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1. 08:37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3년 동안 어머니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형들과의 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작은형과의 관계 변화는 ‘체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인간관계나 사회에 대한 태도나 차이가 워낙 큰 사람인데, 나는 더 이상 그 차이를 놓고 분노하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의 형제관계라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내 생활이 그의 행동에 좌우될 여지를 없애야 한다. “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지는 않지만 맞는 때도 있다.


최근 큰형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는 훨씬 더 극적이다. 한 마디로 ‘환멸’이다.


스스로를 ‘인격자’로 규정한다는 것이 의식구조에 불건강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운찬 총리 걱정해 주면서 분명히 생각하게 되었다. 큰형과 정 총리에게 비슷한 인식과 비슷한 경의를 오랫동안 품고 지내왔다. 내가 ‘환멸’을 느낀 것은 두 사람의 인격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 엉뚱한 존경심 때문이다. 내 인식의 문제다.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존경심을 품다니.


두 사람에 대해서와 비슷한 인식과 경의를 품어 온 대상이 이정우다. 세 사람 다 모난 짓 않으면서 자기 자리 잘 지키고 자기 할 일 잘 한다는 점에서 부러웠고, 또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면 이 교수와 나는 세상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고, 두 사람은 쉽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교수는 자기와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그러면서 할 일은 열심히 하는 나를 나름대로 부러워하고 존경한 것 같다.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큰형과 메일을 거의 끊고 지낸 지 세 달쯤 되나? 이제 작은형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대한다. 그들도 어머니 자식들이니 즈그들 형편대로 찾아가서 재롱을 떨든 안마를 해드리든 길은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와 영아 같은 ‘가족’의 범위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니까.


세상을 힘들게 살고 쉽게 사는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쉽게 사는 사람들은 가치의 차이를 쉽게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 가족과 옛날의 가족 사이에 우선순위가 분명하다. 드러날 일은 많지 않아도 이런 의식구조에는 ‘나’와 ‘내 가족’ 사이에도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와 ‘사회’ 또는 ‘남’ 사이가 분명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 눈에 내가 얼마나 미련하고 미개해 보일까. 정신만 차리고 살면 제 몫 잘 챙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치관의 혼란’ 속에 헤매고만 있으니. 나 스스로도 오랫동안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가족, 사회, 민족, 인류, 우주, 나를 포괄하는 여러 층위의 대아(大我) 앞에 두루 겸손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그 여러 층위를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얕은꾀가 쉽게 사는 길을 마련해주지만, 근본적인 떳떳함을 해친다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큰형 내외가 우리 부모님과 형수 부모님 네 분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만들었다는 일을 몇 달 전 이야기 듣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힘들여 모은 돈을 ‘쾌척’하는 일을 놓고 좋은 말 많이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멋진 일에서 ‘편의주의’ 냄새를 맡는 것은 내 감각이 비뚤어진 탓일까? 근대성의 구조적 문제에 너무 의식이 사로잡힌 때문일까?


장학기금 만드는 일을 미리 얘기도 않고 있다가 만들어놓은 뒤에, 그것도 어머니 모시는 돈 문제 얘기 가운데 묻어 나왔다는 데 우선 내 감정이 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려 애썼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나랑은 너무나 다른 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기로 했다.


뜨아해진 뒤로 처음 큰형이 한국에 왔고,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있다. 요즘 일도 바쁘고 해서 따로 만날 시간 내기보다 어머니 곁에 있는 동안 가보기로 하고 어제 갔다. 큰아들과의 시간 즐기시는 모습 뵙고, 큰형과는 따로 얘기 나눌 것도 없이 좀 일찍 돌아왔다.


큰형에게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몇 달째 먹고 있었지만, 한 가지 그래도 뜻밖인 일이 있다. 이 블로그에 들어와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시병일기 쓰기가 큰형에게 어머니 근황 알려주는 데서 시작된 일이다. 재작년 11월 회복 기미를 보이시면서 자주 근황을 적게 되고, 큰형 외에도 알려드리고 싶은 곳이 자꾸 떠오르기에 아예 시병일기를 적어놓고 메일로 보내주게 된 것이다.


