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의 제일 중요한 결정이 원자폭탄 사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투하로 핵무기가 ‘사용 가능한 무기’가 되었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채로 그 성격이 널리 알려졌다면 그 실제 사용에는 큰 저항이 있었을 것이고, 냉전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역할도 가지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이 황인종의 나라였기 때문에 원자폭탄 사용이 쉽게 결정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포츠담에서 최대의 공식 의제였던 독일 처리 방침을 보면 추축국에 대한 증오심이 인종 차이 같은 것과 비교도 안 되게 격렬한 것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유럽 복구를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마셜 플랜이 독일의 부흥 여건도 만들어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마셜 플랜은 1947년 여름에야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까지 2년 동안 미국의 점령정책은 합참명령(JCS) 1067호로 대표되는 소위 ‘모겐소 플랜’이었다. 독일 항복 직후 이 정책이 결정되자 그 집행을 맡은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이 “이 정책이 내 이름과 얽혀서 알려지지 않기를 빈다.”고 할 만큼 가혹한 정책이었다.


독일의 발전을 무조건 틀어막는 정책이었다. 파괴된 산업시설을 재건하기는커녕 남아있는 공장까지 제거해서 독일을 농업사회로 되돌려 놓는다는 정책이었다. 독일인의 생활수준을 다른 나라들보다 낮게 유지한다는 구체적 지침까지 있었다. 기아와 질병조차 점령당국에 곤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방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정책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도덕관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전을 앞두고 모겐소 장관은 독일의 조속한 부흥과 정상 회복을 목표로 하는 점령정책을 건의했는데, 루즈벨트가 이렇게 반박했다고 한다.


“미국인과 영국인들 중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책임이 독일인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나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대문명의 원리를 침해한 불법의 음모에 전 민족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독일인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 합니다.”


합참명령 1067호를 작성할 때 그러다가 독일 국민들이 다 굶어죽게 되면 어쩌냐는 말을 누가 하자 루즈벨트는 “그래서 안 될 이유가 뭐요?” 대꾸했다고 한다.


포츠담 회담은 루즈벨트가 죽은 석 달 후에 열렸지만, 그의 정책은 여기서도 관철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대한 소련의 원한까지 여기에 겹쳐졌다. 2천만이 넘는 민간인을 포함해 3천만 가까운 인명을 전쟁에 희생당한, 수백 개 도시와 수만 개 마을을 파괴당한 소련의 원한은 다른 연합국들과 급이 달랐다. 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군 중에는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가 다른 연합군을 찾아 항복한 부대들도 있었다고 한다.


폴란드에게 잘려나간 영토를 비롯해 동유럽 지역에 퍼져 있던 1천만 이상의 독일인이 소련 점령군에게 귀국 명령을 받았다. 그중에서 백만 이상이 기아와 질병 등의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나치 시대에 독일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독일인들이 그대로 당하게 되었으니 정당한 업보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저질러진 일이라는 점에서 그 야만성이 더 두드러진다.


길고 참혹한 전쟁을 통해 키워진 증오심이 이 야만성의 바닥에 깔려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문제를 한탄할 때, 전후 프랑스에서 협력자들을 엄격히 처단한 사실과 대비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다. 친일파 정리가 미흡했던 것은 참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폐단을 남긴 일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협력자 처단과 대비하는 데는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차이점이 있다.


2차 대전에서 프랑스의 역할에는 애매한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본국은 개전 초기에 항복해서 전쟁 말기까지 나치 지배를 받으며 추축국 진영에 협력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국민에게 선출된 정통성 있는 정부가 아니었다. 초기 자유프랑스의 병력 중 태반이 세네갈, 토고 등 식민지 출신의 흑인이어서 파리 해방 때 앞장서서 행진할 부대를 고를 때도 흑인이 적은 부대를 고르느라 고심할 지경이었다.


