활동을 위한 틈새를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중국의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불신해서 교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인의 중개무역을 계속해서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민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이 포르투갈인의 역할을 넘겨받게 된다. 두 나라 상인들은 동인도회사를 배경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교황권과 결탁된 왕권의 배경 위에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처럼 선교 사업의 부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막부 당국은 손쉬운 통제를 위해 무역 주체를 일원화하고 싶어 했고, 영국이 양보함으로써 네덜란드인들이 이후 2백여 년 동안 일본의 서양인 접촉을 독점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1644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꾸준히 늘어나다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례논쟁의 결과로 대폭 위축되기에 이르는데, 일본에서는 1640년경부터 해금(海禁) 정책이 강화되어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해금 정책을 후세에 '사코쿠(鎖國)'라 흔히 부르게 되었는데, 그 원래 의미는 무역에 대한 막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것이지 국제적 고립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인에서 네덜란드인으로 이어지는 일본 무역활동은 중국의 해금 정책으로 제약받는 중일간 무역을 중개하는 것이었다. 1640년경 명나라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중개무역의 필요도 줄어들게 되었으므로 막부가 유럽인의 활동을 나가사키의 매립지 데지마(出島)라는 좁은 구역 안에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가사키에는 중국인의 상선도 기항했고 다른 무역 상대인 조선, 유구, 아이누와의 교역은 각 방면 영주들에게 맡겨졌다.

1609년부터 히라도(平戶) 섬에 거점을 두고 무역활동을 시작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41년 데지마로 옮긴 후로는 나가사키 부교(奉行)를 통해 막부의 엄밀한 감시 아래 놓여졌다. 일본인이 데지마에 들어가는 것도 네덜란드 인이 데지마 밖에 나오는 것도 모두 허가를 받아야 했고 거주 인원도 제한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의사 한 명을 데지마에 배치했는데, 일본 란가쿠(蘭學)의 촉매가 된 것이 의사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란가쿠의 주춧돌을 놓은 것은 1649-51, 2년간 체류한 카스파르 샴베르거였다. 공교로운 사정으로 그는 체류기간의 태반을 에도에서 지냈고, 그 동안 유럽 의술의 장점을 일본 지배층에 널리 인식시켰다.

샴베르거 이래 유럽 의술에 대한 존중은 란가쿠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1720년까지 서양 책의 출판 금지령은 데지마의 고립성과 함께 서양 지식 보급의 장벽이 되었다. 1년에 한 차례 쇼군에게 인사 올리러 에도에 가서 해외 정세와 유럽 사정을 보고하는 일 외에는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이 일본 지배층과 접촉을 가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1720년 출판 금령이 해제된 후 서양에 관한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다. 그 대부분은 얄팍한 호기심에 영합하는 것이었지만 더러 중요한 작업도 있었다. 스기타 겐파쿠가 일군의 역관과 의사들을 이끌고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번역해 1774년 내놓은 <가이타이신쇼(解體新書)> 작업은 대단히 치밀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어의 "neus"가 "코"를 뜻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는 데도 며칠간의 토론을 거쳤다고 한다. 1798년에 나온 <레키쇼신쇼(曆象新書)>도 유럽의 고전물리학을 제대로 옮겨온 치밀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17세기 중국의 서학서는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었음에 반해 18세기 중엽 이후 일본에서 나온 란가쿠쇼(蘭學書)는 일본인들이 고르고 번역한 것이었다. 자발성이라는 측면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중국 서학서의 치밀한 기획과 비교하면 체계성이 떨어지고, 유럽 사상의 핵심 요소보다 흥미거리나 실용적인 주제에 치우쳐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근대화의 성공에 자부심이 넘칠 때, 란가쿠의 존재를 성공의 중요한 한 가지 이유로 내세우는 풍조가 일어났다. 서양문명에 대해 개방적인 풍조가 있어 왔기 때문에 오만한 중국이나 폐쇄적인 조선과 달리 일본이 근대적 문물의 도입에 쉽게 나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일리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개항을 앞둔 19세기 초반 란가쿠가 펼쳐진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란가쿠의 전통과 메이지유신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샴베르거가 씨앗을 뿌렸다면 가장 큰 열매를 거둔 것이 필립 폰 지볼트(1796-1866)라 할 것이다. 동인도회사 파견 의사로 1823에서 1829년까지 6년간 일본에 체류한 폰 지볼트는 1824년에 나루타키숙(鳴瀧塾)을 열어 막부에서 보낸 50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막부에서 이 학교를 열어준 목적은 의술의 전수에 있었지만 실제 교육과 활동은 의술에 제한되지 않아서, 폰 지볼트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박물학 분야를 중심으로 유럽 학술을 폭넓게 접수한 '란가쿠샤(蘭學者)' 집단이 자라났다.

그러나 이 란가쿠샤 집단은 개항에서 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개방과 근대화 과정에 큰 공헌을 남기지 않았다. 1839년 해금정책의 강화에 반대하는 일군의 란가쿠샤들이 투옥된 이른바 '반샤노고쿠(蠻者獄)' 외에는 정치에 관계된 일이 없고, 1854년 개항 이후 서양인들과의 접촉면이 넓어지자 란가쿠샤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반면 폰 지볼트는 란가쿠샤들의 도움으로 수집한 일본 동식물의 방대한 표본을 유럽으로 가져가 유럽인의 일본 연구에 크나큰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의 길에 중국이나 조선보다 쉽게 뛰어든 데는 물론 일본의 특이한 조건들이 작용했다. 그러나 란가쿠의 존재를 중요한 조건으로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란가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배경조건이 메이지유신에도 나란히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명확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원리인 유교 이념의 뿌리가 일본에서는 그리 깊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주자학이 들어와 통치 이념으로 세워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중국과 조선에서처럼 지배계층의 사고가 유교 이념의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개항 전에는 란가쿠가 이단이나 사학으로 탄압받지 않을 수 있었고, 개항 후에는 유교 이념이 쉽게 포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항 전 일본이 데지마에 서양인과의 교섭을 제한한 것은 중국이 광저우와 마카오에 서양인의 활동을 제한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두 나라를 비교한다면 중국보다 일본이 해외의 상품과 지식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중국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대외교섭의 절실한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란가쿠가 중국의 서학보다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초반부터 중국과 일본에 왕래하기 시작하고서도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을 찾아오지 않은 것은 조선의 존재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중국의 사치품이나 일본의 은 같은 교역의 뚜렷한 목표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이 17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서학서를 보고 서학 운동을 일으킨 것은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깊이 있는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데지마 한 모퉁이에라도 서양인이 계속 상주한 일본에서 일어난 란가쿠가 실용적인 주제나 얕은 호기심을 넘어서지 못한 것에 비하면 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조선의 서학은 사상적 대안에 대한 더 진지한 검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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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