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가사키.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 이후 일본의 11개 도시에 주민 대피를 권하는 경고 전단지가 뿌려졌다. 원폭 투하 대상으로 선정된 도시들이다. 투하에 임박해서 하나씩 선정된 것이 6일에는 히로시마였고 오늘은 나가사키다. 선정된 도시의 날씨가 적당치 않으면 그 대신 희생될 후보 도시들이 정해져 있었다.


나가사키를 향한 폭격기 편대에 탑승했던 기술자 윌리엄 로렌스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잠시 후 내 생각은 내가 참여한 이 작전으로 돌아온다. 흰 구름의 거대한 산들 저 너머 어딘가에 우리의 적국 일본이 있다.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를 생산하는 그곳의 도시 하나가 앞으로 네 시간가량 뒤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무기에 의해 지도에서 지워지게 된다. 1초의 100만 분의 1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어떤 시계로도 잴 수 없는 짧은 시간 동안에 하늘에서 떨어진 회오리바람이 그 도시에 있는 수천 개의 건물과 수만 명의 주민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목표로 선정된 몇 개의 도시 중 어느 것이 사라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최후의 선택은 운명에 달려 있다. 일본 상공의 바람이 결정을 내려줄 것이다. 만일 두터운 구름을 우리의 일차 목표지 위에 데려다 놓는다면 그 도시는 살아남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그 도시의 주민들은 얼마나 고마운 운명의 바람이 자기네 머리 위로 지나갔는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바람이 다른 도시 하나에는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역사의 원전>(바다 펴냄) 833-834쪽)


한 달 후 히로시마를 방문한 프랑스 언론인 마르셀 쥐노는 생존자에게 이런 증언을 들었다.


“불과 몇 초 안에 도시 중심부의 길과 정원에 있던 사람들은 밀려오는 끔찍한 열기 속에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순간 즉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며 참을 수 없는 화상의 고통으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폭풍을 가로막고 서 있던 것들은 벽이고, 집이고, 공장이고, 어떤 건물이고 간에 모두 부서져 버리고 그 잔해가 회오리바람에 말려 공중으로 날아 올라갔습니다. 바람에 들어 올려졌다가 옆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전차는 무게도 없고 뼈대도 없는 물체 같았고, 철로에서 내던져지는 열차는 장난감 같았습니다. 말, 개, 소 등 가축도 인간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숯덩어리로 변해 갔습니다. 초목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무가 불꽃을 뿜으며 날아다니는가 하면 논의 벼는 푸른색을 잃었고, 땅 위의 풀은 마른 볏짚처럼 타올랐습니다.”(<역사의 원전> 840-841쪽)


윌리엄 로렌스는 나가사키 상공에서 본 것을 이렇게 적었다.


“미리 약속해 둔 신호를 무선으로 받은 우리는 용접용 안경을 꺼내 쓰고 우리의 약 반 마일 앞에 있는 주기(主機)의 움직임을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간다!’ 누군가 말했다. 그레이트 아티스트의 배로부터 검은 물체로 보이는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 갔다. 보크 대위는 폭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수를 크게 돌렸다. 그러나 우리 비행기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그리고 환한 대낮이었는데도, 우리 선실을 강렬한 빛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가 낀 용접용 안경의 검은 장벽까지도 뚫고 들어온 거대한 섬광의 존재를 우리 모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우리 비행기가 폭발의 방향으로 다시 기수를 돌렸을 때 자줏빛 불기둥은 우리와 같은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겨우 45초가 지난 때였다. 혜성이 외계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그 광경, 흰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올수록 더욱 기세가 맹렬해지는 그 광경을 우리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명체였다. 경이에 사로잡힌 우리의 눈앞에서 태어나고 있는 새로운 종의 생명체였다. ......