프랑스는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전승국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분할 점령의 주체로 결정된 것은 연합국으로 인정받은 결과다. 그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940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모든 나치 협력을 ‘반 프랑스’ 또는 ‘비 프랑스’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했다.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프랑스 정치계만이 아니라 학계에서도 대세이지만, 이것이 현실정치의 필요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지워버릴 수 없다. 국가로서 프랑스의 책임을 회피하는 부도덕성의 지적도 있다. 1995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한 연설에서 비시 정부 경찰의 나치 협력을 사과한 일이 있다. 르팽 같은 극우파는 비시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의회 의결에 따라 세워진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아직도 프랑스 역사의 짐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사회는 나치 협력 문제를 놓고 우리의 친일 문제 고민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해 왔다. 거기에서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협력자(collaborateur)’와 ‘협력주의자(collaborationniste)’의 구분이 그런 예의 하나다. 당시의 프랑스에도 파시스트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치 독일에의 항복을 기화로 비시 정부와 프랑스 사회를 파시즘으로 몰아가며 적극적인 나치 협력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협력주의자’들의 범죄성은 민족주의에 앞서 인도주의와 문명의 원리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친일 문제 고찰에도 이처럼 보다 보편적 기준을 보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Posted by 문천


19세기 후반의 조선인들은 어떤 시대적 과제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범위를 좁혀서, 대원군 집정기(1864~73)에 지식층의 인식은 어땠을까? 19세기 전반기 내내 조선 정치를 지배한 세도정치의 폐단이 당시 지식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교 교양을 갖춘 지식층에게는 유교 정치이념에서의 일탈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중세사회 해체 같은 문제는 나라꼴만 바로잡히면 저절로 해소될 일상적 문제 정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 중 조세 개혁은 부패의 척결에, 경복궁 중건과 공포정치는 왕권 회복에 목적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국가 질서 회복의 의미가 큰 방향들이다. 서원 철폐는 특권구조의 청산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더 적극적 의미를 가진 정책이었다. 대원군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유교국가의 중흥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외관계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내내 대외관계의 거의 전부가 중국과의 관계였던 상황이 고종 즉위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제 2차 중영전쟁으로(1856~60) 북경이 유린당하면서 대외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일어났고, 열강들이 조선을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에 대한 직접 압력은 크지 않은 단계여서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차단시켜 놓은 채 국내 개혁을 계속했다.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한 가시적 성과를 거둔 데 비해 지식층의 호응을 통한 개혁세력의 확장에는 실패했다. 개혁이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면 독선적이고 편의적인 경향에 빠져 개혁 이념의 발전을 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세력의 성장과 확대가 불가능하다. 드러나 있던 개혁의 명분을 권력 투쟁에 이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념의 발전이 없으니 개혁을 위해 끌어 모은 세력 속에서 확보해 놓은 권력을 놓고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민 씨 세력은 그래서 대원군 세력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것이었다.


1870년대 들어 일본의 조선 진출 노력 강화에 따라 쇄국정책이 한계를 보이면서 대원군의 실각을 재촉했다. 그러나 조선 지식층의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미했다. 당시 조정의 개화파 지도자이던 박규수만 하더라도 서세동점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도 ‘수시변통(隨時變通)’ 정도의 조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해의 1차 수신사 이후 4년 후에야 2차 수신사를 일본에 보내게 된다.


1876년 이후 일본의 바뀐 모습을 보며 개화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이 확대-심화되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에도 진지한 관심이 일어났다. 개혁의 명분이나마 내걸었던 대원군 정권보다도 퇴행적인 민 씨 정권 아래 유교국가 중흥을 위해서라도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일본과 청나라의 문물 발전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겹쳐졌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 주목받고 이듬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중국에 보내면서 조선에 ‘개화’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개화의 목적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을 둘러싼 민 씨 세력은 개화에서 이권과 군사력이라는 피상적인 이득만을 취하려 했다. 핵심인물 민영익은 이런 입장에서 일시 개화파의 영수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관료-지식층에서는 그보다는 개화의 의미를 넓고 깊게 보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움직임에도 개화를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곁들여졌다.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온건 개화파가 일본 메이지유신보다 청나라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은 권력구조의 변동을 추구하는 급진 노선이 권력 쟁탈의 도구로 이용당할 위험을 꺼린 데도 큰 이유가 있었다.


