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 직후의 한국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역할을 맡은 것이 여운형(1886~1947)이었다. 8월 15일 아침 총독부의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이 관저로 그를 불러 한 시간가량 회담하며 일본의 항복 방침을 알려주고 치안 유지의 협조를 부탁하면서 그의 특이한 역할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고, 건준은 20여 일 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어냈다.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난 것이 치안 유지의 협조 부탁을 위한 것이지, 총독부의 권한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고 후에 강조해서 밝힌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다. 권한을 넘겨줄 상황도 아니었고, 만약 넘겨준다면 정무총감이 아니라 총독이 만나야 할 일이었다.


치안 유지 협조 부탁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상황 전개를 앞에 놓고 정국 주도권의 큰 칼자루 하나를 쥐게 되는 것이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파국 앞에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맡길 상대를 고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부탁하는 쪽에서 협력 상대를 고르는 데 어떤 기준에 따랐을까? 일본과 총독부의 입장을 존중해 줄 만한 사람이되, 친일파로 몰리지 않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사람이 참 드문 상황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총력 동원을 위해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만한 사람은 남김없이 친일파로 끌어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여운형 외에 총독부에서 접촉했던 사람으로 송진우(1890~1945)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엔도 정무총감은 후에(1957) 한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두 사람 다 언론계의 거물로 일제에 휘말려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여운형이 건준에 송진우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운형이 건준의 주역이 되고 송진우가 끝내 건준 참여를 거부한 것은 여운형이 송진우보다 좌익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일본 세력이 물러가는 상황에서 좌익은 잠재적 지도력과 조직력을 가진 큰 변수였다. 총독부 입장에서도 좌익의 급격한 득세가 가장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8월 15일 이후 여운형의 활동은 살펴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을 텐데, 오늘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8월 15일을 맞고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여운형이 1년 전인 1944년 8월부터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1만 명의 맹원을 확보해서 외곽단체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해외 연락사업을 벌였으며 심지어 국외에서 편성한 병력을 1945년 8월 29일 국치 35주년의 날에 국내로 진공시킬 계획까지 추진했다고 한다. 건국동맹의 인력과 자원이 건준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 1944년 8월이면 아직 추축국 진영의 패세가 명확하지 않을 때였다. 그리고 여운형의 주변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일경의 단속 대상이 된 것은 1945년 8월에 들어서서의 일이었다. 1만 명은커녕 수백 명의 조직이라도 당시의 엄혹한 여건 속에 1년간 활동하면서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여운형이 건준과 인공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음에 따라 그 지도력을 강조하기 위해 단편적인 사실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적 조직활동처럼 윤색한 것이 아닐지.


건국동맹 활동의 진위는 차치하고, 여운형은 위기에 처한 총독부가 선후책을 부탁할 만한 거물임에 틀림없었다. 일본 당국이 그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일은 1919년부터 있었다. 그는 1917년부터 상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지만 임정의 일부 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 당시 조선에 ‘문화통치’를 시작하고 있던 일본 당국이 그를 포섭할 만한 인물로 보고 안전을 보장하며 일본 방문을 권했다. 이 여행에서의 몇 차례 강연으로 34세의 여운형이 큰 성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송건호는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한길사 펴냄)에 1919년 12월 여운형의 동경 제국호텔 강연 일부를 옮겨놓았다.


“일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똑같이 우리 조선민족에게도 생존권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천리를 역행하고 있다. 왜 일본은 생존권의 자연적 발로로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탄압하고 있는가.

한일합병은 순전히 일본의 이익만을 위해 강제된 치욕적 유물이다. 일본은 자신을 수호하고 상호안전을 위해서 부득이 합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러시아가 물러난 오늘날에도 그러한 궤변을 고집할 수 있는가.

오히려 한국의 독립은 일본에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즉 일본은 조선독립을 승인하고 조력함으로써만 조선인의 원한에서 풀리어 오히려 친구가 되고 중국과 그밖의 여러 이웃나라, 나아가 전 세계의 불신과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동양의 평화와 세계평화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여운형은 식민 지배를 비판하면서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감정적 비판보다 가해자의 문제점을 함께 걱정해주는 대범함으로 식민 지배자들의 존중도 받으면서 또한 포섭 내지 협력의 희망을 버리기 힘들게 만든 것 같다. 중일전쟁 내내 일본 당국은 여운형에게 중국으로 가서 중국과 일본의 대립 상황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맡아 달라고 거듭해서 회유했다.