그 일이 오래 되다 보니 블로그에도 올리게 된 것인데, 큰형에게 메일 보낼 다른 용건도 없게 되면서 어머니 근황은 블로그에 와서 살피라고 안내해 줬다. 그런데 여기 와 보지 않는다는 거다.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전화는 드린다. 그런데 여기 들어와 보지도 않았다니 도대체 어머니에 관해 궁금한 생각이 있기는 있는 건가?


나랑 참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 다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다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 근황을 내가 적어놓아도 자기 메일 주소로 받아보면 보되 내 블로그까지 찾아와 살펴볼 만큼 궁금하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장학기금 만들어 효자 소리 듣는다면 자기 식으로 잘 살아가는 거겠지. 아무튼 그 사람 말고도 어머니 소식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적기는 계속 적겠다.


돌아오는 길에 이인희 선생님께 들러 <밖에서 본 한국사>와 <페리스코프>를 드렸다. 지금도 책을 읽으신다니 참 부럽다. 어머니도 이제 가벼운 책은 즐기실 만할 것 같은데 신경을 더 좀 써 드려야겠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쓰시던 지팡이, 끝에 발가락 네 개 달린 것을 이 선생님께 권해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신다. 앉았다가 일어날 때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 생각난 것이다. 발가락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서 자세 바꾸실 때 의지하기 좋으실 것 같다. 이 선생님, 한참 좋아하시다가 "아니, 그런데 어머니가 이거 또 필요하시게 되면 어쩌지?" 하시기에 "이런 거 만일 필요로 하시게 된다면 열 개를 새로 사 드린들 아깝겠어요?" 했더니 하하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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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포맷을 구상하기 위해 며칠 분을 먼저 써보고 있습니다. 연재 시작되면 이렇게 미리미리 써놓는 일이 없겠죠? 학생 때도 꼭 당일치기를 해야 성적이 잘 나오더라고요. 포맷에 대해서든 뭐에 대해서든 의견 있는 분들 아끼지 말고 주세요.)


포츠담. 독일제국의 출발점인 프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 그곳에서 연합군의 실세인 미국, 소련과 영국의 정상회담이 이 날 끝났다.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에 열린 테헤란 회담, 1945년 2월 4~11일 열린 얄타 회담에 이어 세 번째로 세 나라 정상이 모인 자리였으나 이번에는 바뀐 얼굴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대로였지만 미국은 지난 4월에 죽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트루먼이 왔고, 총선을 앞둔 영국의 처칠 수상은 유력한 후임자인 애틀리 부수상과 함께 왔다가 7월 28일에 선거 결과를 확인하고 대표 자리를 넘겨줬다.


바뀐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얄타 회담 때 항복이 임박해 있던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고, 이제 일본만이 남아 있었다.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은 회담이 진행 중인 7월 26일에 먼저 발표했다. 이번 회담의 주 의제는 평정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어떤 전리품을 챙기느냐 하는 데 있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는 소련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소련으로 떼어가고 동유럽을 공산화하는 스탈린의 구상이 이 회담에서 승인받았다. 서부전선은 영국을 겨우 지키고 있을 뿐, 동맹군의 주력에 거의 소련 혼자 맞서고 있을 때였으니 누구도 스탈린을 거스를 수 없었다. 회담 장소부터 스탈린의 편의에 맞춰 선택된 것이었다.


그 후 노르망디 상륙으로 서부전선도 종전까지 한 몫 하게 되면서 서방국들은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 마음이 다르게 되었다. 특히 처칠은 소련이 유럽 대륙의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동조하지 않고 소련의 몫을 그대로 존중했다. 냉전 시작 후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리석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냉전의 상황에 얽매인 관점 같다. 우리가 본 많은 영화는 2차 대전에서 미국군과 영국군의 활약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모두 냉전시대 미국의 관점이다. 실제로 그 전쟁의 가장 큰 주인공은 소련이었다. 피해자로서도, 승리자로서도. 그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인명 피해의 절반 이상을 소련이 입었다. 국토의 파괴도 제일 심했다. 그리고 종전 때까지 전쟁의 주 무대는 동부전선이었다. 루즈벨트는 독일 항복 보름 전 죽을 때까지 소련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것뿐이었다. 똑같이 이기적인 스탈린과 처칠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그는 자임했다.


