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 잡지에 발표된 바 포츠담 최후통첩을 발표하기 전에 스탈린이 三거두회의에 소개하였던 일본의 평화조건은 여좌하니

一.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간에 평화를 계속할 것

二. 만주에서 일본이 퇴출하되 아라사(러시아)가 간섭치 말 것

三. 일본이 인도차이나, 범아(미얀마), 필리핀들에게 독립 주는 원칙을 승인할 것

四. 미국이 일본 내지에 돌입이나 점령하지 말 것

五. 조선과 대만은 미국에게 점령하기를 제공할 것”


8월 1일자 <국민보>(1913년 이후 하와이 교민단체에서 발행한 주간신문) 기사였다. 5월 초 독일 항복 후로 전세 역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태평양 전선은 미군에게 모두 평정되어 일본 본토가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 평화조건에는 종전을 간절히 바라는 일본의 태도가 드러나 보인다. 소련만은 끼어들지 말기를 바라고 본토를 점령하지 말아 달라는 것 외에는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1854년 개항 이래 일본이 걸어 온 찬란한 성공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전 세계 유색인종이 모두 침략과 지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주의 강국으로 성장한 아시아 국가가 일본이었다. 개항 40년 만에 중국을 물리쳐 동아시아의 패권에 접근하고 그 10년 후에 러시아를 물리쳐 1류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면서 선망과 찬탄의 대상이 된 일본이었다.


파국의 출발점은 1940년 9월 베를린에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서명한 추축동맹(Axis Pact)이었다. 그 동맹의 서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세계 모든 민족이 각자 차지할 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지속성 있는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일본,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과 대동아에서 각자의 노력을 지원-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관계된 민족들의 번영과 복지의 증진을 위해 설계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다.”


이 동맹을 맺을 때는 전쟁 상황이 추축국 진영에 한껏 유리할 때였다. 중립국 몇을 빼고는 전 유럽을 추축국 진영이 휩쓸어 영국을 고립시켜 놓고 있었다. 소련과 미국, 주전급 선수 둘이 아직 끼어들지 않고 있었는데, 추축 3국은 이 동맹을 통해 단결을 과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한 것이다.


동맹의 핵심은 “진행 중인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동맹국을 공격할 때” 다른 동맹국들이 지원한다는 제 3조였다. 다만 제 5조에서 소련의 경우는 예외로 했다. 독일과 일본이 각각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1년 6월 소련과 독일이 개전한 뒤에도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종전 직전까지 불가침조약이 계속되었다.


일본은 1894~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적 대륙 진출을 시작했다. 1904~5년 러일전쟁 승리로 대륙 침략의 발판을 넓힐 때 조선이 그 식민지가 되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유럽 열강들의 경쟁이 둔화된 틈을 타서 만주를 먼저 탈취한 다음 1937년 전면적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1940년까지 중국 본토의 태반을 석권한 상태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 동남아시아의 연합국 식민지를 탈취함으로써 ‘대동아제국’ 건설의 꿈을 부풀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본은 추축동맹이라는 한 차례 모험으로 근 백년간 쌓아 온 성공의 실적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군부의 호전성과 모험주의가 일본인들을 참혹한 고통에 몰아넣고 일본의 국운을 망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눈으로 보면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 이래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일본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한국이 일본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미국에 대한 종속적 위치를 거부한 한 차례 몸부림이 태평양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


패전 후 결국 일본이 미국에 종속적인 위치에서 번영의 길을 걸어 온 결과를 보면 일본 군부의 도박이 국가 차원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던 것 같다.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의 힘을 한껏 과시한 것이 냉전의 보루로 미국의 낙점을 받은 결정적 조건 아니었겠는가. 국가로서 일본의 성공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대다수 국민이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국민이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