여운형에 대한 중국행 부탁은 일본 본국 정부와 군 고위층의 양해 하에 여운형 본인의 소신에 따라 중일 양국에 모두 이로운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입장에서 전략적 이득을 노린 일이었겠지만, 독립운동가의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는 일개 식민지 언론인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은 그 인물을 매우 크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전에 임해 치안 유지 협조를 부탁한 것도 그런 인식 위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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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의 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련군은 연해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의 저항은 예상 외로 미약했다. 러일전쟁 후 관동수비대로 출범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본산으로 위세를 떨쳤던 관동군은 전쟁 말기에 정예 인원과 장비를 여러 전방부대에 넘겨준 결과 60만의 병력 규모가 무색하게 허약한 전력의 ‘예비군’이 되어 있었다.


소련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에 미국의 전쟁 종결이 급해졌다. 동유럽에서 독일 항복 전에 소련군이 진격한 지역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떨어진 일의 되풀이를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0일에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연합국의 태도를 조율하면서 ‘일반명령 제1호’를 서둘러 작성했다. 10일 밤늦게 러스크와 본스틸이 38선 분할점령안을 준비한 것은 일반명령 제1호에 넣기 위해서였다.


소련과 미국이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간(1933~45)뿐이었다. 1917년 공산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했을 때 이를 반가워한 자본주의 국가는 없었다. 그 후 소련이 내전의 혼란을 겪는 동안 서방 국가들은 비협조적 태도로 방관하거나 백군을 은근히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25년경까지는 대개 소련의 실체를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만이 1933년 루스벨트 취임 때까지 소련을 승인하지 않고 버텼다.


계급과 국가를 타파하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소련의 등장을 자본주의 국가들이 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미국이 특히 소련을 멀리한 데는 1차 대전 후 새로운 시대의 강대국으로서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 같다. 1차 대전으로 산업화 선진국들이 심한 파괴를 입고 식민지 통제도 어려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자원부국으로서 미국과 소련의 입지가 두드러져 가고 있었다.


2차 대전이 파시즘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1930년대 유럽의 가장 심각한 이념 갈등은 공산주의를 둘러싼 것이었다. 소련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한강이라면 추축국과 서방 사이의 갈등은 샛강이었다. 그런데 샛강에서 홍수가 나는 바람에 서방과 소련 사이의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가면서 숨어 있던 갈등이 눈에 보이게 되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전쟁 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련의 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추축국의 침공 또는 점령 지역에서 좌파가 대개 항전의 주역이 되어 있었다. 우파는 투항하고 협조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 좌파는 파시즘의 철천지원수였기 때문이다. 서방에서도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 좌파 세력이 성장해 있었다.


좌파는 전쟁 기간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자라났다.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권이 일본 못지않은 파시즘 성향을 보이는 데 따라 양심적 저항세력을 위한 대안으로서 공산당 세력이 자라났다. 한국에서도 민족 모순에만 매달린 우파가 투항과 협조의 길로 많이 돌아선 데 반해 계급 모순을 함께 생각하는 좌파가 전향을 거부하는 추세가 강했다. 그리고 만주 지역의 무장항쟁을 중국 국민당이 외면하고 공산당만이 지원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과 좌파 사이의 상관관계가 더 깊어졌다.


1945~49년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소련의 큰 지원 없이 공산당이 승리한 것과 얼마만큼 비슷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사상적 지형이 종전 당시의 한국에 형성되어 있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슷하게 보일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소련은 한반도 적화를 낙관하는 편이었고, 미국은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딘 러스크가 1950년 7월 국무부 역사정책연구소의 문의에 응해 작성한 ‘러스크 메모’에 1945년 8월 10일의 일을 회고한 내용이 있다.(송남헌 <해방 30년사 I>(까치 펴냄) 84-85쪽) 일본의 항복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에 맥아더에게 내릴 명령과 연합국과 함께 취할 조치의 긴급 검토가 필요했으며, 미군이 가능한 한 북쪽까지 올라가 일본의 항복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번즈 국무장관의 의견을 전제로 실무자들이 상황을 검토했다고 한다.


