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출판인 모임 인사회 강연을 위해 준비한 원고입니다.)

100년 전의 ‘국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는 허점이 많다. 일본의 야욕에 의한 대형범죄라는 것이 표준적 인식의 골자인데, 그 범죄행위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이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행한 것이었다는 상식에 역행하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여자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의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서 강간한 남자에게 꼭 감사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출생 배경으로 인해 아이가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독수(毒樹)에는 독과(毒果)만 열린다 하여 강간으로 얻은 원치 않는 아이를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생겨난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것도 훌륭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것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가 축복받은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보다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더 조심스럽게 키울 필요가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이 ‘근대화’다. 어둠 속에서 잉태된 불륜의 씨앗이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맥베스>의 대사처럼 폭력 속에 잉태된 조선의 근대화가 강인한 체질을 보이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 강인한 체질을 잘 살리라고 아이를 폭력적 성격으로 키워내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어미가 만족을 얻고 아이가 행복을 얻는 길일까?


아이가 사회 속에서 좋은 역할을 맡으며 행복하게 살고, 그럼으로써 어미가 낳고 키운 보람을 거두기 위해서는 아이의 소질과 능력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폭력에 유린당한 경험을 가진 인간은 폭력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이 폭력으로 결정된다는 관점에 빠져 폭력을 숭상할 수도 있고, 폭력의 해악을 뼈저리게 느껴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도 있다.


어느 사회에나 두 가지 태도가 병존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폭력보다 평화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일반적 성향이고, 상황에 의해 휘몰리는 일이 없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화적 성향을 보이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폭력적 성향으로 휘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 법칙과 같은 형태의 현상이다. 폭력의 확산 특성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미꾸리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려 놓는” 것처럼 폭력을 숭상하는 소수가 사회를 폭력으로 흐려 놓으면 평화적 성향의 사람들도 자기방위를 위해 폭력을 쓰는 일이 잦아지다가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폭력의 확산 억제는 인류 문명의 원초적 과제다. 종교, 도덕, 법률, 국가 등 문명의 여러 제도들이 폭력 확산의 억제, 즉 질서 기능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여러 문명의 서로 다른 전통들은 서로 다른 질서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질서 구조가 진화를 계속 일으켜 왔다. 전통의 1차적 기능은 질서 유지에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문명은 인류 역사상 특이하게 폭력성이 강한 문명이다. 폭력성이 강한 문명은 쉽게 파멸에 이르는 법인데, 이 근대문명은 산업기술, 즉 자연에 대한 폭력성을 고도로 발전시킨 덕분에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세계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므로 인류에게는 이 현상을 억제할 수단이 없었다. 각지의 문명 전통이 근대문명의 폭력성 앞에 퇴화하거나 파괴되었다.


폭력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근대문명이 순전히 폭력성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온 세계가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잠긴 것처럼 보여도, 각 지역의 문명 전통은 위축된 형태로라도 근대문명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허용해 준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상태가 한계에 이르면서 질서 구조의 강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탈근대 상황이다. 전통적 하부구조가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빚어나갈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경제의 ‘고도성장’에 도취되어 왔다. 고도성장은 근대문명의 폭력성을 대표하는 명제다. 유럽 선진국들이 자원 공급의 증가가 둔화되는 저성장 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근대의 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전통의 상실에 있다.


전통 질서의 형태는 지역과 문명마다 달랐지만 어디서나 공통되는 것은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이다. 어느 사회에도 무력과 재력과 정보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엘리트 계층이 존재하고, 엘리트 계층은 다른 계층보다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소속한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도덕성은 질서 구조의 핵심적 요소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가 이 도덕성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가 된다. 엘리트 계층이 사회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도덕적 실천을 통해 사회 자체를 지키려는 자세가 보수주의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한국 사회 고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 보편적 가치인 재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미국 등 다른 사회에 편입하는 데 대한 저항감이 약하다. 한국 사회의 특성에 대한 애착이 적고, 안보에 대한 의식도 피상적이다. 내부적 안보에 대한 경계심이 약하기 때문에 양극화 등 불안 요소를 걱정하지 않고 고도성장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엘리트 계층의 의식구조는 독립국가의 정체성에 맞춰져 있지 못한 것이다.


‘국치’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허점도 이 의식구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19세기 후반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인식의 속도가 상황 변화의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망국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이 실패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조선 왕조의 국가 기능이 퇴화해 있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야욕이 상황을 급박하게 만든 것이었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망하고 어떤 식의 식민 지배가 펼쳐졌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가 된 조선이 쉽게 독립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펼쳤고,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었다. 조선의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조선인들을 식민지인의 의식구조에 빠뜨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한국이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정해진 식민 지배자가 없는데도 미국이든 국제 거대자본이든 상전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식민지 사회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