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15. 13:33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앉아 있는 동안 불쑥불쑥 해방 무렵 이야기가 나왔다. 십여 일 전 <프레시안>에 <해방일기> 연재를 시작해 놓고 내 생각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재미없어 하는 이야기를 내가 자꾸 끄집어낸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그 시절이 걸리는 주제를 꽤 자주 꺼내시는데, 요즘 나도 그쪽에 생각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곤 하는 것이다.


근래의 일보다 아주 오래된 일이 더 잘 기억되시는 것 같을 때가 많은데, 치매 환자들이 흔히 보이는 경향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 모퉁이 꺼내실 때마다 내가 흥미 일어나는 방향으로 한 발짝 더 밀고 나가면 거기에 자극받아 기억이 더 퍼져나가시는 것이 확연하다. 개별적 사실이 아니라 연관성이 떠오르고, 따라서 연상이 활발하신 것이다.


어머니가 옛날 생각 많이 떠올리시는 큰 이유가 ‘김 서방’에게 있는 것은 분명하다. 59년 전에 사별하신 그분이 어머니 인생에서 차지한 몫이 참 크다. 정을 나눈 부부간을 넘어 ‘스승’으로서의 몫이 컸다. 어머니가 평생 구도(求道)의 자세를 지키신 것은 ‘큰 스승’을 겪은 초년의 경험이 타고난 성품 위에 겹쳐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년 회복 이래 마음이 편안하신 것을 이따금 아버지에 대한 언급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오늘은 어느 대목에서 “말을 않으면서도 자기 뜻을 지킨 분이지.”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말을 않는다”는 데 방점이 느껴진다. 진면목을 세상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떠나신 것이 어머니 마음에 아쉽고 분하고 슬펐던 것은 오랜 세월의 언행에서 늘 드러나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대성무문 대광불현(大聲無聞 大光不見)”의 이치를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17년 전, 돌아가신 지 4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분이 남긴 일기를 <역사 앞에서>로 출간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모은 데서 한풀이도 웬만큼 되시고, 덕(德)을 펼치는 길에 대한 생각을 바꾸시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다. 근원이 자라남에 따라 넘치는 끄트머리만을 세상에 보이며 근원 자체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남김없이 드러내는 효율성보다 덕을 키우는 자연스러운 길이라는 생각이 오늘 “말을 않는다”는 말씀에 비쳐지는 것 같다.


이렇게 풀어서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내 짐작이 많이 들어간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요즘 내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다. 장난처럼 던지는 말씀을 그냥 가볍게 응대했다가 조금 후에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가짐이 은연중에 비쳐진 것을 깨닫게 되곤 하는데, 그 비쳐진 각도에서 어머니 생각이 논리적 표현을 넘어 그려지는 것이다.


오늘은 “지랄발광”이란 말씀으로 꽤 한참 재미를 보셨다. 쌍소리를 그럴싸한 맥락으로 써먹을 기회가 있으면 무척 좋아하신다. 대화중에 내가 짐짓 점잖은 말투로 뭔가(지금 생각이 안 난다.) 살짝 놀려드리는 말씀을 했더니 대뜸 “발~광지랄하고 있네.” 하시기에 일부러 더 정색을 하고 “어머니? 발~광지랄이 뭐예요?” 했더니 “발광지랄! 지랄발광!” 하고는 “지랄발광”을 넣은 예문 몇 개를 얼른 만들어주신다. 국어학자의 직업병이다.


“나는 이 세상이 좋아요~ 지랄발광 할 필요가 없어요~” 같은 예문을 들으면 아까 말씀한 “말을 않는다”는 표현과 상통하는 뜻이 느껴진다. 어머니 노년의 수필에서 도가의 무위(無爲)에 가까운 표현을 봐 왔는데, 이제 생각하면 자연(自然)은 자연이되, 인위(人爲)를 부정하는 무위는 아니다. 유가의 ‘천행건(天行健)’, 덕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생각에 가까운 것 같다. 불가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을 것 같지만 내 공부가 얕아서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이 편안해지신 것은 무엇보다 일찍 돌아가신 것을 못 견디게 애통해 하는 마음이 가라앉으신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돌아가신 지 60년이 다 되는데 애통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별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지아비일 뿐 아니라 스승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어머니의 애통함을 무겁게 했다. “이런 분이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39년 인생을 잘못된 세상의 부당한 폭력으로 망가져버린 희생으로 여기며 어머니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수십 년의 구도 행각이 그 고통의 극복에 꼭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햇볕을, 바람을, 꽃을, 풀잎을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시는 마음자리를 내가 제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김 서방’ 생각이 떠오를 때, 마치 어느 아들 하나를 칭찬하듯 담담히 논평하시는 것을 보면서다. “말을 않으면서도 자기 뜻을 지킨 분이지.”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에게 절대자가 아니다.