우리가 200마일 거리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볼 때까지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러 색깔로 끓어오르는 기둥 역시 그 거리에서 보였다. 무지개를 반죽해 놓은 거대한 산이 산고(産苦)를 겪고 있는 모습 같았다. 무지개들은 생명체로 보였다. 구름을 뚫고 아득하게 솟은 기둥의 꼭대기가 꿈틀대는 모습은 목 둘레에 털이 난 선사시대의 괴물처럼 보였다. 목 둘레의 부드러운 털은 모든 방향으로 눈길이 닿는 데까지 가득 펼쳐져 있었다.”(<역사의 원전> 836-837쪽)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마르셀 쥐노가 전달한 증언에 보이는 것 같은 핵폭탄의 피해자 입장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 9일 쥐노의 기사가 나갈 때까지 일본 밖의 사람들에게는 원폭 피해의 구체적 모습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서방 독자들은 로렌스 같은 필자들이 보여주는 원자폭탄의 경이로운 위력에 찬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참혹한 죽음과 파괴가 한 도시의 모든 생명과 모든 가치를 덮치고 있는 현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버섯구름의 아름다움에 황홀해 하고 있는 저 인간! 로마를 불태운 네로 같은 괴물 아닌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불행히도 윌리엄 로렌스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보통사람이었다. 한 도시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비극 앞에서 같은 시대의 보통사람들이 로렌스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 도시의 비극보다 더 큰 시대의 비극이었다.

Posted by 문천
2010. 8. 5. 11:18


4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8월만 되면 매주 한 차례씩 찾아뵙는 것을 중심으로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망국 100년> 마무리가 덜 되어 그저께 가려던 것을 어제 좀 늦은 시간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계신 것 같았다. 내가 보이자 얼굴에 웃음이 넘치고 아들 예찬 노래를 시작하시는데, 놀라움 같은 생각의 단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계시던 대상이 실물로 나타났을 뿐이고, 눈앞에 실물로 있든 없든 내 존재에 대한 인식의 층위에 별 차이가 일어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점심 후에 쭉 누워 계셨다기에 현관 앞 마당으로 모시고 나왔다가 5시가 다 되어 식사시간에 맞춰 도로 올라갔다. 무더운 날씨라 집밖에는 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늘에 앉아서도 셔츠가 흠뻑 젖도록 땀이 흐르는데 어머니는 아주 쾌적한 기색이시다. 벽과 창문 없는 곳이 썩 기분좋으신 것 같다. 자연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잘 지은 건물이지만 안보다는 밖을 역시 좋아하신다.

산책 중에 정원 돌보던 행정실장님과 주방 앞에서 일하던 송 여사를 만나고, 그늘에 앉아 있을 때 이사장님이 지나다가 잠깐 같이 앉은 외에는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늘 그러듯 반야심경 한 차례 외우고 노래 조금 부르고 편안한 이야기 좀 나누고 했는데, 조금 특이한 주제 하나를 새로 꺼내셨다. '셋째론'이라고 할까?

나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이 내가 '실력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이기 때문에 그런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은 녹음을 해뒀으면 좋을 것을. 내 칭찬이라서 보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니 사고방식을 아주 미묘하게 파악할 수 있는 듯한 말씀이었다. 요점인즉, 맏아들은 드러나 있는 의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속으로 실력을 키울 여건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덧붙이시기를, 둘째는 맏아들의 드러난 문제에 휩쓸려버리기 쉽고, 자유롭게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셋째라는 말씀이시다.

우선, 큰형이 며칠 모시고 있던 흔적이 느껴진다. 지난 번 와서 큰형과 함께 모시고 있는 동안 어머니께 아무런 갈등도 드러내 보여드리지 않았다. 몇 달 전 형제간의 관계 변화를 일으킨 이래 내가 어머니께 갈등을 보여드린 일도 없다. 나는 사실 갈등 느끼는 게 없으니까. 그런데 큰형은 나름대로 갈등을 느끼고 그에 관한 생각을 말씀드린 게 있나보다.

안 봐도 비데오다. 나를 높여주느라고 애를 썼을 게 뻔하다. 큰형은 정말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정 총리 까는 글에서도 정 총리의 겸손과 성실에 초점을 맞춘 대목이 있었지만, 큰형이나 정 총리나 그 겸손하고 성실한 인품은 정말 사랑스럽다. 다만 그 겸손과 성실이 편의적 기준에 휩쓸려 떳떳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할까? 좋은 인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큰형 자신은 본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나는 그보다 고차원의 '실력'을 쌓는 사람이라고 어머니께도 나를 높여주면서 자기 마음에도 위안을 삼겠지. 어머니가 일상의 행복보다 차원 높은 가치에 쏠리는 분인 줄 아니까. '실력'이라는 말을 큰형이 썼을까? 아무튼 그 말을 어머니가 쓰시면서는 남편의 인격적 가치를 기준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큰형이 다녀가고 여러 날 지내는 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그 가치를 많이 생각해 오신 모양이다.

