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로부터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한 갈래 반응을 “위정척사(衛正斥邪)”라 하는 것이 있다.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전통체제에 집착하는 극단적 보수 성향으로 흔히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태도다.
“옳은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내치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는 까닭이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에서 변화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이 필요성을 외면한 것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사의 구분을 앞세우는 태도가 독선과 독단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변화의 절대적 필요성을 판단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풍조에는 반성의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근대 서양의 사고방식에 너무 치우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서양 근대의학과 동양 전통의학의 자세에 차이가 있다. 서양 근대의학은 잘못된 현상이 있으면 그 현상을 직접 바로잡는 대증치료에 치중하는데, 동양 전통의학에서는 잘못된 현상의 배경 원인을 먼저 살피는 원인치료를 중시하고, 치료 과정을 견뎌내기 위한 원기(元氣) 배양을 앞세운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파 중에는 정말로 시대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외친 수구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게 마련이고, 머릿수가 많건 적건 역사의 흐름에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위정척사파 가운데 ‘합리적 보수’라 할 만한 자세가 있었음을 현대인이 간과하기 쉽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에는 내우와 외환이 겹쳐져 있었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진짜 ‘수구’ 입장이 아니고는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화 대처에도 내우를 앞세우느냐 외환을 앞세우느냐 하는 차이가 있었다. 내부 문제를 먼저 처리해서 자세를 바로잡은 뒤에 외부 문제에 대응하자는 것을 보수 노선이라 할 수 있고, 외부 문제 대응에 필요한 기준에 따라 내부 문제의 접근 방향을 정하자는 것을 진보 노선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이 필요하냐에 앞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이냐를 더 중시하는 것은 ‘보수’로서 의미가 있는 정치적 태도다. 다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이 얼마나 ‘합리적’이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그 기준이 독단과 독선에 빠지면 ‘수구’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극단적 정통론에 집착해 사회의 생산성과 건강을 해친 것이 바로 독단과 독선 때문이었다. 같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끼리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인 것이 이 극단성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같은 유학이라도, 심지어 같은 성리학이라도, 주자의 학설과 조금만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풍조가 만연했다.
같은 유학 내에서도 그토록 배타적이었는데, 외래 사상인 서학을 이단과 사학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서학 비판 중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해서 무조건 멸시하고 적대시하기보다 합리적으로 접근한 자세도 찾아볼 수 있다.
서학서를 널리 섭렵한 이익(1681~1763)은 <칠극(七克)>에 대한 논평에서 그 비유가 적절해 우리 선비들이 밝히지 못한 점을 밝힌 것이 있으므로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서학 전반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논설이 많으나 궁극적인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논평을 남겼다. 이단(異端)이기는 하지만 사학(邪學)까지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익의 제자 중 신후담(1702~61)과 안정복(1712~91)은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스승보다 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도 태도의 차이가 있다. 안정복의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1785)에 비해 신후담의 <서학변(西學辨)>은 훨씬 합리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예컨대 서학의 천당-지옥설에 대해 안정복은 불교에서 훔쳐온 것이라 하여 내용 자체를 따지기도 전에 사학으로 몰아붙이는데, 신후담은 천당의 유혹과 지옥의 공포로 사람의 행동을 농락하면서 이(利)를 앞세운다는 점을 비판한다. 본성의 선악을 접어놓고 득실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게 만든다면 이익을 좇는 도도한 추세에 천하가 휩쓸려 버릴 것을 걱정한 것이다.