나도 절대자가 아니다. 2년 전 회복이 시작되신 이래 내가 보호자 노릇을 확고히 해왔고, 어머니도 내게 총체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많이 보이셨다. 그런데 지난가을, 회복이 어느 단계에 이르자 달라지기 시작하셨다. 거리가 생긴 것은 아닌데, 기운 없으실 때는 올려다보시던 시각이 마주 쳐다보시는 쪽으로, 그리고 차츰 내려다보시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뽀뽀만 해도 그렇다. 회복 시작하실 무렵부터 뵙고 나올 때 한 차례씩 뽀뽀를 해드리면 그렇게 꺼벅하셨는데... 지난 주 갈 때 바쁘게 일하다가 면도를 못하고 갔었다. 가서 뵙자마자 한 차례 뽀뽀를 해드릴 때는 어머니 반응을 유심히 살피지 못했었는데... 떠날 때 늘 하던 대로 “어머니, 뽀뽀를 해드리고 싶어요.” 했더니 뜻밖에 고개를 세게 저으며 “그런 거 안해도 된다.” 하시는 것이었다.


왜 이러시나, 속으로 생각하며 “어~머~니~ 한번만요~” 엉구럭을 떠는데,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싫어! 따가워! 아파!”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가는 길에 급했지만 찬물로라도 면도를 하고 갔다. 그런데 뽀뽀의 마력은 깨어져버린 모양이다. 뽀뽀를 허락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눈길로 수염 상태를 살피고 계시니 그 황홀한 마력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사랑의 마력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서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한다.


마력까지는 아니라도 내 존재가 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한 가지 큰 근거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데 있다. 요즘 와서 내 칭찬이 “실력을 키운 사람”이라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아버지 일과 제일 가까운 쪽으로 해온 자식인 내가 세상에 행세는 하지 않아도 공부만은 꾸준히 키워 오는 것을 탐탁해 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비교하고 계신 것을 말씀 않으셔도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시작하는 작업 <해방일기>가 1945년 8월에서 1950년 6월까지 해방공간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1944년 초에서 1951년 10월까지 두 분의 결혼생활 대부분에 해당되는 기간이다. 5년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5년의 시간을 쓸 참인데, 어머니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시면 그 시절의 회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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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오후 1시 휘문중학 교정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장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다. 이튿날 <매일신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16日 오후 1시 부내 계동 휘문중학 운동장에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수반인 呂運亨이 나타나 5천여 군중 앞에서 해방의 제일성을 힘있게 외쳤다. (略)연설은 약 20분간의 짧은 동안이었으나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遠藤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즉


1) 전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문제이니 8, 9, 10의 3개월간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조선 각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오후 3시 10분부터는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의 약 20분 연설이 방송되었다. 여운형의 휘문중학 연설과 대략 같은 취지였다.


연설도 방송도 총독부 당국의 협조로 이뤄진 일이 분명하다. 총독부는 나름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10일에 항복 의사를 연합국에 알린 사실을 조선총독부에는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았지만 총독부에서는 단파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운형도 단파방송을 들은 사람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방적 항복 의사 표명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통보가 없었던 것이지, 엄중한 기밀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운형과 안재홍, 그리고 총독부에서 비슷한 부탁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송진우, 세 사람은 신문사 대표를 지낸 조선 언론계의 거물로서 일제 막바지의 전쟁노력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거물이면서 협력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총독부의 선의를 이해하고 북돋워줄 만한 식견과 도량을 가진 사람, 그것이 이 시점에서 총독부가 내세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를 내보낼 자리가 아니었다.


송진우에게 총독부의 부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증언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정황을 볼 때 부탁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당시의 증언 중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굴절된 것이 많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운형과 안재홍도 연설에서 14일 이전에 항복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15일 정오에야 이 기쁜 소식을 처음 들은 대다수 청중과 일체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효과를 위해 표현을 조절한 일이다.


‘정치경제범 석방 요구’는 표현 조절을 넘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정치경제범 석방은 누구의 요구를 받기 전에 총독부에서 준비해 온 일이었다. 14일 밤 여운형을 초청하러 엔도 정무총감이 보낸 사람이 총독부의 입장을 브리핑해 줄 때 그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것을 건준이 요청하고 총독부가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건준의 권위를 세우고 총독부의 선의를 과시하는 데 좋지 않겠냐는 합의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도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이 이런 기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해해야겠다.


여, 안, 송, 세 사람이 변절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로 성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 사람의 지조가 꼭 같은 수준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세 사람은 언론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전향 압력도 비교적 적었고, ‘먹고 살기 위해’ 협력에 나설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를 악물고 지조를 지켜야 했던 일반인에 비하면 냉정한 판단에 따라 태도를 취할 여유를 가진 위치였다.


