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이맘때 바르샤바를 며칠 방문했다. 오가레크-최 여사의 딸 안나가 그 얼마 전 한국에 체류할 때 알게 된 이후 연락이 이어지고 있던 참이라서, 독일에서 루마니아 가는 길에 구경하러 들른 것이었다. 안나 내외가 함께 살고 있던 오가레크-최 여사의 아파트에서 묵었는데, 오가레크-최 여사는 마침 한국 방문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새벽 바르샤바 역에서 마중 나온 안나 내외와 빠져나오니 거대한 과학궁전이 앞을 막고 있었다. 2차 대전 직후에 소련이 지어준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천박한 미적 감각을 보통사람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소위 스탈린-고딕 형식의 건물이었다. 1990년 당시까지도 바르샤바 시를 압도하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일 잘 즐길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안나가 물었다. 어디냐고 되물으니 남편이 답을 가르쳐준다. “과학궁전 꼭대기 층입니다. 거기서는 그 못생긴 건물이 보이지 않거든요.”
며칠 동안 두 사람에게 폴란드인의 소련에 대한 적대감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카틴 학살 이야기도 들었다. 그곳에서 폴란드의 정화(精華, 안나는 ‘flowers’라고 표현했다.)가 절멸된 이야기를 할 때는 두 사람 다 눈물이 글썽거렸다. 둘 다 많은 친척이 그곳에서 희생당했고,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것이다.
소련의 위성국에서 이제 막 풀려나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뿌리 깊은 원한에 접하며 놀랐다. 우리의 반일 감정은 폴란드인의 독일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수준이랄까?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그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2차 대전 개전과 함께 유린된 폴란드를 종전 후 다시 세우는 과정을 놓고도 소련이 관철시킨 방침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포츠담 회담에 옵서버로 참석한 폴란드 외교관 츠비에르잔스키는 음식 접시를 스탈린의 무릎에 쏟은 '실수'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포츠담 회담 회고록의 영문판 제목은 My Bungle: and the Conference That I Witnessed 였다.
18세기 말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 분할로(1772, 1793, 1795) 사라졌던 폴란드 공화국이 1차 대전 후 120여 년 만에 재건된(1918) 데는 운도 많이 작용했다. 폴란드를 갈라 먹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승계한) 독일제국의 패전 덕분에 독립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는데, 또 하나의 침략자였던 러시아가 전쟁 중에 공산혁명을 겪고 전쟁에서 빠졌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을 억누를 뿐 아니라 소련도 견제할 필요를 느낀 서방국들이 자기네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나라로서 폴란드 독립을 지원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토를 최대한 크게 만들어줬다.
폴란드 현대사를 살피며 크게 아쉬운 점이 독립 직후 폴란드의 팽창정책이다. 독일이 억눌리고 소련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신생 폴란드가 지역 맹주의 자리를 노린 것이다. 내전에 휩싸인 소련과 전쟁을 벌여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등 17-18세기 폴란드 공화국 전성기의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서서 소련과 깊은 원한을 맺었다. 19세기 분할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의 압제가 불러일으킨 원한이 이 전쟁으로 크게 증폭-심화되었다.
2차 대전 내내 소련이 폴란드에 대해 비협조적 태도를 취한 데는 1919~21년의 전쟁 기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39년 개전과 함께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주할 때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방관했고, 소련은 독일과 짜놓은 대로 폴란드를 갈라먹었다. 1941년 독일과 싸우기 시작한 후에도 소련은 폴란드에 대한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사례가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항쟁이었다.
소련군의 진격 앞에 독일군이 밀려나고 있던 시점에서 폴란드 독립군(Armia Krajowa)이 바르샤바 시내를 점령하고 독일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소련군이 쉽게 진격해 들어오도록 며칠만 버티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진격을 멈췄고 독립군이 두 달 넘게 항전하는 동안 시 외곽의 강 건너까지 와서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독립군이 항복하고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참혹하게 파괴한 뒤에야 소련군은 강을 건너왔다.
소련군이 진격을 서둘러 폴란드 독립군과 호응했다면 전술-전략적 이득은 많았을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 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독립군의 ‘수도 해방’을 도와줌으로써 폴란드의 ‘자력 독립’ 명분을 늘려주는 것은 소련의 전후 구상에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 동구권의 위성화 계획을 가진 소련에게 폴란드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프랑스, 영국과의 유대관계도 전통적으로 긴밀한 폴란드가 위성국으로 삼기에 제일 까다로운 존재였다. 폴란드인들의 대 독일 항전 노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립을 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련 자신에게 대들 길이 없도록 전쟁의 진행 중에도 온갖 획책을 다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에게 ‘해방군’이었던 소련군이 폴란드인들에게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폴란드의 공헌은 상당했다. 애초의 점령 당시에도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으로 독일의 전략에 큰 차질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고, 바르샤바 항쟁 등 게일라 항쟁 외에도 종전 당시 50만의 폴란드인이 소련, 프랑스, 영국군에 참여하고 있었다. 망명정부도 폴란드인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계속했다.
그런데 얄타와 포츠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중심의 폴란드 처리 방식을 주장했고, 그것이 관철되었다. 망명정부는 무시당했고, 소련이 조종하는 ‘국민통합 임시정부’가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었다. 연합군에 종군한 폴란드 군인들은 신분 보장 없는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이 허용되었다.
폴란드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독립을 위해 더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더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런 폴란드마저 온전한 독립을 얻지 못한 것이 2차 대전 종전 당시의 상황이었다. 1945년 8월에 우리가 얻은 ‘해방’의 의미를 새김에 있어서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엄혹한 상황이다.
20세기 역사의 최대의 피해자 중 하나인 폴란드 역사에서 내내 아쉬운 점 하나가 1918년 독립한 제2공화국의 팽창정책이다. 폴란드 민족주의가 뿌리를 튼튼히 키운 것은 19세기 후반의 ‘조직 작업(praca organiczna)’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863~64년의 마지막 무장봉기 이후 실력 양성에 민족주의의 목표를 두고 교육, 문화와 산업의 발전에 노력을 집중했다. 무장투쟁기의 폴란드 독립운동은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조직 작업’을 통해 근대적 민족으로서 폴란드 민족이 완성되었다.
‘조직 작업’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1847~1912)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이 인류의 과학, 기술, 경제, 문화 발전에 대한 폴란드의 공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청소년기에 참전했던 1863년의 무장봉기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폭력적 수단을 원천적으로 배척했다. 그런 그가 1905년 러시아의 러일전쟁 패전으로 폴란드에게 러시아의 압제를 벗어날 기회가 보였을 때, 혁명과 파업에 대한 태도를 바꾸며 했다는 말에서 착잡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틀렸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더 없는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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