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교수신문>에 대한제국의 성격에 관한 일련의 논설이 실렸고 이것이 정리되어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푸른역사 펴냄)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 대한 김재호의 비평과 이에 대한 이태진의 반론에서 시작된 한 차례 논전이었다. 이 책 중에서 내가 제일 공감한 대목은 왕현종의 논평 한 마디였다. (이하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에서 인용.)
고종의 절대화만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역사적 구조 변화의 동인과 주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51쪽)
“부적절”하다는 말이 참 정확하다. 고종이 정치를 잘한 것이라면 일본의 침략이 부당한 것이었다고 하는 이태진의 전제는 마치 고종의 정치가 엉터리였다면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 같다. 고종은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시대 변화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극히 제한된 의미만을 가진 것이었다. 침략의 정당성을 고종의 정치 수준에 연계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적절한 일이다.
왕현종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성격을 부정하는 김재호의 시각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근대화 지상주의’라 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세계적 차원의 근대화 지상주의는 결국 자민족의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52쪽)
김재호는 이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이 오히려 근대화 지상주의라고 반박했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화 이전에 왜곡되지 않은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에 의한 왜곡과 좌절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그러한 왜곡을 바로잡는다면 제대로 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 근대가 추구할 지상의 가치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투했겠는가? 왜곡되지 않은 그 근대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56~57쪽)
일리 있는 지적이다. 내재적 발전을 주장하려는 의지는 근대화를 바람직한, 또는 불가피한 진로로 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김재호가 말하는 ‘근대화’는 유럽식 근대화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근대 경제성장을 통해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했으며 도시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세속화되며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는 등 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됐다. 우리가 현재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55쪽)
넓은 의미에서 ‘근대화’란 중세사회의 해체에 따른 모든 대안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럽식 근대화는 그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다.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계급 재편성, 모두 어떤 종류의 ‘탈중세’ 과정에도 나타날 현상들이다. 이 현상들이 각각 어떤 속도로 어느 정도까지 나타나느냐, 그리고 어느 현상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근대화의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유럽식 근대화가 근대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한 근대화의 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프랭크의 <리오리엔트>나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처럼 다른 종류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탐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김재호는 근대화의 여러 현상을 나열만 했을 뿐, 더 이상의 분석을 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럽식 근대화만을 당연한 표준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내재적 발전론자 중에도 유럽식 근대화만을 근대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항기 이전의 조선,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럽식이 아닌 근대화가 “왜곡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왜곡을 바로잡는다 해서 그 노선이 그대로 되살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질적 방식의 근대화에 이미 휩쓸려버렸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근대화라면 필연적인 것이니 ‘지상주의’라는 말이 붙을 여지가 없다.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식 근대화라는 좁은 뜻의 ‘근대화’에 대한 태도가 ‘지상주의’ 여부를 따질 대상이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자 중에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 분명히 있다. 이 논쟁에도 참여한 이영훈이 단적인 예다.
인간 사유의 역사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이 어려운 질문에 부닥칠 때마다 나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자연과 사회의 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또는 공과 사의 분리 등과 같은 명제로 평범히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상식으로서의 근대에 비추어 볼 때 앞과 같은 근본주의적인 성리학의 교의체계는 근대가 아니다.(96~97쪽)
재작년 <뉴라이트 비판> 작업 때도 기발한 착상을 평범한 상식처럼 내놓는 이영훈의 화법이 참 신기했는데,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자연과 사회, 공과 사가 근대에 와서야 분리된 것이라고? 단어만 이어 놓는다고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상식과 전통은 결국 어느 위대한 지성에 의해 무너지기 마련”이라며 이태진을 야유하는데, 그 야유를 본인에게 돌려주고 싶다.
김재호의 근대화에 대한 시각은 이와 분명히 다르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 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됐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비난하면서 말문을 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추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반증하면 된다. 근대 경제성장을 통해서 비로소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근대가 문명의 얼굴만 보여주었던가. 식민지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56쪽)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서세동점 오래 전부터 ‘탈중세’라는 의미의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본주의 맹아’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탈중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고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유럽식 근대화가 동아시아 제 사회의 완만한 근대화에 충격을 가해 교란시킨 것이다.
유럽식 근대화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가 국가 기능의 급격한 확대였다. 영주들이 맡고 있던 주민 관리를 국가가 직접 하게 되고,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관리 업무의 폭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교통의 발달과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격증하는 대외관계도 국가의 전적인 책임과 권한이 되었다. 이렇게 확대된 국가 기능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고차원의 제도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유럽식 근대국가는 입헌정치와 권력 분립 등의 수단으로 통치자의 자의성을 줄이면서도 국가권력 자체는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유교 질서는 군주와 평민 사이에서 중간권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핵심적 원리가 있었다. 임금 이외의 어떤 실력자도 재산과 무력을 어느 수준 이상 쌓지 못하게 하는 이 질서는 성장보다 분배에 역점을 둔 사회주의 성향 체제였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억제하는 힘을 가진 질서이므로 중세사회 해체의 조건이 형성된 뒤에도 느린 속도의 탈중세 과정을 겪게 된다.
