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31. 23:09


이번에는 다녀온 지 열흘만에 쓴다. 보통 그 날이나 늦어도 다음날 아침까지 쓰는데, 이번에 많이 늦춘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 한꺼번에 작용한 게 아니라 한 가지씩 차례로 원인이 떠올랐다.

우선, 다녀와서 <해방일기> 준비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한 달을 넘겨 틀이 겨우 잡힌 셈인데, 이제 1주일 정도는 로드맵을 만들어 가며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녀온 후 이틀 동안 인사불성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사진만 먼저 올려놨다.

이틀이 지나 이제 쓸까? 생각하니, 이번 방문에서 이문숙 선생 역할이 두드러졌던 생각이 난다. 친구분이나 친척분 모시고 갈 때는 내가 어느 정도 통역 노릇을 맡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선생과 어머니 사이의 교감이 하도 원활해서 아내와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잘 쉬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이 선생께 "이번 방문기는 이 선생께서 쓰시죠." 농담처럼 말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이 선생께 양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버텨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한 이틀 더 기다리니 이 선생께서 메일을 보내왔다. 왜 방문기 안 쓰시냐고 채근하면서 간략하게나마 자기 관점과 소감을 보내줬다.

마지막으로 찾은 핑계는 이번엔 기왕 늦은 김에 다른 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늘 뵙고 오자마자 많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쓰자고 허겁지겁했는데, 한 번 최대한 늦춰서,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가라앉아서 남는 생각을 적어보기로. 그래서 내일 가 뵙기 전에 이제 앉아서 쓴다.

이 선생과는 근 열흘 전부터 날자를 잡아 약속해 놓았고, 마침 아내도 쉴 수 있어서 셋이 갔다. 이천 시내에서 점심을 하고 1시쯤 도착했다. 두 사람을 먼저 올려보내고 사무실에 들렀다가 5분쯤 후에 올라가 보니 벌써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

내 얼굴 보일 때마다 얼굴이 확! 피어나시던 것이 요즘은 덜하시다. 힐끗 쳐다보고 "응, 너도 왔냐?" 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 하신다. 참 많이 크셨다. 오늘처럼 선발대가 있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갈 때도 원장님이 일러드려 놓기 때문에 예상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미리 말씀드려 놓아도 잊어먹고 있다가 새롭게 기뻐하시는 맛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생활의 주체로 자리가 든든히 잡히셔서 의존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시는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없을 때 하신 말씀 한 가지를 이 선생이 메일로 일러준 것을 봐도 나를 상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비키신 사이엔 저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서 역사를 했다, 두 사람 다 공부 한 가지밖에 모르는데 제대로 잡았다..그렇지 않냐? 역사가 공부의 제일 중심이잖냐, 그걸 해야 ..하시고 더 말씀을 하실 것 같았는데 김선생님이 나타나시자 선생님 들으시라고 저놈이 미련해서...로 넘어가셨죠."

다른 분 모시고 올 때, 모처럼 오신 분과 가급적 접촉을 많이 가지시도록 최대한 꽁무니를 빼는데, 이 선생 앞에서는 굳이 꽁무니를 뺄 필요도 없었다. 겨울에 나랑 함께 왔었고, 봄에 혼자 한 번 왔었는데, 관련된 기억이 많이 활성화되신 것 같다. 구체적인 일들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아도, 어떤 태도로 대하던 사람인지 분위기는 거의 되살아나신 것 같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교수 모드'로 돌입하셔서, 각별히 가까이 하시던 제자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이 선생도 메일에서 이야기를 자가발전하시고, 한 주제를 길게 이어가시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는데, 다 생각나지 않고, 역시 이 선생이 메일에서 짚어준 이야기가 나도 또렷이 생각난다. 이화여전 다니실 때 말씀을 하다가 불쑥 김옥길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셨다. "이 천지 모르는 여자애가 이전에 다니겠다고 갔는데, 딱 옆에 앉은 게 김옥길이더란 말이야!"

함경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중학 과정을 통신강의로 때우고 동급생들보다 두어살 많게 이화여전에 들어가신 어머니, 갑자기 서울의 양가집 교수들 틈에 끼어들어 이질감을 많이 느끼신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이질감에도 등급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고녀를 막 나온 부잣집 여식들이 대다수였는데, 그들과의 이질감은 2등급이고, 1등급 이질감의 대상은 알짜 예수쟁이들이었던 모양이다. 그 이질감이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그 후 교수생활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김옥길 선생님과의 '충돌'이 아직까지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성제대로 옮겨 희귀한 '조선어문학과 여학생' 노릇도 편안한 학생 노릇이 아니었겠지만, 이화여전 학생 노릇도 어머니께는 그리 편안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학교에 나가기 시작해서 숙대에 몇 해 계시다가 58년엔가 59년엔가 이대로 옮기실 때 '친정'으로 돌아가는 편안함은 별로 안 느끼셨을 것 같다. 옮기고 얼마 되지도 않아 4-19 때 개혁파 쪽으로 목소리를 좀 내다가 헛발질로 끝나고 말았을 때,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김옥길 선생님이 아마 어머니와 이화의 관계를 단적으로 대표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혁파가 찌그러지고 이대의 앙샹레짐이 복원될 때 김 선생님이 총장을 맡았다. 김 총장님처럼 자신만만한 분이 동기동창으로서 학교 책임을 맡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학교 떨려날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 보호막 노릇도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 스타일을 용납하지 않는 질곡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교수생활에는 김 총장님에 대한 고마움과 답답함이 엇갈려 깔려 있었다.

내일은 혼자 갈 참이다. 1940년대 전반 이화여전-경성제대 다니실 때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9. 21  (2) 2010.09.24
10. 9. 11  (0) 2010.09.11
10. 8. 14  (0) 2010.08.15
10. 8. 4  (2) 2010.08.05
10. 7. 20  (5) 2010.07.21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