무게가 좀 있는 주제인데도, 말씀 듣다가 킥킥 실소가 터지는 것은 '둘째를 위한 변명' 때문이다. 장남이 외면적 의무 때문에 내면적 성장에 한계를 가진다는 것은 큰형의 겸손한 관점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인데, 그게 어떻게 둘째까지 면피를 시켜 주나? 범생이 될 의무에서 자유롭다는 건 둘째나 셋째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둘째 말씀하신 뒤에 슬쩍 들이댔다. "어머니는 아들 셋 두시기 정말 잘 하셨어요. 아들 둘인 사람들은 전부 꽝만 뽑잖아요?" 했더니 약간 겸연쩍게(내 느낌이다.) 웃으며 "그야 형편에 따라 잇몸으로라도 씹을 수 있겠지." 하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사장님이 합석했다. 이사장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어머니가 나름대로 투철한 파악을 하고 계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땅을 이런 기관이(나는 '시설'로 해석) 지키고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거듭하셨다. 평생 인간 다음으로 큰 관심을 두신 대상이 땅이었으니까.

이사장님이 저녁을 같이 하자고 청해서 어머니 저녁 숟갈 놓으시는 것 보고 바로 떠났다. 그런데 떠나면서 늘 하듯이 "어머니, 뽀뽀 해드리고 싶어요." 했더니 상상 외로 격렬하게 손을 저으며 "그런 거 안해도 된다!" 하시는 게 아닌가.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좀 빼시나 생각하며 "어~머~니~ 한 번만요!" 엉구럭을 떠니까 속마음이 나오신다. "싫어! 따가워! 아파!"

어머니 뵈러 갈 때는 꼭 면도를 하고 가야겠다. 도착할 때 뽀뽀 해드린 것이 공포의 기억으로 남아 계셨나보다. "아주 살살 할게요." 싹싹 빌어서 겨우 이마에 입술을 댈 때까지도 경계심이 풀리지 않고 있다가 입술을 떼니까 안도의 기색으로 "고맙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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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8. 4. 00:23
<프레시안>에서 자료를 밝혀주면 좋겠다는 댓글 다신 분이 있었는데, 거기 댓글 달기가 안 되어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분(딴지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료에 대한 설명도 조금 올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명색이 '일기'인데, 일기에다 주 다는 건 그렇고... 자료의 윤곽을 여기다 밝히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기본 자료는 국편 웹서비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와 <Wikipedia>입니다. <자료 대한민국사> 덕분에 도서관 갈 필요 별로 없이 거의 집에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키>는 이 용도를 위해 찾아다녀 보니 예상 외로 효용성이 좋습니다.

그밖에는 단행본 수십 권을 쌓아놓고 있는데, 이 분야 관심 가진 분들은 다 알 만한 책들입니다. 각 책의 활용도가 어느 정도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목록 작성해 놓는 건 별 의미가 없겠고... 작업을 해 나가다가 설명할 의미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한두 권씩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권만. E Hobsbawm, <The Age of Extremes>. 해당되는 내용의 분량이 많지 않지만, 이번 작업을 염두에 두고 다시 훑어봐도 홉스봄의 통찰력에 새삼스럽게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 아는데, 국내에서도 많이 읽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 몇 사람에 대한 서술이 감탄할 만큼 감동적이더군요. 역사를 보는 데 그런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 배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다가 <해방일기> 구상을 시작하게 되었죠.

손님들께서도 이런 자료를 이 작업에 활용할 만하다고 생각나는 것 적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미 쌓아놓은 책 중에 있고 없고 관계 없습니다. 같은 책이라도 "이런저런 의미에서 활용가치가 클 수 있다고 본다"는 의견을 주시면 제가 활용하는 길이 잘 열릴 수 있을 테니까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