한편 대원군 세력은 일반 국민의 개화에 대한 반감과 변화에 대한 불안감에 편승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1882년 임오군란 시점의 대원군은 1874년 이래 권력 탈환에만 집착하면서 시대 상황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황 관리 능력도 청나라 측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일’을 표방하면서도 축출되었다. 당시 청나라 외교를 장악하고 있던 양무파에게는 ‘반일’ 여부보다 개혁 거부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청나라의 임오군란 개입은 조공관계를 명분으로 한 것이었지만, 원론적 의미에서는 천하체제를 스스로 부정한 행위였다. 조선의 상황을 단기적 이해관계에 활용하려는 양무파 정책은 전통 체제를 포기하고 일본과 같은 차원의 경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로써 천하체제를 배경으로 전통 체제의 회복을 지향하던 온건 개화파가 입지를 잃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양측의 입지와 명분이 모두 훼손된 상황에서 개화 이념 발전의 길이 막힌 채 민 씨 세력의 피상적이고 편의적인 개화만이 진행되다가 청일전쟁을 맞았다. 이로써 촉발된 갑오개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주체적 개화 노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된 사례였다. 그러나 권력쟁탈전의 양상이 곧 되살아나고 일본의 대 조선 강경파가 책동해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정치적 역할이 사라져 버렸다.



19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근대화’가 지상과제였다고 지금의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는 이 과제에 대한 인식이 ‘개화’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당시 상황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얻은 것이지만, 이후의 역사 진행에 좌우된 측면도 있다. 1930년대에 군국주의 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조선 지식층이 1876년 개항 때부터 일본을 개화의 유력한 모델로 인식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청일전쟁의 진행을 목격하면서 일본이 권하는 개화를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개화의 필요성은 조선에서 중세사회의 해체라는 내부적 변화보다 외부 변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식되었다. 내부적 문제는 개화와 관계없이 왕조 체제의 유교 질서만 회복되면 당연히 해결되리라는 것이 1894년까지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개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면 저절로 해결될 부수적 문제로 보았다. 내부적 위기와 외부적 위기를 구조적으로 결합하는 인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개화정책 중에는 물론 내부적 변화를 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 결과가 좋아보여서 그대로 모방할 뿐, 조선 자체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겉보기 변화는 따라 하면서도 ‘권력의 사유화’라는, 근대적 기준과 전통적 기준 어느 쪽에서 봐도 국가구조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대한제국까지 계속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운동은 내부적 변화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목적의식이 박약하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의미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지던 실학의 현실 인식 노력이 개화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정치의 수준을 너무 떨어뜨려 놓아서 사회경제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의 대정봉환에서 1889년의 헌법 발포까지 20여 년 동안 외부 상황에 크게 휘둘리는 일 없이 새 국가체제 건설의 길을 주체적으로 모색해 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 자체의 사회경제 조건이 근대국가 건설의 기반조건으로 검토되었다. 일본의 개화는 일본에 적합한 근대화의 길로서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었음에 반해 조선의 개화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극적인 ‘선택’의 대상일 뿐이었다.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를 가르는 이유로 나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본다. 첫째는 일본이 먼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조선이 그 길을 독자적으로 찾아갈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판자촌의 한 집에 불이 나면 옆집에서 따로 불이 나기 전에 옮겨 붙게 마련이다.


