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교수가 또 민망한 꼴을 보였단다. 어느 분 빈소에 문상 가서 사오정 플레이를 했다 하니, 개인적 망신일 뿐이지 공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망발의 성격이 마음에 많이 걸린다.

왜 그렇게 강박에 몰리는 걸까? 청문회에서 731부대가 독립군 부대 아니냐 대답해서 보는 사람들의 어이를 실종시키더니, 왜 그렇게 자상한 체하느라고 남의 빈소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어야 하나?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공자도 말했지 않나? 국으로 가만 있으면 2등은 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그분의 '촌놈 정신'이 그립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 얼굴 본 게 98년도였나? 그 뒤론 메일만 더러 주고 받았을 뿐, 얼굴 본 기억이 없다. 하여튼,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그분이 한은 총재 물망에 오르내릴 때였는데, 그분 연구실에 찾아가 둘이 앉았다가 그 얘기가 나오니 이런 취지의 말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 같은 촌놈이 서울대 교수만도 과분한데, 너무 분수에 넘치는 일 할 생각 없다. 교수 노릇 잘하고 있다가 금융통화위원이라도 맡을 기회가 있으면 학교 밖의 사회를 위해서도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진짜로 촌놈들을 좋아한다. 대학 시절 이후의 교우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주류의 편안함보다 변두리의 활력에 더 끌리는 기질일까? 주견이 강하신 홀어머니 밑에 자라면서 헝그리정신이 몸에 배어서일까? 게으른 성품 때문에 스스로 긴장감을 필요로 해서일까? 언젠가 프레시안 이근성 고문 말이 생각난다. "김 선배는 한국 사회의 중심부로부터 바깥으로 바깥으로 도망쳐 나오기만 해 온 사람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 사회의 '주류'가 가진 구조적 문제를 아직 철이 없을 때부터 은연중에 감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덕성의 취약으로 나타나는 이 구조적 문제에 근년 공부 방향이 쏠리고 있는데, 아마 경기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이 문제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운찬 교수처럼 분수를 생각하는 촌놈이 좋았던 것일 게다.

청문회를 보다가 참지 못해 <프레시안>에 올린 "공개편지"에서 "형님, 어찌 그리 망가지셨습니까?" 한탄했는데, 98년에 멀쩡하던 양반이 망가져 버린 게 총장 하면서 아닐까싶다. 그리고 망가진 핵심이 그 '촌놈 정신'인 것 같다.

술이 절반 남아 있는 병을 놓고 "절반밖에 없네." 하기보다 "절반이나 있네." 하는 것이 촌놈 정신 아니겠는가. 남들처럼 잘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하겠다는 안빈낙도의 자세가 여기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런 자세는 쓸 데 없는 강박을 받지 않는다. 학문에 적합한 자세일 뿐 아니라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한다.

731부대가 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왜 못 나왔을까? 청문회를 골든벨로 착각한 건 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 강박이 싫은 거다. 그분이 총리 아니라 뭘 하더라도 "저는 아는 게 있고 모르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 좋다. 그런데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면 할 수 없는 일도 없다는 강박을 가졌기 쉽다. 한국 주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태도다.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생각, 무서운 것이다. 기술만능주의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고, 비인간적 행동이 극단으로 가는 것도 이 생각에서 출발한다. 해서 안 될 일을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을 공자가 무엇보다 앞세운 것도 그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도시, 4대강과 관련한 정 교수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 역시 이미 기술만능주의에 빠져버린 결과는 아닐까?

총장질이 촌놈 정신 망가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의심하는 것은 '지도자'로 갑자기 부각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다. 어릴 때부터 그분을 봐 오면서 그분의 좋은 점을 많이 인식해 왔지만, 그분이 용기 있는 분이라는 인상은 별로 받은 적이 없다. 겁이 없다는 뜻의 용기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서 용기를 말하는 것이다. 용기가 있다면 생긴 대로 놀 생각을 했겠지. 그러나 그분은 모델 찾기에 바빴을 것 같다.

