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4. 00:23
<프레시안>에서 자료를 밝혀주면 좋겠다는 댓글 다신 분이 있었는데, 거기 댓글 달기가 안 되어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분(딴지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료에 대한 설명도 조금 올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명색이 '일기'인데, 일기에다 주 다는 건 그렇고... 자료의 윤곽을 여기다 밝히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기본 자료는 국편 웹서비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와 <Wikipedia>입니다. <자료 대한민국사> 덕분에 도서관 갈 필요 별로 없이 거의 집에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키>는 이 용도를 위해 찾아다녀 보니 예상 외로 효용성이 좋습니다.

그밖에는 단행본 수십 권을 쌓아놓고 있는데, 이 분야 관심 가진 분들은 다 알 만한 책들입니다. 각 책의 활용도가 어느 정도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목록 작성해 놓는 건 별 의미가 없겠고... 작업을 해 나가다가 설명할 의미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한두 권씩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두 권만. E Hobsbawm, <The Age of Extremes>. 해당되는 내용의 분량이 많지 않지만, 이번 작업을 염두에 두고 다시 훑어봐도 홉스봄의 통찰력에 새삼스럽게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의 책이 여러 권 번역되어 나온 것으로 아는데, 국내에서도 많이 읽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 몇 사람에 대한 서술이 감탄할 만큼 감동적이더군요. 역사를 보는 데 그런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 배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다가 <해방일기> 구상을 시작하게 되었죠.

손님들께서도 이런 자료를 이 작업에 활용할 만하다고 생각나는 것 적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미 쌓아놓은 책 중에 있고 없고 관계 없습니다. 같은 책이라도 "이런저런 의미에서 활용가치가 클 수 있다고 본다"는 의견을 주시면 제가 활용하는 길이 잘 열릴 수 있을 테니까요.

Posted by 문천

핵무기를 전술무기(tactical weapons)로 사용하려는 시도도 약간 있었지만, 핵무기는 원래 전략무기(strategic weapons)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전술무기란 전술적 목표를 위해 전술적 판단에 따라 사용되는 무기다. 전략무기는 사용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며, 실제 사용에 이르게 될 경우 그 자체가 전략적 실패를 뜻하는 것이다.


재래식 화학폭탄도 전략무기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남부 해안 지역과 북부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포는 전략무기의 기능을 발휘했다. 화약 기술을 가지지 못한 여진인과 왜인의 도발을 그 존재만으로 억제한 것이다. 실제로 대포가 사용된 일은 거의 없고, 제조된 화약은 거의 모두가 사용기간을 넘겨 폐기되었다. <삼국지연의>에 제갈공명이 남만 정벌 중 한 전투에서 화약을 대량으로 쓴 후 이를 깊이 자책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화약을 전략무기로 본 동아시아인들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차별적이고 큰 파괴력을 가진 대량살상무기가 전술무기로 널리 채택되는 추세는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다. 국가주의의 심화로 인해 비전투원까지도 적국 국민은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전투방법이 극한적으로 잔인해지고 전쟁에 따르는 잔혹행위가 늘어났다. 적십자운동을 비롯한 인도주의 움직임은 이 추세에 대한 미약한 반발이었다.


독일 국민 전체를 처벌 대상으로 여긴 루즈벨트의 태도를 그저께 설명했는데, ‘적국’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가 비쳐진 것이다. 유럽의 경제-사회 체제를 좀먹는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증오심과 세계 평화를 해친 독일인에 대한 루즈벨트의 증오심은 같은 틀이다. 승전국들의 이런 인식 틀로 인해 패전 후 많은 독일인들이 전에 자기들이 저질렀던 것과 큰 차이 없는 참상을 겪었다.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결정도 같은 인식 틀 위에서 이뤄졌다. 핵폭탄의 사용에는 종래 전쟁의 잔인성과 다른 차원의 참혹성이 있다. 일본의 잔인성이 극한으로 나타난 1937년 12월의 남경대학살과 비교해 보자. 남경대학살과 원폭 투하의 피해 규모는 서로 비교할 만한 범위의 것이다. 그런데 양적으로는 비슷해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 원폭 피해자들은 살려달라고 빌어볼 상대도 없이, 자기 삶이 끝나고 있다는 인식도 없이 죽어갔다. 남경대학살의 잔인성이 인간성의 타락이라면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이 차이가 1945년 8월 이후의 전 인류를 원폭 피해자로 만들었다. 직접 피해자는 당시 두 도시에 있던 수십만 명이었지만, 전 인류가 핵폭탄의 그림자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핵폭탄이 실제로 사용되지 않고 전략무기로서의 기능만 발휘했다면 그 존재가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면이 더 컸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사용해 본 경험 때문에 핵폭탄은 전술무기로서의 위험성을 가지게 되었고, 핵무기를 보유한 초강국의 오만과 횡포가 냉전시대의 억압구조를 심화시키게 되었다.