서양 열강들은 조선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중 가장 이해관계가 컸던 러시아에게도 부수적인 의미에 그쳤다. 오직 일본만이 조선에 거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을 그냥 놔두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조선은 일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진로 모색의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또 하나 이유는 조선의 유교정치 체제가 안정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푹푹 썩기는 했어도 틀은 멀쩡했다. 일본은 수준 낮은 정치체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근대유럽이 제시하는 틀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던 반면, 조선에게는 수준 높은 질서 체제로부터 약육강식의 미개한 틀로 내려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유교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던 중국은 어떠했는가. 조선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버린 단계에서는 신문화운동이라는 주체적 반성의 기회를 가졌다. 그 후 중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놓고 좋고 나쁘고를 평할 기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지금의 중국이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기 장래를 남의 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역량으로 헤쳐 나갈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자세의 근거가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1900년대에 강유위, 양계초 등 중국의 개혁가들은 일본을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거꾸로 1950년대의 일본 좌파 지식인들은 전쟁 가해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공산국가를 이룩한 중국을 부러워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의 질곡에 빠진 중국인들을 번영 속의 일본인들이 동정했으나, 지금은 다시 부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1910년 이후 어느 때도 의미 있는 상대로부터 부러움을 산 일이 없다.


Posted by 문천


20년 전 이맘때 바르샤바를 며칠 방문했다. 오가레크-최 여사의 딸 안나가 그 얼마 전 한국에 체류할 때 알게 된 이후 연락이 이어지고 있던 참이라서, 독일에서 루마니아 가는 길에 구경하러 들른 것이었다. 안나 내외가 함께 살고 있던 오가레크-최 여사의 아파트에서 묵었는데, 오가레크-최 여사는 마침 한국 방문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새벽 바르샤바 역에서 마중 나온 안나 내외와 빠져나오니 거대한 과학궁전이 앞을 막고 있었다. 2차 대전 직후에 소련이 지어준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천박한 미적 감각을 보통사람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소위 스탈린-고딕 형식의 건물이었다. 1990년 당시까지도 바르샤바 시를 압도하는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일 잘 즐길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안나가 물었다. 어디냐고 되물으니 남편이 답을 가르쳐준다. “과학궁전 꼭대기 층입니다. 거기서는 그 못생긴 건물이 보이지 않거든요.”


며칠 동안 두 사람에게 폴란드인의 소련에 대한 적대감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카틴 학살 이야기도 들었다. 그곳에서 폴란드의 정화(精華, 안나는 ‘flowers’라고 표현했다.)가 절멸된 이야기를 할 때는 두 사람 다 눈물이 글썽거렸다. 둘 다 많은 친척이 그곳에서 희생당했고,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것이다.


소련의 위성국에서 이제 막 풀려나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뿌리 깊은 원한에 접하며 놀랐다. 우리의 반일 감정은 폴란드인의 독일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수준이랄까?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그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2차 대전 개전과 함께 유린된 폴란드를 종전 후 다시 세우는 과정을 놓고도 소련이 관철시킨 방침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포츠담 회담에 옵서버로 참석한 폴란드 외교관 츠비에르잔스키는 음식 접시를 스탈린의 무릎에 쏟은 '실수'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포츠담 회담 회고록의 영문판 제목은 My Bungle: and the Conference That I Witnessed 였다.



18세기 말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 분할로(1772, 1793, 1795) 사라졌던 폴란드 공화국이 1차 대전 후 120여 년 만에 재건된(1918) 데는 운도 많이 작용했다. 폴란드를 갈라 먹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를 승계한) 독일제국의 패전 덕분에 독립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는데, 또 하나의 침략자였던 러시아가 전쟁 중에 공산혁명을 겪고 전쟁에서 빠졌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을 억누를 뿐 아니라 소련도 견제할 필요를 느낀 서방국들이 자기네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나라로서 폴란드 독립을 지원한 것이었다. 그것도 영토를 최대한 크게 만들어줬다.


폴란드 현대사를 살피며 크게 아쉬운 점이 독립 직후 폴란드의 팽창정책이다. 독일이 억눌리고 소련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신생 폴란드가 지역 맹주의 자리를 노린 것이다. 내전에 휩싸인 소련과 전쟁을 벌여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등 17-18세기 폴란드 공화국 전성기의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서서 소련과 깊은 원한을 맺었다. 19세기 분할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의 압제가 불러일으킨 원한이 이 전쟁으로 크게 증폭-심화되었다.


