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3년 동안 어머니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형들과의 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작은형과의 관계 변화는 ‘체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인간관계나 사회에 대한 태도나 차이가 워낙 큰 사람인데, 나는 더 이상 그 차이를 놓고 분노하지 않기로 했다. 최소한의 형제관계라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내 생활이 그의 행동에 좌우될 여지를 없애야 한다. “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지는 않지만 맞는 때도 있다.
최근 큰형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는 훨씬 더 극적이다. 한 마디로 ‘환멸’이다.
스스로를 ‘인격자’로 규정한다는 것이 의식구조에 불건강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정운찬 총리 걱정해 주면서 분명히 생각하게 되었다. 큰형과 정 총리에게 비슷한 인식과 비슷한 경의를 오랫동안 품고 지내왔다. 내가 ‘환멸’을 느낀 것은 두 사람의 인격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 엉뚱한 존경심 때문이다. 내 인식의 문제다.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존경심을 품다니.
두 사람에 대해서와 비슷한 인식과 경의를 품어 온 대상이 이정우다. 세 사람 다 모난 짓 않으면서 자기 자리 잘 지키고 자기 할 일 잘 한다는 점에서 부러웠고, 또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면 이 교수와 나는 세상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고, 두 사람은 쉽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교수는 자기와 다른 식으로 살아가는, 그러면서 할 일은 열심히 하는 나를 나름대로 부러워하고 존경한 것 같다.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큰형과 메일을 거의 끊고 지낸 지 세 달쯤 되나? 이제 작은형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대한다. 그들도 어머니 자식들이니 즈그들 형편대로 찾아가서 재롱을 떨든 안마를 해드리든 길은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와 영아 같은 ‘가족’의 범위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니까.
세상을 힘들게 살고 쉽게 사는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쉽게 사는 사람들은 가치의 차이를 쉽게 정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 가족과 옛날의 가족 사이에 우선순위가 분명하다. 드러날 일은 많지 않아도 이런 의식구조에는 ‘나’와 ‘내 가족’ 사이에도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나’와 ‘사회’ 또는 ‘남’ 사이가 분명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 눈에 내가 얼마나 미련하고 미개해 보일까. 정신만 차리고 살면 제 몫 잘 챙길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치관의 혼란’ 속에 헤매고만 있으니. 나 스스로도 오랫동안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가족, 사회, 민족, 인류, 우주, 나를 포괄하는 여러 층위의 대아(大我) 앞에 두루 겸손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그 여러 층위를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얕은꾀가 쉽게 사는 길을 마련해주지만, 근본적인 떳떳함을 해친다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큰형 내외가 우리 부모님과 형수 부모님 네 분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만들었다는 일을 몇 달 전 이야기 듣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힘들여 모은 돈을 ‘쾌척’하는 일을 놓고 좋은 말 많이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멋진 일에서 ‘편의주의’ 냄새를 맡는 것은 내 감각이 비뚤어진 탓일까? 근대성의 구조적 문제에 너무 의식이 사로잡힌 때문일까?
장학기금 만드는 일을 미리 얘기도 않고 있다가 만들어놓은 뒤에, 그것도 어머니 모시는 돈 문제 얘기 가운데 묻어 나왔다는 데 우선 내 감정이 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려 애썼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나랑은 너무나 다른 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기로 했다.
뜨아해진 뒤로 처음 큰형이 한국에 왔고,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있다. 요즘 일도 바쁘고 해서 따로 만날 시간 내기보다 어머니 곁에 있는 동안 가보기로 하고 어제 갔다. 큰아들과의 시간 즐기시는 모습 뵙고, 큰형과는 따로 얘기 나눌 것도 없이 좀 일찍 돌아왔다.
큰형에게 이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몇 달째 먹고 있었지만, 한 가지 그래도 뜻밖인 일이 있다. 이 블로그에 들어와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시병일기 쓰기가 큰형에게 어머니 근황 알려주는 데서 시작된 일이다. 재작년 11월 회복 기미를 보이시면서 자주 근황을 적게 되고, 큰형 외에도 알려드리고 싶은 곳이 자꾸 떠오르기에 아예 시병일기를 적어놓고 메일로 보내주게 된 것이다.
그 일이 오래 되다 보니 블로그에도 올리게 된 것인데, 큰형에게 메일 보낼 다른 용건도 없게 되면서 어머니 근황은 블로그에 와서 살피라고 안내해 줬다. 그런데 여기 와 보지 않는다는 거다.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전화는 드린다. 그런데 여기 들어와 보지도 않았다니 도대체 어머니에 관해 궁금한 생각이 있기는 있는 건가?
나랑 참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 다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다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 근황을 내가 적어놓아도 자기 메일 주소로 받아보면 보되 내 블로그까지 찾아와 살펴볼 만큼 궁금하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장학기금 만들어 효자 소리 듣는다면 자기 식으로 잘 살아가는 거겠지. 아무튼 그 사람 말고도 어머니 소식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으니 적기는 계속 적겠다.
돌아오는 길에 이인희 선생님께 들러 <밖에서 본 한국사>와 <페리스코프>를 드렸다. 지금도 책을 읽으신다니 참 부럽다. 어머니도 이제 가벼운 책은 즐기실 만할 것 같은데 신경을 더 좀 써 드려야겠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쓰시던 지팡이, 끝에 발가락 네 개 달린 것을 이 선생님께 권해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신다. 앉았다가 일어날 때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 생각난 것이다. 발가락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서 자세 바꾸실 때 의지하기 좋으실 것 같다. 이 선생님, 한참 좋아하시다가 "아니, 그런데 어머니가 이거 또 필요하시게 되면 어쩌지?" 하시기에 "이런 거 만일 필요로 하시게 된다면 열 개를 새로 사 드린들 아깝겠어요?" 했더니 하하 웃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