포츠담 선언 전에 일본이 제출한 ‘평화’조건에는 ‘항복’의 뜻이 분명한 것으로 나는 본다. 본토 점령의 반대 등 연합국 진영의 요구조건과의 차이는 협상을 통해 처리할 수 있는 범위로 보인다. 원폭 투하 결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을 경우 전쟁이 오래 계속되고 원폭 투하보다 더 큰 피해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그와 반대로 보는 내 의견과 똑같이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설령 전쟁이 오래갈 것을 걱정한다 하더라도 원자폭탄에서 해결의 길을 찾는 것은 나치의 ‘궁극적 해법(die Endlosung <'o'에 움라우트>, final solution)’과 같은 차원의 사고방식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바란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냥 체념해 버릴 것이 아니라 핵무기가 전술무기 아닌 전략무기로만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노력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를 파괴하는 위협의 수단이 아니라 위협을 억지함으로써 평화를 지키고 키우는 수단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북핵 문제를 생각해 보자. 북한이 전략무기로서 핵무기를 보유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북한은 미국의 적대적 태도 때문에 그런 필요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악의 축” 운운 하는 것이나 북한이 개혁개방의 의지를 보이는데도 봉쇄정책을 거두지 않는 것을 보면 타당성이 느껴지는 주장이다.


“악의 축.”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는 정말 무서운 말이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담았던 ‘axis’라는 말을 뒤집어씌우는 데 어떤 뜻이 담길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부시의 이 말에 대해 오바마가 북한에게 사과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이 전략무기로 존재만 하고 전술무기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사실, 북한도 전략무기로서 억지력을 바라는 것이지, 이것을 진짜 사용할 생각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폐쇄된 체제라 하더라도 핵무기의 실제 사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모를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필요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미국의 핵무기 감축이다. 철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전략무기로서 적정 수준을 너무 많이 넘어서 있다. 그리고 미국 극우파는 핵무기의 전술적 사용 주장을 그치지 않아 왔다. 엄청난 예산과 외교적 노력을 쏟아 부어 온 미사일디펜스(MD)도 핵무기의 전술무기화를 뒷받침하는 사업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전술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분명히 한다면 북한 같은 나라의 핵무기 보유 필요성이 해소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

 

“뉴스위크 잡지에 발표된 바 포츠담 최후통첩을 발표하기 전에 스탈린이 三거두회의에 소개하였던 일본의 평화조건은 여좌하니

一.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간에 평화를 계속할 것

二. 만주에서 일본이 퇴출하되 아라사(러시아)가 간섭치 말 것

三. 일본이 인도차이나, 범아(미얀마), 필리핀들에게 독립 주는 원칙을 승인할 것

四. 미국이 일본 내지에 돌입이나 점령하지 말 것

五. 조선과 대만은 미국에게 점령하기를 제공할 것”


8월 1일자 <국민보>(1913년 이후 하와이 교민단체에서 발행한 주간신문) 기사였다. 5월 초 독일 항복 후로 전세 역전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태평양 전선은 미군에게 모두 평정되어 일본 본토가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위 평화조건에는 종전을 간절히 바라는 일본의 태도가 드러나 보인다. 소련만은 끼어들지 말기를 바라고 본토를 점령하지 말아 달라는 것 외에는 무조건 항복이나 마찬가지다.


1854년 개항 이래 일본이 걸어 온 찬란한 성공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전 세계 유색인종이 모두 침략과 지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주의 강국으로 성장한 아시아 국가가 일본이었다. 개항 40년 만에 중국을 물리쳐 동아시아의 패권에 접근하고 그 10년 후에 러시아를 물리쳐 1류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면서 선망과 찬탄의 대상이 된 일본이었다.


파국의 출발점은 1940년 9월 베를린에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서명한 추축동맹(Axis Pact)이었다. 그 동맹의 서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세계 모든 민족이 각자 차지할 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지속성 있는 평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일본,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과 대동아에서 각자의 노력을 지원-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관계된 민족들의 번영과 복지의 증진을 위해 설계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다.”


이 동맹을 맺을 때는 전쟁 상황이 추축국 진영에 한껏 유리할 때였다. 중립국 몇을 빼고는 전 유럽을 추축국 진영이 휩쓸어 영국을 고립시켜 놓고 있었다. 소련과 미국, 주전급 선수 둘이 아직 끼어들지 않고 있었는데, 추축 3국은 이 동맹을 통해 단결을 과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려 한 것이다.


동맹의 핵심은 “진행 중인 유럽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동맹국을 공격할 때” 다른 동맹국들이 지원한다는 제 3조였다. 다만 제 5조에서 소련의 경우는 예외로 했다. 독일과 일본이 각각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1년 6월 소련과 독일이 개전한 뒤에도 소련과 일본 사이에는 종전 직전까지 불가침조약이 계속되었다.


일본은 1894~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적 대륙 진출을 시작했다. 1904~5년 러일전쟁 승리로 대륙 침략의 발판을 넓힐 때 조선이 그 식민지가 되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유럽 열강들의 경쟁이 둔화된 틈을 타서 만주를 먼저 탈취한 다음 1937년 전면적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1940년까지 중국 본토의 태반을 석권한 상태에서 추축국 진영에 가담, 동남아시아의 연합국 식민지를 탈취함으로써 ‘대동아제국’ 건설의 꿈을 부풀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본은 추축동맹이라는 한 차례 모험으로 근 백년간 쌓아 온 성공의 실적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군부의 호전성과 모험주의가 일본인들을 참혹한 고통에 몰아넣고 일본의 국운을 망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눈으로 보면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 이래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일본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한국이 일본에게 그냥 놔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미국에 대한 종속적 위치를 거부한 한 차례 몸부림이 태평양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


패전 후 결국 일본이 미국에 종속적인 위치에서 번영의 길을 걸어 온 결과를 보면 일본 군부의 도박이 국가 차원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던 것 같다.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의 힘을 한껏 과시한 것이 냉전의 보루로 미국의 낙점을 받은 결정적 조건 아니었겠는가. 국가로서 일본의 성공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대다수 국민이 고통을 겪었을 뿐이다. 국민이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