물론 이익이나 신후담 같은 상대주의 관점은 절대주의적 정통론이 우세하던 조선 후기 사상계에서 다수파가 아니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 와중에 터져 나온 황사영 백서 사건을 계기로 서양에 대한 주류 사상계의 시각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들어와 내외의 위기가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는 정통론의 관점도 극단적 순혈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 이항로(1792~1868)를 따른 화서학파가 당대 위정척사론의 본산이기도 했다.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등 위정척사론을 이끌고 의병활동에 큰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이 학파에서 나왔다. 이항로의 학설은 주리(主理)론으로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춘추대의(春秋大義), 즉 최고의 도덕적 명제로 삼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정치와 학술을 지배해 온 서인-노론 계열이 기(氣) 쪽으로 기울어졌던 경향과 대비된다. 기정진, 이진상 등 이항로와 같은 시기 거유들이 모두 주리론에 접근했던 것은 왕권의 쇠미가 심각해진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병” 조에는 조선 말기 의병의 신분구성에 관해 “의병전쟁의 주도세력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순수한 농민들의 봉기는 ‘의병’보다 ‘민란’이나 ‘농민항쟁’으로 규정되기 쉽다. 지도층이 주도하는 항쟁이라야 ‘의병’으로서의 명분을 명확히 표현하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의병장 중 신돌석이 평민 출신으로 각광을 받는데, 의병이 널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중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지, 지도층의 봉기가 없는 상황에서 평민들끼리 나섰다면 ‘의병’으로 인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란 위기에 처한 체제 지도층의 대응방식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유생들이 의병의 주체로 나섰다. (을사조약 이후 구식 군대 출신이 의병에 나서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몰락하는 체제를 대표한 것이다.) 피지도층은 평시에 지도층의 지도를 받으며 사는 것처럼 의병활동에서도 지도받는 입장이었다. 물론 항쟁이 장기화되면 원래의 피지도층에서도 지도자들이 나오지만, 그것은 새로운 지도층의 형성으로 보아야 할 현상이다.
유교 질서는 무력 사용을 억제하여 전쟁과 예악(禮樂)을 천자만이 주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제후는 천자의 위임을 받아 주재했다. 임금의 명령 없이 민간에서 무력을 일으키는 것은 명분에 관계없이 원천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의병이란 천하 질서가 비상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 의병이 나타난 후 1895년에 와서야 다시 의병이 나타났다.
궁궐이 짓밟히고 왕비가 살해당한 을미사변은 250년 만에 의병을 일으킬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국왕과 조정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따지는 것은 국왕과 조정이 지켜진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자 일부 의병이 무기를 내렸고, 1년 후 고종이 환궁하자 거의 모든 의병이 해산했다. 국왕과 조정이 주권을 회복한 상황에서는 의병의 명분이 해소되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전면적으로 침해됨에 따라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07년 7월 고종의 강압에 따른 퇴위와 뒤이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전국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초 1만 의병이 양주에 집결해 서울 입성을 시도함으로써 절정에 올랐던 의병운동은 이후 일본군의 적극적 토벌로 위축되었지만, 일부가 해외로 빠져나가 독립군의 기반이 되었다.
의병의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인식되어 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의병의 존재가 국면 전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천박한 역사 인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광복군과 독립운동은 일본 패전과 민족 해방에 어떤 작용을 했는가? 직접 작용한 효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을 때 그때까지의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패전국의 식민지에서 승전국의 식민지로 넘어가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의병 운동의 위정척사 사상이 시대 변화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의병 지도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는 생각을 많이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술 내지 전략 차원에서 불가피한 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공격 대상인 일본 식민주의가 개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었고, 한국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침해가 근대화의 과정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과 전략을 넘어서는 철학 차원에서는 근대화를 핑계로 사리사욕을 꾀한 사람들보다 변화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느낀 의병들이 있었다.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우주문답(宇宙問答)>이란 글을 남겼다. 정치, 사회, 학문, 종교, 윤리, 교육 등 문명 전반에 걸친 40개 주제에 관한 문답 형식의 이 글에는 당대 어느 개화론자 못지않은 넓고 깊은 식견이 담겨 있다. 이항로의 학파를 이어받아 의병 지도자 이전에 사림 지도자로 숭앙받던 유인석의 ‘근대적 석학’으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글이다.
의병에 나선 유생들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을 등에 짊어지고 있던 집단이었다. 그들 중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의 필요를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일본 식민주의가 ‘개화’의 아젠다를 선점해 버린 것이었다. <우주문답>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하여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하였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上下大小人)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하였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하였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더라도 내 자세를 바로 갖춘 뒤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표준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화를 특허 낸 일본을 상대로 싸우면서 개화 자체에 대한 반감을 키운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양심적 지식인들이 개화를 외면하게 만듦으로써 전통과 변화의 순조로운 연결을 차단한 것이 타율적 근대화의 피해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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