일본 항복을 1주일 앞두고 소련이 선전포고한 것을 기회주의적 태도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2차 대전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 독일의 주력군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지킬 필요가 있었고, 독일 항복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었다. 그 며칠 전 장개석이 루즈벨트, 처칠과 함께 동아시아-태평양 문제를 의논한 카이로 회담에 스탈린이 참석하지 못하고 테헤란 회담을 따로 열어야 했던 것도 일본에 대한 소련의 입장 때문이었다.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 회담이 시작될 때 트루먼은 전임자 루즈벨트보다 인색한 협상자였다. 그리고 상대를 위축시킬 새로운 무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진짜 엄청난 무기였다. 원자폭탄.


회담 시작 바로 전날 뉴멕시코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다.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 상대로 사용할 방침을 처칠과 합의해 놓은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그 이튿날 발표된 대 일본 최후통첩 ‘포츠담선언’에서는 무조건 항복 요구에 불응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명시해서 위협했다. 새 무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일본에서 과연 핵폭탄 사용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니 어느 쪽으로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미국에게 새 무기를 확실하게 데뷔시키고 싶은 강한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탈린을 겁주기 위해서.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그런데 원자폭탄 같은 무차별적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실전에 쓴다는 것은 웬만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다. 일본 항복 전의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자폭탄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트루먼은 (그리고 처칠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그 후 소련은 이란, 터키, 베를린 등지에서 서방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줄줄이 양보했다. 그런데 불과 4년 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추격이었다. 원자폭탄을 믿고 탱자탱자하던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매카시선풍이 일어났다. 소련 해체 후 KGB 비밀문서에서 소련이 스파이활동을 통해 미국 기술을 빼내 온 사실, 포츠담 회담 이전에 스탈린이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 스파이들은 매카시선풍에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자폭탄 사용 방침 합의가 포츠담 회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일은 마침 요긴한 사건도 따로 없으니 포츠담 회담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폴란드 처리에 관한 이야기다. ‘해방’ 후 한국이 겪은 상황과 비슷한 이야기다.


Posted by 문천
2010. 7. 18. 17:55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65년 전의 ‘오늘’을 제 마음속에 되살리는 작업입니다. 1945년 8월 1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나, 그 일의 역사적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오늘 생각합니다. ‘일기’라기보다 ‘일지’가 더 정확한 이름이겠지만, 저는 조금이라도 일기의 주관적 특성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오늘은 인사만 드리고 1945년 8월 1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습니다만 내일은 포츠담 회담이 마무리된 이야기를 하게 되겠죠. 며칠 후에는 일본 어느 도시에 원자폭탄 떨어진 이야기를. 그리고 다시 며칠 후에는 일본이 항복한 이야기. 역사학도의 마음속에서 65년 전의 상황을 하루하루 진행시키려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형편 닿는 대로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2년 전부터 <망국 100년> 작업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지난 8개월 동안 그 작업에 집중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 주제를 반년 남짓의 작업으로 충분히 소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제 구상은 100년 전에 잃어버린 ‘국가’를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늘의 이 사회에 파생된 문제들을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의 작업으로는 “어떻게 망했나?” 하는 설명에 바쁘고, “망해서 어떻게 됐나?” 하는 문제까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두어 달 전부터 <망국 100년> 시즌2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해방 후의 한국에 남긴 흔적을 더듬는 방법을 대략 생각했습니다. 2010년 한 해를 이 주제에 바치고 넘어가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일기’ 생각이 났습니다. 6월 30일 밤이었습니다. 20세기 민족사 최대의 갈림길이었던 ‘해방공간’에 초점을 놓으면 어떨까? 반년 작업해서 책 한 권 만드는 것보다 내 인생의 일부라도 더 적극적으로 투자할 만한 주제가 아닌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하는데, 나는 이 주제를 “과거와 현재의 씨름”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요약한 ‘대화록’을 내놓기보다 경기 진행을 ‘생방송’하는 게 어떨까?


잘 될 경우 제 여생을 바치게 되기 쉬운 이 거창한 작업, 참고할 포맷도 없는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마구잡이로 쌓아 온 제 지식, 그때그때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익혀 온 글쓰기, 그리고 마침 적절한 매체인 <프레시안>과의 인연까지.


하나의 여행으로 생각합니다. ‘산책’의 의미도 있고 ‘대장정’의 의미도 있는 길이 되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먼 길 걸을 욕심으로 쓸데없는 힘을 뺍니다. <프레시안>을 통해 저랑 낯을 익힌 여러분께 길동무로 나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