2차 대전 내내 소련이 폴란드에 대해 비협조적 태도를 취한 데는 1919~21년의 전쟁 기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39년 개전과 함께 독일군이 폴란드로 진주할 때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방관했고, 소련은 독일과 짜놓은 대로 폴란드를 갈라먹었다. 1941년 독일과 싸우기 시작한 후에도 소련은 폴란드에 대한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사례가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항쟁이었다.


소련군의 진격 앞에 독일군이 밀려나고 있던 시점에서 폴란드 독립군(Armia Krajowa)이 바르샤바 시내를 점령하고 독일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소련군이 쉽게 진격해 들어오도록 며칠만 버티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진격을 멈췄고 독립군이 두 달 넘게 항전하는 동안 시 외곽의 강 건너까지 와서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독립군이 항복하고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참혹하게 파괴한 뒤에야 소련군은 강을 건너왔다.


소련군이 진격을 서둘러 폴란드 독립군과 호응했다면 전술-전략적 이득은 많았을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 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독립군의 ‘수도 해방’을 도와줌으로써 폴란드의 ‘자력 독립’ 명분을 늘려주는 것은 소련의 전후 구상에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 동구권의 위성화 계획을 가진 소련에게 폴란드가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프랑스, 영국과의 유대관계도 전통적으로 긴밀한 폴란드가 위성국으로 삼기에 제일 까다로운 존재였다. 폴란드인들의 대 독일 항전 노력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립을 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련 자신에게 대들 길이 없도록 전쟁의 진행 중에도 온갖 획책을 다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에게 ‘해방군’이었던 소련군이 폴란드인들에게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폴란드의 공헌은 상당했다. 애초의 점령 당시에도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으로 독일의 전략에 큰 차질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고, 바르샤바 항쟁 등 게일라 항쟁 외에도 종전 당시 50만의 폴란드인이 소련, 프랑스, 영국군에 참여하고 있었다. 망명정부도 폴란드인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계속했다.


그런데 얄타와 포츠담에서 스탈린은 소련 중심의 폴란드 처리 방식을 주장했고, 그것이 관철되었다. 망명정부는 무시당했고, 소련이 조종하는 ‘국민통합 임시정부’가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었다. 연합군에 종군한 폴란드 군인들은 신분 보장 없는 ‘개인 자격’으로만 귀국이 허용되었다.


폴란드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독립을 위해 더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더 큰 희생을 치렀다. 그런 폴란드마저 온전한 독립을 얻지 못한 것이 2차 대전 종전 당시의 상황이었다. 1945년 8월에 우리가 얻은 ‘해방’의 의미를 새김에 있어서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엄혹한 상황이다.


20세기 역사의 최대의 피해자 중 하나인 폴란드 역사에서 내내 아쉬운 점 하나가 1918년 독립한 제2공화국의 팽창정책이다. 폴란드 민족주의가 뿌리를 튼튼히 키운 것은 19세기 후반의 ‘조직 작업(praca organiczna)’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863~64년의 마지막 무장봉기 이후 실력 양성에 민족주의의 목표를 두고 교육, 문화와 산업의 발전에 노력을 집중했다. 무장투쟁기의 폴란드 독립운동은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는데, ‘조직 작업’을 통해 근대적 민족으로서 폴란드 민족이 완성되었다.


‘조직 작업’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작가 볼레스와프 프루스(1847~1912)는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이 인류의 과학, 기술, 경제, 문화 발전에 대한 폴란드의 공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청소년기에 참전했던 1863년의 무장봉기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폭력적 수단을 원천적으로 배척했다. 그런 그가 1905년 러시아의 러일전쟁 패전으로 폴란드에게 러시아의 압제를 벗어날 기회가 보였을 때, 혁명과 파업에 대한 태도를 바꾸며 했다는 말에서 착잡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틀렸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더 없는 기쁨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