여운형과 송진우에 비해 안재홍은 후세 사람들에게 행적이 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일기 작업에서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나는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 덜 알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의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미덕 때문이라고 보이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에 이 날 휘문중학에 갔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라디오 연설을 마치고 그리로 온 안재홍을 보았다고 한다. 그 묘사를 보면 적어도 안재홍에게만은 민족주의자의 길이 냉정한 판단이나 편안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늦게 종로 계동 휘문중학 교정에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얼굴이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탄 이 노신사야말로 민중이 존경해 마지않는 민족지도자 안재홍이었다. 삼엄한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그들의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끝내 조선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Posted by 문천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이 일제 말기에 열성적으로 ‘협력’했던 사실을 아주 간단한 말로 변명한 일이 있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었다고.


망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렇게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지성인의 자세로서 너무 비루한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부질없게만 생각된다. 지금의 지성인들 중에 망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권력을 상대로 시비를 따지려 드는 사람이 몇이나 되기에.


오히려 “망할 줄 몰랐다”는 진술이 마음에 더 걸린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나?


1937년 중일전쟁을 터뜨리고부터 1941년 말 진주만을 공격할 때까지야 일본의 승리 전망을 믿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라 일컫는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 뒤에도 제국 정부의 집요한 선전에 보통사람들이 의문을 품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궤멸한 1944년 6월의 사이판 전투와 10월의 레이테 전투 이후로는 “유리한 전황”을 선전하고 싶어도 일관성 있게 선전할 밑천이 없어졌다. 이 무렵에는 유럽의 동맹국들도 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웬만한 정보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본의 패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더구나 1945년 2월부터 B-29기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고도 일본이 망할 줄 생각도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335대가 출격해 1,700톤의 폭탄을 떨어뜨려 10만 명의 목숨을 일거에 앗아간 3월 9일 밤의 ‘도쿄 대공습’을 겪고도? 5월 초 독일마저 항복한 뒤로는 일본에게 아무런 역전의 길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을 기회를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장렬한 산화’를 향해 ‘야마도 정신’을 불사른 자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냉정한 계산으로 그들의 희생을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인은 종전의 그 날까지 야마도 정신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정신력의 궁극적 승리를 믿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일관하는 관조의 시선을 놓고는 그런 맹신을 상상할 수 없다.


서정주를 비롯해 1937년 이후 일제의 전쟁노력에 협력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한 동안 승리의 환상을 제국주의자들과 공유했을 것이다. 1942년 중엽 그 꿈이 사그러지기 시작한 이후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입 다물고 물러나 앉았든, 내친 김에 계속 설쳐대든, 눈치 보는 일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돌아설 길이 없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의 하나가 “일본이 망할 줄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을 했다. 그런 변명이 꽤 통할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고, 실제로 꽤 통하는 것 같다. 오늘의 한국에서 그런 변명이 꽤 통하는 상황에는 두 가지 병리적인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승리지상주의다. 이길 것 같은 쪽에 베팅해서 이득을 노리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득을 위해 인간적 가치를 희생시키는 ‘지상주의’가 문제다. 시인의 변명에는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어?” 하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고, 우리 사회에는 “맞아! 인간적으로 이해가 돼.” 대답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베트남 참전도 이라크 파병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다 이해해 주는 이 사회가 아닌가.


또 한 가지 문제는 역사 인식의 허점이다. 65년 전의 오늘에 대한 우리의 회상이 감격과 흥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그 감격을 강조하기 위해 해방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주어졌다는 ‘신화’가 이 사회를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역사학의 훈련을 웬만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노 시인의 변명에 “무슨 그런 황당한 말씀을!” 반박할 생각이 떠오르지 못한다. “맞아! 생각지도 못하던 놀라운 사태 앞에서 시인의 저 순결한 영혼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 우리 사회 일반인의 일반적 반응이다.


승리지상주의의 척결이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 매우 요긴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각자 열심히들 노력하되, 민족 정체성과 평화를 훼손하는 천안함 사기극에까지는 말려들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국토를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4대강 사업의 획책 기반을 없애고, 사회의 구조적 안정성을 해칠 정도로 무리한 경제성장 정책을 억제하는 열쇠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승리지상주의 척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이 승리에만 매몰되지 않는 생활 자세를 지키고, 비슷한 식으로 사는 주변사람들과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살아도 인생이 살 만하다는 사실을 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 <프레시안> 지면에다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별 소용이 없는 줄 잘 안다.


다만 역사 인식의 허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힘껏 애쓸 필요를 느낀다. 불과 수십 년 전의 상황조차 이런저런 이념에 입각한 신화화로 역사적 고찰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현실이 어쩌면 승리지상주의를 비롯한 이 사회의 온갖 집단적 정신질환의 온상일지도 모른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유시가 방송되던 시점에서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꽤 오랫동안 이 상황을 예견, 여러 가지 입장에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부터 밝혀놓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