미군은 소련군보다 먼 곳에 있었고 병력도 적었기 때문에 각자 능력대로 군대를 보낼 경우 한반도는 거의 통째로 소련군이 점령할 상황이었다. 분할점령의 경계선을 너무 북쪽으로 잡으면 소련이 응하지 않을 것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서울을 이쪽에 넣는 38도선 안은 미국의 욕심을 최대한 내세운 것이었는데, “(본인은) 소련이 38선 안을 수락했다고 들었을 때 약간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러스크는 회고했다.


8월 11일 작성되어 사흘 후 발령된 일반명령 제1호는 이런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Wikipedia> "General Order No 1"조)


a. (만주를 제외한) 중국, 대만과 북위 16도 이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장개석 장군에게 항복한다.

b. 만주와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그리고 남부 사할린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c. 안다만 제도, 니코바르 제도, 미얀마, 타이, 북위 16도 이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말레이,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와 솔로몬 제도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한다.

d. 일본의 보호령 섬과 오키나와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및 태평양 섬들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e. 대본영과 그 선임 지휘관들, 그리고 일본 본토와 부속 도서,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과 필리핀의 모든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육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제34군은 이 명령에 따라 8월 21일에서 23일 사이에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를 받았다. 소련군은 8월 22일 평양에 진주한 뒤 이튿날 개성까지 일부 부대가 남하했다가 38선 북쪽으로 물러갔다. 소련 제25군 약 12만5천 병력이 북한에 진주했다. 반면 미군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해 이튿날 서울에 들어와 총독과 주둔군 사령관들의 항복을 받았다. 진주한 미군 병력은 제24군단 7만여 명이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항복 의사표시일 뿐이었다. 물론 한국인에 대한 항복도 아니었다. 천황의 항복 선언과 맥아더 사령부의 일반명령 제1호의 지침에 따라 각 지역의 각 부대가 항복할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총독부의 행정권과 주둔군의 군사력은 9월 9일까지 유지되었다. 9월 9일에도 한국인에게 넘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5년 8월에 한국인에게 주어진 것은 광복이 아니라 광복의 기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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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에서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사람이 이날 밤 38선의 초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에 국무장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내게 될 사람들이지만 아직 대령급 실무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윗선에서 정해진 방침의 세부사항을 다듬었을 뿐이다.


미-소 양대국의 존재감은 2차 대전 진행 중에 드러났다. 연합국 진영 5대 강국이 유엔에서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지만 실세는 두 나라였다. 프랑스와 중국은 해방을 얻은 입장이었고, 영국도 양대 강국 덕분에 살아남은 입장이었다. 세 나라 모두 종전 시점에서 압도적 군사력과 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미-소 두 나라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 전체에서 큰 지분을 가진 나라였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독무대였지만 태평양 전역보다 유럽 전역이 더 중요한 전역이었고, 그곳에서 소련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소련은 유럽 전역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계속하도록 다른 연합국들의 양해를 받고 있었다. 포츠담회담 뒤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러 일본에 얼른 떨어뜨린 목적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지분 확대를 제한하는 데 있었다는 해석이 많다. 정황으로 봐서 그럴싸한 해석이다. 원자폭탄의 실험 성공이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인 7월 16일이었고, 트루먼은 그 사실을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알렸다고 한다. 8일간 매일 보며 회담을 진행시키는 동안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신무기의 존재를 소련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열쇠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소련에게 알린 뒤 보름 내에 두 개의 폭탄을 터뜨렸다. 소련이 예정대로 일본과의 전쟁을 연 뒤 전쟁의 마무리 과정에서 자기 지분을 더 키울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원자폭탄 때문에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그로 인해 항복 시점에서 연합국의 점령 방침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급작스럽게 점령 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원자폭탄의 존재는 소련의 입장을 적지 않게 위축시켰을 것이다.