중국의 경우에는 11세기경부터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등 탈중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19세기까지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17세기 이후 탈중세 현상이 분명해졌다. 그런데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국가가 탈중세 현상을 촉진하기보다 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9세기까지 두 나라에서 왕조의 위기는 있을지언정 문명 전복의 위기는 겪지 않는 채로 변화가 완만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17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국가의 기능이 동아시아 지역보다 약했는데,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강력한 근대국가들이 출현했다. 19세기 들어 이 근대국가들이 열강의 모습으로 동아시아에 나타나자 질서만을 아끼며 변화를 억제하고 있던 동아시아 사회는 그 폭력성 앞에 맞설 길이 없었다. 국가의 보호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동아시아 사회의 사회경제 질서는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너져 갔다.
유교 질서의 관성이 비교적 약하던 일본이 열강을 본받기 위해 첫 번째 한 일이 유럽식 근대국가 수립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열강의 부강을 본받기 위해 양무운동을 벌이면서도 국가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거부했다. 청일전쟁 참패 뒤에야 변법운동이 나타났다.
조선도 청나라의 영향 아래 국가체제 변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가 청일전쟁 후 일본의 입김 속에 갑오개혁으로 제도의 전면적 변화를 시작했다. 갑오개혁에 임하는 일본의 태도는 침략의 야욕을 앞세우기보다 근대적 국가 운영체제를 조선에 우선 세워놓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태진은 “꼭두각시 내각을 급조해 총리대신에게 통치 전권을 부여코자 했다”고 일본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보지만(앞의 책 30쪽) 박영효보다 김홍집을 밀어준 것은 꼭두각시 아닌 내각을 만들려고 애쓴 태도로 생각된다.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통제력을 무력화시킨 후 대한제국을 만든 것은 고종의 독자노선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구조에는 갑오개혁의 개혁방향이 많이 반영되었다. 다만 결정적 차이는 군주의 절대권력이었다.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은 황제 1인에게 집중되었다. <대한국 국제>로 명문화되어 나타난 황제 전제 체제가 대한제국의 제1 원리였다.
1인 전제 체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군주제가 아니다. 전통적 군주제는 군주를 정점에 두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형태의 균형과 견제가 작용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정치의 퇴행은 권력의 사유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의 1인 전제 체제는 이 권력 사유화가 극한에 이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근대국가의 틀이 될 수도 없는 체제였다. 이태진은 고종이 서양의 개명군주를 지향한 것이라고 하는데, 개명군주는 18세기 후반 절대왕정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그리고 성공한 개명군주에게는 실력을 갖춘 지지층이 있었다. 고종의 주변에는 그의 권력에 기생하는 친위세력만 있을 뿐, 자기 기반을 가지고 그와 함께 국가를 책임질 세력이 없었다. 전통적 정치세력인 학자-관료 계층이 정치력을 잃었기 때문에 고종의 자의적 움직임에 견제가 없었을 뿐이다.
대한제국의 구조적 문제점은 김동노의 <근대와 국민의 서곡>(창비 펴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공적인 실체로서 중앙집권화된 경우에는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거두는 모든 조세는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반면, 왕실과 정부가 분리된 상황에서 왕실이 거두어들인 수익을 공적인 용도로 쓸 것인지 혹은 사적인 용도로 쓸 것인지는 군주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 따라서 대한제국 시기에 왕실과 정부의 분리는 국가의 공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왕권(왕실)의 강화를 국가의 강화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갑오개혁은 청국의 경쟁을 따돌린 일본이 한껏 여유를 가지고 조선의 개혁을 유도한 노선이었다. 침략의 야욕은 바닥에 깔려 있더라도 이 여유 덕분에 야욕을 앞세울 필요 없이 비교적 원론적인 개혁 방향을 내세울 수 있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기 입맛에 따라 대한제국을 만들었다.
대한제국이 갑오개혁의 개혁 내용을 많이 이어받았다는 점을 평가하기도 하는데, 나는 수긍하기 힘들다. 고종과 친위세력의 기획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변 요소까지 모두 다 바꾸지 못했던 것이지, 핵심 요소는 고종의 입맛에 따라 바꾼 것이다. 정부와 왕실의 분리는 갑오개혁에서 국가의 공공성 제도화에 목적을 둔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에서는 전통 왕조보다도 공공성을 더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설립은 기본적으로 반동쿠데타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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