이현재 선생님과 조순 선생님을 모델로 검토했으리라 짐작된다. 조 선생님을 모델로 했다면 그래도 체질에 웬만큼 맞았을 텐데, 조 선생님은 실패한 모델, 이 선생님은 성공한 모델로 판단해 버린 게 아닐까. 이 선생님은 자기 자신과 체질이 너무 다른 분인 것 같은데...

'촌놈 정신'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안에 이미 함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의식. 존재의 차원에서 내가 비주류, 촌놈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당위의 차원에서는 주류를 선망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기회가 있을 때 정체성을 바꾸려 들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길을 바꿀 때도 있는 것이다. '변절'이란 이름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쓴다. 나도 언제든 어떤 사람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말이니까. 그렇지만 길을 바꿔서 인생이 괴롭게 되는 일은 절대 피하려 한다. 이기적인 향락주의가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내 인생을 편안히 여기며 주변과 사회를 위해 조금이나마 공헌하며 산다는 존재의 자신감만은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 교수 인생도 너무 괴롭지 않기만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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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이면서 평화적이고, 무(武)를 숭상하면서 또 미(美)를 추구하고, 뻔뻔스러우면서 예절바르고, 딱딱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순종적이면서 반항적이고, 충실하면서도 속임수가 많고, 용감하면서도 겁이 많고, 보수적이면서도 변화에 호의적이고......"

<국화와 칼>(1946)은 루스 베네딕트가 미국 국방정보국(OWI)의 의뢰로 일본의 이해를 위해 쓴 책이다. 일본을 점령 통치하게 된 미국이 통치 대상국을 이해할 필요에서 의뢰했던 것이다. 이 책이 행정 관계자들의 범위를 넘어 널리 인기를 끈 것은 위 귀절처럼 모순의 미학을 현란하게 펼친 덕분이겠지만,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그 시절까지도 서양인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수수께끼의 느낌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는 일본의 열강 대열 진입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클럽 가입 자격은 뭐니뭐니해도 전쟁 잘하는 데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95)으로 준회원 자격을, 러일전쟁(1904-05)으로 정회원 자격을 땄다.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이 풍미하고 백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던 이 시절에 일본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룬 이유는 일본 안에서도 밖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되었다.

개항 전의 일본이 근대화 이전의 유럽과 어떤 비슷한 특성을 가졌느냐 찾아내는 것이 오랫동안 일본의 성공을 설명하는 열쇠로 여겨졌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봉건제가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흡사한 형태였다는 점을 많은 학자들이 천착하기도 했다. 출발점이 비슷하기 때문에 비슷한 경로를 쉽게 따를 수 있었다는 설명인데, 요즘은 좀 수그러든 것 같다.

그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따라서 생명력도 강한 설명은 개항 전 일본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근대화에 적합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다룬 연구와 논설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여 있고, 깊이 살펴보지 못한 나로서도 개연성을 인정할 만한 점이 많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예를 들어 중국이나 터키의 같은 시기 상황과 비교해 일본만이 꼭 근대화에 성공할 충분한 조건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이 글은 조선의 망국 상황의 배경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개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근대화의 당위성을 치밀하게 검토하기보다 근대화 과정의 흥미로운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은 사람의 하나인 이또오 히로부미(1841~19109)의 경력에 비쳐진 일본 근대국가 건설 과정의 굴곡을 살펴보겠다.