일본의 항복이 몇 주일이라도 더 늦었다면, 그리고 원자폭탄의 존재가 소련의 입장을 위축시키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 본토를 통째로 점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if)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글은 역사가 아니고 일기니까. 그리고 이건 너무나 뻔히 눈에 보이는 일이다.


일본 점령의 독점은 미국에게 갑자기 떨어진 대박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아시아-태평양 연합군 총사령부가 점령의 주체였지만, 소련이 빠진 연합군 총사령부는 미국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을 소련이 양보할 경우 대가로 한국을 통째로 달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8선 제안에는 소련을 떠보려는 뜻이 있었던 것인데, 소련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방면으로는 쿠릴 열도와 사할린만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미국 관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전후 처리 3개항을 발표했다. (1)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도서들을 뱉어내고, (2) 만주와 대만을 비롯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돌려주고, (3)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유로운 독립국으로 만들 것.


카이로회담의 3개항은 일본제국을 일본열도로 돌려보낸다는 것인데, 한국은 돌려받을 임자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중국이 힘이 넘치는 사정이라면 보호국으로라도 돌려받겠다고 나설 입장이었지만 자기 앞도 가리기 힘든 형편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카이로회담 당시 한국을 어찌해야겠다는 아무 생각 없이 일본 영토를 깎아내기 위해 한국의 독립 방침을 세웠을 뿐이다. 미국 국무부가 장래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카이로회담 이후의 일이었다.


아무리 검토해도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리 크게 인식되지는 않은 것 같다. 포츠담회담 직전까지도 미국 전쟁부 작전국(OPD)에서는 한반도의 미-영-중-소 4국 분할점령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츠담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 양상이 뚜렷해지고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종전이 갑자기 닥쳐오면서 영국과 중국은 빠지고 미-소 두 나라가 서로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되었다.


냉전의 공식적 기점은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지만, 두 초강대국의 경쟁은 1945년 5월 독일 항복 이후 분명해지고 있었다. 러스크와 본스틸이 8월 10일 밤늦게까지 지도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밝혀 왔고, 이틀 전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이 이미 한반도에 진주하기 시작한 상황에 쫓긴 것이었다.


8월 10일 일본이 스위스와 스웨덴 공사관을 통해 연합국에 보낸 문서 내용은 8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이렇게 게재되었다.


“帝國政府에서는 항상 세계평화의 촉진을 希求하여 今次 전쟁의 계속에 의하여 齎來될 참화에서 인류를 免하게 하기 위하여 속히 전투의 종결을 祈念한다. 천황폐하의 大御心에 쫓아 이미 數週間前 당시 중립관계에 있던 소련방정부에 대하여 적국과의 평화회복을 위하여 알선을 의뢰하였는데 불행히 右帝國政府의 평화 招來에 대한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이에 帝國政府는 天皇陛下 일반적 平和克服에 대한 御希念에 基하여 전쟁의 참화를 될 수 있는 한 속히 終止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帝國政府는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미, 영, 중 三國政府 수뇌자에 의하여 발표된 후 소련정부의 참가를 본 공동선언에 든 조건을 右 선언은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을 변경하는 요구를 포함하여 있지 않은 了解下에 승낙함. 帝國政府가 右 了解에 있어서 그릇됨이 없음을 믿고 本件에 관한 명확한 의향이 속히 표시되기를 切望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천황의 통치권 보전이 일본의 유일한 요구조건이었다. 이에 대해 연합국들은 이튿날 보낸 답신에서 “최종적으로 일본국정부의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遵하여 일본국 국민의 자유로 표명하는 의사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고 하여 천황제 폐지 여부를 확정하지 않은 답신을 보냈고, 이를 14일에 일본이 받아들여 종전 합의에 이르렀다.


소련이 지분을 키우기 전에 서둘러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미국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소 간의 경쟁 양상을 꿰뚫어보는 전략가가 일본에 있었다면 조속한 항복의 대가로 관대한 정책을 미국에게 흥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것은 이처럼 일본 점령 방침을 놓고 판세가 출렁일 때였다. 한반도의 점령 가치는 일본에 비해 100분의 1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중견 실무자들이 한밤중에 만들어낸 분할점령안이 아무런 토론 없이 두 나라 사이에 결정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