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5. 11:18


4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8월만 되면 매주 한 차례씩 찾아뵙는 것을 중심으로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망국 100년> 마무리가 덜 되어 그저께 가려던 것을 어제 좀 늦은 시간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겨 계신 것 같았다. 내가 보이자 얼굴에 웃음이 넘치고 아들 예찬 노래를 시작하시는데, 놀라움 같은 생각의 단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계시던 대상이 실물로 나타났을 뿐이고, 눈앞에 실물로 있든 없든 내 존재에 대한 인식의 층위에 별 차이가 일어나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점심 후에 쭉 누워 계셨다기에 현관 앞 마당으로 모시고 나왔다가 5시가 다 되어 식사시간에 맞춰 도로 올라갔다. 무더운 날씨라 집밖에는 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늘에 앉아서도 셔츠가 흠뻑 젖도록 땀이 흐르는데 어머니는 아주 쾌적한 기색이시다. 벽과 창문 없는 곳이 썩 기분좋으신 것 같다. 자연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잘 지은 건물이지만 안보다는 밖을 역시 좋아하신다.

산책 중에 정원 돌보던 행정실장님과 주방 앞에서 일하던 송 여사를 만나고, 그늘에 앉아 있을 때 이사장님이 지나다가 잠깐 같이 앉은 외에는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늘 그러듯 반야심경 한 차례 외우고 노래 조금 부르고 편안한 이야기 좀 나누고 했는데, 조금 특이한 주제 하나를 새로 꺼내셨다. '셋째론'이라고 할까?

나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이 내가 '실력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이기 때문에 그런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은 녹음을 해뒀으면 좋을 것을. 내 칭찬이라서 보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니 사고방식을 아주 미묘하게 파악할 수 있는 듯한 말씀이었다. 요점인즉, 맏아들은 드러나 있는 의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속으로 실력을 키울 여건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덧붙이시기를, 둘째는 맏아들의 드러난 문제에 휩쓸려버리기 쉽고, 자유롭게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셋째라는 말씀이시다.

우선, 큰형이 며칠 모시고 있던 흔적이 느껴진다. 지난 번 와서 큰형과 함께 모시고 있는 동안 어머니께 아무런 갈등도 드러내 보여드리지 않았다. 몇 달 전 형제간의 관계 변화를 일으킨 이래 내가 어머니께 갈등을 보여드린 일도 없다. 나는 사실 갈등 느끼는 게 없으니까. 그런데 큰형은 나름대로 갈등을 느끼고 그에 관한 생각을 말씀드린 게 있나보다.

안 봐도 비데오다. 나를 높여주느라고 애를 썼을 게 뻔하다. 큰형은 정말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정 총리 까는 글에서도 정 총리의 겸손과 성실에 초점을 맞춘 대목이 있었지만, 큰형이나 정 총리나 그 겸손하고 성실한 인품은 정말 사랑스럽다. 다만 그 겸손과 성실이 편의적 기준에 휩쓸려 떳떳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할까? 좋은 인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큰형 자신은 본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나는 그보다 고차원의 '실력'을 쌓는 사람이라고 어머니께도 나를 높여주면서 자기 마음에도 위안을 삼겠지. 어머니가 일상의 행복보다 차원 높은 가치에 쏠리는 분인 줄 아니까. '실력'이라는 말을 큰형이 썼을까? 아무튼 그 말을 어머니가 쓰시면서는 남편의 인격적 가치를 기준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큰형이 다녀가고 여러 날 지내는 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그 가치를 많이 생각해 오신 모양이다.

무게가 좀 있는 주제인데도, 말씀 듣다가 킥킥 실소가 터지는 것은 '둘째를 위한 변명' 때문이다. 장남이 외면적 의무 때문에 내면적 성장에 한계를 가진다는 것은 큰형의 겸손한 관점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인데, 그게 어떻게 둘째까지 면피를 시켜 주나? 범생이 될 의무에서 자유롭다는 건 둘째나 셋째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둘째 말씀하신 뒤에 슬쩍 들이댔다. "어머니는 아들 셋 두시기 정말 잘 하셨어요. 아들 둘인 사람들은 전부 꽝만 뽑잖아요?" 했더니 약간 겸연쩍게(내 느낌이다.) 웃으며 "그야 형편에 따라 잇몸으로라도 씹을 수 있겠지." 하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사장님이 합석했다. 이사장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어머니가 나름대로 투철한 파악을 하고 계신 것 같다. 이렇게 좋은 땅을 이런 기관이(나는 '시설'로 해석) 지키고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거듭하셨다. 평생 인간 다음으로 큰 관심을 두신 대상이 땅이었으니까.

이사장님이 저녁을 같이 하자고 청해서 어머니 저녁 숟갈 놓으시는 것 보고 바로 떠났다. 그런데 떠나면서 늘 하듯이 "어머니, 뽀뽀 해드리고 싶어요." 했더니 상상 외로 격렬하게 손을 저으며 "그런 거 안해도 된다!" 하시는 게 아닌가.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좀 빼시나 생각하며 "어~머~니~ 한 번만요!" 엉구럭을 떠니까 속마음이 나오신다. "싫어! 따가워! 아파!"

어머니 뵈러 갈 때는 꼭 면도를 하고 가야겠다. 도착할 때 뽀뽀 해드린 것이 공포의 기억으로 남아 계셨나보다. "아주 살살 할게요." 싹싹 빌어서 겨우 이마에 입술을 댈 때까지도 경계심이 풀리지 않고 있다가 입술을 떼니까 안도의 기색으로 "고맙다."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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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