쪼오슈우(長州) 번(藩)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 태어난 이또오가 특이한 경력으로 접어든 출발점은 1863년의 런던 유학이었다. 함께 유학생으로 선발된 4인 가운데 유신의 동지가 될 이노우에 카오루도 있었다. 그들은 이듬해 열강의 시모노세키 공격에 임해 쪼오슈우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귀국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함대의 위압으로 개항했지만, 이후의 진로를 능동적으로 찾아나갈 주체가 세워지지 않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막부의 권위가 개항으로 인해 크게 손상되어 새로운 상황에 확고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쪼오슈우, 사쯔마 같은 강력한 번들이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1863년 쪼오슈우가 시모노세키 해협의 외국 선박 통과를 포격으로 막아 열강의 공격을 자초한 것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준 일이다. 쪼오슈우는 기본적으로 교역 확대를 바라는 입장이었는데 경쟁자인 사쯔마가 그 길에 앞장서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극단적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깃발을 내건 것이었다. 대외적 위기를 만들어놓고 그에 대한 대응을 위해 개혁파가 번의 정치를 장악해 군대를 비롯한 개혁을 급속히 진행하는 가운데 영국에서 돌아온 청년 이또오가 한 몫을 맡게 되었다.

이또오를 포함한 서부 개혁파 집단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개혁을 위해 막부 타도를 기본 목표로 세웠다.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쿄오또의 조정을 개혁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 집단은 먼저 서부의 강력한 번인 쪼오슈와 사쯔마의 정치를 장악하고 1866년 막부에 대항하는 삿쬬오(薩長)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쿄오또 조정을 꾸준히 회유,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시점에서 막부 자체가 역부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비가 쉽게 넘어갔다. 마지막 장군 요시노부는 이미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해 놓고 있었고, 1868년 4월 정부군이 에도로 진격해 오자 저항 없이 성문을 열었다. 토오호꾸(東北)지방 영주들의 항거가 그 해 9월까지 진압됨으로써 유신에 대한 무력저항이 모두 해소되었다.

막부의 문을 닫는 과정에서 서부 개혁파 집단을 비롯한 하급 사무라이 출신 인재들의 역량이 확인되어 유신 조정에서 이들의 역할이 확보되었다. 그 역할이 확정된 것은 1871년 7월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였다. 개혁파 집단은 강력한 몇 개 번의 정치를 장악하고 그 번들을 앞세워 막부를 타도했기 때문에 그 번들이 유신 조정의 주체가 될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막부 붕괴를 뒤이은 중앙집권화 분위기를 타고 폐번치현을 유도해 다이묘들이 정치 주체로 나설 길을 막은 것이었다. 이것이 구체제의 확실한 종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또오는 1870년 외무차관으로 있다가 서양의 통화제도를 학습하러 미국에 갔고, 이듬해 돌아와 지조개정(地租改正) 작업을 진행한 다음 1871년 12월부터 1873년 9월까지 이와꾸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를 순방했다. 1863년의 런던 유학으로 시작한 이또오의 서양 견문과 인맥은 당대의 '서양통'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개항 후 막부도 몇 차례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에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인원도 많고 (48명) 여행기간도 길 뿐 아니라, 단순한 기술만이 아니라 국가의 조직원리까지도 학습 대상으로 삼은 이와꾸라 사절단은 일본 근대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새 국가 건설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이또오를 비롯한 여러 핵심인물이 장기간 조정을 떠나 있을 수 있었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다. 이와꾸라 토모미 단장과 키도 타까요시, 오오꾸보 토시미찌 등 메이지시대 정치를 이끌 인물들이 22개월간 여행을 함께 한 것이었다.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 통일 직후의 독일, 전성기의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뿐 아니라 귀로에는 침략당하고 있는 아시아 지역까지 둘러본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이와꾸라 사절단의 가장 큰 학습 결과는 내치 우선론이었다. 국제무대에서 행세하기 전에 장기적인 내정 개혁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사절단이 귀국할 무렵 일본에서는 사이고오 다까모리를 중심으로 정한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와꾸라 등 사절단 멤버들은 이에 극력 반대해서 유신정부의 분열까지 불사했다. 이 갈등은 이듬해 초의 사가(佐賀)의 난에 이어 유신정부에 대한 마지막 내부 도전인 1876년의 서남전쟁으로 이어졌다.

