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맷을 구상하기 위해 며칠 분을 먼저 써보고 있습니다. 연재 시작되면 이렇게 미리미리 써놓는 일이 없겠죠? 학생 때도 꼭 당일치기를 해야 성적이 잘 나오더라고요. 포맷에 대해서든 뭐에 대해서든 의견 있는 분들 아끼지 말고 주세요.)


포츠담. 독일제국의 출발점인 프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 그곳에서 연합군의 실세인 미국, 소련과 영국의 정상회담이 이 날 끝났다.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에 열린 테헤란 회담, 1945년 2월 4~11일 열린 얄타 회담에 이어 세 번째로 세 나라 정상이 모인 자리였으나 이번에는 바뀐 얼굴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대로였지만 미국은 지난 4월에 죽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트루먼이 왔고, 총선을 앞둔 영국의 처칠 수상은 유력한 후임자인 애틀리 부수상과 함께 왔다가 7월 28일에 선거 결과를 확인하고 대표 자리를 넘겨줬다.


바뀐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얄타 회담 때 항복이 임박해 있던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고, 이제 일본만이 남아 있었다.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은 회담이 진행 중인 7월 26일에 먼저 발표했다. 이번 회담의 주 의제는 평정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어떤 전리품을 챙기느냐 하는 데 있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는 소련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소련으로 떼어가고 동유럽을 공산화하는 스탈린의 구상이 이 회담에서 승인받았다. 서부전선은 영국을 겨우 지키고 있을 뿐, 동맹군의 주력에 거의 소련 혼자 맞서고 있을 때였으니 누구도 스탈린을 거스를 수 없었다. 회담 장소부터 스탈린의 편의에 맞춰 선택된 것이었다.


그 후 노르망디 상륙으로 서부전선도 종전까지 한 몫 하게 되면서 서방국들은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 마음이 다르게 되었다. 특히 처칠은 소련이 유럽 대륙의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동조하지 않고 소련의 몫을 그대로 존중했다. 냉전 시작 후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리석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냉전의 상황에 얽매인 관점 같다. 우리가 본 많은 영화는 2차 대전에서 미국군과 영국군의 활약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모두 냉전시대 미국의 관점이다. 실제로 그 전쟁의 가장 큰 주인공은 소련이었다. 피해자로서도, 승리자로서도. 그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인명 피해의 절반 이상을 소련이 입었다. 국토의 파괴도 제일 심했다. 그리고 종전 때까지 전쟁의 주 무대는 동부전선이었다. 루즈벨트는 독일 항복 보름 전 죽을 때까지 소련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것뿐이었다. 똑같이 이기적인 스탈린과 처칠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그는 자임했다.


일본 항복을 1주일 앞두고 소련이 선전포고한 것을 기회주의적 태도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2차 대전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에 독일의 주력군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지킬 필요가 있었고, 독일 항복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었다. 그 며칠 전 장개석이 루즈벨트, 처칠과 함께 동아시아-태평양 문제를 의논한 카이로 회담에 스탈린이 참석하지 못하고 테헤란 회담을 따로 열어야 했던 것도 일본에 대한 소련의 입장 때문이었다.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 회담이 시작될 때 트루먼은 전임자 루즈벨트보다 인색한 협상자였다. 그리고 상대를 위축시킬 새로운 무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진짜 엄청난 무기였다. 원자폭탄.


회담 시작 바로 전날 뉴멕시코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다.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 상대로 사용할 방침을 처칠과 합의해 놓은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그 이튿날 발표된 대 일본 최후통첩 ‘포츠담선언’에서는 무조건 항복 요구에 불응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명시해서 위협했다. 새 무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일본에서 과연 핵폭탄 사용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필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이니 어느 쪽으로도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미국에게 새 무기를 확실하게 데뷔시키고 싶은 강한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스탈린을 겁주기 위해서.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그런데 원자폭탄 같은 무차별적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실전에 쓴다는 것은 웬만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다. 일본 항복 전의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자폭탄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트루먼은 (그리고 처칠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그 후 소련은 이란, 터키, 베를린 등지에서 서방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줄줄이 양보했다. 그런데 불과 4년 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추격이었다. 원자폭탄을 믿고 탱자탱자하던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매카시선풍이 일어났다. 소련 해체 후 KGB 비밀문서에서 소련이 스파이활동을 통해 미국 기술을 빼내 온 사실, 포츠담 회담 이전에 스탈린이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 스파이들은 매카시선풍에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자폭탄 사용 방침 합의가 포츠담 회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일은 마침 요긴한 사건도 따로 없으니 포츠담 회담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폴란드 처리에 관한 이야기다. ‘해방’ 후 한국이 겪은 상황과 비슷한 이야기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