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1. 01:16
떠오르는 생각도 더러 블로그에 적어 놓을 생각이 드는데, 마땅한 방이 따로 없다. 방을 너무 많이 만들고 싶지 않으니, 많이 안 쓰는 방 구석에 끼워 놓았다가 이런 글이 많아질 것 같으면 방을 따로 만들던지 하겠다.

윤해동의 <근대역사학의 황혼>에서 "민족주의는 괴물이다"라는 장을 읽고 생각해 본다. '괴물'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쓴 것인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민족주의만 괴물이고 다른 이데올로기는 괴물이 아니란 말인가?

'괴물'이란 말이 인간성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라면, 어떤 이데올로기도 괴물이 될 수 있다.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보다 화끈한 정답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정답에 지나친 믿음을 가지면 그 정답에 내포되지 않은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게 된다. 존중하는 가치의 범위가 어떤 것이든, 지나친 믿음은 다양한 가치를 누리는 인간의 본성을 벗어나게 한다.

과학적 탐구의 원리는 입증이 아니라 반증에 있다는 관점을 나는 중시한다. 명제의 참을 직접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참이 아니라고 볼 이유를 배제해 나감으로써 그 개연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정치사상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살면 된다는 정답을 특정한 정치사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유사종교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겠다는, 반증의 방식으로 줄여나가 바람직한 범위를 좁혀주는 것 이상을 정치사상에서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윤해동의 얘기 중 민족주의의 '홀로 서기 어려운' 특성이 눈에 띈다. 단독자로 행동하지 못하는 결여태라고 알듯말듯한 용어를 거듭해서 쓰는데, 가만 읽어보면 결국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얘기인 것 같다.

아항~ 그런 이유로 민족주의를 우습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의 모습"의 존재를 그는 믿는 것이다. 인간이 생긴 대로 살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을 얘기하는 사람이 이런 '근대적'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뜻밖이다. 과연 포스터모더니즘이 극복할 '근대성' 중에 인간의 사명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구속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민족주의가 평화주의와 함께 적극적 당위성을 가지지 않는 사상이니까, 그것이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맞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정치사상으로서 결함은커녕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주의는 전쟁과 투쟁을 피하자는 것이고 민족주의는 타민족의 억압을 피하자는 것이니 네거티브 명제만을 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믿음으로 인간성을 일탈, '괴물'이 될 위험은 적은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가 괴물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일도 많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면의 괴물스러운 심리를 쏟아내는 통로 역할을 해주는 것일 뿐이며, 그런 통로 역할을 일체 안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이 있는가? 평화주의와 민족주의는 괴물적 용도로 쓰일 때 그 모순을 비교적 쉽게 드러내기 때문에 위험이 적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성의 극복이 인류사회의 과제로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근년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내놓는 것도 근대성의 효과적 극복이 우리 사회의 제반 문제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오래 전부터 민족국가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키워 왔다. '근대적 민족주의'가 퇴조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을 나는 내다본다. 그래서 민족주의의 구조조정을 생각하는 것이고, 민족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뭘 어쩌자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것이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도서관 저널> 인터뷰  (0) 2011.01.28
<공자 평전> 드디어 나왔습니다.  (20) 2010.11.02
[연변 말] "행방 없다"  (1) 2010.06.29
[연변 말] "나그네"  (0) 2010.06.25
[연변 말] "일없수다."  (4) 2010.06.2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