1874년 4월의 타이완 정벌과 1875년 9월의 운요호 사건 정도 외에는 이 시기 일본이 대외적 도발을 삼가고 국가체제 정비에 힘쓴 것이 내치 우선론의 작용이었다. 격동의 시대에는 모험주의가 득세하기 쉬운 법인데, 이와꾸라 사절단 멤버들이 이끈 1870년대 후반 이후의 일본 정부는 군비 증강을 억제하고 교육, 사법, 재정 등 근대국가의 기본 기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근대국가 건설의 과제 중 가장 늦춰진 것의 하나가 정치체제였다. 1881년 민간의 국회 개설 요구가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 여파로 정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는 '1881 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의 결과 정부 내에서 이또오의 역할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헌법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 18개월간 체류했다. 이 체류에서 돌아온 이또오는 한 정파의 지도자를 넘어 국가 운영과 건설의 최고 기술자로 널리 인정받는 존재로서 1885년 초대 내각의 총리를 맡은 이래 네 차례에 걸쳐 8년간 총리직을 맡았다. (1885-88, 92-96, 98, 1900-01) 총리를 맡지 않고 있을 때도 추밀원 의장과 원로로서 이또오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1885년 이또오 내각 출범 무렵부터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각제에 이어 지방자치제 시행(1888), 메이지헌법 반포(1889), 국회 개설(1890)이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다. 1876년 서남전쟁 이후 불안하던 국가재정과 1881년 이래의 불황을 몇 년간의 긴축정책으로 극복하고 1886년 은본위 화폐제도를 정착시키면서 기업활동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해 본격적인 산업화에 들어섰다.

이 발전의 혁혁한 성과가 1894-95년 청일전쟁의 승리였다. 이 승리로 일본이 거둔 이득 중 배상금 2억3천만 냥만 하더라도 1894년 일본 국가세입의 네 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 배상금 덕분에 당분간 일본 정부는 여러 방면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오랜 숙원이던 불평등조약의 시정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민간의 기업활동도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승리는 일본의 정치풍토를 험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까지 정치를 운영해 온 것은 이또오를 위시한 관료집단으로, 번벌(藩閥)세력이라 한다. 핵심 인물들이 유신 전 번의 정치에서부터 실력을 키워온 집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로운 정치세력 둘이 떠오르고 있었다. 민권파와 군부다. 청일전쟁 승리는 군부의 입지를 크게 늘려주었고, 민권파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메이지 국가는 천황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만들어졌다. 헌법도 흠정이었다. 민권의 주장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에야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해서 1890년까지 국회 개설을 기다렸다. 그러나 국회가 개설된 뒤에는 경제와 산업의 발달에 따라 민권파의 배경이 지주층으로부터 상공업계로 옮기면서 정부에 대한 견제가 강해졌다. 이 시기 민권운동은 유산계층에 한정된 것이어서 관료집단에 비해 호전적 팽창주의에 쏠리는 경향이었다.

군부는 행정부와도 별도로 천황에 직속하는 기관이었다. 1880년대 국가조직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성격을 극단적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의회는커녕 행정부조차도 군부에 간섭하지 못하는 반면 야마가따 아리또모가 두 차례나 총리를 맡는(1889-91, 1898-1900) 등 군부 출신이 정치계에 영향을 끼치는 길만 열려 있었다.

유산층을 대표하는 민권파와 국가주의 성향의 군부가 청일전쟁 승리에 고무되어 극단적 부국강병책으로 정부를 몰아가는 동안 일본의 새 국가 건설 사업은 고착상태로 접어들었다. 양적인 확장은 계속되지만 질적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 틀이 잡힌 것이다.

30년의 국가 건설 사업에서 이또오 같은 하급 사무라이 계층 출신의 관료 성향 정치가 집단이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근대 일본이 높은 효율성을 가지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에서는 뛰어나지만 국가의 존재 의의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군국주의의 비극을 막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